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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2] Ga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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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칼리굴라 Caligu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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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년 8월 31일 | ||
로마 제국 안티움 | |||
사망 | 41년 1월 24일 (향년 28세) | ||
로마 제국 팔라티누스 언덕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
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 (3년 3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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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 제호 |
Ga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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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GAIVS IVLIVS CAESAR GERMANICVS[5] |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 |||
종교 | 로마 다신교 |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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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유니아 클라우딜라 (33년 결혼 / 34년? 36년? 37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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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오레스틸라 (37년 결혼 / 37년 이혼) | |||
롤리아 파울리나 (38년 결혼 / 38년 이혼) | |||
밀로니아 카이소니아[6] (39년 결혼) | |||
자녀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이[7], 율리아 드루실라,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논란)[8],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사촌동생, 입양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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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게르마니쿠스 | ||
어머니 | 대 아그리피나 | ||
형제 |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티베리우스 카이사르[9], 가이우스 율리우스(이그노투스 카이사르)[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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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제위 내내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최후가 비참했던 터라 고대 기록으로부터 암군,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0세기 이후 옛 로마 강역에서 대대적인 유적, 유물 발견과 새로운 비문 발견과 해석이 이루어지고 실제 명령과 비문 등 실제 영역 증거 아래 고대 기록이 반박되면서, 현대에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평가 중인 로마 황제 중 한 명이다.
2. 명칭
통칭은 칼리굴라(Caligula)이지만, 이는 로마 관보, 비문, 동판, 로마인들의 기록상 공식 표기나 이 사람이 제 입으로 자신을 부른 공적, 사적 통칭이 아니다. 공식적 이름이자 로마인들이 부른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CAIVS CAESAR GERMANICVS), 줄여서 가이우스(CAIVS)다.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가이오 체사레 "칼리골라", 황제의 본명을 부를 경우에는 가이오(Gaio), 카이오(Caio)라고 하며 줄여 부를 때는 통칭화된 별명 칼리골라라고 한다.칼리굴라(Caligula)는 가이우스 황제의 어린 시절 병사들이 붙여준 별명으로, 후대에 이르러 학자들이 가이우스를 외삼촌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구분하기 위해 부른 이름이 대중 영화《칼리굴라》로 유명세를 떨치면서 통칭이 된 경우다. 이런 이유로 인해 실제 로마 기록상 가이우스 황제를 직접 다룬 타키투스와 세네카, 유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는 그를 로마의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켑스, 로마 시민으로의 이름처럼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적거나 줄여 부르더라도 '가이우스'로 표기할 뿐 오늘날 사람들처럼 칼리굴라라고 당연시하며 부르지 않고 있다.[11][12] 이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의 기록,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발행한 라틴어 비문 해석 매뉴얼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시무스는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쓰다가 간혹 가이우스 칼리굴라로만 표기 중이다. 오늘날 서양 로마사 비문 해석 바이블로 쓰이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발행서에 나온, 로마 시대 비문이나 관보 등에서도 이 황제는 명확히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로 나온다.
오늘날 대중들에게 통칭화되어 불리는 칼리굴라(Caligula)는 작은 군화[13]라는 의미다.
3. 상세
로마 황제로서 살아생전 이름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당대 필로는 가이우스라고 적고 불렀고, 후대 디오는 "지금 우리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부르고, 몇몇은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라고 하는 가이우스 황제"라고 하는 로마 제국의 세번째 황제다.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중 처음으로 황제가 된 인물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로마인들에게 역대 로마 황제 중 카이사르라는 명사를 황제 지칭 표현이 아닌, 황제 개인 공식 성씨로 불린 마지막 황제이다. 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친혈육으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를 모두 이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이기도 하다.
로마 황제 중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이사르(CAESAR)를 황제라는 개인명사가 아닌, 형식상 공화국인 원수정 로마 아래에서 개인 성씨로 황제 본인과 원로원이 사용해 부른 마지막 ‘카이사르’이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이래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의 직계를 중심으로 한 혈육 간의 입양 형식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 하지만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이레아와 그를 따르는 일부 근위대 병사들에게 배신당해 일가족 전체와 살해됨으로써 역사상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14]
원로원 회의록, 금석문, 관보, 요세푸스, 필로의 기록 등 당대기록에서는 이 황제를 오늘날 통칭으로 부르는 칼리굴라 대신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어린 시절 불렸던 별명을 통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 본인을 비롯해 로마 원로원과 로마인들도 공식석상에서는 가이우스, 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후대 로마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실제 기록에서 그는 그냥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린다. 따라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역시 칼리굴라로 불린 가이우스 황제를 다룬 저서의 이름을《가이우스》로 했다. 수에토니우스 역시 자신의 기록에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적고 있고, 관보, 회의록, 당대 로마인들의 표기 등을 존중한 원로원 의원이자 역사가 타키투스 역시 살아생전 칼리굴라를 부른 것처럼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따라서 이 황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연대기》에서도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역사가들과 국외내 논문 중에서 이 황제의 외교정책이나 국방정책 등을 언급하는 경우, 로마 공식 관보와 황제 본인 생전의 통칭을 존중해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하면서 칼리굴라라는 이름을 통칭, 별칭으로 각주, 괄호로 언급해 사용하거나 아예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로 표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이 이 황제를 굳이 별명이자 통칭 칼리굴라(Caligula)로 부르거나 이름 뒤에 넣어 언급하는 이유는, 칼리굴라가 대중들에게 유명해진 것과 이 황제의 풀네임이 외삼촌 가이우스 카이사르[15]와 비교하기 어려운 까닭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서에서도 본래 로마 공식 관보, 로마 시민권자로서의 개인 이름, 황제로 사용된 본명인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대신 칼리굴라로 서술됐다.
동시대 정적 세네카, 후세대의 수에토니우스로 대표되는 고대 전승기록에서 "속이 좁고 시기심이 많은 젊은 황제", "말년의 티베리우스가 보여준 통치 방식에 대한 반발로 광기에 휩싸인 사치, 폭력, 쾌락"으로 서술됐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타키투스의 저서 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편을 다룬 7권, 8권은 분실됨에도 간접적으로 그의 통치시대가 티베리우스 시대와 비슷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과 광기로 알려진 주장 모두를 오늘날 문자 그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고대 기록의 작성자들인 원로원과 재위 내내 갈등을 빚다가 일부 근위대에게 암살된 황제라서 오늘날 대중들에게 네로,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 카라칼라 등과 함께 로마 제국의 폭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고, 고대 전승기록을 토대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구제 불능의 미치광이 폭군으로 유명해지게 됐다.
이 황제의 짧은 4여년간의 재위기간은 실패로 끝났지만 권력강화와 애매모호했던 로마 황제 권력의 절대화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16] 그래서 그의 시대는 초기 원수정 시대[17]임에도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 권력강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원수정과 비슷했고, 본인은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식 전제군주를 지향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기대했다가 후기 티베리우스때와 비슷했던 젊은 황제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질릴대로 질린 티베리우스 시즌 2 내지 광기로 치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 이후에는 과거와 달리 의외로 자신의 직책에 대한 이해도와 통치철학이 확고한 군주로 재평가되고 있다. 현대 서양 학계에서는 그가 짦은 재위 기간동안 했던 공공건축과 인프라 입안 및 건설, 화폐발행권 일원화 등 행정 개혁과 내정 정책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행정적 측면에서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괜찮았다"고 평가해주고 있고, 칼리굴라가 죽기 전 추진한 로마와 이탈리아 건설 프로젝트는 후임 클라우디우스 시대때 오스티아 인공항구를 제외한 대부분 건설 프로젝트에서 계속 이어졌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스카레와 같은 현대학자들은 칼리굴라가 변덕스럽고 잔인한데다 불안정하며 흥분을 잘하는 젊은 황제여도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되는 원로원의 악의에 찬 평가를 그대로 반영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분명히 드러냈다. 즉, 현대 학자들에게 로마제국의 세번째 황제인 가이우스라는 인물은 "위험하고 불쾌한데다 과대망상 환자에 가까운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사람의 정보 출처에는 끔찍한 농담과 공허한 허풍과 과장이 담긴 소문들이 많은 탓에 무작정적으로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즉위할 당시 로마는 초기 원수정 상황상 이런 그의 통치스타일은 상당한 정치력과 자기통제가 필요한 프린켑스 상황에서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18] 그래서 학자들은 이런 그의 행동이 광기, 불안, 과대망상으로 인식됐고 마크로 숙청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해 황제의 암살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치닫게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그의 암살 사건은 선대 티베리우스 말년 시기부터 집약된 불만이 폭주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 등으로 칼리굴라는 현대 연구 등을 통해 중병을 앓게 된 이후 얻게 된 후유증으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은 암군 내지 프린켑스 권한 강화 도중 근위대에게 암살된 실패한 황제로 재조명받고 있다.
4. 생애
5. 평가
6. 매장지 발견?
로마인들의 일관된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암살된 후, 에스퀼리누스 언덕 내 개인정원에서 시신이 급히 화장된 뒤 가매장되었다가, 숙부 클라우디우스 즉위 후 여동생들의 장례식 참석 아래 정식으로 유해가 화장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있는 부모 곁에 매장됐다. 이후 칼리굴라를 비롯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 황후, 황자, 황녀 등의 유골 항아리는 로마를 침공한 서고트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골들이 곳곳에 분산됐다는 것이 오늘날 정설이다.그런데 2011년 1월 17일 이탈리아 로마 남부 라치오주의 도시 네미에 위치한 호수에서 2.5미터짜리 칼리굴라 동상을 훔치려던 도둑이 경찰에게 체포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칼리굴라의 유골 중 일부가 발견됐다는 발표가 났다. 이때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메리 비어드 교수는 이 발표에 대해 자신이 이 소식을 아침뉴스로 듣고 흥분해 모든 라틴 기록을 다시 읽었다고 한 뒤, 네미 호수에 있는 동상은 그의 매장지도 아니고 그렇게 화려하게 매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아울러 다른 서구권 학자들 역시 비슷한 의견을 냈는데, 이들의 의견도 가매장 후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에 칼리굴라가 영면했다는 기존 정설의 재확인이었으며, 내셔널 지오그래픽 역시 비슷한 의견을 내며 한때 괴물로 묘사된 로마 황제가 묻혔다는 네미와 네미 호수 일대는 칼리굴라의 매장지가 아니라고 밝혔다.
7. 대중문화에서
7.1. 영화
AD 37년, 로마 황제 티베릴우스(Tiberius : 피터 오툴 분)의 폭정 시절, 황제가 입양아인 칼리큘라(Caligula : 말콤 맥도웰 분)보다 친손자인 제멜리스(Gemellus : 브루노 브라이브 분)를 더 귀여워하자, 칼리큘라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죽음을 당할 것임을 알고, 꼭 살아남아서 황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황제의 심복이며 칼리큘라를 싫어하는 네르바(Nerva : 존 질거드 분)는 그가 황제가 되면 로마가 망한다며 자살을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칼리큘라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고, 궁정의 수호대장 메크론(Macro : 구이도 마나니 분)은 아내마저 칼리큘라에게 바칠 정도로 그에게 충성하지만 칼리큘라는 그 또한 믿을 수가 없다.
어느날, 티베리우스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침대 위에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자, 칼리큘라와 메크론은 누워있는 그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25세에 로마 황제로 즉위한다. 처음에는 치정에 전념하던 그도 점점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고, 측근들을 사소한 트집으로 하나씩 제거하면서 서서히 광기를 드러낸다. 여동생 드루실라(Drusilla : 테레사 안 사보이 분)를 동생 이상으로 사랑하여 동거하는가 하면 음란한 왕비 케소냐(Caesonia : 헬렌 미렌 분)가 낳은 딸을 아들이라고 우긴다. 칼리큘라는 또한 웅대한 이집트풍의 연극을 기획하고 부인과 함께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칼리큘라의 폭정은 날이 갈 수록 심해져 드루실라가 열병으로 죽자 급기야는 황실 안에 커다란 매음굴을 만드는데...
출처 - Daum 영화
칼리굴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1979년작 영화. 칼리굴라 황제의 대중적 이미지를 '섹스에 미친 미치광이'로 굳히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영화다. 대부분의 내용은 로마판 황색언론이라는 평을 받는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세네카, 디오의 주장과 일부 창작 요소를 섞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어느날, 티베리우스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침대 위에 누워만 있는 신세가 되자, 칼리큘라와 메크론은 누워있는 그를 베개로 눌러 죽이고 25세에 로마 황제로 즉위한다. 처음에는 치정에 전념하던 그도 점점 주위 사람들을 의심하고, 측근들을 사소한 트집으로 하나씩 제거하면서 서서히 광기를 드러낸다. 여동생 드루실라(Drusilla : 테레사 안 사보이 분)를 동생 이상으로 사랑하여 동거하는가 하면 음란한 왕비 케소냐(Caesonia : 헬렌 미렌 분)가 낳은 딸을 아들이라고 우긴다. 칼리큘라는 또한 웅대한 이집트풍의 연극을 기획하고 부인과 함께 직접 출연하기도 한다. 칼리큘라의 폭정은 날이 갈 수록 심해져 드루실라가 열병으로 죽자 급기야는 황실 안에 커다란 매음굴을 만드는데...
출처 - Daum 영화
감독은 틴토 브라스이며 칼리굴라 역에 맬컴 맥도웰, 티베리우스 역에 피터 오툴[19], 네르바[20] 역에 존 길구드 경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여배우 둘[21]이 감독과 싸우고 나가서 별로 이름 없던 배우가 캐스팅된다. 문제는 이 영화의 등급은 X등급, 즉 포르노 영화와 동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첫 개봉했을 때는 아예 등급 심사를 받지 않고 극장을 세 내어 개봉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 포르노 잡지인 펜트하우스가 제작에 참가해서 펜트하우스의 쟁쟁한 포르노 여배우들이 줄줄이 나와 시도 때도 없이 농도 짙은 에로 씬을 선보인다. 에로 씬만 모아서 보면, 어느 누구의 눈으로 봐도 빼도 박도 못할 야동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펜트하우스 섭외 담당자가 남자는 크기, 여자는 조이는 힘[22]으로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포르노 영화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 캐릭터의 깊이 있는 내면묘사, 로마 시대를 잘 재현한 소품도 훌륭하고 굴지의 명배우 맬컴 맥도웰의 광기 어린 연기가 관객을 압도한다. 게다가 포르노 영화 수준의 에로 씬도 로마 시대의 타락상과 칼리굴라의 광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수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예술적이어서 봐도 느낌이 없다."라는 의견까지 있다. 상업성으로 서로 엇갈림이 커서 영화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틴토 브라스 영화라고 하기에는 모호하다.
우선 감독인 틴토 브라스는 포르노 감독이 아니다. 에로티시즘 영화로 유명하지만 브라스는 줄거리가 있고 배우들 연기를 중요시하는 예술적인 에로티시즘 감독으로 추앙받는 감독이다. 그런 양반이니 줄거리와 배경을 더 깊게 파고들었고 결국 제작자가 원하던 포르노 위주 영화가 아닌 것에 서로 갈등이 커서 제작자가 도중에 잘라 버렸다. 사실 틴토 브라스의 가장 야한 작품도 검열삭제는 나올지언정 삽입 장면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 다음 감독은 무방비도시로 유명한 네오 리얼리즘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조카인 프랑코 로셀리니 (1935년 ~ 1992년) 감독이었다. 바로 이 영화 기획자 중 하나였기에 같이 기획하고 제작자인 펜트하우스 사장 보브 구치오네는 원한 만큼 야한 포르노를 만들 것으로 기대했으나 프랑코 로셀리니는 광기어린 칼리굴라에게 초점을 맞춰 영화를 감독했고, 결국 프랑코도 구치오네랑 다퉈가며 중도에 잘렸다.
세번째로 맡게 된 감독인 기안카를로 루이 (1930년 ~ ) 역시 이런 영화를 단지 포르노로 만든다는 건 낭비라고 지적하며 구치오네랑 다퉈서 결국 또 잘렸다.
그래서 제작자인 보브 구치오네 (1930년 ~ 2010년) 스스로 나머지 부분을 감독하면서 그냥 포르노가 되었고 세 감독이 만들어낸 부분과 영화가 아주 따로 놀아버렸다. 사실 궁궐을 개조한 창녀촌 장면 등은 나중에 제작자가 펜트하우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삽입했고 유명 배우들이 나온 부분과 외설부분은 따로 찍은 경우가 많은데 펠라치오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맬컴 맥도웰의 물건 노출은 진짜다. 여하튼 개봉 이후 틴토 브라스가 "왜 내 이름 들이대고 개봉하느냐? 이름 빼라"며 분노했고 여러 배우들과도 또 갈등이 빚어지며 우여곡절도 많았다.
결국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작품성과 막장 에로 씬이 공존하는 독특한 포르노 영화라는 것이 중론이다. 감독판의 러닝타임 4시간짜리 물건이 존재한다는 루머가 있지만 헛소문이다. 틴토 브라스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데 감독판이 있을 리가 없다. 사실 일반 상영판도 2시간 30분으로 상당히 긴 러닝타임을 지녔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증언하시기를, 1980년대 한국에 비디오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을 무렵 복사 테이프로 인기가 꽤 좋았던 영화였다고 한다. 그런데 6월 항쟁 이후에 아주 잠깐이지만 진짜로 극장 개봉을 했고, 양지운이 번역한 영화 예고편이 TV에 방영되었다. 물론 전부 다 잘린 것이었지만. 전체 영화 중 무려 1시간 27분 정도가 잘려나가서 보고나면 뭐가 뭔지 몰랐다고 한다.
영화잡지인 월간 로드쇼의 1990년 1월호에서 마광수 교수의 영화 추천목록에 이 영화가 끼어 있다.
시인이자 영화평론가이기도 했던 하재봉이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노골적인 성기 노출씬도 극찬했고, 이 영화의 진짜 백미로 네르바의 자살 장면을 꼽았다.[23] 심지어 위에선 언급한 극장 개봉판을 봤는데, 도저히 줄거리 파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2시간 반짜리 짝퉁 비디오로 보고 나서야 이렇게나 많이 잘렸는지 경악했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음란한 왕비 역으로 영화 팬들이라면 낯이 익을 얼굴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젊은 시절의 헬렌 미렌이다.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누드도 꽤 찍었다고.[24]
시칠리아에서 촬영할 때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로케이션을 지켜봤는데 포르노 영화 촬영장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분노했다고 한다. 결국 주변의 험악한 분위기에 사색이 된 배우와 스태프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고 한다.
칼리굴라 효과라는게 있는데 이 영화와 관련된 일화에서 비롯된 심리학 용어이다. 미국 보스턴에서는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시켰고, 이것이 화자되어 다른 지역에 가서 보고 올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현상을 칼리굴라 효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슷한 것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있다.
선술했듯 제작과정부터 개봉 및 상영 과정에 있어서 험난한 역사를 가졌고 영화 내적으로는 적나라한 외설과 예술성을 가진 영화다보니 시네필들 사이에서는 컬트 클래식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연구를 담은 홈페이지가 존재한다. #
2007년 Imperial Edition 이라는 이름으로 블루레이 발매를 했다. [25] 해당 디스크에는 극장 개봉용 검열 버전과 대관을 통해 개봉한 미검열 버전이 존재하며 말콤 맥도웰과 헬렌 미렌의 인터뷰 및 코멘터리가 담겨있다.
이후 2018년, 위의 홈페이지의 연구원 중 한 명인 란짓 산두(Ranjit Sandhu)가 원본 네거티브 필름이 소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독일의 영화 감독 겸 작가 알렉산더 터신스키(Alexander Tuschinski)[26]에게 알렸다. 이후 터신스키는 펜트하우스와 접촉하여 해당 필름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고,[27] LA의 필름 창고에서 무려 96시간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오리지널 네거티브 촬영분이 발굴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펜트하우스와 틴토 브라스의 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브라스가 찍은 85분 정도의 촬영분량을 활용해서 그의 의도에 맞게 편집을 할 것임을 밝혔다. 단 브라스 본인이 직접 참여 할지는 불명이다. 이후 영화에 대한 설명과 해당 원본 필름을 찾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미션 칼리굴라 라는 제목의 40분정도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2020년 2월, 펜트하우스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바탕으로 40주년 판을 새롭게 만들것이며 해당 판본은 고어 비달이 쓴 오리지널 각본대로 편집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편집에는 저널리스트 토마스 네고반(Thomas Negovan)과 영화감독 엘라이어스 머리지 감독이 참여한다. 공식 사이트 이후 가을에 공개될 것이라는 예정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리처드 버튼, 빅터 마추어가 주연한 기독교 영화 성의 시리즈에서도 등장하는데 역시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배우는 악역 전문으로 유명했던 제이 로빈슨.
7.2. 연극
칼리굴라를 소재로 한 연극. 흔히 칼리굴라 하면 떠오르는 위 항목의 영화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알베르 카뮈가 쓴 희곡을 일컫는다. 다만 내용상의 문제로 공연을 제한하는 국가도 있다. 내용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누이동생이 급사하자 너무나 슬픈 나머지 인간의 유한성에 회의를 느낀 칼리굴라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고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다.악역 전문 캐릭터이자 야인시대에서 조병옥으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학철씨가 주로 칼리굴라 역을 맡았다.
위 항목의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사려고 하다 용팔이에게 속아서 이 연극 실황중계 녹화분을 샀다는 웃지 못할 전설도 있다.
7.3.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 초중반부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며, 20세기 중반에 쓰여진 소설이라 수에토니우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과대망상과 새디즘에 빠진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심지어 소년 시절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의 독에 당해 죽어가고 있을 때 치명타를 가해 목숨을 끊는 등 선천성 소시오패스로 묘사되며, 주인공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가 암살당할 때까지 언제 죽임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1973년 BBC 드라마에서는 존 허트가 열연했다.7.4. 참마대성 데몬베인의 안티 크로스
니트로 플러스의 에로게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나오는 안티 크로스 중 하나.왼쪽 1/3가량이 붉은색의 해골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코트를 걸친 거한.
성우는 고리 다이스케.[28]
보통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니며 클라우디우스는 뚱보나 덩치라고 놀리고 칼리굴라는 주먹으로 맞받아치는 기묘한 페어. 물론 둘의 실력은 비슷하기 때문에 주변의 일반인만 휘말려서 죽는다...그런데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블랙롯지의 평신도들.(어?)
평상시엔 과묵하고 침착한 성격이지만 피를 보면 이성을 잃고 난폭한 본성을 드러낸다.
전투방식은 마력으로 완력을 강화해서 싸우는 육탄계열. 방어력은 높은 편으로, 기신비상에서는 갑각류의 껍질같은것을 둘러 크투가의 총탄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본편에선 방심하다가 쌍마총의 첫 타켓으로서 왼팔과 오른눈을 잃었고 그걸 의수/의안으로로 대체했다. 이후 다이쥬지 쿠로에게 강한 원한을 품게된다.
사실상 안티 크로스중 가장 존재감이 없고 모든 루트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심지어 하도우 루리 루트에선 하도우 루리가 처음으로 조종해 본 데몬베인에게 레무리아 임팩트 맞고 소멸...
코믹스에는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이쥬지 쿠로와 메타트론을 궁지에 몰아넣때 등장한 산달폰에게 맞아 배에 구멍이 뚫린뒤 발광하다 완성직후의 헌팅 호러를 멋대로 가져간 산달폰에 의해 상반신에 더 큰 구멍이 뚫려 데우스 마키나도 소환 못 해보고 사망했다.[29]
보유 마도서는 수신 크타아트, 데우스 마키나는 크라켄.
사실 딥 원 이라는 의혹이 있다.[30]
7.5. 게임
7.5.1. Fate/Grand Order
자세한 내용은 칼리굴라(Fate 시리즈) 문서 참고하십시오.클래스는 버서커. 열병으로 미쳐버린 건 디아나(아르테미스)의 축복[31] 때문이라고 나온다.
7.5.2. Caligula -칼리굴라-
자세한 내용은 Caligula -칼리굴라- 문서 참고하십시오.7.5.3. 권투암흑전 세스타스
로마의 제3대 황제 여러 번 언급된다. 같은 폭군이지만, 나름 마음이 여렸고 동정의 여지가 있는 네로와 정반대로 그냥 또라이 그 자체로 연출됐다. 이 칼리굴라가 네로의 친부라는 암시가 곳곳에 숨어있다. 아그리피나는 오빠의 흉상을 보자마자 기분이 안 좋아져서 그날 자신의 모든 일과를 취소했고 나중에 가서는 칼리굴라가 항상 아그리피나를 희롱했었다는 것이 네로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7.5.4. 도미네이션즈
자세한 내용은 전설 유물/칼리굴라의 반지 문서 참고하십시오.7.5.5.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2편부터 역대 동로마 황제 목록에 포함되며 시리즈 공통으로 미치광이 특성을 갖고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미치광이 특성을 가진 인물에게 랜덤으로 말을 자문회원에 넣는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수에토니우스가 황제열전에서 언급한 애마 인키타투스를 집정관으로 삼겠다고 말한 일화를 패러디했다.8. 여담
- 로마 제정 초기의 다섯 황제 중 유일하게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 역사를 다룬 3~4세기의 교부 에우세비오가 교회 전승에 따라 저술한 교회사에서는 그가 로마인에게 불린 이름인 가이우스라는 이름으로 직접 나온다. 에우세비오에 따르면 본시오 빌라도로 유명한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유대 장관 시절 벌인 불법 행위, 뇌물 수수 등을 알고 기소해 자살을 명해 죽인 황제가 칼리굴라라고 한다. 개역개정판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아구스도라는 이름으로, 티베리우스는 디베료라는 이름으로, 클라우디우스 1세는 글라우디오라는 이름으로 표기되며[32], 네로는 직접 이름이 나오지는 않으나, 바울의 재판 때 로마 황제에서 직접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로마 황제가 네로다.
-
재위 3년 10개월만에 암살됐지만, 로마 서민들에게는 이름이 계속 회자되면서 나쁘지 않게 언급됐다. 로마 귀족, 서민들은 전차 경주 경기를 좋아했는데, 이때 모두 좋아한 전차 경주 중 스릴 있고 박진감 넘친 방법이 "가이우스의 전차 경기"로 불리면서 사랑을 받았다. 그가 지은 경기장 이름은 가이우스와 네로의 키르쿠스 경기장으로 멸망 전까지 불렸는데, 칼리굴라는 함께 언급된 네로와 달리 전차 경주 대회를 흥미롭게 하고 룰도 재밌게 만든 황제로 회자됐다. 이와 함께 그가 이집트에서 값싸게 곡물을 들여 오면서 이탈리아와 갈리아 일대 기근에 기여한 까닭에 이 지역에서는 호평을 받았다.
- 그가 살아생전 장어 요리를 진짜 좋아해 중독된 것처럼 먹었다는 말이 돌면서, 사람들에게 유럽 바다 장어 이름이 Coluber caligulensis라고 붙여졌다.
[1]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을 통해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표기에 의거 표기 중, 당대 로마인이 그를 줄여 부른 이름.
[2]
로마 관보, 원로원 회의록 등을 통해 황제를 명기한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표기에 의거한, 프린켑스이자 임페라토르로서의 정식 이름.
[3]
약칭으로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으며, 로마인들에게는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렸다.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티베리우스와 본인, 황실 일가를 비롯해 원로원, 군대에서 사용해 부른 이름이기도 하다.
[4]
카이사르는 황제 제호가 아닌 성씨로 사용됐다.
[5]
태어날 당시 본명. 게르마니쿠스는 할아버지 이래로 대 드루수스 일가 후손들이 성씨 뒤에 붙인 존칭 성씨이다.
[6]
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의 여동생이다. 칼리굴라와 39년 애인관계가 되었고, 임신 중 결혼한 탓에 이런 부분에서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결혼 후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7]
유니아 클라우딜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산욕으로 사망. 이 아이도 이름을 지어줄 8일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8]
후술하지만 대부분의 거짓참칭자처럼 사생아를 주장했던 사람이다. 네로의 근위대장이지만, 제위를 노리고 의도적으로 칼리굴라의 사생아를 주장하면서 네로 사후 황제를 칭했던 사람이다. 네로 몰락 당시 원로원 편에 붙었다가 제위에 욕심이 생겨 느닷없이 자신이 칼리굴라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휘하 병사들은 당연하고 호사가들조차 이를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주장을 하며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호응도 크게 얻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9]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의 셋째 형으로 유년기때 병으로 요절했다.
[10]
동명이인의 친형이라는 의견도 있다.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8일 전 사망해 가이우스 칼리굴라와 동명이인인지조차 알 수 없다.
[11]
이는 그를 종종 칼리굴라로 혼용표기 했다고 알려진 수에토니우스도 마찬가지인데, 그 역시 칼리굴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를 다룬 저서의 이름을 '가이우스'로 적고 가이우스로 기록했다. 따라서 서양 학자들 역시 논문에서 가이우스로 표기 후 괄호 또는 주석을 넣어 칼리굴라로 소개하며 이런 경향은 갈수록 늘고 있다.
[12]
비슷한 사례로는 3세기 군인황제시대의 황제인 푸피에누스가 있다.
헤로디아누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조시무스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황제는 통칭인 푸피에누스 대신 막시무스로 나와 있다. 그래서 이를 반영해 기술한 서양인들은 푸피에누스 대신 막시무스로 그를 적으면서 푸피에누스를 통칭화하여 부르고 있다.
[13]
여기서 말하는
군화란 당연히 현대적인
전투화가 아니라, 당시 로마군이 사용하던
샌달 형태에 내구도를 높이기 위해 밑창에 쇠징을 박은 로마식 군화
칼리가이(Caligae)를 의미한다.
[14]
완전히 끊겨진 것은 직계혈연적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게 살해당한 시점이며, 역사상 멸문 시점은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가문의 양자 네로가 실각하고 자살한 이후이다.
[15]
현대 이탈리아 표기로는 '가이오 체사레'라고 부른다.
[16]
칼리굴라는 짧은 재위기간동안 총 4번의 집정관 경력을 경험했고, 이중 단독 집정관 취임도 있었다.
[17]
과도기적 상태의 제정 시대
[18]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프린켑스 체제는 기존의 원로원 체제를 존중하는 듯하면서도 교묘하게 활용하고 율리우스 간통법을 활용하여 원로원을 견제해야 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체제였다.
[19]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역인 그 사람이다.
2003년에 영국 - 이탈리아 합작으로 제작된 영화《
아우구스투스》에서 주인공 노년 시절의 아우구스투스 역할도 맡았다. 다만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성에 문제도 있고
막장 드라마 같은 요소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
후대의
네르바 황제의 할아버지이다.
[21]
그 중 한 명이《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의 여주인공인
마리아 슈나이더이다.
[22]
여성의 질로 무엇을 조이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3]
존 길구드 경이 열연했다. 이 영화 이전에도《율리우스 시저》(1953),《
로미오와 줄리엣》(1954),《
햄릿》(1964)에도 출연해 명연기를 펼쳤다. 괜히
셰익스피어 전문배우가 아니다.
[24]
헬렌 미렌은 79년 해당 영화가 개봉했을 때 "저항할 수 없는 예술과 성기의 결합"이라는 촌평을 남겼고, 자신의 입으로 해당 작품을 폄하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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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Disc 버전인 Imperial Edition의
블루레이판은 1번 디스크가
지역 코드 A(한-미-일 공용)의
블루레이이고, 2번 디스크는
블루레이가 아닌
지역 코드 1번(
미국 등지)의
DVD다.
[26]
틴토 브라스의 작품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 및 복원을 해오던 감독이다.
[27]
당시 펜트 하우스 수뇌부는 필름이 소실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28]
슈퍼로봇대전 UX에서는
미야케 켄타.
[29]
정말 압도적으로 발렸다.
[30]
비늘피부, 물 속성 마도서, 단세포, 괴력 등
[31]
달의 여신인 만큼 광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32]
다른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일반적인 표기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