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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 |
|
이명 |
소 세네카 Seneca the Younger |
출생 | 기원전 4년경 |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코르두바 | |
사망 | 기원후 65년 (향년 68세) |
로마 제국 로마[1] | |
직업 |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희곡 작가 |
가족 | 형제: 갈리오 (노바투스) |
학파 | 스토아 학파 |
[clearfix]
1. 개요
고대 로마의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희곡 작가.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학파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의 폭군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들은 수천년간 라틴어 원전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상당히 수준 높다는 평을 받는다.[2]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공자의 《 논어》가 동양 고전의 표준으로 여겨지듯, 서양 라틴어문화권에서는 세네카의 《도덕 편지 Epistulae morales》와 《대화 Dialogi》가 서양 고전의 표준으로 여겨진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3]의 수도 코르두바에서, 귀족 마르쿠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헬비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네카의 아버지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세네카[4]는 젊은 시절부터 당시 히스파니아 코르두바 지방의 토호이자 지방관으로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의 3대 황제를 보좌했으며 아들에 못지 않은 뛰어난 수사학자였기 때문에 대 세네카(Seneca the elder)라고도 부른다.[5]한편, 어린 세네카는 친한 이모에 의해 어린 시절 교육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 아탈로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소티온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네카가 심한 천식으로 인하여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이모는 세네카를 데리고 남편인 가이우스 갈레리우스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던 이집트로 가서 약 6년간 요양 생활을 보냈다.
31년, 세네카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재무관에 임명되어 원로원에 입성하였으며, 뛰어난 웅변실력으로 금세 원로원과 일반 대중들에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서기 37년,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즉위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세네카에게 갑작스런 위기가 찾아온다. 칼리굴라는 스스로 뛰어난 연설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6] 세네카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연설가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로, 이에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던 세네카를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7]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굴라는 자신의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세네카의 폐병이 진행하는 단계에 있고, 그래서 좋은 시절이 오기도 전에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칼리굴라는 그 진술을 믿을 정도로 그 정보원을 신뢰했고, 그래서 곧 병으로 죽을 세네카에게 굳이 사형판결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세네카의 처형을 취소하고는 그 처벌을 가벼운 벌금형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세네카는 한숨을 돌리고는 바로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41년, 칼리굴라가 죽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로마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세네카는 다시 복권되었다. 하지만 또 다시 시련이 다가왔다. 클라우디우스 세번째 부인 메살리나가 클라우디우스의 관심을 받는 율리아 리빌라를 질투해서, 간통했다는 날조된 명분으로 그녀를 추방시켰는데, 이때 그 간통의 상대자로 지목된 것이 바로 세네카였다. 세네카가 지목된 이유는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유명세가 원로원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편 클라우디우스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메살리나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세네카는 코르시카로 끌려가 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유배가기 몇 주 전 외아들을 잃기까지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Consolationes)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기약없는 유배 생활은 메살리나가 쿠테타 음모로 살해되고 새로이 황제의 부인이 된 아그리피나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연설가인 세네카를 네로의 가정교사로 삼기로 결심하면서 끝이 났다. 세네카는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와 치안관이 되었고, 51년에는 네로의 후견인으로까지 임명되었다.[8] 이런 전폭적인 승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세네카의 명성이 아들 네로에게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아그리피나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대부분의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내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당해 사망했으며, 이제 그녀의 의붓아들 네로가 황제에 오르게 된다.[9] 그리고 당시 17세였던 젊은 네로가 권력을 잡으면서, 세네카는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라는 근위대장[10]과 함께 정치 고문 및 장관으로 임명받았다. 55년에는 마침내 네로로부터 세네카는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의 자리를 수여받게 된다.
그 후 8년 동안 세네카와 부루스는 사실상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그들이 젊은 황제 네로를 통해 통치한 그 기간은 "로마 제국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하고 공정한 정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상보다는 타협과 외교에 기반을 둔 세네카의 정책은 무척 효율적이었다. 세네카는 아그리피나의 손에 막강한 왕권을 부여하는 것은 피하면서 젊은 네로의 넘치는 혈기를 억제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따라서 네로가 세네카의 조언을 따르는 동안, 세네카와 부루스는 그 권력으로 지방 총독의 부패를 쫓아내면서 간접세 인하와 같은 일련의 법적 및 재정적 개혁을 촉진할 수 있었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세네카와 부루스는 상원의원 이상의 어떤 제도적 지위도 보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는 자라면서 조금씩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네로는 은밀하게 세네카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하나둘씩 제거했고, 이후 세네카는 점차 제자 네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58년에는 네로의 고문인 수일리우스가 세네카를 다음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세네카는 고리대금업을 해서 어마무시한 돈을 벌었으며 심지어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도 동침했다는 것이었다. 젊은 고문에 불과한 수일리우스가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네로의 묵인과 허락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최근의 학자들은 수일리우스의 고발이 사실을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심하는 편이다.
59년, 네로는 결국 자신의 연애에까지 과도하게 간섭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여버렸다. 세네카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네로 황제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황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아그리피나의 부정을 비판하는 그 연설을 했던 것이었다. 강요가 있었는지 아니면 로마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대승적 판단이었는지는 세네카 자신만이 알겠지만, 그는 이 연설로 인해 후대 사람들에게 위선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62년, 정치적 동료였던 부루스마저 죽게 되자, 세네카는 로마를 위해서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네로에게 전 재산을 바치면서 공직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했다. 퇴직은 암묵적으로 승인되었지만 재산 환수는 몇 년 후까지 수락되지 않았다. 세네카는 점점 위험해지는 로마 궁정에서 물러나 두 번째 부인인 파울리나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좌절과 도피의 시기에 세네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이전 제자 네로의 강박적인 도착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65년에 세네카는 피소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네카는 그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결국 세네카는 네로로부터 자살을 명령받게 된다. 네로의 명령을 전달하러 백부장이 세네카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세네카는 아내 그리고 2명의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백부장은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전달했다. 세네카는 유언장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세네카는 친구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을 금지당했습니다. 그래서 단 하나 남아 있는 것, 그러나 가장 깨끗한 소유물 ㅡ 나의 '삶의 이미지(imago vitae suae)'를 남기겠습니다. 만약 그대들이 이를 마음 속에 지닌다면, 고결한 소양에게 주어진 명예 속에서 충실한 우정의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11]
이윽고 세네카는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정맥을 칼로 베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자 세네카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독약을 부탁하여 마셨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뜨거운 욕탕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세네카는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죽기 전, 욕탕에서 세네카는 하인들에게 물방울을 뿌리면서, 이 물방울은 ' 제우스에게 바치는 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2] 세네카가 죽은 이후, 세네카의 조언이 사라진 황제 네로는 폭정으로 민심을 급격하게 잃어버렸다. 얼마 가지 않아 원로원의 반란을 마주하고는 68년에 네로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논란
3.1. 악행을 저질렀다?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역사가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 수일리우스가 세네카를 다음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고 기록했다. 세네카가 네로 황제 밑에 들어간 지 불과 4년 만에 이탈리아와 그 외 지방에서 고액의 대출 이자를 부과하여 3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개인 재산을 얻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고발에는 세네카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잤다는 암시와 함께 성적인 부패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일리우스는 횡령으로 조사받고 있는 중이었으며, 결국 세네카에 의해 그의 재산의 절반이 압수되고 추방되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당시 고문에 불과했던 수일리우스가 아그리피나를 모욕했다는 것은, 황제 네로의 묵인과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렇기 때문에 그의 고발은 세네카에 대한 네로 황제의 정치적 공격에서 비롯된 전략적인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며, 이런 까닭에 학자들은 수일리우스의 진술을 대체로 의심하는 편이다.
몇 세대 이후에 로마사를 저술한 디오 카시우스는, 세네카가 영국(브리타니아) 사람들에게 원하지 않는 돈을 강제로 빌려준 뒤에 이자를 받아내기 위해 가혹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 부디카의 난이 일어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했다.[13] 하지만 대니 크루거에 따르면, "세네카가 영국에서 '돈 투기'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디오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한다.[14] 아마도 세네카가 돈 투기를 했다는 일화는 앞의 악의적인 비방이 부디카의 얘기와 합쳐지고 섞이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세네카의 악행은 확실치 않고 추측에 근거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러 다양한 해석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세네카가 그 당시 어마무시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런 부자가 자신이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마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위선이 아니냐는 비판이 이때까지 있어 왔다. 물론 그런 어마무시한 부를 가졌음에도 권력 다툼으로 인해 그의 삶은 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위태로웠으며, 그의 대표작들도 대부분 그런 위태로운 시기에 작성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4. 저술
-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Epistulae morales (ad Lucilium)[15]
- 대화 Dialogi[16]
- 섭리에 관하여 De Providentia
- 현자의 항덕(恒德)에 관하여 De Constantia Sapientis
- 분노에 관하여 I De Ira I
- 분노에 관하여 II De Ira II
- 분노에 관하여 III De Ira III
- 마르키아 여사에게 보내는 위로 De Consolatione ad Marciam
- 행복한 삶에 관하여 De Vita Beata
- 은둔에 관하여 De Otio
- 평상심(平常心)에 관하여 De Tranquillitate Animi
-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De Brevitate Vitae
- 폴뤼비우스에게 보내는 위로 De Consolatione ad Polybium
- 어머니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 De Consolatione ad Helviam
- 관대함에 관하여 De Clementia[17]
- 혜택에 관하여 De Beneficiis[18]
- 자연의 탐구들 Naturales quaestiones[19]
- 비극[20]
- 풍자시
- 호박화 Apocolocyntosis[22]
5. 어록
때로는 사는 것조차 용기 있는 행동이다. [23]
살아 있어라. 그리고 매일을 각각의 삶으로 여겨라. [24]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지배다. [25]
두려움은 원인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26]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자주 고통을 받는다. [27]
지구에서 별까지 가는 편안한 길은 없다. [28]
운명이 허락하는 한, 즐겁게 살아라. [29]
고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것이 최선이다. [30]
운명은 뜻있는 자를 이끌어주고, 반항하는 자는 끌고 간다. [31]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사람이다. [32]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운다. [33]
절망 없이 희망할 것도 아니며, 희망 없이 절망할 것도 아니다. [34]
칼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죽이는 사람의 무기인 것이다. [35]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만큼 사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만큼 산다. [36]
우리가 가진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 [37]
분노에 대한 최고의 치료는 시간을 끄는 것이다. [38]
불은 황금을,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39]
시간이 주어지면 언제나 진실의 날들이 드러난다. [40]
모든 야만성은 약함에서 비롯된다. [41]
세네카 인생론이라는 책에서 세네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앞의 문장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한 말과 비슷하고, 뒤의 문장도 원문에 없는 내용이다. [44]
6. 미디어 믹스에서
- 폭군 네로를 흥미 위주로 다룬 창작물들에서는 타락해가는 네로를 안타까워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도록 여러 차례 권유하다가 결국 네로의 노여움을 사서 처형당하는 비운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작중 화자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입을 통해 사악한 위선자라고 묘사된다.
- 쿠키런: 오븐브레이크에서는 시작하기 전 " 용감한 자가 자유롭다 - 세네카"라는 명언이 등장한다. 단, 해당 명언은 세네카가 직접적으로 말한 문구는 아니고, 영미권에서 세네카의 사상이라고 축약된 문구가 세네카가 한 말로 전해지는 것이다.
7. 여담
-
한 때 세네카로 알려졌던 이 청동상은 원본의 형태가 세네카가 태어나기 전인 기원전 2~3세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는 해당 청동상이 헤시오도스나 아리스토파네스인 것으로 추측된다. #
- 한국에서는 책등을 '세네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뒷면'을 뜻하는 일본어 '세나카(せなか : 背中)'의 잘못된 한글 표기로서, 철학자 세네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 캐나다 토론토에 '세네카 칼리지'가 있는데, 이 대학의 이름도 철학자 세네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대학을 창립한 뉴넘 박사는 대학 이름이 인디언 부족 '세네카 네이션(Seneca First Nation)'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밝혔다.[45]
[1]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4마일 떨어진 교외 별장에서 자살했다. (타키투스 『연대기』 15.60)
[2]
세네카의
라틴어 작품들은
키케로의 작품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저작과 함께 로마 시대 고전 라틴어의 표준으로 여겨져서 중세 시대 고전 라틴어 교육에는 세네카의 저작 원전이 라틴어 교과서로 주로 사용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3]
현재의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
[4]
기록에 따르면 80세가 넘는 나이로 장수했다. 만약 그 아들도 네로에 의해 자결을 명령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만큼 오래 살았을 지도 모른다.
[5]
당시 세네카 가문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세네카가
그리스의 대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로마의 위대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거부(巨富)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6]
칼리굴라는 현란하고 명민한 언변을 자랑했다고 한다. 반면에 칼리굴라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세네카를 '순전히 의뢰(commissiones meras)'받은 웅변이라거나 '석회 없는 모래(harenam esse sine calce)'라며 무시했다. (수에토니우스, 칼리굴라 53.2)
[7]
On the other hand, Lucius Annaeus Seneca, who was superior in wisdom to all the Romans of his day and to many others as well, came near being destroyed, though he had neither done any wrong nor had the appearance of doing so, but merely because he pleaded a case well in the senate while the emperor was present. Gaius ordered him to be put to death, but afterwards let him off because he believed the statement of one of his female associates, to the effect that Seneca had a consumption in an advanced stage and would die before a great while. (Cassius Dio, Roman History 59.19.7-8
#)
[8]
이무렵 공화정 시대부터 유력한 귀족 가문 폼페이우스 가(家) 태생의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재혼했다.
[9]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네카는 훗날 자신의 작품 『호박화 Apocolocyntosis』에서 옛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조롱했다고 한다. 그 내용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나 호박화가 세네카의 실제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세네카는 『대화』「폴뤼비우스에게 보내는 위로」13절에서 클라우디우스를 자비로운 사람으로 칭송하기 때문이다.
[10]
당시 로마 도시 내에서는 근위대를 제외한 군사조직이 활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근위대장은 그야말로 권력의 최고 중심부에 위치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맞게 된다.
[11]
Seneca, nothing daunted, asked for the tablets containing his will. The centurion refusing, he turned to his friends, and called them to witness that "as he was prevented from showing his gratitude for their services, he left them his sole but fairest possession — the image of his life. If they bore it in mind, they would reap the reward of their loyal friendship in the credit accorded to virtuous accomplishments." (Tacitus Annals, 15.62
#)
[12]
그리스에서는 향연이 끝날 때 보호자 제우스에게 헌주(獻酒: 신에게 술을 바침)하는 관례가 있었다. 세네카는 인생의 최후를 향연이 끝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타키투스 『타키투스의 연대기』 박광순 옮김, 파주, 범우, 2005, p.696 주석.)
[13]
"This was one reason for the uprising; another was found in the fact that Seneca, in the hope of receiving a good rate of interest, had lent to the islanders 40,000,000 sesterces that they did not want, and had afterwards called in this loan all at once and had resorted to severe measures in exacting it."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
[14]
It is questionable at this point whether Seneca, ..., is now reclaiming a loan of immense amounts and is acting brashly in doing so. Researchers are still unsure how much credibility should be attached to Dio's statement to Seneca. For Salway, Dio's claim is not to be doubted, since this was a common Roman procedure to appropriate the “state treasure" after the death of a client king. For Kruger, Dio's claim that Seneca could have been involved in any “money speculation” in Britain is not credible. More opinions can be listed at this point, but the research trend is now in the direction that Dio's statement should be regarded with caution. ... Nevertheless, there is no (other) evidence here to support Dio's accusation that Seneca might have been involved in money transactions in Britain. For Dio's literary purposes, clear evidence was probably not necessary either. The suspicion that Seneca, as a philosopher and Stoic, not only had too much money, but was also involved in some dubious dealings, probably persisted into Dio's time. Even if Dio had heard other opinions on the matter, ... this would have deprived his “reporting” of a stylistic basis, namely that of introducing Boudica's speech, which is clearly, as will be seen in a moment, aimed at “discrediting” Nero. (Heiko Kammers, Boudicca as a Literary Figure in Cassius Dio DOI 10.4324/9781003024378-22
#)
[15]
한국에는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로 번역되어 있다. 해당 번역본은 오래전에 번역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의역을 좀 한 것만 빼면, 번역의 질은 괜찮은 수준이다. (적어도 영어 중역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원전 번역을 기반으로 한 의역인 것으로 보인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충분할 정도의 번역이다. 물론, 번역이 생각보다 읽을만한 정도인 것이지, 전공자가 학술적으로 참조할 정도까지의 세밀하고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16]
한국에는 『세네카의 대화』로 원전 번역되어 있다. 번역자는 정암학당 연구자로 한국에서 원전번역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이 책의 '일부분'을 편집해서 '세네카의 인생론', '세네카의 행복론', '화에 대해서', '철학자의 위로' 등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17]
한국에는 『세네카 인생철학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스페인어 중역으로 보인다.
[18]
한국에는 『베풂의 즐거움』으로 번역되어 있다. 3명이 함께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3명 다 전문번역가나 관련 전공자가 아닌 게 특이한 점이다.
[19]
당시의 천문학이나 기상학 등 자연 과학에 대한 내용이 쓰여져 있다. 한국에는 번역된 바 없다.
[20]
세네카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8편이다. 이밖에 "오이테산의 헤라클레스 Hercules Oetaeus"과 "옥타비아 Octavia"가 세네카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구에 따르면 이 두 작품은 다른 작가가 세네카의 이름을 빌려 쓴 작품으로 파악된다.
[21]
"분노한 헤라클레스 Hercules furens"라고 하기도 한다.
[22]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것을 풍자한 시로써, 신격화 대신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모셔야 된다고 풍자하여 '호박화(Apocolocyntosis)'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네카가 지었다고 하는데, 해당 작품이 정말 세네카가 지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23]
원문은 "aliquando enim et vivere fortiter facere 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78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세네카는 젊은 시절 비염에 고통스러워서 충동적으로 자살할 생각을 했으나, 늙으신 아버지를 생각하고는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면서 이 말을 한다. 즉, 죽는 것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는 것이 용감한 것이라는 말이다. 직역하면 "때로는 사는 것도 용감한 행동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24]
원문은 "Vivere et singulos dies singulas vitas puta."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1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미래를 미리 생각하는 것은 공포와 욕망을 불러일으키니, 날마다 자신이 정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하루의 삶을 마치 일생을 보낸 것마냥 완수하라는 뜻. 이러한 사람은 미래에 대한 집착과 비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데, 그렇게 매일매일을 "살아 있어라"는 게 세네카의 의도다.
[25]
원문은 "imperare sibi maximum imperium 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13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인생이라는
공성전에서 용기를 내야 하며 그 용기는 자신을 지배하기 위해 쓰여야 된다고 말하면서, 알렉산더 대왕이 수많은 땅과 민족을 정복했지만 친구를 죽이거나 잃고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탄에 빠졌던 것처럼, 온 세상을 지배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면서 한 말이다.
[26]
원문은 "timendi sit causa nescire." 『자연의 질문들』 6권 3,3절
#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이 책에서
불타는 하늘, 혜성,
가짜 태양, 낮에 나타나는 별 등 놀라운 현상의 원인을 조사하여 그 원인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말을 한다. 직역을 하자면 "두려워 할 것은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다."인데, "두려움의 원인은 무지이다. (Timendi causa est nescire)"로 변형되어 알려져 있기도 하다.
[27]
원문은 "saepius opinione quam re laboramus."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3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
[28]
원문은 "Non est ad astra mollis e terris via." 세네카의 비극인 "헤라클레스"에 나오는 구절로써, 헤라클라스가 지하 세계에 가 있는 동안에, 테베의 왕 뤼코스가 헤라클레스의 아내 메가라와 결혼하려고 협박하면서 "지금 헤라클레스는 지하에 있다"며 압박하자, 메가라가 한 말이다. 즉, 헤라클레스는 사람으로 태어나 온갖 고난을 헤치고 천상(별자리)에 오른 영웅이므로, 지하 세계로부터도 무사하게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
[29]
원문은 "Dum fata sinunt, vivite laeti." 세네카의 비극인 "헤라클레스"에 나오는 구절로써, 권력과 부와 명성과 분노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삶은 짧으니 작은 것에 만족하고 평온한 삶을 누려라면서 하는 말이다.
[30]
원문은 "Optimum est pati quod emendare non possis."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7번째 편지에 나온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 자연의 법칙에 복종해야 된다는 맥락에서 한 말로써, 즉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기 마련이니, 자신의 운명을 비난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흔쾌히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이다.
[31]
원문은 "Ducunt volentem fata, nolentem trahun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7번째 편지에 나온다. 세네카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자 클레안테스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32]
원문은 "Non qui parum habet, sed qui plus cupit, pauper est." 루키우스에 대한 서간집(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2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기쁨이 있는 가난은 훌륭한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말을 하는데,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남의 것을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가 생각하는 부의 한도는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채워질수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33]
원문은 "homines dum docent discun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7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대중들의 생각에 무작정 따르지 말고 그렇다고 대중을 적대해서도 안 된다면서, 사귐에 있어서 신중해야 되고, 만약 누군가를 사귄다면 나 자신을 좀더 향상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면서 그 이유로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직역은 "사람들은 가르치는 한, 배운다." 의역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배운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34]
원문은 "nec speraveris sine desperatione nec desperaveris sine spe."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4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에 따르면 절망과 희망은 함께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만' 있으면 미래가 불행해진다.
[35]
원문은 "Quemadmoeum gladis nemeinum occidit, occidentis telum 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87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앞뒤 문장은 다음과 같다. "(부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각자의 무지함이나 외부의 나쁜 의도가 해를 끼치는 것이다. (마치) '칼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이며, (단지) 죽이는 사람의 무기인 것'처럼." 이 말은 세네카의 의견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주장(부가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이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주장)'을 세네카가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사실, 세네카는 부에 대해서는 포세이도니오스의 생각을 따르는데, 그에 의하면 부는 모든 악의 원인이지만, 그것은 부 자체가 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을 일으키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것이다. 또한, (부는) 영혼에 위대함과 자신감, 안도감을 주지 않고, 반대로 자만심과 오만, 거만을 낳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이다. 해당 문장은 의역해서 "검은 살인자가 아니다. 그저 살인자의 손에 들린 도구였을 뿐이다."라는 번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6]
원문은 "sapiens vivet quantum debet, non quantum pot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70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현자는 인생의 질을 생각해야지 양을 생각할 것은 아니며, 나쁜 방식의 삶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 K. 롤링은 이 말을 변형해서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문제는 얼마나 긴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것인가이다. (As is a tale, so is life: not how long it is, but how good it is, is what matters.)"
[37]
원문은 "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mus. Satis longa vita." 『대화』「인생의 짧음에 관하여」1절에 나오는 말이다.
[38]
원문은 "Maximum remedium irae mora est." 『대화』 「분노에 관하여Ⅱ」 29절에 나온다. "분노를 치료하는 최선의 처방은 시간이다"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라틴어 mora는 단순히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지체', '방해' 등을 의미한다.
[39]
원문은 "Ignis aurum probat, miseria fortes uiros(viros)." 『대화』 「섭리에 관하여」 5절에 나온다. 강건하고 성숙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 역경(불행)은 불가피하다는 의미이다.
[40]
원문은 "Dandum semper est tempus: veritatem dies aperit." 『대화』 「분노에 관하여Ⅱ」 22절에 나온다. 세네카에 따르면, 분노하는 이유는 '불의를 당했다는 생각' 때문인데, 사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점들도 언제나 있으니, 그것이 명백하고 분명한 것들이라고 즉각 분노에 빠져서는 안 되며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41]
원문은 "Omnis enim ex infirmitate feritas est." 『대화』 「행복한 삶에 관하여」 3절에 나온다. 직역하면 "모두 약함에서 야만성이 있기(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자신의 본성에 맞추는 삶일 때 정신이 건강해진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 말을 한다. 즉, 그렇지 않는 삶(자신의 본성에 맞추지 않는 삶)일 때 약해지고, 약해지면 그로부터 야만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2]
The various modes of worship which prevailed in the Roman world were all considered by the people as equally true; by the philosopher as equally false; and by the magistrate as equally useful.
[43]
전문을 다 적으면 이렇다. "최악의 결정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민중을 따르기만 하면 민중과 함께 망하고,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에게 망한다. 진정한 지도자는 민중에게 인기가 없지만 득이 될 정책을 내놓고 부단히 설득한다. 최악의 지도자는 인기 있는 정책만 내놓고, 인기 없지만 정작 필요한 정책은 주저한다."
[44]
해당 책(세네카 인생론)에서 해당 문구의 출처가 「리더쉽에 관하여」라고 하는데, 세네카는 「리더쉽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쓴 적이 없다. 그리고 세네카는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행복한 삶에 대하여』 1,2절에서 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서 살지마라'는 것이지, 해당 문장처럼 '결정을 내려야 된다'거나 '민중을 따라도 망하고 거슬러도 망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7편에서도 "사람이 많다고 따라 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그 많은 사람들과 적대해서도 안 된다"는 비슷한 맥락의 문장이 나오긴 하지만, 이 말도 '진정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로 이어지지, 해당 문장처럼 '민중을 따라도 망하고 안 따라도 망한다'거나 '결정', '인기', '정책' 등의 단어들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영어나 라틴어로도 검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해당 문장은 번역가의 과도한 초월번역 또는 편집자에 의해서 매우 많이 각색된 문장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세네카의 사상과도 어긋나는 문장이다. 즉, 이 말은 세네카가 한 말이 아니다.
[45]
Seneca is named after the Seneca First Nation, though the institution is not located on Seneca territory. When giving an oral history of Seneca’s name in 2012, the institution’s first president, Dr. William Newnham, explained that the original Board of Governors were meeting in Brantford—traditional Seneca territory—at the time they were considering a name for the College.
# The tribe's name has no logical connection with the ancient Roman statesmen Seneca the Elder and Seneca the You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