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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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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6대 내각총리대신
미키 다케오
三木武夫 | Miki Takeo
파일:Takeo_Miki.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07년 3월 17일
도쿠시마현 이타노군 고쇼촌
(現 도쿠시마현 아와시)
사망 1988년 11월 4일 (향년 81세)
도쿄도 치요다구 미츠이기념병원[1]
재임기간 제66대 내각총리대신
1974년 12월 9일 ~ 1976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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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미키 무츠코
학력 메이지대학 전문부 (상과 / 졸업)
메이지대학 (법학 / 학사)
정당

지역구 도쿠시마 전현구
의원 선수 19 (중)
의원 대수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약력 중의원 의원
제51대 체신대신
국민협동당 서기장
제17·18대 운수대신
제5·10대 과학기술청장관
제2·8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3·11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27대 통상산업대신
제95·96대 외무대신
제4대 환경청 장관
제9대 부총리
제7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6대 내각총리대신
}}}}}}}}}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정계 입문2.3. 전쟁 후의 활동2.4. 총리 취임2.5. 록히드 사건2.6. 말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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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정치인. 제66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다나카의 저승사자

2. 생애

2.1. 유년 시절

도쿠시마현에서 농업 겸 비료생산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도쿠시마 상업학교로 진학하여 4학년 재학 중, 야구 고시엔 출전비용을 마련하고자 바자회를 개최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이 수익을 야구부가 아닌 학교 전체를 위한 예산으로 전용하자, 미키는 학교 측에 예산사용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였다. 학교가 이를 거부하자 미키는 격분하여 동급생들을 이끌고 수업 거부 투쟁을 주도하며 학교와 마찰을 일으킨 끝에 강전 처분을 당하여 고베에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 이 사건은 미키의 인생에서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미키가 고베에서 다니던 학교의 이사장은 간사이 상계의 거물 유우키 도요타로인데, 유우키가 미키를 높이 평가한 덕분에 모리 노부테루라는 재벌의 딸을 아내로 얻을 수 있도록 중매를 서주었다. 역시 다나카를 날려버린 위인의 패기다

이후 메이지대학 전문부 상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법학부에 편입해서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 웅변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 후 잠시 USC로 유학을 떠났으나 도중에 귀국했다.

2.2. 정계 입문

1937년 하야시 센주로 내각이 중의원 해산을 선언함과 동시에 제20회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때 학생이면서도 선거운동을 도운 이시다 히로히데는 나중에 미키파의 중진으로 노동대신 등을 지낸다. 그리고 레프첸코에 의해서 KGB에 포섭된 인물이라고 지적당하는 등 스캔들도 있다고.

3~40년대에 정치인 생활을 하면서 드물게 반정부적인 연설을 하였으며 기본적으로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일본 헌법의 초안작성에 참가, 미일동지회를 결성하여 개전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2.3. 전쟁 후의 활동

1952년 일본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츠 내각에 입각하여 체신장관을 지내고 진보- 보수 세력의 절충을 제안하여 하토야마 이치로의 민주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2차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으나 법안상정을 놓고 중의원과 마찰을 빚은 끝에 결국 사임했다. 미일안보조약 때도 표결 직전에 퇴장해 결국 표결에는 불참,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으나, 오키나와 미 해군 원자력 항공모함이 주둔하는 문제를 두고 사토의 비핵 3 원칙과 어긋난다 하여 사임하는 등, 자민당 소속이면서도 당시로서는 진보적 정치인으로 주류 정치계와 선을 긋는 행보를 자주 보였다.

그 절정이 사토 에이사쿠의 4선 도전에 저항하기였다. 당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의 공작으로 당내 중간파들이 사토4선을 지지함에 고무되어 단독경선을 요구한 사토의 욕심에 대해 민주정치의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경선에 도전, 사토가 2선시에 얻은 표보다 더 많이 득표하였었다. 이 일로 총리자격이 있다고 당내외에서 인정받은 일은 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보수의 지류". 요시다 시게루를 시초로 하는 관료출신 국회의원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는 전후정치를 "보수의 본류"라 함에 빗대어 말한 것.

1972년 각복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국 후보직을 사임하고 중일수교를 공약으로 하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하여 다나카 내각에서 부총리 겸 환경청 장관으로 선임되었다.

2.4. 총리 취임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66.jpg

1974년 일본의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2]에쓰진카이(月山會)의 외로운 여왕' 이라는 제목으로 문예춘추 11월 호에 다나카의 여비서 사토 아키코를 겨냥한 논평을 발표하여 다나카의 금권정치에 문제를 제기하고 록히드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음을 폭로하자, 다나카는 여론의 거센 반발을 받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다나카는 후임 총리로 외무대신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하며 오히라를 총리로 내세우고자 작업하였다. 그러나 당시 부총재 시이나 에츠사부로가 뇌물수수 의혹 때문에 밀려났는데 차기 총재선거에서 이런 식으로 관여하게 되면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다나카에게 노골적으로 경고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결국 주류파벌이 아닌 미키가 총리가 되었다.

2.5. 록히드 사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키는 곧바로 정치개혁을 주도하여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개혁하고 다나카 체포를 결행하였다.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미키를 실각시키고자 "미키내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미키 총리는 이를 역이용하여 더욱 다나카를 강경하게 몰아붙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당시 법무대신인 이나바 오사무는 다나카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는데, 이 일은 훗날 다나카에 대한 표적수사였다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았다.

다나카 체포과 구속을 성사시켜 청렴한 미키 라는 별명으로 청렴한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당시 자민당의 거두인 다나카를 사법처리했다는 것 때문에 자민당 내에서 번번이 미키퇴진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정치적 부담이 되어 미키는 결국 자민당의 내분과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2.6. 말년

총리 사임 이후에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꾸준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9년에는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퇴진하라는 40일 항쟁을 주도하였으며, 오히라의 사망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0년 고모토 도시오에게 파벌을 넘겨주고 자민당 최고고문으로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났다. 87년에는 재임 50주년을 맞아 중의원에서 최장기 재임의원 표창을 받았으나 이듬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3. 평가

총리 재임시절에는 정치자금규제법과 공직선거법 개정 등 정치개혁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일소관계 개선과 아시아 태평양 평화체제 구축[3], 배기가스 규제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리버럴한 정책을 펼처 중도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자유민주당 주류와 뜻을 달리함을 분명히 하여 소수파벌을 이끌고 정치판 한가운데에서 파격적인 발언과 구상으로 파란을 일으켜 당시 정계의 화약고로 꼽혔다. 당시 기자들은 유럽의 화약고였던 발칸반도에 빗대 미키를 발칸 정치인이라고 조롱하며 야유했으나 즉흥적인 제스처로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노련함을 보여 다나카마저도 정치의 프로는 나(다나카)와 미키뿐이라며 극찬하기도 한다[4].

그러나 비판도 없지는 않다. 다나카를 구속시킨 뒤 자민당 내 거의 모든 계파들이 反미키 운동에 동참했을 때 차라리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비판이다. 비교가 되는 사례가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재임기간 중에 우정개혁을 밀어붙여 당내반발이 생기자 의회 해산 및 선거로 당내 반대세력을 일소하고 개혁조치를 성공한 것. 만약 다나카 구속- 전 계파의 미키 내림 공작- 의회해산 및 선거 크리로 갔다만 설령 다나카 개인은 당선되더라도 다나카파나 다나카를 편든 계파들이 전부 붕괴했을 개연성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 이렇게 될 경우에는 자민당 일당체제 종식이 훨씬 일찍 이루어지고 미키파 계파+ 일본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자유클럽과 같은 비 다나카파 연립정권이 17년 일찍 등장했을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미키는 의회 해산이 헌법에 맞는지 마뜩지 않았다라고 후에 진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정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헌법정신을 흔들면서까지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는 이야기[5]. 이런 케이스는 일본 역사에 유일하다. 그 덕분에 제33대 중의원 의원들은 일본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4년 임기를 꽉 채웠다. 하지만 결말은 자민당의 참패..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우정개혁을 두고 당내 반발이 있자 의회해산과 선거 실시로 맞섬도 이 당시 정치 신인으로 "미키 내림"의 움직임을 보고 반면교사로 체득한 것이라고 한다.


[1] 1919년 '이츠미바시자선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다. [2]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정치인 다치바나 다카시와 동명이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를 말한다. [3] 대표적으로 방위예산은 GDP 대비 1%를 넘기면 안된다는 1% 원칙을 처음 제시했다. [4] 사실 이는 다나카와 미키 모두 일본정치에서 있어서 당인파(黨人派), 즉 관료 출신이 아닌 평당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에 다수 당선된 정치가였기에 나온 말이다. 다나카와 미키가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 일본의 보수정계의 주류는 요시다 시게루를 시초로 하는, 관료로서 장기간 근무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관료파 정치였다.직업 정치인 오오 [5] 또한 미키퇴진을 주장하던 의원들 중에서도 대원로급인 호리 시게루는 미키를 끌어내려다가 자민당이 분당되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퇴진운동 강경화에 제동을 걸었다. 호리 자신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분당할 때 가담했다가 선거 및 당 운영 등에서 고생했었고, 또한 1959년에 제1야당인 일본 사회당에서 민사당이 분당 된 이래로 두 정당 모두 재통합(158석), 분당(40석) 당시의 의석수를 회복하지 못하는 사례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즉,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정권유지가 가능한데 굳이 모험을 감수해야할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 다음에는 호리에게 신세진 후쿠다까지 이 주장에 동조하자 퇴진운동의 기세가 줄어듦도 미키가 분당을 결심하지 않은 요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미키가 분당의 조짐을 보인 것은 실은 퇴진운동의 김을 빼기 위한 제스처로 보는 의견도 많이 존재하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