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안학수 본인, (우)안학수의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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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前 하사이자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2. 생애
1943년 경 경상북도 포항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이는 당시 베트남 파병이 끝나고 열린 개선식에서 정부가 국군 포로는 한 명도 없다고 발표했다가 안케패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유종철 일병이 일주일 후 귀국하면서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 일병 외에 더 이상 포로는 없다고 다시 선언한 상황이었기에 정권 입장에서 안학수는 무조건 월북자여야 했던 것이다.
그의 납북 후 가족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달고 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1]
1976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연락부 365군부대 대좌 김용규의 증언에 따르면 안학수는 1975년에 순안초대소에서 조사받으면서 고문을 당했으며 북부 국경에서 탈북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사형에 처해져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고 한다.
3. 사후
군사정권은 그가 이미 숨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그의 가족을 사찰하고 괴롭혔다. 사찰이 끝난 건 노태우를 끝으로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시작된 1993년이 되어서였다. 십수년을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지독하게 괴롭힌 셈이다.[2]이후에 묻힐 뻔한 사실이 어느 전화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는데 2008년 5월에 동생인 안용수 집에 한 통의 전화가 왔고 자신을 외교부 출입기자라고만 밝힌 익명의 제보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외교 및 정보기관 문건들이 대거 풀렸는데, 그 문서들 중에서 안학수 하사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는 문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다. 출처
그래서 정보공개 청구로 문건들을 입수한 결과 군부와 외교부, 중정, 청와대 모두 안학수가 월북이 아닌 납북당했다는 것을 인식했으면서도 월북으로 조작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가족들을 끈질기게 괴롭혀 온 보안사에선 이미 1975년경에 평양에서 총살됐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황이였다.
2009년 4월, 통일부 산하의 납북피해자지원단 심사위원회에서 그가 납북자로 정정되어 마침내 명예가 회복되었다.
2009년 9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 당국에 ‘재북가족 안학수’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지만 “확인 불가능”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김용규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이미 죽은 지 30년이 넘었고, 결정적으로 월북자로 선전했던 사람이 탈북을 시도하다 처형됐다는 것은 정권에 해가 될 수 있으니 관련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2011년 7월,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되었다.
2022년 3월 31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 3 22화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2022년 8월 21일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도 언급되었다.
4. 참고 자료
2014년 보도된 한겨례 기사2014년 보도된 YTN 뉴스
2015년 보도된 시사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