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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00:32:23

가이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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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섹스투스 마르키우스 프리스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오쿨라투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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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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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ignotus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티투스 베스트리키우스 스푸린나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마르티알리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아킬리우스 [Pri]scus 코엘리우스 스파르수스
루키우스 마이키우스 포스투무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페록스 리키니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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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풀비우스 길로 비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크레티우스 바르바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발레리우스 마그누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페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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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자식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전투
내전기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전투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반란 일리리아 대반란
기타
장소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기타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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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켑스 유벤투티스[1]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CAIVS IVLIVS CAESAR
파일:가이우스 카이사르.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가이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Gaius Vipsanius Agrippa)[2]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3][4]
통칭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
카이오 체사레(가이오 체사레)( Gaio(Caio) Cesare)[5]
칭호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출생 기원전 20년
로마 제국 로마
사망 서기 4년 2월 21일 (향년 23세)
로마 제국 아나톨리아 리키아(Lycia)
매장지 아우구스투스 영묘(Mausoleum of Augustus)
배우자 리빌라
자녀 없음
아버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친부), 아우구스투스 (양부, 외조부), 티베리우스 (계부, 외삼촌, 입양형제)
어머니 대(大) 율리아
형제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 소(小)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티베리우스 (입양형제, 외삼촌),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의붓형제)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입양2.2. 성장과 후계수업2.3.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혼2.4. 프린켑스 유벤투티스2.5. 결혼2.6. 동방 파견
2.6.1. 그리스 순방과 유대 문제 해결2.6.2. 파르티아 문제
2.7. 아르메니아 사태와 사망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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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 CAIVS CAESAR)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제위 계승권자, 정치가, 장군, 외교관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로, 로마 제국 최초의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이다.

서기 1년도 집정관을 지냈으며, 서기 2년부터 4년까지 로마 제국 동방 문제 총책임자로 외교, 국방 문제를 전담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 대(大) 율리아(Julia the Elder)와 로마 제국의 장군, 정치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사이에서 태어났고,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직후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적해 친양자가 돼 차기 로마제국 황제로 일찌감치 낙점됐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이었던 그는 태어난 직후부터 차기 황제로 낙점된 만큼,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다양한 특권을 선사받았고, 어떤 로마인들보다 많은 공직과 훈장을 선사받았다. 하지만 혈통, 이름과 달리 죽을 때까지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요절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통 남자 황족인 만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모든 황족들과 혈통적, 법적으로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이어진 다섯 명의 황제 뿐만 아니라 이 왕조의 아우구스타들과 제위계승자(황태자)들까지 모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이어진다.

여동생 대(大)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 소(小) 율리아를 비롯해 남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으며, 입양형제로는 어머니 율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있다. 따라서 3대 황제 칼리굴라 네로의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외조카가 되며, 여동생 대 아그리피나의 남편 게르마니쿠스는 그의 매제이면서도 법적으로는 조카가 된다.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20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2인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오른팔인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그의 세번째 아내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첫 아이였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가이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고, 그는 친아버지 아그리파가 결혼 후 처음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친부모의 결혼 자체가 외할아버지의 후계자 문제 해결로 진행됐고 지극히 정치적 이유로 가족사가 시작된 만큼, 출생하기 전 외할아버지와 친아버지 간의 약속에 따라 일찌감치 외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에 친양자로 입적될 운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식 입양은 남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17년 태어난 해에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진행됐다.

3살이 되던 해인 기원전 17년, 정식 입양 절차를 통해 갓 태어난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 관례에 따라 '자녀를 입양보내준 감사의 격려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입양 이후, 로마인들의 전통에 따라 이름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빕사니아누스로 개명하지 않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꿨다고 한다.

입양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차기 황제가 된 만큼 태어난 날부터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생일과 건강을 기념하는 희생제를 열고, 자신의 수호신인 아폴로를 모신 신전에 이를 알리고 두 외손자를 위한 대대적인 행사를 매년 거행했다고 한다.

2.2. 성장과 후계수업

부모의 결혼이 결정난 순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양되기로 한 만큼, 입양 이후 외할아버지가 사는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자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두 외손자를 끼고 살았다고 하는데, 평소 가부장적이고 냉정한 성격과 달리 이례적으로 두 혈육의 모든 교육을 직접 관장하고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두 외손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 때문에 진행된 후계수업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최고의 교육을 제국 각지의 석학들에게 받고, 예절을 포함한 공무 분야 교육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진행했다. 아울러 두 사람은 키르쿠스 축제를 비롯해 국가 제사 의식에선 최고제사장인 아우구스투스를 직접 보필하는 사제 역할까지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어릴때부터 귀족 자제들이 참가하는 서커스, 연극 등에서도 항상 주인공을 맡거나 행렬을 이끄는 리더를 담당했다.

후계 수업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두 손자에게 글쓰기, 식사예절, 걸음걸이 등등을 모두 자신과 똑같이 하는 훈련도 있었고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식사 자리에서 외조부 역할을 그대로 따라 행동하고, 연회를 진행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으로 자랐는데, 두 사람이 성인 이후 남겨진 로마시대 조각상들은 20대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흉상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모습으로 조각됐다. 그래서 최근 경매를 통해 이탈리아에 돌아온 가이우스 카이사르 흉상을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 흉상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놀랍다는 평가가 많다[6].

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생일이나 나라의 국경일마다 두 혈육을 홍보하는데 막대한 돈을 지출했다. 또 모든 행사에서 그들에게 각종 명예와 훈장들을 하사하고 두 혈육 홍보에 엄청난 돈을 로마와 이탈리아 각지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에도 정작 로마민중들과 원로원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인기는 오르지 않았고, 이들의 평판은 상당히 나빴는데 이런 여론은 형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이런 여론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견제 때문은 전혀 아니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성격적, 행동적 결함과 친모 율리아 탓이 컸다고 한다.

2.3.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혼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외할아버지와 친아버지가 50이 다 되어 얻은 후계자인 만큼, 몸이 건강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가 급사할 경우 바로 제위를 잇기에는 상당히 어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이를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친부 아그리파를 징검다리식 후계자로 지명해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공동으로 그 뒤를 잇는 시간을 확보했다. 마르켈루스 사후,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사실상 공동황제가 됐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만이 가진 임페리움 일부를 동방 문제를 총책임지는 중책 아래 떠맡았다.

동시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 중 날 때부터 본인이 직접 키웠고, 누나 소 옥타비아의 막내 사위로 누나, 아내 모두의 지지를 확고하게 받고 있는 양자이자 조카사위 대 드루수스를 아그리파마저 급사할 경우를 대비해, 실질적인 후계자로 놓고 그 경력을 그의 친형 티베리우스보다 위로 놓고 빠르게 명예로운 경력을 갖추게 했다. 이어 자신의 양자 대 드루수스와 조카 소 안토니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과 가이우스 카이사르 형제자매들의 인척 관계를 계획해, 모든 급변 사태를 제어했다. 이 부분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누나 소 옥타비아의 의중도 담겨 있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쉽게 우군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기원전 13년, 리비아 황후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 전선을 총책임지고 있었는데 이중 드루수스는 라인강을 도하해 라인강 동쪽 일대까지 로마 국경을 확장시킨 뒤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종결시키기 직전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에게 두 외손자의 군무 교육을 담당케 하려고 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같은 해 마르켈루스 극장 완공을 기념한 트로이 게임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대중 앞에서 공개한 뒤 판노니아에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보내 그의 군무교육을 담당케했다. 동시에 기원전 13년 태어난 본인의 양손녀이자 아내의 친손녀, 누나의 외손녀인 리빌라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배필로 삼는 결정을 사실상 내렸다. 아우구스투스, 리비아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미래 아내가 될 리빌라에게 손수 애칭을 지어줬으며, 그녀의 양육에 적극 관여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예상과 달리, 어린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중심으로 생각한 후계구도는 예기치 못한 변수 아래 망가졌다.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전역을 총사령부 삼아 군을 통솔한 대 드루수스, 판노니아와 일리리쿰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다뉴브 강 수원을 찾는 형태로 상류에서 하류를 훑는 방법 아래 전쟁을 수행한 티베리우스를 중심으로 빠르게 정복전쟁의 속도를 높였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갓 동방에서 돌아온 아그리파에게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그에게 판노니아에서 게르마니아 전쟁의 후방 지원을 요청했다. 아그리파는 이런 이유로 판노니아로 이동했는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 일대 특유의 춥고 서늘한 겨울 공기, 날씨 때문에 아그리파의 건강이 크게 상하게 된다. 아그리파는 매우 성실했고, 몸이 강건했지만, 연이은 혹사에 결국 건강이 상해, 급히 이탈리아 남부로 귀국했다. 하지만 건강은 회복되지 못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 아그리파는 기원전 12년 캄파니아의 시골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나이는 고작 8살에 불과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예상과 전혀 빗나간 사건이었기 때문에 후계구도는 요동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딸 율리아, 그리고 이들의 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얼굴이 담긴 데나리우스 발행을 급히 중지시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아내 리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어 데리고 온 두 의붓아들(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중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가 맡은 역할을 넘겨,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성장하기까지의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후계자 관점에서 볼 때,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갓 다섯째 아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출산한 율리아가 본래 티베리우스와 결혼해야 했고, 두 사람이 모두 젊어, 사이에 많은 후계자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컸다. 또한 아그리파 사망 이후, 혹시 모를 대안으로 선정한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의 대략적인 1차 목표 달성 후 개선식 후 정식으로 본인의 양자가 되면 티베리우스가 확실한 우군이 되어야 할때, 확실한 교통정리를 하기 위함이었다. 즉, 대 드루수스의 형 티베리우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와 함께 장차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을 자녀들의 아버지이자 보호자로 본인 뒤를 잇게 될 경우 발생할 문제까지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런 복잡한 이유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의 이혼을 명령하고, 티베리우스와 율리아를 결혼시켜, 두 사람을 다시 포 강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 도시로 보냈다. 더해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의 사위이자 아내의 차남, 즉 자신의 둘째 의붓아들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 홍보와 함께 그에게 힘을 크게 실어준다.

아그리파가 해야 할 역할을 맡길 계획은 이렇게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가 나눠 가졌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 될 대 드루수스를, 사위가 된 티베리우스보다 높게 중용했다. 여기에는 이때 대 드루수스의 입지를 위해,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와 누나 옥타비아는 드루수스에게 보다 많은 힘과 비중이 몰리게 힘쓴 부분도 컸다. 조용하기로 유명한 소 옥타비아는 아들 마르켈루스 사후, 여러 사위 중 맏사위이자 본인의 양자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막내사위 대 드루수스에게 많이 의지했는데, 그녀는 확실히 드루수스를 후계자로 삼는 조치를 굳히게 했다. 리비아의 뜻에 따라 일찌감치 막내딸 소 안토니아의 배필로 드루수스를 선정했고, 드루수스가 갈리아로 파견될 무렵이던 아그리파 생전부터 힘을 쏟음을 떠올리면 이 점은 놀랍지 않았다.[7]

아우구스투스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리 드루수스를 집정관에 추천해 집정관에 당선시키고 약식 개선식까지 통과시켰다. 이 추천과 개선식 의결은 동방 전선에서 비슷한 수준의 공을 세운 티베리우스의 경우, 끝내 개선식을 올리지 못했다는 과거를 떠올리면, 놀라운 조치였다. 그렇지만 이는 아그리파 급사 후 갑작스레 내린 아우구스투스의 결정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 드루수스는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처럼 남들보다 5년 먼저 모든 공직에 취임할 특권을 가졌음에도, 친형 티베리우스보다는 마르켈루스와 똑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8]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생전부터 "두 아들[9] 못지 않게 진지하게 드루수스를 내 후계자로 고려 중이다."라고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실토했던 것을 넘어 노골적으로 드루수스가 단순한 징검다리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발언,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가족 행사에서 드루수스가 맡던 역할과 지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남성으로 참석함을 떠올리면, 또 아그리파 사후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나이가 10살도 되지 않은데다 아우구스투스가 60이 다가온 상황인 것을 안다면, 드루수스가 차기 황제로 낙점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양자로 입적된다면,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선 두 외손자의 미래가 문제가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상술했듯이 아그리파 생전인 기원전 13년에 일찌감치 해소된 상태였다. 드루수스, 안토니아 부부의 딸 리빌라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약혼했고,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약혼도 결정된 터라, 교통정리까지 해소된 것이다. 실제로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성인이 된 뒤 예정에 따라 드루수스의 딸과 결혼하고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는 가이우스, 루키우스의 여동생 아그리피나와 정혼 후 약혼했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사후부터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차남 드루수스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킬 생각을 한 뒤, 약식 개선식 진행을 통한 정치적 이벤트 후 드루수스를 황태자로 삼아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보호자로 묶어둘 생각을 했다. 즉, 그는 드루수스를 양자 삼아 율리우스 가를 통해 제위를 잇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의 장녀 리빌라를 결혼시켜 정치적 연합체로 완성된 새로운 귀족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은 첫 단추를 막 맨 상황에서 드루수스가 개선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게르마니아 전선 시찰 중 낙마해 요절해버리면서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미래를 위해 구상한 모든 시나리오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의미였고, 드루수스의 자녀들을 율리우스 가에 편입시켜 첫 번째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의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와 결합을 완전케 하려는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까지 미래가 의심될 상황이라는,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선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이 된 것을 말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유아기 때부터 아들로 키운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 드루수스가 맡았어야 할 역할을 전부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를 이 방법 아래 후계자로 삼게 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어쩔 수 없이 내린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는 처음부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갑작스러운 사망 등으로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아내의 친아들(본인의 의붓아들)에게 중간다리, 혹은 대타 정도로 생각해 내린 조치였다. 같은 후견인 역할이라도 아그리파와 티베리우스의 입장,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입장이 달랐던 기원전 11년과는 기원전 9년의 일은 근본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아그리파의 경우에는 가이우스나 루키우스 모두 자신의 친자식들이니 중간다리 역할 내지 후원자 역할을 맡는 것이 억울하거나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손에서 친아들 수준의 대우를 받으며 인생 대부분을 자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는 말 그대로 자신과는 피 한방울 안 섞인 계부의 아이들을 섭정 자격으로 떠맡아야 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는 이때 선택권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었다. 율리아가 티베릴루스를 낳았고, 이후 두 번 더 임신한 과정에서 장차 태어날 자녀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똑같은 지위를 확보하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된 친동생과 적절히 관계만 유지하면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원전 9년 동생 드루수스가 요절하면서, 티베리우스는 말 그대로 징검다리 역할 내지 바지 사장 역할을 하는 예비 황제가 됐다. 원로원이나 로마 귀족들이 말하는 데릴사위, 양자보다 못한 처지의 집사 노릇과 같게 된 셈인데, 이런 것을 영리하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자타가 인정한 티베리우스가 앞날이 뻔히 보이는 최악이 된 것을 모르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이는 추측이 아니라 실제 이후에도 고스란히 증명됐다. 서기 4년 8월에는 죽은 동생 드루수스의 두 아들 중 본인이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되면서 가문 수장 형태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남성을 이끌게 된 친조카 클라우디우스가 이름을 개명할 때 본인 의사보다는 아우구스투스의 명령과 결단 아래에서 넘기는 상황이 된다거나, 서기 14년 공개된 아우구스투스 유언장이 원로원 앞에서 읽혔을 때,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지만, 그 다음 황제는 무조건 내 핏줄에게 물려줘야한다"라고 작성한 것으로 공개되면서, 운신의 폭이 계속 줄어든 것이다.[10]

동시에 기원전 11년 티베리우스와 대 율리아 재혼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의 이혼을 지시한 뒤,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율리아와 명령으로 이혼하게 될 티베리우스의 결혼을 지시내려 강행한 터라, 이 점은 장차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티베리우스 관계를 끈끈하게 하면서도 서로 오해가 쌓인 시작이 됐다. 그런데 이 결정은 표면상 아우구스투스가 아버지의 명령, 황제의 명령으로 확정지었다고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기원전 11년 사망하게 된 옥타비아와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때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원래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두번째 남편 아그리파와 사별해 홀몸이 되자 가문에 상관없이 기사계급 출신 남성 중 한 명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결혼 직후부터 자신의 두 아들을 남편의 공식적인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황제로 만들고 싶어한 리비아는 이 결정에 반대했다. 당시 건강이 나빠지고 있던 소 옥타비아 역시 올케 리비아와 생각이 일부 같아 당시 생존해 있는 드루수스의 미래를 위해, 율리아의 남편이 장차 궁중 암투가 될 것 등을 알고, 실질적으로 리비아 편을 든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쥐기 전부터 동갑내기 친구 아그리파와 함께 누나 소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들에게 자신의 결정을 재고할 수 있게 해준 황제였다. 따라서 리비아가 옥타비아의 의견까지 얻어 아우구스투스에게 후계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율리아의 결혼상대자는 티베리우스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을 때의 파괴력은 상당했다. 이 당시 생존해 있던 마이케나스 역시 리비아 의견에 반대를 놓지 않고, 사실상 드루수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공존의 열쇠가 이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이것 만이 최선이라고 봤다. 더해 율리아는 의붓 오빠이자 의붓 사위인 티베리우스를 일찍부터 이성으로 좋아한 터라, 티베리우스가 남편 후보로 언급되자 반대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런 이유로 리비아의 판단과 결정은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배려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명령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일처리와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정치적일 정도로 냉정했는데, 본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차갑지 못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먼저 가족들의 일이 아니라고 부담감을 덜어주고, 누나와 친구 마이케나스까지 리비아 의견을 동조하자, 그는 본래 그의 방식처럼 티베리우스의 이혼,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재혼을 명령했다. 이는 티베리우스를 아예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계부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과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늘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결정은 티베리우스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아내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소 드루수스[11]라는 아들까지 둔 상태였다. 심지어 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바로 아그리파가 율리아 이전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기 때문에, 즉 티베리우스는 장인의 딸과 이혼하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장모인 율리아와 결혼하게 된 셈이다. 거기다 티베리우스는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한 케이스가 아닌, 연애결혼으로 빕사니아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혼전순결을 지킬 만큼 상당한 애처가였다. 그래서 금슬이 좋던 빕사니아와 이혼하기 진짜 싫어서 계부에게 제발 안 된다고 사정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어머니[12]에게 강제적인 이혼과 재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명령과 태도는 강압적이고 절대적이었기에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13]

그 결과 아그리파와 드루수스의 죽음 이후, 티베리우스는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징검다리 역할을 떠맡게 됐다. 그는 사실상 공동 황제로 아우구스투스와 책임을 나누어지게 되며, 황제의 특권 중 하나인 호민관 특권까지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이때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재혼임에도 처음에는 본인이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율리아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교양도 부족하고 문란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로 유명한 사람답게 결혼 생활 내내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계부 티베리우스와 끊임없이 부딪쳤다. 이런 상황에서 고부갈등이 벌어지고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아들[14]마저 얼마 안 되어 잃었다. 설상가상 율리아가 두 번 더 임신했다가 불규칙한 사생활로 모두 유산한 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율리아를 지적하고 이 문제가 가정 문제가 되며 상황은 악화됐다. 부부 관계의 악화에 기름을 부은 것은 율리아가 티베리우스를 내조하겠다며 원치 않은 인맥을 만들어주면서 벌어진 오해, 기원전 8년 그나마 속마음을 터놓을 때 멘토 역을 해준 마이케나스의 죽음이었다. 이 모든 일이 연달아 터지자 티베리우스는 좌절했다.

따라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최전방 근무를 지원해 전장으로 향하거나 힘든 업무를 떠맡기도 했는데, 이때 티베리우스가 애정을 가지고 신경 쓴 사람은 친아들 소 드루수스 외에도, 의붓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였다.[15] 그는 이 무렵 군무 훈련을 받아야 될 나이에 접어든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직접 판노니아, 일리리쿰으로 데리고 가서, 손수 군대를 다루고 연설하는 방법을 지도했다. 반란 진압 때에는 어떤 식으로 제어하는 것이 분명한지 직접 옆에서 익히게 했다. 이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후일 티베리우스에게 원망의 감정 속에서도 애정 어린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율리아는 여러 남성들과 불륜관계를 맺는 등 좋지 않은 품행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더니, 결국 티베리우스 부부는 더 이상 회복불능 사태에 빠지고 만다. 이 사태의 결정타가 된 것은 율리아가 새롭게 호민관 특권을 선사받아 공동황제에 오르게 될 남편 티베리우스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할 세력을 포섭한 일과 여러 남성과 애인이 되어 벌인 파벌 구축이었다. 이런 정치적 움직임은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좋아하지 않은 일이었고, 티베리우스는 이 과정에서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36살의 나이로 말 그대로 모든 공직을 내던지고, 스스로 평범한 자연인이 되어 로도스 섬으로 은퇴를 해버린다.

2.4.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계부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은퇴한 이후, 거의 8년 가까이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살았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티베리우스를 수도로 데리고 오길 원했고, 티베리우스에게 끝내 황제 대리인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나 갓 사춘기가 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여러 고대기록의 직간접적 증거로 드러나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달리 확실히 티베리우스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티베리우스를 삼촌이자 아버지로 따랐던 터라, 티베리우스가 모든 책무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도망치듯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형제자매를 내팽겼다고 생각했다. 더해 그의 새로운 가정교사가 된 롤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이들이 그에게 영향을 행사하면서, 그는 자신의 입지 때문에 티베리우스를 더욱 용서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상반된 모습이었는데, 그는 어머니 율리아가 간통죄로 처벌받은 직후부터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외할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티베리우스의 갑작스러운 가출 사건 후, 아우구스투스가 어쩔 수 없이 세습왕조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6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그리고 죽은 마르켈루스만 받았던 온갖 특권들을 모두 선물 받았다.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의 경우에는 성년식을 올린 뒤, 남들보다 5년 이상 빠른 공직 경험을 인정받는 선의 특권이었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그 형제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받은 특권의 선례는 마르켈루스, 대 드루수스 형태와 똑같았고, 최대한 빨리 집정관에 오르는 형태로 수여됐다.

다음 해인 기원전 5년 아우구스투스는 아직 성년식도 안 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정식 사제에 임명하고, 원로원 회의장 참석 특권 외에도 원로원에서 모든 발언이 보장받을 권리까지 부여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도 똑같은 특권들을 보장했는데,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미성년의 나이에 특권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대규모로 열렸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의 은퇴 이후, 정식 후계자에 등극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5년 생일을 맞자마자 서둘러 성년식을 치루게 한 뒤 그에게 토카를 입혀 원로원에 출석했다. 그리고 그에게 황태자에 해당하는 각종 명예를 연이어 수여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제정이라고 불려도 이때 로마는 엄연히 '공화국'이었으며 황제 개인의 제국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일가 남자황족들[16]은 "공화국의 위대한 영광" 같은 공화정 로마 시대의 상투적 문구를 사용했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지나치게 이른 정계 데뷔와 특권들은 예전 전례들을 생각해도 엄연히 세습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원로원은 과거 마르켈루스 생전의 일로 홍역을 치룬 적을 잊지 않았고, 대 드루수스가 갈리아 전역의 3개 총독 직을 모두 관리한 이례적인 형태로 군권을 쥔 방법에도 불만이 있어,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확고히 권력을 넘길 생각을 눈치챘다. 원로원은 이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데뷔를 자연스레 권력 세습으로 확신했고, 여론전을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잘 알았고, 과거 선례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한 것도 2번의 경험으로 확실히 알았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과거 자신이 드루수스가 법무관을 지내지 않음에도 편법으로 법무관을 거치게 하고, 곧바로 전직 법무관이 쥔 군대 지휘권을 쥐어준 다음, 전직 집정관처럼 여러 군단을 거느릴 때 쓴 방법을 활용했다. 그는 원로원 내부 지지자에게 원로원에서 터져나올 비난을 모두 틀어쥐게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어 반대 의견이 있는 이들을 하나씩 정치적 타협 아래 각개격파 후 포섭했다. 이어 아우구스투스는 두 외손자를 위해 원로원과 정치적 타협을 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민중들과 민회까지 원로원과 프린켑스의 협상장에 끌어들여 우격다짐으로 10대 소년들에게 각종 특권들과 집정관 등 공직을 하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그는 엄청난 돈을 들여 국가 행사로 자신의 혈육들을 홍보했고, 유벤투스라는 소년단을 만들어 두 손자에게 단장, 부단장 자리를 주고 각종 행사들까지 주최시키는 등 엄청난 지원을 했다. 하지만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은 성과가 있다고 해도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공이었고, 여론 역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해주지 않았다. 실제로 로마 여론을 주도한 원로원과 로마 민중들은 혈통만 타고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는 두 사람이 거만한 말투와 태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안하무인적 행동 등으로 원로원과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던 이유도 있었고, 미움은 받아도 능력은 인정받은 티베리우스[17]와 달리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가 지나치게 능력이 평범한데다 어린 나이에 특권을 받은 값을 하지 못한 이유도 컸다. 하지만 이런 여론이 형성된 결정적 이유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율리아가 티베리우스와의 결혼 생활에서 보인 추태와 난잡한 사생활, 즉 여러 애인들과의 불륜과 교양없는 행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여론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두 외손자가 왜 인기가 없는지 모른 듯 행동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들에게 기회를 줬다.

2.5. 결혼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친모 율리아(티베리우스의 아내)가 아우구스투스의 고소로 간통죄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고 기원전 2년 판다테리아로 추방됐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계부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는 티베리우스의 장남 소 드루수스의 성년식이 다가오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가 티베리우스 복귀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율리아 추방 이후 기정사실이 되게 된다. 그런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어머니 율리아가 간통죄로 추방되자,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온다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 끊임없이 그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의식해 티베리우스의 복귀를 자신의 양손자 소 드루수스의 성년식까지 늦출 수 밖에 없었고, 티베리우스 역시 로도스 섬에서 이런 정황을 알고 거취에 불안을 느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시기에 유대 왕국에서 소요사건이 일어나고 파르티아의 개입으로 아르메니아 문제까지 터졌다. 기원전 1년 초,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예정대로 대(大) 드루수스와 소(小) 안토니아의 딸 리빌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아내 리빌라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고, 결혼생활 역시 결혼식 직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동방 문제 해결을 위해 유대 지방으로 떠나면서 사실상 없다시피했다.

2.6. 동방 파견

유대 왕국 소요사건과 파르티아의 개입으로 촉발된 아르메니아 문제가 발생할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정식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민중과 원로원 모두에게 지나치게 인기가 없었고, 내세울 공적 역시 트로이 경기 축제 진행, 유벤투스 단장직 수행 같은 떠먹여주기 식 공적 외에는 전무했다. 다만, 이 홍보 아래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확실히 피사를 비롯해 에트루리아 일대에서의 인기는 확고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그 측근들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공적만 갖춰진다면, 과거 대 드루수스 사례와 똑같아질 것을 확실히 인지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당시 동방 문제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직접 맡기면서, 이 정치적 이벤트를 외교적으로 성공시킨다면 자신의 양자가 단번에 민중들과 원로원에게 인정받을 거라고 판단한 것은 확신이 선례로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9년 요절한 대 드루수스의 선례였다. 대 드루수스는 친형 티베리우스가 법무관 활동 중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판노니아로 출장을 갈 때,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으로 법무관에 취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무관의 책무 중 입법권을 행사하는 형태로 전직 법무관 자격자가 된 뒤 군대를 처음 지휘했다. 그리고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나이와 거의 비슷할 때, 갈리아로 파견된 다음, 게르마니아 전쟁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이 과정에서 드루수스는 여러 장군, 총독의 독려 아래 경력이 쌓여, 결국 게르마니아 전쟁의 성적 아래 원로원, 민회, 로마군 모두에게 국가 영웅으로 칭송됐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제대로 된 고문단을 꾸려주면서, 본인이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고, 로도스 섬에서 황제 대리인으로 근무 중인 티베리우스가 복귀하는 형태로 돕는다면, 가이우스 카이사르 동방 파견은 모든 고민거리를 해소할 최고의 이벤트였다. 하지만 후일 게르마니쿠스의 동방 파견이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파르티아 전쟁 사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난도는 상당히 높았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년 초, 자신의 측근들과 이를 논의한 뒤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동방 문제를 총책임질 사람에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선정했다. 이는 과거 젊은 티베리우스가 아그리파를 대신해 파견된 전례와 드루수스가 어린 나이에 게르마니아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직책을 얻은 사례를 종합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지나치게 경험이 없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위해 고문단을 꾸린 뒤, 동방속주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전직 집정관 롤리우스를 고문단장에 임명해 돋보이는 성과를 내야 할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보좌하도록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년 8월 1일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스 신전 봉헌 축제를 지휘하고, 같은 해 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함께 트로이 목마 게임을 선두에서 이끈 행사를 진행했다. 또 그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역대 규모로 열린 검투사 경기와 맹수 사냥, 모의 해전을 성공리에 이끌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장성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그동안 경험을 살려 올바르게 행동하고, 베테랑 롤리우스를 비롯한 인사들이 잘 보좌해준다면 젊은 시절 티베리우스처럼 잘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판단은 당시 상당한 도박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출발점은 언뜻 비슷해보여도 능력과 성과 자체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불과 10대 중반의 나이에 재무관이 된 직후, 아우구스투스조차 놀랄 정도로 재무관 역할을 잘해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파견될 나이에 트로이 목마 게임을 이끌고 각종 축제를 개최해 성공리에 임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불과 9살 나이부터 이런 축제들을 밥먹듯 소화해내며 친가인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 분파인 네로 가문을 당대 최고의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올려놓았다. 또 그는 10대 후반 아우구스투스를 도와 여러 원로원 의원들을 반역죄 기소한 뒤 법정에서 유죄를 얻어냈고, 여러 소규모 전투에서도 군을 이끌며 승리까지 여러 번 거둔 상태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능력치 자체가 달랐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두 사람 모두를 친아들처럼 키웠고 지나치게 자신의 친혈육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고문단을 꾸릴 때 “티베리우스만큼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안 된다면 고문단을 잘 꾸리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한 듯 하다.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 전쟁 파견 전 동방문제를 해결할 당시, 그는 이미 원로원조차 “쟤가 밉긴 한데 일은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인정할 정도 실력자였고, 실제 본인의 역량만으로 적국 파르티아와 동맹국 아르메니아 역시 놀라워 할 정도로 군사문제와 외교문제를 해결짓고 당근과 채찍 전력을 통한 군사작전으로 약식 개선식까지 논의될 정도로 성과를 냈다. 따라서 고문단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아무런 성과가 없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외교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발휘할 거라고 아우구스투스가 믿은 것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휼륭한 고문단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도박이었다.

기원전 1년 초,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리빌라와 결혼식을 올린 뒤 아우구스투스의 믿음과 대대적인 출정식 아래 로마를 떠났다. 고문단에는 황태자의 스승이자 수석 고문단장 마르쿠스 롤리우스를 비롯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가 선정됐고,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티베리우스의 참모로 맹활약한 장군이자 티베리우스의 최측근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훗날 황제가 되는 네로의 할아버지이자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엄청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포함됐다. 또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국왕 유바 2세와 젊은 근위대 병사로 총명함을 인정받은 세야누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수행단에 이름을 자리했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롤리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파테르쿨루스, 퀴리누스라는 로마 최고의 실력자들의 호위 속에 출발했는데, 문제는 로마를 떠난 직후부터 시작됐다. 그는 이때 새신부 리빌라를 남겨두고 로마를 떠났다.

2.6.1. 그리스 순방과 유대 문제 해결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머리아픈 문제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뽑아 선정한 고문단에게 다 맡긴 뒤, 가도를 따라 이탈리아 도시를 지날 때부터 세상 급한 일도 아닌 듯 느긋이 여행을 즐겼다고 한다. 따라서 고문단들은 이런 황태자의 태도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주요 실무진과 고문들이 그리스를 거쳐 시리아로 떠났다고 해도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던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무려 1년이 넘도록 동방 속주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느긋하게 여행을 즐겼다는 것은 현대 연구 결과, 후대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폄하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한 고대 작가들의 비방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느긋하게 여행을 즐겼다고 하기에는, 그가 그리스 순방 속에서 아드리아 해를 시작으로 지중해 동쪽의 주요 도시에서 내린 결정 모두 여행을 한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난 뒤 부유한 그리스 지역으로 향했다. 이때 유대 왕국 내 문제 해결 실무진은 일찌감치 갈라져 출발했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아카이아 지방을 거쳐 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형태로 현지 장관, 유지들에게 현지 사정을 파악하며 생전 처음 방문하는 그리스, 이집트 상황을 익혔다. 다만, 얼마나 거만하게 행동했는지 지나가는 도시마다 그를 위해 환영 만찬과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주는 과정에서 몇 가지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대부분 이런 수행단의 환영식은 속주민들과 도시 유력자들이 모두 경비를 부담한 탓에 시간이 지체되면 될 수록 다른 도시들의 부담까지 늘어나게 됐다. 그래서 그 행렬이 그리스를 출발해 이집트로 가기 전 로도스 섬을 지날 거라고 알려지자,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공부하면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나누던 티베리우스마저 그 소문을 들은 뒤 아랫사람처럼 그를 알현하러 마중나와야만 했다고 한다.[18]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서 나온 것은 사전에 아우구스투스가 먼저 서한을 보내, 결정내린 조치 아래 티베리우스가 먼저 수행원을 데리고 합류하는 형태였기에, 이 부분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티베리우스 모두를 폄하하기 위한 기록 혹은 야사일 확률이 높다. 다만,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티베리우스는 여기에서 쌓인 오해 때문에 결국 부딪혔다.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 중 고위층들로 구성된 고문단 멤버 중 아헤노바르부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싸운 만큼 우호적인 관계였고, 술피키우스 퀴리누스 역시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라서 티베리우스와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또 역사가로도 잘 알려진 파테르쿨루스는 두 말할 필요도 없는 티베리우스의 오른팔 격이라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티베리우스의 조우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고문단장을 맡고 있던 롤리우스는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철천지 원수일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 롤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후계자에게 스승이기도 했는데, 로도스 섬 방문 당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로 숙부 티베리우스를 무시하고 모욕한 일이 벌어지게 됐다. 이는 황태자가 어머니 율리아로 인한 사적인 감정을 담은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가이우스 카이사르 본래의 밥맛 떨어지는 거만한 성격과 롤리우스의 의도적인 이간질이 결합된 탓에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해프닝이 아닌 자존심 상하는 일의 연속으로 연이어 터졌다. 그래서 다른 고문들은 이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태도에 완전히 혀를 내둘렀는데, 이런 황태자의 행동을 옆에서 본 롤리우스는 앙숙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당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치하면서 두 사람의 대립 각을 키웠다.

또 롤리우스는 로도스에 있는 동안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끊임없이 부딪치게 만들면서, 미숙한 황태자 옆에서 티베리우스를 비난했다.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면서, 가정사 문제로 원망을 토로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말리지 않았다. 되레 이번 기회에 티베리우스를 죽이라고 지시하면 처형하겠다는 식으로 조언했다. 그러나 이런 롤리우스의 간계는 티베리우스에게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냉정해진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는 롤리우스의 이런 제안을 듣자마자, 티베리우스에 대한 원망을 멈추고, 이 제안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롤리우스와 서서히 고조된 갈등 속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롤리우스를 경계한다. 그러나 롤리우스는 멈추지 않고, 티베리우스를 압박했다.

따라서 다른 고문단 멤버들은 더 이상 롤리우스가 미숙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움직여 티베리우스와 대립구도를 만든 문제를 넘기지 않고 로마 원로원에 공식 보고하면서 “롤리우스가 의도적으로 일을 키운다.”고 롤리우스를 질책했다. 이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모욕을 당해도 집안 어른으로서 참았던 티베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직 어리고 이런 경험이 많지 않은 가이우스를 이해했지만, 롤리우스에 대해서는 굉장히 불쾌해했다. 그래서 황제 공식 대리인으로서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 롤리우스의 비열한 행동을 서한을 통해 공식 제기했다. 따라서 로마 원로원에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로도스 섬 방문 이후 “롤리우스가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이며 정부 공식 대리인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받는 사건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내용의 안건이 올라 이 문제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래서 내심 손자가 티베리우스와 화해하고 힘을 합쳐 좋은 결과를 내기를 원했던 아우구스투스는 고문단 멤버 중 가이우스 카이사르 수행 백인대장을 로마로 소환해 조사까지 했는데, 이 사건 이후 동방 문제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롤리우스와 경쟁관계가 되는 상황이 연이어 펼쳐지게 됐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도스 섬을 지나 시리아로 가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 곡물 수급과 연관이 깊고, 당시 소동이 일어난 까닭에 군사작전이 필요한 이집트로 향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이 없다면 불가능한 방문이었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전 허락을 받고 예정대로 이집트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 도착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한 다음, 민심 회복 차원에서 이집트 전역의 유명 관광지와 부유한 도시들을 도는 여행에 치중했다. 이어 유대로 떠나, 이곳에서 현지를 둘러본 다음, 아라비아로 원정대를 꾸려 현지 정찰 후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2.6.2. 파르티아 문제

가이우스 카이사르 역시 놀고 먹으면서 여행만 하지 않았다. 그는 실무진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롤리우스를 포함한 베테랑 고문단들의 보좌 속에서 아라비아 탐사 등을 하면서,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의 기 싸움을 주도한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 지시를 철저히 이행했다. 그가 서둘러 유대 지방과 시리아 속주에 도착해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지시내린 문제 해결에 집중하지 안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방 파견 이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도착해 한 일이라고는 도착 후 파르티아와의 국경까지 이동해 파르티아 측과 형식적인 조인식을 거행한 일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조인식 종료 직후,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로마에 보고서를 보낸 뒤 다음 행선지인 아르메니아로 떠나기로 했다. 한편 원로원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다음해 집정관에 선출됐다. 그리고 이어진 회의에서 미리 짜인 각본대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담당한 동방 문제 보고서가 낭독됐다. 이때 조인식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기뻐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얼마나 외교문제를 잘 해결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원로원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일을 잘 해결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로마인들과 원로원에서는 이 성과의 보고서를 토대로 한 아우구스투스의 주장에 수긍했다. 왜냐하면 롤리우스가 어려워 보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공으로 교묘히 잘 돌려 놓은 까닭에 아우구스투스의 칭찬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7. 아르메니아 사태와 사망

가장 시급했던 유대 문제와 파르티아와의 국경 문제가 해결된 직후, 가이우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불행한 일이 연이어 터졌다.

먼저, 고문단장 롤리우스가 뜬금없이 파르티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고발됐다. 내통의 증거로 거론된 것은 그가 동방 속주에 도착한 이후 파르티아 왕과 지방 유력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수령한 행동이었는데, 정황상 이를 고발한 측이 파르티아라고 해도 여기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롤리우스에게 질린 로마 측의 입김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사실 롤리우스는 뛰어난 행정가, 장군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열혈 지지자였지만, 늘 자신이 통치하던 속주의 속주민들을 쥐어 짜내거나 뇌물을 받아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행동 자체가 굉장히 위선적이어서 티베리우스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적이 많이 없었고, 로마 지식인들은 그를 가리켜 사람 좋고 인격적으로 흠 잡을 구석이 없다고 헌정시까지 보냈다.[19] 그래서 이 당시, 로마에서 그 고발장을 접수받은 아우구스투스는 고발 소식을 보고받고도,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미래를 위해 숙고 끝에 소환형을 내리지 않고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티베리우스 입장에서는 천운일 수도 있는 사건이 이때 벌어지는데, 그동안 롤리우스를 믿고 따르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버팀목이던 롤리우스를 맹비난하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문제를 재차 거론한 것이다. 결국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개입하게 되면서 롤리우스 고발 사건은 새로운 전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실 황태자와 스승의 사이는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부터 서서히 대립관계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는 롤리우스가 의도적으로 티베리우스를 조롱거리로 만든 사태 이후 티베리우스 측의 개입을 야기하면서 복잡하게 흘러가게 된다. 여기에 못을 박은 것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받은 황제 대리인 결정에 따라, 수년간 행사 중인 백인대장 임명장 수여를 롤리우스가 반역 증거로 내몬 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자신이 오해를 살 행동을 하게 된다면 생사여탈권을 쥔 감시자를 붙여달라고 호소하면서 억울함을 밝혔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티베리우스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한 다음 티베리우스에 대한 중상모략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롤리우스는 재차 티베리우스를 위기에 몰고자 압박을 다시 가했다. 그러나 이런 계략은 롤리우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티베리우스를 죽이라고 명령만 하면 머리를 가져다 바치겠다고 한 것을 면박당하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큰 불쾌감을 표하면서 정리됐다. 이 일은 티베리우스가 롤리우스 문제를 정식 상정하기 전에 벌어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롤리우스 사이가 이때부터 사실상 갈라졌다고 해석하는 학자가 많다.

이런 가운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의 샤한샤 프라아테스 5세와 그 모후 무사에게 조인식 후 열린 만찬에서 롤리우스가 뇌물을 요구해 착복함을 항의받는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여기에서 큰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꼈고, 이를 시작으로 롤리우스가 장차 자신의 삼촌이자 계부 티베리우스를 죽이려고 했던 것 역시 본인마저 제거할 수단이라고 의심했다. 그는 시리아 속주로 돌아간 뒤,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소식을 보고 받으며, 고문단장 롤리우스가 파르티아 측에게 왕을 담보로 한 몸값을 요구하고 불법적으로 파르티아에게 접근해 막대한 뇌물을 착복한 사실을 로마에 알렸다. 이렇게 롤리우스 고소가 진행되는데, 이런 가이우스 카이사르 행동은 롤리우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정적으로 만든다. 이런 가운데,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손을 들어주면서, 조사를 진행시키고, 티베리우스 모욕 사건에서 벌어진 문제를 재차 상정한다. 이에 황제와 원로원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판단한 롤리우스는 고발 소식을 들은 뒤 비관하다가 현지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린다.[20]

이렇게 황태자의 고문이자 스승인 롤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젊은 황태자가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의 중책을 떠맡게 된다. 사실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고문 롤리우스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롤리우스가 적정선 수준으로 컨트롤했기 때문에 나름 역할 수행을 잘해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롤리우스가 자살한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의 계산과 달리 그동안 가려진 온갖 문제를 연이어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고문단의 빈자리가 생기자 더 오만해졌으며, 역량 있는 고문들의 말도 잘 듣지 않고 자신을 수행하던 군대와 수행원들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 도착 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와 언행들로 자존심 강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자극하더니, 결국 아르메니아 왕실과 귀족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폭동사태를 유발시켰다. 그런데 이 당시 일에 대해 로마사 학자 카시오 디오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개인적 성격과 행동 탓에 벌어진 일이 우발적인 사태로 확대되었다고 결론내리진 않는다. 이는 하이켈하임 등 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방 업무는 아르메니아 사태 전까지는 전형적인 아우구스투스 스타일인 만큼 상당히 좋았다고 말한다. 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이때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요청에 따라 티베리우스 복귀를 허락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로 그가 마냥 오만하거나 멍청하면서 거만했다는 주장도 의문을 낳고 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르메니아 도착 때 큰 문제가 된 것은 아르메니아 내 반로마 기류가 강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이 피보호 동맹국은 파르티아 국경이나 시리아 속주 등과 비교해 확실히 위험했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보좌한 총독, 고문단은 군대를 꾸려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질 모든 악조건을 대비했다. 그런데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본인의 부주의함인지, 아니면 사태 해결을 처리하면서 얻은 확신 때문인지 몰라도 인생 최악의 실수를 했다. 그는 소규모 군사접전에서 로마군이 반로마파 반군을 코너에 몬 상황에서, 아르메니아 측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헤노바르부스의 고견에도 그는 군대를 혹시 모를 상태에서 전투 준비로 만들라고 한 뒤, 협상장에 들어간다. 이 결정은 최악이 됐다.

협상장을 열어 그를 맞이하겠다고 온갖 사탕발림을 한 아르메니아 내 반로마파는 기다렸다는 듯 가이우스 카이사르만 노려 공격했다. 이들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생포하기 보다는 죽일 생각으로 덤벼 들었고, 협상장으로 들어온 요새는 생지옥이 됐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비무장 상태로 소수의 경비병과 함께 분노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표적이 됐다. 그래서 그는 협상을 이유로 협상장에 들어간 순간 로마군의 호위를 받았음에도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매복 후 포위 공격을 당해, 복부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됐다, 이때 황태자를 호위한 경비병도 큰 부상을 입을 정도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암살 시도 사태는 심각했다. 다행히 가이우스는 함께 온 로마군이 서둘러 진압한 까닭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로마군은 반군을 완벽히 제압했고, 이 사건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쉽게 해결될 문제를 본인의 오판으로 망쳤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는 침울해했다. 제 아무리 강력한 로마군이 함께 했다고 해도 더 이상 아르메니아에 머물순 없었다고 판단해, 철군을 명한 것도 이때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이 소란 사태 후 아르메니아 문제를 종결 짓지 못하고 로마군의 호위 속에 문제를 완전히 해결도 못하고 소아시아 해안 도시까지 진군했다.

이 사건은 원로원까지 알려지게 되는데, 이 때 일 하나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방 문제 해결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게 됐다고 확대해석된다. 즉, 그동안 동방전역 문제를 프로콘술(전직집정관) 권한을 가지고 무력시위 방식을 병행하면서 아르메니아를 굴복시킨 뒤 파르티아 측과 협상에서 우위를 유지했음에도, 갑작스러운 암살시도 사건으로 황태자 본인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만 당한 채 탈출한 상황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고문단의 도움으로 어려운 임무를 잘했다고 평가받다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계략에 걸려 그 대단한 위업들이 타격을 입었다는 것과 의사들조차 치료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복부부상을 입은 본인의 몸상태에 괴로워 했다. 따라서 그는 소아시아에서 우울하게 지내면서, 외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티베리우스처럼 모든 것을 내버리고 자연인이 되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아직 어린 외손자 가이우스가 충분히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로 은퇴선언을 한 행동을 평소 투정으로 여기고 자상한 어투로 달랬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서 사람을 보내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로마로 속히 돌아오라고 따뜻한 말이 담긴 편지를 보내며 설득했다. 그럼에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귀국을 거부하고 소수의 수행원들의 호위 속에 소아시아 일대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이탈리아로 귀국할 생각을 가지고 준비했는데 아르메니아에서 매복 후 포위 공격을 당하면서 얻은 부상과 그 상처 후유증은 갈수록 악화됐다. 따라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미처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선박에 오르기도 전에 아나톨리아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부상이 악화돼 쓸쓸히 죽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자신의 후계자가 사망하자 그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굉장히 절망했다. 이에 앞서 둘째 손자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2년 전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향하던 중 뜬금없이 그리스계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머물다가 갑작스레 질병에 걸려 별 공적이나 능력도 증명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따라서 유일한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그동안 그가 공들여 완성한 후계구도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사망선고였다. 하지만 다른 로마 시민들이나 원로원에서는 슬픔에 잠긴 아우구스투스를 위로해줬음에도,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무능함을 드러낸 아우구스투스 외손자의 요절을 추모하지 않았다고 한다.[21]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로마인들 모두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사랑스럽지만 지나치게 버릇이 없고, 조숙하며 거만하다”고 말하면서도 티베리우스처럼 무조건적으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아울러 아우구스투스의 인기는 절대적인 만큼 그 혈육의 죽음 당시, 로마인들은 표면상으로는 추모를 잘만 했고 추모비도 세워줬다. 즉, 가이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희망이자 분신이기 때문에, 능력이나 성격과 별개로 시민들에게 티베리우스에 비해 인기가 꽤 많았던 것인데 인기가 없었다는 건 시오노 나나미의 티베리우스 띄워주기라고 보면 된다. 아우구스투스: 이상하다, 티베리우스랑 드루수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하던데...

3. 평가

공식 풀네임이 법적 할아버지가 되는 카이사르와 똑같고, 기록이나 공식석상에서 부른 이름의 경우에는 조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통칭 칼리굴라)와 거의 똑같은 까닭에 종종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카이사르와 비교하기에는 애당초 도저히 불가능한데다, 살아생전 로마인들에게도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양자라는 타이틀 외에는 그가 무슨 업적을 세웠는지 언급조차 안 됐다. 이는 오늘날 대중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그의 풀네임이 그냥 불릴 때는 "종신독재관 카이사르?"로 인식되고 통칭으로 부르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했을 때조차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칼리굴라가 더 많이 떠오른다고 평가받는 실정이다. 이는 그의 현대식 표기인 가이오 체사레로 검색해도 잘 나타나는데,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더 많이 검색되고 있고 이 사람의 대리석 흉상 역시 '아우구스토의 외손자이자 양자 가이오 체사레'라고 표기될 정도다. 이런 상황은 그와 이름이 거의 비슷한 외조카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인데 외조카는 가이오 체사레 " "칼리골라"라고 정식적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냥 칼리골라 또는 가이오 체사레로 언급되고 있다.

물론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여동생 아그리피나의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경우, 사후 소문들과 너무 빨리 써버린 티베리우스의 유산 문제, 그리고 근위대장을 비롯한 일부 측근들의 배신으로 인해 암살된 탓에 폭군으로 까이고 있다. 하지만 조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오늘날 재평가를 받아 암군 내지 권력 강화 중 실패한 군주 소리를 듣고 있고 당대 사람 중 두 인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유대인 필로, 그리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고문 역할을 한 파테르쿨루스 등이 언급했듯 두 사람을 비교하면 개인적 성격이나 매력, 지적 능력은 조카가 이 사람보다 훨씬 낫다거나, 이 인물이 매력없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평이 더 많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와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함정이지만... 따라서 일각에서는 만약 아우구스투스 사후 이 사람이 뒤를 이었으면, 살아생전 성격적 결함과 평범한 능력 탓에 거의 이름이 비슷한 조카보다 더 짧게 치세가 끝나거나 설령 더 버텼다고 해도 비참하게 끝났을 거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일단 배우자부터가 왕조 구성원들 중 가장 악명이 높은 리빌라였던 것을 감안하면...

반면, 이런 부정적 평가와 별개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태어난 순간부터 제왕교육을 받았던 후계자인 만큼, “버릇없고 조숙하며 거만하다”는 평과 별개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책임감은 확실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비슷한 케이스였던 콤모두스 같은 부류 내지 예술가적 기질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춘 네로 같은 통치자는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그의 태도와 성격적 결함은 분명히 심각했어도 아르메니아 사태 이후 본인 스스로 깨달은 것이 많았고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이 컸던 만큼 외조부의 판단처럼 이른 요절은 아우구스투스 입장 분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분명히 아쉬운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 결점이 분명히 있다는 이유로 비슷한 스타일이었던 친조카 칼리굴라처럼 무조건적으로 주변과 일관된 힘대힘 대결로 일관하다가, 측근들이 원로원과 모종의 협력 후 이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는 불상사를 겪었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가이우스의 후계자 등극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노망이 나 자기 핏줄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욕심에, 함량미달 철부지를 내세웠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후의 제위 후계자들은 가이우스 나이 때 로마에서 제왕수업을 받았지 노회한 정치인에게나 어울리는 막중한 임무를 받고 외지에 파견되지는 않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친 부담이었다는 점은 참작되어야 할 것[22]이다. 개인적으로 핏줄들을 매우 아끼기는 했지만, 권력구도 문제에서는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판단을 일관되게 해온 아우구스투스가 유독 두 손자에게만 팔불출 할아버지처럼 굴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아우구스투스가 두 후계자들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미증유의 제위세습을 위해 급히 실적을 만들어야만 하던 사정이 있었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실패는 개인적 역량부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시대상황으로 인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음도 분명하다. 덧붙이면 티베리우스 대부터의 황실 내 골육상쟁을 생각하면, 정통성에서 흠잡을 데 없던 가이우스가 무사히 황제 자리에 올랐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핏줄로 황위를 잇고자 했던 시도는, 그가 권력의 속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던 만큼 단순한 개인적 욕심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여담으로 삼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조카 가이우스 카이사르 모두 살아생전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불렸음에도 정작 기록에는 조카 칼리굴라가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이는 제정 시대의 역사가 중 관보, 원로원 비문 등을 참고문헌으로 활용한 타키투스나 황색 소문을 죄다 기록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외삼촌과 조카를 모두 가이우스 카이사르 또는 가이우스로 공식 기록한데다 이 문서의 주인공 가이우스 카이사르 관련 내용들은 그냥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인데 요절했다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로마인들이 부자 간, 친척 간 이름이 비슷한 까닭에, 후세 대부분 사람들과 학계는 편의상 이 사람을 보통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하고, 3대 황제였던 조카 가이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그의 어린 시절 애칭을 통칭으로 서술해 부르면서 칼리굴라(아기 군화, 작은 군화), 가이우스 칼리굴라(아기 군화/작은 군화 가이우스)라고 한다.

[1]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선사받은 정식 영예, 칭호. [2] 출생 당시 이름 [3]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양자 입적 된 이후 개명한 이름 [4]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입양 후 이름이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똑같다. [5] 현대 이탈리아 표기에서 부르는 이름 [6] 가이우스 카이사르 조각상과 옥타비아누스 흉상의 차이는 머리 모양과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멋지게 기른 구레나룻 정도인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7] 소 옥타비아는 기원전 11년 사망할 때 이례적으로 막내사위 대 드루수스에게 상주 역할을 일찌감치 맡기면서, 아예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남성의 대표로 로스트라에 오르도록 힘을 썼다. [8] 티베리우스는 재무관, 조영관, 법무관을 거쳐 집정관에 올랐다. 반면 마르켈루스는 요절하기 전 첫 명예로운 경력을 재무관을 건너 뛰고, 조영관을 지내면서 감찰권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대 드루수스는 마르켈루스 전례를 참고하는 형태로, 재무관을 지내면서 조영관 업무와 함께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감찰권 일부를 보좌하는 형태로 첫 공직을 수행했다. 이어 형 티베리우스가 법무관인 점을 편법삼아 대리로 법무관의 입법권을 행사한 다음, 재무관 임기 종료와 동시에 법무관 경력을 지낸 것으로 간주해 전직 법무관이 된 다음, 군 지휘권을 행사해 첫 전투를 이끌었다. [9]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10] 이런 배경 때문에 후일 티베리우스는 서기 30년 이후 사실상 후계자가 칼리굴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정도가 남은 상황에서 이 점이 트라우마가 된 나머지, 두 혈육 모두를 살릴 수 있는 확실한 카드를 쥐고 있음에도 망설였고, 주변에게는 클라우디우스가 경험이 없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남성이 멀쩡히 2명이나 있어서 생각만 했다고 밝힌 선에서 넘기게 됐다고 타키투스는 언급하고 있다. [11] 대부분 로마인들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돌려 쓴 것과 마찬가지의 예인데,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죽은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왔다. 그리고 애초에 그 동생 드루수스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온 것이고, 동생 드루수스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우스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형의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서 따온 것이다... [12]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결정을 바꿀 수 있던 사람은 그의 누나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10대 때부터 친구였던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리비아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건강이 좋지 않은 터라 정치활동을 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유일했다. [13]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티베리우스 본인은 물론이고 아내 빕사니아에게까지 해가 미치기 때문이다. [14] 티베릴루스(Tiberillus)라고 하며, 유아기에 죽었다. [15]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할 때, 눈물을 크게 쏟으면서 손수 서한을 보내 추모를 표한 것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친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충격에 빠진 나머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일찍 세상을 뜬 것을 추모했다. [16]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17] 게다가 티베리우스는 로마인들에게는 베스타 여사제 같다, 후세 역사학자들에게는 청교도 같은 황제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고 청렴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그를 비난할 구실이 마땅치 않았다. [18] 로마인들의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위계질서가 상당히 강조되고, 가부장법이 있을 정도로 권리를 보장받았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황태자와 신하 간의 관계’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봐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친모 율리아와는 법적으로 결혼했던 상태였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었어도 계부이자 의붓외삼촌이었다. 또 티베리우스는 집안어른의 자격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에게 군무 경험을 쌓도록 해준 웃어른이자 엄연히 로도스로 파견된 황제의 공식 대리인 신분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가 황제 대리인으로서 예를 갖췄다고 해도 당대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19] 롤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라이벌이었고 그를 굉장히 싫어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롤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역시 롤리우스를 굉장히 싫어했다. 왜냐하면 롤리우스의 위선적인 태도와 속주민들을 강탈해 막대한 부를 취득한 행동을 굉장히 경멸했기 때문이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태도는 롤리우스가 자살한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는데, 귀국 후 티베리우스는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서 평소 그답지 않게 롤리우스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난했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서 롤리우스의 파렴치한 재산 축적과 위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성토했다. [20] 당시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또 다시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버림받은 상태에서 로마로 귀환이 확정될 티베리우스 측의 고발 및 문제 공론화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따라서 롤리우스 입장에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롤리우스가 음독 자살을 한 이후, 그의 막대한 재산들은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모조리 롤리우스의 손녀에게 상속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롤리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롤리우스 고발 사건을 넘어갔는데, 공식 후계자로 등극하게 된 티베리우스는 롤리우스의 부정한 재산 증식과 약탈에 가까운 착취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맹비난했다. [21]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손자는 살아생전 원로원과 민중 모두에게 진짜 인기와 인망이 없었다. 그 원인에는 두 사람의 지나친 거만함과 매력없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이들의 어머니 대 율리아의 행실 문제 등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 [22]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33세 때 가이우스와 같은 임무를 받아 동방에 파견되었다. 임무는 가이우스보다 잘 수행했으나, 황제의 허락 없이 황제의 사유지인 이집트에 방문하는 큰 실책을 저지르고 시리아 총독과 불화를 겪는 등 이런저런 문제를 겪었다. 당시의 가이우스보다 훨씬 경험이 많았고 인품과 능력 면에서 전반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던 게르마니쿠스에게조차 쉽지 않은 임무였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