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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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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元均
파일:external/www.ilyoseoul.co.kr/95587_50061_1049.jpg
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에 있는 영정
<colbgcolor=#94153e><colcolor=#fff> 이름 원균(元均)
본관 원주 원씨[1]
평중(平仲)
출생 1540년 2월 12일
( 중종 35년 / 음력 1월 5일)
충청도 진위군 여방면 내리
(現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내리마을)
사망[2] 1597년 8월 27일 (향년 57세)
( 선조 30년 / 음력 7월 15일)
경상도 거제현 거제도 칠천량 앞바다
(現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도)
체중 초고도비만, 100kg 전후[3]
부모 부친 - 원준량(元俊良)[4]
모친 - 남원 양씨 양희증(梁希曾)의 딸
형제자매 8남 1녀 중 장남
남동생 - 원연(元埏)[5], 원전(元塼)[6], 원용(元墉), 원지(元墀), 원감(元堪), 원곤(元坤), 원해(元垓)
여동생 - 창녕 성씨 성대충(成大忠)의 처
부인 윤차심(尹次深, 1546 ~ 1642)[7]
자녀 1남 5녀
장남(승적[8]) - 원사웅(元士雄, 1575 ~ 1646 이전)
장녀 - 청주 한씨 한억(韓嶷)의 처
서장녀 - 이신춘(李新春)의 측실
서차녀 - 원정일(元貞一)[9]
서3녀 - 조정견(趙廷堅)의 측실
서4녀 - 정항(鄭沆)의 측실
비고 사후 선무공신에 녹훈.
1. 개요2. 직위3. 생애
3.1. 출생부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3.1.1. 과거 급제3.1.2. 북방에서의 무난한 활동3.1.3. 전쟁 3개월 전, 경상 우수사가 되다
3.2. 임진왜란 발발과 초기 행적
3.2.1. 70여 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3.2.2. 반론3.2.3. 재반론
3.3. 이순신과의 갈등
3.3.1. 이순신의 전공을 가로채다
3.4.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이어받다
3.4.1. 제 꾀에 제가 넘어가 곤장을 맞다
3.5. 칠천량 해전
3.5.1. 생존설
3.6.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전투일지
4. 기록
4.1. 난중일기4.2. 실록4.3. 난중잡록4.4. 달천몽유록
5. 대중매체6. 기타
6.1. 막장인 인간성6.2. 추증 - 선무공신 1등6.3. 원균옹호론
6.3.1. 원균평전6.3.2. 원릉군기념관6.3.3. 원균장군문화벨트시민연대

[clearfix]

1. 개요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자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원문]
선조실록 선조 31년 무술년 (1598) 4월 2일 기사 중 사관의 논평.[11]
조선의 무신. 한국사의 대표적인 똥별로 유명하며 임진왜란기의 대표적인 장수 중 하나였으며, 칠천량 해전의 졸전과 패배, 그 외의 여러 전쟁 패전 등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평판이 좋지 않은 장군 중 하나다.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부산포 해전 등 여러 해전을 이순신과 함께 치렀으나 이순신과의 불화로 잠시 전라병사로 제수되었다가 이후 파직된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올랐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전임자가 공들여 육성해 온 조선 수군이 와해되고 본인도 전사했다. 이 패배는 당시 전황을 크게 악화시키면서 정유재란을 발발시킨 주된 원인으로 평가된다.

오늘날에는 전공을 탐내 아군을 해칠 정도의 탐욕, 칠천량 해전에서의 이해할 수 없는 전략, 군 운용, 나태함, 오만함과 이순신에 대한 지나친 시기 등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이미 당시에도 전반적으로 능력에 비해서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장수로서는 지나치게 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로 인해 원균을 매국노라 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는 매국 행위조차 한 적이 없어 그냥 철저히 무능하고 탐욕스러웠을 뿐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조선이 멸망할 뻔한 피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분명히 간신으로 분류된다. 간신들 중에서 원균처럼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에 피해를 끼친 간신은 소현세자 부부를 모함해 죽이고 청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한 김자점, 중앙 정규군의 봉급미에다 모래와 겨를 섞는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임오군란을 초래하게 하여 중앙 정규군을 공중분해시킨 민겸호가 있다. 다른 간신들은 이들에 비해서는 양반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질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왕 선조는 그에게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중책을 맡겼으며, 결국 이는 큰 대가를 치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후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균의 실책이 이후에 있었던 기적과 같은 승리와 더욱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이순신의 신화와 같은 업적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지만 당시로서는 나라를 큰 위기에 빠트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실제로는 원균이 좋은 장수였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해당 주장은 이미 근거가 없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이 내려졌으며, 이는 정치적 또는 다른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2. 직위

[12]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원릉군
(贈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原陵君)

같은 선무공신 1등이라도 권율 이순신의 경우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은 반면 원균의 경우는 종1품 숭록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와 숭록대부의 사이에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있다. 당시 권율과 이순신에게 각각 영의정 좌의정 및 부원군의 작호가 추증된 반면 원균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군의 작호가 추증되었다. 임금 선조에 의해 억지로 선무공신 1등이 되었는데도 종1품에 머무른 점을 보면 조정에서도 원균의 평가가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간단하다. 임금이었던 선조는 올려주고 싶은데 이에 호응하는 신하가 단 1명도 없고 전부 반대했기 때문인데 그래도 임금의 명령이니 마지 못해 올릴 수 있는 최소한의 추증만 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피땀 흘려 부강하게 키워 놓은[13] 조선 최정예 수군 판옥선을 12척만 남기고 모조리 침몰시키는 대패를 당하고 공적을 위해 인간 백정 행각[14]까지 저지른 주제에 부총리에 해당하는 좌찬성과 검찰총장 기무사령관에 해당하는 판의금부사를 제수받았다니 분에 차고 넘치는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조가 이토록 원균 추증에 매달린 이유는 본인이 직접 발탁하고, 본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은 자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균의 칠천량의 대패의 소식을 듣자마자 "이 패전은 원균의 잘못이 아니라, 하늘이 돕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현실도피를 했고, 전후에는 원균을 집요하게 1등공신으로 추증하여 잘못된 인선과 잘못된 작전명령의 최종책임자인 선조 본인의 과오를 희석시키려 한 것이다.

3. 생애

3.1. 출생부터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3.1.1. 과거 급제

중종 35년(1540) 1월 5일, 충청도 진위군(現 경기도 평택시)에서 8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인 집안 출신이자 경상도 병마 절도사를 역임했던 원준량. 충순위(忠順衛)로 복무하다가 28살이 되던 1567년( 선조 즉위년) 식년시 무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게 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원균은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 덕분에 무과에서 부정으로 급제했다는 의혹이 있다. 명종실록 명종 19년(1564) 6월 21일자 기록에 따르면, 원준량이 자식을 부정입시케 하여 탄핵받았다. 이때 원균의 나이는 24살로 입시에 응할 나이이며, 원균의 바로 아랫 동생인 원연은 21살이나 문과 급제생이었고, 다른 두 동생들(원용, 원전)은 무과에 응시하기엔 지나치게 어렸을 것이므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원균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아버지 원준량도 벼슬살이를 하던 시절 윤원형 같은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며 관직 생활을 하였는데, 정작 왜구의 침입 시에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으며, 선술했듯이 아들의 무과 응시에 부정도 의심되고, 이렇게 무능하고 부패한 무인의 전형을 보여준 데서 알 수 있듯이 아주 뼛속부터 심하게 썩어빠진 인물이었다.

어찌 됐건 첫 직위는 선전관(宣傳官)을 맡았으나 이후 1574년까지 공직생활 기록이 없다. 일각에서는 원준량 윤원형와 연을 맺고 있다가, 윤원형이 몰락하며 같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주장[15]이 있으나 주류 주장은 아니다.

3.1.2. 북방에서의 무난한 활동

1575년(선조 9년) 잠시 거제현령으로 부임했고[16] 이후 조산보만호로 재직하게 된다.

이 시기 여진족 토벌에 참여해 부령부사(富寧府使)로 진급[17]했고 이후 종성부사(鐘城府使)[18]에 임명되어 49세 때인 1588년(선조 21) 북병사 이일(李鎰)의 휘하에서 시전부락(時錢部落) 정벌에 참가해 승리를 했다. 이를 근거로 김탁환의 소설 불멸이나 불멸을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북방에서 여진족 토벌에 활약했다고 설정되어 있지만[19], 선조시대는 워낙 기록 유실이 심해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남아있는 기록들을 보더라도 참가는 했는데 어떤 공을 세웠는지에 대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지 않거나 두리뭉술하게 묘사된 경우가 많다.

3.1.3. 전쟁 3개월 전, 경상 우수사가 되다

선조 24년(1591)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대간이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탄핵 사유는 거제 현령 시절에 보여준 무능함이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20]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21]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22]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23]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24]
선조실록 선조 24년(1591) 2월 4일자 첫 번째 기사 #
1년 뒤인 선조 25년(1592)에는 조선 최대의 수군 기지인 경상 우수영을 담당하는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사 시절에 일 못한다고 탄핵받은 인사가 더 큰 전력을 관할하는 경상우수사로 임명된 걸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무관들의 평균적인 수준과 관직생활 양상을 이해하면 이상할 것 없다. 문관들에 비해 학문이 떨어지는 무관들이 평시에 불량한 행실, 행정 능력 미숙 등을 이유로 심심하면 탄핵해서 견제당하는 일은 무척 흔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은 신립도 성격이 폭급하고 장졸들이 명에 따르지 않는다 싶으면 중한 형벌을 내려 부하들이 꺼린 정황이 보이며 이일도 여진족 간자를 조정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선참했다가 파직된 전례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은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기 전부터 전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1590년, 비변사에서는 무신들의 불차채용(不次採用)[25]을 대거 진행했다.[26] 평시라면 전투 경험이 있든 말든 행실이 불량하다면 얄짤없이 탄핵감이지만, 이 때는 일본의 침공 위협과 여진족의 준동이 동시에 급부상하는 상황이어서 조정의 분위기가 조급해진 탓에 일손이 잡히는 대로 전부 뽑아 남쪽으로 내려보내던 시점이었다. 그러니 원균의 능력은 일단 차치하고[27] 전투 경험이 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억세게 좋은 운까지 더해져서 경상우수사라는 그릇에 넘치는 자리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임한 지 3개월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본인과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다.

3.2. 임진왜란 발발과 초기 행적

임진왜란 초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원균을 무작정 비판하는 이들이 가장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으로 잘못된 비판으로 원균옹호론자들에게 빌미를 많이 준다. 선조실록이 기록유실이 심해 일괄적인 정리가 되지 않았고 승정원일기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도 크다.

이순신에게 일본의 침공 사실을 바로 전달한 사실은 난중일기에서 검증된다. 이후 선조실록 5월 10일자 기사에 실린 선전관 민종식의 전선 시찰 보고에 의하면 원균이 적선 30여 척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6월 28일, 경상 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올린 경상도 전선의 상황 보고에는 원균이 군영을 모두 불태우고 보유 판옥선을 전부 자침시킨 후 전선 1척을 몰고 도망쳤다는 보고를 올린다. 김수의 장계에는 조라포, 지세포, 율포, 영등포 등 경상 우수영의 포구들이 이미 텅비었고, 이 때문에 원균이 우응신을 시켜 창고를 불태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임진왜란 동안 원균은 이렇다 할 함대를 이끌지 않았기 때문에 후자의 서술이 맞는 것으로 보이며, 이 때 자침시킨 판옥선의 수는 70여 척 ~ 80여 척[28]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선 수군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수군 최강의 전력을 상실한다.[29]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이순신이 바닷길을 질러막다
심지어는 기록에 따라서는 원균이 직접 배를 불태운 것이 맞는지 조차 의문인 부분도 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원균은 수사의 부관인 우후[30]에게 병영을 지키게 한 후 형세를 지켜보다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으로 착각하고 노량으로 바로 도망갔다고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후에게 명령을 내리고 튄 것도 아닌 것이 바로 다음 문장에 '우후가 (원균이 노량으로 갔다는) 그 소문을 듣고' 라고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원균이 직속부하인 우후에게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바로 노량으로 튀어버린 바람에 우후가 소문을 듣고서야 원균이 백천사를 떴다는 사실을 알았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경상우수영을 불태운 것은 우후의 자체 판단일 수 밖에 없다.

같은 날 김수가 올린 또 다른 장계에서는 이순신 또한 왜적이 쳐들어오지 않은 남해안 섬들의 군량과 군기를 불태워 빈 성이 된 곳이 있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는 당시 원균의 도주로 원균 예하의 수령과 병사들이 패닉에 빠져 함께 도망치고, 빈 성에 군량과 군기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출정을 앞둔 이순신이 이를 회수할 방법은 없었기에[31] 왜군에게 빼앗기기 전 불태웠는데, 초기 원균이 도주한 걸 몰랐던 김수는 이를 이순신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착각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3.2.1. 70여 척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

원균이 장수로서 제대로 전략전술이나 식견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한 것은 맞지만,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영 전력 70여척을 전부 자침시킨 순간부터 비판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전란 시작 원균의 행보부터 비판하는 것은 전근대 조선수군과 현대 한국해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실수다. 현대 해군이야 모항에 전투함들이 모여 있고 승조원들이 언제든지 출동지시에 응할 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키워진 전근대 조선수군은 소규모로 쪼개어 관할 진포에 흩어져 있었다.

20만의 왜군이 느닷없이 한꺼번에 상륙해서 밀어닥치는 시나리오는 조선군이 흔히 생각했던 왜구의 침략과는 스케일 자체가 달랐었기 때문에, 준비할 시간 자체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경상우수영이 수영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곤 하나 그만큼 관할 구역도 넓어 임진왜란 직전에 8관 16포였다. 70여척의 전선들은 8관 16포에 흩어져 있었지 경상우수영에 모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배를 움직일 인원들도 항시 배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수군은 상하번으로 나뉘어 근무했고 전시에는 지방관들에게 통보해 병력을 소집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고니시는 경상좌수사 박홍의 관할에 상륙했지만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은 우수영 관할로 상륙해 밀고 들어왔고 전쟁 이틀만에 동래성이 함락되어 경상도 전역이 전쟁공황과 행정마비 사태가 몰아닥쳤다.

경상우수영의 3분의 1규모로 수영 중에 규모가 세번째에 불과했고 전화를 입지 않았던 이순신 전라좌수영이 병력과 전선을 모두 소집하는데 보름이 걸렸다. 전라좌수영의 2배, 경상우수영의 3분의 2 정도 규모인 이억기 전라우수영은 해당 기간안에 병력과 전선을 모으는데 실패해서 이순신의 1차 출동에 함께하지 못했다.

전화도, 아스팔트 도로도, 자동차도 없던 시대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로 예비군 소집문자 보내면 택시타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전라좌수영이 소집에 보름이 걸렸고[32], 전라우수영이 그보다 오래 걸렸다면, 제일 큰 경상우수영은 당연히 20일 이상 소모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다는 가정하에.

즉, 원균은 경상우수영 전력을 동원할 시간 자체가 없었고,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무리였다. 실제 개인적으로 원균을 극혐 수준으로 싫어했던 이순신조차도 난중일기에 이때 원균의 행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단순히 경상우수영이 와해되었다고 원균을 비판하는 주장은 전근대 시대상과 소규모 국경방어 병력이 시간을 끄는 동안 병력을 모아서 내려보내는 조선의 방어전략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비판이 원균옹호론자들에게 파고들 틈을 준다. 경상우수영 전력은 원균이 70척을 불태운게 아니라 애초에 모일 틈도 없어서 각 진포에 흩어진채 와해되었다고 보는 게 맞으며 원균이 군영을 불태운건 적들에게 시설을 이용 못 하게 하고 해도나 군사자료를 태워 파기하는 행동은 이런 상황에서 전세계적으로 일반적인 대응이다.

3.2.2. 반론

얼핏 보면 그럴싸하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경상우수영의 자침이 당연했다는 논리대로라면 조선은 돈이 펑펑 남아돌아서 삼도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자침이 예정된 경상우수영에 몰아줬다는 소리가 된다.

위에서 이순신과 이억기의 소집 사례를 잘 보면 의도적으로 논점을 어그러뜨리고 있는데, 이순신의 15일은 좌우수영이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지 좌수영 본영의 소집 시간은 물론 좌수영 전력의 소집 시간조차 아니다. 이순신이 예하 전력의 소집을 명한 것은 4월 27일이고(대기 명령은 4월 26일 하달) 거리가 먼 보성, 녹도 등을 제외한 예하 전력이 소집된 것이 4월 29일, 전체 전력이 모인 것이 5월 1일이었다. 전라우수영은 관할 자체가 장흥 이서 전라도 서해안 전역이라 당연히 소집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경상우수영 본영 전력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으나 8관 16포가 상하번제에서 70척 중 규모에 따라 각각 2~3척의 전선을 보유한다고 가정해도 본영에 남는 전선 전력은 족히 두자릿수가 된다.[33] 아무리 상하번제임을 참작해준다 해도 이 중 절반은 수습했어야 한다.

원균이 시간이 없었다는 주장도 남아있는 기록을 조금만 읽어보면 바로 논파된다. 전라좌수영에 김수와 원균의 공문이 도착한 것이 4월 15일 오후였으니 이미 원균은 4월 14일에 적의 침공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후 경상우도 방면이 전선이 된 것은 4월 19일 김해가 공격받으면서다. 즉 아무리 원균에게 불리한 상황을 가정해도 최소 4~5일의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동안 원균이 한 것은 고작 배 한 척을 건진 것에 불과했다. 최전방도 아닌 전라좌수군은 4월 15일 저녁 공문을 받은 후 4월 17일이 되자 상하번 병력들이 모여들었고 예하 진포에 소집령을 내린 뒤 거리가 먼 보성, 녹도 전력까지 완전히 모이는 데 5일이 소요되었다. 아무리 초전이고 최전방임을 감안해도 본영 전력조차 소집 못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4월 27일 도착한 좌부승지의 서장에서 인용된 원균의 장계에는 '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를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라고 큰소리를 탕탕 쳐놓았다.[34] 본영보다 전선에 가까운 영등포와 옥포에서도 전선 두 척은 수습했으니[35] 더더욱 본영 전력 수습 실패에 대해 실드 쳐 줄 건덕지가 없다. 거제현은 5월 초까지 굳건히 버티다가 옥포 해전 이틀 후인 5월 9일 현령 김준민이 김수의 명령으로 진주 수성을 위해 출병한 여파로 5월 12일에서야 함락되었으니, 이쯤되면 대체 원균이 무엇때문에 우수영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부리나케 도망갔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더욱 문제인건 원균이 군영을 불태운 이후의 행보다. 수군이라고 무조건 배를 모아 싸우는 방법만 추구한 게 아니다. 수군의 핵심 임무는 해안 방어였고 이를 위해선 농성전을 포함한 지상전도 감행했다.

구체적 사례로 박홍이 이끄는 경상좌수영 본영은 일본군이 상륙하자 즉각 전선을 모은 게 아니라 병력을 동래성으로 보내 동래성 방어전에 가담했다. 또한 임진왜란의 첫 전투인 부산진 전투 다대포 전투 역시 수군들이 지키던 진영에서 벌어진 싸움이였다. 이순신 역시 처음부터 전선을 모으기 보단 병사들을 소집하고 훈련시키며 차분히 방어태세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당장 전선 70척을 본영으로 모을 수 없었다고 해서, 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본영에서 빠져나와 고성으로 몸을 피한 원균의 행동은 일반적 대응으로 보기 힘들다. 정상적인 대응은 적과 가까이 있는 진영들은 농성을 하며 버티고, 원균 자신은 남해현 등 후방의 병력을 모아 농성하는 진영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했었다.[36]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경상도 수군들이 해안의 요지들을 지키기 않고 달아난 것을 두고 격분하여 비판하고 있다. 경상우수영이 대왜구전쟁에서 전통의 최전방이었음을 고려하면 원균은 평시에 이 전시 계획, 즉 어느 기간 내에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전력을 유지하고 집결시킬지를 상정하고 준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러나 원균은 그러지 않았고, 도망과 육군 합류 둘을 놓고 고민하다 이운룡 등의 만류 끝에 전라도에 지원을 요청한다.
임진년(1592년) 5월, (경상)우수사 원균이 군사를 잃고 도망치려 하자 옥포 만호 이운룡이 막아서며 말하길 " 주상이 임명한 이곳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곳은 바로 양호(호남)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니, 이곳을 잃으면 양호가 위태로워집니다." (원균은) 즉시 율포 만호 이영남을 이충무(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이충무가 군대를 이끌고 옥포에서 원균과 합류했다. 이운룡과 영등포 만호 우치적이 선봉에 나서 왜선 30여 척을 대파하고 왜군이 전선을 버리고 달아나자 마침내 이를 모두 불태워 버렸으며, 추격하다 노량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고 또 왜선 30여 척을 불태웠다.
右水使元均敗軍欲走, 玉浦萬戶李雲龍抗言曰, "使君當死於對內. 此兩湖咽喉, 失此則兩湖危矣." 卽遣栗浦萬戶李英男, 請救於李忠武. 忠武引軍赴之, 會均於玉浦. 雲龍與永登萬戶禹致績, 爲先鋒大破倭船三十餘艘, 彼棄船而走, 遂盡焚其船, 追擊至露梁大破之, 又燒三十餘艘.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 고적(古蹟) 중.
그리고 그 이후에야 경상우수영이 수습되기 시작한다. 그것도 원균이 주도한 게 아니라 전라좌수영이 옥포에 도착하자 아직 판옥선을 유지한 남해현령 기효근 등의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른 합류였다. 전라좌수군이 당포에서 원균과 합류하기까지 경유한 진포는 평산포, 상주포, 미조항, 소비포 등이며, 관할 군현도 고성, 사천, 곤양, 하동, 남해 등 5개 군현이 남아있었다. 이미 옥포, 영등포, 율포 등의 전력이 우수사에게 합류했고 당포 이서의 각 진포와 군현마다 판옥선 한척씩만 건사해도 최소 9척인데 원균은 이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 것은 물론 매 보고마다 모조리 버려졌다 할 정도로 완전히 방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중과부적으로 밀려난 것도 아니고, 원균은 고작 거제 코앞인 당포에 처박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옥포 해전의 발단이 된 구원 요청은 그냥 본인이 똥 싼 거 이순신에게 치워달라고 징징댄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차 출정 당시 연합함대의 전력은 28척으로 그 중 24척이 전라좌수군 세력이었는데, 원균이 사람처럼만 굴었으면 이 정도 세력은 당연히 수습하고도 남았을 것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1차 출정 직후 벌어진 고현성의 실함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사례로 충무공은 칠천량 해전 직후 전쟁터가 된 전라도를 돌면서 도망친 수군과 남아있던 물자, 피란민까지 수습해서 전라우수영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도 단 하루 차이로 왜군과의 조우를 피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원균의 행동이 정상참작이 되었던 것은, 그 이순신조차 부임 직후 여럿 모가지를 날리며 좌수영의 기강 확립에 애를 먹을 정도로 당시 수군의 상황과 기강 자체가 좋지 않았고 어쨌든 관할을 아예 버리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참작 사유가 있었기에 이각, 이유검 등 도망친 경상도 지휘관들을 본보기로 참할 때 살아남아서 계속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37] 잘못된 원균 비판론은 여기서 원균이 중앙에 빽이 두터워서 살았다! 라며 엉뚱하게 윤두수를 공격해서 원균옹호론자들이 파고들 틈을 더욱 열어준다.

3.2.3. 재반론

재반론의 요건은 이정도가 있다.

1. 조정의 예상보다 큰 규모의 침공
2. 형편없는 원균의 군재

1번의 경우 임진왜란은 조선의 건국이래 최대규모의 침공이며 고려말 왜구의 침공을 감안해봐도 단독 침공으론 그렇다. 제1진으로 온 고니시 유키나가만 해도 거의 2만에 가까운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고니시만 해도 이정도인데 이후 병력까지 합치면 17만 수준으로 에상치의 10배를 넘는 초대규모 침공이었으나 조정은 사전에 그정도 예상을 못해서 선조가 그나마 수만명도 올 수 있지 않을까? 했다가 당시 비변사에 있던 변협이 한척에 100명 규모였으니 100척 띄워도 1만명에 불과하다며 수만명 가능성도 일축했다.

또한 당시 일본은 막 통일된 상태였으며 그나마도 많이 불안한 상황이었다. 김성일과 황윤길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방문했을 때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정 나가서 4개월이나 기다리고서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계 17만 규모의 대침공이 일어날거라고 예상하는 게 넌센스다.

즉 조선이 기존에 내다본 관점은 "얘네들이 전쟁준비 하는거 같은데 지금 계네 상황도 그렇고 전례를 들춰보면 많아도 1만명 안팎일 것이다." 였고 이에 맞춰서 각 수영에게도 방침을 하달했을 것이다. 문제는 고니시만 해도 1만 8천이나 데리고 와서 대전제가 처음부터 깨졌고 원균 입장에서는 "아니, 분명 윗분들이 1만명 남짓만 온댔는데...?" 입장이었을 것이고 2번의 문제까지 겹쳐져 원균은 도저히 '싸워서 물리친다'를 선택할 수 없었다.

2번의 경우 칠천량 해전을 보면 답이 나온다. 이순신이 악으로 깡으로 키운 수군을 한큐에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말아먹은 원균의 군재는 가히 재앙적이다. 물론 원균은 자기 군재를 잘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런 자였다면 이순신을 모함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자기 신세를 망치는 게 아니라 이순신 밑에서 하라는 거 하며 묻어하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원균은 이 때엔 자침을 했고 정작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서는 자기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았다.

이는 1번과 합쳐서 '싸워서 이긴다'는 선택지는 절대 고르지 않게 만든다. 문제는 이 다음 차선의 선택지가 뭐냐는건데 이 후보로는 '병력을 온전시켜 전라도 수군과 합류한다', '백성들이 피난할 때까지 존버했다가 전라도 수군과 합류한다.', '자침하고 합류한다' 정도가 있다.

첫번째의 경우 병력 보존의 관점에서는 좋다. 가장 큰 경상우수영 병력을 온전히 이순신에게 합류시켜 조선 수군은 경상좌수영 병력만 빼고 모두 온전한 상태에서 시작하며 이 경우 이순신은 250척 규모로 시작하기에 현실 역사보다 더 많은 병력으로 편하게 시작한다.(적어도 규모면에서는) 이 경우 일시적으로 경상도 해안 전역의 제해권을 잃겠지만 경상우수영+전라우수영+전라좌수영 세 군영의 수군이 모인다면 다시 탈환할 수 있다. 다만 성공하려면 어떻게 병력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저 상태에서는 백성들이 잠시 일본군의 노략질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게 가장 큰 흠이다. 또한 합류를 위해서라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 구역을 내줬다고 하면 윗선에서 난리날 것이고 그렇다고 셋 다 자기 구역에서 집결하려고 하면 진작에 전투는 벌어지고도 남는다.

두번째는 백성 보호의 관점에서는 훌륭한 선택이지만 대신 그만큼 병력을 까먹을 각오는 해야 한다. 나름 싸워봤다고 말할 수 있고 백성 보호라는 측면에서 나중에 할말이 생기는 선택지지만 대신 병력을 좀 까먹는 게 흠이고 진짜 우수영을 박살내려고 온다면 자기도 원치 않게 '싸워서 이긴다' 혹은 '싸웠는데 졌다'의 선택지를 골라야 하며 운이 좋든 어떻든 전자가 걸린다면 정말 좋지만 원균의 군재상 그럴 리 없고 후자에 걸리면 경상우수영 병력은 증발, 함선과 물자는 탈취당할 우려가 있다. 하필 원균이 지휘관이라 위험성이 너무 높은 선택지다.

세번째는 셋 중에서 가장 나쁜 선택지로 사실 원래는 차선보다는 차악에 가깝다. 싸워보지도 않고 함선과 물자를 바다에 꼬라박하는 게 좋은 선택지일 리는 없다. 문제는 원균이 지휘관이라 차선급에 속한다는 것.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된다는 보장도 없고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면 차라리 "내가 제대로 못 쓸거 너도 못 쓰게 만들겠다!" 라는 게 그나마 낫다는 것. 원균이 원래 자침하고 제대로 된 계획이 있긴 했는지 의문인걸 감안하면 자침하고 이순신에게 합류한건 그나마 나은 선택이고 1,2번을 감안하면 그의 능력으로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다. 해전을 위해선 병력이 모여야 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자침을 위해서는 각지에 명령을 하달하고 각지에서 알아서 자침하면 되기 때문.

다만 저 와중에 원균이 정말 저런 전략적인 판단을 하고 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고 그렇다고 백성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노력도 없어서 원균 같은 똥별이 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는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애초에 현재로 치면 함대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자리는 그에게 맞지도 않았고 그런 자리를 고작 실전경험이 있긴 하다고 줄 정도로 장수 보는 안목이 없던 조정이나 또 낼름 받는 원균이나 그놈이 그놈이지만 그래도 예상대로 1만 언저리의 침공이었다면 그랬는데도 원균이 대뜸 자침했다면 조정에서 금부도사를 보내도 할 말이 없는 트롤링이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침공이라서 원균의 자침은 조금 이해받을 여지가 있고 이걸로 원균만 비판하기에는 사람 보는 눈이 없던 조정도 똑같다. 차라리 원균이 맡은 곳이 이순신과 맞바뀌어져(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원균이 전라좌수영, 이순신이 경상우수영에 있었다면 원균이 자침을 했을 리 없다. 그 때는 하면 변명거리가 1도 없는, 조정에서 사약 보내도 할 말이 없는 대트롤링이기 때문.

물론 이 변명도 어디까지나 원균에게 최소한의 당위성이라도 있었다는거지 원균이 잘했다는건 아니다. 장수로서의 소임은 어디까지나 지더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기 때문. 정말 전략상의 계획이 있지 않고서야 싸우지도 않고 자침하는 것이 명장의 자세일 리 없다. 원균이 한심한 똥별이니까 "그래... XX하는 것보다는 낫지..." 할 수 있는거지."[38]

그 외에 이순신의 15일은 4월 16일에 전쟁발발을 전해듣고 5월 1일에 집결했다. 명령을 내린 때부터는 분명 5일이지만 그 이전에 열흘 정도 텀이 있었던 것. 왜 열흘이나 텀이 있었던 걸까? 당연하지만 전쟁 터졌다고 바로 소집명령을 내린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났다고 해서 바로 출동하는 게 아니라 적의 규모는 어느정도인지 우리가 나서도 되는지 안 되는지(적은 병력이라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으니) 전쟁 났다는 말에 불안해하는 민심이나 동요하는 병사들은 없는지 등 할일은 많다. 실제로 난중일기에 17,18,20일에는 전황에 대한 기록이 있다.[39] 원균 또한 전장에서 먼 이순신과는 달리 매우 가까이 있는 인물로서 파악에 걸릴 시간이 그만큼 길 수는 없겠지만 그 또한 소집에 걸리는 시간+소집 전 상황 파악하는 등 기타 일에 필요한 시간이 10일 이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건진 배가 절망적으로 적어서 문제지 원균이 시간도 넉넉한데 배 못 건진건 아니다.

요컨대 재반론의 요지를 말하자면 원균은 원래 무능했고 조정의 의도치 않은 오판까지 더해져서 더한 트롤링을 저질러도 이상할게 없었지만 용케도 자기 배 자침하는 정도로 끝났고 그정도면 상황에 비해 보면 사고를 덜 친게 아니냔 의미다.

3.3. 이순신과의 갈등

원균의 본격적인 문제점은 이순신과 합류하고 난 뒤의 모든 행동이다. 경상우수영을 건사 못한 건 전근대 현실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인데 이순신에게 합류한 뒤 칠천량까지 보여준 모든 행동은 어떤 기준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악행과 무능으로 점철되어었다.

원균은 1592년 5월 6일 전선 4척 협선 2척을 끌고 이순신 함대에 합류했다. 이순신 함대의 첫 출격일로부터 2일 뒤이다. 그 다음날 옥포 해전을 치른 후, 조정에 공적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는 문제로 이순신과 갈등을 빚게 된다.[40] 1594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게 되었으나, 원균은 이순신의 지휘권에 도전하는 등 쓰레기 행각을 계속 벌인다. 이는 옹호의 여지가 없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애시당초 경상 우수영이 조선에서 가장 큰 수군 기지이고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사는 모두 경상우수사가 겸직한 점을 보면 진작 원균이 적당히만 잘 했어도 그 삼도수군통제사는 자신이 앉을 자리였던 것이다. 자기가 삽질로 조선 최대 수군전력을 날려먹고 뒤에서는 그나마 전력을 온전히 가져 삼도수군 통제권을 가진 이순신을 시기하는건 현대의 관점에서도 이성적이게도 감정적이게도 옹호받기가 힘들다.

원균과 이순신의 반목이 날로 심해지자 조정은 1595년에 원균을 충청 병사로 발령을 냈다. 정3품 수사에서 종2품 병사로 발령이 났으니 여하간에 승진이었다. 그럼에도 원균은 오히려 이순신이 자신을 충청도로 쫓아냈다 생각하여 패악질을 일삼았다고 하며, 충청 병사 재임시에 상당산성을 다시 건축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완공 후 가 내리는 바람에 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 외에도 포악하고 탐욕스럽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옹호로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1596년에 전라 병사로 다시 전출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요시라가 반간계로 조정과 이순신을 흔들고 있을 때 원균은 '수군이 출동해서 부산 앞바다에서 위용을 과시한다면 가등청정이 수전에 약한지라 그냥 물러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선조 비변사는 원균의 이 상소에 대해서 그럴 듯하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이순신이 파직되는데 한 몫을 거들게 된다. 하지만 경상도의 주요 항구 및 포구 및 거점들이 일본군들에게 모두 점령되어있는 데다가 일본군들이 곳곳에 왜성을 쌓아서 해로를 감제하고 있는 점을 완전히 배제한 원균의 상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다. 물론 이순신이 전쟁 첫해 부산포로 한번 쳐들어가서 이긴 적은 있지만, 그 때는 왜군이 성을 쌓아 육상에서 해로를 감제하기 전이므로 같은 방식이 또 통할 수가 없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이순신이 부산포로의 출전을 거부했다는 게 통설인데,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상륙하였음을 알고도 부산포로 출전했었다. 실록 1597년 2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2월 10일(이미 조정에서는 2월 6일에 체직이 확정된 상태였지만 그 소식을 전달할 선전관이 도달하기 전이었음) 김응서와 함께 부산포로 출전해서 늘 하던 것처럼 신나게 부수다가 돌아왔고, 원균이 했던 것처럼 가덕도에 하루 머물렀다. 이때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내려와 협상 후 포로들을 돌려받은 후에야 돌아갔다.[41] 굳이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이후 원균의 졸전과 너무나도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의 병력은 겨우 62척이었고, 육군 장수 김응서와 합동했다.

실제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후에 육군이 가덕도와 안골포[42]를 점령해야 부산포로 출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원균 본인마저 수륙병진으로 부산포 출정을 주장했으니, 위의 수군 단독으로의 부산포 출정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보여준다. 원균은 통제사에 제수되기 전에는 이순신이 겁쟁이라서 부산을 공격하지 못한다면서 자주 비난하는 발언을 했는데[43], 정작 그 역시 제대로 공격에 나서지도 못하는 주제에[44] 권율에게 호출당해 곤장을 맞는 치욕까지 겪었고[45], 결국 여차저차 출전은 하였으나,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국 전쟁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게 된다.[46]

3.3.1. 이순신의 전공을 가로채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 원균은 전공(戰功)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하고, 김순명(金順命)이 아뢰기를, "충청도(忠淸道)의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마음은 순박한데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에게는 군사를 미리 주어서는 안 되고, 전투에 임해서 군사를 주어 돌격전을 하게 해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군사를 거느리게 하면 반드시 원망하고 배반하는 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원균을 탐오하다 하여 대론(臺論)이 있었다. 원균은 지극히 청렴한데 탐오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전에 조산 만호(造山萬戶)로 있었을 때는 어사(御史) 성낙(成洛)이 장계하여 포장(褒奬)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원균이 어찌 지극히 청렴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고,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종성(鍾城)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萬軍)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行軍)도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이와 같은 장수는 많이 얻을 수 없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 이후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기사 #

# 실록을 보면 원균은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조정에 홍보하는 것 만큼은 열심히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위의 옥포해전을 가지고 거짓 장계를 올려서 이순신과 갈등을 빚는 것 부터 시작해서 한산도 해전, 수급, 전리품 등등 마치 자신이 나서서 공을 세웠고 작전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자기 포장을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때문에 앞뒤 전황을 아는 이순신의 수군 장병들과 후대와 달리 조정에서는 원균이 할일하는 장수로 착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순신 곁에서 공을 세운 이억기의 장계와 비교하면 이순신이라는 황금거위에게 뭍어 가려는 원균의 욕심이 더욱 두드러진다. 원균의 이런 양심없는 언론플레이에 대한 혐오감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드러나는데 문제는 중앙정부의 분위기를 몰랐던 이순신이 원균의 행동을 그저 소인배적인 행동으로 취급하며 그를 탄원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만호 시절부터 너무 솔직해서 상관들의 음해를 받아온 인물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솔직함과 실력만으로 명장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은 그 명성에 비해 정치력은 0에 가까워 간신들의 아첨과 모함에 어처구니 없게 죽음을 맞고 국가가 멸망을 맞는 일이 흔하다. 이순신과 원균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너무 솔직하고 진중하게 장계를 올리는 이순신과 달리 원균은 대신들에게 끊임없이 감성팔이, 모함을 했고 여기에 선조의 의심이 더해져 이순신과 원균 중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모르는 분위기로 흘러가다가 사관 마저도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하고 있다고 매도하는 지경까지 간다. 즉, 칠천량 해전은 전근대의 미약한 통신체계와 무능력한데 감투 욕심만 많은 원균의 찌라시, 그리고 선조의 속좁은 판단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그나마 도체찰사로서 원균과 이순신을 몇번 만나 본 이원익은 원균이 사람됨이 쓸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간파했고[47] 그의 전공 보고도 미심쩍다는 것을 눈치챈 상황이었다. 다만 콩깍지가 씌인 선조가 원균을 워낙 이뻐하고 있고 입만산 원균의 허풍에 용장 이미지까지는 못 벗겨냈는지 돌격만 시키는 역할에 맞는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건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원익은 평상시 군사를 맡기면 안된다는 말을 하며 원균이란 인물은 그동안의 전공을 감안해 적당히 돌격대장이나 시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즉, 돌진 하다가 전부 말아먹은 신립마냥 총 지휘관 같은 요직에 올리면 안된다는 뜻도 내포한다. 하지만 원균은 무력 하나만큼은 뛰어났던 신립 같은 용장도 아니었고 이것조차도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선조는 그런 인물에게 그에 맞는 장계를 올려준다고 기여코 통제사 자리에 올리게 된다.
2월28일 통제사 원균이 장계하기를,
"부산포 앞바다에서 진퇴 하며 병위를 과시하고]], 가덕도 등처에서 접전한 절차는 전 통제사 이순신이 이미 치계하였습니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 탐문하였더니, 본영 도훈도 김안세의 공초에 ‘전 통제사가 부산포 앞바다로 가서 진퇴하며 병위를 과시할 때, 통제사가 탄 배가 적진 가까이 갔는데 조수가 물러가 물이 얕아지면서 배 밑창이 땅에 닿아 적에게 배를 빼앗기게 되었을 적에 배 위의 전졸들이 큰 소리로 구원을 요청하니 안골포 만호 우수가 노를 빨리 저어 달려가서 이순신을 등에 업어 어렵게 우수의 배로 옮겼고 이순신이 탔던 배는 선미에 연결하여 간신히 안골포로 끌어 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대개 이번 부산의 거사에서 우리 나라 군졸들이 바다 가득히 죽어 왜적의 비웃음만 샀을 뿐, 별로 이익이 없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제장들을 조정에서 처치하소서.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3월 20일 경술 4번째기사 #

이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이순신을 쫓아내고 통제사 직위에 오른 후에도 모함으로 이순신의 공을 깍아내는 철면피 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당시 조정은 이 말을 전부 믿었고 후퇴조차도 제대로 할줄 모르는 원균의 처참한 능력을 보고 받고 나서야 이순신을 쫓아낸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

3.4.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이어받다

이순신이 파직된 후, 원균은 원하던 바대로 본래 이순신의 자리였던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껏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어 놓고도 그의 타고난 못된 성정 때문에 기수열외를 당했다. 징비록에서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새로이 발령받자마자 저지른 실책을 나열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와서 말하게 함으로써[48] 군중의 사정에 통달했으며,[49] 매양 전쟁할 때마다 부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패전하는 일이 없었다.

원균은 자기가 사랑하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거처하면서 울타리로 당의 안팎을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또 술을 즐겨서 날마다 주정을 부리고 화를 내며, 형벌 쓰는 일에 법도가 없었다. 군중에서 가만히 수군거리기를 "만약 적병을 만나면 우리는 달아날 수밖에 없다" 라고 했고, 여러 장수들도 서로 원균을 비난하고 비웃으면서 또한 군사 일을 아뢰지 않아 그의 호령은 부하들에게 시행되지 않았다.
징비록(2007년, 이재호, 역사의아침, 291p)

이순신이 계급을 막론하고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이 작자는 기생 끼고 술판이나 벌이는 놀이터로 만들면서 아예 언로를 막는 전무후무한 짓을 벌였다. 당시 선조도 이순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원균과 똑같은 수준으로 놀아났기에 망정이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더라면 선임의 업적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에게 직접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50] 휘하 장수들이 아예 원균을 백안시하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상황을 상의하고 수습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참고로 징비록에서는 이 묘사 바로 직후에 칠천량 해전의 기록적인 패배에 대한 기사가 나와 정말 아이러니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를 보면,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은 처가 원균과 친척이 되는 원주 원씨여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전라도 보성의 안중홍의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 때의 만남을 기록한 것이 있다.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51]의 처[52]가 원씨의 친족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과 정[53]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정을 쓰게까지 해서야 될 말인가?"[54][55]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야이 개새끼야 소리가 안나오고 허탈해 하면서 껄껄웃은 게 양반이다.
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기사(記事) 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

조선 수군 전체를 총지휘하는 통제사라는 자가 어떻게 싸워서 공을 세우겠느냐는 질문에 겨우 "활 쏘고 칼 휘두르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만 봐도 장거리 항해, 항해 속력 등을 싸그리 희생하고 내구성과 포격에 집중한 연안 방어용 순수 포함이었고, 그에 대항하는 일본 군함은 내구성과 화포를 다소 포기하더라도 빠른 기동력을 통해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유도하는 배였다. 일본군의 특기는 백병전이었고, 이를 아는 조선 수군은 도선 접전을 피하려고 했으며 만약 도선하더라도 화살이나 총통으로 적군의 위세를 꺾어놓은 다음에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수군이 육군보다 승률이 좋았던 것은 이순신의 절묘한 지휘 능력도 물론 한 몫 하지만, 백병전을 일절 허용하지 않고 함선 자체의 피지컬 차이로 승리할 수 있는 덕이기도 했고, 배 안에 몇백 명이 타고 있든 일단 침몰시키면 전멸이라는 해상전의 특성을 백분 활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떻게 공을 세울 것이냐는 물음에 활과 칼, 즉 백병전을 언급한다는 건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특징, 장점, 단점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러니 인척인 안중홍도 원균을 조괄이나 기겁만도 못하다 말한 것[56]이다. 심지어 은봉전서에는 또다른 원균에 대한 평을 실어놓았는데,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정신이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고. ( 전과 긴빠이쳐왔다고) 비웃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야사로 넘어갈만한 개드립을 굳이 기록을 해서 후손이 읽고 웃으라고 남겼다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결국 원균은 임진왜란 최초로 도선을 허용하여 판옥선을 빼앗긴 장수라는 역사에 남을 불명예를 얻었고, 칠천량 해전으로 임진왜란 최초로 근연안 방어용 함선을 이끌고 외해를 나가 처참히 패배한 장수가 되기에 이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원균의 친척이고, 원균의 당파인 서인이라서 그나마 좋게 써 준 것이 이 지경이다. 더구나 안방준 장인 을묘왜변에서 활약한 정승복이다. 그런 사람인데 인척이란 작자가 이런 망언을 하니 더더욱 갑갑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아래는 칠천량 해전을 전후로 한 원균의 작전 결과이다.

3.4.1. 제 꾀에 제가 넘어가 곤장을 맞다

원균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사졸에 앞장서서 일거에 섬멸하려 합니다. 조선의 위무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원하건데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쉬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선조실록》1597년 1월 22일.
권율은 원균이 직접 바다에 내려가지 않고 적을 두려워하여 지체하였다 하여 전령을 발하여 곤양(昆陽)으로 불렀다. 11일에 권율이 곤양에 도착하자 원균이 명령을 받고 이르렀다. 권율이 곤장을 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난중잡록》
원균은 물러나와 거제 칠천도에 도착했는데 권율이 고성(固城)에 있다가 원균이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했다며 격서를 보내 원균을 불러와서 곤장을 치고 다시 나가 싸우라고 독촉했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오자 더욱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취해 누웠는데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보고 군사일을 의논하고자 했으나 만날 수 없었다. 그날 깊은 밤 왜선이 습격해오니 군이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해안에 올랐다.
《징비록》

전공을 세우기는커녕 술이나 퍼마시고 노는 원균의 작태에 분노한 도원수 권율은, 직접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때리면서 그를 강하게 질책했다.[60] 이유야 어찌 됐든 수군 최고 지휘관이나 되는 사람이 부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엉덩이 까고 빠따를 맞았으니 원균에게는 창피한 일이다. 심지어 곤장을 치는 병사도 계급이 원균보다 한참 아래다. 현대로 따지면 별 4개 단 해군참모총장이 장병들 보는 앞에서 합동참모의장 겸 계엄사령관[61] 앞에서 공개적으로 얼차려 서서 병에게 빠따를 맞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상황이다. 아무리 심각한 트롤링을 해도 가능하면 따로 불러내서 질책하지[62] 장병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질책하진 않는다는 것에서 권율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63] 선조의 의도도 무능하니까 참모들 말은 잘 듣겠지 였다.

원균이 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 있어서 매를 맞은 것은 확실하다. 다만 날짜를 두고서는 기록이 서로 엇갈리는데,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7월 11일에 권율이 원균을 곤양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치자, 그날 밤으로 원균이 부산으로 출진했다고 한다. 반면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는 가덕도에서 돌아온 원균을 고성으로 소환하여 곤장을 쳤고, 본대로 복귀했더니 그날 밤에 야습을 당해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균이 곤장을 맞은 것은 칠천량 해전 직전인 7월 15일이 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징비록의 신뢰도는 난중잡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① 징비록은 칠천량 해전의 날짜부터 8월 7일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류성룡이 쓴 칠천량 해전의 정황이 피상적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곤장을 맞았다고 기록된 날짜 역시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64]
② 징비록을 일정부분 참고한 선조수정실록에도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은 출진하기 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③ 조선 함대는 15일에 칠천도에 정박했다 그날 밤 붕괴되었는데, 이 한나절 사이에 고성까지 가서 매를 맞고 왔다고 보기는 시간이 매우 빠듯하다.
④ 권율이 11일 어간에 곤양에 있었다는 것은 난중일기를 통해서도 방증된다.[65] 그러나 15일에 고성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권율이 원균을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억지로 밀어넣었고, 따라서 권율에게도 패전의 책임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는 이미 당대부터 제기되던 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친 이유는 그가 이순신을 모함하고 자신이라면 부산포를 수복할 수 있다고 주장해 그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막상 통제사가 되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출전을 거부하는 이중성으로 조정을 능멸했기 때문이다. 원균이 아무리 무능한 똥별이라 할지언정 그래도 꼴에 군인이라고 처먹은 짬밥은 있을 테니 부산포 공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도 출정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순신을 제물로 삼았고, 그 이후의 생각은 하지 않고 이순신의 파직에만 만족했으니 더욱 괘씸한 것이다. 게다가 원균은 권율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권율 개인적으로도 몹시 꼴보기 싫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원균은 자기보신에는 기가 막힌 능력을 가진 위인인 만큼 선조가 좋든 싫든 자신과 한 배를 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만큼 선조가 자신의 빽이 되어 줄 수밖에 없었음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선조 또한 제아무리 빽을 서 준다 할지라도,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왕명을 대놓고 어기는 신하를 도와줄 방도는 없었다. 어쨌든 이후 원균이 출전을 했고 그의 무능함으로 부하들의 큰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참모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책임은 쏙 빼려는 심산으로 억지로 원균의 사후에 종1품을 수여했다.
지난날 주사(수군)의 싸움은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원수가 된 자로서는 힘을 헤아리고 시기를 보아서 대항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그 상황을 치계하여 후회가 없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데 이러한 계획은 하지 않고 경솔한 생각과 부질없는 행동으로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마침내 6년 동안 경영하여 어렵게 마련한 주사를 단번에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많은 산책을 한 곳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적이 호남으로 들어가 군민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11월 4일
한산 싸움(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그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이다. 그의 서장을 보면, 안골포가 그 앞에 있어 금방 들어갈 형세가 못되니 육군으로 하여금 먼저 적을 몰아내게 한 다음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원수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게 과연 그가 스스로 패한 것인가?
『선조실록』 34년(1601) 1월 17일

게다가 원균이 내몰려서 어쩔 수 없이 출정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미미하다. 당시 조정의 작전개념은 함대를 나누어서 해상의 적 보급선을 교란하라는 뜻이었지, 병력을 죄다 이끌고 부산으로 몰려가 한큐에 건곤일척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곤장을 친 당사자인 권율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 선조조차도 당시 원균에게 그만큼의 기대는 걸고 있지 않았다. 선조의 의도는 어차피 무능하니까 참모들의 말은 잘 들을 것이다 였다.
도원수가 비밀 장계 한 통을 올렸다. (그 내용은 대강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가 고단한 것은 원균이 말한 바와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선조실록』 30년(1597) 5월 8일
가령 크게 싸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배를 3등분해서 절영도 앞바다를 번갈아 오가며 뒤따라온 배가 이어가고 앞에 있던 배가 되돌아가게 함으로써 주사의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부산과 서생포에 상륙해 있는 왜적들은 모두 군량미 수송로가 끊길까 걱정할 것이고, 뒤를 이어 나오는 적선들도 반드시 두려워하고 주저하여 함부로 건너오지 못해서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적의 형세는 선두와 후미가 단절되어 우리가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5월 12일
신구(新舊)의 전선을 모두 합쳐 절반은 한산도 등에 머물러 있고 반은 운도 등처의 해양에 출몰하게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정박할 곳이 없기는 하지만 번갈아 교체하면서 끊임없이 왕래하면 형세상 반드시 피차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안골포 등처에 왜적이 있지만 본진의 선박으로 배후를 도모할 계책을 세울 수 있고 바다를 건너오는 적이 있더라도 해양의 선박으로 즉시 처치케 할 수 있으므로……
『선조실록』 30년(1597) 6월 1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비록 우리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은 경상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는 전라우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최호는 충청도의 배로 한 부대를 만들고, 원균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서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6일
도원수 권율이 장계하길…… "이런 식으로 계속 번갈아 교대하며 뒤에 오는 자가 나아가고 앞에 간 자가 돌아오면, 그곳의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혹시 돛을 달더라도 파두(波頭)에 부서질 것이니, 이곳에 있는 적들의 형세가 고단해지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입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6월 28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선조실록』 30년(1597) 7월 10일

이렇듯 권율도 당장 적 본진을 공격하는 것은 무리임을 파악하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이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비변사에서도 이를 수용하여 함대를 나눠 번갈아 출전시켜서 왜적을 견제할 것을 언급한 것이 확인된다. 즉 통념과는 달리, 위에서 얼른 부산을 공격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곤장을 맞은 원균은 이를 만회할 전공을 세우기 위해 멋대로 전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서 뻘짓만 하다가 퇴각하였다. 전공은커녕 병력만 내다 버리고 왔으니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게 된 원균은 칠천도[66]에 함대를 짱박아 놓고 또 술이나 처마시며 인사불성이 되어버린다. 결국 이는 칠천량의 참패로 이어진다.

한편 원균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반대로 '권율이 곤장만 치지 말고 조정을 능멸한 죄로 원균을 참해야 했다'라고 권율 또한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권율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원균이 했던 짓거리만 보면 당장 그 자리에서 찢어죽여도 싼 것은 사실이나, 원균은 일개 병졸이 아니라 임금인 선조가 직접 세운 조선 수군의 최고 지휘관이다. 아무리 도원수 권율이 조선에서 제일 높은 장군이긴 하지만, 무슨 반란군도 아니고 조선군에서 명색이 서열 5위 안에 드는 수군 통제사를 일개 병졸처럼 막 즉결처분할 수는 없었다. 군율로 다스리려면 당연히 그 죄목과 근거를 조정에게 보고해서 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냅다 죽였다간 어명을 거역하고[67] 부하를 함부로 죽인 죄를 물어서 권율 역시 탄핵되었을 것이다.[68] 해참이 성접대나 받고 술이나 마시다가 합참의장한테 걸려서 쪼인트 까이는 상황도 막장인데 그것도 휘하 졸병들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준 거다! 그리고 그걸 냅둔 국가원수도 폐급이긴 하다.

또한 당시 상황을 보면 권율이 보고를 했다고 해도 선조가 원균의 처형을 허락했을 리가 만무하다. 즉 원균에게 곤장만 때린 것도 권율 입장에서는 그나마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응징을 한 것이다.

3.5. 칠천량 해전

이렇게 칠천량 해전은 시작되었다.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선봉에 섰던 김완은 이 상황을 저서 《해소실기》에 자세히 남겼다. 당시 사관의 표현대로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는 임진왜란 최초이자 최대의 해상전 참패가 시작된 것이다.

칠천도 앞바다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 수군에게 일본군은 야습을[69] 시작했고, 김완은 이에 맞서 싸운다. 이때부터 조선 수군의 비극이 시작되었는데, 휘하 병력의 절반 가량이 무작정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기습한 적은 단 두 척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조선 수군 주력이 있는 곳으로 후퇴했다고 하는데, 이때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金大福)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이라서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 정도 여유가 있었던 것. 당연히 두 척밖에 안 되는데 김완은 거부했고, 아군이 계속 본진 쪽으로 후퇴하면서, 김완의 함선은 결국 점령당해, 김완은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힌다. 훗날 일본군에게서 도망쳐 돌아온 김완이 《용사일록(龍蛇日錄)》[70]에서 이 상황을 회고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十六日五更, 賊雲集, 放砲夜驚. 我舟師已蒼黃擧碇, 疾者先出溫川, 鈍者未及出, 賊已回擁 (中略) 主將失措諸船已潰, 一半北于鎭海, 一半奔于巨濟. 時余獨掉後船鼓角促旗. 南渡浦萬戶姜應彪·會寧浦萬戶閔廷鵬·助羅浦萬戶鄭公淸·海南代將·江津大將等各從水使已走遠洋. 余獨與軍官·射夫及奴子, 放砲齊射, 殊夗力戰, 一倍厮殺之. 際勢甚孤弱, 揮旗馳進, 主將謝曰 "令公奮戰之力, 甚多也." (中略) 主將曰 "李億祺·崔浩不知去處. 惟令公戮力捕捉, 夗而後已." 聽訖回視, 賊船二隻已近百武之間. (中略) 余亦左脚中丸, 危怕之際. 高聲疾呼曰 "主將! 主將! 胡不出救!" 主將元均醉酒, 高臥號令, 軍官金大福片箭十餘射. (後略)
7월 16일 5경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 이억기, 최호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71]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하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김완,『해소실기』 《용사일록》 출처

흔히 통념상으로는 이 야습 때 일본 수군의 주력 함대가 모조리 뛰쳐나오고, 이 기습으로 인해 조선 수군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그대로 궤멸하고, 배설이 이끄는 12척만이 간신히 도주했다는 게 칠천량 해전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후퇴는 정상적인 명령으로 작동했다는 것. 당시 야습한 일본 수군은 토도 다카도라의 병력으로 50척이 채 되지 않았다. 이후 조선 수군이 도주했다고 확실해진 이후에야 우리가 잘 아는 '바다를 뒤덮은 적선 천 척'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고, 말 그대로 궤멸되었으며, 원균은 행방불명되었다.
16일 오전 8시경 조선 함대가 양갈래로 나뉘었고 한쪽은 진해만으로, 한쪽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다.[72]
《해소실기》 1권

어느 정도냐 하면, 조선 수군 160여 척 중 배설이 진작에 끌고 도망친 12척을 제외하고 전부 '증발'했다. 이는 칠천량 해전 최고의 의문으로, 지휘권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든 아니든 조선 수군은 견내량으로 후퇴해서 한산도로 이동함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우리가 잘 알듯이 고성 춘원포[73]로 후퇴해서, 거기서 배를 버리고 모두 도주해 버린다. 배설만이 홀로 후퇴하여 경상 우수군만 살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다면 조선 수군이 춘원포로 간 이유는 지휘관의 명령이었다는 말이 된다. 즉, 임진왜란 초기처럼 조선 수군은 원균의 명령으로 자살한 셈이 된다. 이외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만 명량 해전 직후 수군의 재건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는 점을 들어, 침몰한 게 아니라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채 뿔뿔이 도망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전 직후만 해도 조정에서는 전멸했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후 '뿔뿔히 흩어졌다.'는 서술에서 '단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는 서술까지 나오면서, 이 해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이 전투에서 전사가 확인된 장수는 (뒤에 밝혀진) 이억기 최호 둘이었고, (사실 처음엔 유일하게 죽었다고 알려진) 포로가 된 김완 이외에는[74] 전사가 확인된 장수가 없으며, 명량 대첩 이후에 하나둘씩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뒤에도 나오지만, 전사를 확인할 수 없는 목록에는 원균도 있다.

명량 대첩에서 배가 없는 장수들은 통제사 좌선에서 일개 사수로 참전했다는 것을 보아, 자신의 배를 타고 도망친 장수는 그대로 배에 타고 참전했다는 걸 알 수 있고, 여기에 전라 수영 휘하 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배들이 견내량으로 후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와, 명량 대첩 이후 임치 첨사 홍견 등 판옥선을 끌고 합류한 장수, 조선 수군의 부활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서, 제법 많은 배가 춘원포로 가지 않고 견내량으로 탈출했다고 볼 수 있다.[75] 다만 이쪽 설을 택해도 원균이 완벽하게 지휘에 실패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원균은 칠전량 당시에 종사관으로 종군했던 친동생 원전(元㙉)[76]을 버려두고 도망갔다. 반대로 원전은 이억기와 최호 등과 남아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원균이 술에 취해 기생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기습 당해서 지휘권이 무너졌다는 말도 있는데, 이건 정말 원균을 좋게 봐준 거고, 낙관적으로 상황을 본 것이다.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가 춘원포에서 전사한 것은 원균의 명령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고, 설사 지휘권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원균 단독으로라도 한산도로 돌아갔어야 했다. 원균은 그야말로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놓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차라리 원균이 술에 취해서 지휘권이 무너졌거나,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너희들이 알아서 도망가라'라고 손을 놓아버렸다면 더 많은 배들이 한산도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고[77], 그렇지 않더라도 춘원포에서 대다수가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 내내 견내량은 막히지 않았고, 한산도가 점령된 것은 해전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균이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면 오히려 정상 참작이 된다. 이게 아니라면 원균은 제정신으로 자기 혼자서 도망치기 위해서,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끌고 가놓고 탈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나마, 그나마 그를 옹호해줄 유일한 방법이 견내량 바로 서쪽에 막힌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견내량으로 착각해서 갔다가 육지에 막히자 패닉에 빠져 도주했다는 것.[78] 하지만 이 역시 그의 지휘가 무능했다는 방증에 불과하다.

칠천량 해전이 사실상 정유재란이 시작된 원인이라는 걸 생각하면[79], 이 전투에서 그를 옹호해줄 방법은 없다. 디테일하게 보고 싶다면 김경진의 임진왜란 1권 ~ 3권 참조. 능력이 없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도 전시에 공을 탐하면 나라가 멸망해도 이상할 게 없다. 무능한 병사는 혼자 죽지만 무능한 지휘관은 부대나 국가를 절단내는 법이다. 원균이 정말 괘씸한 이유는 또 따로 있다. 바로 배를 버린 것이다. 끝까지 어떻게든 싸우다 패했으면[80] 그나마 정상참작이라도 되는데, 원균은 적이 몰려오니 기함을 내팽개치고 육지로 도주한 것이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조정과 권율이 출전을 거부한 원균에게 출전을 강압했기에 원균만 나쁘다 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 자신이 부산포 진격 떡밥을 흘리며 이순신의 경질과 자신의 부임에 큰 역할을 했으니 이는 자업자득이다. 이순신의 무패 신화 속에서 조선 수군의 장비와 훈련도는 절대적으로 우세했으며 사기 역시 하늘을 찔렀으나, 왜군의 사기는 장졸을 막론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할 정도였는데, 나름 충무공과 비슷한 급의 수군 장수로서 '함께' 왜군을 격멸했던 원균이 지휘하자마자 허무하게, 그것도 적군은 아무 타격이 없고 아군은 수습할 여지조차 없는 패배를 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아무리 낙천적인 일본군이든, 아무리 염세적인 조선군이든 일본군의 승리 자체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하다못해 백전 노장의 옛 이순신 휘하 장수들 의견만 현명하게 수렴했었다면 이런 참담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원균이 그토록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이순신처럼 잘 할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재주와 모함에도 뛰어났으며 휘하 장수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81]

2018년 6월 3일에 방송한 역사저널 그날 시즌2에서는 당시 판옥선이 파도가 높은 곳에서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갑작스런 기습을 당해 운항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원균도 정작 통제사 임명전과 달리 판옥선을 가지고는 전라도와 달리 외해로서 파도가 높은 부산 방면에서는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알고 출전을 주저하다 (선조를 통한) 권율의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출전 후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했다는 사실도 소개되었다. 원균을 실드치겠다고 한 발언으로 추정되는데 이건 오히려 원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발언이다. 임진년부터 명량 해전까지 해전은 모두 경상도 바다에서 벌어졌고, 그 자리엔 원균도 함께 있었다. 부산포 해전에서도 원균은 이순신을 따라서 같이 출전했고 위에 언급한대로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였다. 저 논리라면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이래 경상도 바다의 특성에 대해 무지했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반면 이순신은 1597년 1월 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 바다에도 불구하고 부산까지 나가 신나게 포격을 해대다 돌아온다. 백번 원균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순신은 더 열악한 조건에서도 해냈다.

이처럼 방송에서는 마치 원균이 마치 부당한 명령에 억울하게 희생된 군인처럼 묘사하였으나, 애당초 먼 바다까지 출정해 전투해야 한다는 엉뚱한 주장을 한 사람이 원균이다. 원균은 이순신이 선조의 명을 따라 출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괜히 트집을 잡아 그를 모함하고 헐뜯어서 마침내 통제사의 자리를 빼앗았으나, 정작 자신도 해당 작전을 따르려 하지 않다가 곤장을 쳐맞고 난 후에야 질질 짜며 억지로 출정했다가 조선 수군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이 문제는 원균을 옹호하는데 들기에는 적절한 예시가 절대로 아니며, 오히려 원균이 철저하게 군인으로서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도 없는 심히 부적격한 인물이었음을 재확인시켜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비합리적인 작전을 주장하며 군지휘권을 얻고, 결국 그 작전을 시행하다 참패한 전략적 무능은 물론 지형을 읽는 능력도, 정찰을 게을리 않는 꼼꼼함도,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까지 죄다 낙제 수준이었던 전술적 무능, 뛰어난 동료를 모함하고 뇌물과 아첨과 인맥으로 출세를 꾀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격적 결함을 남김없이 보여준 사람은 바로 원균 본인이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이 부분을 통째로 건너뛰어 원균을 마치 희생양처럼 묘사한 것은 역사 왜곡이나 다름없다.[82]

3.5.1. 생존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몸이 비대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행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였던 그는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징비록
칠천량에서의 패주 이후 원균은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졌다. 말 그대로 뿅 하고 사라진 것이다. 현대에도 그가 도망치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남았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묻혔는지를 밝혀내지 못했다.

일단 조선의 공식 입장은 원균은 전사했다는 것이다.[83] 문제는 패전 직후부터 각지에서 도망가던 원균을 보았다는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심지어 당시 책임자였던 권율이 목격자까지 직접 확보하는 등 그가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서술하자면, 원균의 패퇴 이후 행적에 대한 첫 보고는 칠천량에서 살아돌아온 선전관 김식이 올린 것이다. 1597년 김식은 자신과 원균의 도주를 알리면서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다만, 이 경우 김식도 원균과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상황에서 자신의 실책을 무마하기 위해 거짓 보고를 올렸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맹점이 존재했다. 그리고 원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 죽었다고 확언한 것도 아니다. 그 외에도 이순신이 칠천량 패전 직후 곤양에서 경상우후 이의득과 경상 우수사 배설과의 대화에서도 원균이 도망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도망 후 전사했는지는 자신들도 모르는 상황이었다.[84]

그러나 선조는 이 보고 직후 벌인 회의에서부터 원균이 죽었다고 단정해 버린다. 문제는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서 도원수 권율의 보고서가 올라오는데, 주요 골자는 이순신의 복귀 관련 내용이었지만 여기에 원균의 패전 이후 행적에 대한 상세한 증언이 덧붙여져 있었다는 것이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도)(蛇梁 - 통영 부근의 지명)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도)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선조실록 1597년 7월 26일 기사
물론 이 보고가 오보였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이라, 전사했던 정발 송상현을 두고 한양에서는 일본군에 항복해 일본 장수가 됐다는 오보가 올라올 만큼 그러한 통신사고가 잦기도 했다. 하지만 원균 생존 보고는 다른 오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 최영길이라는 명백한 증인과 함께 증인이 원균을 단순히 목격한 수준이 아니라 그와 직접 대면한 후 대화를 나눴다는 증언까지 했다. 때문에 이 보고 직후 조정에서는 당연히 원균을 찾아내어 참패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지탄이 나왔고, 처음에는 선조도 여기에 응해서 사실상 즉결 처분을 명령했다.(선조실록 1597년 8월 5일)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명량 해전으로 자기 목숨줄을 연장시켜 주자 배가 불렀는지,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입 씻고 원균의 처벌 요구에 "원균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지 말라"는 헛소리를 하며 그를 처벌하자는 의견을 묵살했다.[85]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어처구니없게도 원균은 공식 전사자로 대우받는다.

사실 선조가 원균에게 책임을 묻자는 의견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칠천량 패전의 1차적 책임자야 분명 원균이긴 하지만, 그에게 속아넘어가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혀 판을 깔아 준 장본인이 선조 본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로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에는 생각을 바꾸어 그냥 한산도에 주둔하려 한 원균을 끝끝내 떠밀어 공격에 나서게 한 이도 자기였다. 이래저래 원균에게 죄를 물으면 물을수록 최종 책임은 선조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간악하게도 원균을 전사자로 취급함으로써 그에게 모든 실책을 떠넘기고 정치적 피해를 최소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할 이를 논할 때, 선조가 이순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냈음에도 신하들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자고 은연중에 압력을 가하자 본인도 한 짓거리가 있으니 결국 이를 승인해야만 했을 정도로 선조의 정치적 입지는 많이 좁아진 상황이었다. 하물며 살아 있는 원균을 불러들여 진상을 파악했더라면 선조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국 선조의 방기로 인해 원균이 확실히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그저 공식적으로만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86] 김경진 등이 집필한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이러한 생존설에 따라 순천 부사 우치적이 평생 숨어 살도록 원균을 숨긴 것으로 처리하기도 했다.[87]

한편 일본 측이 기록한 사살 적장 목록에서 원균으로 짐작되는 자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그의 생존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한국에서는 이에 관해 '워낙 무능한 놈이라 왜적들도 기록할 가치조차 못 느껴 뺐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당연히 원균 깔 겸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엄연히 적대국이였던 왜에게는 직급이 중요하지, 무능한지 유능한지는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가 그렇듯 왜에서도 장수들의 논공행상을 위해 죽인 적장을 빠짐없이 기록했는데, 일본의 기록에서조차 어디서도 원균은 커녕 원균 비스무리한 장수조차 찾을 수가 없다. 즉, 적어도 원균이 달려든 왜군을 혼자서 몰살하고 외딴 곳에서 과다출혈로 죽었다는 판타지스러운 상황을 겪은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 뒤 모가지를 따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원균은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설령 왜적들이 원균의 얼굴을 몰랐다손 치더라도, 직책이 직책인 만큼 튀는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 구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원균의 이름은 몰랐겠지만[88][89], 갑옷 등 화려한 장비들로 봐서 충분히 고위급 지휘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원균의 신원을 확인해 줄 고위직 포로까지 있었는데도 일언반구조차 없었다는 것은 답이 딱 나오는 얘기다. 일본군은 원균의 수급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김완이 입 꾹 다물고 있었다고 해서 원균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같은 맥락에서 역시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원균의 행동 때문에 일본군에서 항의까지 했는데 원균이라는 인물로 수군 고위직이 교체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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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원균은 시체조차 찾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재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원균의 묘는 가묘이다.( 경기도 기념물 57호)[90] 설령 생존설이 사실이라 한들, 원균이 백치가 아닌 이상 본인도 이 따위 역적짓을 저지르고도 감히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아예 조선 땅을 떠난 것이 아닌 이상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수준으로 겨우 연명만 하며 숨어 살다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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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안정국가산업단지에서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로 이어지는 국도 77호선 주변 야산 20여m 지점,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 산435번지에 완만하게 오른 자갈 흙더미가 하나 있는데, 지금은 흔적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다. 주변 마을 주민들 사이에 엉규이 무덤[91] 또는 목 없는 장군묘라고 불려 온 이 봉분은, 각종 문헌과 구전을 토대로 원균의 묘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통영군사편찬위원회가 1985년 펴낸 '통영군사'와 통영문화원의 '통영향토사 연구 논문집' 그리고 선조실록 및 선조수정실록에 선전관 김식이 기록한 원균의 마지막 행적을 고려할 때 봉분이 원균의 묘가 거의 확실하다는 게 향토 사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무덤이 공인되면 칠천량 전투 이후 생존했음이 확실해지므로, 원균을 어떻게든 포장하려는 후손들이 애써 외면했기 때문에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왔다. 그러다 봉분 주변을 지나는 국도 77호선 확장공사로 아예 사라질 처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굴조사 필요성이 다시 제기됐다. 다행히도 지역 주민들이 관심을 가져 확장공사 구간에서 제외되어 봉분은 살아남게 되었다.

이 봉분을 발굴해 남아 있는 유해의 DNA와 현재 생존해 있는 원주 원씨 후손들의 DNA를 비교하면 진짜 원균의 무덤인지 아닌지 가려낼 수 있겠지만, 원주 원씨 가문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 보니 영 요원한 상황이다. 사실 이들 입장에서는 꺼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평택시와 손잡고 원균의 가짜 무덤과 원균 기념관까지 거창하게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원균이 이렇게 추한 꼴로 죽었다는 증거가 확실해지면 원주 원씨 대종회는 물론 평택시 또한 세간의 비판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를 미화하고 영웅화 사업을 하던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원주 원씨 대종회 안에서도 2014년에 언론 보도를 본 후 봉분을 매입한 뒤 현장 조사와 유골 발견 시 DNA 대조를 하자는 찬성 목소리가 있었지만, 평택에 있는 가묘는 어쩌냐는 반대 목소리가 대립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통영 지역언론 보도가 있었다. 통영인뉴스 해당 뉴스는 2020년 보도인데 이로부터 2년이 흘러도 후속 보도가 언론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볼 때 통영 봉분에 대해 결론내리기 껄끄럽거나 문제가 생긴 듯하다. 2014년에 확인해 원주 원씨 문중에서 토의를 했다고 하는데, 현재 2024년으로 정확히 10년째다.

그렇게 엉규이 무덤, 통칭 전 원균묘(傳 元均墓, '원균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묘'라는 뜻)는 지금도 관리하는 이 없이 그저 방치되어 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표시가 하나 있을 뿐이다. #

3.6.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전투일지


한 달 기간 동안의 전과를 보면 왜군은 20척 정도에 손실에 많아 봐야 2000여명 정도 사상자를 낸 반면, 원균은 거북선 3척에 더해 판옥선 170척 정도를 뿔뿔히 흩어지게 하거나 침몰시키고 10000명 이상을 바다에 수장시켰다.[99] 이정도면 진짜 왜군의 명장(...)이라고 비꼬아 불러도 할 말이 없다.

4. 기록

4.1. 난중일기

보통 어린이용 위인전이나 대중매체 등지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의 무능과 흉폭함도 넓은 아량으로 감싸주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가 많으나, 이순신도 불세출의 영웅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실제 이순신은 원균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부하들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깐깐한 잣대를 세워 평가하였으며, 논공행상도 그에 맞춰 철저하고 공정하게 하는 인물이었다.[100] 그런데 원균은 장군으로서 단순히 무능하기만 한 것도 죄이건만 성격조차 포악하고 옹졸한 소인배였기에 진작 이순신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거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모함하여 기어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키고, 백의종군이라는 크나큰 치욕까지 겪게 만들었기에 이순신도 그를 누구보다 혐오하였다.[101]

이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진중하고 침착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는 난중일기의 내용 중에서, 유독 원균과 관련된 날의 일기에서는 이순신답지 않게 격앙된 감정을 보이는 대목이 많다. 원균과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실책을 지켜보면서도 일단은 '원 수사', '경상수사', 또는 원균의 호를 따서 '원평중'이라고 품위있게 써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원균을 가리키는 호칭이 점점 경멸적으로 바뀐다. 특히 1597년 3~4월 원균의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된 뒤 백의종군을 당하는 신세가 되어 온갖 고생을 겪던 1597년 5월 초부터는 그냥 '원'[102]으로 적었다가, 5월 6일부터는 일말의 인내심도 사라졌는지 아예 '흉측한 자', ' 원흉(元凶)'현대로 치면 원새끼 등으로 이르는 지경이 되었다. 당시에는 선술된 '원'이라는 표현도 상당히 강한 수위의 멸칭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놓고 '흉측하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은 현대 기준으로 보면 쌍욕을 한 수준이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시선이 크게 들어가는 일기 형식의 기록물인 난중일기를 근거로 이순신과 서로 사이가 나빴던 원균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올곧고 깐깐한 성향에 따라 쓰여진 것이라 원균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판단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역사적으로도 사실로 검증된 일들만을 다루기에 실록 못지않은 훌륭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아래 실록과도 비교해 봤을 때 일치하는 사실이 매우 많으니,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원균을 평가하자. 이순신은 원균이 각종 패악질을 일삼는 꼴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지만, 일기라고 해도 대놓고 욕설을 적는 것은 껄끄러워서인지[103] 오히려 난중일기는 실록보다도 원균을 더 점잖게 표현한 축에 속한다. 본인의 사견이 잔뜩 들어갈 수 있는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원색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이 아닌 신뢰성 높은 증거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당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104] 실록은 원균이 올린 말 그대로 원흉들과 방관적 공범자들의 책임 회피가 난무하는 형국이다.

이하의 번역본은 원문에 해석이 덧붙여져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고 참고하길 바란다.

4.2. 실록

이제 실록의 기록을 보자.
사헌부가 아뢰기를,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포악하기 까지 합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는 자가 많고 앓다가 죽는 이도 또한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충청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기용치 마시옵소서.
선조 "원균의 사람됨은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윤허하지 않는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
사헌부가 원균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연달아 아뢰니, 상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선조 1595년 8월 16일
사헌부가 원균의 일을 연달아 아뢰고, 또 아뢰기를,
(....)
선조: 원균의 일은 따를 수 없다.
선조 1595년 8월 17일
사헌부가 원균·이여온의 일로 계속 아뢰니, 답하였다.
선조: 오늘날의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선조 1595년 8월 18일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선조: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선조 1596년 1월 21일

이 외에도 해당 홈페이지에서 원균으로 검색 후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을 클릭하면, 무수히 많은 선조의 사랑과 대신들의 디스를 볼 수 있다.

4.3. 난중잡록

4.4. 달천몽유록[129]

5. 대중매체

6. 기타

6.1. 막장인 인간성

원균은 무능한 것 뿐만 아니라, 같은 나라의 민간인을 왜군으로 몰아 학살도 저질렀다는 잔혹 행위 의혹까지 있는 등 인격마저 막장이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 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정만록에 따르면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에게 위임받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여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다만 이따위 거짓말을 했다면 조정에서 원균에 대한 문책이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기록은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리 군공을 조작하기 위해 거짓 전공을 보고하는 일이 난무했던 때라지만, 자국민 학살은 자칫하면 백성들이 "아오씨 우리 군사들도 우리 죽이네? 이딴 나라 필요없음" 하며 외면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 다만 한국전쟁의 최덕신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학살극이나 나름 잘 나간 형 두어서 인간 말종짓 함에도 두둔된 백인엽을 생각하면 학살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더욱이 난중일기에는 그가 남해안의 섬에 배 두척을 보내어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찾는 것을 이순신이 저지하고 돌려보냈다는 기록[156]과 거짓으로 왜군 노릇한 자를 목을 베어 바친 것을 바로 잡은 장계를 올렸다는 기록[157]이 있다. 여기서 일부러 민간인을 왜적으로 둔갑시킨 것이 진실인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나, 수급을 구걸했다는 은봉전서의 기록까지 볼 때, 여러 기록에서 그가 수급에 목매다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최소 무리하게 민간인 시신에서 목을 거두거나 섣부른 처형을 했다는 진술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서 많은 이들이 그가 잔혹한 성정을 가졌음을 의심하는데에는 충분하다.

의병장 조경남이 남긴 < 난중잡록>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말(10공기), 생선 5마리, 3마리, 4마리"를 먹는 대단한 대식가로, 전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몸이 뚱뚱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부터 많은 사람이 원균의 이런 못난 모습을 조롱했으며, 한 유생은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듣고 '원균이 나라를 버린 게 아니라, 원균의 배때기가 원균을 버렸다.'는 시를 지어 고인 드립을 치기도 했다.[158]

'최소한 배신하거나 임무를 방기하고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일부 원균 옹호론자들의 논거 중 하나이고, 원균을 마구 조롱하고 비난하는 당시의 여론을 공정하게 기록한 <난중잡록>에서도 주석에서는 '당시에 겁에 질려 임무를 저버리고 도망쳐버린 놈들이 하고 많은데, 무능했어도 최소한 싸우다 죽은 원균을 마구 비난하는 건 과도한 것이 아니냐' '원균을 선무 원훈에 책정한 것은 왕법의 공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당시의 정권의 검열 하에서 선조의 관점에서 쓰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가려서 봐야 할 필요도 있다.

도망친 것은 제외하더라도, 원균은 무능하더라도 임무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기보다는, 자기가 판 무덤을 자기가 들어가게 되자, 궁지에 몰려서 자포자기하고 자살적인 행동을 한 것에 가깝다. 그것도 조선 수군의 전력을 저승길 동무 삼아서 말이다. 따라서 죽음으로 항전했다기보다 죽음으로 이적 행위를 하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린 것에 가까운 행동에 근거를 둔 원균에 대한 그런 옹호론은, 결코 올바른 주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끌고 갔더라도 중간에 질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그냥 니들은 알아서 살아남아라"라는 무책임해보이지만 그나마 그가 내놓을 수 있을만한 조치 중엔 가장 나을 조치라도 내렸다면, 수군이 그리 허망하게 궤멸되진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그토록 키운 수군의 반수는 침몰하고, 반수는 도망쳤다. 차라리 저 명령을 내렸다면, 각자 적어도 이탈해도 죄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원균 무능했지 그 아래는 죄다 이순신이라는 명장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베테랑들이니, 그들은 살아남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을 찾았을 것이다.

만약 이 내용이 맞다면 원균은 실제로는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부하들에게 엉터리 작전으로 해전을 완전히 말아먹고는 자기 혼자, 그러니깐 건방지게 자신의 가족들까지 전부 죽게 만들고 도망쳤다는 것이 된다. 모든 의혹들이 맞다면, 원균은 매우 뻔뻔하게도 자국민을 맘대로 학살하고 엉망인 작전으로 병력을 말아먹은 주제에 혼자서 탈영을 한 셈이다.

흔히 원균을 무타구치 렌야와 비교하고 심지어 원군이 환생한 것이 무타구치 렌야다식의 농담도 있다. 그러나 비록 무타구치 렌야는 무능하고 뻔뻔한 인물이었지만 적어도 자국 민간인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민간인과 포로를 대상으로 한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기에 전범재판에서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을 만큼 최악의 똥별이지언정, 인간으로서의 선은 지킨 인물로 원균과 비교하는 것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모욕이다. 적어도 무타구치 렌야는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공으로 꾸민 적은 없다. 오히려 무능할 뿐만 아니라 전쟁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한 츠지 마사노부가 진짜 일본판 원균에 가까운 포지션이다.

6.2. 추증 - 선무공신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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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시 도일동 산82에 자리잡은 원균의 사당.[159]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임진왜란 3대 선무공신이다. 원균이 선무공신에 제수되었음이 공을 증명한다는 시각도 있으나 사실은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의 발로. 정확하게 말하면 왕권 강화에 집착했던 선조는 이순신의 위명이 조선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매우 꺼려 이를 견제하고자 원균을 1등 공신으로 만든 것.[160] 더군다나 이몽학의 난을 당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버린 선조로서는 뭔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계속 견제하고자 했다. 게다가 신립이 탄금대에서 드러눕고 한양까지 털려버리자 선조는 요동으로 도망가려고 한 반면 광해군은 분조를 꾸려 조선을 누비고 다니며 전쟁을 독려하고 노력했다. 이미 백성들의 지지도 역시 선조 <<< 넘사벽 <<< 광해군인 상황이었다. 당시 조정에선 이순신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한 목소리로 "원균에게 어찌 그런 영예를 주냐"고 반대했지만 선조가 다 씹고 무리하게 공신으로 만들었다. 그랬기에 원균은 전후 논공행상에서 2등에 제수되었으나 원균에게 출정하라고 독촉하던 선조는 태도를 바꿔 칠천량의 패배를 도원수와 비변사의 독촉 때문인 것으로 몰며 자기의 생떼만으로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제수시켰다. 또한 이는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 자체를 공으로 만들어[161]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한 술책이기도 했다. 종전 후 공신 책봉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 선조는 "명나라 덕분에 이겼지, 조선 장수들은 한 게 없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왕이 공로가 있다고 한 세 장수 중 하나가 원균인데 공신 명단 자체에서 빼면 왕 체면이 뭐가 됐을까? 2등 공신에 올린 것조차도 선조 체면 세워주기용에 가깝다.

그런데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원균이 공을 세운게 되는데 바로 선조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킨 어처구니 없는 공로이다. 전쟁과는 아무 상관없는 선조 개인 영달을 위한 공로가 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원균의 선무공신은 의전상의 공로이지 실질적인 공로가 아닌 셈이다. 결국 선조는 자기 명예 떨어지는 걸 막으려고 원균을 공신으로 삼아준 것일 뿐으로 절대 원균이 잘나서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군으로 따지면 똑같이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어도 이순신과 권율은 진짜 원수가 맞는데 원균은 의장대 병력 1명 뽑아서 원수 정복을 입힌 것일 뿐이다. 선조가 노골적으로 도망쳐버렸는데 그걸 덮기 위해 똑같이 도망친 원균을 옹호하여 원균에게는 임금님이랑 같은 행동을 한 것만 강조하고 선조에게는 그런 원균과 같은 행동을 했으니 영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디밀어 원균을 선무공신으로 삼아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원균은 엄청난 행운아인 셈인데 자신이 망하려면 일단 선조가 반정을 먹어야만 하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님과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린 덕분에 원균은 영웅아닌 영웅이 되었고 어느 누구도 원균을 건드리지 못하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조선 왕조에서 원균 수준의 행운아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선무공신 제수는 선조 37년(1604년) 10월에 하사된 선무공신 교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로도 매우 정치적인 녹훈으로, 선무공신 1등공신인 이순신, 권율, 원균은 1604년 제수 당시 시점으로도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원균 1597년 전사, 이순신 1598년 전사, 권율 1599년 병사). 말 그대로 죽은 영웅은 있어도 살아있는 영웅은 없다. 다만 선조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해도 이순신이 세운 공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선무 1등 공신 3명 중 이순신은 원훈, 으뜸에 위치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편찬자들이 상당한 원균까였음을 알 수 있다.[162] 사실 당시에도 선조 외에는 원균을 까는 사람밖에 없었다 쪽이 답이다. 심지어 이후 실록에서도 무능하고 악한 사람을 빗대어 말할 때 제일 먼저 들먹이는 이름이다. 그 지역에 탐관오리가 넘쳐나 마치 원균을 보는 것 같았다 어쩌고, 왕이 잘못하면 원균 같은 놈이 벼슬을 하니 저쩌고 등등.
敎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孝忠仗義迪順協力宣武功臣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原陵君元均書
자헌대부(정2품)·지중추부사(정2품) 원균을 효충장의적순협력선무공신·숭록대부(종1품)·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종1품) 원릉군으로 추증한다.[163]

내용은 "장군은 전사하였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공업(功業)은 끝을 보지 못하였으나, 훈상(勳賞)은 죽어도 가상하므로 선무공신 1등에 책훈(策勳)하고 3품계를 올려주며, 부모와 처자에게도 3품계를 올리고 노비 13구(口), 전지 150결(結), 은자(銀子) 10냥, 옷감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원균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만약 원균이 사고를 안 치고 이순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해오던대로 수급을 챙기는 행위만 했더라도 선무 2등 정도는 받을 자격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이순신의 명령을 받고 출전해 적군을 쳐부수며 싸웠다면 적어도 그 공은 원균 자신의 공이 되었을 테고, 후대에 '원균은 무능하고 성정이 포악했으나 싸울 때는 잘 싸웠다.'는 말이 나와도 헛소리로 치부되진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원균의 집안도 대대로 대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164]

6.3. 원균옹호론

경기도 평택시에서 5선 한나라당계 국회의원을 지낸 원유철이 원균 백부의 후손이다. 정확히 말하면 원균의 경우 아들인 원사웅의 후손기록이 부족한 편으로 동생인 원연의 아들인 원사립이 꾸준히 관직에 있으면서 원연계가 원씨 집안의 혈통을 이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인 원유철이 원연의 13대손이다. 그래서 원유철의 지역구이자 원균의 출신지인 평택시에서는 원균을 밀어주고 빨아주는 중이다.

사실 원주 원씨 중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원균의 친동생인 원연[165], 원전, 조카인 원사립처럼 목숨 바쳐 활약한 인물들이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평택시의 문화 및 역사인물 홍보행정에 원유철과 원주 원씨 문중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

즉, 이런 원균옹호론은 여야를 떠나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닥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으나,[166] 평택시에서 원주 원씨 세력의 입김이 워낙 크다보니 아직까지도 논란 속에서 계승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웃긴 건 원균을 옹호하는 원씨후손들의 직계조상이 바로 원연이라는 사실로, 원연의 경우 명장이자 좋은 목민관이었는데 정작 자기들 직계조상인 원연의 무덤은 방치하고 있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조선 조정이 원연, 원사립 부자의 공을 인정해 원씨 가문에 하사한 양효충효정문마저 방치하는 등 조상님에게 할 수 있는 불효를 전부 저지르고 있다.

6.3.1. 원균평전

2014년에 평택시에서 편찬한 원균평전이 대표적인 원균을 재평가하자는 주장이 담겨 있다.

원균평전을 비롯한 평택시에서 원균을 자랑하는 글을 읽어보면 실소를 금하기 어려운 내용이 한 둘이 아닌데 구체적으로 지적해보자면 기원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어 온 충각전술[167]을 마치 원균이 창시한 전술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하여 서술하고 있으며 이순신과의 불화 이유를 공로 다툼이라고 설명해서 이순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168]처럼 양비론에 입각한 원균 옹호를 주장하는 데다가 칠천량 해전의 패전 책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이없게도 권율 장군에게 완전히 떠넘겼다. 엉덩이 맞은 거 때문에 아파서 졌나보다 그게 더 머저리같은데?

6.3.2. 원릉군기념관

파일:원릉군_기념관_개관식_2018.jpg

위의 사진은 평택시 도일동에 위치해 있는 원균의 가묘다. 이름은 원릉군(原陵君)기념관. 평택시 공식 블로그.

평택시의 원균 밀어주기는 계속되었고 2018년 4월에는 '원릉군기념관'[169]을 개관했는데 당연히 지역구 의원이자 원주 원씨 대종회 회장인 원유철도 참여했다. 건립 목적은 2018년 4월 16일 개막식 때 축사를 한 원유철의 발언으로 알 수가 있는데 기념식에서 원유철은 “원릉군 원균 장군의 많은 업적은 감춰지고 마지막 패전만 부각된 지금까지의 인물 평가는 오늘날에 와서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기념관 내부의 소개글들도 대부분 기존 통설을 바로잡자는 취지로 설명되어 있다.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자면

6.3.3. 원균장군문화벨트시민연대

원균을 옹호하는 시민단체로, 2022년 6월 8일 출범하였다. 출범식에 정장석 평택시장이 참여하였고, 2022년 10월에는 원균을 비판한 역사 유튜버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도 하였다. # 원균의 후손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손이 아니라면야 굳이 원균을 옹호할 이유를 찾기 어렵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사자명예훼손 고소는 직계 후손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료 발표, 토론회 등 행사를 개최하여 원균에 대한 바른 정보를 전한다고 한다. 각종 지역 행사에도 참여하여 원균 부스를 만들어 열심히 홍보활동을 하는듯 하다. #


[1] 삼사공파 20세손.( 족보(1) 족보(2) 족보(3)) [2] 일본은 그동안 죽인 조선의 장수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왔는데 그 어디에도 원균의 수급을 취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관복을 다 벗고 도망가다가 죽었을 수도 있다. [3] 외모에 대한 기록에서 초고도비만이며 100kg 전후였다는 기록과 말을 탈 수가 없을 정도로 뚱뚱했다라는 기록이 많다. 한번 앉은 자리에서 닭 3~4 마리를 먹었다는 기록과 허구헌날 대식을 일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근거없는 구전이 아닌 임진왜란때 가장 유명한 의병장 중 하나인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의 기록이다. 난중잡록은 전쟁 후 시간이 지나 선조가 죽자 광해군의 지시로 궁궐에 가져가서 조선왕조실록 참고 자료로 쓰게 했을 만큼 신빙성이 높은 책이다. 과거에는 식량이 귀했기 때문에 특히 종교에선 필요 이상으로 먹는 것은 죄라고 여겼다. 천주교의 칠죄종 중 폭식의 죄가 대표적. 물론 조선도 역시 너무 적게 먹는 것은 건강상의 이유로 우려하긴 했지만(단적인 예시로 영조는 소식했는데 이에 대해서 너무 적게 먹으니 건강이 우려된다는 말이 나왔다. 물론 영조는 83세까지 장수하는 것으로 그 우려를 가볍게 깨버렸다.) 탐식은 좋지 않게 보았다. [4] 병마절도사를 지냈는데, 장남이라는 놈의 임팩트가 너무나 강한데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서 잘 부각이 안 될 뿐, 이 사람도 살아생전에 아들급으로 상당한 개차반인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첫 기록부터가 궁 내 순찰이 임무인 선전관이면서 순찰을 게을리 해서 그 당시 임금 중종이 궁 내 기강 해이를 질타하는 부분이었고, 이후 전라좌수사를 뇌물로 달고는 을묘왜변 당시 아예 출정을 하지 않아서 파직당할 뻔했다가 빽이던 문정왕후가 무마해줬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후 문정왕후 실각 후엔 좌천당한다. 공문서에 기록된 마지막 기록은 길주 목사던 시절에 공금을 빼돌려 여진족과 밀수를 하다가 적발되어 파직당한 것이다. 기묘하게도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은 기록되어 있는데, 생년과 몰년은 모두 미상이다. [5] 의병을 모아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공을 세웠다. [6] 형의 부관으로, 칠천량 해전에 형제가 같이 참전했는데, 형은 비겁하게 빤스런한 반면 동생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 [7] 태종의 16녀 숙경옹주의 5대손. 숙경옹주 → 윤준원 → 윤수천 → 윤임형 → 윤언성 → 윤차심 [8] 본래 서자였으나 적자가 되었다. [9] 의신군 이비(義信君 李備)의 측실로, 의신군은 성종의 15남 운천군의 (양)손자이나 의신군의 부친인 이천군(伊川君)이 본래 성종의 4남인 완원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완원군의 손자이다. # [원문] 史臣曰: "閑山之敗, 元均可磔, 而將卒皆無罪焉, 何也? 均之爲人, 乃麤暴一無知人也。 初與李舜臣爭功, 百端構捏, 逐舜臣而自代。 外爲大言, 有若一擧而殲賊者然, 及智窮兵敗, 捨船登陸, 使士卒盡爲魚肉, 當時之罪, 誰執其咎? 閑山一敗, 湖南繼沒, 湖南覆沒, 而國事不可更爲矣。 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11] 칠전량 패전의 책임은 원균의 몫이 크다고 비변사에서 말하였는데, (이순신 대신 원균을 임명했던) 선조가 "원균 핑계대지 말라."고 감싸자 한 사관평이다. [12]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 [13] 학자들이 이순신을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인데 군대란 전시 체제 돌입 시 국가 재정을 많이 소모할 수 밖에 없는데 이순신은 개전 내내 조정으로부터 어떠한 물질, 재물적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조정에서 물자 지원을 안 해줘서 졌어요."해도 할 말이 없는 전투를 오히려 단 1번의 패배도 없이 승리로 이끌었다. 심지어 이순신은 단 한척의 판옥선도 적에게 격침되거나 빼앗기지 않았다. [14] 학살당한 조선 백성들의 수급까지 취했다. [15] 대표적으로 평택시에서 편찬한 원균평전이라는 책에서도 이런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16] 실록은 아니나, 거제읍지(巨濟邑誌)에 따르면 거제 현령으로 부임하기 직전 시기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재직하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정3품이 아닌 낮은 직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에도 벼슬의 등급이 낮아지고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 자료. [17] 하버드-옌징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융경원년정묘식년문무과방목(隆慶元年丁卯式年文武科榜目)』가 출처. [18] 시전부락 전투에 당시 종성 도호 부사(약칭 종성 부사·종3품)였던 원균이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했다고 나온다. [19] 불멸의 경우에는 원균맹장론을 인용한 소설이고 당연히 그를 원작으로 한 불멸의 이순신 또한 원균맹장론을 어느정도 차용했다. [20] 고적(考積)은 관리에 대한 인사평가를 말하며, 거하(居下)란 인사평가의 등급 중 하등(下等)말한다. 조선의 인사평가 체계의 거상, 거중, 거하로 나뉘게 되는데 당연히 거하를 받았다는 말은 인사평가가 무척이나 나빠서 최하점을 받았다는 의미다. [21] 초수는 계급, 직급을 올려주는 것을 말한다. [22] 출척(黜陟)은 "못난 사람을 내쫒고, 올바른 사람을 쓴다."는 뜻이며 권징(勸懲)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선징악(선을 추구하며 악을 벌한다)이다. 그러니까 사간원이 보기엔 원균은 관리로써 제대로 일할 생각이 없는 무능한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3] 체차(遞差)란 관리의 임기가 다 되었거나, 임무 수행에 적절하지 않거나, 무능할 경우 관리를 변경함을 말한다. [24] 간단히 해석하면 원균은 이전에 고을 수령직도 제대로 못 했는데, 더 큰 자리인 좌수사직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당장 자르시고 다른 유능한 사람을 골라서 좌수사에 임명하여 주십시오.라고 건의한 것이다. [25] 관계의 차례를 뛰어넘어 벼슬을 줌. [26] 바로 이 때 이산해 정언신의 추천으로 이순신이 천거되었다. [27] 이순신의 경우에도 (이일의 거짓 장계 때문이긴 하지만) 조선 조정이 봤을 때는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아니었다.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의 지원과 비변사의 반대에도 밀어붙인 선조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전라좌수사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28] 징비록 기준 [29] 참고로 임진왜란에서 조선 수군의 최대 전력은 칠천량 직전 130 ~ 180여 척이다. 최대 전력을 180여 척이라고 가정해도 원균이 자침시킨 70여 척 ~ 80여 척은 40%를 넘는 규모다. [30] 기록에 따르면 당시 우후의 이름은 우응진이며, 이후의 기록은 없이 93년 5월 난중일기에 경상우수영 우후로 이득진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따라서 정황상 왜란 초기에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31] 조정의 출정 명령을 받고 이순신은 좌수영의 수군을 총소집 중이었다. 이후 발생한 해전이 바로 옥포 해전 [32] 그러나 난중일기에 따르면 전라좌수영 수군에게 본영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건 4월 27일이며 본영에 수군 집결이 완료된건 5월 1일로 5일 정도 걸렸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다만 이때 29일까지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난중일기에 따르면, 본영으로 집결이 완료된 시기는 5월 1일로 원래 계획보다 2일이 더 걸렸다. 이런 상황으로 볼때 우수영도 전 전선을 모으려 했다면 최소 5일 이상은 걸렸으리라 추정해볼 수는 있다. [33] 8관 및 2첨사진이 각 3척, 나머지 14진이 각 2척씩이라 가정할 경우 남는 전력은 무려 22척이다. 첨사진인 부산진의 경우 전선 1척, 중선 1척, 방패선 1척을 각각 자침시켰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실제 우수영 본영 전력은 전체 우수군의 절반에 달할 가능성도 있다. [34] 이 서장은 4월 23일 작성되었다. 앞서 4월 20일에 한 차례 서장이 성첩되어 내려왔고, 경상우수영->한성->전라좌수영의 이동시간과 한성에서의 장계 취합 및 작성 시간을 포함해보면 원균의 해당 장계는 4월 15~18일 쯤 작성되었을 것이다. 실제 거제 일대에서의 전황이든 기록상으로든 원균이 삼도 최대의 수군 전력을 모조리 포기해야 할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35] 정확히는 영등포, 옥포, 지세포 만호들이 전선 두 척을 끌고 왔는데, 옥포 해전에서 우치적과 이운룡이 경상우수군의 선봉이었다는 것을 보면 두 전선은 영등포와 옥포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6] 당시 일본군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뛰어서 이동하는 것일텐데 가까운 창원등의 진영에서 병력을 소집시켜 농성하게 하고 본인은 전선을 타던 협선을 타던 뱃길을 활용해 후방으로 이동하고 전령을 보내 각 지역의 전선들을 끌어모으려는 시도를 했었다면 70척중에 태반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농성하고 있었다면 소집을 마치고 달려온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합류하여 일본군을 역사서에서보다 더 강하게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37] 실제로도 원균 말고도 도망은 쳤지만 나름 참작할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징벌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경상좌수사 박홍은 갑자기 공격받아 병력 절반이 갑자기 날아간 상태에서 동래성을 구원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원균처럼 자침하고 도망쳤고 박진은 병사 500명으로 어떻게 싸워보려다가 실패하였다.(단 김성일이 올린 장계에 따르면 반대로 처음부터 냅다 도망쳤다가 인맥으로 남의 공을 제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의문.) 이각 같은 유형은 문자 그대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도망쳐서 쉴드칠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으니 참한 것. [38] 임진왜란 초기에 원균이 가장 큰 트롤링을 저지른 것 같지만 사실 원균 이상으로 트롤링이 심했던 이들도 많았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진짜 아얘 도망쳤다 김명원에게 잡혀 참수되었으며 지휘관의 도망으로 지휘권이 붕 떠버린 그의 휘하 병력은 새로운 병마사인 박진이 올 때까지 각개전투를 이어나가야 했고 또 도망치면서 병마사 인신을 잃어버려 후임 병마사인 박진은 의심을 받는 등 고생이 많았다. 사실이 아니긴 했지만 신각도 도망쳤다는 오해를 받아 처형되었다. 사실 원균 역시도 이렇게 도망친 장수1에 속할 뻔 했다가 겨우 거기까지는 면한 케이스다. [39] 동래성, 부산진이 무너진 소식 같은건데 이미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에서도 몇몇 고을이 함락당한 전적이 있었던 만큼 고을 몇개 함락당했다고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순 없었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임지는 부산 일대에서 아주 먼 전라도 서부 해안이었다. [40] 특히 옥포 해전에서는 일본군에게 입은 피해는 1명 부상이었으나, 전투 후 원균이 전공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2명에게 상해를 입히면서 옥포 해전에서 조선 해군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장수가 됐다. [41] 위쪽 링크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나오는 인물중 행장은 고니시를 말하고 청정은 가토를 말한다. 정성는 테라자와 히로타카로 추정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정유재란이 일어나서 가토나 고니시등 일본군은 다시 침공을 했으나 나아가길 원치않았고 '중국쪽에서 뭔가 반응을 보이기전까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자'라는 내용의 맹약을 서로 모여 작성하고 있었다. 이때 가덕도의 왜장이 고니시에게 와서 말하길'조선군이 공격해서 14명이 즉사하고 17명이 중상입니다. 너무 슬픕니다'라고 하자 고니시등이 말하길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뭐하러 조선군을 건드려서 일을 내냐? 잡아온 조선군을 빨리 돌려보내라'라고 하고 요시라가 직접 이순신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42] 한산도 대첩에서 견내량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작살낸 이순신이 그 직후 새벽에 공격한 곳이다. 일방적인 우위를 끼고 전투해 승리했으나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조선 수군도 상당한 피해를 안았다. [43] 원균은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출격할 수 있는 상황인데 출격 명령을 거부했다'는 둥 이순신을 모함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찬동했으나, 막상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니, 부산으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손바닥 뒤집듯 주장을 바꾸어 이순신처럼 출격이 힘들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44] 이 당시 원균 본인이 쓴 장계가 육군 30만을 동원해서 섬을 일단 정벌하면 해군도 따라 나서겠다는 내용이다. 당연하지만 당시 조선은 전쟁으로 전국이 초토화 되어서 30만 병력을 징병하고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45] 3번이나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 이유가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는 과정에서 수군이 부산포에 출정해 시위를 하면 적들이 물러날 것이라 주장하였고, 그 주장이 먹혀들어 이순신을 파직시킨 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오르자, 원균은 부산포 출정이 육군의 원조 없이는 안 된다고 말을 바꿨다. 권율이 볼 때 원균이 하는 행위는 출세를 위해 임금을 속인 것과 다름없이 보였다. 이는 기군망상죄(임금을 속인 죄)로, 전시였기에 망정이었지, 평시였으면 사형당해도 할 말 없는 중죄였다. 이순신이 파직당한 이유 중 하나가 부하의 잘못된 공로 보고로 인한 기군망상죄였다. [46] 원균이 한 짓은 죽어 마땅한 이적 행위이지만 이런 처벌은 원균이 자포자기해서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닥돌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원균의 후손 중에는 권율에게도 칠천량 패전에 대한 간접적 책임이 일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47] 가장 높은 평가를 주는 이순신과 대비된다. 이와중에도 김응서의 발언을 통해 원균은 장기간 이순신을 헐뜯어 왔음을 알 수 있다. # [48]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군대를 간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현대에 비유하면 이등병이 해군참모총장에게 직접 안건을 건의했다는 것이다. # [49] 조선시대의 수군은 바닷가에서 사람을 끌어와 병력을 구성했을 것이다. 따라서 수군의 병력들은 자신이 살던 바닷가의 지형에 해박했을 것이며 그런 정보들을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들었으니 조선 수군은 항상 일본보다 정보력에서 앞설 수 밖에 없었다. [50] 전임이었던 이순신도 어쨌든 선조에게 직접 통제사 임명을 받은 인물이다. 전제군주제 사회에서 왕명으로 관직을 받았던 선임이 세운 선례를 허락없이 함부로 무시하고 갈아치운다는 것은, 그 선임을 믿고 지지했던 왕의 위엄 또한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51] 안중홍(安重洪)으로 동암처사라고도 불렸다. [52] 원주 원씨(原州元氏) 원천상(元天祥)이다. 153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언보(元彦輔), 할아버지는 원익(元翊), 증조부는 원치(元菑)이며 외조부는 파평윤씨 윤현손(尹賢孫)이다. [53] 梃, 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 [54] 현대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원거리에서는 라이플. 근거리에서는 권총. 그다음 총검, 맨손을 쓰면 된다. 라는 병기전환(Weapon Transition)이야기를 한 것. [55] 일기토도 아닌데 대장이 무기를 휘두를 상황이라면 이미 전황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의미이다. 설마리 전투도 그렇고, 일본 작가 다나카 요시키도 그의 소설인 은하영웅전설에서 자유행성동맹의 사령관인 양웬리의 입을 빌려 "총사령관이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직접 무기를 들어야 할 상황이라면 이미 전쟁은 패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56] 조괄은 훗날 입으로 떠드는 전략에만 능하다며 종이 위에서 논하는 병법이라는 뜻의 '지상담병'(紙上談兵)이라는, 탁상공론과 동의어인 사자성어와 '조괄병법'이라는 자기 이름이 들어간 고사성어를 남겼다. 그저 책상에서 공부한 대로만 병법을 적용하다 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실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겁 또한 교만과 방심으로 전임인 악의가 다 이겨놓은 전투를 말아먹은 인물로 언급된다. 하지만 조괄과 기겁은 자만심 때문에 일을 그르쳤을지언정 최소한 아군을 모함으로 제거하려 들지는 않았고, 주색잡기로 일을 게을리하지도 않았으며, 더불어 상대 적장들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명장들인 백기 전단이기에 명예로운 죽음으로 취급될 여지라도 있다. 이에 반해 원균은 어떠한가? 이미 임진년에 후속 조치조차 제대로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음에도 이순신의 지원으로 겨우 살아나서 체면치레한 주제에, 자신이 그 위에 군림하려고 이간질까지 하였다. 따라서 조괄과 기겁에 비유함은 오히려 원균에게 과분하다 할 것이며, 그의 행적으로만 평가할 때 중국사에서 가장 비슷한 인물은 차라리 진회일 것이다. [57] 원균 옹호론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는 소위 '기문포 해전'인데, 사실 진상을 알고 나면 해전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일이다. [58] 판옥선을 만드는 데에는 산에 있는 소나무를 모두 베어야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싼 이다. [59] 이후 명량 해전 직전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이라고는 겨우 판옥선 12척 뿐이었으나, 이 배로 이순신은 기적같은 승리를 일군다. [60] 이 내용은 <선조실록> 1599년 7월 19일자에 수록되었다. [61] 도순변사인 신립 육군참모총장에 해당된다. [62] 심지어 이 사례는 대장이 대장한테 질책한 게 아니라 더 낮은 계급인 소장이 대상인데도 따로 불러낸 것이다. [63] 여기에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1992년작 KBS1 임진왜란 4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제4부를 근거로 제시하나, 이글루스 블로거 '을파소' 측의 내용과 전술한 다큐 영상 등을 종합해 보면 해당 내용이 없다. # [64] 물론 난중잡록에 기록된 칠천량 해전의 정황도 정확하지는 못하다. 조선군이 식수와 땔감을 구하다 기습받은 장소를 영등포로 적은 것이 대표적인데, 실록에는 기습받은 장소를 가덕도로 적고 있으며, 해소실기에는 영등포에서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고 있었다고만 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65]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정유일기』 7월 8일) [66] 칠천도는 해안이 움푹 들어간 형태로 좌 우로 산 등성이를 끼고 있어서 적이 적선이 다가와도 바로 알아채기 힘들고, 만일 적선이 해안을 포위하면 꼼짝없이 당할 곳이라 이곳에 숙영을 하면 안 된다고 배설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반대했지만 묵살하고 틀어박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척후선을 여럿 띄우지만 그동안의 지나친 체력 소모에 초병들이 그만 깜빡 잠들어 버렸고(일본 측 사료로 검증된 내용) 일본군 침투조는 그대로 초병을 처치하고 콜오브듀티 클리프행어 미션마냥 기지가 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조선군 본진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선임인 이순신은 사병들의 체력과 사기 관리에 매우 신경을 썼으며, 기록에는 유인하는 적을 쫒지 않아 체력을 비축했으니 그 체력으로 보초에 힘쓰라 고까지 했다. [67] 왕이 임명한 관리를 마음대로 죽이면 역모로 간주된다. [68] 후대의 명나라 장군 원숭환 모문룡을 이렇게 죽였다가 피를 봤다. [69] 여기에서 원균의 첫번째 졸장 면모가 드러나는데, 적의 본진을 공격하러 간 입장에서 야간에 경계를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이 점령한 땅에서 숙박을 하게 되면, 경계를 강화하는 게 정상이다. 이순신이 단 한 차례도 적의 기습을 허용하지 않았던 점과 대비되는 부분인 것이다. [70] 김완의 후손들이 김완의 글과 시문(詩文) 등을 모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 수록되어 있음. [71] 즉, 경계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으려고 오버하냐?" 하고 되려 적반하장 격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 [72] 이 함대가 배설을 위시로한 훗날 합류하는 함대일 것이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주력 함대는 죄다 진해만으로 달려갔고 그 결과... [73] 지금의 경남 통영시 광도면 황리 및 안정리 지역 [74] 김완은 나중에 탈출해서 조선으로 돌아온다. [75] 원균이 사실상 지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을 볼때 원균의 명령에 불복하고 이순신이 통제사로 있었을 때 받아왔던 지휘를 생각하여 독자적으로 후퇴했을 가능성이 있다. [76] 원균의 셋째 동생인데, 관련 기록을 보면 연락관 노릇을 많이 했다. 원전만큼은 친형 원균이나 아비와 달리 진짜 조선의 신하 역할을 한 올곧은 사람이다. [77] 원균이 지휘권을 놔버렸다고 하면 휘하 장수들은 이순신 밑에서 배운 대열을 유지하며 퇴각했을 것이다. 바뀐건 통제사 한명. 이순신이 원균으로 바뀌었을뿐이기때문이다. 원균이 지휘권을 놓았다면 그 휘하의 부사령관급의 장수들은 경력이 충분한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 초기부터 이순신과 함께 해전을 수행한 이억기등이 그런 인물중 하나다. 즉, 하기싫었으면 그들한테 맡겨버리기라도했으면 이정도의 대패는 나오지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원균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78] 비슷한 상황으로 이후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한 시마즈 요시히로 역시 패퇴 도중 관음포를 해협으로 착각해 빨려들어가 도주로가 막혔다. [79] 엄밀히 말하면 시작은 이미 된 상태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지적 했듯 이순신이 지휘하는 해군이 건재 했다면 전라도가 변을 당하고 충청도 까지 약탈 될 일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일본의 계획은 항왜나 이순신이 예상했듯이 전라도 침공이었고, 조선 수군 공격은 1차 목표였다. 결국 원균 한명이 남해안을 일본에게 내주고 왜성을 쌓게 허용하는 등 조선을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사실상 정유재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80] 예를 들어 신립은 탄금대 전투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긴 했으나 그곳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했기 때문에 비판이 덜하다. [81] 1마리의 토끼가 이끄는 사자 100마리보다 사자 1마리가 이끄는 토끼 100마리가 훨씬 강하다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 [82] 애초에 방송 시작 전에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하겠다고 패널들이 되도 않는 뉘앙스를 깔긴 했다. [83]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하여 죽고 전라 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 수사 최호(崔湖) 등이 죽었으며,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출처: 선조수정실록 1597년 7월 1일 기사 [84] 출처: 난중일기 1597년 음력 7월 21일, 22일 일기 [85] 저 위에 있는 사관평이 바로 이 개드립에 붙인 사관평이다. [86] 다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선조가 원균의 생사 확인을 방해했다는 것 정도이며 그가 죽었는지를 정말 알았거나 알아보려 했다는 증거는 없다. [87] 이는 1990년대에 인기를 끈 '원균 그리고 원균' 같은 소설 및 기타 매체에서 이순신 노량 해전 생존 음모론이 횡행했던 것의 패러디 성격이 짙다. [88] 이순신의 이름도 에도 시대에 류성룡의 징비록이 수입되어 유행하면서부터 일본에 알려졌다. [89] 진주목사 서예원을 죽였을 때도 왜군들은 이름을 몰라서 "목사판관"을 잡았다고 기록했고, 심지어 전사한 전 진주목사 김시민과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90] 참고로 평택시에서는 이 역적의 무덤을 정비한답시고 4억 5천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혈세를 쏟아부었는데, 이는 당시 평택시 국회의원이었던 원유철이 원균의 방계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즉 평택시는 일개 지역구 국회의원의 조상, 그것도 민족의 역적이나 다름없는 졸장의 묘를 정비하는 데에 세금을 낭비한 것이다. [91] '엉규이'는 사람 이름 뒤에 '~이'를 흔히 붙여 부르는 경상도 방언식 표현으로, '원균이'의 변형된 발음으로 추정된다. [92] 하지만 실상은 휴전 기간에 일본군의 뒷통수를 친 거에 가까웠다. 그리고 일본군은 배 3척과 병사 47명을 잃었지만, 반대로 조선 수군은 판옥선 1척, 고성 현령 조응도, 병사 140명을 잃었다. 자세한 내용은 칠천량 해전 문서 참조. [93] 선조실록 30년 7월 7일 기사에 조선 수군이 다대포에 정박했다는 기록으로 추정된다. [94] 노를 젓는 병사들. [95]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4일, 16일자 기록. [96] 난중일기 정유년 7월 15일자 기록. [97] 부산시 북구 화명동 수정마을. [98] 칠천량은 임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임진장초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 "7월 9일에는 맞바람이 거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어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 [99] 판옥선 중 절반정도가 개별로 달아났다고 해도, 거북선 3척에 판옥선 96척을 침몰시킨 것이다. 참고로 이순신이 인계한 판옥선이 182척이니까 원균은 무려 절반 이상을 까먹은 것이다. [100] 이는 이순신 자기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기준이어서, 난중일기에서도 자신의 판단이나 행동을 자책하는 표현이 많다. [101] 더구나 이렇게 죄인으로 살고 있을 때 이순신의 어머니가 그 충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순신은 부고를 직접 전해 들었음에도 시묘살이조차 못 했다. 당시 유교 가치관에 따르면 전시라도 부모상을 당하면 고향에 돌아가 시묘살이를 해야 했는데, 이마저도 무시당하는 매우 원통한 취급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제공을 한 장본인이 다름아닌 원균이니 그를 증오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102]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을 칭할 때 아무 직함이나 칭호도 없이 성씨만 딸랑 써 놓는 것은 형식적인 존칭조차 붙여 줄 가치도 없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기실 불구대천의 원수 내지는 흉악 범죄자에게나 쓰는 극히 경멸적인 표현이다. 현대식으로 치면 "원 가놈"이라는 표현과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상대를 향한 모욕과 하대의 의사가 매우 강한 표현이었다. 씨(호칭) 문서 참조. [103] 아무리 원균 때문에 화가 나는 상황을 서술할 때조차도 ' 표현할 길이 없다'는 식으로 매우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심지어 칠천량 해전 이후 원균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후에는 지금까지 건조한 배들과 그동안 생사를 함께한 장병들이 고기밥 신세가 된 것을 두고두고 원망할 법도 한데, 그래도 죽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냥 더 이상 그 이름조차 입에 담기도 싫었는지 몰라도 원균에 대한 일체의 서술을 그만두었다. [104]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신만큼 원균을 잘 아는 이도 드물다. 전란이 터진 임진년부터 원균이 사라지는 정유년까지, 좋든 싫든 원균과 부대껴서 가장 고생해야 했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105] 이들은 왜란 초반부터 모두 제 발로 원균을 따라다니던 장수들이었고, 이 중 기효근과 김승룡은 몇번 대면한 적도 있었다. 이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시점에서 이순신 장군은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106] 방답(防踏)은 인명이 아니라 지역명이며,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 충무공과는 동명이인)을 말한다. 정3품인 우수사가 아니라 한계급 아래인 종3품의 첨사가 병력을 보냈으니 현대로 치면 사단 병력이 오는 줄 알았는데 연대 병력이 온 셈. 이 우수사는 이억기 전라 우수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한다. [107] 난중일기에서는 같은해 2월 1일부터 비가 계속 내렸고, 역풍이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같은해 2월 5일. 보성 군수의 소속 함대가 비 때문에 발이 묶여 합류가 늦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안그래도 바람세를 포함한 기상 여건이 불순했고, 거기에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함대는 신안 앞바다 기지 함대들까지 우수영에 모여야 하고, 여기에 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견내량까지 이동 거리를 감안하면 원균 함대보다 10일 정도 더 수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균은 이걸 따져보지도 않고 이억기가 안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발끈한거다. 이같은 원균의 험담은 원균을 두둔하는 대신들에게 '원균은 조정의 명을 받고 제일 먼저 달려왔지만 이순신과 이억기는 때마다 늦었기에 원균이 화가 나서 단독으로 출동하고자 했다'고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108] 이 날은 웅포 해전을 한 날이다. [109] 禿沙伊項, 현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 [110] 적군도 아니고 고기잡는 자국민을 잡아다 목을 베어 공적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111] 이영남과 이여념은 원균 휘하의 기지 대장들이다. 계속 언급되겠지만 부하들에게까지 뒤통수를 맞을 정도로 무능했다. [112] 명군 총사령관 송응창. [113] 이 시기 나고야에는 10만여 왜군이 조선 출정을 대기하고 있었고 북쪽으로부터는 16만의 왜군이 남하해 내려오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114] 전략된 내용에서는 탐망꾼이 보고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웅천에 있던 적선 4척이 자기네 본토로 돌아갔고 김해 어귀에 있던 적선 150여 척이 나왔는데 19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남은 배들은 부산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원균의 얘기는 이걸 공격하자는 얘기 같은데 새벽 2시에 떠나자면 취침 중인 병사들을 깨워서 출동 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여기서 웅천에 도착하면 정오쯤. 수비력이 가장 탄탄할 시간이다. 때문에 작전 제의를 하려면 수사들간의 정보 분석 → 작전 입안 → 출동준비 → 출항 순으로 절차가 있는 법인데 원균은 그런거없이 그냥 가자고 한거다. [115] 6월 10일 새벽 2시에 온 원균의 제안에 대해 이순신이 공문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 계획안과 작전 회의 요청서를 보낸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출정하자고 공문을 보냈던 본인은 전날 마신 숙취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술을 마셨는지 인사불성이었다는 얘기. 상식적으로 자신이 출정하자고 요청했으면 바로 답변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작전안을 구체화하여 다른 수사들과 논의를 하고있어야 했다. [116] 바닷속에 들어가서 조개, 미역 따위의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하는 사람. [117] 이 부분은 원균은 아마 이순신을 깔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 있는 항목이다. 자신의 배 25척은 어디 숨겨놓고 7척, 8척만 이끌고 와서 출동을 제안한 것으로 보아하면, 이순신이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후에 장계에 올릴 때 이 일을 들먹이면서 "저는 항상 용감하게 나가 싸우자고 했는데 이순신 저놈은 쫄아서 절대 안 나왔습니다"라고 모함까지 했다. [118] 松峙: 순천시 서면. [119] 우치적: 순천 부사. [120] 백의종군 하던 당시. [121] 좌수영은 전라 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을 말한다. 당시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이라 제대로 된 보직도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런 이순신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뿌렸다는 것은 원균의 일처리가 지극히 한심했다는 뜻이다. [122] 전략된 내용에서는 원균이 권율의 명령으로 편지를 보내 억지로 조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123] 원균이 부하의 아내를 강간하려 시도했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무장이라는 인간이 평범한 여성을 일대일로 제압하는데 실패했다는 어이없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당시 머문 지역은 오늘날 합천으로 그 근방에 삼국 시절 격전지인 대야성이 위치한다. 거기에서 김춘추 사위 품석이 동일한 짓거리를 하는 덕에 백제한테 점령당하는 결과를 부르고 여기에서 화랑 죽죽이 역사상에 알려진다. [124] 申蓁. 신진. [125] 안골포와 가덕의 일본군을 먼저 물리쳐야 수군이 나아갈 수 있다는 말 자체는 맞다. 하지만 이순신을 모함하면서 자신이 부산포를 공격하겠다고 했던 것은 원균 자신이었는데, 이제 와서 육군이 먼저 힘을 써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안골포와 인접한 곳에 있는 조선 육군은 김응서 경상 우병마사의 병영 뿐인데, 고작 수천 명 뿐이며, 그나마도 낙동강 하구부터 초계까지 수비 작전 중이었다. 이 병력으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몰아낸다는 게 말이 되는가? [126] 主將, 원균을 뜻한다. [127] 맨날 되도않는 모함만 하던 원균으로부터 상석에 앉아 대접받는 꿈을 꿔서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현실에선 사고치고 총대장한테 붙잡혀 갔다는 얘기. 원균은 이때 출전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는 이유로 도원수 권율에게 호출당하여 곤장을 맞는 치욕을 겪었다. [128] 이 내용 때문에 결국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서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되고 그 자리를 원균이 차지한다. [129] 임진왜란이 끝나고 2년 후 윤계선이란 선비가 쓴 소설이다. [130] 1980년 MBC 드라마 < 전원일기>의 종기 아버지 역,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승려 석총 역, 2005년 MBC 드라마 < 제5공화국>에서는 신현확 역. [131] 참고로 이 말을 한 이는 극중에서 주현의 매니저였던 이동욱. [132] 원래는 이순신 역을 줘야지 하필 원균 따위 배역을 줬다고 화가나서 출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매니저가 이 말로 꼬드겨서 넘어간다. [133]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이 작전 중에 군선에 기생을 태우고 논 건 사실이나 귀양은 엄연히 처벌이라 반성하고 근신해야 한다. 장희재처럼 빽이 든든하다면 모를까 귀양지에서 방탕하게 보내면 조정과 왕의 눈 밖에 나고 생명줄을 단축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4] 2015년 KBS 드라마 < 징비록>에서 신립 역. [135] 해설도 겸했다. [136] 1992년생. 1998년 KBS 드라마 <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의 아역, 2001년 SBS 드라마 < 여인천하>에서는 명종의 아역을 연기했다. 2008년 MBC 드라마 < 천하일색 박정금>을 마지막으로 연예계 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137] 최재성은 <불멸의 이순신> 방영 전 인터뷰에서 "원균이 세간에서 평하는 것처럼 악랄한 인간이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캐스팅을 거부했을 것"이라며 원균이 역사의 피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최재성이 <불멸의 이순신>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외운 대사( 칠천량 해전에서 죽을 때 유언)가 "이순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였음을 감안한다면 최재성은 원균을 으로 숭배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38] 2002년 SBS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는 두뇌파 주먹패 두목 김동진 역, 2004년 KBS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일 역, 2006년 SBS 드라마 < 연개소문>에서는 백제의 용맹스런 맹장 윤충 역, 2007년 SBS 드라마 < 왕과 나>에서는 충신 김자명 역, 2008년 KBS 드라마 < 대왕 세종>에서는 악역 김도련 역, 2009년 KBS 드라마 < 천추태후>에서는 강감찬의 부장 김종현 역, 2012년 KBS 드라마 <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 화랑의 믿음직하고 강직한 지휘관이며 감독관인 풍월주 호림 역. 2019년 폐암으로 별세했다. [139] 작중에서 주인공인 류성룡이 전생이전에 친구가 보여준 케틀벨 저글링을 새로운 신체단련법이라 알려주며 발등이나 깨지라고 했지만 머리 맞고 죽어버리면서 효과 좋네 라는 평만 남겼다. [140] 작 중 정말로 찌질하고 고집만 센 데다 무엇 하나 도움이 안 되는 꼬장꼬장한 꼰대로 확실하게 각인되는데, 이것이 올바른 묘사임을 감안하면 손현주의 연기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141] 일심이긴 했다. 일관적으로 헛짓만 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142] 현재 관광객들이 타는 승마용 말들도 조선시대 말들보다는 체격이 크다. [143] 당연한 소리지만 공신 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 원균이 받아서 가치가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 [144] https://www.joongang.co.kr/article/2710077, https://www.cha.go.kr/nationBbz/selectNationPostList.do;jsessionid=XK8mgBX3AHPXaljPi5tbPBf5PzEOnafCsHbj1tPyabXTku2v7GF1xgsHtXOyF3vi.cha-was02_servlet_engine1?mn=NS_01_04&nationId=75248&pageIndex2=59&searchCnd=&searchWrd=&searchStartDay=&searchEndDay= [145] 원래 저 책이 옛날책이고 재야사학자의 한계 때문에 지금보면 오류가 많은편이다. [146]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선산의 묘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실제 묘지는 통영시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실제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은 방치된 상태이며(해당 링크의 기사는 부산일보 8월 기사, 후손들이 벌초 비용을 보내고 성묘도 온다고 한다) 77번 국도 확장 공사로 아예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147] 영국군의 버마 침입을 알고는 공포에 질린 상태로 손을 떨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48] 참고로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는 임팔 작전 일본군 사망자 수가 기무라의 적전도주 후 일본군 사망자의 70% 정도인 약 5만 2천명이었다. 심지어 제28군은 부대원의 과반이 사망했다고 한다. [149] 사실 기무라가 버마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할 때 버마 방면군은 임팔 전투의 대참패의 영향으로 이미 힘도, 사기도 바닥난 한 줌의 패잔병 무리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150] 한국 한정으로 유포되던 버마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정작 극동군사재판 관련 자료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제대로 된 근거도 없다. 물론 기무라 헤이타로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개전에 관여한 혐의로 A급 전범 판결을 받고 처형된 7명 중 한 명이었던 데다가 포로 학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비록 직접적으로 포로학대를 지시한 근거는 없지만 포로 학대를 방치했던 인물이었는데, 더 가관인 건 기무라는 포로 학대를 인지하고 있었는지 겉으로는 버마에서 군인들에게 포로 학대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151] 다만 원균이 아무리 맹장이라고 그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원균 휘하의 전력이 강한건 사실이지만 이 전력이 평상시에는 각 지역에 흩어져 있기에 이를 모으기 위해선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순신의 경우 4월 15일에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들었고 5월 4일에 첫 출전을 한다. 그러니까 출정에 20일 가까이 걸렸다는 것인데 그나마 다행히 이순신은 일본군의 거점지인 부산진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서남부 해안이었지 원균은 그냥 남해, 사천 이런 곳들이다. 이순신보다 일본군으로부터 훨씬 더 취약한데 이런 상황에서는 원균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순신처럼 휘하 병력을 다 모으고 결전을 벌일 수가 없다. 그 이순신조차 20일이나 걸려서야 첫 전투를 치를 수 있었는데 원균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보다 더 단축하는건 불가능하다. 심지어 원균의 경상우수영은 가장 규모가 컸기에 전력이 강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급할 때 모이기는 더 힘들다는 게 단점이다. 이러니 앞서 '임진왜란 발발 이후'에서 나왔듯 병선을 모조리 자침시키는 게 더 현명했다. 적어도 병선을 자침시키면 적이 노획하여 쓰지 못하기 때문. 그러니까 이 때의 원균은 겁쟁이라서 싸우지 않았다기보다는 그 나름대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한거다. 원균이 진짜 잘못한건 그 다음. 병선을 자침시킨 후 아무것도 안 한 것이다. 그나마 고민은 했지만 선택지중 하나가 도망이었다는 것이 문제. [152] 이는 후대 야사가 아닌 전쟁 이후 선조가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기 참고자료로 공인한 대표 기록 중 하나인 의병장 조경남의 < 난중잡록>에 써있는 기록이다. 닭이 없으면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피죽도 못 먹고 굶어죽기 일쑤였던 상황에 장군이라는 인간이 이런 탐욕적인 행동만 했으니, 백성들과 함께 왜군과 싸우던 조경남이 원균을 혐오할만 했다. [153] '원'씨의 영어 표기인 'Won'은 영어로 '이겼다'는 의미다. [154] 다만 현재는 두 영상 다 비공개 상태다. [155] 출처: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4023_008 [156] 1593년 2월 28일 기록. [157] 1594년 3월 13일 기록. [158] 중국의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송나라의 당진이라는 무장이 식탐이 심해 늘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으며 "배야, 내가 널 저버리지 않았단다!"라며 (실로 황당한)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걸 보고 기가 막혀서 "장군은 장군의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장군의 배는 장군을 저버렸구려. 장군은 장군의 배를 그렇게 정성스레 먹여 살리는데 배란 놈은 장군을 위해 계책 하나 내놓지 않으니 말이오!"라며 비웃었다. [159] 본래는 원균의 묘역 앞에 있었으나, 물이 나고 낡아 현재의 위치인 묘 뒷편 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160] 이순신이 죽자 남도의 백성들이 모두 통곡하고 상여를 붙잡아 운구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161] 근데 이마저도 원균이 원군 요청이고 뭐고 튀려던걸 부하가 겨우겨우 뜯어말리고서야 한 거다. [162] 선조수정실록은 기존의 실록이 너무 북인 쪽의 시각으로 쓰여졌다고 여겨 인조 서인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인데,(사실 선조실록이 문제가 없던 것도 아니라서 분량부터가 사초가 많이 소실되어 한달치 분량이 보통 실록의 하루치 분량만도 못한 경우도 많았고 선조수정실록이 서인에게 좀 봐주는 성향이 강했던 만큼 선조실록은 서인들 말대로 서인까 성향이 강했다.) 서인 계통의 인물인 원균이 서인에게 까이는 상황에서 조선 때도 원균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 바로 알 수 있다. [163] 이전 내용은 불천위에 모셨다고 하였으나 불천위에 관한 내용은 없고, 또 한문 부분은 어디서 교지 중간 부분을 잘아온 것 같은데, 내용이 오기된 듯 하다. [164] 당시에는 조상을 잘 두면 후손들까지 줄줄이 덕을 보았다.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 가담자 중 정보라는 사람이 있어 참형을 당할 예정이었는데, 그가 정몽주의 후손임을 알게 된 세조가 귀양형으로 낮춰 주었다. 삼족을 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반역죄를 저지른 죄인조차도 조상 덕에 감형받고 산 것이다. 대우가 이 정도니 공을 세워 인정받음은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근데 원균 이 인간은 반대로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더군다나 원균의 그 '원씨'는 조선 최초의 후궁인 성비 원씨를 냈을 정도로 그 위세가 아주 대단했는데, 원균 혼자서 가문에 똥칠을 해 버렸으니... [165] 이 사람은 그 원균의 친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위인이다. 원연이 장손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서자 취급을 하여 외면한 점도 원균을 더더욱 띄우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66] 애초에 상술했듯 원균은 보수, 진보, 중도를 떠나 역사를 공부했던 사람들로부터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그의 만행에 관한 출처가 명확한데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업적에선 말할 것도 없고 인품에서조차 인권이 발달된 현대에서조차 흠을 찾는 게 더 힘든 이순신하고 대립한 터라 정치인들이라면 지지자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가 더더욱 힘들다. 정치인들 중에는 역사에 빠삭한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167] 해당 글에서는 당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이 당파라는 이름 자체도 이미 기원전부터 사용되었다. [168] 이순신이 개전시부터 전 휘하 장병에게 수급을 우선시하지 말고 적을 격파하는 것만을 우선시하라고 무지막지하게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참수 기록이 격침 기록에 비해 너무 적어 공과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는걸 고려해보면 개소리다. 이순신 입장에서는 원균이 수급을 탐하는 것은 단지 자기 공을 뺏어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적은 수급이라도 그걸 가지고 공적 분배를 통해 부하 장수 및 장병들에게 보상과 동기 부여를 해야 이순신 특유의 빡빡하고 철저한 전술을 장병들과 장수들이 열성을 다해 따를텐데 그 운영이 원균의 사적인 욕심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 [169] 건물명에 붙은 원릉군은 원균이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받은 작호에서 따온 것으로 평택시와 원주 원씨 종친회가 적극적으로 추진해 건설되었다. 건설비는 시비와 도비가 각각 2억 5천만원,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1억 7천만원을 지원해 총 6억 7천만원이 투입되었다. 운영비는 원주 원씨 종친회에서 부담하며 평택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 배치 비용을 지원한다고 한다. [170] 왜영 방화사건은 안위, 김난서가 왜영에 불을 지른 사건으로 이순신이 이를 보고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1일 기사) 그러나 이후 김신국이라는 인물이 "이순신이 한 게 아니라 체찰사 이원익과 군관 정희연이 한 일인데요?"라는 장계를 올렸고(선조실록 1597년 1월 2일 기사) 이 사건으로 이순신이 왕을 기망했다며 조정이 뒤집어 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신국이라는 인물의 거짓 장계일 확률이 높은데 관련 내용을 참고. 그리고 1월 27일에 선조가 "그거 이순신이 올린 장계가 맞어."라며 인정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171] 崇文賤武.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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