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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서 사건 霧社事件 Wushe Incident[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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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서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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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30년 10월 27일 ~ 12월 17일 | |
장소 |
일본령 대만
다이추 주 (現 대만 타이중시) |
|
원인 | 일본 제국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 대만 원주민에 대한 박해 | |
교전 세력 | 일본 제국 | 대만 원주민 |
대만총독부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경찰 |
세디크 족 | |
지휘관 |
이시즈카 에이조 대만 총독 이시이 타모츠 대만 총독부경무국장 |
모나 루다오† 장남 타도 모나(達多·莫那)† 차남 바소 모나(巴索·莫那)† |
병력 | 병력 약 2000여명 | 원주민 약 1200명 |
피해규모 |
일본군 22명 사망 일본 경찰 6명 사망 친일 원주민 부족 21명 사망 일본 민간인 134명 사망 친일 대만인 2명 사망 |
약 644명 전사 216명 학살 |
결과 | 봉기의 진압, 지휘자 모나 루다오 사망 | |
영향 | 대만총독부의 통치방식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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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霧社事件(무사사건).[2] Wushe Incident.대만일치시기이던 1930년 대만에서 일어난 대만 원주민들의 항일 봉기.
2. 배경
대만 원주민은 당시 생번(生蕃, 야만인, 원시인등으로 해석)이란 멸칭으로 불리며 차별받고 있었다.[3] 그 전부터 대만 원주민들은 이런저런 항일 봉기를 일으키곤 했었으며 일본은 이들에 대해 동화정책 및 무력진압을 해왔다. 특히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대만 총독을 지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는 아타얄족과 부눈족의 봉기를 진압하고 대만 동해안을 개발하는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원주민들은 이런 과정에서 강제이주당하기도 하였다.3. 우서 사건
봉기의 중심 인물이었던 모나 루다오(가운데)의 모습
1930년 10월 9일 대만 북부의 원주민 중 하나인 세디크족(賽德克族 / Seediq)[4]의 현족장이자 전족장이었던 루도 루헤(魯道·鹿黑 / Rudo Luhe)의 아들 모나 루다오(莫那魯道)는 자신의 장남인 타도 모나의 결혼식을 열고 있었다. 마침 순찰을 돌고 있었던 일본 제국 경찰관 요시무라 카츠미(吉村勝美)에게 신랑이자 모나 루다오의 장남 타도 모나가 포도주를 따른 잔을 받길 권유했다. 원주민 사회에서 족장이 남에게 술을 건네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으나 요시무라는 "야만인이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타도 모나가 계속 잔을 받길 권하자 참다못한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그를 때렸고, 이내 싸움이 일어나 요시무라는 부상당했다. 그 다음 날 모나 루다오는 사과하기 위해 그에게 포도주를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했다.
10월 27일 우서 초등학교에는 육상 경기로 일본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나 루다오가 보복을 위해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 측은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붙은 일부 세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나머지 세디크족에 대한 머리사냥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세디크 족도 11월 4일부터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저항했으나 진압 끝에 세디크 족 중 644명이 죽었다. 3개월간의 봉기 끝에 1930년 12월 17일에 봉기는 진압되고 남은 세디크 족 500여명도 항복했으나 이듬해인 1931년 4월 25일에 일본 측에 붙은 원주민 측에 의해 세디크 족 생존자가 습격당해 216명이 살해 당하기도 하였다. 그 다음달인 5월 6일에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타지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반란 협력자"의 적발도 계속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원래 세디크 족에 대한 대만총독부 통치는 "효율적"이라 평가받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항쟁은 충격을 줬다. 심지어 당시 일본 내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있었을 정도였다. 대만 총독부는 이후 원주민에 대한 정책을 3.1운동 이후 조선에서 그랬듯 비교적 덜 강경하게 바꾸고 생번 같은 멸칭도 고사족(高砂族)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물론 친일 교육 등도 강화되었다(...)2011년 오우삼이 제작한 홍콩자본 합작의 장장 276분의 대만 영화인 세디크 발레(Seediq Bale)에서 다뤄졌다. 국내 개봉명은 '워리어스 레인보우'[5]. 이 영화를 두고 일본 극우들은 중국이 제작한 반일영화라고 악을 썼지만 앞서 밝혔듯이 이 영화는 감독이 홍콩인일 뿐 대만이 제작한 영화다. 일본의 마토메사이트들이 이 영화에 비판적인 대만인의 반응[6] 입맛대로 골라서 친일적인 대만에서는 실패작 취급받는 반일영화로 날조하고 있지만 현실은 대만에서 흥행도 상당히 성공하고 대만 금마장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베니스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 등 메이저한 영화제들에서도 상영되었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 칼 한자루로 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수십명을 베어버리고 소년 하나가 기관총을 람보마냥 난사하는건 어이 없을 수도 있다.
영화는 긴 상영시간으로 인해서 2011년 9월 9일과 9월 30일에 두개의 파트로 나뉘어서 개봉했는데[7] 영화의 1부인 항전의 시작은 도입부에서 보여지는 1895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타이완 침략에서부터 시작하여 약 35년이 경과한후 1930년 10월 27일에 벌어진 우서 지역 민간인 학살사건까지를 다루었고 클라이맥스 부분에 학교에서 벌어진 민간인들의 시신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 뒤에 개봉된 영화의 2부인 최후의 결전에서는 학살사건이 끝나고나서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규합시켜서 본격적인 봉기를 시작한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벌어진 반란의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여러차례의 전투 및 세딕크 족의 족장인 모나 루다오의 장렬한 죽음까지 다루었다.
5. 여담
- 봉기의 주동자였던 모나 루다오는 이전부터 일본 제국에 대한 감정이 있었다. 아끼는 여동생 티와스 루도(狄娃丝·鲁道)가 일본제국이 대만을 차지한지 얼마 안되어 대만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경찰관 콘도 요시자부로(近藤儀三郎)의 현지처가 되었으나 가정을 꾸리기는 커녕 오히려 노리개로 유린당하고 자식들[8]과 함께 버려졌었다. 세디크족의 가족법에 따라 그녀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없었고 다른 부족들도 이와 같은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봉기가 진압된 후 모나 루다오의 유골은 우생학 및 후대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박제가 되어 타이베이 대학 연구실에 전시되었으나, 1973년 수습되어 국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봉기의 방아쇠를 당겼던 일본제국 경찰 요시무라 카츠미는 봉기 첫날 주재소를 습격한 저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 모나 루다오는 아내 바칸 월리스(巴崗·瓦力斯)와 결혼하여 각각 아들 4명과 딸 4명, 이렇게 8명의 자식을 얻었는데 이중 장녀인 마훙 모나(馬紅·莫那)를 제외하곤 나머지 7명의 자식들인 타도 모나(達多·莫那), 바소 모나(巴索·莫那), 이완 모나(依婉·莫那), 파완 모나(巴萬·莫那), 검 모나(姑姆·莫那), 월리스 모나(瓦力斯·莫那), 루비 모나(露比·莫那)는 우서 사건에 참전했다 전사했다.
- 영어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이 항목을 검색하면, 참수당한 머리들이 나오는 혐짤이 나오니 주의바람.
- 이전에도 대만 원주민과 일본군과의 싸움인 모란사 사건이 있었다.
[1]
우서 를 정확히 발음하면 우'셔'에 해당한다.
[2]
참고로 社는 일본 통치하 대만에서 원주민들의 마을단위에 둔 행정구역이다.
[3]
염상섭의 소설인 '
만세전'에도 이 표현이 등장한다.
[4]
2008년까지는 아타얄족(泰雅族 / Atayal)의 일부로 분류되었다.
[5]
한국에서는 무려 4시간 36분이라는 상영시간으로 인해서 너무 긴 나머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처럼 파트를 나눠서 개봉했다.
[6]
정작 그 비판이라는 것도 지나친 민족주의 감성을 비판한 것이지 절대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한 것이 아니다.
[7]
한국과 일본에서는 2014년 2월 20일과 7월 9일에 개봉해였다.
[8]
모나 루다오의 입장에서는 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