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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51:41

이필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李弼濟
(1825~1871)

조선 말기의 인물. 이필제의 난의 주도자. 이종원의 아들, 이원규의 손자, 안씨 조이 소생. 외조부는 안규묵.

2. 생애

충청남도 홍성(洪城)인 홍주(洪州) 출신으로 향반(鄕班 시골 양반)이며, 생애 초기부터 여러 차례 이름을 바꿨다.

처음에 홍주에 살 때는 이름이 근수(根洙)였다가 필제로 바꿨고 과거 시험을 치러 무과에 급제하기도 했지만, 벼슬자리가 부족해 선달로 지냈다. 공주에 머물다가 진천으로 옮겨 살면서 이홍(李弘)으로 바꿨으며, 1863년에는 동학에 입교했고 주지(朱趾)로 바꿨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서양인들에게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조선인들의 두려움이 커지자[1], 1천의 군사를 내어 나라를 삼킨 뒤 청나라와 일본 영토를 전부 조선 땅으로 만든 다음 유럽도 박살 내겠다는 허무맹랑한 천하 정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당연히 주변인들도 이런 주장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으나, 망국에 치달은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이다 보니 결국 그의 사상에 동조한 세력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1869년 4월에 진천에서 북으로 중원을 정벌한다는 뜻을 내세워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가 친척의 밀고로 발각되었고, 이 당시에는 김창정(金滄艇) 또는 창석(滄石)으로 바꿨다고 한다. 진주, 거창 등지에서 봉기를 준비하면서 주성칠(朱成七), 주성필(朱性必) 등으로 바꿨으며, 12월에 남해 죽도로 가서 군기를 탈취하고 섬의 백성들을 동원해 통영, 고성, 김해를 거쳐 육지로 가서 한양으로 향할 계획을 시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1870년 7월에는 남해현으로 가서 관청의 재물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워 하동 나루에서 남해도 죽도로 건너가려다가 의심받자 계획을 중단시켰다.

1871년 2월에는 최시형과 접촉해 교조 최제우 신원을 돕겠다는 등 동학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으며, 이 시기에는 이제발(李濟潑)로 바꿨고 3월 10일에 영해의 관아를 공격해 점령했다가 12일에 관군이 온다는 소식으로 인해 단양으로 도망쳤다. 진명숙(秦明叔)으로 바꾸고 봉기를 시도해 7월 5일에 문경의 조령관을 빼앗아 조정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을 통해 한양을 공격하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수상한 모의를 한다고 신고하면서 8월 2일에 체포되었다가 12월 23일에 처형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1991년 영화 " 개벽"에선 원로배우 김기주씨가 분장했고, 특유의 강한 인상을 보여주었다. 동학을 믿는 동인들을 이끌어 사악한 자들만 벌을 내리자면서 교주인 해율을 설득해 허락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의미한 살인[2], 강간[3] 그리고 방화[4]까지 저지르면서 동학이 사악한 집단일란 것을 못박아 버리게 만든다.[5]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에서 단역 조연으로 등장한다. 조선이 개화하고 국력이 강해지자 북벌을 주장하며 청 공사관을 습격하는데, 이를 들은 고종 김귀남 옹은 한국전쟁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대노한다. 온화한 노인인 귀남옹이 이처럼 화를 낸 건 작중 단 두 번뿐이며, 이필제의 이런 말을 듣고 '군대를 안 다녀 와서 사람이 덜 되었다'고 생각하고 징병제를 도입해 버린다. 본인도 군대에 끌려가 고생한 건 물론이고 징병제 도입의 원흉으로 푸짐하게 욕을 먹자, 전역 후 이름을 바꾸고는 복무지인 길림에 눌러 살았다고 한다. 이 때 어찌나 욕을 먹었는지 한 번 실수로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는 '신미년 필제 같다'라는 속담이 생길 지경이었으며, 귀남옹이 격노한 일이 와전되어 귀남옹이 필제에게 벼루를 집어던졌다와 같은 소문이 떠돌게 된다. 대체역사 갤러리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귀남 옹이 이필제의 머리에 화로를 던졌다, 혹은 이필제를 화로 집어던졌다는 등의 드립을 치기도 한다.
[1] 왜냐하면 불과 6년 전인 1860년 조선의 바로 이웃 나라인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서구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가 쳐들어와 한바탕 약탈과 파괴를 저지른 아편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에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와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한양의 백성들이 프랑스 군대가 혹시 한양까지 쳐들어올까 봐 앞다투어 산골로 피난을 떠나는 바람에 한동안 한강의 나루터가 피난민들로 꽉 막히고 강을 건너는 배를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2] 관청에 일하는 포졸들 살해 [3] 관청에 있던 여자들 강간 [4] 관청에 일하는 포졸들의 집에 처들어가서 살해 후 집에 불을 질러버림, 그 과정에 어린 처자식까지 사망 [5] 동학파들 딴엔 탐관오리와 그 동조자들을 처단하려는 목적이엇겠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들이었고 하룻밤 사이에 집이 풍비박산+마을 사람들까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니 반발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