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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3:27:41

롤리아 파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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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llia Paulina | 롤리아 파울리나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리비아 오레스틸라
후임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신상 정보
Lollia Paulina
롤리아 파울리나
출생 서기 15년
로마 제국 로마
사망 서기 49년 (향년 34세)
배우자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 ~ AD 38년)
칼리굴라 (AD 38년–AD 38년)
자녀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1. 소개2. 생애
2.1. 출신 가문과 가계2.2. 부유한 상속녀2.3. 칼리굴라와의 결혼, 이혼2.4. 사망
3. 평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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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이다. 남편은 로마 황제 칼리굴라. 칼리굴라의 세 번째 아내였다. 1세기 당시 엄청난 재력을 보유한 귀부인 중 자기 과시가 심했던 사례로 거론됐다.

2. 생애

2.1. 출신 가문과 가계

롤리아 파울리나는 마르쿠스 롤리우스의 동명이인 아들과 볼루니아 사투르니나 사이에서 서기15년 태어났다. 위로는 언니 롤리아 사투리니나가 있었고, 그녀의 할머니는 오래된 귀족계급의 발레리우스 가문 태생이었다. 친정은 이탈리아에서 기원한 전형적인 평민 씨족 가문 롤리우스이다. 그녀의 출신 가문은 피로스와의 전쟁에서 처음 언급된 유서깊은 평민집안으로, 가장 유명한 출신인물은 롤리아 파울리나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롤리우스이다.

조부 마르쿠스 롤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측근으로, 필리피 전투부터 옥타비아누스파의 일원으로 있었다. 그는 로마군 장군이자 정치인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측과 옥타비아누스 측이 협상을 할 때 그 중재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또 악티움 해전을 비롯한 굵직한 전투들에서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못지 않게 활약했다. 따라서 롤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받았으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스승으로 발탁돼 파르티아-아르메니아 사태때 고문단장에 임명됐다.

이외에도 그는 로마의 초대 갈라티아 속주 총독을 역임하며, 소아시아 일대 속주행정체제를 정비했던 유능한 행정가였다. 그러나 그는 역임한 속주마다 속주민들에게 '약탈' 수준으로 수탈을 자행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와는 원로원과 로마 내에서 철천지 원수 수준으로 사이가 나빴다. 따라서 로도스 섬에서 복귀한 티베리우스는 롤리우스가 음독자살한 이후, 원로원 회의 중 대놓고 롤리아 파울리나의 조부를 탐관오리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파 외에는 상당히 평판이 좋았고,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비롯한 수많은 거물정치인과 각계 명사들에게 신사이자 청렴한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롤리우스를 충신으로 여겨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양자 티베리우스가 롤리우스의 부정행위를 질책했음에도 이를 눈감아줬다. 또 그는 불법으로 불린 재산을 모조리 롤리아 파울리나에게 상속하도록 했다.

2.2. 부유한 상속녀

할아버지 마르쿠스 롤리우스가 동방에서 벌인 부정한 행동으로 고발된 뒤, 음독자살하자 어린 나이에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따라서 롤리아 파울리나는 어릴 때부터 언니 롤리아 사투르니나와 함께 로마 내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가 됐다.

첫 남편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의 정치가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였는데, 두 사람은 칼리굴라의 명에 따라 38년 이혼했다고 한다. 레굴루스와의 사이에서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를 낳았다. 롤리아 파울리나의 유일한 혈육인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는 서기 63년 집정관에 올랐으며, 첫남편 푸블리우스 레굴루스는 서기 61년 사망했다.

2.3. 칼리굴라와의 결혼, 이혼

서기 38년, 롤리아 파울리나는 칼리굴라로 더 잘 알려진 가이우스 황제와 결혼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롤리아 파울리나의 할머니가 엄청난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 미모와 재력을 노린 황제에게 이혼을 명령받고 재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칼리굴라와 롤리아 파울리나는 6개월 만에 이혼했다. 이후 칼리굴라는 롤리아 파울리나의 재혼과 교제, 성관계를 모두 금했다고 한다. 수에토니우스가 남긴 고대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이혼 발표상 표면적 이유는 롤리아 파울리나가 불임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칼리굴라의 여동생들과 롤리아 파울리나 사이가 나빴고 롤리아 파울리아에 관한 평판 등이 더 큰 것으로 추측된다.

2.4. 사망

롤리아 파울리나는 두번째 남편의 여동생 중 소 아그리피나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황족 여인들을 자극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저녁 파티마다 상류층들에게 자신의 재력과 보석으로 치장된 장신구, 5000만 세스테르티우스짜리 보석 등을 자랑한 일화 등이 유명했을 정도로, 롤리아 파울리나는 상당히 자기과시적인 면모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탐욕스러운 황후 메살리나에게 밉보이지 않아 기소되지 않았는데, 원수 같았던 소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 1세와 재혼해 황궁으로 복귀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게 됐다고 한다. 칼을 갈고 있던 소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타가 된 이후, 롤리아 파울리나를 점성가들과 모의해 마법을 부린 이유 등으로 기소했으며, 직접 명까지 내려 롤리아 파울리나를 죽였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는 롤리아 파울리나가 기소 당시 청문회나 재판도 없이 유죄를 받았으며, 서기 49년 모든 재산을 빼앗긴 뒤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의 감시 아래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고 한다.

사후 그녀의 막대한 재산은 모두 소 아그리피나에게 몰수됐다.

3. 평판

동시대 사람 대 플리니우스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로마 상류층들의 자기과시가 무척 심하다고 비판하면서 롤리아 파울리나를 그 대표 사례로 언급했다. 그래서 1세기 로마인들에게 그녀의 평판은 꽤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롤리아 파울리나는 자신의 엄청난 재력을 과시했고 낭비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녀가 5000만 세스테르티우스짜리 보석을 자랑했고, 저녁 파티마다 머리, 목, 팔, 손가락까지 이런 고가의 보석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이를 과시한 것을 날카롭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