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시마즈 당주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 |
|
|
|
<colbgcolor=#3a3c4f><colcolor=#fff> 출생 | 1535년 8월 21일 |
사쓰마국 이자쿠성 (현 가고시마현 히오키시) |
|
사망 | 1619년 8월 30일 (향년 84세) |
오스미국 카지키 (현 가고시마현 아이라시) |
시마즈의 가몬(家紋), 동그라미에 열십자(丸に十文字)[1] |
[clearfix]
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 시마즈 4형제 중 둘째로 사쓰마 시마즈가 제17대 당주이다.2. 생애
2.1. 당주가 되기까지
요시히로는 사쓰마 시마즈가 17대 당주이며, 시마즈 타카히사의 차남으로 큰형인 요시히사를 도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규슈 통일에 힘쓴 무장이다.원래는 타다히라(忠平)였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이름을 받아 요시타카로 바꿨다가 요시히로로 개명했다. 1554년에 게도인 요시시게, 이리키인 시게츠구, 가모 노리키요, 시카리 시게토요 등 연합군과 이와츠루기 성에서 싸우는 것으로 처음 출전하여 적의 수급을 취했지만 화살 5발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1560년 3월 19일에 이토 요시스케의 공격에 시마즈 타다치카를 구하기 위해 그의 양자가 되었지만 1562년에 사쓰마 본가가 키모츠키 가문의 공격을 받자 귀환하였다가 오비 성이 함락돼서 양자 결연은 풀렸다. 키타하라 가문의 영지가 이토 가문에게 빼앗기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도왔지만 키타하라 가문 내부에 배반자가 나오자 마사키인(진행원)이 되어 이이노 성으로 향했으며, 1566년에 요시스케가 이이노 성 공략을 위해 미츠야마 성을 건설하자 시마즈 요시히사, 시마즈 토시히사 등과 완성하기 전에 공격했지만 부상을 입은 채로 패하면서 후퇴했다.
1572년에 휴가 키자키바루에서 요시스케의 대군을 적은 병력으로 격파했다. 이 승리로 이토 가문을 쇠락에 빠지게 해 1577년에는 요시스케를 휴가에서 추방했다.
1578년 시마즈는 오늘날의 미야자키현인 휴가 지방을 공격, 휴가의 다이묘인 이토 요시스케가 규슈 북부의 강자 오토모 소린에게 망명한다. 오토모는 이 명분으로 시마즈와 결판을 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나섰으나 요시히로가 미미카와 전투에서 오토모를 격파했다. 그리고 1585년에 히고 국의 슈다이가 되어 아소 가문을 멸망시켰다. 오토모는 세력권이던 치쿠고, 치쿠젠은 물론 본거지인 분고까지 시마즈에게 항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마즈는 규슈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오토모 소린은 혼슈를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한다. 1586년에 시마즈는 도요토미군이 오기 전에 규슈를 통일해둘 생각으로 오토모를 총공격했지만, 오토모군의 타카하시 쇼운의 분전 탓에 때맞춰 규슈를 통일하지 못했다.
1587년에는 오오토모 가문의 원군 요청을 받고 큐슈에 당도한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이끄는 도요토미군과 싸웠으나 혼슈를 장악한 도요토미와는 체급 차이가 너무 컸기에 맥없이 패배했고, 규슈 통일전쟁에서 얻었던 땅들을 거의 다 토해내고 규슈 남부만 영지로 인정받았다. 이후 장남인 요시히사(후의 류하쿠)가 책임을 지고 은퇴하였으므로 요시히로가 뒤를 이어서 가독을 상속했다. 이후 요시히사는 후시미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으므로 코에이 게임 등에서 둘이 함께 있는 것은 오류이며, 비록 요시히로가 가독을 이어받아 당주가 됐지만 히데요시의 강압에 의한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신들은 아직 요시히사를 당주로 생각하여 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도 요시히사의 딸 카메쥬히메와 결혼하여 시마즈 가의 당주가 될 수 있었고, 타다츠네의 후계자 역시 카메쥬히메가 결정했다. 카메쥬히메 자신은 자식이 없었으나 언니의 손녀가 낳은 타다츠네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정작 타다츠네 자신은 다른 아들을 더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2.2. 임진왜란 참전
도요토미 정권은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공을 위한 전쟁 준비를 하달했다. 1591년 8월 사쓰마번의 시마즈 가문에게 하달된 군역 부담은 15,000명이었다. 1591년 10월 그의 형 시마즈 요시히사는 류큐 왕국의 쇼네이 왕에게 도요토미의 지시를 통보하며 병력 동원은 면제해 줄테니 7,000명의 병력이 먹을 열달치 식량을 준비하라고 통보했다.[2] 하지만 1592년초에 요구하는 군비 모두를 준비할수 없으니, 요구한 물량의 절반이라도 받아달라고 답신이 왔고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3]1592년 5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전의 1만 5천여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 문단에 적힌 당시 시마즈의 복잡한 상황을 감안해 개전 이후 상당히 늦게 참전했고, 병력도 사쓰마, 휴가, 오오스미 삼국을 거느리는 대형 다이묘의 급에 비해 적은 병력을 이끌고 갔다.
1593년 7월 당시 일본 원정군의 거의 전부가 한꺼번에 동원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해 약 열흘간의 혈투 끝에 성을 함락시켰다. 1597년 7월에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수군과 제휴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격파했다.[4] 8월에 남원 전투에 참가하고 부여까지 북상했다가 정읍을 지나 해남에 남하했다. 10월 말부터 사천을 수비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현재의 학성 터)에서 농성하며 겨우 명나라 상대로 승리할 때 시마즈 요시히로는 1598년 9월에 사천에서 명군을 대파했다. 시마즈군이 약 7천에서 1만여 이하, 명군 및 조선군이 2만 9015명이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 보고에 의하면 명군은 약 7천여 명의 전사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시마즈군의 이 압도적인 승리는 사실상 사로병진책을 명나라의 완벽한 패배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패배로 명나라는 사실상 왜성 뚫기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도 전대미문의 대승리라 평했다고 한다.
이 공로로 명나라군 사이에서는 그를 귀석만자(鬼石曼子)[5]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석만자라는 같은 시마즈 지역의 왜장이 사로잡힌 일이 있었는데 이후 요시히로 즉, 의홍과 동일 인물인가 하는 질문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기도 한다. 명사에서도 석만자(石曼子)란 왜장이 등장하지만 이쪽은 진린에게 패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귀석만자'(鬼石曼子)라는 호칭이 나오는 것도 일본, 그것도 시마즈 가문 기록 정도고, 명과 조선에서는 그렇게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영조 때 조엄과 함께 1763년 조선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원중거는 일본 측 사료와 조선의 사료를 비교 정리하여 자신의 저서 《화국지(和國志)》를 펴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기록을 보고 귀석만자(鬼石曼子)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 " 일본의 귀신 이름인가?"라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조선 측 기록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자주 나타나는 무장이다. 흔히 한자 이름 '도진의홍'이나 '심안돈(沈安頓)' 또는 심안돈오(沈安頓吾)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일종의 존칭인 '도노(殿)'를 성에 붙인 '시마즈 도노(島津殿)'를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가고시마 사투리로 '도노'를 '돈'이라고 하는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표준어로는 '시마즈도노'이지만, 가고시마 사투리로는 '시마즈돈'이라고 한다. 비슷한 예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가고시마 출신)의 경우, 가고시마에서는 '사이고돈', ' 세고동'이라고 불린다.
1598년 11월,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탈출시키기 위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과 합세해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과 전투를 벌였다. 시마즈는 개전 초기 반포위에 걸려든 시점에도 기민하게 움직여 조명 연합수군의 약점인 진린 방향을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진린의 함대가 뚫리기 전 이순신의 본함대에게 먼저 후미가 쪼개지면서 패전했다. 이후 퇴로를 찾다가 관음포에 갇히고, 수차례 탈출 시도를 하여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대부분의 함대가 수장당했다. 이로 인해 시마즈 가문 총 병력의 절반 이상이 여기서 사망했다. 결국 요시히로는 목숨만 건진 채로 고국에 돌아갔다.[6] 다만 본인의 실책으로 마지막 전투에서 많은 가신이 죽은게 떨떠름 했는지 이때의 피해에 대해 본인은 짤막한 기록만 남긴다. 이에 대한 얘기는 노량 해전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비록 전투에서 패해 전력을 전부 잃었지만 시마즈가 조선 수군을 공격함으로써 해상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렸고 덕분에 일본군의 퇴로가 열렸다는 점이 인정되어 전후 봉록을 받았다. 또한 '난중잡록' 등에 의하면 이순신을 전사시킨 총탄을 쏜 조총병이 시마즈 부대 소속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2.3.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일본으로 살아돌아왔지만, 사쓰마 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시마즈는 규슈 통일전쟁을 하는 동안 얻었던 땅을 토해내고 규슈 남부의 사쓰마, 휴가, 오스미 3국만을 인정받게 되는데 히데요시의 이간책으로 휴가는 요시히로에게, 오스미는 히데요시와 협상을 이끈 이주인 타다무네에게 주어졌다. 임진왜란에서도 다른 영지가 그렇듯 원하지 않았음에도 히데요시의 징병 압박에 시달렸고,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파병에 반대한 시마즈 요시히사와 히데요시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요시히로간의 반목도 시작된다. 또한 1599년에 이주인 타다무네가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미리 제거했고, 이 때문에 그의 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해야 했다.이런 상황에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가 처음 병사를 이끌고 간 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시미성 방어 지원요청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군을 동원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해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해 버렸고, 후시미 성주 토리이 모토타다는 요시히로의 모반을 두려워해 입성을 거부한다.
천하의 정세가 정해지는 이 싸움에 참여해서 명분을 쌓고 이기면 콩고물을 얻어먹을 계획으로 그리고 오사카 성에 인질이 있어서 서군에 참가하기로 한다. 또 이시다 미츠나리가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당시 시마즈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 간에 화평을 주선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은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본국에 지원요청을 하지만 요시히사는 들어주지 않았고, 시마즈 토요히사 등 수백여 명만이 가문의 뜻과는 별개로 각자 요시히로를 위해 달려와 줬다. 이렇게 모인 시마즈군의 규모가 약간씩 다른데 이 때문일 것이다. 보통 1500~1600명 정도로 본다. 이에 대해 요시히사가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고 해도 노량 해전 때 입은 피해 때문에 처음부터 병력 동원이 힘들었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전투에서 시마즈군은 본진의 서쪽에 위치해 비교적 최전선에 있었지만 침묵한다. 초반에 우키타 히데이에가 분전해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일시 패퇴시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미쓰나리가 참전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자 말에서 내리지 않고 말했다는 게 군법에 어긋나고 시마즈를 모욕했다면서 죽이려고 달려들 정도였다.[7] 전황이 밀리자 미쓰나리가 직접 와서 부탁했지만, "오늘 전투는 각 부대가 스스로의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외다. 승패는 하늘이 정할 터."라고 대답하곤 계속 무시했다. 여기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통찰력이 없는 매우 우둔한 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옆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 있는지만 알아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함께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자기 병력을 탈탈 털어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는 바람에 큼지막한 고쿠다카에 비해 병력이 형편없이 적은 것이다. 나중에 우키타 부대가 패퇴할 때는 자기네 구역을 지나서 퇴각하자 사격을 가해서 '자기 편에게 총쏘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라고 욕도 먹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이 동군으로 배신, 서군은 패주하게 된다. 동군은 서군 본진으로 밀고 나가면서 시마즈군의 퇴로가 끊겼고 시마즈군도 공격받게 되었다.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는 자결을 결심했지만,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가 설득해서 막는다. 다이묘인 대장이 죽는 것은 사쓰마는 물론이고 당시 일본에서 절대 막아야 할 일이었다. 이에 시마즈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요시히로만은 탈출시킨다는 결론을 내리고 퇴각을 결심한다.
문제는 퇴로가 끊겼고 후퇴하려고 해도 앞 뒤로 도쿠가와 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것. 후방은 산이 가로막혔고, 거기에 사쓰마로 돌아가더라도 오사카에 있는 인질들도 구해서 가야 했기에 빠르게 가야 했다. 이에 시마즈군은 적진을 돌파해서 이세 로(路)를 통해 귀환환다는, 앞으로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적이 대부분 서군 본진에 가 있기에 의외로 전방이 병력의 밀도가 낮았던 점도 고려됐을 것이고 전쟁광 이미지인 시마즈군 특유의 정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마즈군은 깃발을 버리고 부대표식을 부러뜨린 후 모두가 한덩어리가 되어 징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동군을 향해 돌격했다. 이 일화는 이후로 시마즈의 퇴각이라고 불린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이들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공격을 상대하지 않았고, 차츰 동군 본진으로 오자 혼다 타다카츠와 이이 나오마사는 이들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때 시마즈군이 쓴 전술이 바로 가문 고유의 진법 스테가마리(捨て奸)였다. 본진이 도주하는 동안 수 명의 팀으로 나눈 저격수가 후미에 남아 추격해오는 적 부대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저격 후에는 총을 버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시간을 벌기를 반복하는 진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간벌기로 투입된 병사는 전사가 확실하기 때문에 인망이 없는 지휘관은 절대로 쓸 수 없는 전술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이 진법을 쓰는 와중에 이에야스의 본진 옆을 지나치기도 했다. 이때 부하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이번에 뜻하지 않게 적이 되어 싸우다가 지금 막 진 앞을 지나 본국 사쓰마로 돌아가옵니다. 내 마음에 대해선 훗날 바로 말씀 올릴 것 이외다."라고 외치게 했다고 한다.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와 가신 쵸주인 모리아츠가 요시히로의 갑옷을 입고 카게무샤 역할을 하였다. 둘 다 전사했고, 모리아츠는 죽기 직전까지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여기 있다!" 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렇게 적지에서 벗어났을 때 병력은 50~80명 정도로 줄어 있었다. 도쿠가와 측에서는 이들을 막던 이이 나오마사가 저격당했고, 2년 후 상처가 악화돼 병사한다. 또한 나오마사의 사위로 함께 첫 출전한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도 저격당해서 나오마사가 죽은 후 얼마 안 돼 병사한다.
그리고 이들의 목숨을 바쳐서 요시히로는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이세로를 따라 이가성을 지나 오사카로 가서 인질을 구출했고, 세토 내해를 가로질러서 영지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도망가던 중에 같은 서군 소속인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만났다. 무네시게의 친부 타카하시 쇼운이 위에 언급되었듯 시마즈 가문과의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무네시게가 복수를 생각한다면 80명밖에 없는 시마즈군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일전의 은원관계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함께 힘을 합쳐 규슈로 갑시다"라며 대인배다운 태도를 보여 요시히로는 크게 감격했다. 이후 영지로 돌아간 무네시게가 주변의 나베시마, 구로다, 가토 등 동군 세력에게 협공당하자, 요시히로는 은혜를 잊지 않고 지원군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출두명령을 거부하고 계속하여 군비증강에 힘쓰는 사쓰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시마즈 가를 치기 위하여 큐슈의 다이묘들에게 사쓰마 토벌을 명하긴 하였으나, 아직 시마즈 가가 건재하여 심히 부담이 되었거니와 싸움이 장기화될 경우 각 다이묘들의 불만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터라 1주일 만에 철회했다.
시마즈 가문 또한 원래부터 요시히로를 당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세키가하라 참전은 요시히로의 독단이었지 시마즈 가문 전체의 뜻은 아니었다. 요시히로 본인도 오사카 성에 인질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기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싸운 게 아니다. 탈출할 때만 용감해서, 이에야스가 그냥 보내줬으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게다가 1600명만 동원할 만큼 그리 서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은 아닌 만큼 용서해달라는 뉘앙스로 화의를 내비쳤다. 거기에 시마즈 가문 차원에서도 원래 요시히로가 지병으로 치매를 앓는고 말했으며[8] 그래서 가문 내에서 돈을 들여 이 인간의 치매를 치료하는 중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까지 말했다. 한마디로 제 정신이었으면 서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하는 발언이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눈 앞에서 지인들이 자신을 가리켜 "미쳐서 그런 거니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이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이이 나오마사였다는 것이 참 특이하다. 헌데 그걸 받아준 나오마사도 대인배인 듯하다.
결국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 1602년, 시마즈 가에 대한 처분은 불문에 붙이고 요시히로에 대해서도 일선에서 물러나고 막부에 충성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결정이 죽을 때까지 껄끄러웠는지 "내가 죽으면 시신을 사쓰마 쪽으로 향하게 묻으라."라는 유언을 남겨 죽어서도 시마즈 가를 감시하겠다는 의도를 보인다.[9] 일단 요시히로는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에게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2.4. 말년
이후 요시히로는 조용히 지냈지만 말년에는 정말로 치매에 걸려 식사나 화장실도 혼자서는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으며, 가신이 출전의 소라고동을 불면 그 때 한정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10] 결국 1619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3. 기타
- 임진왜란 당시 가장 많은 조선의 도공(陶工)들을 끌고 간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특히 정유재란은 '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당시 일본에서는 차를 즐기는 다도가 융성해 전투 이후 포상으로 다기[11]를 내려주기도 하는 등 좋은 다기에 대한 수요는 높았으나, 이에 비해서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낙후돼서 조선의 막사발조차 일본에서 예술품 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그런 조선 도자기는 다이묘들에게 권력과 부의 상징이였다. 시마즈는 일본으로 귀환하면서 전라도 남원성에서 박평의(朴平意)·심당길(沈當吉)을 비롯한 80여 명의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여 끌고 갔으며, 심당길의 후손들은 일본 3대 도자기이자 세계 도자기의 명품으로 이름난 사쓰마 도자기를 굽는 심수관가(家)라고 불린다. 박평의 역시 도공으로서 심당길의 친구였으며 같이 일본에 끌려가 대대손손 도자기 산업에 전념하여 번창하였으나 1886년 12대손 박수승(朴壽勝)부터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구매하여 개성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 58·63대 외무대신을 역임하였던 도고 시게노리(한국명 : 박무덕(朴茂德))이다. 13대손 이후부터 가업이었던 도자기 산업에서 손을 떼고 정치를 새로운 가업으로 잇고 있다.
- 조선에서의 악명과는 다르게 본인 휘하의 가신과 부하, 병사들에게는 자상한 덕장이였다. 시마즈는 병사들과 모여 같은 난로로 추위를 견뎠으며,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의 정신이 나갈것 같은 수준의 혹독한 추위로 다른 다이묘들의 군대에서 동사자가 속출할 때 시마즈군에서는 단 한 명도 동사하지 않았을 정도로 충분한 보급을 해주면서 사기를 끌어올렸다고 한다. 또한 가신이 아이를 낳으면 초대해서 축하도 하고, 아이를 무릎에 직접 앉혀놓고 덕담도 해주며 축복을 내려줬었다. 또한 부인을 상당히 존중하고 사랑한 애처가였고, 아내에게도 임진왜란 당시 편지를 자주 보내면서 자신이 죽더라도 가문과 아이들을 위해 강하게 살아달라며 당부하기도 했다. 이렇듯 덕장이자 가신들의 신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시마즈의 퇴각이라는 극한의 돌격퇴각이 가능했다.
- 임진왜란 당시 빛의 강도에 따라 동공의 크기가 달라지는 고양이의 특징을 이용해 시간을 파악하고자 고양이 7마리를 조선에 데리고 갔는데, 아들 시마즈 히사야스가 이 고양이들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이 중 두 마리만이 살아돌아왔고, 가고시마에는 이 고양이들을 모신 신사가 있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
호랑이 사냥하면 유명한 인물은
가토 기요마사이나, 시마즈도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도 했는데 당시의 기록화가 남아있다. 부하들을 이끌고 나갔다가 비가 내리는 통에
조총도 못 써먹고, 두 마리를 잡기는 했지만 인명피해는 피할 수 없어서 수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가죽과 고기를 바친 공로로 감사장을 받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호랑이 사냥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조선출병 시마즈군 호랑이사냥도(朝鮮出兵島津勢虎狩絵巻)
- 도요토미 히데요리 생존설에 단골로 등장한다. 오사카 전투 패전 이후 오노 하루나가, 사나다 노부시게, 키무라 시게나리 등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함께 사쓰마로 도망갔다고 하는데, 에도 시대 초기의 소설인《사나다 삼대기》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꽤 오래된 떡밥인 듯하다. 당시 오사카 등지에서 히데요리가 사쓰마로 도망갔다는 동요가 유행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우키타 히데이에를 숨겨주었던 일이 있어 이런 소문이 생겼을 법하다.
- 시마즈 요시히로가 본국 사쓰마 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받은 하리마국의 작은 영지에서 영지 관리를 돕던 인물에게 시마즈 가문의 성씨와 가몬을 하사한 일이 있는데, 그 인물의 후손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의 유명 기업 시마즈 제작소의 창립자 시마즈 겐조라고 한다. 그래서 회사 로고로는 시마즈 가문의 가몬을 사용한다.
4.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시마즈 요시히로/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이
가몬은 '구쓰와'라고 부르며,
일본식 '말의 입에 다는
재갈'이다. 본래는 붓으로 쓴 '十'자인 '쥬지몬'이었으나 이후 위와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참고)
[2]
요구 품목은 식량 1만1,250석과 황금 8,000냥
[3]
훗날 류큐 왕국 멸망의 시초가 되는 사건이다.
[4]
이때 침몰한 조선의 함선 중에는 거북선 3척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의 거북선을 보고 "메쿠라부네 칠천량에서 내가 직접 불태웠다."라는 대사가 나온 이유이다.
[5]
귀신 시마즈, 꾸이시만쯔(鬼石曼子).
중국어로 귀신(꾸이)과 같이 두려운 시마즈(시마즈의 음차, 시만쯔). 석만자의 발음이 시만쯔로 당대
일본어가 '나베'(鍋)를 '남비'처럼 들리게 유성음을 비음화한 것을 감안하면 '즈'가 비음화된 '시마즈'과 상당히 유사하다.
[6]
일본 영주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휘하 무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영주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무사들은 떠돌이 낭인이 되어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영주-가신간의 관계 때문인데, 영주가 아닌 가신들은 '어느 영주 아래에 있는 가신'이라는것 자체가 신분이고 그 신분을 보장해주는것이 영주다. 그런데 영주가 죽으면? '영주를 제대로 못지킨 가신'이 따라붙으며 이때 자신이 엄청난 공훈으로 다른 영주들의 눈도장을 받은 상태가 아니라면 그 순간부터 신분보장이 안되는 낭인이나 다를바 없어지는것이다. 따라서 모시는 영주가 죽으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니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7]
현대의 기준은 물론 그 때 당시의 기준으로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참전을 거부한 것이다. 애초에 싸울생각이 별로 없었던 것.
[8]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단 이렇게 우겨서 도쿠가와 가문에게 해명해야만 했다.
[9]
훨씬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결국 도쿠가와가 세운
에도 막부는 시마즈의
사쓰마 번이 주축이 되어 망했으므로 예언이 된 셈이다.
[10]
다만 당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하더라도 본인이 죽기 전까지는 실권을 행사하거나 최소한 자문역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치매에 진짜 걸리기 전까지는 요시히로도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11]
다도에 쓰이는 용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