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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17:37:14

박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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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소태산 박중빈
1916~1943
2대~4대
정산 송규
1943~1962
5대~10대
대산 김대거
1962~1994
11~12대
좌산 이광정
1994~2006
13대~14대
경산 장응철
2006~2018
15대
전산 김주원
2018~2024
16대
왕산 성도종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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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대각여래위
소태산
박중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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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24. 5. 7 동시 추존

<colbgcolor=#ffc224> 원불교 대종사
박중빈
朴重彬 | Park Joongbin
파일:소태산 박중빈 대종사.jpg
출생 <colbgcolor=#fff,#121212> 1891년 5월 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
대각[1] 1916년 4월 28일
사망 1943년 6월 1일 (향년 52세)
법호 소태산(少太山)
재임기간 1916년 4월 28일 ~ 1943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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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224><colcolor=#221f20> 본관 밀양 박씨
아명 진섭
처화(處化)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과 구도 과정2.2. 깨달음을 얻다2.3. 교단의 시작2.4. 사망
3. 법문4. 제자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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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대종사 게송

나는 시루가 아니라 솥이오. 솥에서 산 사람이란 말이오.[2]
소태산 평전
원불교의 창시자이자 대종사. 호는 소태산이다.

2. 생애

파일:external/www.wonnews.co.kr/105031_20694_327.jpg
원불교에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일생 10가지 장면(십상)을 표현한 그림

2.1. 어린 시절과 구도 과정

소태산 박중빈은 1891년 오늘날의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농촌 마을의 흔한 평민 출신. 밀양 박씨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진섭, 청년 시절 이름은 처화이다.

7세 즈음부터 세상의 이치를 궁금해 하기 시작하여 여러 의문들을 가졌고 어른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묻기를 좋아하는 등 궁금증이 많은 아이였다. 10세 때 서당 훈장이 "나는 담력이 강해서 하늘이 무너져도 안 놀란다."라고 허세를 부리자 "내가 놀라게 해드리겠다."라고 장담하더니 훈장 아들에게 불장난을 가르쳐서 마당 솔잎더미에 불을 붙였다. 훈장이 옷을 오줌통에 적셔가며 투혼을 발휘한 끝에 별 피해 없이 불길을 잡았지만, 이 때문에 그는 서당 다니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3] 이걸 본 당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찬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장차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라고 비방하기도 했다.

11세에는 친척들이 선산에서 조상에게 제사하기 전에 산신에게 먼저 제사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는데 산신이 크게 신령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신이 지금껏 궁금한 점을 산신을 만나 물어보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 매일 마을 뒷산 삼밭재에 올라 산신에게 기도를 하였다. 기도할 때 쓰기 위해 가는 길에 산과일을 따가서 기도를 드렸는데 겨울에는 산에서 딸 과일이 없으니 집에 있는 과일을 가져갔다. 그러다가 어머니에게 걸렸으나 단순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하는 것임을 보고는 이후에는 오히려 과일을 챙겨주게 된다. 나중에 아버지도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 역시 아들의 진지함을 보고는 도와주었다.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올렸으나 산신을 만나지 못했고 이번엔 시간대를 밤으로 바꿔서 기도를 하기도 하며 약 5년 동안 매일 산신에게 기도하였으나 산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세에 부모님의 뜻에 따라 같은 면에 살던 양하운이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결혼 후 16세에 처가집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고대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도사를 만나서 소원을 이루는 것을 보고 존재 여부도 알 수 없는 산신 대신 도사를 찾아다니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후 소태산은 지리산 노고단에 새, 뱀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을 찾아갔으나 그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 뒤 법성포에서 행색이 추레한 걸인이 제갈량의 시를 읊어대는 것을 보고 범상치 않다 생각해서 그 걸인을 집으로 데려와서 3일간 함께 하였는데 진짜 그냥 걸인일 뿐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도사를 찾아다니다가 지리산 천왕봉에 20년간 수도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번엔 그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에게 소 한마리를 주면 자신의 도를 알려주겠다고 하자 소태산은 먼저 뭔가를 직접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 자칭 도사가 방안에서 계속 주문을 외우면서 한참동안 뭔가를 했는데 잘 안됐는지 "이 집에 문제가 있다"는 핑계를 대며 "혹시 이 집 주변에 초상난 집이나 출산한 집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이 죽고 태어나는건 당연히 일어나는 일인데 어느 동네인들 그런 집이 없을리가 없으니 말이 안되는 소리였고 결국 이 사람은 새벽에 도망갔다.

나중에는 불갑사 선운사에 찾아갔다. 소태산은 그 곳에서 사람들이 불상 앞에서 온갖 공경을 표하고 소원을 비는 것을 보며 불상에 뭔가 영험함이 있는가 생각하여 사람들이 없을 때 불상의 따귀를 때렸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제 불상 따귀를 때렸으니 뭔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잠에서 깨어나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불상은 영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소태산은 배유지[4]라는 기독교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교회에도 가보았는데 절에서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2. 깨달음을 얻다

그러다가 20세 되던 1910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의 생계 문제도 생기게 되었다. 구도와 생계를 동시에 해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어 도사 만날 생각은 접고 이 때 귀영바위 옆에서 주막 장사를 시작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주막 장사를 접은 뒤에 임자도의 타리 섬에서 민어 파시[5] 장사를 했다. 당시 그 섬에는 민어잡이 배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 배의 어부들을 상대로 식량, 생필품을 파는 일이었다.

여기서 큰 돈을 벌어서 가족의 생계 문제를 해결하였고 소태산은 장사를 접고 다시 영광으로 돌아와 노루목에 있는 집과 고창 연화봉 중턱에 있는 오두막 등에서 수행을 계속 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시로 입정 삼매에 들었다. 25세 무렵에는 몸이 쇠약해져서 온 몸에 종기가 나고 피골이 상접하여 남들이 보기에는 거의 폐인처럼 보여서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도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26세인 1916년 음력 3월 26일(양력 4월 28일) 새벽, 노루목 집에서 선정에 들던 중 깨달음을 얻으며 그 동안의 의심이 풀리고 정신이 맑아졌다. 원불교에서 '원불교 열린날'이자 '우리 모두의 공동생일'로 경축하는 대각개교절이 바로 이 날이다. 아침이 밝은 뒤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으려고 나서자 그 모습을 본 가족들도 놀라며 기뻐했다.

소태산은 정신이 맑아진 이 날에 대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청풍월상시 만상자연명(淸風月上時 萬象自然明, 맑은 바람이 불고 둥근 달이 떠오르니 삼라만상이 자연히 밝아지도다)"

그는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웃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불교 동학, 유교, 도교, 기독교의 경전들을 구해서 열람하였는데 그 후 "내가 안 바는 옛 성인들이 먼저 알았구나"라고 하면서 그 중에서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제일이며 석가모니는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였다.

그리고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 본다면 모든 일이 은연 중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라고 하며 불법을 주체로 삼아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도 제창하였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불법을 바탕으로 새 교단을 건설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원불교는 그래서 불교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6]
세계의 모든 종교도 그 근본되는 원리는 본래 하나이나, 교문을 별립하여 오랫동안 제도와 방편을 달리하여 온 만큼 교파들 사이에 서로 융통을 보지 못한 일이 없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다 모든 종교와 종파의 근본 원리를 알지 못하는 소치라 이 어찌 제불제성의 본의시리요.

과거의 불교는 그 제도가 출세간(出世間)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하여 조직이 되었는지라, 세간 생활하는 일반 사람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으므로, 누구나 불교의 참다운 신자가 되기로 하면 세간 생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며 직업 까지라도 불고하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되고 보면 아무리 불법이 좋다 할지라도 너른 세상의 많은 생령이 다 불은(佛恩)을 입기 어려울지라, 이 어찌 원만한 대도라 하리요.
정전 제1 총서편 제2장 교법의 총설
석가모니 부처에게 연원을 대고도 새 교단을 만든 것은 당시의 불교가 불법이라는 훌륭한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법을 공부하려면 세상 일도 가정도 버리고 산에 들어가야만 했고, 승려가 아닌 불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돈을 시주하고 불상 앞에 기도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대종사는 이것에 비판적이었다.

1916년 당시에는 강일순의 증산 교파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대종사는 이를 방편으로 사람들을 모은 후 자신의 깨달음을 가르쳤다. 40여명의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들과 수개월을 왕래했는데[7] 이들 대부분이 일시적인 허영심으로 모인 사람들이라서 그 중 진실한 사람 8명을 선택하였다.

2.3. 교단의 시작

불법의 생활화를 표방하는 종교답게 대종사와 제자들이 맨 처음 모여서 한 일은 경제적 자립기반을 갖추는 것이었다. 원불교라는 명칭은 대종사의 사후에 정해진 이름이고 최초의 이름은 '저축조합'이었다. 대종사는 저축조합을 창설한 후 "우리가 앞으로 세상을 위해서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는 공부할 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허례허식 폐지, 금연, 금주를 하여 그 남은 돈을 저축하게 하였다.

그렇게 모은 돈과 대종사의 사재를 처분한 돈, 이웃 마을 부자에게 빌린 돈을 합쳐서 을 샀다. 이때가 1917년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숯 가격이 폭등하여 불과 1여년만에 큰 이윤을 남겼다. 그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큰 공사를 벌이는데, 바닷물을 둑으로 막아 물을 퍼내고 논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하려고 생각해도 보통 스케일이 아닌 일인데, 시골 사람 9명이서 일을 벌렸으니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미쳤다'라는 것이었다. 그 간척사업의 결과가 정관평이다.

공사가 끝날 때쯤 경북 성주에서 구도생활을 하던 송도군(정산 송규 종사)이 9번째 제자로 합류한다. 이렇게 9명을 원불교에서는 구인제자라 부른다.

1919년 7월 대종사는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라고 물었고 구인 제자들은 그러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약속한 날 한 명도 빠짐 없이 모여 단도를 꺼내놓고 결심을 담아 종이에 사무여한이라는 글을 쓰고 인주 없이 지장을 찍었는데 조금 있자 핏빛으로 지장 9개가 드러났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일이 거의 없는 원불교 경전에서 드물게 초자연적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다.

그러자 대종사는 자결하러 기도 장소로 가던 제자들을 불러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아무리 힘들어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온갖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제자들에게 법명을 주며 그대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원불교에서 쓰는 법명의 시작이다.

1919년 10월에 대종사는 모임의 이름을 저축조합에서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으로 바꿨다. 이후 대종사는 변산으로 거처를 옮겨 교리를 짜기 시작한다. 원불교의 상징인 동그라미 일원상을 처음으로 그린 것도 이 때다.[8]

1924년에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에서 기성조합을 빼고 그냥 '불법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에 원불교 중앙총부를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원불교 중앙총부는 지금도 익산에 있다.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
도산 안창호[9], 대종사를 만나서. #

이후 1943년 열반에 이르기까지 익산 총부를 중심으로 서울, 부산, 금강산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새로운 제자들을 만나고 포교활동에 힘썼다. 직접적인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시기이다보니 이런 단체나 모임은 항상 감시의 대상이었고 압박을 많이 받았다. 특히 안창호의 방문 이후로 더 심해졌다. 실제로 도산 안창호가 대종사를 방문하고 간 이후에 익산 관내 3번째 주재소인 북일주재소가 원불교 중앙총부 구내에 설치되어 일제 순사가 총부에 상주했다. #

2.4. 사망

파일:external/www.won.or.kr/1337328768445_img.gif

대종사는 식사 후 복통을 호소하며 투병하였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윽고 1943년 6월 1일에 5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죽음을 미리 직감하고 말년에 정전 편수를 서두르며 제자들에게 "먼 길 떠날 것이다." 하며 여러 번 언질을 주었지만 다들 진짜 멀리 수양하러 간다고만 생각했지 이 세상을 떠난다고는 짐작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로 갈수록 일제의 압박이 심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종교단체들은 친일종교(불교계열의 경우 황도불교화)가 되든지 아니면 탄압속에서 사멸되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불법연구회라고 별 수가 없던 상황에서 대종사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일제의 관심이 불법연구회에서 떠나게 되었다.[10] 그 후 소태산 대종사를 이어 정산 송규가 2대 종법사가 되었는데 일제가 1944년 말, 1945년 초에 들어서는 불법연구회를 완전히 황도불교화 시키기 위해 압박 수위를 다시 높여왔다. 그러자 정산 송규 종사는 1945년 6월 지방 교당 시찰을 명분으로 익산 총부를 떠나 부산으로 갔고, 일제는 황도불교화 서류 수속을 끝내고 정산 종사의 마지막 인준을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예 총부에 새로 달 간판까지 만들어 가지고 나타나 정산 종사의 익산 복귀를 독촉했다. 그러나 정산 종사는 이래저래 시간을 끌며 복귀를 계속 늦췄고 8월 15일에 다행히 광복을 맞으면서 불법연구회는 위험에서 벗어났다.

1948년에 정산 종사가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선포하면서 불법연구회에서 원불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 법문

박중빈 대종사가 직접 만든 교리는 95쪽 분량이며 정전이란 이름으로 편찬되어 있다. 대종사의 평상시 법문들은 대종사 사후에 제자들이 엮어 대종경으로 출간했으며, 총 15품 547장이다. 정전과 대종경을 합쳐서 원불교 교전이라고 하며, 여기에 불조요경과 정산종사법어, 성가, 교사 등 원불교의 모든 교서를 합친 것을 원불교 전서라고 한다.

교전은 원불교 교당에서 구할 수도 있고 앱스토어에서 누구나 무료어플로 다운받을 수도 있다.

4.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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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를 초기에 모셨던 일산 이재철, 이산 이순순, 삼산 김기천, 사산 오창건, 오산 박세철, 육산 박동국, 칠산 유건, 팔산 김광선, 정산 송규, 이렇게 9명을 구인제자라 부른다. 정산 송규를 제외하면 모두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대체로 대종사보다 나이가 많았다.[11]

파일:external/www.wbsi.kr/15224467_1_1487343012765.jpg

모두 남자인 구인제자와 별도로 여성 구인제자가 있다. 남성 구인제자처럼 극초창기 제자들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원불교가 자리잡아 가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일타원(一陀圓) 박사시화[12], 이타원 장적조[13], 삼타원 최도화[14], 사타원 이원화[15], 오타원 이청춘[16], 육타원 이동진화[17], 칠타원 정세월[18], 팔타원 황정신행[19], 구타원 이공주[20]가 이에 해당한다.[21] 시골 촌부들이었던 남성 구인제자들과 달리 여성 구인제자들은 당시 부잣집 부인이거나 잘나가는 신여성들이 많았다.

대종사 사후 법통은 수제자인 정산 송규 종사로 이어졌으며, 이후 3대 대산 김대거 종사, 4대 좌산 이광정 종사, 5대 경산 장응철 종사 등으로 이어졌다.

5. 여담



[1] 큰 깨달음. 원불교에서는 박중빈 대종사의 탄생일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이 날을 대각개교절로 경축한다. [2] 가끔씩 떡을 찌는 데 쓰는 시루가 아니라 민초들이 매일 밥을 하는 데 쓰는 솥이라는 의미. 또한 발음을 살짝 뭉뚱그리면 소태산이 된다. [3] 실제로 한문을 공부한 총 기간이 2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나중에 경전을 집필할 때에도 한문에 능한 제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4] 영어 이름 유진 벨 [5] 바다에서 열리는 어시장 [6] 원불교는 새 불교를 표방하므로, 교단으로서는 서로 다르나 내적인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공식 입장. 천주교와 개신교 차이 정도로 생각해도 80%쯤은 맞다. 애당초 원불교는 불교 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가 형식은 다르지만 근본진리는 다르지 않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다 같이 힘을 합치자." 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굳이 불교냐 아니냐 하는 구분이 소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7] 이 중에는 강일순의 증산 교파를 신앙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증산 교파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종교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면 여기를 거쳐가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증산도 등에서는 원불교가 증산 계열 종교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8] 대종사가 벽지에 처음으로 그린 일원상 원본은 6.25 전쟁 당시 유실되었다고 한다. [9] 안창호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35년 2월 위장병으로 가출옥, 그 뒤로 2년 동안 전국 각지를 순회하였는데, 호남에 온 것은 1936년 2월의 일이었다. [10] 창시자가 죽었으니 당연히 망할 줄 알았다고 한다. [11] 심지어 박동국은 친동생, 유건은 외삼촌이다. 과거의 성인들이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포교활동을 했음과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새로운 땅에 구세주처럼 짠 나타나지 않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에게 스승으로 인정받았다는 면이 특기할 만 한다. [12] (1867~1946) 전북 남원에서 출생. 일찍이 부군을 사별한후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으며 1924년에 서울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뵙고 동생 박공명선 (朴孔明善)과 함께 귀의하였다. 이후로 전국 각처로 돌아다니며 방물장수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고 교단 창립에 헌신하였다. [13] (1878∼1960) 경남 통영에서 출생. 일찍이 강증산교의 신자가 되었다가 1921년에 소태산 대종사에 귀의하였다. 나중에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으며 교단 초기에 박사시화, 최도화와 함께 교직없는 교역자로서 교화에 큰 활동을 하였다. [14] (1883~1954) 전북 진안에서 출생.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동학사·화엄사 등에서 화주 노릇을 하였다가 1922년에 진안 만덕산에서 송규를 만나 입교했다. [15] (1884~1964) 전남 영광에서 출생. 소태산 대종사가 22세경부터 26세에 대각을 이루기까지 정성을 다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으며 소태산의 대각 후에는 영산에 주재하면서 영산교당 창설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나중에는 영광지방의 교세 발전과 교도 관리에도 힘썼다. [16] (1886~1955) 본명은 화춘(化春)이며 전북 전주에서 출생. 1924년에 최도화의 인도로 입교하여 교단 창립에 전 재산을 바쳤으며 나중에 전주교당의 창립주로 수행하였다. 1934년부터 20여년간 봉직하였다 [17] (1893~1968) 본명은 경수(慶洙)이며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24년 3월에 박사시화의 인도로 서울에서 입교한후에 같은 해 5월에는 만덕산 초선회에 참석하여 소태산 대종사를 처음 만났다. 신앙심이 투철하여 서울 창신동에 가옥을 매입하여 가옥·가산·대지를 모두 서울교당 창설에 희사하였다. 그후 1933년에 본격적으로 출가하여 전라북도 익산 총부 금강원에서 거주하면서 교단의 어머니 역할을 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18] (1896∼1977). 전북 김제에서 출생. 1923년에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 뵙고 귀의하였다. 1932년부터 출가하여 대종사에 대해서 지극한 심성을 가졌으며 익산 총부건설과 교단 창립 발전에 헌신하였다. [19] (1900~2004) 전쟁고아 907명을 피난시킨 '고아들의 어머니'이자 한국보육원의 설립자로, 속명인 황온순으로 더 유명하다.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에 원불교에 귀의하였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전문교육을 받은 신지식여성으로 사회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한 때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도 전개한바 있다. 원불교 교단에서는 대호법 제1호가 되었고 교육사업에 까지 투신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전개하여서 8·15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 여성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 (1896~1991) 본명은 경자(慶子)이며 서울 출생. 1924년에 박공명선의 인도로 입교하고 1930년에 출가하였다. 교단 초창기에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을 가장 많이 기록하여 법낭(法囊)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림에도 정통하여 초창기 교단의 그의 손길이 미쳐 만화보살 (萬化菩薩)이라고도 불리었다. 초기 원불교의 교서의 대부분이 그의 물질적 후원으로 출판되었고 나중에는 원광대학교의 설립에 크기 기여하기도 하였다. 공부면에 있어서도 교단 최초의 특신급 6인 중의 한사람이며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을 잘 계승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21] 대종사의 아내인 양하운은 십타원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때문에 십타원 양하운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십타원 양하운(1890~1973)은 전남 영광에서 출생하여 소태산 대종사와 결혼하여 교단에서 대사모(大師母)라 존칭하고 있으며 교단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내조하고 교단 창립에 공헌하여 정토원훈(淨土元勳)으로 존경을 받고있다. [22] 대종사의 열반이 1943년이기 때문에 현재도 대종사를 직접 모셨던 제자들이 원불교의 원로로 남아있다. [23] 예외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원기 4년(1919)의 백지혈인이다. [24] 법명은 황이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