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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02:26:33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에서 넘어옴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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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 <tablewidth=100%><tablealign=center>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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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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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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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티투스 베스트리키우스 스푸린나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마르티알리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아킬리우스 [Pri]scus 코엘리우스 스파르수스
루키우스 마이키우스 포스투무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페록스 리키니아누스
98년 보결 99년 99년 보결 99년 보결 99년 보결
퀸투스 풀비우스 길로 비티우스 프로쿨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팔마 프론토니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크레티우스 바르바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발레리우스 마그누스 율리아누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페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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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
파일:Seneca-berlinantikensammlung.jpg
이명 소 세네카
Seneca the Younger
출생 기원전 4년경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코르두바
사망 기원후 65년 (향년 68세)
로마 제국 로마[1]
직업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희곡 작가
가족 형제: 갈리오 (노바투스)
학파 스토아 학파

1. 개요2. 생애3. 논란
3.1. 악행을 저질렀다?
4. 저술5. 어록6. 미디어 믹스에서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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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철학자, 연설가, 정치인, 희곡 작가.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학파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폭군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여러 작품들은 수천년간 라틴어 원전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 상당히 수준 높다는 평을 받는다.[2]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공자의 《 논어》가 동양 고전의 표준으로 여겨지듯, 서양 라틴어문화권에서는 세네카의 《도덕 편지 Epistulae morales》와 《대화 Dialogi》가 서양 고전의 표준으로 여겨진다.

2. 생애

로마 제국의 속주인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3]의 수도 코르두바에서, 귀족 마르쿠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헬비아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네카의 아버지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세네카[4]는 젊은 시절부터 당시 히스파니아 코르두바 지방의 토호이자 지방관으로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의 3대 황제를 보좌했으며 아들에 못지 않은 뛰어난 수사학자였기 때문에 대 세네카(Seneca the elder)라고도 부른다.[5]

한편, 어린 세네카는 친한 이모에 의해 어린 시절 교육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 아탈로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소티온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네카가 심한 천식으로 인하여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이모는 세네카를 데리고 남편인 가이우스 갈레리우스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던 이집트로 가서 약 6년간 요양 생활을 보냈다.

31년, 세네카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재무관에 임명되어 원로원에 입성하였으며, 뛰어난 웅변실력으로 금세 원로원과 일반 대중들에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서기 37년,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즉위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세네카에게 갑작스런 위기가 찾아온다. 칼리굴라는 스스로 뛰어난 연설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6] 세네카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연설가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으로, 이에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던 세네카를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7]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굴라는 자신의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세네카의 폐병이 진행하는 단계에 있고, 그래서 좋은 시절이 오기도 전에 죽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칼리굴라는 그 진술을 믿을 정도로 그 정보원을 신뢰했고, 그래서 곧 병으로 죽을 세네카에게 굳이 사형판결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세네카의 처형을 취소하고는 그 처벌을 가벼운 벌금형으로 대신했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세네카는 한숨을 돌리고는 바로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41년, 칼리굴라가 죽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로마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세네카는 다시 복권되었다. 하지만 또 다시 시련이 다가왔다. 클라우디우스 세번째 부인 메살리나가 클라우디우스의 관심을 받는 율리아 리빌라를 질투해서, 간통했다는 날조된 명분으로 그녀를 추방시켰는데, 이때 그 간통의 상대자로 지목된 것이 바로 세네카였다. 세네카가 지목된 이유는 확실하진 않지만 그의 유명세가 원로원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편 클라우디우스에게 독이 될 것이라는 메살리나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세네카는 코르시카로 끌려가 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유배가기 몇 주 전 외아들을 잃기까지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학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Consolationes)이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기약없는 유배 생활은 메살리나가 쿠테타 음모로 살해되고 새로이 황제의 부인이 된 아그리피나가 당시 가장 유명했던 연설가인 세네카를 네로의 가정교사로 삼기로 결심하면서 끝이 났다. 세네카는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와 치안관이 되었고, 51년에는 네로의 후견인으로까지 임명되었다.[8] 이런 전폭적인 승진이 가능했던 이유는 세네카의 명성이 아들 네로에게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아그리피나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대부분의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54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아내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당해 사망했으며, 이제 그녀의 의붓아들 네로가 황제에 오르게 된다.[9] 그리고 당시 17세였던 젊은 네로가 권력을 잡으면서, 세네카는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라는 근위대장[10]과 함께 정치 고문 및 장관으로 임명받았다. 55년에는 마침내 네로로부터 세네카는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의 자리를 수여받게 된다.

그 후 8년 동안 세네카와 부루스는 사실상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그들이 젊은 황제 네로를 통해 통치한 그 기간은 "로마 제국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하고 공정한 정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상보다는 타협과 외교에 기반을 둔 세네카의 정책은 무척 효율적이었다. 세네카는 아그리피나의 손에 막강한 왕권을 부여하는 것은 피하면서 젊은 네로의 넘치는 혈기를 억제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따라서 네로가 세네카의 조언을 따르는 동안, 세네카와 부루스는 그 권력으로 지방 총독의 부패를 쫓아내면서 간접세 인하와 같은 일련의 법적 및 재정적 개혁을 촉진할 수 있었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세네카와 부루스는 상원의원 이상의 어떤 제도적 지위도 보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네로는 자라면서 조금씩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네로는 은밀하게 세네카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하나둘씩 제거했고, 이후 세네카는 점차 제자 네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58년에는 네로의 고문인 수일리우스가 세네카를 다음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세네카는 고리대금업을 해서 어마무시한 돈을 벌었으며 심지어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도 동침했다는 것이었다. 젊은 고문에 불과한 수일리우스가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이렇게 모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네로의 묵인과 허락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최근의 학자들은 수일리우스의 고발이 사실을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심하는 편이다.

59년, 네로는 결국 자신의 연애에까지 과도하게 간섭하는 어머니 아그리피나를 죽여버렸다. 세네카는 그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네로 황제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황제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아그리피나의 부정을 비판하는 그 연설을 했던 것이었다. 강요가 있었는지 아니면 로마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대승적 판단이었는지는 세네카 자신만이 알겠지만, 그는 이 연설로 인해 후대 사람들에게 위선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62년, 정치적 동료였던 부루스마저 죽게 되자, 세네카는 로마를 위해서든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네로에게 전 재산을 바치면서 공직에서 은퇴할 것을 요청했다. 퇴직은 암묵적으로 승인되었지만 재산 환수는 몇 년 후까지 수락되지 않았다. 세네카는 점점 위험해지는 로마 궁정에서 물러나 두 번째 부인인 파울리나와 함께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좌절과 도피의 시기에 세네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를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네카는 이전 제자 네로의 강박적인 도착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65년에 세네카는 피소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네카는 그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음모를 사전에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결국 세네카는 네로로부터 자살을 명령받게 된다. 네로의 명령을 전달하러 백부장이 세네카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세네카는 아내 그리고 2명의 친구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백부장은 세네카에게 자살 명령을 전달했다. 세네카는 유언장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세네카는 친구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방금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을 금지당했습니다. 그래서 단 하나 남아 있는 것, 그러나 가장 깨끗한 소유물 ㅡ 나의 '삶의 이미지(imago vitae suae)'를 남기겠습니다. 만약 그대들이 이를 마음 속에 지닌다면, 고결한 소양에게 주어진 명예 속에서 충실한 우정의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11]

이윽고 세네카는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정맥을 칼로 베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자 세네카는 자신의 주치의에게 독약을 부탁하여 마셨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뜨거운 욕탕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세네카는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죽기 전, 욕탕에서 세네카는 하인들에게 물방울을 뿌리면서, 이 물방울은 ' 제우스에게 바치는 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2] 세네카가 죽은 이후, 세네카의 조언이 사라진 황제 네로는 폭정으로 민심을 급격하게 잃어버렸다. 얼마 가지 않아 원로원의 반란을 마주하고는 68년에 네로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논란

3.1. 악행을 저질렀다?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역사가 타키투스는 원로원 의원 수일리우스가 세네카를 다음과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고 기록했다. 세네카가 네로 황제 밑에 들어간 지 불과 4년 만에 이탈리아와 그 외 지방에서 고액의 대출 이자를 부과하여 3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개인 재산을 얻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고발에는 세네카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와 잤다는 암시와 함께 성적인 부패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일리우스는 횡령으로 조사받고 있는 중이었으며, 결국 세네카에 의해 그의 재산의 절반이 압수되고 추방되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당시 고문에 불과했던 수일리우스가 아그리피나를 모욕했다는 것은, 황제 네로의 묵인과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고발은 세네카에 대한 네로 황제의 정치적 공격에서 비롯된 전략적인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며, 이런 까닭에 학자들은 수일리우스의 진술을 대체로 의심하는 편이다.

몇 세대 이후에 로마사를 저술한 디오 카시우스는, 세네카가 영국(브리타니아) 사람들에게 원하지 않는 돈을 강제로 빌려준 뒤에 이자를 받아내기 위해 가혹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 부디카의 난이 일어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주장했다.[13] 하지만 대니 크루거에 따르면, "세네카가 영국에서 '돈 투기'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디오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한다.[14] 아마도 세네카가 돈 투기를 했다는 일화는 앞의 악의적인 비방이 부디카의 얘기와 합쳐지고 섞이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세네카의 악행은 확실치 않고 추측에 근거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러 다양한 해석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세네카가 그 당시 어마무시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런 부자가 자신이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마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위선이 아니냐는 비판이 이때까지 있어 왔다. 물론 그런 어마무시한 부를 가졌음에도 권력 다툼으로 인해 그의 삶은 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위태로웠으며, 그의 대표작들도 대부분 그런 위태로운 시기에 작성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4. 저술

5. 어록

때로는 사는 것조차 용기 있는 행동이다. [23]
살아 있어라. 그리고 매일을 각각의 삶으로 여겨라. [24]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지배다. [25]
두려움은 원인을 모른다는 데에 있다. [26]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자주 고통을 받는다. [27]
지구에서 별까지 가는 편안한 길은 없다. [28]
운명이 허락하는 한, 즐겁게 살아라. [29]
고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것이 최선이다. [30]
운명은 뜻있는 자를 이끌어주고, 반항하는 자는 끌고 간다. [31]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사람이다. [32]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운다. [33]
절망 없이 희망할 것도 아니며, 희망 없이 절망할 것도 아니다. [34]
칼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죽이는 사람의 무기인 것이다. [35]
지혜로운 사람은 할 수 있는 만큼 사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만큼 산다. [36]
우리가 가진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 [37]
분노에 대한 최고의 치료는 시간을 끄는 것이다. [38]
불은 황금을,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39]
시간이 주어지면 언제나 진실의 날들이 드러난다. [40]
모든 야만성은 약함에서 비롯된다. [41]
종교는 일반인에게는 진리이고, 현자에게는 거짓이며, 권력자에겐 유용하다
이 말은 에드워드 기번의 《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인용된 구절일 가능성이 높다. [42]
최악의 결정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민중을 따르기만 하면 민중과 함께 망하고,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에게 망한다. [43]
세네카 인생론이라는 책에서 세네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앞의 문장은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한 말과 비슷하고, 뒤의 문장도 원문에 없는 내용이다. [44]

6. 미디어 믹스에서

7. 여담


[1]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4마일 떨어진 교외 별장에서 자살했다. (타키투스 『연대기』 15.60) [2] 세네카의 라틴어 작품들은 키케로의 작품들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저작과 함께 로마 시대 고전 라틴어의 표준으로 여겨져서 중세 시대 고전 라틴어 교육에는 세네카의 저작 원전이 라틴어 교과서로 주로 사용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3] 현재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4] 기록에 따르면 80세가 넘는 나이로 장수했다. 만약 그 아들도 네로에 의해 자결을 명령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만큼 오래 살았을 지도 모른다. [5] 당시 세네카 가문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세네카가 그리스의 대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로마의 위대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거부(巨富)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6] 칼리굴라는 현란하고 명민한 언변을 자랑했다고 한다. 반면에 칼리굴라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세네카를 '순전히 의뢰(commissiones meras)'받은 웅변이라거나 '석회 없는 모래(harenam esse sine calce)'라며 무시했다. (수에토니우스, 칼리굴라 53.2) [7] On the other hand, Lucius Annaeus Seneca, who was superior in wisdom to all the Romans of his day and to many others as well, came near being destroyed, though he had neither done any wrong nor had the appearance of doing so, but merely because he pleaded a case well in the senate while the emperor was present. Gaius ordered him to be put to death, but afterwards let him off because he believed the statement of one of his female associates, to the effect that Seneca had a consumption in an advanced stage and would die before a great while. (Cassius Dio, Roman History 59.19.7-8 #) [8] 이무렵 공화정 시대부터 유력한 귀족 가문 폼페이우스 가(家) 태생의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재혼했다. [9]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네카는 훗날 자신의 작품 『호박화 Apocolocyntosis』에서 옛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조롱했다고 한다. 그 내용도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나 호박화가 세네카의 실제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세네카는 『대화』「폴뤼비우스에게 보내는 위로」13절에서 클라우디우스를 자비로운 사람으로 칭송하기 때문이다. [10] 당시 로마 도시 내에서는 근위대를 제외한 군사조직이 활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근위대장은 그야말로 권력의 최고 중심부에 위치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맞게 된다. [11] Seneca, nothing daunted, asked for the tablets containing his will. The centurion refusing, he turned to his friends, and called them to witness that "as he was prevented from showing his gratitude for their services, he left them his sole but fairest possession — the image of his life. If they bore it in mind, they would reap the reward of their loyal friendship in the credit accorded to virtuous accomplishments." (Tacitus Annals, 15.62 #) [12] 그리스에서는 향연이 끝날 때 보호자 제우스에게 헌주(獻酒: 신에게 술을 바침)하는 관례가 있었다. 세네카는 인생의 최후를 향연이 끝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타키투스 『타키투스의 연대기』 박광순 옮김, 파주, 범우, 2005, p.696 주석.) [13] "This was one reason for the uprising; another was found in the fact that Seneca, in the hope of receiving a good rate of interest, had lent to the islanders 40,000,000 sesterces that they did not want, and had afterwards called in this loan all at once and had resorted to severe measures in exacting it."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 [14] It is questionable at this point whether Seneca, ..., is now reclaiming a loan of immense amounts and is acting brashly in doing so. Researchers are still unsure how much credibility should be attached to Dio's statement to Seneca. For Salway, Dio's claim is not to be doubted, since this was a common Roman procedure to appropriate the “state treasure" after the death of a client king. For Kruger, Dio's claim that Seneca could have been involved in any “money speculation” in Britain is not credible. More opinions can be listed at this point, but the research trend is now in the direction that Dio's statement should be regarded with caution. ... Nevertheless, there is no (other) evidence here to support Dio's accusation that Seneca might have been involved in money transactions in Britain. For Dio's literary purposes, clear evidence was probably not necessary either. The suspicion that Seneca, as a philosopher and Stoic, not only had too much money, but was also involved in some dubious dealings, probably persisted into Dio's time. Even if Dio had heard other opinions on the matter, ... this would have deprived his “reporting” of a stylistic basis, namely that of introducing Boudica's speech, which is clearly, as will be seen in a moment, aimed at “discrediting” Nero. (Heiko Kammers, Boudicca as a Literary Figure in Cassius Dio DOI 10.4324/9781003024378-22 #) [15] 한국에는 『세네카 삶의 지혜를 위한 편지』로 번역되어 있다. 해당 번역본은 오래전에 번역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의역을 좀 한 것만 빼면, 번역의 질은 괜찮은 수준이다. (적어도 영어 중역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원전 번역을 기반으로 한 의역인 것으로 보인다.) 책의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충분할 정도의 번역이다. 물론, 번역이 생각보다 읽을만한 정도인 것이지, 전공자가 학술적으로 참조할 정도까지의 세밀하고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16] 한국에는 『세네카의 대화』로 원전 번역되어 있다. 번역자는 정암학당 연구자로 한국에서 원전번역으로 유명한 곳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이 책의 '일부분'을 편집해서 '세네카의 인생론', '세네카의 행복론', '화에 대해서', '철학자의 위로' 등의 책으로 출간하기도 한다. [17] 한국에는 『세네카 인생철학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스페인어 중역으로 보인다. [18] 한국에는 『베풂의 즐거움』으로 번역되어 있다. 3명이 함께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3명 다 전문번역가나 관련 전공자가 아닌 게 특이한 점이다. [19] 당시의 천문학이나 기상학 등 자연 과학에 대한 내용이 쓰여져 있다. 한국에는 번역된 바 없다. [20] 세네카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8편이다. 이밖에 "오이테산의 헤라클레스 Hercules Oetaeus"과 "옥타비아 Octavia"가 세네카의 비극으로 알려져 있으나, 연구에 따르면 이 두 작품은 다른 작가가 세네카의 이름을 빌려 쓴 작품으로 파악된다. [21] "분노한 헤라클레스 Hercules furens"라고 하기도 한다. [22]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것을 풍자한 시로써, 신격화 대신 클라우디우스를 '호박'으로 모셔야 된다고 풍자하여 '호박화(Apocolocyntosis)'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세네카가 지었다고 하는데, 해당 작품이 정말 세네카가 지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다. [23] 원문은 "aliquando enim et vivere fortiter facere 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78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세네카는 젊은 시절 비염에 고통스러워서 충동적으로 자살할 생각을 했으나, 늙으신 아버지를 생각하고는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면서 이 말을 한다. 즉, 죽는 것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는 것이 용감한 것이라는 말이다. 직역하면 "때로는 사는 것도 용감한 행동이기 때문이다."가 된다. [24] 원문은 "Vivere et singulos dies singulas vitas puta."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1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미래를 미리 생각하는 것은 공포와 욕망을 불러일으키니, 날마다 자신이 정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하루의 삶을 마치 일생을 보낸 것마냥 완수하라는 뜻. 이러한 사람은 미래에 대한 집착과 비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로운데, 그렇게 매일매일을 "살아 있어라"는 게 세네카의 의도다. [25] 원문은 "imperare sibi maximum imperium 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13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인생이라는 공성전에서 용기를 내야 하며 그 용기는 자신을 지배하기 위해 쓰여야 된다고 말하면서, 알렉산더 대왕이 수많은 땅과 민족을 정복했지만 친구를 죽이거나 잃고서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비탄에 빠졌던 것처럼, 온 세상을 지배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면서 한 말이다. [26] 원문은 "timendi sit causa nescire." 『자연의 질문들』 6권 3,3절 #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이 책에서 불타는 하늘, 혜성, 가짜 태양, 낮에 나타나는 별 등 놀라운 현상의 원인을 조사하여 그 원인에 대한 지식을 얻으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말을 한다. 직역을 하자면 "두려워 할 것은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다."인데, "두려움의 원인은 무지이다. (Timendi causa est nescire)"로 변형되어 알려져 있기도 하다. [27] 원문은 "saepius opinione quam re laboramus."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3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 [28] 원문은 "Non est ad astra mollis e terris via." 세네카의 비극인 "헤라클레스"에 나오는 구절로써, 헤라클라스가 지하 세계에 가 있는 동안에, 테베의 왕 뤼코스가 헤라클레스의 아내 메가라와 결혼하려고 협박하면서 "지금 헤라클레스는 지하에 있다"며 압박하자, 메가라가 한 말이다. 즉, 헤라클레스는 사람으로 태어나 온갖 고난을 헤치고 천상(별자리)에 오른 영웅이므로, 지하 세계로부터도 무사하게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 [29] 원문은 "Dum fata sinunt, vivite laeti." 세네카의 비극인 "헤라클레스"에 나오는 구절로써, 권력과 부와 명성과 분노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삶은 짧으니 작은 것에 만족하고 평온한 삶을 누려라면서 하는 말이다. [30] 원문은 "Optimum est pati quod emendare non possis."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7번째 편지에 나온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 자연의 법칙에 복종해야 된다는 맥락에서 한 말로써, 즉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기 마련이니, 자신의 운명을 비난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흔쾌히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미이다. [31] 원문은 "Ducunt volentem fata, nolentem trahun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7번째 편지에 나온다. 세네카에 따르면 스토아 철학자 클레안테스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32] 원문은 "Non qui parum habet, sed qui plus cupit, pauper est." 루키우스에 대한 서간집(Epistulae Morales ad Lucilium) 2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기쁨이 있는 가난은 훌륭한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말을 하는데,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남의 것을 더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 그가 생각하는 부의 한도는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채워질수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33] 원문은 "homines dum docent discun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7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는 대중들의 생각에 무작정 따르지 말고 그렇다고 대중을 적대해서도 안 된다면서, 사귐에 있어서 신중해야 되고, 만약 누군가를 사귄다면 나 자신을 좀더 향상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면서 그 이유로 "사람은 가르치면서 배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직역은 "사람들은 가르치는 한, 배운다." 의역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배운다"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34] 원문은 "nec speraveris sine desperatione nec desperaveris sine spe."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104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세네카에 따르면 절망과 희망은 함께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만' 있으면 미래가 불행해진다. [35] 원문은 "Quemadmoeum gladis nemeinum occidit, occidentis telum 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87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앞뒤 문장은 다음과 같다. "(부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각자의 무지함이나 외부의 나쁜 의도가 해를 끼치는 것이다. (마치) '칼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이며, (단지) 죽이는 사람의 무기인 것'처럼." 이 말은 세네카의 의견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주장(부가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이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주장)'을 세네카가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사실, 세네카는 부에 대해서는 포세이도니오스의 생각을 따르는데, 그에 의하면 부는 모든 악의 원인이지만, 그것은 부 자체가 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을 일으키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것이다. 또한, (부는) 영혼에 위대함과 자신감, 안도감을 주지 않고, 반대로 자만심과 오만, 거만을 낳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이다. 해당 문장은 의역해서 "검은 살인자가 아니다. 그저 살인자의 손에 들린 도구였을 뿐이다."라는 번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6] 원문은 "sapiens vivet quantum debet, non quantum potest."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 70번째 편지에 나오는 말로써, 현자는 인생의 질을 생각해야지 양을 생각할 것은 아니며, 나쁜 방식의 삶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 K. 롤링은 이 말을 변형해서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문제는 얼마나 긴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것인가이다. (As is a tale, so is life: not how long it is, but how good it is, is what matters.)" [37] 원문은 "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mus. Satis longa vita." 『대화』「인생의 짧음에 관하여」1절에 나오는 말이다. [38] 원문은 "Maximum remedium irae mora est." 『대화』 「분노에 관하여Ⅱ」 29절에 나온다. "분노를 치료하는 최선의 처방은 시간이다"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라틴어 mora는 단순히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지체', '방해' 등을 의미한다. [39] 원문은 "Ignis aurum probat, miseria fortes uiros(viros)." 『대화』 「섭리에 관하여」 5절에 나온다. 강건하고 성숙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 역경(불행)은 불가피하다는 의미이다. [40] 원문은 "Dandum semper est tempus: veritatem dies aperit." 『대화』 「분노에 관하여Ⅱ」 22절에 나온다. 세네카에 따르면, 분노하는 이유는 '불의를 당했다는 생각' 때문인데, 사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점들도 언제나 있으니, 그것이 명백하고 분명한 것들이라고 즉각 분노에 빠져서는 안 되며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41] 원문은 "Omnis enim ex infirmitate feritas est." 『대화』 「행복한 삶에 관하여」 3절에 나온다. 직역하면 "모두 약함에서 야만성이 있기(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자신의 본성에 맞추는 삶일 때 정신이 건강해진다는 것을 말하면서, 이 말을 한다. 즉, 그렇지 않는 삶(자신의 본성에 맞추지 않는 삶)일 때 약해지고, 약해지면 그로부터 야만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2] The various modes of worship which prevailed in the Roman world were all considered by the people as equally true; by the philosopher as equally false; and by the magistrate as equally useful. [43] 전문을 다 적으면 이렇다. "최악의 결정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민중을 따르기만 하면 민중과 함께 망하고, 민중을 거스르면 민중에게 망한다. 진정한 지도자는 민중에게 인기가 없지만 득이 될 정책을 내놓고 부단히 설득한다. 최악의 지도자는 인기 있는 정책만 내놓고, 인기 없지만 정작 필요한 정책은 주저한다." [44] 해당 책(세네카 인생론)에서 해당 문구의 출처가 「리더쉽에 관하여」라고 하는데, 세네카는 「리더쉽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를 쓴 적이 없다. 그리고 세네카는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행복한 삶에 대하여』 1,2절에서 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서 살지마라'는 것이지, 해당 문장처럼 '결정을 내려야 된다'거나 '민중을 따라도 망하고 거슬러도 망한다'거나 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도덕 편지』7편에서도 "사람이 많다고 따라 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그 많은 사람들과 적대해서도 안 된다"는 비슷한 맥락의 문장이 나오긴 하지만, 이 말도 '진정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로 이어지지, 해당 문장처럼 '민중을 따라도 망하고 안 따라도 망한다'거나 '결정', '인기', '정책' 등의 단어들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영어나 라틴어로도 검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해당 문장은 번역가의 과도한 초월번역 또는 편집자에 의해서 매우 많이 각색된 문장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세네카의 사상과도 어긋나는 문장이다. 즉, 이 말은 세네카가 한 말이 아니다. [45] Seneca is named after the Seneca First Nation, though the institution is not located on Seneca territory. When giving an oral history of Seneca’s name in 2012, the institution’s first president, Dr. William Newnham, explained that the original Board of Governors were meeting in Brantford—traditional Seneca territory—at the time they were considering a name for the College. # The tribe's name has no logical connection with the ancient Roman statesmen Seneca the Elder and Seneca the You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