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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01:17:06

록히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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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Lockheed bribery scandals
일본어 : ロッキード事件
독일어 : Die Lockheed-Skandale
네덜란드어 : De Lockeed-affaire
이탈리아어 : Lo scandalo Lockheed
파일:IMG_25555.jpg
사건의 발단이 된 전일본공수 록히드 L-1011 트라이스타

1. 개요2. 전개
2.1. 발단2.2. 전일본공수의 이해할 수 없는 트라이스타 발주 사태2.3.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와 드러나는 스캔들2.4. 검찰 수사2.5. 미키 내림과 재판2.6. 사건의 결과
3. 사건의 남은 의문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사상 최대의 정치자금 스캔들.

영어로 Lockheed bribery scandals이라고 하면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항공기를 팔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 뇌물을 뿌린 일련의 사건이다. F-104 판매 대가로 각각 천만 달러 이상의 뇌물을 준 것이나 이탈리아 C-130 수송기를 판매하면서 뇌물을 준 것, 사우디아라비아 무기거래상에게 수수료만 1억 달러 이상을 준 것, 일본에서 사토 에이사쿠 총리 시기에도 사토 총리와 겐다 미노루 등에게 뇌물을 준 것[1] 등을 모두 포함하는 대규모 뇌물 스캔들이다. 이 스캔들로 이탈리아에서는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이 사임했으며 네덜란드에선 율리아나 여왕의 부군인 베른하르트 공자가 연루되어서 율리아나 여왕은 폐위 위기까지 몰렸다.

이 문서에서는 수많은 록히드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집권기에 일어난 뇌물수수 건만을 다룬다.

2. 전개

2.1. 발단

사건의 발단은 록히드[2]에서 야심차게 밀던 신형 제트 여객기 L-1011 트라이스타로부터 시작되었다. 록히드는 군용기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항공기 제작사였지만 제트기의 흐름을 타지 못해 민항기 부분에서는 다른 회사들에 뒤쳐진 상태였다[3].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야심차게 제작된 트라이스타는 록히드가 그간 군용기 제작에서 얻은 노하우를 쏟아부어 만든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여객기였다.

하지만 이미 시장에는 보잉 747이나 DC-10이 있었기에 이들과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했다. 트라이스타에는 롤스로이스 plc 사가 개발 중이던 신형 엔진이 탑재될 예정이었지만 이 엔진의 개발이 난항에 빠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롤스로이스 plc사가 파산하고 국유화 과정에서의 혼란까지 겹치면서 개발에 차질이 생겼고, 그렇게 개발이 지연되는 사이 DC-10이 3발기 광동체 시장을 독점하면서 록히드는 L-1011을 제대로 어필해보기도 전에 수많은 잠재적 고객들을 빼았겼다.

그래도 록히드는 어떻게든 트라이스타를 팔아먹어야 했기 때문에 각국의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벌였다. 일본도 록히드사의 중요한 로비대상이었는데 이미 전일본공수(ANA)의 라이벌인 일본항공(JAL)이 DC-10의 대량 발주를 결정하면서 록히드로서는 전일본공수라도 잡을 필요가 있었다.

2.2. 전일본공수의 이해할 수 없는 트라이스타 발주 사태

당시 전일본공수는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여객수요의 증가와 1972년에 예정된 삿포로 동계올림픽을 대비해 신형 대형 여객기의 발주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장 오오바 테츠오를 중심으로 한 선정작업이 이뤄졌다. 세 종류의 여객기가 후보에 올랐고 트라이스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트라이스타는 롤스로이스사의 신형 엔진 탑재가 난항을 겪은 탓에 전일본공수는 비록 최첨단 여객기라고 해도 엔진의 문제가 있는 트라이스타는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또다른 후보였던 보잉 747 SR의 경우 전일본공수의 회사 규모상 너무 크다는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DC-10[4]이 낙점을 받아 1970년 미츠이 물산을 통해 총 3기를 가발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DC-10의 발주에 관여한 사장 오오바가 사기사건[5]에 휘말렸다는 괴문서가 주주총회 앞으로 배달되었고 결국 오오바는 사직했으며 전 운수차관 와카사 토쿠지가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1971년 2월 운수대신 하시모토 도미사부로는 "일본 항공회사의 단거리 운행용 여객기(대형 여객기)의 도입은 1974년 이후에 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 발언을 했고 이 같은 취지에서 1971년 3월 31일 운수성이 행정지도를 내림에 따라 도입은 연기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일본공수가 DC-10을 발주하는것이 정식화 되어서 맥도널 더글라스사의 공장에서는 전일본공수에서 발주한 DC-10의 제작이 이뤄지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와카사는 트라이스타를 차기 대형 여객기 도입 후보에 다시 올리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따라 전일본공수 내부에서 재검토가 이뤄진 끝에 DC-10의 발주가 뒤집어지고 트라이스타를 발주하기로 최종 확정되었다. 그리고 와카사는 이를 1972년 10월 30일에 공식 발표했다.

이런 느닷없는 트라이스타 발주의 배경으로 그해 9월 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이 꼽혔다.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은 록히드사의 공장이 위치한 캘리포니아가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닉슨이 당시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트라이스타의 발주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9월 18일 도쿄에서 열린 영일 정상회담에서도 비밀리에 당시 영국 총리인 에드워드 히스가 다나카에게 롤스로이스의 엔진을 탑재한 트라이스타의 발주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2006년에 공개된 영국의 기밀문서에서 확인되었다.

마치 하시모토의 발언에 맞춘 듯이 1974년 1월 트라이스타가 정식으로 납품되어 2월에 운항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트라이스타의 발주는 상당히 느닷없는 일이긴 했지만 아직은 스캔들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다나카는 금권주의 체질이라는 비판을 받아 그해 12월 9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2.3.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와 드러나는 스캔들

일이 불거진 것은 1976년 2월 4일 미 상원 외교위원회 다국적기업 소위원회의 공청회에서부터였다. 이 공청회에서 록히드가 일본내의 자사기 판매를 위한 로비를 위해 여러 나라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의 경우는 마루베니 상사를 통해 200만 달러를 일본의 고위 정계인사들에게 건넸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전일본공수의 신형 여객기 발주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 해상자위대 초계기 도입에도 록히드의 뇌물 살포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당초 일본 해상자위대는 초계기를 도입하면서 자국 기업의 기체를 도입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뒤집히고 록히드의 P-3 오라이언을 도입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공청회에선 구체적인 자금의 흐름도 밝혀졌다. 록히드의 부회장과 도쿄 주재 사무소 대표가 록히드의 일본내 대리인 역할을 하고있던 코다마 요시오[6]에게 소위 컨설턴트 비용이라면서 21억엔을 건넸고 다시 코다마와 그의 친구 오사노 겐지[7]를 통해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5억엔이 건네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코다마는 DC-10의 도입을 주도하고 있던 오오바를 밀어내기 위해서 오오바가 M자금의 사기사건에 휘말렸다는 괴문서를 흘리게 했고 1972년 논란이 된 오사카 국제공항의 소음 문제에 대해 트라이스타는 소음이 적어요라는 식의 문서를 오사카 국제공항 인근 주민들에게 뿌린 공작이 언론들을 통해 폭로되었다.

일본 정계는 발칵 뒤집혔고 일본 국회에선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조사했으며 관련자인 오사노 겐지, 전일본공수의 와카사 토쿠지 사장과 와타나베 부사장, 오오바 테츠오 전 사장, 마루베니 상사 회장인 히야마 히로시 등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병상에 있던 코다마 요시오는 병원에서 증인 심문을 받았다. 이는 TV를 통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록히드사가 큰 기대를 걸고 열심히 공작했던 고다마 라인은 전일본공수가 트라이스타를 채용하는 데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록히드의 공식대리인인 마루베니 상사의 로비가 트라이스타의 채용에 결정적이었고 투입한 금액도 훨씬 적었다고 한다.[8]

2.4. 검찰 수사

당시 다나카의 후임 총리인 미키 다케오는 "청렴한 미키"로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중의원 예산위원회의 조사 생중계를 지켜본 일본 국민들은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9] 결국 미키는 검찰과 관련기관에 수사를 지시했다. 게다가 록히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당시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에게도 이례적으로 협조 요청을 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나카 가쿠에이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민당 내 자신의 파벌들을 적극 동원하기 시작했다. 소위 친다나카 성향의 의원들은 록히드 사건 수사가 정권의 표적수사라고 주장하며 미키 다케오를 끌어내릴 궁리를 시작했다. 미키 타케오는 자민당에서는 소수파였기에 위치가 꽤 불리했다.

자민당내 대표적 반미키 성향을 지닌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사건수사를 서두르는 미키를 "너무 까분다"며 비판했고 다나카와 결탁해 1976년 5월 7일 회동을 가진 끝에 미키를 총리 자리에서 해임시키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오히라계, 후쿠다계, 시이나계, 미즈타계, 후나다계 등 대부분의 계파들이 여기에 찬동했다.(미키 내림) 유일하게 나카소네계만 미키 총리 쪽에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10].

일본 국민들은 이를 록히드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라고 분개했으나 다나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찬동하는 계파들과의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런 가운데 요시나가 유스케를 수사주임으로 하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례적으로 7월 26일 다나카를 체포했다.[11] 이를 나카소네계의 법무대신 이나바 오사무의 역지휘권 발동[12]으로 간주한 다나카계는 맹공을 퍼부었다.

2.5. 미키 내림과 재판

다나카의 체포로 다나카와 자민당내 다수파들은 다나카의 체포로부터 1개월 안 되는 8월 24일 반주류 6파에 의한 "거당 체제 확립 협의"를 결성했다. 미키는 9월에 개각을 실시했는데 여기서 다나카계의 입각은 과학기술청장관 1명 뿐이었다. 이는 미키도 다나카와의 대결 자세를 재차 천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와중에 자민당은 미키가 중의원 해산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전후 유일한 임기 만료에 의한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맞이했다. 1976년 12월 5일 치러진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록히드 사건의 여파를 받아 자민당이 8석을 잃는 등 사실상 패배해 미키는 패배의 책임을 지고 수상직을 사임했다. 뒤를 이어 미키 내림을 주도한 후쿠다파의 리더의 후쿠다 다케오가 수상에 취임했다. 더불어 이 선거에서 다나카는 니가타 3구에 출마해 168,522표를 획득해 최다득표 당선 기록을 세웠다.

한편 수사가 진행되던 가운데 사건을 취재하고 있던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기자 타카마츠 야스오가 1976년 2월 14일에, 코다마의 통역을 담당했던 후쿠다 타로가 6월 9일에, 다나카 가쿠에이의 운전기사인 카사하라 마사노리가 8월 2일에 사망하자 언론과 일본 국민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관계자에 의해 암살된 게 아니냐는 의혹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6년 5월 24일에 개최된 참의원 내각위원회에서 사회당 참의원 의원이 후쿠다나 카사하라 등 관련자에 대한 신변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 질문했지만 "그런 인물로부터의 신변 보호의 의뢰가 없었기 때문에 경찰이 딱히 할일은 없다"는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답변을 한 바로 다음 달에 후쿠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다시 관련자들의 신변 보호 필요성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정치가 이외의 민간인에 대해서 신변 보호를 하지 않아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다나카 등 구속된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1977년 1월 27일에 시작되었다. 1983년 10월 12일 다나카에게 징역 4년에 추징금 5억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이 판결에도 다나카는 판결에 불복하고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겠다고 뻔뻔한 모습을 보인 탓에 야당은 다나카의 의원직 박탈 결의안을 내며 국회 의사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중의원 의장과 참의원 의장이 중요 제출 법안을 처리해주면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중재안을 제시해 자민당과 야당들이 동의하여 중의원이 해산되었다.(다나카 판결 해산)

2.6. 사건의 결과

다나카는 록히드 사건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의원직을 유지하며 버텼고 다나카 판결 해산 이후에 치러진 제37회 중의원 선거에서도 자신의 지역구인 니가타 3구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고 다케시타 노보루에 대한 일본 우익 세력의 공격에 배후로 지목되는 등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뻔뻔한 다나카에게 격분해 자민당은 되려 역풍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해 신자유클럽[13]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해야만 했다.

록히드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국가기관이 되었고 사건 이후에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14]

세가(제작사는 코어랜드, 반프레스토의 전신)에서 발매한 게임 곤베에의 아임 쏘리( 다나카 가쿠에이 주인공 게임)는 이 사건을 패러디한 게임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오사노 겐지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소환되었을 때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에 대해서는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記憶にない!)"를 연발해서 유행어가 되었다. 과연 이게 나중에 일본 바로 옆의 모 나라에도 퍼져서 정치인들이 자신들한테 불리한 질문이 나올때마다 널리 써먹게 되었는지는 불명.[15] 다만 이건 비단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기한테 불리한 질문이 들어오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거나 말을 돌리거나 대답을 회피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는만큼 단순히 오사노 겐지로 인해서 퍼졌다고 볼 순 없다.

참고로 마에노라는 우익 활동가 겸 포르노 배우가 (배신자) '코다마에게 천벌을 내린다'며 소형 비행기를 몰고 고다마의 집에 특공을 했는데 정작 목표인 고다마는 다른 곳에서 자고 있었기에 무사했고 마에노 본인만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저택 일부가 불에 타고 가정부가 부상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충돌할 때 일장기 완장을 달고 '천황폐하 만세'라고 외치는 등의 행동을 해 일본 언론은 그를 '최후의 카미카제'로 불렀다.



록히드 사건 당시 고다마에 대한 영상. 법원 소환 때 지병을 이유로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 고다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카미카제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L-1011이 퇴역하기 1년 전인 1994년 당시의 공항 착륙 영상.

아이러니하게도 전일본공수는 이 난리를 치며 도입한 L-1011을 노후화되어 대체기인 보잉 767에게 물려주고 1995년에 퇴역시킬 때까지 단 한 차례의 사고도 없이 아주 잘 써먹었다. 물론 성능이 부실한 물건을 뇌물 먹여가며 판매하는 사례는 차고 넘쳐서 L-1011 또한 그런 고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해당 문서의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듯 L-1011의 기체 자체는 매우 우수했다. 단지 롤스로이스 자금난 등으로 인해 꺼려졌던 문제고 그로 인한 와중에 도입 과정이 구렸던 거지......

반면에 록히드의 뇌물 공세로 인해 재고가 되었던 DC-10의 경우 화물칸 문 잠금 장치에 문제가 있으면서 맥도넬 더글라스사가 이를 알고도 숨겼다는 문제가 있었으며, 이 사실을 모르던 터키항공이 이를 임차했다가[16] 추락 사고를 겪어 한국인 2명을 포함한 탑승객 346명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기체에는 일본인이 48명이 타고 있었으며[17] 이들 중 15명은 신원조차 확인되지 못했다.

3. 사건의 남은 의문

일본을 뒤흔든 사건이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다.

가장 큰 의문은 코다마를 통해 흘러간 21억엔(한화로 210억)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코다마가 P-3 오라이언의 도입 로비에 이 자금을 쓴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이 21억엔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뿌린 건지는 끝내 해명되지 않았다.

도쿄지검 특수부도 이 문제에 매달렸으나 코다마는 끝내 이 부분에 대해선 침묵했고 증거도 인멸해 버리면서 이 자금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고 P-3 오라이언 도입 로비 부분은 결국 법정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다만 코다마의 필사적인 21억엔 인멸은 역설적으로 이 자금의 행방이 드러나면 가장 크게 치명타를 입을 존재가 있다는 점은 증명한다고 볼 수 있으며 트라이스타 도입 로비보다도 P-3 오라이언 도입 로비가 더 중대한 범죄 행위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 주범이자 치명타를 입을 그 사람이 다나카라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을 뿐이다.

4. 관련 문서



[1] 이것도 F-104 판매건이다. 일본은 원래 F-11 슈퍼타이거를 구매하려고 했는데 이 로비로 F-104구매로 유턴했다. [2] 1995년 마틴 마리에타와 합병하여 현재의 록히드 마틴이 되었다. [3] 록히드는 프롭기 시절만 해도 일렉트라 컨스텔레이션 등으로 성공의 연속을 이어나갔으나, 제트기 시대가 도래하고 서둘러 제트기를 출시한 보잉이나 맥도넬 더글라스와 달리 록히드는 계속해서 L-188과 같은 프롭기를 고수했다가 시장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거기다 L-188의 치명적인 설계결함으로 인해 사망사고까지 잇따라 발생하면서 록히드의 민항기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찍게된다. [4] 다만 해당 기체는 워낙 결함이 많아 사고가 거진 재앙급으로 발생했고 그로 인해 피트 콘래드까지 기용한 광고를 펼쳤음에도 제조사인 MD사 보잉에 합병되며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정도로 폭망했다. [5] 소위 M자금에 관련된 사건. 전후 일본에서는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압수했다는 M자금의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를 가지고 사기를 치는 자들이 종종 있었다. [6] 당시 일본 극우의 행동대장격으로 우익정치권과 기업인 그리고 야쿠자 사이를 연결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브로커였으며, 죽기 직전에 스스로 CIA의 공작원이었다고 고백했다. 재일교포 야쿠자로 유명한 정건영의 후원자로 1965년 한일협정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7] 코쿠사이 흥업사의 기업주로 운수산업가였다. [8] 거의 국제 상거래에서 중개인에게 지불하는 합법적인 수수료로 커버할 수 있는 로비금액만 투입되었다고 한다. [9] 지금도 문제지만 당시 일본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과 같이 부패가 심했던 나라였다. [10] 요시다 시게루- 사토 에이사쿠-다나카 가쿠에이의 전횡에 질려 버린 당시 자민당 중진들이 당개혁의 일환으로서 총리-총재파벌에서 당 간사장을 내는 관례를 포기하고 적당한 중간파벌에서 간사장을 내기로 합의하면서 미키 정권의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나카소네였다. 게다가 미키와 나카소네는 1950년대말까지 보수 주류파가 아닌 보수 방계의 정당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나카소네는 미키 내각 퇴진운동을 적극 저지하고 나섰다. [11] 이로 인해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상 최초로 구속된 선진국 국가원수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12] 쉽게 말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다나카를 체포했다는 이야기다. [13] 고노 요헤이 등의 6명의 자민당 의원들이 다나카 가쿠에이에 반발하여 자민당을 탈당해 결성한 온건보수 신당. [14] 지금도 신뢰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데 아베의 최측근 자민당 의원이 중국 기업에게 뇌물을 받았다가 체포되어 구속수사가 일어날 정도였다. 참고로 비트코인도 이쪽에서 수사를 하고 있다. [15] 비정상회담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16] 981편 사고기의 기체 등록번호도 TC-JAV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 [17] 대부분이 취직한 회사 생활을 하기 전 단체로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