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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다마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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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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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코다마 요시오
[ruby(児, ruby=こ)][ruby(玉, ruby=だま)][ruby(誉, ruby=よ)][ruby(士, ruby=し)][ruby(夫, ruby=お)] | Yoshio Kodama
파일:external/isrtm.ru/image015.png
출생 1911년 2월 18일
일본 제국 후쿠시마현 모토미야시
사망 1984년 1월 17일 (향년 72세)
일본 도쿄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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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요코 (배우자, 1958년 사별)
직업 해결사, 사업가, 공작원

1. 개요2. 생애3. 한국과의 관계4. 그외5. 그를 모델로 한 소설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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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극우진영의 전설적인 정치 브로커.[1] 후쿠시마현 모토미야시 출신이다.

전전(戰前),전후(戰後) 일본 정치계의 브로커( 세지마 류조처럼)로 유명한 사람이다. 야쿠자들과 긴밀한 관계로 금정회의 고문이었는데 이 조직은 나중에 일본 3대 야쿠자인 이나가와카이로 변신한다. 일종의 반달과 같은 사람으로 야쿠자와 우익 정치계를 연결시킨 인물이기도 했다.[2]

후쿠모토 노부유키 은과 금에서도 이름만 짧게 등장한다. 이자와 의원이 히라이 긴지와 첫 대면하는 자리에서 자네가 헤이세이의 코다마라고 들었다며 언급했다.

2. 생애

2.1. 극우 정치깡패

원래는 공산주의를 공부한 적도 잠깐 있다고 하지만 곧 도야마 미츠루[3][4]밑에서 배우면서 국가주의( 반공주의)[5]를 습득했다. 이후 도야마 미츠루가 고문으로 참여한 건국회[6]에 가담하여 실업자와 농촌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며 '쇼와 천황 직소사건'을 일으켜서 처음으로 투옥된다. 이때의 고다마는 위험한 일도 태연하게 하는 간이 큰 젊은이였다고 한다. 반년간의 투옥 생활 이후에는 더더욱 급진파가 되어서 이번이는 건국회도 탈퇴하고 이번에는 더더욱 급진화 되어서 사사카와 료이치가 주도한 국수대중당에 가입했다.[7][8] 국회에서 삐라를 뿌리고, 이노우에 준노스케[9] 협박사건을 일으켜서 다시 투옥되었다. 그리고 만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한 뒤에는 도야마 미츠루의 아들과 함께 당시 수상과 장관을 암살하고 황도파 군인들의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투옥됐다.

그후 외무성 정보부장이던 카와이 타츠오(河相 達夫)[10]에게 발탁되어[11] 2차 대전이 일어나기전부터 외무성 정보부의 인맥을 통해서 일본 제국 해군의 후원하에 정보기관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와 인맥,기술을 쌓아갔다. 상하이에서 텅스텐이나 라듐, 코발트 등의 전략물자를 구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사업체를 운영했는데, 텅스텐 구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헤로인을 수출했다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며 패전무렵 이렇게 번 돈을 들고 당시 해군대신이던 요나이 미쓰마사에게 찾아갔더니 요나이는 현금만 받고 현물[12]은 고다마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 돈의 일부는 일본민주당[13]의 창당자금으로 들어갔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먹었다.

도쿄 전범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고도 도조 히데키와 달리 사형되지않고, 기시 노부스케랑 함께 살아남았다. 고다마가 석방된 데에 대해 고다마 본인은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중국인 노무자들을 공정하게 대우한 것 덕분이라 주장했지만 정말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과거 일본 제국의 핵심이었던 우익정치권과 군조직을 밀어내는 작업을 하다가 냉전이 본격화되자 다시 반공으로 넘어가는 역주행 과정에서 CIA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풀려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에는 일본 미군정 참모제2국(일명 G2)와 야쿠자 조직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며 유바리 탄광 노조 탄압 등에 앞장서 폭력단으로서 세력을 키웠다. 이후 하토야마 이치로 정권의 탄생과 1955년 거대 공룡정당 자유민주당의 탄생에도 관여하면서 정치권의 흑막으로 영향력을 키웠고 하토야마 퇴임 후 총재선거에 도전한 기시 노부스케에게도 힘을 보태었다.다만 이때 기시는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배하였다.

이시바시가 뇌경색으로 2달만에 퇴진하고 정권을 잡은 기시는 숙원인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앞두고 거당적인 협력이 필요하게 되어 차기 정권을 당인파(党人派)[14] 실력자 오노 반보쿠(大野 伴睦)에게 넘긴다는 서약을 하게되는데 이때도 코다마가 입회인으로 참여하였다.[15] 이후 아이젠하워 방일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이 격화되자 우익과 야쿠자를 동원해 통해 맞서는 구상이 기시 노부스케 정권내에서 대두되었는데 당시 자민당 간사장 가와시마 쇼지로와 만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논의하고 공작에 나섰던게 코다마였다.

기시가 물러난 후 오노 반보쿠- 고노 이치로로 이어지는 당인(党人)정권을 기대하였던 고다마는 이케다 하야토가 총리에 취임하자 매우 실망하였고 관동지역의 주요 야쿠자들과 우익세력들을 움직여 이들 명의로 자민당을 상대로 파벌정치를 종식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보냈다. 자민당 입장에서 야쿠자들이 공공연하게 정치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개가 주인을 무는 격이었고 이에 자민당 측은 경고의 의미로 야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이는데 이것이 제1차 정상작전(第一次頂上作戦)이다.

2.2. 록히드 사건 연루

1976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등과 함께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다. 고다마는 록히드 마틴으로부터 로비 자금을 받아 이것을 다나카를 비롯한 정계의 실력자들과 마루베니, 전일공 등에 뿌렸다. 흑막이라서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워낙 여파라든가 규모가 커서 당연히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타가야에 위치한 그의 집이 기자들에게 포위되고 고다마는 언론의 먹잇감이 되어 어항속의 물고기 신세가 된 가운데 그의 숭배자였던 로망 포르노 배우 겸 아마추어 조종사인 마에노 소이치로가 그에게 실망하여[16] 비행기를 몰고 카미카제를 감행해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 당시 코다마는 충돌 지점과 다른 방에 있어서 별다른 부상 없이 무탈하였다. 어쨌든 그는 록히드 사건을 계기로 몰락하여 영향력을 상실하고 만다. 심지어 어떤 우익단체는 고다마를 상대로 할복을 권고하였다. 이 와중에 고다마 저택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고다마가 친분이 있던 정치인과 경제인, 그리고 기업들로부터 선물 받은 일본도를 비롯한 골동품들 중 적잖은 것 들이 알고 보니 모조품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동성회의 보스인 정건영[17] 그와 관련이 있었다.

2.3. 사망

1984년에 자신이 CIA 공작원이었음을 고백한 뒤 발작으로 사망했다.

3. 한국과의 관계

코다마와 한국의 관계는 비교적 초년부터 시작된다. 코다마가 어린 시절 서울에 있던 친척에게 맡겨져서 선린상업학교[18][19]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다마 요시오가 다시 한국과 연결되는 것이 국교정상화이다. 한국의 박정희와 야쿠자 정건영, 그리고 일본의 통칭 지한파라는 기시 노부스케, 코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 등의 인맥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이뤄내게 된다. 당시 고다마는 수시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쪽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쌍방의 요구사항을 조율하고 또한 한일수교를 반대하던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를 설득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고다마는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한국은 그해 1962년 12월 내에 한일 국교 회복의 조건이 정리되지 않으면, 곧바로 행해지는 박 대통령의 선거에 영향이 가는 급박한 정세였다. 나는 오노 선생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건너갔다. 가보니 일본 정부의 마음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정세는 상상 이상으로 긴박했다. 나 혼자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오노 선생과 매우 친한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씨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정을 전하고 지원받았다. 그래서 오노 선생과 와타나베 씨가 곧바로 김종필 씨와 그 밖에 한국의 최고 수뇌부들과 회담하였다. 그때 나는 오노 선생에게, "이것은 선생이 아시아의 장래를 생각해서 마음을 먹고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선생이 여기서 결정한 사항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만약 자민당 정부가 승인하지 않는다면, 선생은 고노 선생과 함께 자민당을 탈당하십시오. 두 분이 탈당하게 되면. 이케다 총리가 아무리 관료주의자라고 해도 손을 들 것입니다. 요컨대 선생이 한국에 대해 일본의 약속어음을 끊으면, 일이 정리됩니다" 라고 말하자, 얼마 동안 가만히 생각하던 오노 선생은 "좋다, 해보자"라고 결심을 하셨다.
김소연 역《짐승의 길》에서 재인용

친일파 이런거 보다는 아주 넒게 보면 아시아주의의 영향도 있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돈이었다.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상당한 금액의 돈이 넘어갔고, 이 돈을 먹기 위해서 일련의 세력들이 결집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코다마 요시오는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대한민국 정부로 부터 받았다. 참고로, 기시 노부스케는 1등급 광화대장이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코다마 요시오가 한국정부에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당시 공화당 정치인들이 코다마 요시오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이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제외하면 김종필의 형 김종락, 석정선, 김용태 등 상당수가 김종필 계열 인물들이었다. 코다마를 통해서 김종필을 박정희의 차기로 올리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물론 코다마는 그런 것까지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서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알렸다. 당연히 이 사실에 분노한 박정희가 김형욱을 시켜서 도청하게 한 결과 위의 3인방은 모두 숙청된다. 이것이 유명한 JP 불충사건, 혹은 노골적으로 코다마 불충사건이라고 한다.

참고로 통일교의 총재인 문선명도 이 사람과 사사카와 료이치[20]와 관련이 있다.

패전 직후 재일교포들에게 린치당해 이가 부려졌던 기억때문에 한일수교에 냉담했던 오노 반보쿠를 설득하면서 ''선생님, 한국은 수십년간 일본에 잡혀있었습니다. 그건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본은 또 다이쇼 12년 대지진때 한국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 겨우 이가 대수입니까?"고 말했다고 한다.

4. 그외

전후의 대표적 픽서로 흑막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미스테리한 인물 같지만 실제로는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적이었고[21] 본인 자서전도 썼다. 당장 본항목만 봐도 고다마 요시오의 출신부터 죽을 때까지의 행적이 상당히 상세한 편이다.

정재계의 해결사로 알려져있지만 정작 요시다 시게루-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어지는 보수 본류라 불리는 자민당 주류계열과는 그다지 접점이 없었고[22] 하토야마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로 이어지는 비주류 보수방류 그룹과 밀접했다.

경제 4단체( 경단련, 일경련, 일본상공회의소, 경제동우회)를 중심으로 한 재계주류 또한 때때로 고다마의 영향력을 빌리면서도[23] 동시에 경계시하였다. 고다마와 가장 친했다고 알려진 고노 이치로[24]는 고다마와의 관계 때문에 재계 주류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총리의 꿈을 접어야 했다.[25]

록히드 사건때도 다나카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고다마는 다나카에게 접근하기 위해 국제흥업의 사주였던 오사노 겐지를 통해야 했다.

부라쿠민 해방운동에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언급했다던지, 부라쿠민 문제에 우호적이었다던지 하는 기록을 보면, 제국주의 극우라기보단 반제국주의(자칭) 극우, 즉 일본에는 많지 않았던 정통 파시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황도파와 아시아주의 이론가 등도 도조를 위시한 통제파에 의해 숙청되기 전에는 혁명적이고 대중주의적인 파시즘을 내세우는 인사들이었고, 코다마도 이 맥락에 속했던 것. 그래서 언뜻 보면 때로 이상주의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것이다.

코다마 요시오 외에 널리 알려진 픽서들로 앞에서 등장하는 사사카와 료이치, 세지마 류조를 비롯해 미우라 기이치(三浦義一)[26], 야쓰기 가즈오(矢次一夫)[27], 오타니 타카요시(大谷貴義)[28], 다나카 세이겐(田中清玄)[29], 요츠모토 요시타카(四元義隆)[30] 등이 있다.

5. 그를 모델로 한 소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짐승의 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 코다마를 모델로 해서 만든 정계의 흑막 캐릭터가 나온다.

야마자키 도요코의 소설 불모지대에선 가마쿠라의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등장한다. 살베스탄 광구에 독자적으로 입찰하려는 이키 타다시를 불러 사바시 총리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압박한다.

6. 같이 보기



[1] 일본에서는 픽서(fixer, フィクサー)라고 한다. 말 그대로 해결사라는 뜻이다. [2] 전후에 정계와 우익, 야쿠자의 연계를 처음 구상하고 추진한 인물은 기무라 도쿠타로(木村篤太郎. 1886 ~ 1982)라는 인물인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변호사회 회장, 검사총장, 법무대신등을 지낸 법조인 출신이다. 기무라 도쿠타로는 나중에 안보투쟁때도 코다마와 함께 우익을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1967년에는 우익세력을 규합하여 자민당의 원외조직인 자유민주당동지회(自由民主党同志会) #를 결성하였다. [3] 일명 두산만(頭山 満). 아시아주의의 대표격인 인물이고, 일본 국가주의자의 상징중 하나이다. 을미사변의 배후이자 경술국치의 뒤에서 활약한 것으로 손꼽히는 겐요샤의 창시자이고, 갑신정변 이후의 김옥균이나 손문을 지원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또한 흑룡회라고 해서 일본 우익 야쿠자 조직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아시아주의 항목에서는 이 사람을 이상주의자로 이론도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을 뿐이라고 언급하고 대동아공영권 이론에 휘말리면서 이론이 변질되었다는 식으로 적혀 있는데, 이 사람도 극우파이고 일본중심 병합을 선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방법론의 차이일 뿐.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흑룡회와 건국회이다. 그나마 유사한 정치인이라면 이토 히로부미. [4] 야인시대에서 유명해진 하야시( 선우영빈)도 도야마가 발탁한 인물이다. [5] 쇼와 국가주의. [6] 도야마를 고문으로 밀어낸 회장이 누구냐면 우에스기 신키치(上杉慎吉)이다. 이 사람은 천황은 곧 신이다라고 주장했고, 이 학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의 자유로운 학풍으로 등장한 '국가는 그 자체로 인격을 갖추고 있으며, 법인으로서 국가는 그 자체로 인격을 가지고, 텐노는 그 최고 기관이다'라는 상식적인 천황 기관설을 아작내버린다. 당시 일본이 실제로는 수상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이면서도 명목적으로는 신권정치가 된 것이 이 사람의 주장이 먹혔기 때문이다. [7] 역시 A급 전범이고, 기시 노부스케와 친분이 있었다. 전후에 기시의 정치력을 등에 업고 경정 사업에 진출하여 큰 돈을 벌어 '일본선박진흥회'란 비영리 재단을 만들었는데, 현재의 '일본재단'이다. 문재인의 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이 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8] 다만 문정인 김준형이 설계한 초월외교론은 일본의 아베 신조가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에게 제안한 것이 그 시작인 Quad를 사실상 엿먹이는 정책이었다. 윤석열 당선 이후 폐기되었지만. [9] 당시 내각이었던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다. 현대의 한국으로 치자면 기획재정부장관 격. 참고로 이 사람은 1932년 우익들에게 대로에서 암살당했다. 이를 혈맹단 사건이라 하며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암살당한 다음날에는 미쓰이 재벌의 총수였던 단 다쿠마도 암살당한다. [10] 후일 호주 공사, 정보국 총재겸 외무차관 등을 역임했다. [11] 때문에 코다마는 카와이를 은사, 아버지같은 존재로 여겼다. [12] 다이아몬드, 금괴 등 이었다고 한다. [13]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당. 1955년 역시 같은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합당해서 지금의 자민당이 되었는데, 이것이 55년 체제의 시작이다. [14] 정당 정치인 출신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일본의 보수정당들은 1980년대까지도 청년시절부터 직접 정당에 참여해서 정치에 입문한 당인파와 고시에 합격해서 정부에서 일하다가 정치권으로 들어온 관료파 사이에 은근한 갈등이 있었다. [15] 이때 더불어 함께 입회인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다이에이의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 홋카이도 탄광기선의 사장 하기하라 기치타로였는데 세명 모두 고노 이치로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이 서약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16] 마에노는 긴자의 바에서 고다마를 직접 만난적도 있다고 한다. 그때 마에노는 고다마로 부터 "너는 재밌는 남자다"란 소릴 들었다고 전해진다. [17] 마치이 히사유키 [18] 이 곳이 바로 박노준으로 대표되는 야구 명문고 선린상고, 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 일본어판 위키백과에는 '경성상업전문학교'라고 나오는데 이런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린인터넷고의 명칭은 선린상업학교였다. [20] 1899~1995. 1963년 T교 재단의 일본지부 고문이다. A급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UN평화상을 수상했다. [21] 한국 언론과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22] 사토 에이사쿠는 가스업계의 실력자이자 사돈지간이었던 안자이 히로시(安西 浩)로부터 고다마와 만나볼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였던 일도 있다. 그래서인지 고다마는 사토에게 직소를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한국언론과 인터뷰하며 징징거리기도 하였다. [23] 가령 기업들간에 분쟁이 생기면 고다마가 중재를 하거나 사측과 노조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개입하였다. 갓 스물을 넘긴 고다마가 건국회에 몸담고 있을 당시 건국회의 실력자인 아카오 빈의 집 근처에 있던 버스회사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는데 이걸 중재한게 코다마였다. 젊어서부터 막후교섭과 중재에 능했던 듯 하다. 그러나 아카오 빈은 나중에 이 일을 알고 그런 일을 하는건 우익이 아니다며 화를 냈는데 결국 고다마는 록히드 사건때도 거간꾼 노릇을 하다 몰락하고 만다. [24] 고노 요헤이의 아버지이자 고노 다로의 할아버지이며 고다마가 패전 직전 귀국해서 자신이 중국대륙에서 들여온 각종 현물을 현금화할때 고노가 도와주었다. 후일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에서 사임후 고노가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오노 반보쿠를 옹립하였다가 이케다 하야토에게 패배한 후 탈당하려 할때 고다마 요시오는 오노 반보쿠와 함께 고노를 간곡히 말리기도 하였다. [25] 재계 주류는 고노 이치로 정권이 탄생할 경우 고다마 요시오, 하기하라 기치타로(萩原吉太郎, 홋카이도탄광기선 회장)등 고노와 가까운 인사들이 고노의 지원하에 자신들을 대신할 재계 집행부를 세울거라고 우려하였다. 마찬가지로 고다마와 친했던 정치인이 기시 노부스케였지만 그는 재계 주류에 대해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총리에 오를수 있었다. [26] 명문가 출신의 전전부터 우익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실력자로 도조 히데키와 절친했으며 전후에는 그의 사무실이 있던 니혼바시 무로마치에 빚대어 무로마치 쇼군(室町将軍)이라 불렸다. 금융계에서 법왕(法王)이라 불리며 오랫동안 일은총재, 대장대신등을 지냈던 이치마다 히사토(一万田尙登)와 인척관계여서 이러한 연줄로 경제계에도 인맥이 넓었으며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도 매우 가까웠다. [27] 국책연구회 설립자. 쇼와 최대의 괴물로 불렸으며 기시 노부스케의 최측근으로 1958년 한국에 특사로 파견되어 이승만 대통령과 회견하였다. [28] 일본의 보석왕으로 후쿠다 다케오 총리의 그림자라고 할 정도였다. 허영중이 이 사람의 운전기사를 한 적 있다. [29] 원래 일본공산당의 중앙위원장까지 지낸 공산주의자였으나 1930년대에 들어서 우익으로 전향하였다.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있어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덩샤오핑, 오토 폰 합스부르크 등 과도 친분이 있었다. [30] 고다마 요시오의 라이벌 격인 존재로 고다마가 자민당 당인파와 가까웠다면 요츠모토는 관료파와 가까웠다. 원래는 혈맹단 사건에 가담할 정도로 과격하였지만 옥살이 이후에는 온건해져서 종전공작에 참여하였고 스즈키 간타로의 비서를 지내며 궁성사건 당시 육군 강경파의 암살위협으로 부터 스즈키를 지켜냈다. 전후에는 요시다 시게루에게 발탁되어 이후로 보수 본류 출신 총리들의 측근으로 정재계의 이면에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