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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2:11:13

헤이세이 연구회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D7003A><tablebgcolor=#D7003A> 파일:자유민주당(일본) 흰색 로고.svg 자유민주당의 파벌 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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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연구회
모테기파
<colbgcolor=#D7003A> 형성 <colbgcolor=#ffffff,#1f2023> 1987년 7월 4일
전신 목요 연구회
설립자 다케시타 노보루
회장 모테기 도시미쓰
주요 정치인 모테기 도시미쓰 (회장)
누카가 후쿠시로 (최고고문 / 일시 이탈)[1]
와타나베 히로미치 (부회장)
가토 가쓰노부 (부회장)
후나다 하지메 (상임고문)
오쓰지 히데히사 (일시 이탈)[2]
신도 요시타카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2.2. 다케시타·가네마루파 시절2.3. 오부치파 시절2.4. 와타누키·누카가파 시절2.5. 모테기파 시절
3. 역대 회장 목록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파벌이다. 굉지회, 지공회, 유린회( 다니가키 그룹), 수월회( 이시바 그룹)와 함께 보수본류 파벌들 중 하나이다.

직접적인 전신은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파벌인 목요회이고[3] 보다 근본적으로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파벌에서 유래했다.

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

1970년대 초반부터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회(木曜クラブ)는 자민당 내부의 최대 파벌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비록 다나카 가쿠에이는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부패스캔들 때문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여전히 당외부에서 목요회를 움켜쥐고 막후에서 자민당과 일본정치를 움직여나갔다.[4] 이 시기에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신의 파벌지배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확실한 후계자(2인자)를 키우지도 않았고, 목요회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목요회에서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고 있던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은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85년 이들은 스터디 그룹의 개념인 창정회(創政会)를 창설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독단적인 파벌운영에 반기를 꾀하게 된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창정회의 실체를 알게 되자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자연스레 정계에서 밀려나고 목요회는 다케시타가 장악하게 된다.

1986년, 목요회를 사실상 장악하게 된 다케시타 노보루는 자신이 만들었던 공부회인 창정회를 해산하고 세력확대를 꾀한다. 이후 1987년 5월 21일,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다케시타 노보루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 파티를 열었는데, 참가자만 13,000명 정도였고 매출로는 대략 20억엔을 찍는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특히, 목요회 소속 의원 중에는 128명이 참가하여 전체 파벌의 90% 정도가 전부 출석하는 등 목요회에 대한 세력장악력을 과시했다. #

이후 목요회내 그나마 남은 대립 세력이었던 니카이도 스스무의 니카이도그룹(二階堂グループ)과 총재후보 단일화 협의를 시도했으나 결렬되고, 다케시타 노보루는 신파별 결성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1987년 7월 4일, 신파벌 경세회(経世会)[5]가 결성되면서, 해산 당시 의원 141명의 거대 파벌 목요회는 다케시타파 114명, 잔류파(니카이도그룹) 15명, 중립계의 12명으로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2.2. 다케시타·가네마루파 시절

경세회의 결성 이후, 같은 해 10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지명으로 총리에 취임하면서 다케시타 노보루는 자민당의 확실한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다케시타의 총리 취임후에 경세회의 회장은 가네마루 신이 맡게 되었다. 이 시절 경세회의 핵심 인원이었던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하시모토 류타로,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오쿠다 게이와, 오자와 이치로의 7명을 가리켜 다케시타파 칠봉행(竹下派七奉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다케시타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불명예 사퇴했을때도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 남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정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었고 당시 이를 경세회의 지배라고 불렀다. 현재 파벌 명칭이 헤이세이 연구회로 바뀌었음에도 경세회로 자주 불리는데, 이때의 영향력이 워낙 컸고 이름이 바뀐뒤에도 이때 수준의 위상을 회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총리 재임 동안 대행으로서 역할을 할 줄만 알았던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의 총리직 사퇴 이후에도 회장직을 계속 유지하자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임 총리로 결정된 우노 소스케 게이샤 스캔들로 1989년, 제15회 참원선에서 참패해 69일만에 사퇴하자, 후임으로 우노 집행부 하에서 간사장을 맡았던 경세회 소속 하시모토 류타로를 추대하려고 했지만, 오자와 이치로가 하시모토의 여성 스캔들 문제를 발견해 이를 단념시킨다. 결국 1989년 총재선에서 가이후 도시키가 총재 겸 총리로 당선되어 오자와는 가네마루 신의 지원 하에 최연소 간사장을 맡게 되고 하시모토 류타로 대장대신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경세회 내에서 세력 다툼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두고 일룡전쟁(一龍戦争)[6]라 불렀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까웠고, 오자와 이치로는 가네마루 신과 가까웠다. 그래서 이를 두고, 다케시타와 가네마루의 대리전이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199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당 본부가 공인한 후보가 도쿄도련이 지원하던 후보에게 패하자 오자와 이치로는 책임지고 간사장직에서 사임했다. 그런데 가네마루 회장이 자민당 간사장을 퇴임한 오자와 이치로를 회장 대행에 맡겨 일본 정치의 막후 실세로 군림하게 되자 다케시타의 측근 정치인들의 반발을 샀다. 제2차 가이후 개조내각 당시 중의원 해산 시도에 오자와와 경세회가 반대를 하여, 가이후 총리가 사임하기도 했다. 그만큼 다케시타파의 지배력이 엄청났다. 이는 오자와의 적이 늘게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미야자와 내각 시기까지 경세회는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 이치로 세 사람이 정부와 당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두고 세 사람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곤치쿠쇼(金竹小/こんちくしょう)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세회의 전성기도 사가와 규빈 사건에 대해 책임지고 가네마루가 회장직에서 사임하면서 끝나게 된다. 경세회도 후임 회장 자리를 두고 오자와파와 반오자와파 두갈래로 나뉘게 된다. 다케시타파 칠봉행 중에서 오자와는 하타 쓰토무를 총리로 옹립한다는 조건으로 그를 끌어들였고, 이 조건이 오자와의 하타 회장 구상이다. 반면 반 오자와파는 오부치 게이조를 총재 겸 총리로 옹립하고자 했다.

파벌 내에서 계속 집회를 한 오자와파는, 다케시타와 가네마루의 지지를 얻고자 경세회 최고 간부회에 갔지만, 두 사람은 오자와에게 “아이같은 싸움 그만둬라”, “오부치는 적이 적으니 오부치가 회장이 되어야 한다.”라며 사실상 오부치 편을 들었다. 수적으로는 오자와파가 더 많았음에도 최고 고문격인 두 사람이 해당 발언을 하자 간부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돌연 기자회견 자리에서 경세회 좌장인 하라다 겐이 “회장감으론 오부치가 적절하다.”라고 말해 여론이 뒤집혔고, 1992년, 오부치는 반 강제적으로 경세회 차기 회장직에 취임한다.

오부치 취임 5시간 후,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등 오자와파 인물들은 개혁 21 포럼을 창설하여 경세회에서 이탈한다. 이로써 당 최대 세력이었던 경세회는 각각 제4대 파벌인 경세회와 제5대 파벌인 하타•오자와파로 쪼그라든다.[7]

2.3. 오부치파 시절

1993년 6월 하타·오자와파는 탈당 이후 신생당을 결성.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 정권을 수립했다.

호소카와 내각· 하타 내각이 단기간에 붕괴되어 자민당이 일본사회당 연정하여 여당으로 복귀하자, 오부치파는 점차 세력을 회복했다. 1995년 총재선에서 다케시타는 파벌 간부 하시모토 류타로 의 옹립을 결정. 총재 취임 후 1996년 1월, 무라야마 총리가 사퇴하자 후임 총리로 취임했다. 그동안 당내 파벌 해소 운동이나 소파벌 전락으로 사무소 유지비가 엄격해지면서 다나카파 때부터 입주하던 사방회관에서 헤이세이 연구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98년, 제18회 참원선에서 패배하자 하시모토는 총재 겸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총재선에서 헤이세이 연구회는 오부치 회장을 총재 후보로 추대했으나[8] 이 결정에 불복한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파벌을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4. 와타누키·누카가파 시절

2000년, 오부치, 다케시타가 잇달아 사망하고 7월에 와타누키가 중의원 의장으로 취임하고 파벌을 이탈했기 때문에 하시모토가 후임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파벌의 실권을 잡고 있던 것은 노나카 히로무 아오키 미키오였다.

하시모토는, 2001년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대패했다. 다나카파 이후 '일치 결속·상자 도시락'이라 불리는 철의 단결을 자랑했지만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출범 이후 파벌 구심력이 떨어졌다. 또 각각 전쟁 이후의 원념을 안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는 '저항 세력'으로 자리매김해 눈의 적이 되었고, 2003년 9월까지 하시모토파는 당 집행부에 입성하지 못했다.

2003년 총재선에서 반고이즈미의 급선봉이었던 노나카가 독자 후보의 옹립을 주장했지만, 아오키 미키오, 무라오카 가네조가 고이즈미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노나카는 완전히 고립당했고 정계은퇴를 표명하게 된다. 파벌 내에서는 사사가와 가미, 구마시로 아키히코 등 여러 회원들이 대거 총재선 출마를 선언해 교통정리가 안되었다가, 최종적으로 후지이 다카오를 옹립했다. 그러나 파벌 내의 지지를 제대로 얻을 수 없었던 가운데 후지이는 총재선에서 낙선해 고이즈미가 총재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고이즈미 집행부는 2003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 누카가 후쿠시로가 정무조사회장, 2004년 9월부터 2006년 9월까지 규마 후미오가 총무회장으로 기용해 오랜만에 당3역 포스트를 얻었다.

2004년, 일치연암 헌금사건으로 논란이 일어날 때, 노나카 히로무와 아오키 미키오가 회동하며 하시모토 류타로가 1억엔의 수표를 받아, 정치 수지 보고서에 검은 헌금으로서 처리하고 있던 의혹이 부상했다 이 의혹으로는 무라오카 가네조 전 관방장관은 재택 기소되어 유죄를 받았다. 2004년 7월 30일, 하시모토는 책임을 지는 형태로 회장직에서 사임하고 파벌로부터 이탈해, 2005년, 44회 중원선에 불출마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게다가 우정 민영화 법안 찬반을 둘러싸고 제44회 중원선에서 법안 반대자들이 낙선하여 당내 제1파벌의 자리를 뺐겼다.

회장 부재의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이 출범하고 4일 후인 2005년 11월 4일, 쓰시마 유지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원래 경세회 분열과 그 후의 제45회 중원선에 있어서, 후나다 하지메, 하토야마 구니오 등의 장래를 담당할 것으로 보인 의원이 이당 내지 파벌 이탈해(그 후 대부분은 복당했지만, 하토야마 구니오는 재차 자민당을 이당, 후나다 하지메는 도치기 1구에서 낙선했다.), "NYKK"의 한명이라고 한 나카무라 기시로가 제네콘 부패 사건으로 실각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파벌 인재가 부족한 가운데 차기 총재 후보는 후지이 다카오, 누카가 후쿠시로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지이 다카오는 제44회 중원선에서 낙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누카가 후쿠시로를 총재 후보로 출마시키는 방향이 사실상 확정되었지만, 아오키 미키오가 총재선 때마다 누카가 옹립에 찬동하지 않는 등, 자타 모두 인정하는 총재 겸 총리 후보로 내세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하토야마 구니오는 파벌 복귀 후에도 위공회 회장인 아소 다로와 함께해 파벌로서의 통일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정 민영화를 반대하며 탈당했다가 복당한 의원의 대부분이 타파벌로 이적하거나 무파벌이 되어 파벌을 돌볼 간부가 부재했다.

2.5. 모테기파 시절

다케시타 와타루 전 회장이 2021년 9월 17일, 사망한 이후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이 회장직을 대리하는 구조로 제49회 중원선을 치렀다.

자민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11월 11일, 파벌 회의를 통해 모테기 간사장을 그대로 후임 회장으로 선임했다. 같은달 25일 회파 총회에서 모테기 간사장이 정식 회장으로 취임했다.

2023년 12월에 불거진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오부치 유코등 파벌 중요 인사들이 이탈하는 출혈이 발생했고, 자금 모집과 인사 추천 기능이 없는 정책집단으로 바꿨다.

3. 역대 회장 목록

<rowcolor=#fff> 대수 이름 파벌 호칭 임기
1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파 1987년
2 가네마루 신 1987년 ~ 1992년
3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파 1992년 ~ 1998년
4 와타누키 다미스케 1998년 ~ 2000년
5 하시모토 류타로 하시모토파 2000년 ~ 2004년
공석 (2004~2005년)
6 쓰시마 유우지 쓰시마파 2005년 ~ 2009년
7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파 2009년 ~ 2018년
8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파 2018년 ~ 2021년
9 모테기 도시미쓰 모테기파 2021년 ~ 현재


[1] 중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 [2]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 [3] 다나카 가쿠에이의 목요회의 2인자였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경세회라는 파벌을 차려 나간 뒤 목요회를 흡수했다. [4] 이 시기 다나카 가쿠에의 별명이 '어둠의 쇼군'이었다 [5] 중국 고전의 경세제민에서 뜻을 빌렸다. [6] 각자의 이름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의 이치(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의 류(龍)이다. [7] 이때 칠봉행 중 다케시타 계열이었던 오부치, 가지야마, 하시모토는 경세회에 잔류했고, 오쿠다, 와타나베는 하타, 오자와를 따라간다. [8] 오부치 다음 회장은 와타누키 타미스케가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