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9:24:19

가네마루 신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C3C965"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제1차 요시다 내각 가타야마 내각 아시다 내각 제2·3차 요시다 내각
시데하라 기주로 아시다 히토시 니시오 스에히로 하야시 조지
국무대신(복원청 총재) 외무대신 무임소 국무대신 후생대신
제4·5차 요시다 내각 제1·2·3차 하토야마 내각 제1차 기시 내각 제2차 기시 내각
오가타 다케토라 시게미쓰 마모루 이시이 미쓰지로 마스타니 슈지
국무대신(내각관방장관) 외무대신 행정관리청 장관 겸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행정관리청 장관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제1·2차 다나카 내각 미키 내각 제2차 오히라 내각
고노 이치로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이토 마사요시
1964 도쿄올림픽 담당대신 환경청 장관 경제기획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다케시타 내각 미야자와 내각
가네마루 신 미야자와 기이치 와타나베 미치오 고토다 마사하루
민간활력도입담당대신 대장대신 외무대신 법무대신
호소카와 내각 무라야마 내각 제1차 하시모토 내각
하타 쓰토무 고노 요헤이 하시모토 류타로 구보 와타루
외무대신 통상산업대신 대장대신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노다 제1차 개조내각 제2·3·4차 아베 내각 스가 내각
간 나오토 오카다 가쓰야 아소 다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재무대신
재무대신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000,#e5e5e5
경찰예비대본부장관·경찰예비대 상당·해상보안청장관 (1950년~1952년)
초대
마스하라 케이키치
2대
오오하시 타케오
3대
야나기사와 요네키치
방위청장관 (1952년~2007년)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1대
기무라 토쿠타로
2대
오무라 세이치
3대
스기하라 아라타
4대
스나다 시게마사
5대
후나다 나카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임시대리
기시 노부스케
6·7대
고타키 아키라
8대
츠시마 슈이치
9대
사토 키센
10대
이노 시게지로
11대
아카기 무네노리
12대
에사키 마스미
13대
니시무라 나오미
14대
후지에다 신스케
15대
시가 켄지로
16·17대
후쿠다 도쿠야스
18·19대
고이즈미 준야
20대
마츠노 라이조
21대
칸바야시야마 에이키치
22·23대
마스다 가와시치
24대
아리타 기이치
25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6대
마스하라 케이키치
27대
니시무라 나오미
28대
에사키 마스미
29·30대
마스하라 케이키치
3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32대
우노 소스케
33대
사카타 미치타
34대
미하라 아사오
35대
가네마루 신
36대
야마시타 칸리
37대
구보타 엔지
38대
호소다 키치조
39대
오무라 쇼지
40대
이토 소이치로
41대
타니가와 가즈오
42·44대
쿠리하라 유코
43대
가토 고이치
45·62·63대
가와라 츠토무
46대
타자와 키치로
47대
야마사키 타쿠
48대
마츠모토 주로
49대
이시카와 요조
50대
이케다 유키히코
51대
미야시타 소헤이
52대
나카야마 도시오
53대
나카니시 케이스케
54대
아이치 가즈오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5대
칸다 아츠시
56대
타마자와 도쿠이치로
57대
에토 세이시로
58대
우스이 히데오
59대
규마 후미오
60대
누카가 후쿠시로
61대
노로타 호세이
45·62·63대
가와라 츠토무
64대
토라시마 가즈오
65대
사이토 도시쓰구
66대
나카타니 겐
67·68대
이시바 시게루
69·70대
오노 요시노리
71대
누카가 후쿠시로
72대
규마 후미오
방위대신 (2007년~)
초대
규마 후미오
2대
고이케 유리코
3대
고무라 마사히코
4대
이시바 시게루
5대
하야시 요시마사
6·24대
하마다 야스카즈
7·8대
기타자와 도시미
9대
이치카와 야스오
10대
다나카 나오키
11대
모리모토 사토시
12·17·18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13대
에토 아키노리
14대
나카타니 겐
15대
이나다 도모미
16대
기시다 후미오
12·17·18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19대
이와야 다케시
20대
고노 다로
21-23대
기시 노부오
6·24대
하마다 야스카즈
25대
키하라 미노루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이시이 미츠지로
2대
스나다 시게마사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고노 이치로
5대
마스타니 슈지
6대
이시이 미츠지로
7대
호리 시게루
8대
아카기 무네노리
9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2대
후쿠나가 켄지
13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14대
하시모토 토미사부로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7대
스즈키 젠코
18대
나다오 히로키치
19대
마쓰노 라이조
20대
에사키 마스미
2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2대
쿠라이시 타다오
23대
스즈키 젠코
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타츠오
26대
호소다 키치조
27대
가네마루 신
28대
미야자와 기이치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이토 마사요시
31대
미즈노 키요시
32대
카라사와 슌지로
33대
니시오카 다케오
34대
사토 고코
35대
키베 요시아키
36대
무토 카분
37대
시오카와 마사쥬로
38대
모리 요시로
39대
후카야 다카시
40대
이케다 유키히코
41대
오자토 사다토시
42대
무라오카 카네조
43대
호리우치 미쓰오
44대
규마 후미오
45대
니와 유야
46대
니카이 도시히로
47대
사사가와 다카시
48대
다노세 류타로
49대
고이케 유리코
50대
시오노야 류
51대
호소다 히로유키
52대
노다 세이코
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호소다 히로유키
55대
다케시타 와타루
56대
가토 가쓰노부
57대
스즈키 슌이치
58대
사토 쓰토무
59대
후쿠다 다쓰오
60대
엔도 도시아키
61대
모리야마 히로시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초대
기시 노부스케
2-3대
미키 다케오
4대
카와시마 쇼지로
5대
후쿠다 다케오
6대
카와시마 쇼지로
7대
마스타니 슈지
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9-10대
미키 다케오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12대
후쿠다 다케오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14대
호리 시게루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8대
우치다 쓰네오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로쿠스케
26대
가네마루 신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28대
아베 신타로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30대
오자와 이치로
31대
오부치 게이조
32대
와타누키 타미스케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34대
모리 요시로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36대
가토 고이치
37대
모리 요시로
38대
노나카 히로무
39대
고가 마코토
40대
야마사키 타쿠
41대
아베 신조
42대
타케베 쓰토무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4대
아소 다로
45대
이부키 분메이
46대
아소 다로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이시바 시게루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2대
오노 반보쿠
3-5대
가와시마 쇼지로
6·7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8대
후나다 나카
9·10대
니시무라 에이이치
11대
니카이도 스스무
12대
가네마루 신
13대
오부치 게이조
14대
야마사키 타쿠
15대
오시마 다다모리
16대
고무라 마사히코
17대
아소 다로
}}}}}}}}}


일본국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부총리
가네마루 신
金丸信 | Kanemaru Shin
파일:가네마루신.jpg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colbgcolor=#fff,#1F2023> 1914년 9월 17일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이마스와무라
(현 미나미알프스시)
사망 1996년 3월 28일 (향년 81세)
재임기간 부총리 겸 민간활력도입담당대신
1986년 7월 22일 ~ 1987년 11월 6일
학력 도쿄농업대학 전문부 (졸업)
정당

지역구 야마나시 전현구
의원 선수 12 (중)
의원 대수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약력 구제 니시자키 중학교 생물교사
야마나시현 양조조합 상무이사
중의원 의원 (제28-39대)
우정성 정무차관
제16·24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제34대 건설대신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제14대 긴키권 정비장관
제10대 중부권 개발 정비장관
제23대 수도권 정비위원회 위원장
제3대 국토청 장관
제35대 방위청 장관
제27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26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부총리
민간 활력 도입 담당 대신
자유민주당 부총재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 전2.2. 정계 입문2.3. 정계 은퇴 후 말년
3. 소속 정당4.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12선 중의원 의원, 부총리, 자유민주당 부총재, 간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선 구태 정치인의 대표 격으로 여겨진다.[1]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다나카 가쿠에이의 최측근이었으며, 일본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 간사장, 부총재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총리를 움직이는 흑막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십중팔구는 가네마루 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2] 또한 8, 90년대 당시 일본 정치인 중에 북일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정치인 중 한명으로 1990년 자민당 대표자격으로 일본 사회당 대표와 같이 평양에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하였고 그의 행보는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북일정상회담과 이후 북일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1914년 9월 17일, 일본 제국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이마스와무라(현 미나미알프스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네마루 가문은 양조업으로 돈을 벌고 있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조부는 현내 철도 사업에서 중심적인 인물이었고, 삼촌은 야마나시현의회 의장을 역임한 정치인이었다.

니시노 소학교를 졸업한 이후 구제 고후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불량학생으로 낙인 찍혀 퇴학당한 뒤, 아버지의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구제 미노부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33년에는 도쿄농업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여 유도를 배웠다. 농대 졸업 이후 구제 니시자키 중학교에서 생물학 교사가 되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치거나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1938년, 징병으로 인해 일본군에 입대해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 관동군으로 발령을 받아 만주로 향했으나 감기에 걸린 뒤 늑막염으로 진행되어 창춘에 있는 병원에 입원, 이후 병역면제되어 전역하였다. 귀국 이후에는 이바라키현에 있는 누나집에서 요양을 하다 친가로 돌아와 과수원을 운영했다.

1941년, 대정익찬회 야마나시 지부의 발족으로 익찬회의 준군사 청년조직인 요코샤 소년단의 단장을 맡았다. 이때 야마나시 중앙은행에서 일하며 현내 재계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토리 타다히코의 지우를 얻었다. 1943년에는 야마나시현 양조조합 상무이사로 취임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전국의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술집을 반으로 줄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는 스스로 술집을 폐업하고 동업자에게도 술집을 폐업하라는 명령을 따르도록 촉구했다. 이후 군수산업의 용접에 사용되는 산소를 만드는 "일등공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지만, 패전과 동시에 사업을 접었다.

대전 이후에는 양조업에서 소주를 만드는 "중앙발효화학공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전부터 지우를 얻고 있었던 나토리 타다히코에게 지역 산업 진흥을 위해 철거 예정이었던 "후쿠센 양조공업"이라는 회사의 와인 공장을 인수해 회사명을 "태평양조"로 바꾸어 와인 사업에도 크게 성공했다.

2.2. 정계 입문

어느 세무서에서 '술집은 술을 밀조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이에 분노를 느껴 이 때부터 정계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공직에서 추방되고, 마찬가지로 공직에서 추방된 나토리 타다히코는 소년단 시절 동지들을 모아 "맥들회"를 결성해 가네마루도 이 모임에 참여했다. 1951년 야마나시현지사 선거에서 다른 모임의 추천을 받은 아마노 히사시가 당선되었고, 나토리와 가네마루는 아마노를 용공분자로 적대하였다.

지사 취임 이후 나토리와 가네마루는 아마노에게 접근했다. 1953년 제3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나토리의 친형 히로세 히사타다가 아마노에게 추천을 받고선 출마하자, 선거캠프에 참가해 선거활동에 참여했다. 선거 이후 가네마루는 선거법 위반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지만 증거가 되는 명함 5장을 순식간에 삼켜 기소를 면했다고 한다.

참의원선 이후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가네마루는 중의원 총선거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나토리의 친형인 히로세 히사타다는 " 사토 에이사쿠는 언젠가 반드시 재상이 될 남자다. 선거를 하려면 반드시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가네마루에게 권유하여, 가네마루는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갔다. 그러나 사토는 "너와 같은 어중간한 녀석은 쓸모가 없다."라고 말하며 가네마루를 쫒아냈다. 가네마루는 격노하였으나 이후 히로세의 의원 취임으로 다시 사토를 찾아가 무사히 자민당의 사토파에 들어갔다.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으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트럭의 화물칸에서 유세를 하였다. 또한 자신이 교사 시절 가르쳤던 학생들과 친구들, 자신의 회사 사람들도 선거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선거에서 6만 9354표를 얻어 첫 선거만에 1위로 당선되었으나, 한 달 뒤 아내 가네마루 레이코를 협식증으로 떠나보냈다. 그의 동기에는 전 총리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등이 있고 실제 그들과도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1960년, 일미안보조약 개정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소란이 있었을 때, 당시 중의원 의장을 대신해 의장석에서 국회 회기를 연장시키며[3] 의장석으로 들쳐업고 데려와 회기가 연장되어 조약의 가결과 개정안의 통과를 가능하게 했고, 이 때의 사진이 미국 라이프 잡지에 실렸다.

이후 1961년에 둘째 부인인 가네마루 에츠코와 재혼하여 당시 사토파의 간부였던 호리 시게루가 매주인 역할을 해주어, 이후 호리를 "정치의 스승"이라고 말하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1963년에 우정성 정무차관으로 취임했다.

1972년 가네마루는 자민당 간사장이 된 호리의 지지를 받아 노동대신에 취임한 츠카하라 토시오의 후임으로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4]

그러나 이후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호리가 각료 출신의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하자 이에 반하여 가네마루가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같은 파벌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해 다나카파 결성에 동조했다.

다나카는 가네마루가 총재선에서의 활약을 높게 평가하며 건설대신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제1차 다나카 내각이 성립되었을 때 기무라 다케오가 건설대신을 맡았다. 이후 가네마루는 국회대책위원장에서 유임되었고 제2차 내각에서 건설대신으로 입각하며 자신이 원하던 관직을 얻었다.

차기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는 국토청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또 미키 끌어내리기의 기운이 높아졌을 때, 가네마루는 미키에게 중의원 해산을 권했으나 미키가 해산을 결정하지 않아 이후 미키에게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네마루는 미키의 대항마가 나타나지 않으면 후쿠다 다케오 선에서 정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사이가 틀어져버린 후쿠다와 호리의 관계 수복을 주선하였다.

1976년, 후쿠다 내각 하에 중의원 의원 운영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동시에 호리는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 1977년, 후쿠다 개조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취임했다. 임기 내에는 " 자위대가 외국에 위협을 주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적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게 무슨 방어인가."라며 외국에 적대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후 후쿠다파가 후쿠다의 총재 재선을 위해 중의원 해산 카드를 시전하였으나, 가네마루는 '대의명분이 없는 해산은 안된다.'는 이유로 해산에 반대했다. 결국 중의원이 미해산된 채 총재 선거가 실시되어 다나카파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오히라 마사요시가 후쿠다를 끌어내리고 총리, 총재직에 취임했다. 이후 오히라 내각에서 가네마루는 국회대책위원장에 재취임했다.

1980년, 헌정사상 최초로 중의원과 참의원이 동시에 선거를 치루었을 때, 가네마루는 세대교체론을 주장하며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정권 수립을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뒤에서 나카소네를 밀어주고 있었던 다나카와 가네마루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네마루는 의원 동기인 다케시타 노보루와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1984년, 측근이었던 오자와 타츠오를 간사장으로 내세울 것을 원했던 다나카의 요구에 나카소네가 반발하여 다나카와 적대 관계였던 가네마루를 간사장으로 지명했다. 다음 해 다나카파 내에 훗날 헤이세이 연구회의 전신이 되는 "창정회"를 결성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자신과 적대 관게였던 가네마루가 다케시타를 총리로 내세워 자신을 끌어내리려하는 쿠데타라는 것을 깨달은 다나카는 이 모임을 전격 반대했으나, 발족 이후 다나카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기세는 점점 창정회로 기울기 시작했다. 창정회를 반대하는 파벌 내 세력들을 모으기 위해 일단 창정회를 해산하고, 1987년에 독립된 파벌인 "경세회"를 결성했다. 다케시타가 총리로 취임한 이후 가네마루는 경세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1989년, 소비세 도입으로 인한 불인기와 리크루트 사건의 발생으로 인해 다케시타 내각이 총사퇴했고, 차기 총재로 우노 소스케가 취임했으나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가네마루는 후쿠다 다케오를 총재로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소식을 듣고 실패했다.

그러나 우노 내각이 제15회 참원선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총사퇴를 결정하면, 최대 파벌의 회장이었던 가네마루는 큰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우노의 퇴진 이후 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총재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이를 노려 가네마루는 총재 선거 출마를 고민하지만 다케시타의 반발로 무산되어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로 선출되고 가네마루는 같은 파벌의 젊은 의원 오자와 이치로에게 눈을 돌려 1989년 다케시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자와를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시키는 등 오자와의 강력한 방패가 되었으나, 평소 오자와를 못마땅하게 보던 하시모토 류타로 가지야마 세이로쿠 등 다케시타와 가까운 의원들이 이러한 가네마루의 행동에 반발하였고, 이것이 다케시타파가 분열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90년 9월 24일 가네마루는 자민당 대표단 자격으로 다나베 마코토 전 위원장이 이끄는 일본 사회당 대표단과 같이 조선노동당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틀 뒤인 9월 26일 김일성 주석과 가네마루, 다나베의 3자회담이 열려 이 자리에서 일본 대표단은 가이후 도시키 총리의 친서를 전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북-일 국교 교섭 개시 제안을 하였다. 이에 9월 28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대표가 모여 3당 공동선언을 채택했는데, 공동선언의 내용으로는 북일 국교수립과 식민지 전후 보상에 관한 내용으로 북일관계에 한 획을 건 역사적인 선언이었다.
파일:b06269bb6ed0d9843ddd3cc775664d45.webp
왼쪽부터 가네마루 신, 김일성,다나베 마코토

1991년 자민당 총재선에서 오자와에게 출마를 촉구했으나 본인이 고사하고, 다른 파의 후보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파벌 내에서 하시모토 류타로가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던 가운데, 가네마루와 오자와는 파벌 내의 이론을 무릅쓰고 미야자와 기이치를 지지했고, 와타나베 미치오에게도 지지를 구했다. 미야자와가 총리직에 오른 이후 1992년, 가네마루는 자민당 부총재직에 취임하여 정권이 안정된 뒤 미야자와 내각의 지주가 되었다.

1992년, 참의원선 당시 도치기현에서 야마오카 겐지를 응원 연설하고 있던 도중 우익 인사로부터 총격을 받았으나, 총알은 모두 빗나갔고 가네마루도 무사히 살아났다.

2.3. 정계 은퇴 후 말년

1992년 8월, 사가와 익스프레스에서 정치자금 5억 엔을 개인자산에 축재한 사실이 발각돼( 사가와 규빈 사건) 결국 가네마루는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을 인정했다.[5] 이후 법원에서 벌금 20만 엔이 선고돼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여론이 들끓자 이에 가네마루는 10월 중의원을 사직하고, 다케시타파 회장직에서도 물러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1993년 가네마루가 도쿄지방검찰청에 체포되었는데, 검찰은 그가 '1987년부터 89년까지 소득 약 18억 4230만 엔을 숨기고 10억 3775만 엔을 탈세했다.'고 밝혔다. 가네마루는 수사에서 모든 죄를 인정했으나, 보석으로 가석방된 이후에는 '정계재편을 위한 정치자금'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후 가네마루는 당뇨병으로 인해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되었으나, 마지막까지 형사 공판을 계속 진행하리란 생각으로 끝까지 공판에 임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걱정으로 결국 1996년 3월 21일에 공판이 정지되었다.

1주일 뒤 3월 28일에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1 - 1945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 1958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정당 해산


1958 - 1996 입당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야마나시 전현구

69,354 (17.8%) 당선 (1위) 초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435 (18.5%) 재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2,206 (15.9%) 당선 (4위) 3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339 (17.4%) 당선 (2위) 4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8,660 (17.1%) 5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2,954 (27.4%) 당선 (1위) 6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7,609 (14.2%) 당선 (3위) 7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2,007 (19.7%) 당선 (1위) 8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6,919 (18.4%) 9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6,449 (21.2%) 10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2,530 (22.8%) 11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1,756 (19.7%) 12선[6]


[1] 건설 분야의 이권을 주로 다루고 흑막 정치를 하다가 돈 먹고 퇴진한 게 딱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의 정치인 느낌을 준다. [2] 대표적으로 생추어리의 이사오카 간사장 [3] 의장도 부의장도 아닌 신진 의원이 의장석에서 의사진행을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노령인 데다가 당시 발목을 다친 상태였던 중의원 의장 기요세 이치로를 야당 의원들로부터 엄호하며 의장석으로 인도하였던 일을 가네마루 신이 하였던 것이다. [4] 당시 국회대책위원장은 각료 경험이 있는 입각자가 맡는 것이 관례였고, 각료 경험이 없는 가네마루가 국회대책위원장이 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5] 당시 가네마루의 집을 압수수색을 했는데 금괴들이 여럿 나오게되자 그가 김일성을 통해 금괴를 받았다는 루머가 돌았다. [6] 1992.10.21 의원직 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