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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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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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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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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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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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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에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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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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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소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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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요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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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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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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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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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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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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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시마 쇼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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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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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이도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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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마루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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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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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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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야마 세이로쿠
34대
모리 요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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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즈카 히로시
36대
가토 고이치
37대
모리 요시로
38대
노나카 히로무
39대
고가 마코토
40대
야마사키 타쿠
41대
아베 신조
42대
타케베 쓰토무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4대
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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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키 분메이
46대
아소 다로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이시바 시게루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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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마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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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즈타 미키오
2대
츠카다 주이치로
3대
미키 다케오
4대
후쿠다 다케오
5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6대
후나다 나카
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대
후쿠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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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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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오키노리
11대
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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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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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기 무네노리
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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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토 류타로
18대
미즈타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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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 미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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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노 라이조
25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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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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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키 마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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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토시오
29대
아베 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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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로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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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마사요시
33대
와타나베 미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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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케이지로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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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요시로
38대
미쓰즈카 히로시
39대
하시모토 류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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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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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사키 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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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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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테기 도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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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이치 사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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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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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 농림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오카자키 쿠니스케
3대
하야미 세이지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8대
고토 후미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0·16대
시마다 토시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2대
아리마 요리야스
13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14·16대
고도 타쿠오
15대
사카이 타다마사
10·16대
시마다 토시오
17대
고노에 후미마로
18대
이시구로 타다아츠
19대
이노 히로야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전후 농림대신 (1945~1978)
초대
센고쿠 고타로
2대
마츠무라 켄조
3대
소에지마 센파치
4대
와다 히로오
5대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대
히라노 리키조
7대
하타노 카나에
8대
나가에 가즈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9대
스토 히데오
10대
모리 고타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3대
네모토 류타로
15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7대
타코 이치민
18대
우치다 나오야
19대
호리 시게루
20-21·22대
고노 이치로
23·24대
이데 이치타로
25대
아카기 무네노리
26대
미우라 쿠니오
27대
후쿠다 다케오
28대
난조 도쿠오
29대
스토 히데오
30대
고노 이치로
31대
시게마사 세이지
32·33·34대
아카기 무네노리
35대
사카타 에이치
36대
마츠노 라이조
37·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니시무라 나오미
40대
하세가와 시로
41대
쿠라이시 타다오
42대
아카기 무네노리
43대
아다치 도쿠조
4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45대
쿠라이시 타다오
46대
아베 신타로
47대
오이시 부이치
48대
스즈키 젠코
49대
나카가와 이치로
농림수산대신(1978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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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나카가와 이치로
2대
와타나베 미치오
3대
무토 가분
4대
가메오카 다카오
5대
다자와 기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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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가네코 이와조
7대
야마무라 신지로
8대
사토 모리요시
9·12대
하타 쓰토무
10대
가토 무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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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사토 다카시
9·12대
하타 쓰토무
13대
호리노우치 히사오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15대
야마모토 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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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곤도 모토지
17대
다나부 마사미
18대
미야자와 기이치
19대
하타 에이지로
20대
가토 무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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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오가와라 다이치로
22대
노로타 호세이
23대
오하라 이치조
24대
후지모토 다카오
25대
오치 이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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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28·29대
다마자와 도쿠이치로
30대
다니 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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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야쓰 요시오
32대
다케베 쓰토무
33대
오시마 다다모리
34·35대
가메이 요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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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3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38·39대
이와나가 미네이치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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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마쓰오카 도시카쓰
42대
아카기 노리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4대
엔도 다케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7대
오타 세이이치
48대
이시바 시게루
49대
아카마츠 히로타카
50대
야마다 마사히코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53대
군지 아키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5·56대
니시카와 고야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5·56대
니시카와 고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8대
모리야마 히로시
59대
야마모토 유지
60·61대
사이토 겐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0·61대
사이토 겐
62대
요시카와 다카모리
63·71대
에토 다쿠
64대
노가미 고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7대
노무라 데쓰로
68대
미야시타 이치로
69대
사카모토 데쓰시
70대
오자토 야스히로
63·71대
에토 다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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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e5e5e5
민부·대장경 (1869~1885)
초대
마츠다이라 슌가쿠
2대
다테 무네나리
-
오키 다카토
3대
오쿠보 도시미치
4대
오쿠마 시게노부
5대
사노 쓰네타미
6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전전 대장대신 (1885~1947)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초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2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3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4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6대
이노우에 가오루
7대
마츠다 마사히사
8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9대
와타나베 구니타케
-
사이온지 긴모치
10대
소네 아라스케
11대
사카타니 요시로
12대
마츠다 마사히사
13대
가쓰라 다로
14대
야마모토 타츠오
15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6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17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18대
다케토미 도키토시
19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0대
쇼다 카즈에
2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2대
이치키 오토히코
23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24대
쇼다 카즈에
25대
하마구치 오사치
26대
하야미 세이지
27대
가타오카 나오하루
28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미츠치 추조
30대
이노우에 준노스케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1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2대
후지이 사다노부
33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34대
마치다 추지
35대
바바 에이이치
36대
유우키 토요타로
37대
가야 오키노리
38대
이케다 시케아키
39대
이시와타 소타로
40대
아오키 카즈오
41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42대
가와다 이사오
43대
오구라 마사츠네
44대
가야 오키노리
45대
이시와타 소타로
46대
쓰시마 준이치
47대
히로세 토요사쿠
48대
쓰시마 준이치
49대
시부사와 케이조
50대
이시바시 단잔
전후 대장대신 (1947~2001)
-
가타야마 데쓰
51대
야노 쇼타로
52대
구루스 다케오
53대
기타무라 도쿠타로
-
요시다 시게루
54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
오야 신조
55대
이케다 하야토
56대
무카이 다다하루
5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8-60대
이치마다 히사토
61·62대
이케다 하야토
63대
이치마다 히사토
64대
사토 에이사쿠
65·66대
미즈타 미키오
67-69대
다나카 가쿠에이
70대
후쿠다 다케오
71·72대
미즈타 미키오
73·74대
후쿠다 다케오
75대
미즈타 미키오
76대
우에키 코시로
77대
아이치 기이치
-
다나카 가쿠에이
78대
후쿠다 다케오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79·80대
오히라 마사요시
81대
보 히데오
82대
무라야마 다쓰오
83대
가네코 잇페이
84대
다케시타 노보루
85대
와타나베 미치오
86·87대
다케시타 노보루
88·89대
미야자와 기이치
90대
다케시타 노보루
91·92대
무라야마 다쓰오
93·94대
하시모토 류타로
95대
가이후 도시키
96대
하타 쓰토무
97대
하야시 요시로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98·99대
후지이 히로히사
100대
다케무라 마사요시
101대
구보 와타루
102대
미쓰즈카 히로시
103대
하시모토 류타로
104대
마쓰나가 히카루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105-107대
미야자와 기이치
재무대신 (2001~)
초대
미야자와 기이치
2대
시오카와 마사주로
3-5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6대
오미 고지
7·8대
누카가 후쿠시로
9대
이부키 분메이
10대
나카가와 쇼이치
11대
요사노 가오루
12대
후지이 히로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노다 요시히코
15대
아즈미 준
16대
조지마 고리키
17-20대
아소 다로
21·22대
스즈키 슌이치
23·24대
가토 가쓰노부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외무경 (1869년~1879년) · 외무사무총재 (1873년)
초대
사와 노부요시
2대
이와쿠라 도모미
3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4대
데라시마 무네노리
5대
이노우에 가오루
전전 외무대신 (1885년~1945년)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대
이노우에 가오루
6대
이토 히로부미
7대
오쿠마 시게노부
8대
아오키 슈조
9대
에노모토 다케아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0대
무쓰 무네미쓰
11대
사이온지 긴모치
12대
오쿠마 시게노부
13대
니시 토쿠지로
14대
오쿠마 시게노부
15대
아오키 슈조
16대
가토 다카아키
17대
소네 아라스케
18대
코무라 주타로
19대
가토 다카아키
20대
사이온지 긴모치
21대
하야시 타다스
22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23대
코무라 주타로
24대
우치다 고사이
25대
가쓰라 다로
26대
가토 다카아키
27대
마키노 노부아키
28대
가토 다카아키
29대
오쿠마 시게노부
30대
이시이 키쿠지로
3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32대
모토노 이치로
33대
고토 신페이
34대
우치다 고사이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4대
우치다 고사이
3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36대
이주인 히코키치
37대
마츠이 케이시로
38대
시데하라 기주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9대
다나카 기이치
40대
시데하라 기주로
41대
이누카이 쓰요시
42대
요시자와 겐키치
43대
사이토 마코토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4대
우치다 고사이
45대
히로타 고키
46대
아리타 하치로
47대
하야시 센주로
48대
사토 나오타케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9대
히로타 고키
50대
우가키 가즈시게
51대
고노에 후미마로
52대
아리타 하치로
53대
아베 노부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4대
노무라 기치사부로
55대
아리타 하치로
56대
마츠오카 요스케
57대
토요다 테이지로
58대
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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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대
도조 히데키
60대
타니 마사유키
61대
시게미쓰 마모루
62대
스즈키 간타로
63대
도고 시게노리
전후 외무대신 (1945년~현재)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4대
시게미쓰 마모루
65대
요시다 시게루
66대
가타야마 데쓰
67·68대
아시다 히토시
69·70·71대
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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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74대
오카자키 카츠오
75·76·77대
시게미쓰 마모루
78대
이시바시 단잔
79·80대
기시 노부스케
81·82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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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대
고사카 젠타로
85·86대
오히라 마사요시
87·8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9·90대
미키 다케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91대
사토 에이사쿠
92·93대
아이치 기이치
94대
후쿠다 다케오
95·96대
오히라 마사요시
97대
키무라 토시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98대
미야자와 기이치
99대
고사카 젠타로
100대
하토야마 이이치로
101·102대
소노다 스나오
103대
오키타 사부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04대
이토 마사요시
105대
소노다 스나오
106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107·108대
아베 신타로
109대
쿠라나리 타다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0대
우노 소스케
111대
미쓰즈카 히로시
112대
나카야마 타로
113·114대
와타나베 미치오
115대
무토 카분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6대
하타 쓰토무
117대
가키자와 고지
118대
고노 요헤이
119·120대
이케다 유키히코
121대
오부치 게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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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대
고무라 마사히코
123·124·125대
고노 요헤이
126대
다나카 마키코
12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128·129대
카와구치 요리코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30·131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2·133대
아소 다로
134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135대
고무라 마사히코
136대
나카소네 히로후미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37·138대
오카다 가쓰야
139대
마에하라 세이지
140대
에다노 유키오
141대
마쓰모토 다케아키
142대
겐바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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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대
기시다 후미오
145·146대
고노 다로
147-149대
모테기 도시미쓰
150대
기시다 후미오
151대
하야시 요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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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대
가미카와 요코
153·154대
이와야 다케시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전전 농림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오카자키 쿠니스케
3대
하야미 세이지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4·6대
마치다 추지
5·7대
야마모토 테이지로
8대
고토 후미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0·16대
시마다 토시오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12대
아리마 요리야스
13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14·16대
고도 타쿠오
15대
사카이 타다마사
10·16대
시마다 토시오
17대
고노에 후미마로
18대
이시구로 타다아츠
19대
이노 히로야
9·11·20대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전후 농림대신 (1945~1978)
초대
센고쿠 고타로
2대
마츠무라 켄조
3대
소에지마 센파치
4대
와다 히로오
5대
요시다 시게루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6대
히라노 리키조
7대
하타노 카나에
8대
나가에 가즈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9대
스토 히데오
10대
모리 고타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3대
네모토 류타로
15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12·14·16대
히로카와 고젠
17대
타코 이치민
18대
우치다 나오야
19대
호리 시게루
20-21·22대
고노 이치로
23·24대
이데 이치타로
25대
아카기 무네노리
26대
미우라 쿠니오
27대
후쿠다 다케오
28대
난조 도쿠오
29대
스토 히데오
30대
고노 이치로
31대
시게마사 세이지
32·33·34대
아카기 무네노리
35대
사카타 에이치
36대
마츠노 라이조
37·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니시무라 나오미
40대
하세가와 시로
41대
쿠라이시 타다오
42대
아카기 무네노리
43대
아다치 도쿠조
4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45대
쿠라이시 타다오
46대
아베 신타로
47대
오이시 부이치
48대
스즈키 젠코
49대
나카가와 이치로
농림수산대신(1978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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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나카가와 이치로
2대
와타나베 미치오
3대
무토 가분
4대
가메오카 다카오
5대
다자와 기치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대
가네코 이와조
7대
야마무라 신지로
8대
사토 모리요시
9·12대
하타 쓰토무
10대
가토 무쓰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1대
사토 다카시
9·12대
하타 쓰토무
13대
호리노우치 히사오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15대
야마모토 도미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6대
곤도 모토지
17대
다나부 마사미
18대
미야자와 기이치
19대
하타 에이지로
20대
가토 무쓰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1대
오가와라 다이치로
22대
노로타 호세이
23대
오하라 이치조
24대
후지모토 다카오
25대
오치 이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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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28·29대
다마자와 도쿠이치로
30대
다니 요이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1대
야쓰 요시오
32대
다케베 쓰토무
33대
오시마 다다모리
34·35대
가메이 요시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36대
시마무라 요시노부
37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38·39대
이와나가 미네이치
27·40대
나카가와 쇼이치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1대
마쓰오카 도시카쓰
42대
아카기 노리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4대
엔도 다케히코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43·45·46대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47대
오타 세이이치
48대
이시바 시게루
49대
아카마츠 히로타카
50대
야마다 마사히코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4·51·52대
카노 미치히코
53대
군지 아키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5·56대
니시카와 고야
{{{#!wiki style="margin: -16px -11px" }}}
55·56대
니시카와 고야
54·57대
하야시 요시마사
58대
모리야마 히로시
59대
야마모토 유지
60·61대
사이토 겐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0·61대
사이토 겐
62대
요시카와 다카모리
63·71대
에토 다쿠
64대
노가미 고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5·66대
가네코 겐지로
67대
노무라 데쓰로
68대
미야시타 이치로
69대
사카모토 데쓰시
70대
오자토 야스히로
63·71대
에토 다쿠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1946년~1952년)
초대
젠 케이노스케
2대
이시바시 단잔
3대
타카세 소타로
4대
와다 히로오
5대
쿠루스 타케오
임시대리
아시다 히토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6대
이즈미야마 산로쿠
임시대리
스토 히데오
7대
아오키 타카요시
8대
스토 히데오
경제심의청장관 (1952년~1955년)
1대
스토 히데오
2대
야마자키 타케시
3대
이케다 하야토
4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5대
미즈타 미키오
6대
오카노 키요히데
7대
아이치 기이치
8-9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경제기획청장관 (1955년~2001년)
1-2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3-4대
우다 고이치
3·4대
우다 고이치
5대
고노 이치로
6대
미키 다케오
임시대리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7대
세코 코스케
8대
칸노 와타로
9-10대
쿠사미즈 히사츠네
11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임시대리
이케다 하야토
12-13대
미야자와 기이치
14·15대
다카하시 마모루
16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임시대리
사토 에이사쿠
17·18대
미야자와 기이치
19대
칸노 와타로
20대
사토 이치로
21대
기무라 도시오
임시대리
다나카 가쿠에이
22대
아리타 기이치
23대
코사카 젠타로
24대
우치다 츠네오
25대
쿠라나리 타다시
26대
후쿠다 다케오
27대
노다 우이치
28대
쿠라나리 타다시
29대
미야자와 기이치
30대
코사카 도쿠사부로
31대
쇼지 케이지로
32대
고모토 토시오
33대
시오자키 준
34대
고모토 토시오
35대
가네코 잇페이
36대
히라이즈미 와타루
37대
곤도 테츠오
38대
나카오 에이치
39대
하라다 겐
40대
아이노 고이치로
41대
오치 미치오
42대
타카하라 스미코
43대
아이자와 히데유키
44대
오치 미치오
45대
노다 다케시
46대
후나다 하지메
임시대리
미야자와 기이치
47대
다카토리 오사무
48대
쿠보타 마나에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49대
테라사와 요시오
50대
고무라 마사히코
51대
미야자키 이사무
52대
다나카 슈세이
53대
아소 다로
54대
오미 코지
55-56-57대
이케구치 코타로
58대
누카가 후쿠시로
경제 재정 정책 담당대신 (2001년~2003년)
1대
누카가 후쿠시로
2대
아소 다로
3대
다케나카 헤이조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경제 재정 정책 담당) (2003년~)
{{{#!wiki style="margin: -16px -11px"
4·5·6대
다케나카 헤이조
7대
요사노 가오루
}}}
8·9대
오타 히로코
10·11대
요사노 가오루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2대
하야시 요시마사
13대
간 나오토
14대
아라이 사토시
15대
가이에다 반리
16대
요사노 가오루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7대
후루카와 모토히사
18대
마에하라 세이지
19·20대
아마리 아키라
21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22·23대
모테기 도시미쓰
24·25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wiki style="margin: -16px -11px" }}}
24·25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26·27대
야마기와 다이시로
28대
고토 시게유키
29대
신도 요시타카
30대
아카자와 료세이
}}}}}}}}}}}}

일본국 제67대 내각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
福田赳夫 | Fukuda Takeo
파일:fukuda takeo.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905년 1월 14일
군마현 군마군 가네코정
(現 군마현 다카사키시 아시카도정)
사망 1995년 7월 5일 (향년 90세)
도쿄도 기타구
도쿄여자의과대학 부속 아오야마병원
재임기간 제67대 내각총리대신
1976년 12월 24일 ~ 1978년 12월 7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후쿠다 미에
자녀 후쿠다 야스오
손자 후쿠다 다쓰오
오치 다카오
친인척 동생 후쿠다 히로이치
학력 카네코마치니토코 소학교 (졸업)
타카사키 중학교 (졸업)
제1고등학교[1]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프랑스법학 / 학사)
신체 172cm[2]
정당

지역구 군마 3구
의원 선수 14 (중)
의원 대수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약력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수석합격
대장성 주계국장
중의원 의원
제27대 농림대신
제4·8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4·10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70·73-74·78대 대장대신
제99대 외무대신
제36대 행정관리청 장관
제10대 부총리
제8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7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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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정계 입문2.3. 총리 재임 시절2.4. 총리 퇴임 이후
3. 선거 이력4. 여담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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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67대 내각총리대신. 라이벌인 다나카 가쿠에이 각복전쟁을 치른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905년 군마현 군마군 카네코마정[3]에서 태어났다. 최대 정적이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과 반대로 후쿠다는 에도 시대 마을 촌장 격인 쇼야(庄屋)를 대대로 지낸 지역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쿠다는 어릴 때부터 똑똑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대 최고 명문인 제1고등학교를 거쳐서 역시 최고 명문 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고등문관시험에도 수석으로 합격해서 대장성(現 재무성)에 들어가게 된다.

대장성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 들어간지 1년도 안 된 신임 관료가 주영 일본대사관에 재무관으로 가서 3년여간 근무했을 정도였다. 이후 대장성의 핵심 부서인 주계국[4]에서 승진을 거듭해 국장의 자리에까지 올랐고[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왕징웨이 괴뢰정권의 재정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쇼와전공이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을 뿌린 쇼와 전공 사건에 연루되어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대장성에 사표를 내고 물러나게 된다.

2.2. 정계 입문

대장성을 나온 뒤, 관료계의 선배인 기시 노부스케의 권유로 고향 군마현의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정치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한동안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이후 자민당에 입당했고 1958년 자민당 정조회장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인 1959년에 자민당 간사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6월에는 농림수산대신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내각에 입성하게 된다.

1960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자민당 정조회장에 취임하지만, 이케다의 고도 경제 성장 정책에 "이런 식으로 가면 3년 뒤에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고 이케다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면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6] 이를 지켜본 기시가 자신의 파벌을 일부 떼어주어서 후쿠다는 이를 바탕으로 '당쇄신 연맹'을 결성했고 비주류의 입장에서 이케다와 대립했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차세대 주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하는데 대장대신, 간사장,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세간에는 사토의 뒤를 이을 자는 후쿠다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2차 임기를 지낸 사토는 1968년, 차기 총재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형인 기시의 직계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토의 직계였던 다나카는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토의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고, 결국 사토는 총리를 한 번 더 지내게 된다. 당연히 사토의 세 번째 총리 임기는 후쿠다와 다나카의 보이지 않는 차기 총리 주자 경쟁이 벌어진 시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각복전쟁).

'일본 열도 개조론'을 주창하며 대대적인 고도경제성장과 지역개발을 부르짖은 다나카와는 달리, 재무통이었던 후쿠다는 일본 경제가 안정에 들어선 만큼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주장해 차이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을 주장한 다나카와는 달리 후쿠다는 기시의 노선을 이어받아서 타이완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1972년, 사토가 세 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마침내 후쿠다와 다나카는 총리직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구워 삶은 다나카였던지라 결국 결선투표에서 다나카에게 패배해 총리의 꿈이 미뤄지게 된다. 그러나 후쿠다는 총재 선거 이후 "이제 곧 일본이 후쿠다를 필요로 할 때가 올것이다"라는 강경한 발언을 남겼다.

대신직에서 사임했으나, 197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의 패배로 다나카가 초계파적인 내각구성을 하면서 행정관리청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73년, 오일쇼크와 다나카의 무리한 확장정책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다나카는 내각을 개편하면서 후쿠다를 대장대신으로 임명했고 후쿠다는 감축정책으로 인플레를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1974년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후쿠다는 다나카를 비판하면서 미키 다케오와 함께 장관직을 사임했다.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연루의혹을 폭로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다나카는 결국 1974년 12월에 사임했다. 본래 다나카는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총리로 내세우려고 했으나, 시이나 에츠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국민들이 뿔나있는 상황인데 이런식으로 나가면 앞으로 뭔일이 날지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게 된다.

미키 내각에서 후쿠다는 다시 부총리 겸 경제기획청 장관에 임명되어 경제 안정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미키가 록히드 사건의 엄정 수사를 다짐하며 다나카를 압박하게 되자, 위기를 느낀 다나카는 미키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민당의 모든 계파들을 구워삶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최대 정적인 후쿠다에게도 연대를 제안했고, 총리직에 욕심이 있던 후쿠다는 이를 낼름 받아먹었다. 결국 미키파와 나카소네파를 제외한 모든 자민당 계파가 반미키로 돌아섰고 1976년 선거 패배로 미키는 결국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때 후쿠다는 재빨리 손을 쓰게 되는데, 다나카와 긴밀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연대를 제안했다. 오히라도 이 제안에 응해 결국 양측 사이에 밀약이 맺어지게 된다.(오후쿠 밀약사건) 밀약의 내용은 후쿠다가 2년 총리를 한뒤에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준다.라는 것이었다. 오히라가 후쿠다와 연대해버리면서 다나카도 손을 쓸 방도가 없게 되어, 자민당 총재선거는 후쿠다가 단독 입후보해 투표없이 총재가 되었고 정부수반 지명투표에서 과반을 조금 웃도는 득표로 마침내 대망의 총리가 되게 된다.

2.3. 총리 재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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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2월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썩 좋지는 않았다.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지라 우익적 성향을 가진 후쿠다였던 탓에 당내는 물론 진보 성향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힘으로라기 보다는 계파간의 밀약으로 총리가 된 탓에 신선미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 71세인 고령의 나이 탓에 과연 총리를 잘할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어린 시각도 있었다.

이런 우려를 후쿠다는 "나는 메이지 38세"라고 말하면서 젊음을 어필했는데 후쿠다가 태어난 해가 메이지 38년이라 이런 어필을 했다. 그리고 오히라를 당 간사장에 임명하고 오히라파를 입각시켜서 당내 안정을 도모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라서 197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50석대 정도를 확보해서 참패하고 참의원이 여야백중에서 자민당이 소수여당으로 전락하는 여소야대로 변모해서 총리에서 조기퇴진할것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때마침 내분이 일던 사회당에서 일부계파가 탈당하며 사회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따로 차리며 세력이 누수되며, 당초 예상보다는 선전하며 의석을 유지할수있었고, 이런 승리를 바탕으로 당 밖에 지원조직인 '자유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우익 작곡가 이즈미 도시로를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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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첫 해인 1976년 2월 6일 식사시간 중. 메밀국수는 후쿠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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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첫 해인 1976년 2월 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해 9월 28일, 적군파가 일본항공의 여객기를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카 일본항공기 납치사건) 이때 적군파는 몸값 600만 달러와 적군파 6명의 죄수석방을 하지 않으면 미국인 인질부터 살해하겠다고 협박했고, 후쿠다는 "사람의 목숨은 지구보다 더 무겁다"라고 말하면서 이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후쿠다의 이런 조치는 논란을 일으켰는데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뜨려서 결국 더 많은 테러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미국인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내린 결단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한때 이로 인해 떨어졌던 후쿠다 내각의 지지율은 재임중에 회복되었고 후쿠다는 중국과의 외교정상화와 적극적인 동남아시아 외교를 전개했다. 이는 마닐라에서 발표한 후쿠다 독트린으로 나타나게 된다. 1978년에는 덩샤오핑이 일본을 방문해 '중일 평화우호조약'의 조인식을 가지게 된다.

당내 파벌정치의 해소를 목적으로 당원들이 참여하는 총재 예비투표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약속대로 2년이 지나 이제 밀약대로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어야 했지만 후쿠다는 "세계가 후쿠다를 원한다" 라면서 재선도전을 선언해버렸다. 이에 뿔이난 오히라는 다나카와 연대했고 후쿠다가 자신을 언제 쳐낼지 몰라 불안해하던 다나카는 오히라를 총리로 만들고자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 총재 예비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당원명부는 비공개가 원칙이었으나, 다나카는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이 비공개 당원명부를 빼돌리게한 다음 자신의 조직을 풀가동해 당원들과 1:1로 접촉하면서 오히라 지지를 호소했다.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데에는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세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예비선거의 초반에는 후쿠다가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후쿠다는 당내 파벌해소라는 명분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다나카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고 방심하는 우를 범해버렸다. 결국 여론조사와는 달리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오히라에게 큰 차이로 패배했다. 그래도 말 그대로 예비선거에 불과했던 탓에 후쿠다파의 소장파 의원들인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7]은 본선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했다. 그러나 후쿠다는 이미 이전에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후보는 본선에 나가면 안되지 않나?"라고 말을 뱉어버린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결국 후쿠다는 "민심은 곧 천심이라지만 가끔 천심 중에도 이상한 천심은 있는 모양입니다. 패장은 군사를 논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말하며 본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후쿠다가 본선 출마를 포기한 데에는 억지를 쓰고 본선에 출마해도 결국 국회의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본선에서는 다나카의 입김으로 패할것이 뻔하기 때문에 추한꼴이 되기 전에 깨끗이 물러난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사람들은 만약 후쿠다가 오히라와의 밀약을 깨지 않았다면 이후 다나카 천하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2.4. 총리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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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 31일. 나이 들 수록 눈꺼풀이 점점 쳐지더니 거의 감겨버렸다.

비록 물러나긴 했으나, 다나카의 공작으로 오히라가 총리가 된것을 잘 알고 있던 후쿠다는 비주류로서 오히라와 각을 세웠다. 사실상 오히라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고 세간에는 오히라 내각은 "다나카 카게(그림자) 내각"이라고까지 불리는 상황이었다. 이후 열린 선거에서 자민당이 불과 1석밖에 상실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오히라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강하게 비난했고, 오히라도 지지않고 맞서서 자민당은 사상 초유의 내홍을 겪게 된다.(시토카 항쟁)

결국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관례와는 달리 자민당은 극도의 내홍으로 계파별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나카파 등은 오히라에게 투표했고 후쿠다도 자신의 파와 지지하는 계파(미키파, 나카소네파)들을 규합해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나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만다. 이후에도 후쿠다는 계속 오히라와 대립했는데 사회당이 제출한 오히라 내각 불신임안 떡밥을 낼름 받아먹어서 자신과 지지하는 계파(후쿠다파, 미키파)들을 모두 국회 본회의에 불참시켜서 내각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게 해버렸다.(나카소네파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리 되자 오히라는 사상 초유의 중참 동시선거로 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선거 초반 여론은 자민당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정권교체까지 이어질 정도의 상황이었지만, 이 와중에 오히라 총리가 돌연사하면서 여론이 급반전 되었다. 오히라가 죽은 마당에 후쿠다는 더이상 각을 세우기가 어려웠고 자민당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오히라의 사망 때문에 후쿠다의 입지는 많이 약해졌고, 그 틈을 다나카가 치고 들어가 다나카는 어둠의 쇼군이라 불리며 총리를 세우고 갈아치울 정도로 뒤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나카 때문에 총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스즈키 젠코[8]가 후쿠다, 미키등과 연합하고 야당인 공명당, 민사당과도 연대해 다나카파의 2인자인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실행했다.( 니카이도 옹립구상) 결국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자민당의 원로들이 퇴장하게 되면서 후쿠다도 차세대 주자인 아베 신타로에게 자신의 파벌을 물려주고[9] 뒤로 물러나게 된다. 한편 이 니카이도 옹립구상의 여파로 다나카파에서 점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이내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다나카파가 분열되어 다나카 역시 입지가 축소되고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둘의 라이벌 관계는 마무리된다.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고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에서 물러나면서 모리 등이 후쿠다를 다시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으나 아베 신타로가 반대했고, 후쿠다는 이미 늙었다면서 이를 고사했다.

1990년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장남인 야스오에게 본인의 지역구를 물려주었다. 본래 후쿠다는 정치에 큰 뜻이 없었던 장남 야스오보다는 차남인 유키오를 후계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결국 야스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그러나 야스오가 그리 탐탁지 못했던 후쿠다는 늘 "저 녀석은 낯짝이 얇아서 정치는 못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의 예측대로 야스오는 총리직을 오래 지키지 못하고 1년만에 사임했다.

1995년 만성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향년 90세.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군마 3구

[[무소속(정치)|
무소속
]]
46,531 (14.53%) 당선 (2위) 초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665 (16.46%) 당선 (4위) 재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1,090 (19.42%) 당선 (2위) 3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8,027 (27.37%) 당선 (1위) 4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2,099 (29.27%) 당선 (1위) 5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5,378 (29.58%) 당선 (1위) 6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0,573 (29.68%) 당선 (1위) 7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9,466 (27.39%) 당선 (2위) 8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8,281 (46.20%) 당선 (1위) 9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8,736 (36.30%) 당선 (1위) 10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542 (30.24%) 당선 (1위) 11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8,542 (31.55%) 당선 (1위) 12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9,100 (32.93%) 당선 (1위) 13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0,500 (29.37%) 당선 (1위) 14선

4. 여담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후쿠다 다케오는 다나카 가쿠에이와 더불어 치열하게 전쟁을 치른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출신부터 성향 차이가 극명했다.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고시 수석, 대장성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후쿠다와는 달리 다나카는 농가의 아들로 정규 고등학교[10] 졸업장조차 없이 밑바닥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다나카는 자연히 집안의 배경이나 자신의 경력이 일천한 탓에 문어발식으로 인맥을 넓히고 세력을 구축해 나갔는데 이런 탓에 후쿠다는 다나카와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끝내 다나카를 누르지는 못했다. 다나카는 돈과 숫자의 힘에 의존하는 정치를 했는데[11] 후쿠다는 이를 무식하다고 보면서도 결국 현실적으로는 쪽수의 힘에 당해낼 재간은 없었던 셈이다. 심지어는 후쿠다파 의원들 중에서도 다나카의 돈을 받아먹어서 X맨 짓을 한 의원들이 여러 있었을 정도였다니 말 다한 셈.

명문가 출신의 거물급 정치인임에도 생각보다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여자 관계도 깨끗했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후쿠다의 가장 큰 패착을 미키 다케오를 총리직에서 끌어내리는데 동조한 것과 오히라와의 밀약을 깬 것에 두고 있다. 다나카를 밀어낼 결정적인 구도를 만들 기회가 있었지만 총리직에 대한 욕심이 이런 기회를 걷어차게 만들어서 결국 각복전쟁에서 다나카가 승리하게 된 것이라는 것. 물론 미키 내림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라와의 밀약을 지켰어도 다나카를 이겼을 거라는 보장도 없기는 하지만.

정책적으로는 경제통이었던 동시에 반 케인스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다나카가 과도한 성장정책으로 경제혼란을 야기했던것과는 달리 균형재정과 안정적인 경제운용을 주장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세계경제가 자국 위주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돌아설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수출 위주의 일본경제가 그런 국면이 되면 어려움에 처할수 있으니 내수 시장을 키워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예상과는 다르다. 무역장벽은 공산권 붕괴에 따른 전세계적인 시장 확대, WTO 등의 이벤트 등을 거치면서 그 이후로도 점차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꼭 그런 정책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예전과는 달리 이미 일본은 70~80년대만 해도 대규모 경제를 자랑했으므로 마냥 경상수지 흑자에만 의존하는 것에도 충분히 한계가 있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12] 이는 오늘날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어찌보면 일본의 갈라파고스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것은 후쿠다일지도?

동시에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였던 탓에 우익적인 성향이 강했다. 비록 다나카가 추진했던 중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완결짓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중적인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이런 성향은 자신이 중매를 서주기도 했던 기시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에게로 고스란히 계승 되었다. 또한 총리 시절에 4번에 걸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당시로서야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이었다면 충분히 논란이 되고도 남을 문제다.[13]

포항제철의 설립자였던 박태준 전 총리가 모 인터뷰에서 후쿠다를 은인이라고 할 만큼 포철 설립 당시의 대장대신으로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14] 박정희가 직접 후쿠다 부부를 초청해 1979년 6월19일부터 23일까지 방한하기도 했다. 물론 정치적으로 보자면 일본내 유력 계파 수장급 정치인을 초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많고 탈많은 통일교의 후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장대신 재임중인 1974년에 문선명의 강연회에 참석해 문선명과 한국식으로 포옹을 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사진. 통일교는 일본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 탓에 여론이 좋지 않아 세간에서는 후쿠다와 통일교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후쿠다는 "나는 문선명의 사상은 잘 모르지만 나의 평소의 신조인 협조와 연대를 말하는 게 좋았을 뿐", "파티 자리에서 무슨 말을 못하냐" 등으로 맞섰다. 어찌어찌 넘어간것 같긴 하지만, 그때 강연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후쿠다는 "문선명은 아시아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기도 했다. 흔한 정치인의 립서비스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제 자민당 일부 계파와 통일교가 꽤나 친밀한 사이였던걸 감안하면 묘하기도 하다.
후쿠다 다케오: 아시아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났다. 그 이름은 문선명이라고 한다.(アジアに 偉大なる 指導者 現る. その 名は 文鮮明と いう 事で ある) 출처
사실 일본에서 한창 교세를 확장하던 통일교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게 기시 노부스케였고, 후쿠다는 기시의 후계자격인 인물이었으니 당연히 유착 의혹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손자 후쿠다 다쓰오가 할아버지의 통일교 유착 의혹 때문에 괜히 찔렸는지 "그런 일은 추호도 없었고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망언을 하는 바람에 국민 신뢰를 잃어, 다쓰오는 아베 암살 직후 이루어진 개각에서 당 총무회장이라는 요직에서 부간사장으로 좌천되어 3대 총리 가문 달성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 큰 위기를 맞았다.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를 귀여워해서 그를 후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초대 명예회장으로 취임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의 홈 구장 첫 경기에 시구를 하기도 하는 등 프로스포츠 쪽과도 인연이 많았다고 한다.[15]

국민영예상이 그의 재임 시기에 만들어졌다.

야마자키 도요코의 소설 화려한 일족에 등장하는 나가타(永田) 대장대신의 모델인 걸로 알려져있다. 이케야마 총리 한테 대들다 찬밥을 먹었던 과거나 사하시 총리의 신뢰를 받고 다부치 간사장과 총재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게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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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일본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인 구제고등학교 중에서도 가장 전통이 깊고 유력 동문이 많아 제일로 꼽혔다. 사실 구제고는 고등학교보단 대학 예과에 가까운 곳으로, 제1고도 원래 구제 도쿄대학의 예비문이었으나 제국대학 개편 때 분리된 것이고,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신제 도쿄대학에 재통합되었다. [2] 당시 일본인 남성 평균 신장이 160대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장신이다. 이 영향으로 그의 아들인 후쿠다 야스오나 손자인 후쿠다 다쓰오 역시 출생 당시 일본인 남성 평균을 한참 웃도는 장신이다. [3] 군마현 타카사키시 [4] 예산 편성을 담당하는 곳으로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재무성의 핵심이다. 한국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실이 핵심인 이유와 같다. [5] 대장성 주계국장은 거의 무조건 다음 인사에서 사무차관으로 승진하는 자리로, 대장성 관료 중 명백한 2인자다. [6] 당시 이케다 정권의 위세를 생각하면 간덩이가 단단히 부은 셈이었다. [7] 두 사람은 당시 불혹밖에 안 된 젊은 나이였다. [8] 아소 다로의 장인이자 스즈키 슌이치의 부친이다. [9] 자신이 창립한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의 회장 자리에 아베 신타로의 아들 아베 신조가 2021년 11월 취임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실질적인 수장은 아베였다. [10] 고등소학교(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공업학교로 들어가서 다나카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했다. [11] 참고로 한국에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쪽수 정치를 선호했던 정치인이었다. 물론 이쪽은 민주화 운동한다고 돈을 많이 뿌리긴 했지만 태생이 금수저였다는게 차이라면 차이. 그리고 묘하게 YS의 차남 김현철이 후쿠다 다케오랑 닮았다. [12] 한 마디로 외국 경제가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다. [13] 참고로 아들인 야스오는 의외로 아버지와는 달리 자민당치고 온건한 스탠스였다. [14] 박태준 총리는 후쿠다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서 도쿄까지 급히 날아간 적도 있다. 박태준 총리와 후쿠다의 인연이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데 그래서 인지 박태준 총리는 후쿠다 가와 대를 이어 인연을 이어 후쿠다 야스오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15] 더불어 후쿠다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인 세이부 그룹의 오너였던 쓰쓰미 가와도 가까운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