1. 개요
헤센 가문의 문장 |
Haus Hessen |
독일의 헤센 선제후국과 헤센 대공국을 통치한 유서 깊은 귀족 가문.
러시아 제국, 덴마크 등 유럽 여러 국가의 왕비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한 적도 있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2. 역사
헤센 가문의 뿌리는 튀링겐을 통치하던 루도빙거 가문(Ludowinger)으로, 튀링겐 방백 루트비히 4세(Ludwig IV. von Thüringen 1200~1227)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공주 성녀 엘리자베트(Árpád-házi Szent Erzsébet 1207~1231)[1]의 딸 조피(Sophie von Thüringen 1224~1275)로부터 시작한다. 루트비히 4세의 아버지 헤르만 1세(Hermann I. von Thüringen 1155~1217)는 유타(Jutta von Thüringen 1184–1235), 루트비히 4세와 하인리히 라스페(Heinrich Raspe 1204~1247)[2] 형제를 두었고 루트비히 4세는 헤르만 2세(Hermann II. von Thüringen 1222~1241)와 조피를 두었으나 헤르만 2세가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하인리히 라스페도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루도빙거 가문은 단절되었고 튀링겐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튀링겐을 두고 브라반트 공작 앙리 2세(Henri II de Brabant 1207~1248)와 결혼한 조피[3]와 유타의 아들인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하인리히 3세(Heinrich III. Markgraf von Meißen 1215~1288)가 서로 대립해 17년 간의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결국 하인리히 3세가 승리하여 튀링겐을 가져갔으나 튀링겐 일부를 떼어 조피에게 주었고, 조피는 아들 하인리히(Heinrich I. von Hessen 1244~1308)에게 하인리히 3세로부터 받은 땅을 주면서 헤센 방백국(Landgrafschaft Hessen)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509년까지는 오버헤센(Oberhessen)과 니더헤센(Niederhessen)으로 나뉘었다가, 필리프 1세에 의해 통합되었다. 종교 개혁에 헌신해 루터교회로 개종했던 필리프 1세는 자녀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 헤센 방백국을 맏아들 빌헬름 4세의 헤센-카셀, 둘째아들 루트비히 4세의 헤센-마르부르크, 셋째아들 필리프 2세의 헤센-라인펠스, 넷째아들 게오르크 1세의 헤센-다름슈타트로 4등분해 나누어주었다.
2.1. 헤센카셀 가문(종가)
헤센카셀 가문의 문장 |
대체로 덴마크 왕실과 통혼을 많이 했으며, 덴마크의 왕위 계승권[4]도 가지고 있었지만 일가 전체가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크리스티안 9세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9세는 샤를로테의 6자녀 중 셋째 딸인 헤센카셀의 루이제와 결혼한다.
원래는 프로이센 왕국과 대대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방백 빌헬름 9세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 선제후로 임명되어 헤센 선제후국을 칭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도 선제후 직위를 떼버리지 않고 헤센 선제후국으로 남았는데, 지금까지 프로이센 편을 잘 들다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편을 딱 한번 잘못드는 바람에 영토 전체가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원래 종가이기는 했지만 헤센 대공국이 더 유명한데다가 본인들은 영지도 날라갔기 때문에 종가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방계인 마르부르크, 라인펠스, 다름슈타트와는 달리 이쪽은 아들을 많이 낳은 아들부자 가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아들들이 일찍 죽거나, 아들을 못 낳거나, 사생아거나, 귀천상혼했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헤센카셀 가문을 계승할 후계자가 부족하게 되었고 방계였던 프리드리히 카를[5]이 당주가 되었다. 카를은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의 막내 아들 프리드리히의 후손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나머지 아들들도 아들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첫째는 요절, 둘째인 빌헬름 9세와 셋째 카를[6]의 가계는 단절되었다.
여담으로 로스차일드 가문과 연관이 있는 가문이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가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 9세와 거래를 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2.1.1. 역대 방백 및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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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센카셀 방백국 및 선제후국
- 빌헬름 4세 (1532~1592, 재위: 1567~1592)
- 모리츠 (1572~1632, 재위: 1592~1627)
- 빌헬름 5세 (1602~1637, 재위: 1627~1637)
- 빌헬름 6세 (1629~1663, 재위: 1637~1663)
- 빌헬름 7세 (1651~1670, 재위: 1663~1670)
- 카를 1세 (1654~1730, 재위: 1670~1730)
- 프리드리히 1세 (1676~1751, 재위: 1730~1751)
- 빌헬름 8세 (1682~1760, 재위: 1751~1760)
- 프리드리히 2세 (1720~1785, 재위: 1760~1785)
- 빌헬름 9세/선제후 빌헬름 1세 (1743~1821, 재위: 1785~1821)[7]
- 빌헬름 2세 (1777~1847, 재위: 1821~1847)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802~1875, 재위: 1847~1866)
- 선제후국 멸망이후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802~1875, 당주: 1866~1875)
- 프리드리히 빌헬름 (1820~1884, 당주: 1875~1884)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1854~1888, 당주: 1884~1888)
- 알렉산더 프리드리히 (1863~1945, 당주: 1888~1925)
- 프리드리히 카를 (1868~1940, 당주: 1925~1940)
- 필리프[8] (1896~1980, 당주: 1940~1980)
- 모리츠 (1926~2013, 당주: 1980~2013)
- 하인리히 도나투스 (1966~, 당주: 2013~)[9]
- 추정 상속인
- 모리츠 (2007~)
2.2. 헤센마르부르크 가문(단절)
필리프 1세 둘째 아들 루트비히 4세(Ludwig IV. von Hessen-Marburg 1537~1604)로부터 시작하며, 1604년 루트비히 4세가 후사 없이 죽으며 단절되면서 마르부르크는 헤센카셀과 헤센다름슈타트의 계승 전쟁 끝에 헤센카셀에 통합되었다.2.3. 헤센라인펠스 가문(단절)
필리프 1세의 셋째 아들 필리프 2세(Philipp II. von Hessen-Rheinfels 1541~1583)로부터 시작하며, 1583년 필리프 2세가 후사 없이 죽으며 형 빌헬름 4세가 라인펠스를 회수했다.2.4. 헤센다름슈타트 가문(단절)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의 문장 |
한편 게오르크 1세의 또 다른 아들인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von Hessen-Homburg 1585~1638)를 기점으로 시작된 헤센홈부르크 방백 작위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장남이 아니었기에 헤센다름슈타트 방백이 될 수 없었으나, 대신 헤센다름슈타트의 접경 지역이자 아버지 게오르크 1세가 소유하고 있었던 헤센홈부르크 지역을 물려받아 프리드리히 1세의 후손들은 헤센홈부르크 방백이 되었다. 헤센홈부르크 방백은 프리드리히 3세에서 끊겼다. 프리드리히 3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 루트비히 그루노(Ludwig Gruno)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 결국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에서 회수했다.
친척인 헤센 선제후국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때 오스트리아 제국 편을 들어 나라가 날아갈 뻔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2대 대공 루트비히 2세의 딸 헤센의 마리 공녀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였기 때문에, 완전 합병은 면한 채 마인 강 이북의 영토만 북독일 연방 관할로 편입되고 남쪽은 헤센 대공국의 이름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독일 제국에 가맹해 계속 존재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독일 제국 다른 영방국가들의 군주들이 퇴위할 때 같이 퇴위했다. 1937년 발생한 비행기 추락사고로 당시 당주였던 게오르크 도나투스(Georg Donatus von Hessen-Darmstadt 1906~1937)의 가족이 사망했고, 동생 루트비히(Ludwig von Hessen und bei Rhein 1908~1968)도 후사 없이 사망해 현재는 대가 끊겼다.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의 특징은 대대로 공녀들이 자녀를 많이 낳았다는 점이다. 비록 독일의 소국 출신이지만 이렇게 대대로 다산을 했다는 점과 유서깊은 통치가문이라는 점 덕분에, 알렉산드르 2세를 비롯해 각국의 군주들이 헤센다름슈타트의 공녀들을 배우자감으로 많이 데려갔다.[13] 이렇게 황후 혹은 왕비가 된 헤센다름슈타트의 공녀들이 시집간 왕실에서 많은 자녀를 낳으면서 비록 직계는 완전히 끊겼지만 모계로는 수많은 후손들이 남아있다.[14]
2.4.1. 역대 방백 및 대공
2.4.1.1.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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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크 1세 (1547~1596, 재위: 1567~1596)
- 루트비히 5세 (1577~1626, 재위: 1596~1626)
- 게오르크 2세 (1605~1661, 재위: 1626~1661)
- 루트비히 6세 (1630~1678, 재위: 1661~1678)
- 루트비히 7세 (1658~1678, 재위: 1678. 4. 24.~1678. 8. 31.)
- 에른스트 루트비히 (1667~1739, 재위: 1678~1739)
- 루트비히 8세 (1691~1768, 재위: 1739~1768)
- 루트비히 9세 (1719~1790, 재위: 1768~1790)
2.4.1.2. 헤센홈부르크 방백
- 프리드리히 1세 (1585~1638, 재위: 1622~1638)
- 프리드리히 2세 (1633~1708, 재위: 1638~1708)
- 프리드리히 3세 (1673~1746, 재위: 1708~1746)
2.4.1.3. 헤센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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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비히 10세/대공 루트비히 1세 (1753~1830, 재위: 1790~1830)[15]
- 루트비히 2세 (1777~1848, 재위: 1830~1848)
- 루트비히 3세 (1806~1877, 재위: 1848~1877)
- 루트비히 4세 (1837~1892, 재위: 1877~1892)
- 에른스트 루트비히 (1868~1937, 재위: 1892~1918)
[1]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딸.
헝가리어 이름은
아르파트 왕가의 성녀 에르제베트(Árpád-házi Szent Erzsébet).
[2]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
프리드리히 2세,
콘라트 4세 부자의
대립
독일왕이기도 했다.
[3]
조피는 브라반트 공작 앙리 2세의 두번째 부인이었기 때문에 첫 부인의 아들 앙리 3세가 브라반트 공국을 상속받을 예정이어서 자신의 아들을 위한 상속분을 주장했다.
[4]
당시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 본가의
프레데리크 7세가 자녀가 없어서 여계후손도 왕위계승이 가능하게 법을 바꿨다. 이에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와 샤를로테의 1남 5녀가 모두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중 가장 순위가 앞선 것은 당연히 유일한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5]
프로이센의 마르가레테 공주 공주의 남편.
[6]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6세의 장인이자
크리스티안 9세의 외할아버지.
생 제르맹 백작과 관련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7]
1803년부터
선제후.
[8]
1968년부터 명목상의
헤센 대공국 대공
[9]
부인 플로리아-프란치스카는
파버카스텔 가문 출신이다.
[1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헤센다름슈다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헤센의 카를 공자 -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 -
헤센의 이레네 공녀.
[11]
파벨 1세 - 헤센다름슈다트의 빌헬미네,
알렉산드르 2세 -
헤센의 마리 공녀, 세르게이 대공 -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
니콜라이 2세 -
헤센의 알릭스 공녀.
[12]
루트비히 4세 -
영국의 앨리스 공주.
[13]
헤센의 마리 공녀(6남 2녀),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2남 2녀),
헤센의 이레네 공녀(3남),
헤센의 알릭스 공녀(1남 4녀) 등의 헤센 대공가 직계 여인들은 물론 귀천상혼계 후손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1남 4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5남 2녀),
패트리샤 내치불(6남 2녀)와 모계 쪽 후손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르가리타 공주(4남 1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4남 4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케킬리아 공주(3남 1녀) 등도 많은 자녀를 낳았다.
[14]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도 모계쪽으로 가면 헤센 대공가의 후손이다. 외할머니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4대 대공
루트비히 4세의 딸이기 때문.
[15]
1806년부터
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