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Gnaeus Julius Agricola(40 ~ 93)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활약한 장군, 정치가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칼레도니아( 스코틀랜드)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로마령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잉글랜드, 웨일스)를 지켜낸 장군이며, 로마인 중 최초로 브리튼이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는 로마 제정 중기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장인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사위 타키투스가 그의 전기를 썼고, 그 책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어서 다른 로마인들에 비해 삶 전체가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아그리콜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의 갈리아계 로마인[1]이었다. 그의 양친은 모두 기사계급에 속했으며, 친가는 조부때부터 로마 제국에서 행정관료로 활약해 아버지 율리우스 그라에키누스가 원로원에 들어가면서 제국 지배 계층에 편입됐다.아그리콜라의 아버지는 칼리굴라 시대에 법무관으로 재직했는데, 칼리굴라의 조카뻘 황족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에 대한 처벌 명령을 거부한 일로 인해 처형당했다. 따라서 어린 시절, 그는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성인이 된 뒤, 군에 입대해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이끄는 브리타니아 주둔 제2군단에서 활약하며 브리타니아 여왕 부티카와 전투를 치르고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22살이 되던 해, 로마로 귀환해 같은 해인 62년, 귀족 가문 출신인 도미티아 데키디아나와 결혼했다.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치세 동안 재무관을 시작으로 호민관, 법무관까지 경험하며 출세 가도를 달리고 원로원 계층에 편입됐다. 법무관을 지내던 68년 네로가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어 몰락하고 내전기에 접어들었다. 이때 아그리콜라는 로마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오토 휘하 군단병들에게 살해되고 어머니의 생가가 약탈당하는 비극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오토를 죽인 비텔리우스 대신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다.
당시 혼란을 틈타 반란이 산재하던 브리타니아 속주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베스파시아누스는 브리타니아에서 군경험이 풍부한 아그리콜라를 브리타니아 주둔 제20군단장으로 임명해 파견했다. 브리타니아 속주 파견 당시 아그리콜라는 함께 속주 총독으로 파견된 퀸투스 페테리우스 케리아리스 밑에 있었다. 전임자보다 강경파 총독이었던 케리아리스는 불안한 브리타니아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때 이그리콜라는 그를 도와 브리타니아 일대를 안정시켰고, 그 공로로 75년 파트리키로 편입되는 영예을 얻었다. 동시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아그리콜라를 갈리아 아퀴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다가 77년 로마로 귀환해 보결 집정관으로 뽑혀 집정관까지 경험했다. 같은 해, 자신의 사위로 같은 속주 출신인 타키투스를 맞이했는데, 21세의 타키투스는 아그라콜라의 딸 율리아 아그라콜라와 결혼한 이후 로마 지배 계층에 안착해 원로원에 입성했다.
이후 모두가 잘 아는 대로 그는 브리타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브리타니아 원정 전쟁을 치렀다.( 아그리콜라의 칼레도니아 침공) 이때 그는 칼레도니아인들의 공격을 막아냈으며, 원정 도중 그동안 대륙으로 알려진 브리타니아가 섬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따라서 그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모두 점령해 후환을 없애려 했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소환되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로마로 귀환하면서 개선식의 영예를 수여받았고 동상이 제작돼 전시되는 영광도 선사받았다. 하지만 사위 타키투스의 주장처럼 아그리콜라는 도미티아누스로부터 로마 귀환 이후 어떠한 군사적 요직도 받지 못했고, 나중에 제안받은 자리도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자리였다. 아그리콜라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93년 53세의 나이에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개인 저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1]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후 갈리아 일대가 로마 제국에 편입된 이래, 카이사르는 이 지역 출신의 지역 유력자들에게 율리우스 씨족명을 하사해 클리엔테스로 삼았다. 따라서 갈리아 출신들 중에 율리우스 씨족명이 들어간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