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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AG의 상징. 본인들의 상부조직인 친위대의 룬 문자 SS 상징이 아니라 국방군의 상징인 철십자를 본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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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HIAG 모임 당시 찍힌 사진. 왼편은 전직 친위대 상급대장 파울 하우서이며, 오른쪽의 인물은 전직 친위대 소장 쿠르트 마이어다. 마이어는 캐나다군 포로 학살을 지시한 혐의로 복역하다 기민당 콘라트 아데나워 정권의 비호로 풀려났다. 무장친위대의 원로였던 두 사람은 HIAG의 열성적인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사진 출처: 슈피겔 #) |
1. 개요
한국어: 전직 무장친위대원 상호부조협회(HIAG)독일어: Hilfsgemeinschaft auf Gegenseitigkeit der Angehörigen der ehemaligen Waffen-SS(HIAG)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직 무장친위대 대원들이 모여 결성한 전우회. 친위대원들의 명예를 변호하고 서로 상부상조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이들은 전후 독일의 역사왜곡 문제에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친위대를 추종하는 현대 네오나치들과 대안 우파들에게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깊은 정치적 악영향을 남겼다.
2. 주요 구성원
3. 역사
3.1. 창설과 주된 활동
전후인 1951년, 친위상급대장 파울 하우서, 친위대장 빌헬름 비트리히, 친위소장 오토 쿰을 비롯한 일부 전직 친위대 장성들을 중심으로 무장친위대 상조협회(Hilfsgemeinschaft auf Gegenseitigkeit der Angehörigen der ehemaligen Waffen-SS), 줄여서 HIAG이 창립된다. 당시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은 자신들이 범죄자로 낙인찍혀 재판에 불려다닌 것도 모자라 연금도 박탈당하고 직장을 구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우회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명예를 되찾고, 국방군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우받기를 원했다. 병사와 간부를 막론한 다수의 전직 친위대원들이 HIAG에 가입했다.우선 그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는 수정주의적 회고록들을 간행했다. 여기에는 극우 출판사로 분류되는 오스나브뤼크의 무닌 출판사(Munin-Verlag GmbH)가 조력했다. 하우서 상급대장은 《작전 중의 무장친위대(Waffen-SS im Einsatz)》을 저술했고, 쿰 소장은 《바이킹의 부름(Wiking-Ruf)》지와 《자원자들(Der Freiwillige)》지의 편찬을 주도하고 논설을 실었다. 노쇠했던 하우서는 1972년에 죽기 직전까지 두 세 개의 프로젝트에 더 참가했다. 마이어 소장은 《척탄병들(Grenadiere)》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슈타이너 대장은 《무장친위대의 자원자들: 이상과 희생(Die Freiwilligen der Waffen-SS: Idee und Opfergang)》을 저술했다. 이 회고록들은 제3기갑사단 "토텐코프"가 강제수용소장 위병 근무만 섰을 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었다던가, 무장친위대는 전방 전투부대였기에 후방에서의 잔학행위를 알 수 없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3.2. 회고록의 문제점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며, 무장친위대는 전후방 부대나 설립 연도에 가리지 않고 수많은 학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제1기갑사단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는 1940년 프랑스 덩케르크에서 영국군 포로들을 창고에 집어넣고 수류탄을 던져 집단학살했다. 제2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1944년 프랑스에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벌였으며 1943년 2월에는 소련에서 요아힘 파이퍼의 주도로 872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두 학살 사건에서 다스 라이히 병사들은 교회에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분살해버리기도 했다. 제3기갑사단 "토텐코프"는 1940년 프랑스에서만 한정하더라도 르 파라디, 리옹, 방델리쿠르 등 수많은 지역에서 학살을 자행했다.그 외에도 무장친위대는 친위대 내 학살부대 및 수용소 경비대나 질서경찰 등 경찰부대와의 인적 교류, 협력이나 인원 재배치도 숱하게 이루어졌다. 가령 상술한 토텐코프 사단은 모체부터가 테오도어 아이케가 이끌었던 강제수용소 관리 및 운영 부대인 친위대 해골부대(SS-Totenkopfverbände)였다. 아이케 휘하의 해골부대 연대들이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재조직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단 창설 이전에도 유대인 및 정치범 박해와 T-4 프로그램 운영에 중책을 담당했으며, 최초의 아인자츠그루펜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7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은 1943년 세르비아에서 국방군의 크로아티아 외인부대인 제369사단, 국방군 제717엽병사단과 함께 1500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제8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경우, 사단으로 승격되기 전인 1941년에 벨라루스에서 중부집단군 소속 국방군 보안사단 및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휘하의 질서경찰과 친위특무대와 함께 파르티잔 토벌전을 빙자한 대량학살을 벌인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제5기갑사단 "비킹"은 1943년 루블린에서 벌어진 '수확제 작전(Aktion Erntefest)'에 참여했다. 해당 작전은 4만 2천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으로, 나치 독일이 벌인 단일 총살 작전으로는 바빈야르 학살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다스 라이히" 또한 1941년 민스크 주 라호이스크에서 아르투어 네베의 특무대 B와 협조하여 920명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들 모두는 일각에서 소위 "정예사단"이라 부르며 순수한 전투부대일 뿐이라고 변호하던 부대들이다. 이들마저도 이 정도이며, 전쟁 중후반에 새로 신설된 사단들까지 포함하면 무장친위대의 학살은 셀 수도 없이 많다.
HIAG는 더 나아가 무장친위대가 다른 친위대와 다르며, 국방군과 함께 제4의 군종으로써 독일 국가를 위해 전투에만 힘쓴 정예 부대라고도 주장했다. 심지어는 전쟁 후반기 무장친위대 외인부대에서 다른 민족들을 받은 것을 두고, 무장친위대가 NATO의 선구자로써 공산주의에 맞서는 범유럽적 조직이었다고 왜곡하였다. 인종주의의 화신과도 같던 나치당이 벌이던 독재와 침략 전쟁의 충실한 개였던 무장친위대가 사람이 없어서 피지배민들을 마구잡이로 동원한 것을, 자유 국가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결성한 방위 공동체인 나토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다. 둘 간의 공통점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것밖에 없었음에도 말이다.
3.3. 독일 정계의 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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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HIAG 회합 당시 영상. 카셀 근교의 샤퍼베르크 호텔(Waldhotel Schäferberg)에서 열렸다. 이제 노인이 된 제1SS기갑사단 장병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서로 대화하며 추억에 잠기거나 감사패를 주고받고 초빙된 가수들의 노래를 듣는 등 친목을 다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
HIAG와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이 이렇게 활개칠 수 있었던 데에는 전후 서독 정치계의 비호도 한몫 했다. HIAG는 50년대, 그리고 60년대 서독 기독교민주연합(CDU) 정부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도 연줄이 닿아 있었다.
사실 기독교민주연합이나 사회민주당이나 모두 나치 치하에서 고초를 치렀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이념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심지어 개인적으로든 나치를 살려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가령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나치당에게 아내를 잃었고, 쿠르트 슈마허 사회민주당 당수는 게슈타포의 고문으로 장애를 얻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나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 모든 나치 가담자들을 전부 처벌할 수는 없었다. 종전 직후부터 서방과 소련 간의 긴장이 오르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최전선이었던 독일에 대한 가혹한 처분은 재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1950년 동아시아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냉전이 개막하였음이 명확해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독일을 가능한 빠르게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 연합군의 군정이 끝난 후 세워진 서독 정부 역시 전후복구와 독일의 국제사회로의 복귀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모든 공무원, 군인, 회사 임원들을 전부 처단하면 독일의 재건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심리적으로도, 전후 독일인들이 선택한 역사 반성 방법은 분리와 망각이었다. 그들은 나치 전쟁 기계에 자신들이 직간접적으로 협력했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고 그 안에서 '침잠하는' 대신, 자신들을 나치당의 책임으로부터 분리한 채 새로운 동맹인 서구권 국가들과 함께 민주적 질서 속에서 걸을 밝은 앞날만을 바라보기를 선택했다. 결국 그들은 범죄 행위가 명확하거나 나치즘을 공공연히 떠드는 이들만을 처벌한 후, 빠져나갈 구석이 있던 이들은 대부분 단순가담자(Mitläufer)나 무죄로 분류하여 사면해주었다. 그들의 이러한 선택은 전후 서독이 빠르게 정상국가의 반열에 올라 라인 강의 기적을 일궈내고 프랑스와 화해하며 유럽 연합의 기초를 놓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과거 청산의 측면에 있어서는 매우 미흡한 것이었다. 가령 기민당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는 아예 나치당에 당적을 두고 나치 독일 정부에서 공직 생활을 했던 인물이었으나, 아데나워에 의해 단순가담자로 분류되어 사면받고 훗날 총리직에 올랐다. 군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서독은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국경에 접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을 막기 위해서는 독일 연방군의 빠른 재건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냉전과 소비에트의 위협이라는 상황은 과거 동부전선에 대한 심리적인 정당화 계기를 제공했다.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국방군은 물론이거니와 무장친위대 또한 단순가담자일 뿐이라고 변호했다. 심지어 아데나워는 국방군 방첩국과 친위대 게슈타포 출신들로 구성된 겔렌 조직을[1] 휘하의 비밀 정보기관으로 두고 정치적 반대파들을 사찰하기도 했다.
좌익이라는 사민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 당수는 HIAG 인사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사민당 당원이자 훗날 독일 총리에 오르게 되는 헬무트 슈미트는 1953년 함부르크의 HIAG 모임에 나가 연설을 했는데, 과거 대전 당시 '같이 싸웠던 무장친위대 동료들이 얼마나 든든했는지'를 언급하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2] 그들이 그랬던 이유는 간단했는데, 정치인들에게 있어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의 머릿수는 유의미한 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HIAG의 숫자는 25만에 불과했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200만명을 상회하는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을 대표한다고 8배나 크기를 과장했고, 하우서 등 친위대 원로들이 몸담고 있던 HIAG의 특성 상 그게 먹혔다. 그들의 로비 결과 기민당과 사민당은 무장친위대 출신자들에게도 국방군 전역자들과 마찬가지로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합의했다. 이 때문에 슈피겔 지는 2011년의 기사에서 이에 대해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이 전후 독일의 민주주의를 '이용해먹었다'며 비판했다.
정계에도 영향을 뻗치게 된 HIAG와 무장친위대 전역자들의 행동은 가관이었다. 1953년에는 나치 시절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었고, 많은 회원들은 이스라엘을 살려두면 다시 독일에 손을 뻗을 것이라는 반유대주의 사고관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만 당시의 HIAG가 나치 독일의 재건을 바라며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모인 우선적인 이유는 국가에서 지급하는 연금이었고, 자신들의 삶을 가로막은 '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떼는, 아주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인 목표로 모인 집단이었다. HIAG가 만일 나치의 재건이라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졌다면 비호를 받기는커녕 연방헌법수호청에 의해 바로 해산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소박한' 바램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속성을 띄었으며, 독일의 과거 청산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가담한 거대한 범죄를 부정하는 결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행보는 우측 극단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물론 HIAG의 공식적인 입장은 여전히 정치적 색채를 띄지 않았다. 하우서의 뒤를 이어 사실상 리더가 된 쿠르트 마이어는 '유대인 시나고그를 보호하기 위해 전직 무장친위대원들을 경비로 보내 줄 수도 있다'며, HIAG가 네오 나치 단체라는 세간의 의심을 부정했다. 전쟁 범죄에 관해서도, 차마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부정할 수 없었는지 무장친위대가 해당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렇듯 HIAG가 내세우는 '비정치적 집단'이라는 타이틀은 서독 정부로 하여금 그들을 손쉽게 해산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최소한의 면피용 행적일 뿐, 내부적인 분위기는 달랐다. 학계에서는 HIAG가 외면적으로는 민주적인 체계를 갖추었을 지 몰라도 개별 구성원들은 확실하게 국가사회주의를 믿었다고 평가한다. # 많은 수의 HIAG 회원들은 극우주의 정당인 독일 제국당과 같은 단체들과 손을 잡았다. 또한 마이어와 HIAG 지도부는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마지못해 인정했으나, 그마저도 당시 현장에 있던 친위대원 개인들의 문제로 벌어진 일이라고 일축했다. 나머지 학살들에 대해서는 전부 부정하거나 일반친위대 예하부대의 탓으로 돌리면서 친위대 전범들의 범죄를 부정하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유포했다. 가령 파울 하우서 상급대장은 말메디 학살을 일으킨 요아힘 파이퍼 대령에 대한 변호를 자기 회고록 《작전 중의 무장친위대(Waffen-SS im Einsatz)》에 적극적으로 반영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이 앵무새처럼 주워섬기는 파이퍼에 대한 옹호 논리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3.4. 청산의 시작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상함을 느낀 기성 정치인들도 슬슬 이들과 손을 떼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위르겐 하버마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필두로 한 일련의 학자들이 나치 시절을 경험한 구세대와 전후복구 시절에 나치의 유산과 타협한 기성 정치인들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독일인들도 68혁명의 영향을 받아 과거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으며, 사민당과 기민당도 1960년대부터는 갈수록 우경화되는 HIAG와 거리를 두었다. 그 중 사민당은 적어도 1981년부터는 HIAG의 극우적 사상을 문제삼으며 연을 완전히 끊었다. 가령 1979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지역구를 두고 있던 사민당 출신 하원의원 우도 피비히(Udo Fiebig)는[3] 자신의 지역구에서 사민당 당원들이 HIAG 대원들이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는 당 상부에 문제를 제기했다. 조사 결과 최소 5명의 HIAG 회원이 사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어떻게 극우 범죄 집단의 출신자들이 사민당에 당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에 대해 격하게 성토하였다. 그들은 단순한 상조협회가 아니며, 회원들이 제한 없이 옛 전쟁의 기억을 만끽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역당 지도부는 연방 당 지도부에 그들을 출당시킬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 점진적인 변화는 1970년대가 지나 1980년대가 되면서 서서히 전후 세대가 독일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와 그 가담 여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국방군 무오설을 기반으로 무장 친위대가 전장에서의 모든 전쟁 범죄의 책임이 있다는 국방군 참전 용사들의 주장이 부정되었고 나치 독일에 당시 일상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며 나치 독일의 집권 당시 독일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으면 나치당의 악행을 묵인하고 지지하였다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헌법수호청의 1980년 연례보고서 104p. 당시 바덴뷔르템베르크 헌수청은 HIAG 오스탈프(Ostalb)[4] 지부가 협회 잡지에서 유대인 집단학살을 두고 "대량학살 거짓말(Massenvernichtungslüge)", "(유대인이) 수백만이 죽었다는 것은 시오니스트들이 조작한 사기(von Zionisten ausgeheckten Millionenschwindel)"라고 주장한 것을 이유로 그들을 감시 대상에 올렸다. 문서에 첨부된 사진이 바로 문제의 그 잡지로, 독일의 연방수리 국장이 가운데 새겨진 육망성이 그려져 있다. 그 아래에는 "시온의 독수리는 시온주의 독재 하에 완전히 굴복한 독일연방공화국을 상징한다!(Der Zionsadler symbolisiert die totale Unterwerfung der Bundesrepublik unter die zionistische Diktatur!)"는 선동적인 반유대주의 문구가 쓰여 있다. |
그러자 HIAG는 신세대에 맞서 극우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네오나치 집단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나치 시절 군가를 부르며 집회를 연다거나 홀로코스트 허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수립한 무장친위대 신화를 부르짖는 것은 물론이다. 이미 1960년대부터 독일 내무부 소속 정보기관인 연방헌법수호청은 HIAG의 극우적 성향이 장차 독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그들을 곧 감시 대상 목록에 올렸다. HIAG는 1963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내무부 헌법수호국의 보고서에서 최초로 언급되었고, 연방헌법수호청의 1980년 연례보고서에서부터는 그들의 사상적 극단화 경향과 나치 범죄에 대한 부정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3.5. 해산과 그 이후
보다 못한 독일 정부는 결국 1992년에 HIAG를 공식적으로 해산시켜버렸다. 그러나 HIAG에서 갈라져 나온 네오나치 조직들은 통일 이후 혼란기를 거쳐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에 이른다. HIAG 역시 연방 차원에서의 거대 조직은 해산되었으나 지역 차원의 잔당들은 존속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다시 전몰자재단 "모든 전우들이 침묵할 때(Kriegsgräberstiftung - Wenn alle Brüder schweigen)"를 결성하여 친위대원들의 묘지를 관리하고 기념물들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이들은 훗날 신세대 네오나치 단체들과 공조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2006년 벨트(WELT) 지는 HIAG 함부르크 지부가 지역 상공회의소의 레스토랑에서 모임을 가지려 시도하다 쫒겨났고, 네오나치들과 연합하였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함부르크 헌법수호청이 감지하여 발표했다. # TAZ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이 전직 무장친위대 노병들은 상공회의소에 출입금지 조치를 당한 후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내 조국이 어쩌다가 요지경까지 온 거냐(Soweit ist es mit dem Vaterland gekommen)"며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기사 말미에서 기자는 이 시대착오적인 노인들이 조금 후에는 '에셀의 친위대 묘지에 모여 (추모와 시위를 빙자한) 고성방가를 질러댈 지도 모른다'고 비꼬았다. #
오늘날 2차 대전 종전 이후 8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친위대 노병들은 대부분 죽고 사라졌으나, 그들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남아 독일 사회에 여전히 암적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