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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4 22:48:34

세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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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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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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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ignotus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티투스 베스트리키우스 스푸린나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마르티알리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아킬리우스 [Pri]scus 코엘리우스 스파르수스
루키우스 마이키우스 포스투무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페록스 리키니아누스
98년 보결 99년 99년 보결 99년 보결 99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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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퀸투스 소시우스 세네키오 세네키오 멤미우스 아페르 아울루스 카이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igno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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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출신과 어린시절2.2. 근위대장2.3.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2.4. 티베리우스의 은둔2.5. 권세의 절정2.6. 몰락2.7. 사후
3. 평가

1. 개요

Lucius Aelius Sejanus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티베리우스 황제 때 로마 제국의 최고급 행정관료이자 권신, 간신.

티베리우스 황제의 부하. 프라이토리아니의 대장(근위대장)으로 오늘날까지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로마사 전체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음흉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외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했다고 하며, 율리우스 가문의 대다수 남자 황족들을 반역죄로 고발해 제3대 황제가 되는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이자 칼리굴라의 사촌동생이었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씨를 말려버린 사람으로 악명높다.

세야누스는 에퀴테스 계급 출신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이후 근위대장이 근위대를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칼리굴라의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킨 이후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음모를 꾸미다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에게 고발당한 뒤, 즉시 체포돼 반역죄로 사형 선고 후 교살됐다.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고, 그 일가와 가문 전체가 멸족됐다.

2. 생애

2.1. 출신과 어린시절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지만, 고향이나 출신계급, 가문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기사계급( 에퀴테스) 출신인 세야누스는 에트루리아 사람으로, 오늘날의 중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이 고향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는 아우구스투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으로 임명되는 등 총애를 받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동맹자이자 친구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아내 테렌티아와 결혼한 에퀴테스였고, 이를 계기로 원로원 유력 인사들과 연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는 세야누스의 아버지 세야누스 스트라보 역시 비슷했다. 아버지 스트라보는 에트루리아 지방 동향이기도 한 마이케나스의 총애를 받아 기사계급 출신이 원로원에 입성하지 않고도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프라이토리아니 장교가 됐다. 이후 기원전 2년에는 마이케나스의 후원으로 아우구스투스를 보필하는 근위대장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여러 번 결혼해 형성한 인척 관계와 살아생전 마이케나스가 꾸준히 도움을 준 덕분에, 세야누스 역시 일찍이 이집트 장관을 지낸 아일리우스 갈루스 형제의 아일리우스 가문에 입양돼,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에트루리아 출신들을 후원한 마이케나스, 세야누스의 입양 가문과 친아버지 스트라보의 도움을 배경 삼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다양한 원로원 유력자들 밑에서 기회를 얻었고, 당대 최고의 미식가 아피키우스와도 연인 관계를 맺어 출세를 지향했다.[1]

훗날 행보를 보았을 때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눈치가 대단했고 조부 대부터 쌓아 놓은 인맥 등을 활용할 줄 아는 것도 탁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세야누스는 프라이토리아니에 들어온 뒤 승승장구했다. 따라서 기원전 1년 당시 제위 계승 후보였던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방 순행에 동행했고,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의 근위대장이 된 이후에는 차기 관료로서 친분과 경력을 쌓았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야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제위계승자 티베리우스와도 접촉할 수 있게 됐는데,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티베리우스에게 그 능력과 충성심을 서서히 인정받았다고 한다.

2.2. 근위대장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제위에 오르자, 근위대장이었던 아버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함께 공동 근위대장이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에게 자신을 유일한 근위대장에 임명해줄 것을 주장해 1~2년 뒤에 단독으로 근위대장이 되었다. 단독 근위대장이 된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쌓으면서, 이전까지 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져 주둔해온 9개의 보병대가 로마시 동쪽 교외의 근위대 막사에 함께 주둔하는 것을 이용해 서서히 권력을 키워나갔다. 14년에 판노니아 로마군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小) 드루수스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폭동을 진압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유능한 모습을 보여 티베리우스에게 중용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야심도 드러냈다.

20년에 자신의 딸을 황족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2]와 약혼시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자 했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3]로 황태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며, 소 드루수스의 처남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4]의 아들로 세야누스에겐 좋은 사윗감이었다. 왜냐하면 이 소년은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 모두의 손자로 그 혈통이 카이사르 가문의 적통이면서도, 소년의 아버지가 일찌감치 제위 계승 서열에 밀려 기사계급인 세야누스에겐 최고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약혼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질식사로 급사해 결국 무산되었다. 그는 모친 플라우티아 우르굴리닐라의 남성편력과 방치 속에서, 를 공중에 던지고 입으로 받아먹는 놀이를 하다가 과일이 기도에 박혀 질식사했다. 이는 세야누스가 몰락한 이후, 세야누스가 그를 살해했다고 하는 말이 나오게 했다. 그러나 당시 소아마비로 아우구스투스 생전 제위계승후보에서 밀린 클라우디우스에게 아무런 정치적 권력이 없었던 점을 들어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주장은 현실성없는 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

세야누스가 야심을 보인 모습은,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많고 사람이 진실되지 않아 보일 때가 있었다. 물론, 세야누스는 뛰어난 처세술과 쇼맨쉽을 앞세워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의심을 사지 않았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5]는 세야누스의 본심을 눈치채, 그를 경계했다. 이는 소(小) 드루수스가 서기 1년 전부터 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정치술, 용인술, 심리분석 등 통치에 필요한 제왕학을 직접 배운 결과였다. 따라서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를 두려워하면서 대립했고, 이는 그가 소 드루수스와 끝없이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됐다. 이는 어릴 때부터 세야누스와 그 친부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친분을 맺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역시 비슷했다. 같은 기사계급 출신인 테렌티우스는 세야누스의 본심을 꿰뚫어 봐서 그를 경계했다가, 세야누스가 권력과 가까워지고 악행을 저지르자 이를 규탄했다. 그 결과, 둘은 원수이자 정적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22년, 폼페이우스 극장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때 세야누스는 소방대와 프라이토리아니를 동원해 화재의 진화에 노력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그 결과,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그 공적을 칭찬받았다.

2.3.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서기 22년에서 23년으로 넘어갈 무렵,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Socius Laborum(내 수고로움의 동반자)"라는 거창한 칭호를 수여받을 정도로 신임을 굳힌다. 그는 1만 2천명의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을 전부 지휘하게 됐고, 티베리우스 황제는 기사계급에 불과한 그에게 이례적으로 법무관으로 추천해 원로원 의원이 될 길을 열어줬다.

23년, 당시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제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게르마니쿠스가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요절했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로는 티베리우스의 친아들로, 율리우스 가문 남성 중 가장 연장자였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6],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삼남 가이우스 카이사르[7], 소(小) 드루수스가 리빌라와 결혼해 낳은 일란성 쌍둥이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게르마니쿠스 게멜루스 형제가 있었다. 그 외에도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자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로, 티베리우스의 친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도 있었다. 헌데 그는 어릴적 앓게 된 소아마비 장애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 양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생전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제위 후보에서 일찌감치 배제된 상태였다.[8]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 황제는 서기 22년 폼페이우스 극장 화재 사건을 완벽하게 처리한 세야누스를 칭찬하면서, 세야누스 전신상을 폼페이우스 극장에 세워줬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 주변으로 야심 많은 추종자들이 몰려들고 세야누스의 형제, 친척, 친구들은 속주 총독, 지방 장관, 고위 관료로 승진했다. 세야누스는 이탈리아 기사계급 야심가들의 롤모델이 됐고, 그가 가진 근위대장 자리는 어떤 원로원 의원, 황족들보다 막강해졌다. 이렇게 되자,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친아들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런 부황의 조치에 강하게 반발했다.

사실, 서기 20년부터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와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었다. 소 드루수스는 인격자로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예의바른 황족이나, 세야누스를 경계해 그를 요주의 인물로 여겼다. 그는 아직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과는 달리 나이와 경험이 출중했다. 서기 4년 직전부터 아우구스투스 생전,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와 격려 아래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파트너로서 티베리우스 사후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제왕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요절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였고, 황실 내 음모도 중재자로 완만히 해결해, 권좌에 대한 야망을 이루려는 세야누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이런 드루수스의 반발과 개입은 세야누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당시 소 드루수스는 인기 없고, 냉혈한으로 단단히 찍힌 아버지 티베리우스와 달리 원로원, 평민,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 모두의 신망을 받고 있었다. 그는 판노니아 총독으로 파견돼, 뛰어난 행정력과 외교 능력을 선보였고 로마군을 이끌며 탄탄한 능력을 선보였다. 축제가 열리면 매우 무관심한 아버지와 달리, 과거의 아우구스투스처럼 열정적으로 평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 줬고 부정부패에 대해선 굉장히 엄격하고 공정해 원로원 귀족, 기사계급 관료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런 드루수스가 개입하자, 세야누스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황태자 드루수스는 서기 20년 자신의 처남이며 사촌동생인 클라우디우스의 어린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자기 사위로 맞이려는 세야누스의 의중을 꿰뚫고 있었다. 그 전인, 서기 15년 판노니아 파업 사태부터 세야누스를 직접 데리고 다니며 그 인성과 비열함도 알고 있어 경계 중이었다. 따라서 서기 22년, 세야누스가 아버지 티베리우스의 총애만으로 황족, 원로원 의원 중 개선장군 수준의 공을 세운 인사들도 못 받는 특권을 선사받은 것을 프린키파투스 체제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 큰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판단 그대로, 원로원 귀족과 각 속주 총독들은 "세야누스가 황제 배경만 믿고 설친다"고 불만을 표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인사들과 만나 그들의 입장을 들은 뒤, 아버지 티베리우스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노골적으로 세야누스를 간신이라고 칭하면서 울분을 토했고 아버지에게 공화정 전통을 위협하는 세야누스와 그 일당을 없애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는 세야누스를 감싸는 아버지에게 객관적 증거를 거론하면서, 논리적으로 따졌다. 이는 효자로 이름난 드루수스가 일평생동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행동이라서, 티베리우스는 그런 아들을 되려 크게 혼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린다. 이 당시 드루수스는 아버지와 공동 집정관을 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를 잡아내고 수도 사업 등 로마의 주요 행정 조치의 문제점, 비용 처리 문제 등 어렵고 복잡한 사무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원로원에게서 자발적 지지를 얻어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날, 세야누스는 원로원 회의 중 헛소리를 하면서 국정 과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드루수스는 논리적으로 세야누스가 내린 판단을 지적했다. 이에 세야누스는 자신이 서기 4년 직후부터 윗사람으로 모신 드루수스에게 막말을 퍼부었고, 이는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인격자로 이름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격분케 했다. 그 결과, 소 드루수스는 원로원 회의 중 논쟁이 붙은 세야누스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다가, 세야누스의 비열함에 격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주먹으로 세야누스를 때려 단번에 내리치고 그를 땅바닥에 때려 눕혔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원로원 안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처지가 됐다. 이 사건 직후, 세야누스는 자기 부하들에게 "황제가 고령이라서 서거하면, 곧 황제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손자 놈이 제위에 오를 것이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지만 세야누스는 이 발언 후, 주눅들기는 커녕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반드시 제거해야 될 정적으로 점찍는다. 결국 세야누스는 자기 본심을 알아채 마찰을 빚고 있던 황태자 소 드루수스를 제거할 계획을 짜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아내로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여동생이었던 리빌라(Claudia Livia Julia)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녀를 유혹했다. 이는 손쉬운 계략이었다. 리빌라는 엄청난 미인이나, 어릴 적부터 2살 위인 오빠 게르마니쿠스, 1살 위인 오빠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에게 열등감을 느껴 이들을 숙적으로 여기고, 바로 아래의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자기 앞길을 막는 짐짝으로 여겨 구박할 정도로 거만하고 질투심 많은 공주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기 남편인 1살 위의 소 드루수스가 어릴적부터 게르마니쿠스, 대 아그리피나 부부와 친형제, 친남매처럼 사이가 깊고, 자기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챙긴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 이 부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근위대장인 세야누스는 이런 황실 내 분위기를 이용해, 야심 많고 불만 가득한 리빌라에게 접근. 온갖 말로 리빌라를 구워삶아 그녀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때 세야누스에게 푹 빠진 리빌라의 요구에 따라 세야누스는 3명의 아이를 낳았던 아내 아피카타와 이혼하고 리빌라와 결혼 약속을 했고, 장차 제위를 소 드루수스와 리빌라의 아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이어 리빌라에게 할아버지 같은 시종이자 주치의 에우데모스, 환관 류그도스도 끌어들여 소 드루수스 암살을 계획했으며, 드루수스의 술잔 관리인, 집사 등도 포섭한다. 여기에 큰 도움을 준 이는 리빌라였는데, 그녀는 시종들과 함께 소 드루수스에게 약간의 독을 서서히 먹여서 병사로 위장하는 방법으로 암살에 성공했다.

25년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었던 리빌라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티베리우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2.4. 티베리우스의 은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받으며 공식 후계자가 되었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자,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티베리우스는 고령이었고, 드루수스는 호민관 특권을 받기 전 집정관을 하며 원로원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능력이 출중하고 인기가 많았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자연스레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가운데 이미 성인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로 좁혀졌다.

근위대의 힘과 정보력을 이용해 세야누스는 이 2명과 그들의 후원자인 대 아그리피나를 표적으로 삼았다.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의 사망 이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측을 이간질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야누스의 정부였던 리빌라 역시 오빠의 아내인 대 아그리피나와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고, 리빌라와 소 드루수스의 딸 율리아 리비아도 어머니와 한통속이 되어 남편 네로 카이사르를 쥐잡듯 구박한 터라 세야누스의 이간계는 손쉬웠다. 따라서 그는 이런 상황을 적극 이용했으며, 시누이 대 아그리피나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리빌라 역시 자기와 유대관계가 돈독한 딸 율리아 리비아를 포섭. 모녀가 이 음모에 가담했다.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세야누스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 게르마니쿠스 일가의 파멸을 위해 고발과 협박, 음모를 통해 '게르마니쿠스 파'들을 제거했다. 먼저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들, 대 아그리피나의 동조자를 차례차례 고발. 이들을 은퇴시키거나, 실각시키면서 대 아그리피나의 세력을 약화시켜나갔다.

25년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로 출발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낙반 사고가 일어났는데,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

27년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떠나 카프리 섬에 거처했다. 이때부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완전히 장악하고 거대한 권세를 누렸다. 세야누스의 생일은 공식적으로 경축되었고, 티베리우스의 동상과 함께 세야누스의 동상이 놓이게 되었다. 세야누스의 파벌도 급격히 성장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으로 형과 대립하고 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우호 세력으로 포섭했다.

2.5. 권세의 절정

29년, 로마에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이었던 '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가 사망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대 아그리피나 일파를 숙청할 수 있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위조한 증거를 내밀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큰 아들이자 죽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죄로 고발해 유죄를 받아낸 뒤 추방해서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때 아그리피나의 친구들과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손녀 등도 함께 묶여 추방하거나 자살로 내몰아 제거했다.

네로 카이사르는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폰티아로 추방된 이후,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인 31년 폰티아에서 자결했다. 따라서 자연스레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24년 티베리우스의 후원과 격려 속에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역임하며 인품과 능력 모두 평가가 상당히 좋았다. 그는 먼 친척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는데, 세야누스는 리빌라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밀리아를 유혹해 간통을 한 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함정에 빠뜨렸다. 이때 악명높은 카시우스 세베루스가 위조된 증거로 만들어진 스캔들을 이유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고발했고, 세야누스에게 포섭된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공격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세야누스에게 고발당해 30년부터 로마의 팔라티누스 궁전 지하실에 유폐되어 병사의 감시 아래 놓였다.

31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콘술( 집정관)이 되었으며,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비록 황제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집정관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며,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 세력은 권세의 절정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이미 티베리우스는 점차 세야누스를 경계하게 되었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이 무렵,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미망인인 소 안토니아[9]는 티베리우스에게 은밀히 자신의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노예 팔라스를 보내 죽은 대 드루수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고 간청했다. 세야누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마저 파멸시키고 율리우스 가문 전체를 끝장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호소였다.

티베리우스 역시 섬에 틀어박혀 있어도 돌아가는 정국을 손바닥보듯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좌를 위협하며, 자신의 가문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세야누스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관습적으로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은 로마에 머물러야 했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세야누스는 로마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그때까지 장악하고 있었던 티베리우스의 서신, 면회를 관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세야누스의 통제가 사라지자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된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 대한 의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야누스 일당의 힘은 티베리우스조차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 표면적으로는 세야누스를 신뢰하며 모든 속주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프로콘술 명령권[10]과 함께 향후 5년간 공동 집정관 권한을 주었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황제의 3가지 권위 가운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31년 그간 반대했던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자 세야누스의 불륜관계였던 리빌라와의 약혼을 허락해 한층 세야누스의 경계심을 늦추었다.

2.6. 몰락

화려한 권력을 누리던 세야누스는 그 최후도 극적이었다.

31년 5월 초,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집정관을 사임했다.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사임하게 되었다. 5월 9일, 2명의 후임 보궐 집정관이 취임했으며 이 중 1명이 그만두고, 6월 1일 세야누스의 동료인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가 취임했다. 10월 1일, 또 한 명의 집정관으로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이 두터운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가 취임했다.

이 시기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경계하게 되어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사트리우스 세쿤두스에 의해 누설되어 티베리우스에게 입수되었다.

10월 17일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에 의해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가 세야누스 대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에 임명되어 서한을 가지고 로마에 갔다. 밤에 도착한 마크로는 그날 밤 집정관 레굴루스, 소방대장(Praefectus Vigilis)[11] 그라이키누스 라코 등에게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전달했다. 마크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지휘권을 접수한 다음, 세야누스에게 찾아가서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통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도 알려주었다. 이는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였고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집정관 레굴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서한 낭독을 시작했다.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해 혹시 모를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레굴루스는 낭독을 계속했다.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은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다음 세야누스는 경비병들에게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단은 큰 장애없이 이루어졌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근위대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대처도 치밀했는데 세야누스가 근위대 병력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게 대항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다만 이때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미 지하실에서 굶어 죽은 뒤였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속주의 군단으로 도망치는 상황까지 고려해 선박도 준비해두고 있었다.

2.7. 사후

생전 악행이 대단한데다 세야누스의 삼촌과 자녀들부터 심지어 집안 해방노예와 노예들 역시 원로원 의원들에게 뇌물을 받거나 음모에 가담하는 등, 온갖 나쁜 짓을 다한 터라 세야누스 일가의 숙청으로 티베리우스 치세의 후반은 말 그대로 공포 그 자체가 됐다.

세야누스의 시체는 대역죄인들에게 내려진 형벌대로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르 강에 버려졌으며, 세야누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었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 세야누스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세야누스의 처형 이후, 그의 가족과 일파 역시 반역죄로 숙청되었다.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블라이수스는 세야누스가 처형될 때 즉시 처형됐고 아직 어린 차남과 장녀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녀는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었다고 한다.[12] 아울러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도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이때 아피카타는 유서로 소 드루수스 암살의 정황을 밝혔다. 따라서 모든 정황을 알아낸 티베리우스에 의해 세야누스의 남은 가족 전체와 그 노예들까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됐고, 그를 지지했던 친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들, 세야누스와 간통해 소 드루수스 암살과 게르마니쿠스 아들들의 몰락에 일조한 며느리 리빌라까지 몰살당했다.

세야누스의 악행에 놀아났다가 본인과 가문 전체까지 없어질 뻔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물론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어머니와 두 형에 이어 고모부까지 모두 잃은 가이우스( 칼리굴라) 황제는 살아생전 원로원 앞에서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울분을 토하고 이를 갈았던 만큼 세야누스 일가를 향한 황제들과 황실 자체의 보복도 벤데타 그 자체였다. 이는 판결을 담당한 원로원도 예외가 아니라서 매일 같이 황제와 피해자 가족들의 고소장이 법무관들에게 전달되고, 세야누스와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거나 과거 그의 발언에 동조한 것이 확인되면 기소돼 사형, 유배형, 재산몰수 등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티베리우스의 종손으로, 차기 제위계승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아사돼 지하감옥에서 발견됐을 때 절정을 찍어 노황제가 원로원에게 서한장으로 "복수가 나쁘다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을 위해 복수하겠다"며 대대적인 세야누스파 청산이 시작됐다. 따라서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재위 후기부터 그 다음 황제인 가이우스 시대까지 원로원 전체에서 벌어진 반역죄 기소는 거진 세야누스 사건 조사 등을 통해 밝혀진 옛 세야누스 일당 처단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이 도망가면 황제와 원로원은 과거 술라 시대를 연상시키듯 추격대까지 보내 모조리 처벌했다.

세야누스 사건은 그 파장이 엄청난 만큼,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으로 티베리우스의 조카, 가이우스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 시대 초반까지도 세야누스파 추적과 제거 작업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3. 평가

로마 제국의 역대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중 악랄함과 비열함으론,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최악의 악인으로 항상 거론된다. 인맥, 지연, 혈연과 입양 등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해 출세한 것은 관점에 따라 그 평이 갈린다고 해도, 세야누스는 한 사람이 출세와 권력을 쥐기 위해 벌인 일은 로마사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처럼 다양하고 비양심적이었고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로마 제국 안에서의 폐해는 심각했다. 실제 기록상 그가 사용하지 않은 방법은 근친상간 외에는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로마인들에게 사후 그 일족 전체가 말살당하고도 수십년 간 세야누스 일당은 증오의 대상 그 자체였다.

따라서 네로의 두 근위대장이자 총신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서기 2세기 말의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가 있고 잔혹함과 부정부패로는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가 세야누스와 함께 거론되지만, 이 네 명 중 세야누스와 동등한 수준의 악인으로 평가받는 이는 티겔리누스와 플라우티아누스 정도였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세야누스와 같은 나쁜 쪽의 완전체는 플라우티아누스가 유일했다고 디오 카시우스는 말하고 있다. 사후에도 나쁜 쪽으로는 쭉 악명을 떨친 악인이었고 황제 자리를 경매로 팔아치운 라이투스를 경험한 디오에게조차 라이투스 윗급은 확정된 셈.

따라서 왕정 ~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전체를 통틀어 로마사와 동로마사 전체에서 가장 파렴치하고 음흉한 인물로 거론되고 있으며, 세야누스가 개인적 야심으로 벌인 악행은 종국적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단명까지 이어졌다고 평가받는다. 오죽했으면 티베리우스를 극도로 미워한 타키투스나 전지적 원로원 입장에서 기록한 디오 카시우스 같은 후세 로마인들조차도, 대역죄인 외의 가족 구성원을 처벌하지 않는 로마 사회에서 전 국가적으로 연좌제까지 적용해 직계 가족과 방계 혈족 심지어 해방노예와 노예들까지 죄다 없앤 부분을 세야누스와 그 가족 및 노예들이 한 인과응보라는 식으로 서술했을 정도. 다만, 극도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미워하다 못해 혐오하고 증오한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어느 정도 쉴드를 쳐줬다. 그 이유는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의 부하인 것은 사실이고, 최종결정권자가 티베리우스인데다 원래부터 카이사르와 그 가족들의 악행은 유명하지 않았냐는 건데 이는, 티베리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좋아하지 않은 타키투스가 "세야누스가 벌인 악행이 티베리우스의 치세를 망가뜨렸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근대 이후 학자들 주장처럼 그냥 수에토니우스 특유의 헛소리로 생각하면 편하다.

평가가 최악인 사람인 만큼, 로마 사회에 사후에도 온갖 악영향을 미쳤다. 살아생전 악행들은 티베리우스 치세 후반을 공포정치, 공안통치로 몰아넣은데다, 사후에는 세야누스파 제거 때문에 그 여파가 클라우디우스 1세 초반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니 로마사회에서 세야누스라는 사내가 바이러스 같은 악마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된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런 악행 못지 않게 그가 입안한 정책이나 기술은 의외로 꽤 오래 살아 남았다. 그가 건의하여 만들어진 로마시 근교의 근위대 병영은 티베리우스가 최종결정해 세운 만큼,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세야누스가 벌인 악행은 로마 황제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무기로 활용하면서도 온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경우 혹은 세야누스처럼 개인적 야심으로 그 자리를 악용하면 어떻게 되는 지 제대로 선례를 남겼고,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가진 취약점과 함께 서기 3세기 제국의 내란을 심화시켰다. 또 세야누스가 건의한 고발자 제도 활용,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한 정적 제거 등은 네로와 그 휘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에게 좋은(?) 선례가 되어 이후에도 황제들이 원로원이나 기사계급, 지식인들을 반역죄로 엮어 줄줄이 숙청할 때 널리 활용돼 공화정 회귀론자들에게 제정 체제가 가진 단점으로 늘 거론됐다.

좋던 나쁘던 간에 권력의 최정점 직전까지 찍었고 로마 제국을 좌지우지한 전력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문학 작품 등에서 권력무상의 대표적인 예시로 거론되고 있다.
[1] 혹은 세야누스의 아내가 되는 아피카타가 아피키우스의 딸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2] 클라우디우스가 첫번째 결혼에서 맞이한 아내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사이에서 얻은 장남이다. 풀네임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와 할아버지 대 드루수스에서 각각 따와 지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이복 여동생으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장녀이자 파우스투스 술라의 아내였던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가 있었다. [3] 정확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로 혈연상 외종손이고, 아우구스투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차남의 아들로 법적으론 양손자, 의붓손자다. 허나 손이 많지 않고, 아내의 아들 대 드루수스를 양자로 삼아 친아들로 대우한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와 그 형 게르마니쿠스를 늘 "우리의 사랑하는 손자"로 불렀고, 사후 공개된 유언장에도 자기 친혈육이라고 분명히 명시했다. [4] 후일의 클라우디우스 1세 [5] 보통 친삼촌이자 장인인 대(大) 드루수스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小) 드루수스라고 불린다. [6] 소(小) 드루수스 [7] 훗날의 칼리굴라 [8] 다만, 양할아버지이자 외종조부인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클라우디우스가 가진 비범함과 휼륭한 인성을 알고, 일찍부터 그에게 로마귀족이자 자신의 직계혈육으로서 필요한 모든 교육을 시켰다. 여기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담당한 품성 교육, 식사예절과 원로원을 다루는 대화법, 웅변술부터 각계 최고 명사와 역사가들이 직접 담당한 학문 수업, 각 속주 상황과 속주민들의 풍습 교육 등도 포함됐다. 따라서 일찌감치 현실적인 한계로 제위 계승에서 배제됨에도 클라우디우스는 약관의 나이부터 알아주는 역사가이자 교양인이 됐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정치 활동을 만류했다. 허나 자신의 보좌사제는 반드시 맡게 하고, 그가 가문 클리엔테스, 귀족들 앞에서 연설 등을 할 때 반드시 참석해 자기 혈육임을 귀족들에게 인식시켰다. 또 사후 발표될 유언장에 "내 친혈육이자 손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재산을 남긴다"고 명시해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했다. [9]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리빌라의 어머니이다. [10] Imperium proconsulare maius(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 이 권한의 직책명이 임페라토르이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가리킬 때 임페라토르란 말을 쓴다. [11] 치안까지 관할하는 집단이라, 근위대와 함께 로마의 무력집단이었다. [12] 일설에 따르면 바로 처형할 수 있게 교수대에서 목에 밧줄을 걸어놓고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처형할 구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번 삽입만 하고 바로 처형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