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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말디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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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말디 가문
Casa Grimaldi
파일:모나코 국장.svg
창립일 1160년
창립자 그리말도 카넬라
現 당주 알베르 2세
국가 모나코 공국

1. 개요2. 특징3. 역대 군주 및 수장4. 여담
4.1. 21세기

[Clearfix]

1. 개요

모토: Deo Juvante 하느님의 도움으로

모나코의 통치 가문. 역사적으로는 제노바 공화국 도제를 배출한 가문[1]으로 유명하다.

2. 특징

이탈리아를 통일 사보이아 가문 이탈리아화 프랑스 출신 집안이라면 그리말디 가문은 반대로 프랑스화 이탈리아 출신 집안이다. 원래 모나코를 둘러싼 사르데냐 왕국 니차 도(Divisione di Nizza)가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1860년에 체결된 토리노 조약으로 프랑스 제2제국에 할양되면서 사르데냐 왕국 보호령에서 프랑스 보호령으로 바뀌었기 때문. 다만 모나코는 사르데냐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에게 둘러싸였던 시절에도 프랑스 왕국의 보호를 받았기에 서서히 프랑스화되다가 니차의 프랑스 할양으로 프랑스화에 쐐기를 박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유럽 왕실로부터 좋게 말하면 셀럽, 나쁘게 말하면 격 떨어지는 집안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모든 왕국 및 공국이 멸망했고 21세기에는 사실상 복위가 불가능해진[2] 독일의 구 왕가 및 공가들조차 그리말디 가문은 결코 혼담 후보로 고려하지 않는다. 독일의 구 왕가들은 아직까지도 귀천상혼으로 인한 계승권 박탈을 작용해서 같은 왕가 출신이거나 슈탄데스헤어 출신하고만 동등결혼을 인정하는데 모나코 공은 엄연히 현존하는 일국의 군주임에도 혼인하지 않는다는 건 그리말디 가문을 동등한 군주로 인정하지 않다는 뜻이다.[3] 그리말디 가문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는 전통적인 유럽 왕실/공실의 편입이 상대적으로 늦었기 때문이다.[4] 오랜 세월 혼맥으로 얽혀 온 타 유럽 왕실 및 귀족들과 달리, 그리말디 가문은 통치 역사가 7백 년이 넘는데도 통치가문 출신의 공비는 장 2세(1468~1505)[5]의 부인이자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의 딸 안토니아(Antonia di Savoia ?~1500) 단 한명 뿐이었으며[6], 안토니아는 필리포 2세의 사생아라 정식 공녀도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유럽 왕실에서는 그리말디 가문을 왕족이 아닌 고위 귀족 정도로 여겼다. 그나마도 대다수가 빠르게 파경을 맞으면서 가문의 품격에 먹칠을 했다. 다만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 왕실과 혈연은 닿는다. 현재 가장 가까운 왕실 친척은 벨기에 왕가 루이 2세의 모후가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의 외손녀다.

3. 역대 군주 및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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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에 3세 알베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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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4.1. 21세기

현 모나코 공인 알베르 2세가 2011년 6월 30일 결혼식을 올렸는데, 약혼녀 샤를린 위트스톡도망가려다 실패했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나왔다. # 일단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샤를린은 결혼식장에서 펑펑 울었고, 세 번이나 도망가려다 실패했다는 기사까지 떴다. 공실 측에서는 이를 부인했다.

파일:20231215_232452.jpg
12월 10일, 알베르 2세와 샤를린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 자크 가브리엘라가 태어났다. 가브리엘라가 2분 일찍 태어난 누나이지만, 모나코는 남자 우선 공위 계승제이므로 자크가 1순위 공위 계승자가 되었다.

모나코를 통치하는 그리말디 가문에는 저주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자손 대대로 집안이 막장이다. 13세기에 그리말디 가문으로 구성된 모나코 점령군 중 한 남자에게 버림받아 마녀가 된 여자가 그라말디 가문에 "너희 그리말디 가문의 누구라도 결혼하여 행복이란 것을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저주를 내렸다고. 실제로 알베르 2세의 증조부인 알베르 1세 이래로(그 이전에도) 결혼생활이 평안한 모나코 공들이 없었다. 시조부터 후손 모두가 대를 이어 이혼이나 별거하는 것도 세계구급 신기록. 그나마 정상인 아버지 레니에 3세도 그레이스 공비가 사고로 일찍 죽어 말년에 20년 넘게 홀로 살았다. 대신 그레이스 생전부터 바람은 꽤나 피웠다.

레니에 3세의 세 자식들도 죄다 결혼에 실패했다. 장녀 카롤린은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고 나이트 클럽에서 춤추거나 미니 스커트, 혹은 반나체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는 등 막장으로 살다 17살 연상의 첫번째 남편 필립 주노와 결혼했다. 그러나 맞바람 작렬하다가 이혼[23], 3살 연하의 두번째 남편 이탈리아 석유업계의 재벌가문 막내아들 스테파노 카시라기와 속도위반으로 결혼하여 세 자녀를 출산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나 카시라기가 요트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번엔 과부, 이후 다소 긴 침체기를 겪다가 3살 연상의 친구 남편인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24]을 빼앗아 또 속도위반으로 세번째 결혼 후 딸을 낳고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안정기를 갖는 듯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 공은 폭행 관련으로 구설수에 자주 올랐으며 # # 2009년 6월부터 지금까지 별거 중이다. 게다가 아우구스트 공은 태국 푸켓의 해변에서 젊은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25]

차녀 스테파니는 젊은 시절 뒷날의 패리스 힐튼처럼 온갖 막장짓으로 부모 속을 썩였으며[26], 명색이 일국의 공녀가 모델과 가수로 활동하겠다고 나서기도 했고[27] 심지어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하겠다며 서커스단과 유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결혼과 이혼을 두 번 했는데 첫 남편과는 애 둘을 먼저 낳고 결혼했다. 하지만 첫 남편의 외도로 초고속으로 이혼한 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서커스단장과 동거하다 헤어지고, 레니에 3세의 시종(유부남)이나 주로 이상한 남자들과 엮여 악명이 높았고 여러가지 시끄러운 사고들을 많이 일으켰다. 임신중독증으로 졸도하거나 병원에도 자주 실려갔던 적도 있었다. 몇 차례나 유부남들과 바람이 나서 가정을 깨기도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사생아를 낳기도 했다. 심지어 이 사생아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채털리 부인 증후군, 블루 칼라 마니아 같은 취향으로 의심 받기도 한다.

콩가루 집안답게 집안 구성원 간의 사이도 당연히 대대로 좋지 않다. 카롤린과 스테파니의 사이가 그레이스 공비 사후부터 심각하게 안 좋은 건 워낙 유명하고, 알베르 2세가 원래 결혼에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카롤린이 알베르 2세의 결혼을 방해했다는 말도 꽤 있었다. 이유는 알베르가 정식 결혼으로 아이를 얻지 못하면 공위를 카롤린의 장남 안드레아 카시라기가 잇게 되기 때문.

그런데 어릴 적 그렇게 예쁘고 멀쩡하던 안드레아도 술, 담배, 마약으로 맛이 갔고, 2013년 3월 한 살 연상의 콜롬비아 재벌의 상속녀 타티아나 산토 도밍고와의 사이에서 아들 알렉상드르 '사샤' 안드레아 스테파노 카시라기부터 낳고 8월 31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영국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2015년 4월에는 딸인 인디아 카시라기가 태어났고 최근 2018년 5월에는 셋째아들을 얻은 상태다.

카롤린의 둘째이자 고명딸인 샤를로트 카시라기는 15살 연상에 애딸린 모로코 프랑스인 코미디언 겸 배우인 가드 엘마레와 2011년에 교제를 시작하여, 2013년 8월에 약혼하고 그해 12월 아들을 출산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은 채 집안 차이를 이유로 2015년 결별했다. 가드 엘마레와 결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11살 연상의 이탈리아 귀족 출신 영화감독 람베르토 산펠리체와 만남을 가져 여러가지 추측이 나돌았으나, 1년여의 연애 끝에 람베르토 산펠리체와도 결별하였다. 그 이후에도 여러 남자들과 엮이다가 2018년 임신한 몸으로 프랑스 배우인 드미트리 라삼과의 약혼과 결혼을 발표했다.

셋째인 피에르 카시라기는 2015년에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모델 겸 언론인인 베아트리체 보로메오[28]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1] 스피놀라(Spinola) 가문과 더불어 11명의 도제를 배출했다. [2] 다만 복위만 불가능해진 것뿐이지 몇몇 왕가는 기존의 재산을 가지고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 독일 제국의 황가인 호엔촐레른 가문. [3] 종교가 다른 개신교 계열의 왕가들은 그렇다고 해도 비텔스바흐 가문을 비롯한 같은 가톨릭 계열의 독일 왕가들하고도 혼맥을 맺어본 적이 없다. 다만 뷔르템베르크 왕가에서 귀천상혼으로 한 등급 낮아진 우라흐 가문과는 통혼한 적이 있어서, 적국인 독일인 빌헬름 폰 우라흐가 모나코 공 루이 2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프랑스가 개입하여 루이 2세의 사생아 딸 샤를로트 그리말디를 후계자로 정했다. [4]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가 그리말디 가문보다 500년이나 전통적인 유럽 왕실로의 편입이 늦었고 최초군주는 대놓고 평민 출신이었지만, 주권국가의 엄연한 통치 가문이어서 유럽 왕실들의 관례적인 인정을 받았다. [5] 프랑스어: Jean II de Monaco, 이탈리아어: Giovanni II di Monaco. 그는 동생 뤼시앵(1487~1523. 프랑스어: Lucien de Monaco, 이탈리아어: Luciano I di Monaco)에게 암살당했고, 현재 그리말디 가문은 뤼시앵의 후손이다. [6] 그나마 앙투안 1세의 부인 로렌의 마리가 로렌 가문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고조 할아버지인 엘뵈프 후작 르네 2세(René II d'Elbeuf 1536~1566)는 기즈(Guise)가문의 시조 기즈 공작 클로드(Claude de Lorraine 1496~1550)의 자녀 6남 4녀 중 막내 아들이였으며 그녀의 할아버지인 하코트 백작 앙리(Henri de Lorraine 1601~1666)는 차남으로 직계와 너무 먼 방계이기 때문에( 앙리 3세의 왕비 로렌의 루이즈보다 매우 먼 방계다.)통치 가문으로 보기에는 한미했다. [7] 공동 [8] 공동 [9] 샤를 1세의 공동 통치자 [10] 공동 [11] 공동 [12] 복위 [13] 복위 [14] 형제 장 1세와 공동 통치 [15] 형제 장 1세와 공동 통치 [16] 클로딘의 남편 [17] 형 장 2세를 암살하고 즉위했으나 본인도 조카에게 암살당했다.막장 [18] 루이즈 이폴리트의 남편 [19] 1793. 1. 19~ 1793. 2. 24 약 한 달 동안 국민공회를 거침 [20] 루이 2세의 외손자. 레니에 3세의 어머니 발랑티누아 여공 샤를로트 루이 2세의 적녀가 아닌 술집 여가수가 낳은 사생아로 명목상으로는 모나코의 계승권은 커녕 공가의 일원조차 아니었지만, 루이 2세에게 후사가 없자 프랑스에게 합병당하지 않기 위한 모나코의 비책으로 하루아침에 공녀로 신분상승했지만 공위는 넘겨받지 못했다. 대신 계승권을 양도하여 루이 2세의 뒤를 이어 공위에 오른 사람이 아들 레니에 3세. [21] 빌헬름 폰 우라흐 [22] 이 때문에 이전부터도 그래왔지만 특히 레니에 3세 이래로 모나코 공가는 귀족 출신보다는 평민 출신의 공비를 맞이하고 있는 편이다. 레니에 3세의 공비인 그레이스 켈리도 유명 여배우여서 그렇지 평민 출신이며 현 알베르 2세의 공비인 샤를린 위트스톡도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다. [23] 그레이스 공비는 이 결혼을 엄청 반대했었다. [24] 하노버 왕가의 현 수장으로 소피아 왕대비 콘스탄티노스 2세의 외사촌이다. [25] 아이러니하게도 엄연한 군주국인 모나코 왕실보다 현재는 없어진 하노버 왕실의 위상이 더 높아서 카롤린 공녀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공과의 결혼으로 유럽대륙 정식 왕족 반열로 대우받고 있다. 그렇기에 카롤린으로선 굳이 이혼을 서두를 필요가 없는 것. [26]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공비는 너무 일찍부터 망나니같이 놀아제끼는 스테파니를 'Wilde Child'라고 불렀다. 하지만 아픈 레니에 3세를 곁에서 가장 정성스레 보살펴준 효녀이기도 했지만말이나 잘 듣지 근데 정작 공위는 아들 알베르 2세가, 재산 절반쯤은 언니 카롤린에게 가고 스테파니는 가장 적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다만 이유는 납득이 갔던 게 망나니 짓으로 있는 재산도 말아먹을 게 뻔해서. [27] 정작 본인 명의로 발매한 앨범은 혹평받고 망했다. 그나마 잘 알려진 건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In the Closet에서 Mystery Girl 명의로 나레이션 한 것 정도. 음색은 꽤 괜찮다. [28] 이탈리아 왕국의 왕가 사보이아 가문의 당주이자 움베르토 2세의 손자인 베네치아 공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SNS에서 싸운 걸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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