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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정

파일:남원정.png
남경필[1] 원희룡[2] 정병국[3]
파일:남원정 (1).jpg
2004년, 한나라당 시절의 남원정.

1. 개요2. 역사3. 결말4. 관련 문서5. 둘러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계 내 대표적 개혁, 쇄신파인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의 3인을 일컫는 단어이다.

각각 1965년 1월 20일생, 1964년 2월 14일생, 1958년 2월 10일생. 나이 순으로 따지면 역순으로 가야겠지만, 언론에서 이 표현을 쓰면서 사실상 대명사로 굳혀졌다.[4]

2. 역사

1999년, 한나라당의 당내 혁신 차원에서 이회창 총재의 이른바 '젊은 피 수혈'로 들어온 이들[5]로, 그 전엔 남경필 이회창 후보의 대변인, 원희룡 변호사, 정병국 문민정부 청와대 제2부속실장 출신이였다.

1998년 재보궐선거로 먼저 정치에 들어온 남경필과 달리 다른 둘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들어왔는데, 남경필도 사실상 이때부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남원정의 출발은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로 대부분 여겨진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에 성공한 세 사람은, 김부겸, 권영진[6]과 함께 젊은 피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개혁적이고 소신있는 언행들로 유명해졌는데,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 줄여서 미래연대의 주축 멤버로서 미래연대가 생기고 부터 보수 일색을 넘어 수꼴이라는 비아냥까지 듣던 한나라당 내부에 이 때부터 젊은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에는 당의 강령에 따라 찬성했다.

이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병국, 남경필이 강하게 이명박을 지지하던 것과 달리 원희룡은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3등으로 낙선한다.[7]

사실상 이 당시부터 3명은 각자도생을 걷게 된다.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된 원희룡은 서울 시장 경선에서 나경원, 오세훈에게 밀리며 낙선하고 총선 불출마를 건 당 대표 선거에서 4등으로 떨어지며 최고위원이 되지만 이듬해 중앙 선거권을 떠나게 된다.

반면 대표적인 친이 정치인이 된 정병국[8]이 2010년 초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제18대 국회 후반기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에 선출된다, 2011년 1월부터 같은 해 9월까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역임하였고, 재임 중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국보급 문화재인 외규장각 의궤를 환수받았고 한국문화원을 설치하거나 K-POP 산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양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한다.

강하게 이명박을 지지했던 정병국과 달리 남경필은 2008년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파동때, 경찰의 폭력진압 논란에 대해서 비판하고 미국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협상할 것을 주장했었다.

그리고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이명박 정부가 잘 되려면 형까지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 곤란하다면서 이상득에게 국회의원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용보다는 '정치와 이념' 잣대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정두언, 정태근과 함께 사찰대상이 되었다는 논란에 휩싸이며 사실상 친이계를 떠난다.[9] 이후 홍준표 신임 당 대표와 함께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유승민, 정병국, 원희룡을 그 곳에서 만난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패배와 선관위의 디도스 공격 논란이 일자 유승민과 함께 지도부 사퇴를 주장해 홍준표 체제가 무너지고 박근혜 대표 체제로 전환되어 비대위에 들어간다.

이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남경필 경기도지사에,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에 각각 당선된다. 또한 정병국은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게 된다. 이 시기까지는 광역자치단체장 중에서도 서울시장과 함께 투톱인 경기도지사가 된 남경필이 남원정 중 정치인으로서 가장 앞서나갔다고 볼 수 있다.

남경필과 원희룡은 이 선거를 계기로 50대 초반의 젊은 광역자치단체장으로서 대권주자로 분류되게 된다. 하지만 남경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 아들의 군대 내 폭행 사건과 마약 투여 사건으로 대권주자로서의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2016년 들어서 남원정은 배신의 정치라 불리며 찍힌 유승민, 이혜훈, 유의동, 새롭게 개혁적 성향을 보이던 김성태, 장제원, 지상욱, 하태경과 함께 쇄신파라 불리게 되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며 개혁파, 소장파들과 새누리당을 탈당, 바른정당을 창당한다. 남경필의 경우 바른정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서 유승민과 붙었으나, 큰 득표율 차로 낙선하고 만다.

하지만 바른정당이 지지율 부진을 겪고 바른정당 탈당사태가 반복되며 결국 남경필은 탈당하여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 경기도지사 재선[10]을 노렸고, 원희룡의 경우 바른정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도전한다.[11]

반대로 정병국은 바른정당에 남으며 바른미래당에도 잔류함으로서 남원정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미래통합당 창당에 합류하면서 재회했다.

3. 결말

자유한국당에 복당해 경기도지사 재선을 노리던 남경필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패해 재선에 실패했으며, 2019년 3월 30일에 정계 은퇴 선언을 하며 정치계를 떠났다. 2023년 현재는 스타트업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12]

유승민을 따라 바른정당에 남은 정병국은 이후 바른정당 국민의당과 통합한 후신인 바른미래당에까지 잔류했다. 그러나 바른미래당 내부에서 친유 출신이 호남계와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바른미래당을 탈당했다. 바른미래당 탈당 후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했고, 새로운보수당 자유한국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같이 미래통합당으로 합당했다.

그러나 황교안, 친박, 친황 황교안의 대선가도에 방해가 되는 정병국을 컷오프하고 그 자리 친박 김선교를 공천하였다. 그런데 역시 공천 과정에서 컷오프당해 이에 반발하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태호, 홍준표와 달리 정병국은 불출마를 선언했고, 미래통합당에 남아서 유승민과 같이 수도권 지역 후보, 청년정치학교 출신 등 청년정치인들의 지원유세를 하기로 결정했다.[13] 이후 정병국이 컷오프 된 자리를 차지한 친박, 친황 정치인인 김선교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연루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결국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김선교는 피선거권 상실이 되지 않은 관계로 22대 총선에서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병국은 청년정치학교의 교장직과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으면서 청년 정치인들과 후학을 양성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이후에는 총선 부정선거 음모론을 부르짖던 친황이 몰락했고 정병국은 국민의힘 중앙위 위원장을 맡는 등 당내 영향력이 건재했다. 물론 이준석과의 갈등 이후 사실상 교체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케냐 특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정병국이 친윤이라서기보다는 전직 장관이라는 이유로 특사 임명을 받았다.

지금도 정병국 친유 정치인으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징계 사건 - 이준석 추가 징계 사건 윤석열 미국 순방 중 욕설 논란에 대해서는 윤석열, 친윤, 윤핵관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고 이준석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밝히면서 비윤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2023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간간이 정치 평론을 이어나가고 있다.

바른미래당을 탈당한 원희룡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뒤 제주도지사 재선에 성공했고, 재선 이후 바른미래당이나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지 않고 계속 무소속으로 남아 있다가, 2020년 2월 통합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에 합류, 최고위원을 맡게 된다.

이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참패하며 최고위원직은 내려놓게 되었지만 제주도지사, 그리고 대권주자로서 여전히 정치 인생을 이어가고 있다. 20대 대선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나름대로 존재감을 보여줬으며 윤석열 정부에서는 국토교통부장관 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22대 총선에서는 계양구 을에 출마하여 이재명 후보와 맞붙었지만 낙선하였고, 국민의힘 4차 전당대회에 친윤 후보로 나섰지만 한동훈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며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남원정 모두 탈당, 복당, 합당을 거치며 모두 다른 소속으로 나뉘어졌다가 현재는 모두 국민의힘 소속이 되었다.

이재명과 직접 맞붙은 적이 없는 정병국을 제외하면, 남경필·원희룡은 이재명을 상대로 패전을 기록했다는 공통점도 있다.[14]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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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민의힘 소속. [2] 국민의힘 소속. [3] 국민의힘 소속. [4] 이에 대해 이준석은 아마 어감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았는가라는 추측을 한 바 있다. 잘 보면 가나다순이긴 하다. [5] 친박으로 분류되었던 유승민 또한 이러한 의도로 들어온 것이다. [6] 단, 권영진은 나중에 합류했다. [7] 4등은 홍준표였다. [8] 사실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 가장 많았던 상도동계에서는 서청원(대표적인 친박), 김무성(후에 범친이성향 비박으로 이탈), 강삼재(이회창 지지)나 민주당계 정당으로 이탈한 김영춘, 박재호 등의 일부를 빼고는 거의가 이명박을 지지했으며, 상도동계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김덕룡은 아예 이재오, 이상득, 최시중, 박희태와 친이 핵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상도동계 정병국 친이라는 건 딱히 이상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9] 이 때, 이상득 남경필, 정두언, 정태근에게 '참 나쁜 사람들'이라는 격한 표현을 사용했고, 남경필은 이에 반발해 사찰 의혹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10] 결과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1] 결과는 당선되었다. [12] 다만 공식적으로 은퇴 의사를 밝힌 것과는 별개로 자유한국당을 탈당하지는 않았다. 이후 야권 개편을 거쳐 미래통합당으로 개편되고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변경한 현재까지도 별다른 탈당 없이 당적 유지 중. [13] 단 본인이 컷오프 된 원인인 김선교는 지원하지 않았다. 물론 김선교 정병국 비하하면서 본인이 정병국의 지지거부를 이끌어 낸 면도 있다. [14] 심지어 둘 모두 그 패배들이 각각 자신의 정치인생 첫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