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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5:17:25

라다비노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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ডঃ রাধাবিনোদ পাল
राधाविनोद पाल
Radhabinod Pal

1886년 1월 27일 ~ 1967년 1월 10일 (향년 80세)

1. 개요2. 이력3.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의 친일과 비판4. 평가
4.1. 일본
5. 기타

1. 개요

인도 제국의 법조인.

2. 이력

1886년에 인도 벵골 주에서 태어났다. 법률가의 길을 지망하여 캘커타 대학을 졸업하고, 1920년에 법학 석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등록했다. 1924년에 캘커타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캘커타 대학 법학부 교수를 지내면서, 1941년에는 캘커타 고등법원의 판사로 취임했다. 1944년에는 캘커타 대학 총장에 취임하여 1946년까지 재직했다. 태평양 전쟁 찬드라 보스 일본군과 협력한 사실이 인도에 알려지자 이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1946년 도쿄 재판을 관장하는 판사 재판소의 일원으로 인도를 대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46년 5월에 극동국제군사재판 인도 대표 판사로 파견되었다.

재판 초기, 팔은 다른 10개국의 판사들과의 논의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침략전쟁 소급적용에 관하여 홀로 비판적인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는 전쟁범죄와는 별개로 재판소가 A급 전쟁 범죄(평화에 대한 범죄)라는 성문화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을 소급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2년 6개월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의견은 각각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대표하는 베르트 뢸링, 앙리 베르나르 판사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A급 전쟁 범죄로 기소된 피고인의 유죄 판결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이끌어냈다. 팔은 총원 11명의 재판관 중 3명을 자신의 의견과 동조시키는 성과를 이뤄냈으나, 재판소의 규칙에 따라 모든 평결과 선고는 재판장 과반수에 의해 결정되었기에 재판 결과를 뒤집진 못했다.

1950년, 1952년, 1953년에 각각 일본을 방문했다.

3.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의 친일과 비판

팔이 법실증주의의 입장에서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한 것은 나름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역사인식은 굉장히 친일적이었습니다. 이건 팔 판사와 가장 친했던 (도쿄재판의 네덜란드 판사) 뢸링 판사의 증언 입니다. "(팔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아시아인의 아시아", "아시아의 해방"을 외쳤기에 굉장히 감동했었다" (중략) 팔은 이시하라 간지를 숭배하고 있었지만, 도쿄재판의 마지막 재판관으로 선발되는 과정상에선 이것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찬드라 보스는 추축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꾀하려 했었는데, 팔의 생각이 그의 생각과 비슷하였기에 그렇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東京裁判はなにを裁いたのか, p.24.
라다비노드 팔은 일찌감치 일본에 대해 무조건 무죄를 주장할 생각으로 미국, 영국, 중국 등의 연합국 판사들이 작성한 공명정대한 재판운영을 다짐하는 공동선언문유일하게 서명하지 않았다. 팔의 입장에서는 공명정대한 재판이라고 해봤자 '승전국의 패전국 죽이기'였기 때문이다.

라다비노드 팔은 466일의 공판기일 중 109일이나 재판에 결석하였고, 피해자들이 제출한 일본의 전범 행위 증거물도 제대로 살펴보는 경우도 없었고, 무엇보다 재판 자체에 성의없는 행동으로 무책임한 태업 행동을 하였다. 또한 일본군을 아시아를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여겼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보이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모두 부정하는 친일 성향을 드러냈다.

4. 평가

팔의 경우 단순히 승전국에서 패전국을 처벌할 수는 없다는 식의 법리적인 문제만으로 이런 의견을 낸 것으론 볼 수 없다. 대놓고 ' 일본인을 살립시다. 일본이 옳습니다'라고만 안 했을 뿐이지,[5] 본인의 국가나 본인 스스로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일본 편을 들어 줬다고 봐야 한다.

사실 일부 인도인들은 찬드라 보스 등의 사례처럼 대영제국의 인도 식민통치에 반감을 갖고 독립투쟁을 펼치며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논리로 흥아론를 선창한 일본 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반영친일 인도인들조차 정말 맹목적으로 일본 제국을 추종한 건 아니고 자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과 손잡자 정도였다. 본래 찬드라 보스도 일본 대신 나치와 손잡고 독립하려고 했으나 당시 독일이 소련과 전쟁으로 인도를 도울 여력이 없어 일본에 협조한 것이다.[6]

이후 1966년에 팔은 당시 일본 총리이자 이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죽을 뻔했던 기시 노부스케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갔는데 이때 기시 총리로부터 일본 최고의 훈장을 수여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팔은 “일본이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어린이들에게 뒤틀린 죄의식을 심어줘서는 안된다”며 일본을 재차 두둔했다.

또한 팔은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을 같은 아시아인이랍시고 편들어주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반면에 딱히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일본의 문제를 지적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재판 당시의 상황이나 이후 이와 같은 팔의 행보를 보면 팔 본인의 친일 성향과 관계없이 단순히 법리적인 문제만으로 전범 재판에 반대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일각에서는 라다비노드 팔의 이런 행동이 본인을 위한 처세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영 제국이 서서히 쇠퇴하고 있고 간디의 독립운동이 성과를 보이면서 인도의 독립은 빠르든 늦든 오는 것이 확실하였고 당시 영국에 부역한 세법판사 라다비노드 팔은 자신의 부역이미지를 벗고자 당시 영국과 전쟁하였던 일본을 옹호하여 자신의 보신을 누리고자 하였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4.1. 일본

당연히 일본 극우 세력에게는 양심있는 인물로 극찬받고 있으며, 전가의 보도로 일본제국과 당시의 전쟁수행에 관하여 자주 인용되고 있다. 전후 승전국 세계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화두에 오른다.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팔을 귀축영미의 비열한 보복행위에 맞서 유일하게 양심을 지킨 아시아의 의인으로 추앙하는 송덕비를 세우는가 하면 그에게 틈만 나면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하는 등의 속이 뻔히 보이는 짓을 계속 했다.

그리고 그와 찬드라 보스 등의 협력자로 인하여 일본에서 인도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편으로 일본-인도 관계에 소소히 공헌했다. 인도 역시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모한 싱[7],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라다비노드 팔을 찬드라 보스와 함께 인도와 일본 우호의 상징으로 언급한 바 있다. 기사 물론 인도도 외교적 쇼와 립서비스와는 별개로 일제가 벌인 제국주의 침탈과 만행 및 전쟁범죄를 정당화하지는 않으며 역사교과서에도 식민제국으로 가르친다.

야스쿠니 신사 라다비노드 팔 송덕비가 있다. 송덕비에는 법의 정의를 지킨 열렬한 사명감과 고도의 문명사적 식견이라는 찬사가 적혀져 있다. 전시관인 유수칸 안에도 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초상화가 크게 걸려있다. 척 둘러만봐도 이 사람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5. 기타

라다비노드 팔 판사마저 "살면서 이런 또라이들은 처음 본다."며 경악해 하면서 "아무리 지금 만든 법으로 이전에 저지른 전쟁범죄를 처벌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행위일지라도 이 미친놈들은 아니다."라고 사형 판결을 내리게 만든 작자들이 있었으니  다치바나 요시오, 치치지마 식인 사건 참조. 하지만 이 재판이 정말 팔 판사의 재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애초에 다치바나 요시오는 극동군사재판이 아닌 별건의 재판이었고, 다른 전범들이 법정에서 온갖 망언을 해도 무죄를 때린 그가 식인 하나로 유죄를 때릴 인간일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그냥 다치바나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 팔 판사를 끌어들인 낭설일 수 있다.[8]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일본의 전쟁범죄 항목 등에서 승전국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라다비노드 팔이 승자의 보복 운운하며 일본 전범들을 두둔했지만 그 자신도 일본의 전쟁범죄를 비난했다던가, 일본 극우들이 인도까지 가서 라다비노드 팔을 칭찬하며 감사를 표하자 팔의 가족들이 일본 극우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는 등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의 의심스러운 서술이 적혀 있었다. 팔의 가족들이 일본에 항의한 적은 전혀 없으며 그의 아들인 프라샨토 팔은 아베 신조와의 면담 당시 “아버지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니 자랑스럽다. 아버지의 공적은 당연한 것이었고 정당했다.”, '“어떻게 전쟁 범죄에서 한쪽만을 비난하고 다른 편은 옹호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망언을 하며 자랑스러워 했다.

다만 후에 일본에서 군국주의에 경도되지 않은 사학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 라다비노드 팔은 당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간디주의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이고, 독재자 한 명이나 소수의 엘리트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는 파시즘, 나치즘, 일본 제국주의 같이 전체주의 국가관을 지지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했다.[9]

말년에 일본에서 훈장도 수여받고 환호를 받았으나, 세금체납으로 인하여 집을 잃고 곤궁하게 살다가 1967년 1월에 사망하였다.


[1] 당연한 소리겠지만 군인이 아닌 이상, 군인이더라도 대놓고 민간인 학살이 일어날 정도라면 학살 현장에서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은 말 그대로 자살행위다. 비슷하게 타지키스탄 카틴 학살에서 이 장면을 목격한 나무꾼은 수십년간 침묵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자식들에게 학살 장소를 알려주었고 다시 그 자식들이 소련 붕괴 후 이 사실을 폭로했다. 그나마 타지키스탄은 이렇게라도 학살 장소가 알려졌지 다른 소련 가맹국들은 그런 것조차 없다. 그런데 만일 그 나무꾼이 학살자들을 말렸다면 과연 학살 장소가 지금 알려질 수 있었을까? 아예 학살 장소에서 학살되어 함께 시체로 묻혀졌을 것이다. [2] 대학살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결정하는 수뇌부에 생명경시가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그러지 않는다면 무고한 수만 수십만을 죽인단 결정 자체를 못한다.) 그런 그들에게 일개 평범한 일반인이 수만이든 수십만이든 평화시위를 해봤자 죽여야 할 표적 따위에 불과하다. [3] 이미 원폭투하 전부터 일본은 전쟁에서 이길 가망이 전혀 없었지만 나치 독일의 수뇌부가 그랬듯 일본 군부도 국민도 국가도 천황도 아닌 자신들이 항복하여 재판대에 세워질 시간을 아주 잠깐 늦추기 위해서 그런 현실을 싹 외면하고 끝까지 발악했다. 아닌말로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7월 말에 항복했어도 원폭 투하는 없었고 심지어 소련의 만주 공세가 8월에 시작되었기에 오늘날 쿠릴 열도를 두고 소련-러시아랑 다툴 일도 없었고 한반도 분단도 없어서 북한의 일본인 납북으로 골치썩일 일도 없었다. 즉 항복을 늦춘 덕에 오히려 손해만 보았다. 항복을 늦춰서 일본이 이득을 본 것은 겨우 군부 수뇌부의 목숨이 1달 연장된 것 뿐이었다. 그나마도 국익이 아닌 사익이고. [4] 참고로 이들 동남아시아는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초기에는 일본을 환영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이 지역들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받던지라 '아무래도 같은 아시아니까 낫겠지?' 싶었다가 일본이 유럽 열강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더 심하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을 상대로 저항했다.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 산이 대표적인 사례.(물론 반대로 수카르노처럼 친일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다만 수카르노도 진심으로 일본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이이제이 차원에서 그런 것.) [5] 그러나 공명정대한 재판을 할 것을 선언하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하지 않은 데서 보면 실질적으로 일본에 대한 재판에서 전범 처벌 자체를 의도적으로 방기한 거나 다름없다. [6] 물론 라다비노드 팔의 심정도 이해가 되는 것이 영국도 일본 못지않게 식민지를 철저하게 수탈하고 인도의 독립뿐만 아니라 인도인들 스스로 근대적인 산업이나 교육을 못하게 방해하는 등 영국에 대한 악감정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나 라다비노드 팔은 일본에게 학살당한 피해자 대부분이 영국과 프랑스,미국 출신이 아닌 영국과 미국, 프랑스,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식민지 제국에게 착취당하던 아시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외면하고 일본의 범죄를 정당화하여 전범재판의 의의를 훼손한 것이 문제다. [7] 참고로 집권 1년차인 200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는지 식민지 근대화론 + 독립운동가 비하 연설을 한 바가 있다. [8] 그러나 이 사건마저도 무죄를 때릴 경우 미국의 분노가 엄청났을 테니...(이 때 까딱하면 식인종 한끼 안줏거리 될뻔한 사람이 아버지 부시다. 참고로 부시 가문은 전형적인 WASP의 상류층 집안이다.) 이 재판에 진짜 팔 판사가 참가했다면 참으로 아스트랄한 게 저렇게 '팔 판사조차 경악했다는' 식인종 다치바나 요시오는 그나마 일반인에게는 까이는데 문제는 극우들에게는 순국선열로 여겨지고 있으며 심지어 그 악명높은 야스쿠니 신사에도 모셔져 있다. [9] 이런 관점에서 전범재판이 일본측에 유리하게 진행된 것을 꽤나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