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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4 00:26:27

드루수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Drusus Caesar
파일:드루수스 카이사르.jpg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Drusus Julius Caesar Germanicus)
생몰년도 서기 8년 ~ 33년
출생지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추정)
사망지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팔라티노 황궁 지하 감옥
지위 로마 황족, 황태자, 임페라토르&프린켑스 상속자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양부)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형제 네로 카이사르(형)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동생)[1], 가이우스 율리우스(동생)[2],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동생)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배우자 아이밀리아 레피다

1. 개요2. 생애
2.1. 부모와 어린 시절2.2. 아버지와 고모부의 죽음2.3. 결혼과 후계자 데뷔2.4. 형과의 경쟁 및 어머니와 형의 몰락2.5. 누명과 지하감옥 수감2.6. 사망
3. 사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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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이자 황태자.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정식 상속자이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였던 게르마니쿠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차남으로,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남자 혈육이었다.

정식 이름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였다. 로마 공문과 티키눔 아치 기둥에 실린 휘는 '드루수스 율리우스 게르마니쿠스'였고, 주화와 약칭 표기에 따른 로마 공식 표기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였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 소 안토니아의 손자였으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친혈육이었던 대 율리아의 외손자로 제3대 황제 칼리굴라의 둘째 형이었으며,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조카였다.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의 외아들이었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훗날 클라우디우스 1세의 딸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결혼하고, 입양되어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제5대 황제였던 네로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남녀 황족들로 네로에게 살해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자녀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이 사람의 사촌이었다.

로마 역사상 최악의 간신이자 권신이었던 세야누스와 공모한 고모 리빌라, 형수이자 친척인 율리아 리비아,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 쓰고 서기 30년 팔라티노 황궁 내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3년 후인 서기 33년에 석방 직전 아사했다.

사후 친동생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른 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묻혔고, 정식으로 신원이 복구되었다.

2. 생애

2.1. 부모와 어린 시절

서기 8년,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둘째 아이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부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몇 안 되는 남자 혈육인데다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한 율리우스 가문(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가문(네로, 풀케르)을 비롯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 받았다.

조부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동생이며 리비아 드루실라 황후의 차남이었던 대 드루수스인데다가, 서기 4년 2월 고모 리빌라의 첫남편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해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차기 황제로 낙점된 것은,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육으로 각종 특권이 일찌감치 보장받은 이유가 되었고, 이런 배경은 그 정통성을 공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본래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사람이지만, 부모 양쪽을 통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었다. 더욱이 조부는 태어나기 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는 소문도 정설처럼 돌았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4년 6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입양되어 출신부터 카이사르 가문 사람 그 자체였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출신 가문 자체부터 정치적, 사회적, 법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 카이사르의 고손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4년, 즉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하기 이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남자 혈육 중 후계자 후보가 된 데다가, 조부인 대 드루수스가 정식 입양되어 차기 황제로 낙점될 상황이었다가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 직전인 29세의 나이에 요절한 집안 배경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집안은, 조부 이래 이탈리아, 갈리아, 저지 게르마니아, 고지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그 혈통적, 사회적 위상이 군대와 민중들의 지지 아래 상당히 공고했고, 이는 훗날 부친인 게르마니쿠스가 죽고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민간과 로마군 병영에 유행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도 그 영향력이 서기 3세기 중반까지 자발적인 지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확한 고향은 미상이다. 형인 네로 카이사르, 남동생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율리우스(이그노투스 카이사르), 가이우스(칼리굴라)처럼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것은 확실하다. 다만 태어난 도시가 형처럼 로마인지, 동생 칼리굴라처럼 안티움(오늘날의 이탈리아 안치오) 태생인지는 불명확하다. 5살이던 서기 13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레누스 강(오늘날의 라인 강) 유역의 로마군 사령관이 되자, 어머니 및 형제•자매와 함께 게르마니아와 갈리아 일대에서 성장했다. 이때 그는 과거 소년 시절의 아버지, 고모 리빌라, 삼촌 클라우디우스 1세처럼 겨울에는 로마로 돌아왔다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아버지가 거주한 로마군 기지에서 성장했다.

그러다가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임페라토르, 프린켑스 지위 등을 단독 승계한 큰할아버지이자 법적 할아버지인 티베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로 등극했다.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붕어 소식이 전해지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원로원 대표단에게 고인 추모에 대한 위로를 받고 잠시 로마로 귀환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군대의 항명도 벌어지고 게르마니쿠스 추대 요구도 있어,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와 자녀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갈리아의 루그두눔으로 피신했다가, 잠시 로마에서 살았다. 그러나 상황이 수습되고 이 해에 게르마니쿠스가 레누스 강 일대 로마군 사령관에 재임명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어머니 아그리피나, 그리고 형제•자매는 다시 게르마니아 내 로마군 기지로 돌아와 성장했다.

2.2. 아버지와 고모부의 죽음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정식 개선식을 거행한 뒤,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제국 동부인 아시아 전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게르마니쿠스는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일대 및 푸닉(페니키아) 일부 속주 재편을 담당하는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서기 19년 10월 10일, 게르마니쿠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요절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요절할 당시, 그가 시리아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갈등을 빚었고, 드루수스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 역시 피소의 아내와 앙숙이라서 '피소 사건'으로 불리는 일대 파장이 벌어졌다.

서기 19년 10월,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생전 유언장과 차기 계승 구도 및 제왕 교육 훈련 등을 토대로, 자신의 친아들이었던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를 사실상의 황태자로 원로원에 소개했다. 이때 소 드루수스는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형제에겐 고모부이면서도, 법적으로는 작은아버지였다. 그래서 소 드루수스는 자신의 5촌 조카이자 법률상 조카인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형제 중 곧 성년식을 할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원로원에 데리고 간 뒤, 게르마니쿠스의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었음을 알리고 원로원에게 이들을 따뜻하게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와 소 드루수스는 겉으로는 정적이자 경쟁자로 인식되었지만, 사촌 간의 우애는 친형제 이상으로 대단했고, 게르마니쿠스 못지 않게 소 드루수스 역시 인격적으로 매우 휼륭했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이런 소 드루수스의 보호 아래, 성장할 수 있었다. 허나 서기 23년, 근위대장으로 서서히 야심을 드러내며 제위를 차지할 야망에 부푼 세야누스와 공모한 고모 리빌라에게 소 드루수스가 독살되었다. 당시에는 과로 등으로 인한 급사로 알려졌지만,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3년 뒤인, 서기 26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는 듯이 카프레아이 섬(오늘날의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 마련한 별궁에 들어가 은둔 통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2.3. 결혼과 후계자 데뷔

티베리우스 황제는 아들인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기 전후로 아들에게 보호를 받았던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 중 성년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곧 성년식을 치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새로운 공식 후견인이 되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인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원로원에 데리고 가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데뷔시켰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 네로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5년 먼저 공직을 경험할 특권 등을 똑같이 하사받았으며, 형과 함께 각종 특권들을 선사받았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조치들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들은 후계자로 적합한 인물들이어서 원로원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러다가 친아들인 소 드루수스가 급사한 직후인 23년에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을 후계자로 못박은 후, 24년엔 아예 친동생이었던 대 드루수스의 손자이자 자신의 법적인 손자가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위해 이들의 건강을 소원하고 비는 제사를 지내면서 이들 형제를 홍보하기에 이르렀다. 티베리우스는 비록 친아들을 잃었지만, 그 아들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에게 제위를 물려줄 것이라는 걸 확고히 보여준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티베리우스의 행보는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있었던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25년 세야누스는 일단 황제가 될 혈통과 명분을 얻기 위해, 죽은 소 드루수스의 미망인이자 아우구스투스 황가의 피를 잇고 있었던 리빌라와 재혼할 뜻을 밝혔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며 리빌라와의 재혼은 씨알도 안 먹힐, 분수에 맞지 않을 일이라고 통보했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방법을 바꿔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가문 출신의 남성 황족들의 씨를 완전히 말리는 방식으로 자신이 황제에 오르겠다고 결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에게 준 권한을 이용해 고발과 날조, 협박 등을 통해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로 했다.

이런 가운데, 서기 29년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먼 친척으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딸(혹은 조카뻘 친척)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허나 이 결혼은 타키투스가 기록했듯이,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큰 이유 없이 남편인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냉대한데다가 서기 36년 그녀가 결혼 직전부터 자신의 남자 노예와 불륜 관계였기 때문에, 이는 참담한 비극이 되고 말았다.

2.4. 형과의 경쟁 및 어머니와 형의 몰락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형제 중 티베리우스 황제의 뒤를 이을 차기 황제에 더 가까운 쪽은 네로 카이사르였다. 그는 소 드루수스의 딸이었던 율리아 리비아와 결혼해,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자이며 양자이면서도, 손녀사위였고, 그 뒤에는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의 적극적인 후원도 있었다. 반면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과 비교해,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후순위 후계자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친형제는 하나 뿐인 황제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는데, 이런 틈바구니를 노린 세야누스와, 친아들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위에 앉힐 생각 및 대 아그리피나 및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던 고모 리빌라로 인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카이사르 가문의 비극으로 연결되었다.

세야누스와 리빌라는 불륜관계였고, 이들에게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과 3형제의 어머니인 대 아그리피나는 반드시 제거할 1순위였다. 따라서 세야누스와 리빌라는 형보다 뛰어난 재능과 평판에도 불구하고, 뒤쳐진 입장인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편드는 척하면서 황실 내 갈등을 조장했다. 그 결과, 네로 카이사르를 앞세운 대 아그리피나파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앞세운 세야누스, 리빌라, 티베리우스 파벌 간의 갈등이 터지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티베리우스 황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도 네로 카이사르가 누린, 남보다 5년 앞서 모든 공직에 오를 수 있는 특권을 내렸다. 이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장남과 차남을 원로원에 직접 데리고 갔을 때 약속한 것을 그대로 이행한 행동이었는데, 이런 행보는 티베리우스라면 이를 가는 대 아그리피나가 네로 카이사르를 더 밀어주는 이유가 되었다.

세야누스는 리빌라와 함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고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갈라친 후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향해 반역 혐의를 내세우며 총공격을 퍼부었다. 근위대는 세야누스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여러 증거를 들이밀며 모자를 반역죄로 고발했다. 이때 원로원에서는 황족인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 모자에 대한 처벌 문제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정은 티베리우스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대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되었다.

대 아그리피나는 아직까지도 남편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피소 부부의 배후가 티베리우스 황제라고 의심해 반티베리우스 파벌까지 만들어 사사건건 대립한데다가 그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눈엣가시였다. 그녀는 시어머니인 소 안토니아와 살아 생전의 소 드루수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장남인 네로 카이사르에게 임페라토르의 직위를 내리지 않을 거라고 매일 같이 주장했다. 또 황제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가 악습에 빠졌다고 주장하거나, 소 안토니아가 티베리우스를 옹호하는 것에 말대꾸를 하면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 티베리우스의 인내심을 한계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여기에 더해 대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남편이 요절한 이후부터는 과거와 달리 우울하고 쉽게 화를 잘 내던 터라 그녀를 미워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거기다가 세야누스의 정부가 된 리빌라, 남편 네로 카이사르와 사이가 최악인 율리아 리비아까지 합세해 쪼아대니, 대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는 반역죄를 공모하거나 실행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몰락하고 말았다.

어찌되었든 세야누스의 음모대로 대 아그리피나 모자는 포파이우스 사비누스와 엮여 '위험하고 거대한 음모'라는 이름 아래 고발되었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어머니와 형은 국가의 적이 된 뒤 서로 다른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때 어머니와 함께 억울하게 반역죄로 엮여 폰티아로 추방된 네로 카이사르는 얼마 후 유배지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31년 10월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 일찌감치 스스로 곡기를 끊어서 자살했다. 그런데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유배된 폰티아로 사형집행인이 가자 네로 카이사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2.5. 누명과 지하감옥 수감

이렇게 네로 카이사르를 끝장낸 이후, 세야누스는 이용가치가 다한 게르마니쿠스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위조해 제거했다.

물론 이 사건을 벌이기 전,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대 드루수스 일가의 보호막 역할을 할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와 함께 그는 더 큰 신망을 얻고, 성공하기 위해 티베리우스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일을 공작을 벌여 현실로 만들어 주었다.

디오에 따르면,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고자, 황제가 자신의 전처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원로원 의원 갈루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을 알고 갈루스 숙청 작전을 세워 갈루스와 그 친구인 시리아쿠스를 모두 제거했다. 갈루스는 평소 세야누스의 야심을 알고, 그를 위험인물로 규정했는데, 세야누스는 이를 교묘하게 바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남편 갈루스가 마치 티베리우스와 세야누스의 우정을 경멸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카프리 섬의 별궁 안에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애당초 갈루스가 자신의 전처와 재혼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따라서 세야누스의 요구에 따라 갈루스 숙청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그렇지 않는 듯이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이를 신호로 갈루스 제거를 위해, 세야누스는 갈루스를 로마에 있었던 티베리우스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해, 우정의 잔을 나눠 마시며 서약한 다음, 그를 체포해 원로원 안에서 유죄를 내리고 집정관을 보내 결박한 후 사형에 처했다. 이때 갈루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반역죄 개정으로, 불경죄가 명확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때 티베리우스는 본인은 전혀 이 사건을 몰랐다는 듯 서한을 보내면서,
"로마 시민은 정당하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얻고, 판결은 그 내막을 알아야 한다."
고 의견을 밝히며 갈루스를 보호해주겠다면서 그를 카프리 섬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갈루스를 황제 옆으로 보내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갈루스는 아주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서 카프리 섬으로 끌려가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디오는 이 사건에 관해 티베리우스가 악감정을 가지고 연적 갈루스에게 혹독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갈루스는 노예와 변호사 등도 대동하지 못한채 포승줄에 묶여 두 눈은 가려진 채, 로마에서 나폴리를 거쳐 카프리 섬까지 음식도,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더 끔찍한 것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인지 세야누스의 지시인지는 몰라도, 갈루스가 죽으려고 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음식과 물이 제공되어 숨이 붙은 채 티베리우스 앞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갈루스가 죽은 뒤, 로마에 있었던 시리아쿠스도 세야누스의 공작과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의해
"너는 반역자 갈루스와 친구이며, 불경죄를 방치했다."
는 이유로 똑같이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갈루스와 시리아쿠스가 죽자 세야누스는 보호막이 완전히 사라진,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제거할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 네로 카이사르와 함께 처음으로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지내면서 평가가 괜찮았기에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나름 우호적이더라도 반드시 제거할 대상이었다. 이때 세야누스는 겉으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차기 황제로 밀어주며 그를 가장 후원하는 측근인 척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를 독살했을 때와 똑같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었다. 당시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이들 부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소 드루수스보다 훨씬 쉬웠는데, 우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부주의한 여성인데다가 남편을 너무 쉽게 배신했다. 따라서 그녀는 남편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끝내 자신의 남편이 30년에 억울하게 체포될 당시, 음모임을 알고 있음에도 뻔뻔하게 남편을 공격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능력이 출중하고, 본인에게 순종적인 종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인격적, 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벌일 리 없다며 판결을 유보시켰다. 더욱이 여러 기록상으로 알 수 있듯이,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차기 황제로 생각해 세야누스 일당과 원로원에게 선을 넘지 말 것을 여러 번에 걸쳐 드러냈다. 그러나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무조건 제거하려 했고, 리빌라 역시 자신의 아들이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이유로 물러서지 않았다. 따라서 세야누스 일파는 티베리우스를 완전히 속이기 위해, 유능하나 잔혹한 수사관 카시우스 세베루스를 포섭했다. 그리고 유배를 간 네로 카이사르의 아내인 율리아 리비아(리빌라의 딸)를 속여(혹은 함께) 동맹을 맺었다. 남편과 사이가 데면데면해도, 어머니 리빌라가 나쁜 말을 하고 율리아 리비아 역시 세야누스가 카이사르 가문에게 헌신한다고 생각해 공격해대니,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남은 희망마저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역죄로 고발되어 체포 직후 위조된 증거물이 확실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강제로 황궁의 지하실에 유폐되었다.

2.6. 사망

서기 30년부터 3년 동안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안의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훗날 그가 죽은 뒤, 원로원과 티베리우스 황제가 읽고 충격을 받은 수감 일기가 이때 작성되었는데,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어떻게든 버티다가 세야누스가 몰락한 31년에서 2년이나 지난 서기 33년, 아사한 뒤 시체가 되어 지하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드루수스는 마지막 9일 동안 더할 나위 없이 형편없는 참담한 식사만 받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다가 침대요 속에 있는 짚까지 씹어가며 버티다가 굶어 죽었다.

세야누스를 몰락시키는 작전을 세우면서, 만일을 위해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석방시켜 군 지휘권까지 주려고 했던 티베리우스는, 뒤늦게야 자신의 후계자이며 동생의 혈육이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어 나오자 크게 절망했다. 노황제는 세야누스에 대한 원한으로 벤데타를 하고 있었던 터라, 드루수스 카이사르 석방 명령을 내리기 전부터 생사여부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며느리(대 아그리피나) 및 두 손자(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화해하고 싶어했던 터라, 서기 31년 네로 카이사르가 자살을 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크게 절망한 상태였다.

설상가상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인해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파렴치한 정욕과 증오에 사로 잡혀 적개심에 찼다는 언행으로 가득차 있었던 터라, 이를 알게 된 황제의 분노를 키웠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은 채 발견되자, 그 조사가 진행되었고 이때 세야누스 일당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감옥 관리가 소홀해져, 음식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드루수스가 자신의 침대 매트리스인 짚을 뜯어먹다가 죽은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는 일대파장을 일으켰다. 그래서 자신의 결정이 늦어졌다는 자책과 함께 감옥 관리 소홀로 인해 친혈육을 잃게 된 티베리우스 황제는 관련 인물들을 모조리 기소해 죽여버릴 정도로 분노를 표출했다. 더욱이 분노한 황제는 드루수스가 적은 일기 내용을 모두에게 공개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안에는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쓴 그가 남긴 분노, 적개심, 억울함이 담겨 있어 이를 들은 원로원은 크게 침통해하고 죄인이 된 양 부끄러워했다.

이렇게 되니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의 후반은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이는 원로원과 민중들도 비슷했다. 석방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거리에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티베리우스가 있는 카프리 별궁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나폴리 인근에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허나 드루수스는 이미 참혹하게 죽은 뒤였고, 원로원 회의에서는 드루수스의 수감 일기 내용이 공개되었다. 일기의 내용을 들은 원로원과 이를 전달받아 읽은 황제는 크게 침통해했다. 그래서 은둔 중인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 사건 이후, 손자의 일기장을 전체 공개토록 한 다음, 자신의 친혈육이 음식 한 입이라도 얻어 먹기 위해 비굴하게 백인대장과 노예에게 간청한 것을 원로원에게 직접 내보이면서 그들부터 죽여버리겠다고 일갈했다. 이미 아티우스와 디디무스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엄격한 조사를 한 다음, 보고서까지 제출한 뒤 원로원 앞에서 백인대장 아티우스가 낭독했으니 원로원 중 일부는 반발한다는 차원에서 시끄럽게 굴었다.

그렇지만 이 시간 동안 근위대 병사와 티베리우스의 측근들은 원로원 의원의 이름과 그들의 언행을 모두 기록해, 아직 색출되지 않은 세야누스파와 반(反)황제파 명단을 확인 중이었다. 그래서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일기장 공개 및 보고서 낭독 직후, 티베리우스 황제의 서한장이 공개되었을 때 원로원은 뒤늦게야 티베리우스가 어떤 생각으로 이 모든 것을 공개했는지 깨닫고 벌벌 떨었다. 노쇠한 티베리우스는 온 몸의 힘을 모아, 그 증오심을 서한장의 글귀 하나하나에 표현했다. 이어 다음과 같은 서한장을 보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죽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혈육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선전포고했다.
백인대장 아티우스와 해방 노예 디디무스가 각기 카이사르에게 제출한 보고서 속에서, 방을 떠나려 할 때마다 드루수스를 때리거나 위협한 노예의 이름이 하나하나 열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백인대장은 냉혹함으로 가득 찬 말을 늘어놓으며, 드루수스가 죽어가며 남긴 몇 마디를 잘했다는 듯이 덧붙이고 있었다. (중략) 확실히 원로원 의원들은 차마 듣고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끄럽게 굴며 낭독을 방해하고 있었다. 허나 실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전율이 그들의 마음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타키투스, 《연대기》

이 서한장의 발표 직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건이 재조사되었다. 낭독을 마친 아티우스는 근위대장 마크로를 비롯해 소방대장, 경비대장, 집정관, 법무관, 호민관을 차례로 만나 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에 법무관과 호민관은 황제의 고소장을 받은 뒤 원로원 내 황제파와 함께 고발을 진행했다. 그 사이, 근위대는 이날의 분위기를 티베리우스에게 제출했고, 티베리우스는 이를 토대로 불손한 언행을 하거나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낭독을 방해한 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자 등을 모조리 살생부에 올려 이들도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서기 33년부터 티베리우스의 치세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인해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와 똑같이 전개되었다. 눈만 뜨면 원로원 의원과 그 가족들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재판을 거쳐 줄줄이 유죄를 받았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은 겁에 질렸다. 드루수스를 조롱한 노예들은 그 주변 인물들까지 모조리 제거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계속되었다.

세야누스와 공모한 혐의로 기소되어 감옥에 있었던 죄수들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모두 참수되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학살당한 시체가 겹겹이 가로놓였으며, 유명인과 무명인을 불문하고 남녀노소 모두 참수된 다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그 시체 수습까지 금지해, 감시 병력을 세워놓고 그들의 유족이나 친구들의 접근도 막았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시기부터 티베리우스는 서기 31년 네로 카이사르가 누명을 쓰고 추방되었다가, 자살했다는 사실에도 침통해하면서, 세야누스 일당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은 두 혈육을 기리는 듯 학살당한 시신들을 모조리 테베레 강에 던지게 하고, 썩을 때까지 방치하도록 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이어진 그 직계에 대한 향수가 대단한 민중들도 비슷해, 그들은 티베리우스가 정찰병을 보내 감시하지 않더라도 세야누스 잔당과 그 가족들의 시신조차 손 대지 않고 매장조차 해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죽은 고모 리빌라도 마찬가지라서 그녀는 원로원의 만장일치 의결 이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서기 36년,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위증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녀가 세야누스와 불륜을 저지른 후 공모한 사실과, 결혼 초부터 자신의 노예 및 주치의와 불륜을 벌인 것까지 드러났다. 따라서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대역죄로 사형이 언도된 남성들처럼 스스로 손목의 혈관을 자르고 고통스럽게 자살하는 방식으로 처형당했고 그 시체는 버려졌다. 이는 생존해 있었던 카시우스 세베루스도 비슷해, 그는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반역죄로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고 외딴 섬으로 영구 추방되었다. 당연한 말인데, 그가 남긴 수사학 저서들은 압류당했고, 가족들도 연좌제로 묶여 모조리 처벌받았다.

3. 사후 복권

서기 33년에 사망하기 이전인 서기 31년 10월 이후, 사실상 신원에 대한 복구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황족의 지위를 되찾은 것은, 세야누스 일당의 음모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동생 칼리굴라와 숙부인 클라우디우스 1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였다.

칼리굴라는 서기 37년 원로원으로부터 티베리우스 유언장과 달리, 단독 황제로 승인된 직후 죽은 어머니와 두 형을 정식 신원 복구한 다음, 이들의 시신을 정식 장례를 거쳐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정중히 모셨다. 이어서 그는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 형제의 동상 건립과 추모식을 담당하는 책임자에 임명했다. 아울러 칼리굴라는 죽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몰락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추방되었다가 추방지에서 죽은 카시우스 세베루스의 모든 저서를 금서로 영구 지정하고, 남은 일당들의 저서들도 모두 금서로 지정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의 시대에도 이어졌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인 칼리굴라가 41년 1월에 암살된 직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업적과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재홍보하면서, 자신의 조카들이 겪은 비극이 불충한 이들이 벌인 현직 황제 암살로 다시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 이탈리아 주민, 로마군과 장병 가족들의 큰 지지를 받아 왕조 존속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리빌라의 아들이자 티베리우스의 손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중병에서의 회복 직후 살해된 이유와 클라우디우스 시대 당시 벌어진 율리아 리비아 처형, 네로 시대의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반역사건도, 그 내면에는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1] 풀네임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유년기때 병으로 요절. [2] 영아기 때 요절. 이름이 정확하지 않고, 남자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8일 전후로 요절해, 보통 이그노투스 카이사르로 불린다. [3] 자신을 우월화하면서 '도미누스'라는 표현을 사용케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베리우스는 말년의 공포정치 중 분노의 일갈을 서한에 보내면서도 늘 원로원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