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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1-03 05:34:52

칼마르 동맹

칼마르 동맹
Kalmarunionen
파일:칼마르 동맹 국기.svg 파일:칼마르 동맹 문장.png
국기 문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Kalmar_Union_ca._1500.svg.png
1397년 ~ 1523년
위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 주변
그린란드, 북해 여러 섬
실질 수도 코펜하겐
인구 1500년 1,690,000명
덴마크 600,000명
핀란드 300,000명
노르웨이 240,000명
스웨덴 550,000명
공동 군주 [1]
주요 국왕 마르그레테 1세(1397~1412)[2]
크리스티안 1세(1457~1464)[3]
언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아이슬란드어
종족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스웨덴인
핀란드인, 아이슬란드인
종교 가톨릭 개신교
주요 사건 1397년 성립
1523년 해체
통화 크로네
성립 이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스웨덴 탈퇴 이후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스웨덴

1. 개요2. 역사
2.1. 배경
2.1.1. 노르웨이-스웨덴 탄생2.1.2. 덴마크-노르웨이 탄생2.1.3. 칼마르 동맹의 탄생
2.2. 포메른의 에리크 시대2.3.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 시대2.4. 크리스티안 1세 시대
2.4.1. 올덴부르크 왕조 창건2.4.2. 노르웨이, 스웨덴 왕위 획득2.4.3. 스웨덴 섭정의 독립
2.5. 한스 시대2.6. 크리스티안 2세 시대
2.6.1. 상공업 계급 장려와 왕권 강화2.6.2. 스웨덴 왕위 획득2.6.3. 스톨홀롬 대학살과 덴마크 개혁2.6.4.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스웨덴 독립전쟁과 칼마르 동맹의 붕괴2.6.5.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 실패와 칼마르 동맹의 해체2.6.6.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대두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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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4세기 말 덴마크를 중심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4] 세 국가가 동군연합(同君聯合)을 결성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했던 왕국이다.

연합이 이루어진 이유는 발트해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상업을 위협하던 한자동맹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이 '칼마르 동맹'인 이유는 스웨덴의 항구 도시 칼마르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2. 역사

2.1. 배경

파일:Scandinavia1219.png

2.1.1. 노르웨이-스웨덴 탄생

스웨덴의 왕권을 확립했던 망누스 3세가 AD 1290년에 사망한 뒤 그의 아들들과 스웨덴 귀족들간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이 거의 30년 간 이어졌지만 망누스 3세의 차남 쇠데르만란드 공작 에리크와 노르웨이 왕 호콘 5세의 딸 잉에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망누스 4세가 AD 1319년 7월 왕위에 오르면서 겨우 종식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호콘 5세도 사망하면서 망누스 4세가 노르웨이 왕위까지 상속받아 '망누스 7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망누스 4세의 즉위 당시 나이가 세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할머니 홀슈타인의 헬비히, 어머니 노르웨이의 잉에보리, 그리고 덴마크 귀족인 크누트 욘손과 노르웨이 귀족인 에를링 비드쿤손이 섭정단을 조직했다.

비록 망누스 4세가 성년이 되기 전인 AD 1333년, 노르웨이에서 에를링 비드쿤손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섭정단은 큰 무리없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양국을 통치했다. 또한 당시 덴마크는 독일의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 및 홀슈타인-플뢴 백작 요한 3세가 그동안 덴마크 왕실에 빌려준 대출금의 담보를 위해 영토 대부분이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는데, 이에 AD 1332년 스코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으로의 귀속을 요청하고 나서자 스웨덴 섭정단은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스코네를 스웨덴 영토에 병합했다.

AD 1336년 망누스 4세가 20세가 되자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국왕 노르웨이 국왕으로서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르게 되었지만 AD 1338년 노르웨이 귀족들이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결국 AD 1343년 바르베리 조약에 의한 대타협이 이루어져 스웨덴 왕위는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가 이어받게 되었지만 노르웨이 왕위는 차남인 호콘이 계승하게 되었고, 어린 호콘 왕자가 바로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대신 성년이 될 때까지는 망누스 4세가 섭정이 되기로 했다. 이후 망누스 4세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스웨덴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지방법들을 통일하기 위한 《통일 국법》(Landslag)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스웨덴 전국의 도시들에게 적용되는 《도시법》(Stadslag)도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망누스 4세의 대외정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1323년 체결되었던 뇌테보리 조약 위반을 이유로 AD 1348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했으나 AD 1350년부터 북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흑사병(페스트)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망누스 4세는 치세동안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귀족과 교회의 경제력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샀다. 그리고 AD 1355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했던 차남 호콘 6세가 성년이 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은 종식되고 다시 별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러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었지만 그동안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했던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망누스 4세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의 수장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에리크 12세는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을 얻어냈고, AD 1356년에는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AD 1357년 망누스 4세로부터 핀란드와 스웨덴 남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이후 망누스 4세가 반격에 나서서 AD 1359년 노르웨이 왕이 된 차남 호콘 6세와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장남인 에리크 12세와도 화해했다. 같은 해 에리크 12세가 갑자기 병사했고, 이듬해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가 망누스 4세를 배신하여 스코네를 되찾아 갔다. 하지만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한 스웨덴 귀족들이 망누스 4세의 매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접근하여 그의 아들인 알브레크트에게 왕위를 제안했기 때문에 망누스 4세는 스코네의 탈환을 포기하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다시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망누스 4세는 AD 1362년 호콘 6세를 스웨덴의 공동왕으로 임명하여 노르웨이의 지원도 받아냈다.

이렇게 망누스 4세가 덴마크 및 노르웨이와 공동 전선을 펼쳤으나 AD 1364년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가 북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대관식까지 치르는데 성공했다. 이후 스웨덴에서는 8년 동안 망누스 4세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 지지파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AD 1364년에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 세력이 망누스 4세를 지원하러 온 호콘 6세의 노르웨이 군을 물리치고 망누스 4세까지 포로로 붙잡았다. 이제 호콘 6세가 AD 1370년 한자동맹 도시들에게 상당한 무역 특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1371)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까지 받아 스톡홀름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결국 호콘 6세와 알브레크트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포로로 붙잡혀 있던 망누스 4세가 풀려나는 대신에 알브레크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2.1.2. 덴마크-노르웨이 탄생

덴마크는 AD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정통성 있는 왕위 계승 후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덴마크 왕위가 비어있는 대공위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발데마르 4세의 장녀 잉에보르가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3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알브레크트 4세가 외할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후광에 힘입어 강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가문이 이미 스웨덴 왕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덴마크 귀족들은 이를 거절하고, 노르웨이 왕 호콘 6세와 결혼한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의 아들인 올루프를 AD 1376년 덴마크 왕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AD 1380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가 사망하자 올루프 2세가 노르웨이 왕 '올라프 4세'로 즉위하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올루프 2세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었다.

2.1.3. 칼마르 동맹의 탄생

스웨덴에서는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가 왕위를 차지했지만 스웨덴 귀족들로 이루어진 섭정 의회의 광범위한 권한을 인정해 주어야 했다. 그 중에서 알브레크트를 왕위에 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부 욘손 그리프는 무려 1,500여개의 농장을 얻고 스웨덴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비록 알브레크트가 19년 간이나 왕위를 유지했지만 스웨덴 서부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알브레크트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주요 지역의 토지를 독일 영주에게 넘겨주고 중요 보직에도 독일인만 중용하자 스웨덴 귀족들은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알브레크트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AD 1389년 부 욘손 그리프는 사망하자 이제 스웨덴 귀족들이 부 욘손 그리프의 방대한 영지의 상속권을 두고 알브레크트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마르그레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본래부터 마르그레테도 스웨덴의 망누스 4세의 왕위를 빼앗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레크트를 상대로 자신의 아들인 올루프 2세가 망누스 4세의 외손자임을 내세워 스웨덴 왕위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올루프 2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스웨덴인도 올루프 2세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올루프 2세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루프 2세가 AD 1387년 1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그레테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언니 잉에보르의 외손자이자 독일 신성 로마 제국 포메른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의 아들인 포메른의 에리크를 양자로 삼아 덴마크 왕위를 계승시키고 덴마크 국왕 에리크 7세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국가자문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실상 마르그레테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AD 1389년 알브레크트와 대립하던 스웨덴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망한 스웨덴의 실력자 부 욘손 그리프의 막대한 영지까지 대부분 넘겨받았다. 이 때부터 마르그레테는 스웨덴의 '여군주이자 통치자'로 선포되었고 AD 1389년 2월 스웨덴을 공격하여 오슬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알브레크트도 생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이후 알브레크트는 6년 간이나 스코네의 린드홀름 성에 감금되어야 했고 AD 1395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스톡홀름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 사이 마르그레테가 이미 스웨덴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AD 1396년 포메른의 에리크를 노르웨이 왕위와 스웨덴 왕위에 모두 즉위시켰다. 포메른의 에리크는 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에리크 3세, 스웨덴 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로 각각 명명되었다. 이어서 마르그레테는 AD 1397년 6월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3개국 귀족 의회를 소집하여 3개국의 연합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서로 동군연합 상태가 되는 '칼마르 동맹(Kalmarunionen)'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포메른의 에리크가 3개국의 통합 왕이 되어 같은해 6월 7일에 3개국 합동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포메른의 에리크가 통합 왕이었지만 여전히 마르그레테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렇지만 마르그레테는 칼마르 동맹의 3개국 통합 헌법을 비준시키는 데는 실패하여 칼마르 동맹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동군연합 형태의 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칼마르 동맹을 결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귀족 의회를 가지며 고유의 법과 관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칼마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행사했고 나머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를 하나로 통합시킨 업적을 남긴 마르그레테는 마지막으로 덴마크 남부의 홀슈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던 중 AD 1412년 갑자기 사망하였다.

2.2. 포메른의 에리크 시대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통합왕이 된 포메른의 에리크는 AD 1412년 양모인 마르그레테가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친청을 시작할 수 있었다. 포메른의 에리크는 슐레스비히를 지키고 마르그레테가 미완으로 남겨놓은 홀슈타인 지방의 수복을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와 동맹을 맺고 홀슈타인 백작들과 AD 1416년부터 AD 1422년까지 전쟁을 벌였고 AD 1426년 재차 홀슈타인을 공격했다. 이에 홀슈타인이 북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과 동맹을 체결하자 포메른의 에리크는 AD 1428년 한자동맹의 함대를 격파하고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외레순 해협을 지나가는 선박에 대하여 통행세를 부과했다. 이 통행세 덕분에 덴마크는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고 남부의 슐레스비히 지방이 홀슈타인과 한자동맹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초기 성과에도 불구하고 포메른의 에리크가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덴마크인 관리를 파견하고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중과세를 부과한 것 때문에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많은 반발을 샀다. 더구나 한자동맹 도시에 대한 무역 봉쇄 조치로 소금과 생필품이 부족해지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불만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AD 1434년 포메른의 에리크가 한자동맹 도시들과의 무역을 봉쇄하자 철과 구리 수출의 길이 막힌 베리슬라겐의 스웨덴 광부들이 엥엘브레크트 엥엘브렉손의 주도로 봉기하였다. 이어서 노르웨이에서도 아문드 시구르손에 의한 농민 반란이 일어나 오슬로가 함락되었다.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지자 포메른의 에리크는 엥엘브레크트와 협상하여 1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엥엘브레크트는 AD 1435년 아르보가에서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의 4계급 신분제 의회를 개최하여 상공인과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가혁명위원회 의장(Rikshovitsman)'으로 선출되었다. 다만 스웨덴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엥엘브레크트를 경계하여 AD 1436년 귀족 출신인 칼 크누트손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했다. 같은해 스웨덴 봉기를 주도했던 엥엘브레크트는 스웨덴 귀족들과의 불화 때문에 AD 1436년 암살당했다.

엥엘브레크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서는 포메른의 에리크가 펼치는 전제 군주정을 견제하기 위한 입헌 정부 형태의 새로운 연합체 구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덴마크 귀족들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포메른의 에리크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스웨덴 귀족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포메른의 에리크가 끝내 이를 거절했고 이에 덴마크와 스웨덴 귀족들은 AD 1439년에, 노르웨이 귀족들은 AD 1442년에 차례로 포메른의 에리크의 폐위를 결정하였다. 대신에 포메른의 에리크의 여동생 카타리나와 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의 노이마르크트 궁중백인 요한[5]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프를 칼마르 동맹의 새로운 통합 왕으로 선출하였다.

2.3.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 시대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프는 AD 1440년부터 덴마크 국왕 크리스토페르 3세가 되어 AD 1441년 유틀란트 반도 퓐 섬의 농민반란을 신속히 진압하고 같은해 스웨덴 왕위에도 올랐으며 AD 1442년 5월에 노르웨이 왕위도 차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본래 덴마크의 수도였던 로스킬레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코펜하겐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폐위된 포메른의 에리크가 발트해 고틀란드를 거점으로 해적 행위를 벌이기 시작한 것에 대해 별다른 대비책을 세우지 않아서 스웨덴 귀족들의 원망을 샀다. 또한 포메른의 에리크가 지나치게 한자동맹 도시들과 대립하다가 폐위된 전례 때문에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는 한자동맹과 화해하고 그들의 상업 특권을 회복시켜 주면서 스칸디나비아 지역 상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 사이 스웨덴에서는 엥엘브레크트와 함께 스웨덴 국가혁명위원회 공동 의장이 되었던 스웨덴의 칼 크누트손이 AD 1441년 스웨덴의 최고 법무대신으로 임명받았고 이듬해 이를 사직하는 대신에 스웨덴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AD 1442년에는 러시아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핀란드의 비보리 총독이 되어 핀란드를 봉토로 지급받으면서 명실상부한 스웨덴의 실력자가 되자 스웨덴 귀족세력을 이끌며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를 견제하고 나섰다. 또한 덴마크의 원로원의 세력도 성장하면서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의 왕권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경우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여 점점 사실상 덴마크의 속국이 되어 갔다.

비록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는 왕권이 크게 약화되고 스웨덴과 덴마크가 귀족 세력에 의해 통치되는 신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3개국 통합 왕의 권위만은 유지하였기 때문에 어찌되었든 스칸디나비아 3개국의 칼마르 동맹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AD 1448년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후 3개국 의회가 차기 통합 왕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칼마르 동맹은 더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스웨덴에서는 비보리 총독인 칼 크누트손이 같은 해 8월 권력을 장악하고 왕으로 선출되는데 성공하여 칼 8세로 즉위하였고 덴마크는 신성 로마 제국 올덴부르크의 백작 디트리히의 장남인 크리스티안[6]을 선출하여 올덴부르크 왕조를 개창하였다.

2.4. 크리스티안 1세 시대

2.4.1. 올덴부르크 왕조 창건

AD 1448년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가 사망한 후 덴마크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국가평의회(덴마크어 Rigsraadet)는 처음에 덴마크의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슐레스비히 공작 아돌프 8세에게 왕위를 제안하였으나 아돌프 8세는 자신이 늙고 자식도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대신에 자신의 누이인 홀슈타인의 헬비히가 독일 올덴부르크 백작 디트리히와 결혼하여 낳은 장남인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티안 7세를 추천하였다. 크리스티안 7세는 AD 1440년 14살의 나이에 아버지 디트리히의 올덴부르크 백작위를 이어받았고 아돌프 8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장차 슐레스비히 공작령까지 크리스티안 7세가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다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외숙부인 슐레스비히 공작 아돌프 8세가 후견인이 되었다.

덴마크 국가평의회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크리스티안 7세가 ' 크리스티안 1세'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의 왕위에 올라 새로운 올덴부르크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덴마크에는 왕위와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동시에 겸할 수 없다는 '발데마르 헌장'이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티안 1세는 덴마크 왕위에 오르는 대신에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포기해야만 했다. 또한 크리스티안 1세는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선왕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의 미망인인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와 결혼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른 뒤에 는 모든 공직과 지방 행정을 덴마크 귀족들에게 위임하고 선전포고 및 강화조약 체결시 귀족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국왕 헌장(Haandfæstning)'에도 서명해야 했다. 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은 크리스티안 1세는 AD 1448년 10월 코펜하겐 대성당에서 대관식과 결혼식을 동시에 치뤘고 올덴부르크는 동생인 게르하르트에게 물려주었다.

2.4.2. 노르웨이, 스웨덴 왕위 획득

크리스티안 1세가 덴마크 왕위에 오른 지 1달 뒤인 AD 1448년 스웨덴에서는 칼 8세가 트론헤임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르면서 이후 크리스티안 1세와 칼 8세는 서로 상대방의 왕위를 요구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노르웨이 귀족들은 덴마크나 스웨덴과 달리 그들만의 단독 왕을 선출하는 것을 포기한 채 크리스티안 1세 지지파와 칼 8세 지지파로 나뉘어졌다. AD 1449년 2월 칼 8세 지지파가 칼 8세를 노르웨이 왕으로 선언했지만 같은 해 6월 크리스티안 1세 지지파는 크리스티안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1세가 먼저 AD 1450년 함대를 이끌고 노르웨이의 트론헤임에 입성하여 대관식을 치르고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어서 베르겐에서 노르웨이 귀족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합병을 공식화하면서 향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를 크리스티안 1세의 적법한 후계자가 상속받기로 합의했다.

이제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 왕위까지 노리면서 AD 1451년부터 덴마크-스웨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스웨덴의 칼 8세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교회 소유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인기를 잃어 버리자 웁살라 대주교인 옥센셰르나 가문의 옌스 벵트손이 귀족 세력을 이끌고 칼 8세에게 항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AD 1457년 칼 8세가 폐위된 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망쳤고 웁살라 대주교 옌스 벵트손의 주도로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 왕으로서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칼마르 동맹이 재건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1세가 직접 스웨덴을 통치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대신에 웁살라 대주교 옌스 벵트손과 토트 가문의 에리크 악셀손을 섭정으로 임명하여 스웨덴에 대한 통치를 위임했다.

한편 AD 1459년 외숙부인 아돌프 8세가 사망하면서 더이상 홀슈타인 백작령과 슐레스비히 공작령의 상속자가 남아 있게 되자 덴마크 왕실로 그 소유권이 넘어왔다. 비록 발데마르 헌장에 의해 덴마크 왕은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겸직할 수 없었지만 크리스티안 1세는 AD 1460년 3월 리베 조약을 체결하여 발데마르 헌장을 무효화시키고 홀슈타인 백작령과 슐레스비히 공작령을 모두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을 벌여 홀슈타인을 덴마크에 병합시키지 않고 여전히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로 남겨둔다는 조건 아래 홀슈타인을 공작령으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향후 덴마크 국왕은 홀슈타인 공작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라는 이중 지위를 갖게 되었다.

2.4.3. 스웨덴 섭정의 독립

비록 크리스티안 1세가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까지 모두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뇌물의 재원 마련을 위해서 스웨덴에 중과세를 부과하고 교회의 면세 특권을 폐지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웁살라 대주교 옌스 벵트손이 납세를 중단시켰고 이에 분노한 크리스티안 1세가 옌스 벵트손을 체포하여 덴마크로 압송시켰다. 그러자 AD 1464년 린셰핑 주교인 바사 가문의 셰틸 칼손이 반란을 일으켜 크리스티안 1세의 폐위를 결정하고 칼 8세를 다시 복위시켰으나 칼 8세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고 린셰핑 주교 세틸 칼손이 섭정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옌스 벵트손이 스웨덴으로 되돌아와 토트 가문의 에리크 악셀손과 함께 칼 8세의 반대 세력을 결집시켰고 스웨덴 교회 전체를 관할하는 웁살라 대주교로서 옌스 벵트손이 칼 8세를 파문했기 때문에 칼 8세는 1년만에 다시 폐위되고 크리스티안 1세가 스웨덴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로도 스웨덴 내부의 귀족들 간의 파벌 싸움이 끝나지 않아 1년도 지나지 않아 웁살라 대주교 옌스 벵트손이 섭정 자리에서 밀려나면서 토트 가문의 에리크 악셀손이 단독 섭정이 되었다. 이제 스웨덴은 칼 8세 지지파, 옌스 벵트손의 세력, 에리크 악셀손의 세 세력으로 분열되었는데 AD 1467년 에리크 악셀손이 칼 8세의 복위를 지지하던 스투레 가문의 스텐과 연합하면서 다시 크리스티안 1세의 폐위가 결정되고 칼 8세가 또다시 왕으로 복위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명목상일 뿐 실권은 에리크 악셀손의 토트 가문과 스텐의 스투레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고 AD 1470년 칼 8세가 사망하자 스투레 가문의 스텐이 스웨덴 섭정이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뒤에 등장하는 동명의 섭정 소(小) 스텐과 구분하여 대(大) 스텐으로 부르게 된다. 이후 크리스티안 1세가 다시 한번 공석이 된 스웨덴 왕위를 다시 한번 노리고 AD 1471년 스웨덴을 침공하였으나 스톡홀름 근처의 브룬케베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스웨덴 왕위를 포기하였고 이후 대(大) 스텐이 스웨덴을 지배하게 되었다.

2.5. 한스 시대

AD 1481년 크리스티안 1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인 한스가 덴마크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한스는 왕위에 오르는 대가로 부왕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제한하는 '국왕 헌장'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는 단독왕을 추대하려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한스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스웨덴의 경우에도 왕위는 공석으로 남겨둔 채 실질적으로 섭정인 스투레 가문의 대(大) 스텐이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에 AD 1483년 할름스타드에 세 왕국의 평의회가 모여서 한스를 통합 왕으로 선출하는 것에 대해서 논의했고 노르웨이 의회가 한스의 왕위 계승을 승인했다. 그리고 비록 처음에는 승인을 거절했던 스웨덴의 의회도 섭정인 대(大) 스텐이 점차 독재권을 강화시키고 스웨덴 귀족 및 교회를 억압하기 시작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한스의 왕위 계승을 인정했지만 대(大) 스텐은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는 방식으로 한스의 스웨덴 왕위 계승을 방해하였다.

AD 1483년 한스는 5월에는 코펜하겐에서, 7월에는 트론헤임에서 각각 덴마크 왕위와 노르웨이 왕위의 대관식을 치뤘다. 그리고 스웨덴 왕위까지 회복하기 위하여 AD 1493년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3세와 동맹을 맺어 스웨덴의 대(大) 스텐을 위협하고 나섰다. 또한 한스가 모스크바 대공국과 동맹은 체결한 것은 북독일의 한자동맹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했는데 한자동맹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벨리키 노브고로드를 이미 AD 1487년 점령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덴마크의 한스와 동맹을 체결한 후 즉각 노브고로드에 상주하던 한자동맹의 상인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AD 1495년 이반 3세가 핀란드를 침공하는 것과 동시에 한스가 독일 용병을 이끌고 스웨덴을 침공하여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결국 AD 1497년에는 대(大) 스텐도 굴복하여 섭정 지위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한스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스웨덴 왕 요한 2세로 즉위하는 대신에 대(大) 스텐은 왕 바로 아래의 관직을 유지하기로 합의되었다.

한편 한스는 AD 1490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동생인 프리드리히(훗날의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1세)와 분할하여 차지하였고 AD 1500년 브레멘 대주교의 관할 아래 반독립 상태에 있었던 디트마르셴 지역을 함께 공격하였다. 그러나 디트마르셴의 농민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이를 기회로 그동안 한스가 국왕 헌장을 무시하고 왕권을 확대하던 것에 불만을 가졌던 3왕국의 귀족들이 나란히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봉기는 쉽게 진압되었지만 스웨덴에서는 대(大) 스텐이 AD 1501년 로테브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시 섭정의 지위를 되찾왔다. 그리고 대(大) 스텐이 AD 1503년 사망했지만 그로부터 8개월 뒤 외가가 스투레 가문이던 스반테 닐손이 새로운 스웨덴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비록 한스는 네덜란드의 중재 덕분에 AD 1509년에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는 하지만 이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결국 한스는 스톡홀름에 입성하지도 못했고 대신에 섭정 스반테 닐손이 AD 1512년까지 계속해서 스웨덴을 통치했다.

2.6. 크리스티안 2세 시대

2.6.1. 상공업 계급 장려와 왕권 강화

한스의 장남인 크리스티안 2세는 AD 1506년부터 노르웨이 총독으로 임명받았고 AD 1513년에는 한스가 사망하면서 덴마크 왕위에도 올랐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2세도 부왕 한스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국왕 헌장'에 동의해야만 했다. 하지만 즉위 이후에는 국왕 헌장을 무시하고 상인들에게 특혜를 부여하여 덴마크 귀족과 한자동맹을 견제하고 나섰다. 특히 네덜란드의 상공업 계급인 부르주아 출신인 시그브리트 빌롬스와 뒤베케 시그브리트스다타르 모녀를 총애하였는데 그 중 딸인 뒤베케 시그브리트스다타르는 크리스티안 2세의 연인이 되었고 그녀의 어머니인 시그브리트 빌롬스는 외레순 해협의 통행세를 관리하며 크리스티안 2세의 재정 담당 자문관이 되었다.

이후 시그브리트 빌롬스는 덴마크 평의회 내에 부르주아 조직을 별도로 결성하여 기존에 귀족들이 장악했던 평의회 자체를 견제하였다. 비록 크리스티안 2세는 AD 151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인 합스부르크의 이사벨라와 결혼하게 되지만 여전히 뒤베케를 총애하면서 외교적 마찰을 빚었기 때문에 AD 1517년 뒤베케가 독살당했다. 그러나 그 배후로 지목된 코펜하겐의 토르벤 옥세가 평의회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 2세는 기어이 토르벤 옥세를 처형했다. 이후로도 크리스티안 2세는 부르주아 계급을 장려하여 지방을 통치하도록 했고 교회의 주교들도 마음대로 임명하며 귀족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2.6.2. 스웨덴 왕위 획득

이제 크리스티안 2세의 남은 목표는 허울좋은 칼마르 동맹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던 스웨덴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당시 스웨덴은 AD 1512년 스벤테 닐손에 이어서 트롤레 가문의 에리크 아르비드손이 섭정으로 선출되었으나 에리크가 크리스티안 2세를 스웨덴 왕으로 선출하려고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반대파들이 그를 내몰고 새로운 스투레 가문의 수장이 된 스반테 닐손의 아들 스텐을 다시 섭정으로 선출한 상태였다. 역사적으로는 이전의 동명의 섭정과 구분하여 소(小) 스텐으로 부르고 있다. 이후 소(小) 스텐은 에리크의 아들인 구스타프를 웁살라 대주교로 임명하여 화해를 추진했으나 오히려 구스타프는 교회의 독립성을 요구하면서 소(小) 스텐에 맞서기 시작했다. 결국 소(小) 스텐은 AD 1517년 구스타프를 웁살라 대주교 지위에서 해임하고 감옥에 수감시켰다.

한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이미 스웨덴 왕으로 선출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명분으로 내세워 스웨덴을 공격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우선 소(小) 스텐이 구스타프를 웁살라 대주교 지위에서 임의로 해임시킨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던 로마교황청의 지지를 확보하여 스웨덴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투옥된 구스타프와의 결탁을 시도했다. 비록 AD 1517년과 AD 1518년의 무력 침공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구스타프를 탈옥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로마 교황청을 움직여 스텐과 그의 지지자들을 파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AD 1519년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출신의 용병대를 이끌고 3번째로 스웨덴을 침공하여 AD 1520년 1월 오순덴스 전투에서 스웨덴 군을 격파하고 소(小) 스텐을 전사시켰다.

이후 크리스티안 2세는 웁살라에 입성하였고 스웨덴 귀족들로부터 봉신서약을 받는 대신에 스웨덴의 고유 관습과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하고 이전에 자신을 적대한 죄도 사면해 주었다. 스톡홀름만이 소(小) 스텐의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닐스도테르가 농민군을 모으며 저항에 나섰지만 AD 1520년 4월 웁살라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은 해 5월부터 덴마크 함대까지 도착하여 수륙 양면으로 스톡홀름을 포위하자 결국 크리스티나도 그 해 9월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스톡홀름에 입성한 크리스티안 2세는 11월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웁살라 대주교로 복직된 구스타프의 축성을 받으며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뤘다. 이로서 크리스티안 2세가 공식적으로 스웨덴 왕이 되었고 칼마르 동맹도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2.6.3. 스톨홀롬 대학살과 덴마크 개혁

크리스티안 2세는 대관식을 치른 지 사흘 뒤에 웁살라 대주교 구스타프이 주관하는 회의를 개최하여 이전의 사면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반대파를 모두 발본색원하기 위해 구스타프가 미리 작성한 살생부에 오른 스웨덴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AD 1520년 11월 8일과 9일의 2일간 로마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던 소(小) 스텐 지지파의 스웨덴 귀족 80여명이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스톡홀름 대학살(Stockholms Blodbad)'이 벌어졌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스웨덴과 핀란드 전역에 걸쳐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점이었는데 이미 죽은 소(小) 스텐의 시체는 부관참시되었고 항복했던 소(小) 스텐의 미망인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많은 스웨덴 귀부인들도 덴마크로 끌려갔다.

한편 덴마크로 돌아온 크리스티안 2세 자신의 왕권을 지나치게 자신한 나머지 네덜란드 법률을 참고하여 귀족 출신 고위 성직자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억제하고 평민 출신 하위 성직자를 적극적으로 육성하도록 하며 상업을 장려하는 내용의 성문법을 제정하는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전통적인 귀족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신흥 세력인 상인들의 세력을 키우는 것을 기본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귀족들의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스톡홀름 대학살로 인하여 이미 많은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있던 스웨덴에서 바사 가문의 구스타브 에릭손이 주도하는 대대적인 반란이 발생했다.

2.6.4.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스웨덴 독립전쟁과 칼마르 동맹의 붕괴

구스타브 에릭손은 스웨덴의 유력 귀족 가문인 바사 가문의 일원으로 그의 아버지인 에리크 요한손과 함께 소(小) 스텐을 지지하며 크리스티안 2세와 싸웠었다. 그러나 AD 1518년 소(小) 스텐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구스타프 에릭손은 소(小) 스텐이 강화의 조건으로 보낸 6명의 인질에 포함되어 덴마크로 향해야 했다. 비록 나머지 인질들은 덴마크의 환대에 넘어가 크리스티안 2세의 편으로 돌아섰지만 구스타브 에릭손만은 끝까지 버텼고 AD 1519년 마침내 북독일의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인 뤼베크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듬해인 AD 1520년 비록 소(小) 스텐이 최종적으로 패배하여 사망하면서 크리스티안 2세가 왕위에 올라 스웨덴의 모든 통치권을 장악했지만 스톡홀름 대학살로 인하여 신망을 잃어버렸다. 그러자 구스타브 에릭손은 스웨덴 중부의 달라르나로 향했고 그 곳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구스타브 에릭손의 반란군이 대부분이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장이라고는 검과 도끼, 석궁, 창과 같은 구식 무기 밖에 없었고 그 숫자도 400여명에 불과했지만 AD 1520년 4월 덴마크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고무된 스웨덴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구스타브 에릭손의 반란에 호응하기 시작하여 예탈란드와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도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제 스웨덴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낸 구스타브 에릭손은 마침내 예탈란드의 유력 귀족인 투레 옌손과 린셰핑 주교 한스 브리스크까지 설득하여 AD 1521년 8월 바드스테나에서 스웨덴의 섭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스웨덴 귀족들이 앞다투어 구스타브 에릭손의 휘하로 귀순하였고 스톡홀름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구스타브 에릭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구스타브 에릭손은 스톡홀름에 대한 포위전을 준비했지만 해군의 도움없이는 스톡홀름을 함락시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한자동맹 도시의 중심인 뤼베크와 협상을 벌여 훗날의 보상을 조건으로 AD 1522년 한자동맹의 함대를 지원받았다.

이제 구스타브 에릭손은 수륙 양면에서 스톡홀름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AD 1523년 마침내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서 노르웨이-덴마크의 국경까지 진격해 들어갔고 덴마크에서는 크리스티안 2세가 위기에 몰리자 이를 기회로 덴마크의 유틀란트 귀족들이 AD 1523년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크리스티안 2세의 폐위가 결정되었고 대신에 그의 숙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프리드리히가 새로운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로 추대되었다. 그러자 프레데리크 1세가 칼마르 동맹에 따라 스웨덴 왕위까지 요구할 것을 우려한 스웨덴에서는 새 왕을 선출할 것을 결의하였고 독립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구스타브 에릭손이 추대를 받아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어 구스타브 1세 바사로 즉위하고 새로운 바사 왕조를 창건하였다.

2.6.5.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 실패와 칼마르 동맹의 해체

이제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위를 모두 빼앗긴 채 위기에 봉착한 크리스티안 2세는 처가가 있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로 탈출하여 자신의 처남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도중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만나 마음의 위안을 얻고 루터교로 잠시 개종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카를 5세와 마찰을 빚었다. 당시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의 열풍은 북유럽까지 도달했고 로마 교황청의 정치 간섭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1세와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 모두 루터교를 지원했다.

이렇게 적대 세력인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1세와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까지 모두 종교개혁에 동참하자 크리스티안 2세는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여 카를 5세와 화해하였다. 그리고 AD 1531년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왕위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AD 1532년 모든 싸움을 포기한 크리스티안 2세는 숙부인 프레데리크 1세와 마지막으로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포로로 붙잡혔다. 그리고 AD 1559년 죽을 때까지 여생을 쇠네르보르 및 칼룬보르 성에서 보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AD 1397년 마르그레테에 의해 성립된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AD 16세기초까지 명목상이나마 유지되던 스칸디나비아 3왕국의 국가 연합체인 칼마르 동맹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이후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서로 경쟁을 벌이며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2.6.6.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대두와 실패

19세기에 와서는 스웨덴을 중심으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여 칼마르 동맹의 영광을 되찾자는 민족주의 사상인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대두되기도 했다. 독일 통일 운동,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같이 근대 유럽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통일 운동이었지만 성공한 둘과는 달리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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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질적으로 대부분 덴마크 국왕 [2] 덴마크 군주로서는 1387~1412 [3] 덴마크 군주로서는 1448~1481 [4] 핀란드도 포함되는데 당시 핀란드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었고 정체성도 상대적으로 작았다. [5] 독일왕이자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의 막내 아들. [6] 덴마크 국왕 에리크 5세의 딸 리케자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