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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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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1b5b40,#ddd> 일생 <colbgcolor=#fff,#1f2023> 일생 · 평가
가족 아내 박영옥 · 형 김종락 · 형 김종익
역대 선거 제13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사건사고 및 논란 · 5.16 군사정변 · 4대 의혹 사건
기타 중앙정보부 · 3당 합당 · DJP연합 · 삼김시대 · 신민주공화당 · 자유민주연합 · 청구동계 · 몽니 }}}}}}}}}

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한국 최초의 현대적 정당 창당2.2. 첫 평화적 정권교체에 기여2.3. 막말 정치 지양2.4. 문화-예술계 지원2.5. 경제개발 기여2.6. IMF 사태 극복에 기여 및 아시아통화기금 제안 2.7. 통일 후 주한미군 주둔문제2.8. 중재역2.9. 흠잡을 데 없는 가정사
3. 부정적 평가
3.1. 박정희 정부의 2인자3.2. 김 - 오히라 메모3.3. 철새 논란3.4. 부정축재3.5. 지역 감정 부추기기 논란

1. 개요

김종필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2.1. 한국 최초의 현대적 정당 창당

김종필이 만든 민주공화당은 중앙당·사무처 중심 시스템과 기존의 파벌 중심의 보스정치를 타파하고 당원들은 정당에 복종하도록 하여 근대적 정당정치 체제를 갖추었다. 비록 권위주의 체제의 권력 강화용 정당이 된 점이나 계파 정치를 타파하지 못했으나 한국 정당의 모델로 평가받는다. #, #, #

2.2. 첫 평화적 정권교체에 기여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땅에 처음으로 민주 정부를 수립한 업적을 세웠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이 YS의 요구를 많이 수용해주기도 했지만, 기존 여권의 연장선상인 민주자유당의 집권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DJP연합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 구도에서 평화적인 첫 정권교체에 공헌한 공로가 크다. 당시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시군(市郡) 한 곳 차이로(39만여표) 당락이 결정된 걸 감안하면, 김종필의 충청 지역 표가 확실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셈이다.

2.3. 막말 정치 지양

고사성어, 몽니[1] 같은 순 우리말 활용의 달인으로, 직설보다는 은유나 시구를 인용한 비유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모습이 종종 언론에 비춰졌다.

'자의 반 타의 반'[2],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3], '유구무언(有口無言)', '살아있는 사전'[4], "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5] 등, 뭇 정치인들 발언에 칼날이 잔뜩 세워지는 주요 선택국면에서도 현 상황에 부합하면서 정적들이나 언론이 문제삼지 않는 중의(重義) 및 비유, 그리고 이 담긴 고사성어로 입장을 표명하는 모범을 보이며, 세고 격한 표현으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일부 정치인들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화권(中華圈)에서는 이런 JP의 멋과 소양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다른 정부 인사는 몰라도 김종필 말은 듣는 시늉이라도 한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도, 젊은 지식인들이 정부를 대신해 유화적으로 청사진을 제시하는 김종필의[6] 모습을 높이 샀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7]
"시구는 언어의 압축이며 비유는 상상을 부른다. 직설적인 말은 표현 그 자체에 갇혀 버리지만 시를 통한 함축적인 표현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풍부하고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 김종필 회고록 소이부답(笑而不答)
"내가 보기엔 당신이 2인자인 듯 한데,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중략..)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넘겨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 신임 보안사령관 전 정권 부정부패의 "책임"을 진 김종필을 위로차 방문한 자리에서 조언을 구하자 건넨 말. #

2.4. 문화-예술계 지원

수준급의 수채화 실력, 만돌린, 아코디언, 피아노, 서예, 검도, 골프, 바둑 등 예술적 소양이 대단히 풍부한 예인(藝人)의 면모가 있는 정치인이었으며, 이 예인(藝人)이라는 별칭처럼 그림, 글씨, 음악, 문학같은 예술 분야에 애정과 조예가 깊었다. 젊은 시절에는 수필 형식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8]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이북을 방문한 사람들이 북한에서 우리 것의 묘미를 잘 살린 창극을 공연하더라는 증언한 말을 접하고는, <배비장전>[9] 같은 해학 넘치는 판소리를 현대화하여 공연할 수 있도록 후원한 것을 위시해, 시민회관에서 좋은 공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도 하였다. 이 외에 전쟁사의 극적인 장면을 그린다는 등 명분을 내세운 미술 이벤트로 국내의 이름있는 화가들에게 일본에서 수입해온 3톤 트럭 분량의 화구(畫具)를 제공하기도 했고, 1978년에는 세종문화회관에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 설치를 주도한 바 있다. 이는 JP가 "음악의 경부고속도로를 깔았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기도 하다.

2.5. 경제개발 기여

박정희의 주요 업적 중 하나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단초를 제공하였으며, 경부고속도로의 개통도 김종필의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 특히 국무총리 시절인 1970년대 초중반은 국무총리실에서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수정할 만큼 총리로서 실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1973년 악몽과 같았던 석유파동(1차 오일쇼크) 당시 대통령이 아닌 김종필 총리가 미국에 지원을[10] 요청하러 간 데에는 이런 측면도 감안됐을 것이라는 후문.

2.6. IMF 사태 극복에 기여 및 아시아통화기금 제안

DJP연합으로 김대중과 함께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종필은 DJP연합 정권 아래 자민련측( 이규성 이헌재 등) 경제 관료들이 크게 활약했고, 당시 공동정부의 한 축으로서 김종필은 직접 국무총리의 권한으로 경제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며 경제에 있어 큰 실권을 행사하며 IMF 사태 극복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IMF를 대체할 아시아통화기금을 제안되기도 했다.[11] 당시 정부의 입장도 아시아통화기금을 김종필국무총리의 사견으로 여겼으나 아시아통화기금에 대해 현상황에서는 한중일 금융협력이 최우선이나 장기적으로는 검토할만하다는 입장을 밝혔다.[12]

2018년 문재인 정부는 고도 경제성장 견인,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극복을 이유로 국민훈장최고훈장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2.7. 통일 후 주한미군 주둔문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남북통일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해 통일 뒤 땅의 소유권은 북한 주민이 우선이며 남북통일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대해 주한미군을 외세라 논하며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나 되지않는 상황에 따라 철수까지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다.[13]

2.8. 중재역

유신 시절에는 김영삼 총재 제명에 유일한 반대표를 행사하고,[14] 찾아가 위로를 전한 여당 인사였다.

노태우 정부 때는 JP가 다른 3과 함께 나서서 여-야, 야-야간에 생기는 갈등을 봉합했으며, 참여정부 초기 한나라당의 완강한 주장을 대북송금 특검을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양보로 마무리 지은 것도, JP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야당( 한나라당)을 중재한 덕분이었다고 한다.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이나 설령 대통령이라도 40년 넘게 "현역, 현직"으로 활동하는 원로 정치인 JP한테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덕분이기도 한데, 대통령과 한나라당 총재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면 나중에는 JP를 쳐다보면서 이 논쟁의 시비를 가려달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는 후문.[15]

과거사에 발목이 잡힐 수 있는 거물 인사가 이렇게 중재역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 과거의 위상이나 줄타기 기술이 아닌, 대의명분에 따라 거취를 결정하는 순리(順理)의 지혜를 발휘한 덕분이기도 하다. 소수정당인 자민련 시절 10년을 공동정권 정당, 연합 정당으로 보내면서 여야를 다양하게 오가는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정국 안정", "국가, 국민의 안정을 돕는다"는 명분에 충실했기 때문에, 철새라는 비난 대신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2.9. 흠잡을 데 없는 가정사

숱한 유력 정치인의 배우자와 아들딸들이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나 여러가지 구설수에 오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종필의 가족들은 이렇다할 잡음이 없었다. 부인 박영옥 씨와 일생을 서로 헌신하였으며, 딸 김예리, 외아들 김진 모두 사회적으로 드러날 만한 부정적인 행적이 전무하다. 두 자녀 모두 부모님의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언론에 모습을 보인 전부다. 박영옥 본인 역시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고 가정 주부로만 생활하였으며 기본적인 내조를 위해서 대외 행사에 가끔씩 참석한 것을 제외하면 대외 활동도 잘 하지 않고 정계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조카딸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를 비롯한 박정희 일가와의 공식적인 접촉도 1990년 박정희 전 대통령 추모식때 참석한 거 빼면 거의 없었다.

일단 본인들이 언론 노출을 매우 꺼리며, 특히 외아들 김진의 경우 1990년 미국 유학 도중 만난 과테말라계 미국인 리디아[16]와 국제결혼을 하면서 더더욱 외부노출을 꺼리게 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기 전 이미 미국에서 결혼을 올리고 같이 살고 있었는데 김종필이 아들의 결혼을 반기지 않았다고 하며 이후 정치 재개 이후 바쁘다는 이유로 한동안 피해다니다가 결국 '자기들이 좋다는데 어쩔꺼냐'면서 아들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부터 권력자 신분이었으며 남다른 교양, 잘 생긴 용모까지 갖췄음에도, 다른 여성에게 한눈을 팔지 않고 본인의 약속처럼[17]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좋은 금슬(琴瑟)로 해로(偕老)했다는 점에서, JP의 제가(齊家)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부정적 평가

3.1. 박정희 정부의 2인자

박정희 정부 시절 2인자로서 당시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을 탄압하고 고문하기로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중정부장(부총리급)이 된 인물이다. 이후에 제4공화국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점도 비난을 받고 있다.

당장에 박정희 유신 시대에만 해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 서다가 막상 전두환 5공이 들어선 이후에는 신군부에 협력하는 쪽으로 갑자기 전향하여 비판의 대상이 된 인물들이 일부 존재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본인들이 5공에 협력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내세운 것이 "1980년도에 대통령 직접선거를 했다면 당시 민주공화당에 대한 동정표 때문에 그냥 김종필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여러 가지 다른 맥락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일단 일차적으로는 상당수의 민주화 운동가들 입장에서 김종필이 집권하는 것을 전두환의 집권보다도 최악으로 보았다는 것으로, 김종필 본인이 박정희 정부의 2인자 이미지로 굳어져 있지 않았다면 없었을 일이다.

3.2. 김 - 오히라 메모

특히 한일기본조약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연관짓는 민감한 시선들이 있기 때문에 김종필의 평가는 이 항목에서 결정적으로 갈리며, 현재도 "독도 문제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돈 몇 푼을 빨리 받으려고 독도를 팔다시피 했다"는 비판과 "급한 외자를 들여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으며, 독도 문제는 차후 보완할 수 있다"는 견해가 현재까지도 팽팽하게 대립 중이다.

사실 이승만 정부 때만 해도, 28억$의 대일청구권을 요구했으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도 1964년 김동조 주일대사의 부탁에 따라, 한국비료 설립에 필요한 차관을 일본에서 확보하는 과정에서 6억$ 규모의 상업차관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업차관 증액보다는 유상자금 2억달러의 이자를 인하하고 상환기한을 15년에서 25년으로 늘리는 편이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상업차관 쪽은 무산되었고, 결국 부족한 외환사정에[18] 따라 이전 요구액보다 적더라도 당장 필요한 자금을 수혈하는 방향으로 선회해, 62년 김종필이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대신과 협상한 김 - 오히라 메모 내용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당시 타결된 협상 요지는 다음과 같다.
* 김종필의 메모
청구권은 3억 달러(무상 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장기 저리 차관도 3억 달러로 한다.
한국의 대일 무역 청산 계정 4,600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하지 않는다.
* 오히라의 메모
청구권은 3억 달러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무역 계정 4,600만 달러는 청구권 3억 달러에 포함한다.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 합의 사항[19]
무상공여로 3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한을 단축할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서 대일 부채로 남은 4,573만 달러는 3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대외 협력 기금 차관으로 2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할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푼 5리로 한다(정부 차관)
수출입은행 조건 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 차관)

이 김 - 오히라 메모를 독도 밀약과도 연결시키는 세간의 시선이 있다. 소문의 독도 밀약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사람이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이었으며, 김 - 오히라 협상을 위해 방일한 JP에게 이케다 총리 또는 오히라 외상이 독도 문제를 언급한 정황이 포착되기 때문.

조선일보에서 파악-추정한 독도 언급 경로는 다음과 같다.
JP가 한일회담의 청구권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으로 파견됨.
이케다 총리 또는 오히라 외무대신(기록마다 다르게 나옴)이 예상치 못했던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옴.
→ JP는 이 문제에 대해 ‘절대 한일회담의 내용으로 포함되어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 일본 측의 제안을 거절
→ 그리고 ‘한일회담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느니 차라리 독도를 폭파해 버리자’는 극언(極言)이 나옴.[20]
→ JP의 진의가 ‘논의 불가’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 측은 일단 독도 문제에 대한 언급을 중단.
- 출처[21]

3.3. 철새 논란

군사정권의 핵심으로 권력을 누리다, 민주화 운동 세력과 연대하여 5년의 공동정권, 5년의 연합 형태로 권력 중앙 자리를 지켰다는 점에서, 기존의 박정희 전 대통령 지지세력으로 부터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외에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 친박 성향의 보수세력에게 배신자라는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공식 석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구설이 나올만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지만, 그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언론인들과 대화하는 자리라 녹음채증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지했을 법 한데도, 혹평을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

다만, 윗 문단과 연결된 기사 내용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도,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라는 대목을 통해 '손을 내밀면 도와주겠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22] 만년에 뇌졸중 고비를 겨우 넘긴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와중에도 일정한 정치영향력을 행사하던 JP의 말 한 마디는, 2016년 당시에도 여전히 파급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3.4. 부정축재

부정축재로 216억 4,648만원을 몰수당하기도 했는데 당시 이를 진행시킨 것이 전두환 정부였다.

이후 김종필은 전두환 본인이야말로 1조원에 가까운 돈을 부정축재하다가 이후 강제 반납하는 와중에도 아직도 수천억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크게 분개하였다. 김종필이 “미운 사람” 지목했던 전두환·노태우 근황은

3.5. 지역 감정 부추기기 논란

충청 지역 정가의 맹주로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개각을 통해 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23] 나온 상황을 " 토사구팽", "충청도 핫바지"라는 단어로 지역 사회의 단결을 도모해 1995년 제1회 전국지방선거에서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강원도,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24] 자민련의 돌풍을 이끌어내며 정면 돌파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지역 감정을 적극 부추겨서 특정 지역 편향으로 흐르는 부정적인 정치에 기여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1] (명사) 받고자 하는 대우를 받지 못할 때 내는 심술. 이 이름을 가진 록밴드도 있다. [2] 1963년 공화당 창당 자금과 관련된 4대 의혹 사건과 연관되어 일본으로 외유를 떠나면서 했던 말. [3]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라는 뜻으로, 원래는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왕소군의 슬픈 처지를 읊은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김종필이 이 말을 한 것은 이른바 서울의 봄 때로, 온 나라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끓고 있을 때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고자 준동하던 현실을 절묘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1995년 11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불똥이 김대중 등 야권(野圈) 주요인사로 번지고 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거자금(대선) 내역도 공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했던 말. 당시 여권인 신한국당의 대선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서는 살아있는 사전인 자신이 있다는 압박이기도 하다. [5] 2000년 총선 패배로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했을 때 "JP는 서산의 지는 해"라는 이인제의 공격을 받아치면서 했던 말. [6] 일례로 서울대에서 강연하면서 "훗날에는 이 대학 교정이 자동차로 가득차게 될 것''이라 발언하자, 대부분 도보나 버스로 통학하던 대학생들이 박장대소했다는 일화가 있다. [7] 그러나 중풍( 뇌졸중)으로 투병 생활을 한 말년에는 이러한 멋드러진 언어 구사력이 매우 적게 비춰졌다. 2017년 5월, 19대 대선에 출마한 홍준표 후보와 청구동 자택에서 접견하던 당시 문재인 후보에 대해 육두문자에 가까운 노골적인 말로 혹평한 것. 이러한 이전같지 않은 모습이 옛 정치인의 한계를 보인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뇌졸중 후유증을 겪는 환자들은 뇌세포 파괴 및 변형으로 인해 언어구사력, 기억력이 저하되거나 성격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김종필답지 않게 1가지 뜻(방향)으로만 해석될 문구를 거칠게 말하는 모습은 이런 경우에 해당될 가능성이 더 크다. 실제로 중풍 투병생활을 한 후로는 기억력이 급격히 감퇴해, 지난날 읽은 책들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8] 말년에 보좌관과 함께 구술 작업을 거쳐, 김종필 사후 책으로 출간되었다. [9] 북한 방문단의 증언에 자극을 받은 우리 정부에서, 당시 작곡가로 유명했던 최영섭(< 그리운 금강산> 작곡)을 섭외하여, 곡을 붙인 해학적인 창극. 이 무렵 유명했던 연극인이 추상미의 부친 추송웅이다. 추송웅이 공연한 <배비장전>은 지금도 견줄만한 공연이 드물다 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고. [10] 인 미국에 아쉬운 얘기를 하러 가는 자리이다. [11] 김종필총리 아시아통화기금 제안 [12] AMF 아시아통화기금 계획 사실상 백지화 [13] 통일뒤 땅 소유권 북 주민 우선 [14] 다만, 실제 개표에서는 어찌된 일인지 전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와서 김종필은 YS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밝히고 해명해야 했다. [15] 물론 문재인 전 비서실장 같은 법조인 출신의 청와대 참모들이 " 특검을 도입하면, 수사 범위를 특정한 사안으로 한정지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미세 조정된 특검안을 마련해, ( 국민의 정부 대북정책 전반을 들쑤시며 뒤집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던 점도 있지만, 이 특검안이 관철되도록 중재한 JP의 공로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16] 결혼 이후 '김 리디아'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17]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 →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한마디만 더(One more word)>의 한 구절. [18] 63년 겨울, 보리밭에 뿌릴 비료 500만달러어치를 일본에서 외상으로 들여오기도 힘들 정도로 당시 ‘외자’가 절실했다고 한다. [19] 양국 수뇌에게 건의할 사항 [20] 조선일보에서는 JP가 말했다고 파악하고 있으며, 오마이뉴스에서는 일본측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파악하였다. [21] JP의 당시 행적을 옹호하는 기사라는 점을 감안해서 볼 것. [22] 한창 활동하던 시절의 JP의 정치 선택을 뒷받침하는 비유, 고사성어, 시 활용도 이런 성격을 띠는 경우가 있었다. [23] 김영삼은 김종필을 아예 당에서 쫒아낼 생각까지 한건 아니였고 2선 퇴진 정도를 원했다고 하는데 민주계의 압박에 김종필은 김영삼에게 탈당을 통보했다. 이후 JP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나는 여태껏 대통령을 성심성의껏 모셔왔다. 그런데 지난 몇 달간을 얼굴없는 세력을 동원해서 나를 몽둥이질하고, 방망이질하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라고 분통을 터뜨리고 "정치 생명이 끝난 것 아니냐"는 지적에 "터무니없는 소리, 내가 70 평생을 헛되게 산게 아니다."라고 일축한 후 자민련 돌풍과 DJP연합을 통해 여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을 뭉개고 김대중을 권좌에 올리며 김영삼에게 제대로 복수했다. 김영삼 정부는 IMF 외환위기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면서 몰락했는데 훗날 김영삼은 본인의 자서전에 "JP의 탈당은 내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썼다. 실제로 김영삼은 김종필을 압박해서 쫒아낸 것을 무척 후회했으며 참모들에게 "JP를 다시 불러올 수만 있다면 좋겠구나."라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24] 박정희 정부 시절 인사들이 당시 김종필의 자민련에 많이 합류한 상태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