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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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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대통령 문장.svg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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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대통령 문장.svg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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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10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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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10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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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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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rowcolor=#cd9f51> 1903 1904 1905 1906
파일:영국 국기.svg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
윌리엄 랜들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시어도어 루스벨트
<rowcolor=#cd9f51> 190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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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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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알프레트 프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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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아스 아서르 엘리후 루트 앙리 라퐁텐 국제적십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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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얄마르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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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쇼프 난센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G. 도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rowcolor=#cd9f51> 1926 192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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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프랭크 켈로그
<rowcolor=#cd9f51> 1930 193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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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탄 셰데르블롬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버틀러 노먼 에인절
<rowcolor=#cd9f51> 1934 1935 1936 1937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카를로스 라마스 로버트 세실
<rowcolor=#cd9f51> 1938 1944 194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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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국제적십자위원회 코델 헐 에밀리 그린 볼치
<rowcolor=#cd9f51> 1946 1947 1949 1950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Quaker_star-T.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존 모트 퀘이커 봉사협회 존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rowcolor=#cd9f51> 1951 1952 1953 195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파일:UN기.svg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마셜 유엔난민기구
<rowcolor=#cd9f51> 1957 1958 1959 1960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파일:벨기에 국기.svg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레스터 피어슨 도미니크 피르 필립 노엘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rowcolor=#cd9f51> 1961 1962 1963 1964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적십자 기.svg 파일:미국 국기.svg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위원회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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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 르네 카생 국제노동기구 노먼 볼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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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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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맥브라이드 안드레이 사하로프 베티 윌리엄스 메어리드 코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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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엘리 비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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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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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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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000> 이름 주요 이력 이사회 합류일
사내이사
팀 쿡 애플
(CEO)
2011년
사외이사
아서 레빈슨 칼리코
(CEO)
2000년
앨 고어 미국 부통령
(45대)
2003년
안드레아 정 그라민 아메리카
(CEO)
2008년
로널드 슈거 노스롭 그루먼
(전직 CEO)
2010년
수잔 바그너 블랙록
(공동창업자)
2014년
제임스 벨 보잉
(전직 CFO)
2015년
알렉스 고르스키 존슨앤드존슨
(의장)
2021년
모니카 로자노 대학선물재단
(전직 CEO)
2021년
CEO · 창업주 · 이사회 의장 · 현직 경영진 }}}}}}}}}

}}} ||
<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파일:Al_Gore,_Vice_President_of_the_United_States,_official_portrait_1994_(1).jpg
본명 앨버트 아놀드 고어 주니어
Albert Arnold Gore Jr.
출생 1948년 3월 31일 ([age(1948-03-31)]세)
워싱턴 D.C.
사저 테네시주 데이비슨 카운티 내슈빌
재임기간 제45대 부통령
1993년 1월 20일 ~ 2001년 1월 20일
서명
파일:앨 고어 서명.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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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부모 아버지 앨버트 고어 시니어
어머니 폴린 라폰 고어[1]
형제자매 누나 낸시 라폰 고어
배우자 티퍼 고어 (이혼)[2]
자녀 장녀 카레나 고어
차녀 크리스틴 고어
삼녀 사라 고어
장남 앨버트 아놀드 고어 3세
학력 세인트 앨번스 스쿨 (졸업)
하버드 대학교 ( B.A.)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 (중퇴)
밴더빌트 대학교 법학대학원 (중퇴)
병역 미합중국 육군 하사 전역
종교 개신교 ( 침례회)
신체 185cm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상원)
4 (하원)
의원 대수 99, 102 (상원)
95, 96, 97, 98 (하원)
}}}}}}}}}

1. 개요2. 약력3. 생애
3.1. 부통령 이전3.2. 부통령3.3. 2000년 대통령 선거 출마와 패배
3.3.1. 패배 원인에 대한 분석들
3.3.1.1. 플로리다에서 패배한 원인3.3.1.2. 전국적인 선거에서 패배한 원인
3.4. 2000년 대선 이후 행보
4. 정치적 성향과 평가
4.1. 부정적 평가
5. 선거 이력6. 기타
6.1.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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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년의 미합중국 차기 대통령 앨 고어입니다.
(좌중 폭소) 저로선 그 사실이 특별히 우습진 않습니다만.
영화 《 불편한 진실》에서의 첫 마디. 뒷말도 농담으로 한 것이다.
머리 아프게 논쟁할 사안이 아닌데요. 물론 이 작전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그래서 비밀 작전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 녀석은 테러리스트입니다. 가서 체포하세요.[원문]
테러리스트 용의자의 송환을 두고서[4]
미국의 제45대 부통령. 빌 클린턴 행정부 산하에서 1993년부터 2001년까지 부통령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애플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 약력

3. 생애

3.1. 부통령 이전

증조할아버지 시절부터 내려오는 정치 명문가, 재력가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워싱턴 D.C.의 명문 보딩스쿨에서 9년간 생활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치활동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성장하였다.

반전운동을 하던 아버지 앨버트 고어 시니어의 정계 활동에 도움을 주기 위해 베트남 전쟁 시기였는데도 하버드대를 졸업하자마자 미 육군에 자원입대하였고(1969년 하버드 졸업생 중 군 입대한 몇 안되는 극소수에 속했다고 함), 베트남 주둔 제20공병여단에서 정훈병으로 복무하였고, 하사로 전역하였다. 그의 아버지 앨 고어 sr. 역시 민주당원이었다.

이후 가문의 정치기반을 이어받아 테네시주 연방하원의원 4선(8년), 연방상원의원 재선 뒤에 45세의 나이에 부통령이 되었다.

3.2. 부통령

부통령 재직시에는 환경과 IT 산업, 통신정책 등을 전담하면서 실세 부통령으로 활약했다.[5]

환경운동에 관심이 많아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6] 부통령이 되기 전은 물론이고 부통령이 된 후에도 미국의 IT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고어의 아버지 앨버트 고어 시니어 테네시주 연방상원의원으로 30여년간 재직하며 특히 1956년 고속도로 건설지원법의 업적을 남겼는데, 이거에 힌트를 얻어서 고어는 '정보고속도로'(Informaion Highway)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IT 산업을 지원하였다.

한마디로 '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다만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는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7] 관료를 맡는 탈이념적 전문가를 말한다. 앨 고어는 청년기부터 특정 정당 소속의 정치가로 자라온 사람이다. 또한 특정 분야에서 학위나 전문자격을 획득한 스페셜리스트 자격을 기반으로 활동한 사람이 아니라[8] 국정 전반을 다루어 온 제너럴리스트이기에 테크노크라트는 아니고 정치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칼 세이건과도 친했다.

빌 클린턴도 그랬지만 고어도 엄청난 달변가였으며, 1992년 대선 당시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뒤 빌빌거리던 클린턴의 지지도가 급상승하고 더 나아가 "차라리 고어가 대통령 후보였다면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래저래 유망한 대통령감이었다.

3.3. 2000년 대통령 선거 출마와 패배

그리하여 2000년 대통령 선거에 당당히 출마했고 두 살 많은 조지 W. 부시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와의 대결에서 전체 득표수 5,100만 표(48.4%)로 약 50만 표(0.5%) 남짓 앞섰지만 정작 선거인단 숫자에서는 271대 266으로 밀려 대통령 당선에 실패했다.[9][10][11] 단순히 깨끗하게 진 것이 아니라 무효표 논란이 크게 불거졌다.

미국은 각 지역별로 투표용지도, 개표방식도, 선거관리 원칙도 제각각이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선거인단수가 네 번째(25명)로 많고 정치적 성향이 극명하게 갈리는 플로리다 주였는데[12], 표차가 불과 537표밖에 안 나는 상황이라 무효표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졌다. 플로리다 주의 많은 지역, 특히 흑인이 밀집한 민주당 우세지구에서 알아보기 힘든 투표용지에 개표 기계의 오류와 선관위의 행정미숙으로 엄청난 무효표가 발생했다. 플로리다의 팜비치 카운티가 대표적이었다. 또한 플로리다의 투표용지는 도안이 복잡해서 눈이 어두운 노인이나 사회적 약자는 자칫 잘못하면 다른 후보를 찍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부시의 친동생 잽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로 있었을 때이기에 앨 고어의 지지자들은 그가 의도적으로 투표용지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때문에 부시 정권은 정당성에 대한 논란에 시달렸고 이런 논란에 빠진 정권들이 흔히 그렇듯 갈등과 분쟁으로 눈을 돌렸다. 심슨 가족에서도 이 부정선거 문제로 공화당을 지적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3.3.1. 패배 원인에 대한 분석들

3.3.1.1. 플로리다에서 패배한 원인
원인은 크게 네 가지였다.

사실 셋째 문제는 명확하게 해명이 되지 않았으며, 넷째는 이미 벌어진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첫째와 둘째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수의 무효표들이었다. 당장 팜비치에서만 만 3천 표가 무효 처리되었는데, 이게 제대로 판정된다면 플로리다주의 선거결과가 뒤집힐 상황이었다. 주 단위의 승자독식제의 선거인단 투표인 미국 대선 방식으로 인해서 플로리다가 고어에게 넘어가면 대선 결과가 바뀌는 상황.

결국 고어 지지자들의 청원과 플로리다 주법원에 의해 시작된 수작업 재개표 결과 일부 선거구에서만 재개표를 했는데도 표차가 300여 표 이내로 줄어들었다. 플로리다 전역에서 수동 재검표를 하면 표차가 역전되어 고어의 승리라는 대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시 측에서 계속 소송을 한 끝에 주법원과 연방법원의 관할권 논란, 각 주의 자치권 논란, 보수언론의 추측성 물타기 기사, 젭 부시 주지사의 영향력, 조직적 부정선거 논란 등 온갖 문제가 꼬이면서 결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전면 재검표가 중단되고 조지 부시의 승리가 선언된다.

이게 정말 문제가 되는 점인데, 미국의 헌법상 선거 관련 소송은 해당 주의 법원이 관할권을 갖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처음 플로리다 주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 앨 고어와 민주당 측은 플로리다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그런데 선거 소송 관할권이 해당 주 법원에 있음을 알고도 부시와 공화당이 연방대법원에 이를 제소했고, 연방대법원은 부시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남북전쟁 당시처럼 연방 vs 주의 알력 다툼이 생길 우려가 있으니까 고어가 양보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한국 판사들은 정당 가입도 금지되며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반면에, 미국의 판사들은 뚜렷하게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16] 애초에 임명 과정부터 어느 당 소속인지, 주요사안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당파성을 심하게 따진다. 따라서 연방대법원이든 주대법원이든 판사들의 당적이 외부로 드러나 있으므로 어떠한 문제에 대해 제소하면 이길 것 같다/아니다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 플로리다 주 대법원에서 패소한 공화당 측은 연방대법원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대법관[17]들로 채워진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푸라기도 잡아 보자는 심정으로 연방대법원에 제소한 것인데, 연방대법원은 관할권이 없음에도 이런 막장 판결을 내린 것이다.

플로리다 개표의 최종 결과는 291만 2,790 대 291만 2,253 표, 고작 0.0090%(537명) 차이. 팜비치 카운티에서만 처리된 무효표만 1만 3천 명이었다나. 여기에 미국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가 플로리다에서 거둔 득표가 9만여 표이다. 참고로 고어가 이긴 뉴멕시코에서의 격차는 366표였지만 퍼센트 차로는 0.06%였다. 참고로, 이후 여러 학자들과 미디어가 자체적으로 재검표를 실시했는데, 연방대법원이 재검표를 중단하지 않았어도 결국 아들 부시가 이기기는 했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다만, 이때 플로리다 주정부에서 실시한 재검표는 전수 재검표가 아니었는데, 전수 재검표 시에는 고어가 이겼을 것이라고. 제기된 소송 중에는 전수 재검표를 포함하는 방안도 있었으므로 만약 이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판결에 따라 고어의 승리도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이 역시 확정된 것은 아니고 확실한 것은 실제로 까 보지 않은 이상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문 위키 링크

훗날 오코널 등 재개표를 중단하는 데 찬성한 일부 공화당 성향의 판사들조차 부시의 막장 임기를 보면서 차마 자신이 공화당 지지자이고, 이 판단이 법적으로는 옳은 판단이라고는 생각하는 데에는 변화가 없지만 자신의 판단이 이런 막장을 불렀다는 것에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토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HBO가 이 기막힌 이야기를 2008년 TV영화로 제작해서《리카운트(Recount)》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 실제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를 주도했던 민주당 선거대책팀장 론 클레인[18] 역할을 케빈 스페이시가 맡아서 이 막장드라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연방과 주정부의 사법관할과 자치권 논란, 선거구마다 제각각인 선거법과 엉망진창인 선거 관리, 명백한 민의의 왜곡을 제도에 따라야 한다면서 순응하는 정치인들, 이런 사례가 불거졌는데도 전혀 변화가 없는 미국의 선거법 등. 미국이 민주주의 선진국이란 환상을 한방에 날려준다. 고어 스스로가 별로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일까.

대선 결과가 부시의 승리로 끝이 난데에는 민주당 주류의 자포자기도 한몫한다. 실제 끝까지 가보자는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을 주저앉힌 것은 고어와 민주당 미국 상원 의원들이다. 플로리다 주 팜비치를 비롯해서 여러 곳에서 개표 첫날부터 문제가 발생해서 집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고어는 성급하게 부시에게 선거결과에 승복한다는 전화를 걸었다가 다시 몇 분 뒤에 이를 취소하는 등 우왕좌왕했으며, 나중에는 오히려 실무자들의 재개표 움직임을 저지하고 나선다.

또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투표 방해 행위 의혹에 흑인 미국 하원 의원들은 집단 반발하였다. 하지만 연방의회에서 선거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선 하원의원 1인과 상원의원 1인의 동의가 필요한데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모조리 거부한다.[19] 그리고 당시에는 버락 오바마 같은 흑인 상원의원이 없었다.[20]

이 시점에서 앨 고어는 정치인생은 여기서 (즉, 대선마저도) 끝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여기서 불복하고 대규모 재검표 운동을 지지한다면 그나마의 신망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때문에 2004년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대부분 매체에서는 2002년 중간선거가 끝난 뒤 고어를 '프런트러너' 취급했고 고어가 존 케리 등 다른 후보들을 선호도 조사에서 압도적으로 눌렀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고어 본인은 고심 끝에 2002년 12월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웬만하면 재선이 뜨는 미국 현실을 고려하기도 하고, 불복처럼 보일 가능성도 있었다.[21] 그리고 부시의 임기가 끝나가던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차기 민주당 대선 후보로 앨 고어를 다시 재출마시키자는 주장도 일각에서 나왔지만, 이마져도 2007년 본인이 대선 불출마 입장을 재차 밝힘으로서 실현되지 못했고, # # 이후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되고 오바마 당시 민주당 후보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를 꺾고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이루면서 앨 고어 전 부통령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재출마시키자는 미국 내의 여론은 완전히 사라졌다.
3.3.1.2. 전국적인 선거에서 패배한 원인
전국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자면, 대선 패배는 그의 지루한 이미지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4대에 걸친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 엄청난 재벌인 데다가[22],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엘리트 출신이라서 대중들이 전혀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해한다는 것이었다.[23] 물론 부시 역시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엘리트 출신인건 마찬가지였으나, 부시는 선거 과정에서 야구를 좋아하고 구단주 경력까지 있었던 친근한 이미지를 어필하는 데 성공하여 엘리트 이미지는 앨 고어의 비중이 더 컸다.
파일:앨고어한숨.gif
부시와의 토론회

그리고 부시와의 토론회에서도 한숨을 쉬면서 "무례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토론회 이전에 고어 45% 부시 42%였던 지지율이 토론회 이후 고어 46% 부시 45%로 2%p 좁혀졌을 정도이다. NBC

3.4. 2000년 대선 이후 행보

고어는 부시의 당선을 선언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인정하긴 어려우나 승복하겠으며 부시를 축하하고 함께 나아가자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 이후 고어는 낙선 후유증으로 한동안 폭식증과 우울증을 겪으며 대중들의 걱정을 샀으나 잘 이겨내고 환경 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에 따른 결과로 2007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같은 해 클라이너 퍼킨스의 파트너로 합류했다.

2000년 대선 이후 고어는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은 접었으나 9.11 테러 때는 국가의 단결을 호소하기도 했고 2003년에는 장기화되던 이라크 전쟁에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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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모습

정계를 떠나 환경운동가가 된 지는 오래됐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방역에 실패하자 이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는 등 민주당 원로로서의 활동은 여전히 이어가는 중이다.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끝까지 결과에 승복하지 않자, 20년 전 대선 당시 플로리다 재검표 문제로 시끄러웠던 상황 속에서도 연방 대법원의 판결 이후 앨 고어의 깔끔한 승복 선언문이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24]

4. 정치적 성향과 평가

남부 민주당원 중 하나로, 민주당 내 온건파 중 하나였다. 198~90년대 빌 클린턴과 함께 민주당 우경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환경, IT 산업 등 일부 의제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이 있다.

전형적인 민주당 성향으로 낙태권을 지지하고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한다. 또한 총기 규제에 찬성하고 복지를 중시한다. 다만 안보 분야에서는 매파의 입장에 있는데, 대선 때도 국방력 강화를 주장했으며 9.11 테러 때도 국민의 단합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는 본인이 군복무를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고어하면 빼놓기 어려운 문제가 환경 문제이다. 정치인 시절에도 환경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며, 정계 은퇴 후에도 환경과 관련하여 유명한 저서인 '불편한 진실'이나 환경 콘서트 '라이브 어스'를 개최하는 등 환경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데 공헌을 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대중문화 검열 단체인 PMRC를 주도하는 등, 남부 민주당원으로서 사회보수주의적 성향 또한 가지고 있었다.

4.1. 부정적 평가

진보적 이미지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앨 고어의 외교 성향은 초강경파였다. 초강경파이기만 했다면 그래도 문제가 없는데, 앨 고어가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를 대하는 방식은 20년 후 제1세계 전체를 덮칠 전랑외교의 선배격에 가까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중반 북대서양 조약 기구 중부 유럽 국가들로 영역을 확장할 때 빌 클린턴은 러시아의 반발을 부를까봐 나토의 확장은 러시아 견제용이 아니라 범유럽적인 안보기구로 재편성하는 것일 뿐이라는 식으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을 정성들여 설득하는 타입이었지만 앨 고어는 나토의 확장이 러시아 견제용이라는 점을 대놓고 언급하면서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국가의 가입이 목표라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등 클린턴 대통령과 미 행정부의 외교 전략에 찬물을 끼얹는 언행을 일삼았다.

그리고 러시아 견제에만 집중한 나머지 모가디슈 전투에서 지원이 늦어져 미군이 큰 피해를 입는 결과를 불렀다.

1997년 외환 위기에서도 앨 고어는 루빈 재무장관과 함께 '미국의 잠재적 반도체 경쟁국이자 현재 미국과 통상 분쟁을 겪고 있는 한국을 도와주지 말자'는 강경파에 속했고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 한국은 결국 IMF 구제금융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고어를 외환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다.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외환위기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쨌든 외화관리와 금융시장 관리를 개판으로 해버린 문민정부 한보 사태를 비롯한 국내 기업들의 방만한 운영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어가 강경하게 지원을 반대하고 끝끝내 관철시킨 것이 IMF 사태의 또 다른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 또한 엄연히 사실이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원을 주장하면서 고어와 격렬하게 대립했기 때문.

앨 고어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엄연히 미국 부통령 신분인데 한국의 입장만을 들어줄 위치도 아니었다는 옹호론도 없지는 않은데 이 또한 이래저래 따져봐야 할 문제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한국 지원을 주장했던 각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샌디 버거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국가의 외교와 안보 전략을 결정하는 최고 책임자들이었는데, 이들이 과연 한국이 좋거나 불쌍해서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겠느냐는 것이다. 미국의 전세계적 영향력이 정점을 찍었던 1990년대 말에도, 한국이 천안문 6.4 항쟁 이후 파국으로 치달은 중국과의 관계와 이에 따른 장기적, 잠재적인 위협, 그리고 북한과 러시아 등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보호할 중요한 동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런 나라의 경제가 공중분해되게 두는 것은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보기에 자살행위였다. 이를 생각할 때, 고어의 행적이 경제 및 무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외교, 안보의 측면에서도 그랬는지에는 물음표가 뒤따른다.

1998년 당시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당시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의 말레이시아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면전에서 한국의 철강보조금문제와 쇠고기 문제, 지지부진한 한국의 구조조정 문제를 강하게 추궁/질책을 했는데 이 정상회담에서 앨 고어는 김대중에게 “지지부진한 구조조정 문제를 강하게 추궁하고 철강보조금을 지급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25][26] 이 정상회담 당시 앨고어는 김대중에게 “대기업 구조조정의 진전이 없는데 못하겠다는건가, 하기 싫은건가 “며 추궁했고 이에 김대중은 “6~30대 그룹은 잘됐고 5대그룹이 문제다. 정부와 합의한 5가지 가운데 경쟁력있는 기업으로 재편하는 것만 아직 안됐다. 연말까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라고 답했다.[27] 철강보조금 문제에 대해서 김대중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보조금 지급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28][29] 여담으로 당시 동아일보 매일경제에서는 앨 고어가 김대중에게 미진한 구조조정 문제를 추궁한 사실이 누락되었다.

파일:Screenshot_20200818-133052_Samsung Internet.jpg

이 시기인 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10명중 4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반미 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 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 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0] 고어가 부통령으로 재임 중이었던 90년대 클린턴 행정부 시절 한미관계는 안보적으로는 안기부의 미국인 간첩 구속사건, 경제적으로는 1997년 외환 위기 사태 등으로 역대 최악의 관계를 보였다.

실제로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까지도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 여론상 반미 감정은 거의 메인스트림 중 하나에 가까웠다.[31][32] 이것이 1차례 크게 꺾인 것은 어디까지나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반미 감정이 많이 희석된 상황에서 터진 천안함 피격 사건, 연평도 포격 도발과 같은 북한의 대남 도발과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 및 패권국 도약 이후였으며,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그라든 것은 한한령으로 촉발된 혐중 여론으로 인해서였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7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테네시 4구

115,392 (94.04%) 당선 (1위) 초선
197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47,831 (100.00%)[A] 재선
198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37,612 (79.29%) 3선
198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4,094 (100.00%)[A] 4선
1984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테네시 1,000,607 (60.72%) 초선
1990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529,914 (67.72%) 재선
1992 미국 부통령 선거[B] 미합중국 44,909,889 (43.01%, 370명) 초선
1996 미국 부통령 선거[B] 47,401,185 (49.24%, 379명) 재선
2000 미국 대통령 선거 50,999,897 (48.38%, 266명)[37] 낙선 (2위) [38]

6. 기타

6.1.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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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부통령 <colbgcolor=#fff,#1f2024> 앨 고어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 매들린 올브라이트
재무장관 로이드 벤슨 로버트 루빈 로렌스 서머스
국방장관 레스 아스핀 윌리엄 페리 윌리엄 코헨
법무장관 재닛 리노
내무장관 브루스 배빗
농무장관 마크 에스피 댄 글릭먼
상무장관 론 브라운 미키 캔터 윌리엄 M. 데일리 노먼 미네타
노동장관 로버트 라이시 알렉시스 허먼
보건사회복지장관 도나 샬랄라
주택도시개발장관 헨리 시스네로스 앤드루 쿠오모
운수장관 페데리코 페냐 로드니 슬레이터
에너지장관 헤이즐 올리리 페데리코 페냐 빌 리처드슨
교육장관 리처드 라일리
제대군인장관 제시 브라운 토고 웨스트
환경보호청장 캐럴 브라우너
관리예산실장 리언 페네타 앨리스 리블린 프랭클린 레인스 잭 루
중앙정보국장 제임스 울시 존 M. 도이치 조지 테넷
무역대표부 대표 미키 캔터 샤를린 바셰프스키
주유엔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 빌 리처드슨 리처드 홀브룩
경제자문위원장 로라 타이슨 조셉 스티글리츠 재닛 옐런 마틴 M. 베일리
연방중소기업청장 어스킨 볼스 필립 래더 아이다 알바레스
연방재난관리청장 제임스 윗
국가마약통제정책실장 리 브라운 배리 맥카프리
백악관 비서실장 맥 맥라티 리언 패네타 어스킨 볼스 존 포데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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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백과 [2] 혼전 성은 에이치슨(Aitcheson). 위키백과 [원문] "That's a no-brainer. Of course it's a violation of international law, that's why it's a covert action. The guy is a terrorist. Go grab his ass.” [4] 고어의 매우 강경한 외교적 성향을 보여주는 어록. 오죽하면 9.11 테러 이전의 부시 정권은 고어보다도 고립주의적이고 국제법을 준수하려고 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이다. 참고로 이게 왜 묻혔냐면 놓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놓쳐버렸습니다"에는 여러 뜻이 있을 수 있다. [5] 미국 역사상 부통령은 대부분 선거운동용일 뿐 실질적인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리 S. 트루먼은 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 자체를 몰랐었다. 고어나 딕 체니 같은 실세 부통령은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문서 참조. [6]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 앨버트 고어 시니어는 석유회사를 운영하면서 떼돈을 벌었고 앨 고어 역시 그 석유회사의 지분을 상속받았던지라 몇몇 환경운동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7] 예를 들면 의사, 과학자, 경제학자 [8] 물론 학위는 있다. 하버드 정치학 학사. [9]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단 총 인원이 538명인데 이 숫자를 합하면 537명으로 1명이 빈다. 이것은 선거인단 정식 투표 때 워싱턴 D.C.의 선거인단 3명 중 1명이 백지 표를 내서 기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 만약 당선됐다면 아버지 부시처럼 현직 부통령으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또 다른 사례가 될 수도 있었다. [11] 거기다 이것보다 먼저 대통령이 될 기회가 있었는데, 부통령 재직 도중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클린턴이 임기 다 마쳤고, 고어도 선거에 실패했기에 의미가 없다. [12] 당시 주지사가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인 것도 한 몫 했다. [13] 투표용지 버프를 받고도 최종 득표수는 17,000여 표, 0.3%에 그쳤다. [14] 이 사건으로 인해 흑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표를 빼앗겼다고 울분을 토했다. 결국, 버락 오바마에게 몰표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15] 자신을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는 무소속의 버니 샌더스가 독자 출마대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온 이유도 랄프 네이더의 2000년 선거 결과 때문이다. 당시 랄프 네이더를 지지했던 진보/환경운동 그룹들도 이 선거의 나비효과에 식겁해서 이후 대부분 민주당에 참여하는 것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16] 사실 미국은 판사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유가 상당히 넓게 보장되어 있다. 일반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업무 시간이나 업무와 민감한 수준으로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항 이외에는 공무원들도 정치적인 견해를 자유롭게 피력하거나 관련 활동에 참여해도 큰 처벌을 받지 않는다. 단 공직에서도 일부 분야는 그러한 자유가 제한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법조계와 정보기관 계열이다. 하지만 미국 판사들의 정치적 성향이 상당히 노골적으로 공개되는 현실을 보면 알듯이 이러한 자유의 제한도 한국과 비교하면 매우 느슨한 수준이다. [17] 캐스팅 보터였던 중도성향의 오코너는 심지어 공화당 정치인 출신 인사였다. [18] 앨 고어 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이지만, 선거운동 도중 권력핵심에서 밀려나서 앨 고어와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다시 조 바이든 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았으며,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2023년 초까지 백악관 비서실장을 맡았다. [19]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공식 선거인단 투표 시에도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역시 상원의원의 서명이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이의제기들은 모두 기각당했다. [20] 자신들의 투표권을 도둑맞았다고 여긴 흑인 유권자들은 이 사태를 방치한 민주당의 백인 의원들에게도 반감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나중의 오바마 열풍으로 나타난다. [21] 20세기 이후 이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후보가 바로 다음 대통령선거에 재출마한 경우는 1952, 1956년에 아이젠하워에게 연패한 애들레이 스티븐슨이 유일하다.(스티븐슨은 1960년에도 재출마를 노렸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22] 그는 방 수십 개짜리 대저택에 살면서, 연방 상원의원 시절까지는 선거모금도 거의 하지 않을 정도로 재력가이다. [23] 사실 힐러리 클린턴이나 마이클 두카키스 등 민주당 후보 중에 이런 엘리트 특권층에 대한 반감으로 호재를 타다가 정작 본선에서는 역전패를 당한 후보가 한둘이 아니다. 민주당이 진보 정당임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부분. [24] 참고로 바이든은 부통령 재직 중(그러니까 선거 끝나고 10년도 더 뒤에)에도 고어가 그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확실하다며 고어를 대통령 당선인이라고 불렀다. 어지간히도 억울했던 듯하다. [25] 매일경제 1998.11.18, 한겨레신문 1998.11.18, 동아일보 1998.11.18 대화록. [26] 경향신문 1998.11.18 김대중 앨고어 대화록 [27] 한겨레신문 1998.11.18 경향신문 1998.11.18 김대중 앨고어 대화록 [28] 매일경제 1998.11.18, 한겨레신문 1998.11.18, 동아일보 1998.11.18 대화록. [29] 경향신문 1998.11.18 김대중 앨고어 대화록 [30] 한반도 전쟁 발발시 청소년 3명중 1명 피난가겠다 [31] IMF가 반미의 유일한 원인은 당연히 아니었고 하다못해 1차적인 원인도 아니기는 했다. 오늘날 존재하는 반미 여론의 원류는 신군부가 권력을 찬탈할 때 이를 방조했다는 것에 대한 학생운동권의 분노다. 이 분노에는 배신감도 섞여 있었는데, 실제로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친미, 정부가 반미를 외치는 구도가 전반적으로 지속되었다. 특히 지미 카터 행정부 당시에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 관계가 코리아게이트 등의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최악을 달렸고, 박정희 정부가 대학생들을 사주해서 반미 관제시위를 획책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박정희 사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80년 시점에서도 서울의 봄이나 5.18 민주화운동 등의 사건에서 미국이 민주화 세력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해 있었는데, 미국이 신군부를 사실상 묵인한 것. 물론 미국 입장에서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과 같은 국내외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점, 그 때문에 국무부에서조차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에 대해 한발 늦게 파악한 점 등 이래저래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많았지만,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멀리 있는 다른 나라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속속들이 파악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32] 물론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나 일관되게 상호 관계의 강화를 외쳤고 한미상호방위조약도 건재했으니 한계는 뚜렷했다. 반대로 고어 쪽도 마찬가지였는데, 고어가 아무리 외교적 결례를 범하고, 한미관계 훼손 시도를 반복해 봤자 미국의 대통령은 클린턴이었고, 상대는 오랜 민주화 운동 경력과 미국에서의 대외 활동으로 영미권 식자층 사이에서 드높은 위상을 구가하던 김대중이었기 때문에 양국관계는 근본적으로 악화되기는커녕 거시적으로나마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고 수준의 전성기를 누렸다. [A] 단독 출마 [A] 단독 출마 [B] 대통령 후보는 빌 클린턴 [B] 대통령 후보는 빌 클린턴 [37] 득표율 1위, 선거인단 2위 [38] 9번의 선거 중 첫 낙선 [39] 이것 때문에 지구 온난화를 음모론 수준으로 생각하는 사우스 파크에서는 제대로 까였다. 관심 좀 받아보려고 있지도 않은 걸로 사람들을 위협한다고.....S10E06 참고. 다만 이후 지구 온난화가 사실로 드러나자 본인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작중 내용을 변경했다. [40] 2007년 고어는 클라이너 퍼킨스의 파트너로 영입되었는데, 의장이었던 존 도어가 해당 다큐를 통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처음 느끼고 영입했다고 한다. [41] 파일:external/z.about.com/gore_internet.jpg 이런 짤방이 좋은 예이다. 천지창조 [42] iPhone 발표 당시에 시연용 폰에 슬라이드 쇼를 해야해서 발표회에 참석을 못했다며 아이폰 출시를 축하하는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43] 정식으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상 이혼이나 다름 없는 상태. [44] 실제로, 위의 인물들은 모두 하버드 대학 출신이다. [45] 바다 위를 떠다니는 쓰레기섬으로 UN의 정식인준 국가는 아니지만 환경운동가들이 해양쓰레기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우표를 발행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46] 당시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집권기로 친미 독재는 눈감는 스탠스를 취했음에도 김대중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전임 지미 카터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김대중에 관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부탁했고 실제로 레이건은 당시 정부 인사들을 방한시켜 미국은 김대중 사형에 절대 반대 입장을 알렸고 민주당에서는 카터 대통령, 에드워드 케네디 등 거물급 인사들이 구명운동에 직접 참여하며 앞장섰다. [47] 현재 해당 게시물은 비공개 처리된 상태이다. [48] 당연히 2006년에도 재선했다고 한다. [49] 절대 3분의 1씩 모인게 아니라 인간, 반, 반 돼지라고 한다. 이 맨베어피그가 Imaginationland 에피소드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어쩌며 앨 고어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존재일지도. [50] 한국어 비공식 자막에서는 보통 인웅돈이라 표기 하고, TVING 공식 한국어 자막에서는 인간곰돼지라고 번역되었다. [51] 다른 메시지들은 절대 삭제가 불가능하지만, 이 이벤트때 등장하는 메시지는 전부 삭제가 가능하다. 대우가 왜 이래 [52] 하지만 에피소드를 2부작으로 내버려서 사우스파크의 인기가 급속도로 추락했다..시즌 당 에피소드가 10편이 된 상황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