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동계 친김영삼계 | YS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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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990> 형성 | <colbgcolor=#ffffff,#1f2023> 1971년 | |
해체 | 1998년[1] | |
수장 | 김영삼 | |
정치적 이념 |
자유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 반공주의 선명야당론(1971년~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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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이념 | 신자유주의 | |
주요 정치인 |
김동영 최형우 강삼재 서석재 김덕룡 김광일 박관용 김무성 정병국 이성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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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삼 前 대통령의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민주당계 정당에서 시작하였으나 3당 합당 이후 한국 보수의 온건~중도 노선의 시초격 계파가 되었다. 2000년대에는 YS 키즈 중 하나인 이명박을 중심으로 한 친이가 상도동계를 사실상 계승했고, 2010년대 들어 친이가 쇠락해 비박으로 전환된 후로는 한동안 친박 루트를 탔지만 사이가 틀어져 비박의 한 축인 친무와 연합했다.국민의힘 상임고문으로 김수한, 박관용, 목요상, 김무성이 있다.
2. 명칭의 유래
김영삼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거주하여 1980년대의 언론들은 김영삼의 측근들에게 상도동계라는 표현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반대로 김영삼의 라이벌이자 동지인 김대중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에 거주하여 김대중의 측근들은 언론에서 동교동계로 불렀다.3. 활동
이들은 군사정권 시기에 일치단결해서 신민당과 통일민주당에서 김영삼의 집권과 민주화를 위해 뛰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여당으로 변신한 이후에도 이들은 변함없이 김영삼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해서, 김영삼은 기어코 민주자유당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한다.이후 이들은 신한국당의 주류가 되었고, 그 이후 열린우리당에 참여하며 민주당계 정당으로 전향한 김영춘, 박재호 정도를 제외하면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거쳐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계보를 지키고 있다. 다만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외환 위기로 한국갤럽 기준 5%라는 초유의 지지율[3]을 찍으면서 퇴임한 후, 세월이 오래 흐르면서 더 이상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는 파벌은 아니다. 다들 알아서 각개약진.[4]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에도 대다수는 박근혜를 지지했으나, 김덕룡, 김정수, 김현철, 문정수 등 일부 정치인은 문재인을 지지하였다.
4. 구성
상도동계의 수장은 김영삼이고 '좌동영 우형우'로 불린 김동영과 최형우가 서열 2위였다.[5] 그 다음으로 서석재, 김광일, 박관용, 김수한, 김덕룡, 김명윤, 신상우, 박용만 등이 원로였다. 박종웅, 서청원, 강삼재, 김무성의 경우 상도동계에서 연령이 낮은 세대에 속하고 막내는 김영춘 정도라고 볼 수 있다.상도동계의 중진으로 분류되는 이들을 보면 김동영은 거창군, 최형우는 울산광역시, 서석재는 창원시로, 박관용, 김광일은 부산광역시로 군사정권 시기부터 부울경을 본거지로 활발히 활동하고, 제5공화국 시기에 가면 상도동계가 야당에서 부울경을 사실상 독점하게 된다. 반대로 호남은 동교동계가 독점한다.
문제는 3당 합당으로 상도동계가 보수 정당에 편입되면서 부울경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사실상 사라지는 상황이 초래된다.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은 애초에 상도동계가 아니다. 이기택은 1960년대부터 야당에서 활동한 중진급으로 김영삼의 수하는 아니었고(수평적 관계), 노무현은 상도동계라기보다는 YS가 영입한 재야인사에 가까웠다. 김정길도 야당 시절부터 상도동계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6] 전라북도에서 태어나서 김영삼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김덕룡과 전라남도에서 태어난 이성헌만 호남 출신이다.
상도동계는 3당 합당 이후 거의 대부분이 민주자유당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김영삼과 친분이 생겨 14대 대선의 민자당 경선 때 김영삼을 지지한 일부 민정계, 공화계 정치인들과 신한국당 잔류파 민정계, 공화계 정치인들을 상도동계의 별칭인 민주계에서 따와 신민주계라고 하기도 한다.
신박과 비슷한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정원식, 김형오, 강재섭, 이상득[7], 최병렬, 박희태, 박창달, 김기춘, 김윤환 등이 속했다. 상도동계의 첫 단독 정당이 통일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김영삼 대선 경선 승리의 '킹메이커' 역할을 한 셈.[8]
이름을 올리는 민정/공화계 출신 신민주계 의원으로는 문민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황인성, 양정규, 변정일, 현경대, 하순봉, 김영일, 문민정부에서 정무제1장관을 역임한 김영구, 신경식, 박우병, 김기배, 문민정부에서 재정경제원장관을 역임한 나웅배, 이자헌, 박명환, 박주천, 유흥수, 김진재, 남평우, 이한동, 김종호,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이해구, 서정화, 이세기, 이웅희, 정동성, 김인영, 오세응, 이만섭, 김영광, 문민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한 서상목, 이성호, 전용원, 곽정출, 이승윤, 이상희, 정창화, 박세직, 권익현, 이춘구, 서정화, 심정구, 김중위, 이민섭, 김일윤, 문민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과 재정경제원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한승수, 문민정부에서 관선 강원도지사를 역임한 함종한, 김종하, 나오연, 김태호, 이강두, 강용식,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한 김용태, 문민정부에서 재정경제원장관을 역임한 강경식, 정재철, 이택석, 전석홍, 최재구, 장영철, 박명근, 박범진, 정영훈, 문민정부에서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정시채, 조영장, 양창식,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장관을 역임한 김한규, 남재두, 이영문,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차관을 역임한 윤한도, 이상배, 김명섭, 이재환, 이상재, 박경석, 김효영, 지연태, 이응선, 최돈웅, 최각규, 강성재, 권정달, 이강희, 김길홍, 조진형, 성무용, 이환의, 문민정부에서 환경부장관을 역임한 강현욱, 고명승, 박시균, 유용태, 김식, 조남조, 민태구, 김용호, 이진삼, 손주환, 김영진, 박성범, 이윤성, 윤원중, 문민정부에서 총무처장관을 지낸 최창윤, 황윤기, 이국헌, 이상현, 박승웅, 김허남, 김사성, 구본태, 이사철 등이 있다.[9][10]
한편 상도동 직계로 분류되진 않지만 15대 총선을 기해 김영삼이 정계로 끌어들이며 그의 밑으로 들어와 정치인으로 입문한 사람들은 YS키즈 라고 불린다. 손학규, 이재오, 김문수, 차명진, 이우재, 이회창, 이명박, 홍준표, 안상수(창원), 이방호, 정의화, 황우여, 정태윤, 강인섭, 현승일, 심재철, 박형준, 이성권, 안상수(인천), 이병석, 임인배, 박진, 권철현, 맹형규, 김혁규, 김선동, 김범준, 김영선, 김태호 등이 대표적이다.[11]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도동계 직계와는 달리 김영삼의 당에 그대로 남았던 사람이 대부분이라 대다수는 보수정당에 있었다.
원외로 확대하면 방송계에서는 이명박 정부 방송통신위원장이었던 최시중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되며 이득렬 전 MBC 사장, 홍두표 전 KBS 사장도 한 때 범신민주계로 분류되기도 한다. 한국갤럽 창업주인 박무익도 범민주계로 볼 수 있고, 현재 리얼미터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는 이택수도 신한국당에 몸을 담고 있었으므로 범민주계라고 볼 수 있다. 한샘학원 설립자인 서한샘 전 의원도 범상도동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이헌 전 의원도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 백영기 전 한국방송영상 사장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재계에서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현대백화점의 정장현 전 의원이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정형근 전 의원도 범신민주계로 분류되며, 그 외 원내의 노승우 전 의원, 허재홍 전 의원, 백남치 전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김봉조 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김동욱 전 국회 재정경제위원장, 정재문 전 의원, 김찬우 전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홍재형 전 국회부의장, 김철 전 의원, 조웅규 전 의원, 송두호 전 의원, 조홍래 전 정무수석, 김남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문준식 전 의원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윤석민 전 의원, 김찬진 전 의원, 이종률 전 국회사무총장, 이동호 전 내무부장관, 이호정 전 의원, 이종남 전 의원, 김진만 전 의원,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 염홍철 전 대전광역시장, 이영창 전 의원, 최문휴 전 국회도서관장, 황용하 전 경찰청장, 김효은 전 경찰청장, 김창근 전 교통부장관 역시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
문민정부 시대 국무위원 중에서는 이영덕 전 국무총리, 이홍구 전 국무총리,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병태 전 국방부장관, 이경식 전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 정재석 전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 유종하 전 외무부장관, 권오기 전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후에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지내는 김인호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박재윤 전 통상산업부 장관, 김두희 전 법무부장관, 안우만 전 법무부장관, 김종구 전 법무부장관, 최상엽 전 법무부장관, 김동진 전 국방부장관, 조해녕 전 내무부장관이 범 신민주계로 분류된다고 볼 수 있다.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 강운태 전 내무부장관, 최동규 전 한국수자원공사 이사장, 권영해, 김덕 등 전 국가안전기획부장도 포함된다. 박상범 전 국가보훈처장 역시 범신민주계로 분류된다. 그 외에는 오명 KAIST 이사장,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 박일용[12] 전 경찰청장과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강만수 전 재정경제원차관이 있으며, 특이사항으로 배우 출신의 강신성일 전 의원도 김영삼에게 영입되었다. 김광석 전 대통령경호실장과 박세일 전 사회수석비서관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전병민 전 청와대 정책수석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책사이므로 상도동계로 분류된다.
윤석열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을 역임했던 국민의힘 박진 전 국회의원도 김영삼 정부 시절에 대통령비서실 비서관을 지냈으므로 범민주계로 볼 수 있으며, 이명박 정부에서 통계청장과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던 윤석열 정부의 김대기 전 대통령비서실장 또한 김영삼 정부 시절에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을 지냈으므로 범민주계로 볼 수 있다.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과 조만후 전 정무제1차관, 이경재 전 공보처 차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금융정책실장 역시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그 외에도 김길환 전 의원, 신우재 전 청와대 공보수석, 김충남 전 공보2비서관, 현재 국민의힘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는 김희곤 전 청와대 행정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정책실장을 역임하고 한나라당 -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지내는 윤진식 전 대통령비서실 조세금융비서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내는 김중수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위원장을 역임하는 김석동 전 재정경제원 금융실명제대책반장,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장관을 역임하는 박재완 전 대통령비서실 서기관,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하는 박태호 전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실 파견, 후에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연설기록비서관과 윤석열 정부에서 국민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하는 정용화 전 대통령 자문 21세기 위원회 상근 연구원도 범상도동계로 분류된다.
검찰 쪽에서는 후에 신한국당 -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내는 김도언 전 검찰총장[13]이 대표적인 케이스고, 후에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국책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박종철 전 검찰총장, 김기수 전 검찰총장, 정경식[14] 전 헌법재판관, 후에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내는 최병국 전 대검찰청 중수부장, 안강민 전 대검찰청 형사부장, 최환 전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정진규 전 법무연수원장, 김재기 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이 범신민주계, 범상도동계로 분류되고 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될 당시에 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이명박 정부 초대 민정수석 이종찬과 송찬엽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도 범민주계로 볼 수 있다. 김영삼 정부 시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파견되어 근무를 한 이승구 전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배재욱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도 범상도동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최재경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김영삼 정부 말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파견되어 근무했으므로 범민주계로 분류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에 법무부에서 근무한 남기춘 전 서울서부지방검찰청 검사장과 신경식 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정동기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 겸 이명박 정부 민정수석비서관, 권영세 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이자 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겸 윤석열 정부 통일부장관, 권성동 전 인천지방검찰청 특수부장 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범 민주계로 볼 수 있다.
5. 동교동계와의 관계
군사 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이후까지 정말 오랜 기간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끌던 동교동계와는 그야말로 라이벌 관계였다. 두 세력은 독재정권 시기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나,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양김씨가 대선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6. 주요 인사
- 강삼재
- 김광일: 부산지역 재야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재야와의 협력을 목적으로 김영삼이 직접 영입하여 상도동계의 일원이 되었다.[15] 통일민주당 시절 기획조정실장, 문민정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통령비서실장, 대통령정치특보를 지냈다. YS와는 학연 지연 혈연 종교연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둘 다 경남고와 서울대 동문, 부산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김녕 김씨 종친이고 보수교단의 개신교 장로였다.
- 김기수
- 김덕룡: 문민정부 시기 정무제1장관을 두 번 역임. 2004년 이래로 민추협 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가 생기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 김동영: 김영삼의 오른팔로 아래의 최형우와 함께 좌동영, 우형우로 불렸다. 1991년 간암으로 작고. 정무제1장관을 노태우 정부 시기에 지냈다.[16] 김동영 장관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서 장관직은 최형우 의원이 승계.
- 김명윤
- 김무성
- 김봉조
- 김수한
- 김영춘
- 김우석
- 김재광
- 김정수
- 노병구
- 목요상
- 문정수
- 박관용: 제16대 국회 후반기 의장. 문민정부 시절에는 대통령비서실장과 정치특보를 지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발의될 당시 국회의장이었다.
- 박권흠
- 박재호
- 박용만
- 박종웅: 3선 국회의원으로, 16대 국회 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역임. 김영삼 대통령 퇴임 이후에는 YS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 서석재: 前 총무처 장관. YS가 통일민주당 총재를 지내던 시절에는 사무총장을 지내기도 했고, 문민정부 시기에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전직 대통령 4000억 비자금설을 언론에 흘렸고, 민정계의 반발 끝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 서청원: 상도동계 출신 친박 맏형[17]이란 경력을 지내고 있는 인물. 문민정부 시절에 김덕룡의 후임 정무제1장관이었고, 이후 2002년에 한나라당 대표, 2008~2012년에 친박연대 대표를 지냈다. 20대 국회에서 최다선(8선) 의원.
- 신상우
- 심완구
- 안경률
- 오경의
- 유성환
- 이성헌
- 이원종
- 이인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3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으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가 되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신당으로 민주계의 지지를 받았다. 사실 입문으로만 따지자면 상도동계지만 그의 당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동교동계와 청구동계와도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 이재근
- 이종혁
- 이진복
- 이채익
- 정병국: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며, 민주화 운동을 했고, 그로 인한 고문을 받았을 때 상도동계의 지원을 받았다. 지금은 친이 - 친유로 분류된다.
- 정재문
- 조만후
- 조윤형: 한때 상도동계의 일원이었으나, 유신 이후 사이가 멀어졌다. 김영삼이 1960년 대선에서 유석청년동지회를 만들기도 했고, 유석 조병옥 박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하기도 했다. 김영삼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
- 최기선
- 최형우: 정무제1장관을 노태우 정부 시기에 지냈다. 김동영 장관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서 장관직은 최형우 의원이 승계. 이후 문민정부에서 내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1997년에 중풍으로 쓰러졌고, 이후 정계를 떠났다.
- 홍인길
- 황낙주
- 황병태
7. 관련 문서
- 김영삼
- 동교동계
- 친이 - 김영삼이 이명박을 정치인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며, 이명박을 밀어준 사람이기도 한데다 김덕룡[18], 박종웅, 김현철 등 이명박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김영삼 세력이기도 했으며, 17대 대선 당시에는 대부분의 상도동계 직계들[19]이 이명박을 지지했다.[20] # 김영삼도 직접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을 정도로 상당히 연관이 깊은 사이다.
- 친유 - 유승민의 경우 상도동계와 갈등이 있었던 유수호의 아들이었고, 원조 친박이었던 정치인이지만 이회창으로부터 정치적 훈련을 받아서 간접적이나마 연관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정병국과 같은 상도동계 - 친이 인사들이 유입되면서 상도동계와 정치색이 비슷해진 모습을 보인다.
- 친윤 - 워낙 시간 간격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직접적인 접점은 덜하지만, 윤석열도 YS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바 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도 2022년 대선에선 윤석열 지지 선언을 했으며, 김현철의 아들이자 김영삼의 손자인 김인규 또한 친윤 중진 권영세 통일부장관의 국회의원실 비서로 일했다.[21] 또 상도동계 소장파인 이진복도 친윤 중진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특히 이진복은 윤석열 정부 정무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 친노 - 김광일 대통령비서실장이 김영삼에게 노무현을 추천하여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친노에서 이어지는 친문을 지지하는 인사들도 일부 있었다.[22] 그래서 친노에서 이어지는 친문을 지지하는 상도동계 인사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의 정책노선에 동의하지 않아 문재인을 지지한 상도동계 인사들은 입당은 하지 않았다.[23]
- 친박 - YS가 박근혜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측근은 “YS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저항해 싸웠기 때문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전한 YS의 발언 가운데는 “야당 총재라면 몰라도…”라는 표현이 있다.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감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 그러다가 2012년 박근혜가 대선 후보가 된 이후 상도동계 민주동지회 김봉조회장, 김수한 국회의장과 보수정당 정치인으로서 박근혜를 지지했다. #[24] 박근혜도 당선된 다음날 20일 감사 전화를 했다. # 서청원처럼 친박에 편입된 케이스도 일부 있었다.
[1]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신한국당에서
이회창이 당권을 장악하여
김영삼이 탈당하고 당명이
한나라당으로 바뀌면서
이회창계,
이인제계,
친이,
친박,
손학규계 등으로 흩어졌다.
[2]
친박으로 전향함에 따라 상도동계에서 버림받았다.
[3]
훗날인 2016년 박근혜가 4%를 찍고
탄핵되기 전까진 역대 최악의 지지율이었다.
[4]
사실 2010년 이후에도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옛 상도동계 인사도 거의 없다. 이건 오랜 라이벌이었던 동교동계도 마찬가지. 각자 보스도 이미 정치를 떠났고, 다들 나이도 먹었고. 이제는 가끔가다 모여서 친목회나 하는 정도로 보면 된다. 참고로 상도동계에서 나이가 적은 편인 김무성이 2017년에 66세로 새누리당 대표였으며,
정병국 역시 바른정당 1대 대표였다.
[5]
김동영과 최형우 두 사람 모두
3당 합당 후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제1장관을 역임했다. 김동영이 병으로 사임하자 최형우가 후임으로 임명됐다.
[6]
1990년 3당 합당 이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부산, 경남 지역에서 민주당계 정당 후보들의 득표력은 잘해야 10%대 초중반이었다.(참고로 부산 인구의 대략 10% 정도가 호남 출신으로 추정되며, 김대중의 1987년 대선 부산 지역 득표율이 15%였다.) 2000년대 이후 30~40%대까지 올라온 것은 바로 부산지역 486들과 시민운동가들이
친노 간판을 쓴 것과 민주노총과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노동운동 덕분에 진보정당/민주당계 정당으로 노동자 계급표가 결집하면서부터다. 그리고 민주당계 정당이 영남 공략을 위해서 나름 공을 들인 점과 한나라당이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점도 있었다.
[7]
이명박의 둘째 형 이상득이 맞다.
[8]
반면
김복동,
박철언,
박태준 등은 김영삼을 직접 밀지 않거나 심지어 비토하다가
통일국민당,
자유민주연합으로 향한다. 김종필은 초반에
민주자유당에서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김영삼과 사이가 틀어져 자민련을 창당해 나갔다. 김복동의 경우
노태우의 처남이고
하나회 소속이었지만
12.12 군사반란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김영삼은 그를 나쁘지 않게 봤으나 본인이 YS를 꺼려 통일국민당과 신민당을 거쳐 자민련으로 향했다. 반면 박철언과 박태준은 김영삼과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외에도
새한국당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로 간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경우도 있다.
[9]
여기서 경남 거제 출신의 김기춘을 제외하면 핵심은 대부분
TK 출신들이다. 김기춘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들은 92년 대선 기간 김영삼을 지지하면서 "
우리가 남이가"식의
영남 지역주의, 패권주의 의식을 대놓고 보여주었다. 물론 하순봉, 김영일, 신경식, 유흥수, 김진재, 이상희, 권익현, 강경식, 이강두, 나오연, 곽정출 같이 PK 출신도 제법 있었다.
[10]
하나회 숙청으로 유명한 김영삼이지만 살아남은 이들도 있다. 권익현, 이춘구, 박세직, 고명승은 하나회 멤버였으며, 아예 고명승은 12.12 가담자였음에도 면죄받았다. 이상재는 언론통폐합과 K공작을 주도했던 보안사 출신의 민정계 실세였으며, 권정달 또한 신군부에 속했다. 강용식, 박성범은 땡전뉴스를 제작했다. 이사철도 군사정권 시절의 공안검사 출신이었다. 육군 제2작전사령관 출신인
박세환 전 재향군인회장도 범 신민주계로 분류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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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회창은 YS가 차기로 키우려고 했는지 국무총리까지 시켰으나, YS 정권 말 IMF가 터지자 YS 뒤통수를 치고 YS 인형 화형식까지 저지르는 등 사이가 극악이 되어버린다. 그래도 YS 사후 이회창이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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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복집 사건 당시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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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검찰총장 중 검찰총장에서 퇴임한 후 특정 정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까지 된 경우는 김도언이 유일하다.
대통령까지 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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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복집 사건 당시
부산지검장으로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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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영입제안을 받고서 당시 김광일이 내건 조건이 자신과 함께 재야에서 활동하던
노무현과
김재규의 총선공천보장이었다. 김영삼이 이 제안을 수락하면서 김광일과 노무현이 1988년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당선된다.
김재규는 거절하고
이대우가 공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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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이후 노태우가 김영삼을 여당에 묶어놓기 위해 상도동계 정치인들을 대거 입각시켰는데 그 케이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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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당시 친박 좌장은
최경환이었다. 물론 서청원도 맏형격으로 좌장급 위상을 자랑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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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김덕룡의 경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 최시중과 더불어 친이 6인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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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적으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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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동계의 수장인 김영삼이 처음부터 이명박 지지 선언을 했던 만큼 이 영향도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당시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에서 일부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동한 인사들을 빼고는 대부분의 상도동계들이 보수정당에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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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엔
정병국 의원 밑에서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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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둘의 사이는
3당합당으로 나빴고,
통일민주당 시절에도 노무현은 비서출신은 아니고 의원직 사퇴서를 쓰는 등 비주류였다.
3당합당 반대할 때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노무현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캠프에 합류했고,
국민의 정부에서
새천년민주당 부총재와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다. 대통령재임 중에도
김대중을 청와대에 불러 깍듯이 예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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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김현철은 문재인을 지지했으나 이후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의힘으로 복당하면서
윤석열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