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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1c85><colcolor=#fff> 엑스포 Expo |
|
<nopad> | |
최초의 엑스포인 1851 런던 엑스포가 열렸던 수정궁 | |
한국어 명칭 | 엑스포, 세계 박람회 |
영문 명칭 | Expo, World's Fair(등록 박람회) |
시작 연도 | 1851년 ([age(1851-01-01)]주년) |
주최 | 국제박람회기구 |
종류 |
등록 박람회 인정 박람회 원예 박람회 A1(세계 원예 박람회) |
최다 개최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11회[1] |
링크 | 국제박람회기구(BIE) 홈페이지 |
[clearfix]
1. 개요
엑스포(Expo) 또는 세계 박람회(世界博覽會, Exposition Universelle)는 국제박람회기구에서 주관하여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박람회로, 각국의 특정 지역에서 몇 개월의 기간을 두고 여러 나라가 참가하여 각국의 문물을 전시, 교류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공 박람회다.2. 정의
용어 '엑스포(Expo)'란 프랑스어 '엑스포지시옹 위니베르셀(Exposition Universelle)[2]'의 첫 두 음절(expo-)을 따 온 것으로, '국제 박람회', '세계 박람회' 등으로 번역된다. 현행 한국어 표기 가운데 가장 널리 통용되는 것은 '엑스포'이며 보다 뜻을 밝혀서 사용할 때는 '세계 박람회'가 쓰인다. 특히 개최지나 개최년도를 함께 붙여 표기할 때는 ' 2030 부산세계박람회'와 같이 쓴다.용례를 보면 1980년대까지는 일본에서 널리 통용되던 명칭인 '만국 박람회(万国博覧会)' 또는 이를 줄인 '만박(万博)'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후 보다 순화하여 '국제 박람회' 등으로 불리다가 1993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엑스포'라는 용어가 정착하였다. 일본에서도 현재에 와서는 '만국 박람회', '만박' 등은 모두 통칭이며 정식 명칭은 '국제 박람회(国際博覧会)', 'エキスポ(엑스포)'라는 용어가 쓰인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등록 박람회를 '월드스 페어(World's Fair)'로, 등록 박람회와 인정 박람회, A1등급의 원예 박람회를 포함하는 세계 박람회 전체를 가리킬 때에는 '엑스포(Expo)'로 표기하는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전자는 1996년부터는 국제박람회기구 측의 규약 개정 및 상표지정으로 등록 박람회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다.
주요 국어사전에서 정의하는 엑스포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 여러 나라가 참가하여 각국의 생산품을 합동으로 전시하는
국제
박람회.
1851 런던 엑스포를 그 기원으로,
1928년에
파리에서 체결한 국제 박람회 조약에 따라 가맹국의 주최 하에 5년마다 열리며, 주로 공업 제품·미술 공예품 따위를 출품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공업,
농업,
상업,
수산업 등의
산업과 기예(技藝), 학술(學術) 등의
문화에 대한 활동과 성과의 실태를 생산품,
모형, 기구도(機構圖) 따위를 이용해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모임이다. 특히 세계 각 나라의 주요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세계 박람회를 이른다. 근대적 의미의 박람회가 그 모습을 갖춘 것은
산업 혁명 이후의 일이며,
1928년
파리에서 국제 박람회에 대한 조약이 조인(調印)되면서 세계 박람회가 활발하게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에서
개최된 바 있다. 또한
2012년 5월 12일부터 8월 12일까지
여수시에서도 엑스포를 개최하며 역대 두번의 엑스포를 치렀다.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
3. 종류
엑스포 소개 링크엑스포는 국제박람회기구(BIE, 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에 의해 개최 주기 및 품격이 관리된다. 1996년 이후 시행되는 현행 규약에 의하면 엑스포는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제로 하는 등록 박람회와 특정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인정 박람회, A1 박람회라 불리는 원예전문 박람회까지 3가지로 분류된다. 단, 원예전문 박람회는 BIE 주관이긴 하지만 자연을 소재로 하는만큼 분야가 다르다. 원예박람회는 엑스포 특유의 상업성을 철저하게 제한받는다.
3.1. 등록 박람회
등록 박람회(International Registered Exhibition, World's Fair)는 1800년대부터 존재하던 만국박람회의 전통을 계승한 엑스포다. 5년 간격으로 '0'과 '5'로 끝나는 해[3]에만 개최되고 최대 6개월 동안 열릴 수 있으며 전시규모의 제한은 없다. 주제가 있지만 일반적인 주제로 충분하며, 다양한 분야의 전시를 하게 된다. 또한 참가국이 각자의 비용과 설계로 전시관을 건립한다.사실 0년 규칙은 1990년대에야 정례화된 것이다. 첫 등록 박람회인 벨기에 브뤼셀 박람회는 1935년에 개최되었으나 1937년 파리, 1939년 뉴욕, 1949년 아이티, 1958년 브뤼셀, 1962년 시애틀, 1967년 몬트리올, 1992년 세비야 등 7회는 규칙을 따르지 않았으며 1970년 오사카 박람회만 규칙을 준수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1996년에 BIE가 해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과거의 박람회를 재분류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분류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84 뉴올리언스 엑스포만 해도 등록 박람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World's Fair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3.2. 인정 박람회
인정 박람회(International Recognized Exhibition)는 등록 박람회에 비해 규모가 작은 박람회이다. 등록 박람회가 열리는 사이에 1회만 개최되며, 최대 3개월만 개최가능하고, 전시규모는 최대 25만 m2 이내로 제한된다.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하며, 모든 전시는 그와 관련된 것으로 한정된다. 각국의 전시관은 개최국이 건설하여 무상으로 제공한다.이처럼 엑스포를 두 가지 형태로 구별하게 된 이유는 결국, 돈 문제(...)이다. 새로이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하는 국가에서는 바로 전회 엑스포보다 더 큰 규모의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하게 되고 따라서 갈수록 엑스포의 규모는 커지게 된다. 규모가 커서 나쁠 것이 뭐가 있나 싶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규모에만 신경쓴 나머지 행사 자체의 수준과 질이 떨어질 수 있으며, 엑스포를 개최할 수 있는 나라가 한정되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거나, 엑스포를 치르는 나라가 거덜나는(...) 일을 맞게 되어버려 장기적으로 엑스포 행사 자체의 운명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규모 박람회는 5년에 한 번씩만 열 수 있도록 하되, 굳이 엑스포가 너무 개최하고 싶어 죽겠다면 인정 박람회로서 개최할 수 있도록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1993 대전 엑스포의 경우 위의 개정된 규약 시행 전인 1993년에 개최되어 전시공간 규모가 현행 인정 박람회에서 허용되는 규모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 m2로서 위 분류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지만 나중에 인정 박람회로 소급 적용된 케이스다. 2012 여수 엑스포의 경우 개정된 규약 시행 후에 개최되는 인정 박람회로서 위 분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따라서 전시공간의 규모가 대전 엑스포보다 작다.
3.3. 원예 박람회
자세한 내용은 국제원예생산자협회 문서의
원예박람회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역사
엑스포 초기의 시대상은 중세 유럽으로부터 내려오던 길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지역적 폐쇄성이 사라지며[4] 각 지역의 산업 발전 정도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게 되면서 이러한 기술적 발전을 한 데 놓고 비교하는 자리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1756년에 '영국산업박람회'가 열렸고, 1798년 프랑스 정부가 최초의 국영 산업전시회인 '제1회 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박람회의 시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849년까지 총 11회 정부의 공식 국영박람회가 개최됐고 이후 더 큰 규모로 박람회를 개최하려다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개최가 늦춰지자 영국이 선수 쳐서 유리궁전을 짓고 개최한 국영 박람회인 1851 런던 엑스포를 실질적인 세계 박람회로서의 시초로 꼽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자국의 선진 과학을 홍보하여 국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다. 아래와 같은 현대문명의 이기들은 엑스포를 통해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다.[5] 기술의 발전과 피드백이 빠른 현대에는 산업 박람회를 통해 빈번하게 신기술이 공개되지만, 체제 경쟁이 심하던 20세기 중반까지도 등록 박람회가 신기술 소개의 장으로 기능했다.박람회 | 소개된 기술 |
1851 런던 엑스포 | 크램튼의 증기 기관차 엔진 |
1853 뉴욕 엑스포 | 오티스의 엘리베이터 |
1876 필라델피아 엑스포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 하인즈의 공산품 토마토케첩[6] |
1878 파리 엑스포 | 에디슨 전구 및 축음기 |
1885 안트베르펜 엑스포 | 자동차 |
1893 시카고 엑스포 | 브라우니 |
1904 세인트루이스 엑스포 | 동력 비행기, 아이스크림콘 |
1939 뉴욕 엑스포 | TV, 나일론, 플라스틱, 녹음기 |
1970 오사카 엑스포 | 무선전화기, IMAX |
의외로 시작이 초라했던 올림픽과 월드컵과는 달리 엑스포는 초창기부터 화려하게 시작했다. 애당초 올림픽이 엑스포에서 스포츠 분야를 분리해 시작하다 보니 초창기에는 마치 엑스포의 부속 행사 성격이 강했고, 그 때문에 초기의 올림픽은 엑스포와 같이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국박람회는 자국이 얼마나 발전했고 선진화됐는지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고 각 나라의 과학적, 예술적, 문화적인 걸작들이 출품돼 한 자리에 모이는 세계 교류의 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나서서 엑스포 개최를 도모했고정치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
대표적으로 1937 파리 엑스포 때는 독일[7]과 소련은 자국의 파빌리온(pavilion)[8]을 서로 마주본 채로 상대방보다 높고 거대하게 만들려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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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파리 엑스포의 모습. 나치 독일과 소련의 체제 대결 구도가 극명히 드러난다. |
위 사진에서 왼쪽이 독일이고 오른쪽이 소련이다. 독일과 소련은 호스트인 프랑스 국가관의 몇배나 되는 국가관을 짓고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10] 국가관을 통해 서로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선전했고, 그 끝은 1941년 독소전쟁으로 터져버렸다.
1900 파리 엑스포 때는 무려 2,0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는데 당대 인구로 미뤄볼 때 엄청난 수준이다.[11] 그리고 엑스포의 영향력은 막강해 와인 등급[12]과 세계 도량형 기구가 엑스포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원래 시카고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나중에 세인트루이스로 변경했는데 이유가 세인트루이스에 엑스포가 개최 중이라 거기에 모인 관람객들에 편승하려고.
그러자 너도나도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혼란[13]을 수습하고자 파리에 국제박람회기구(국제 박람회 사무국, BIE)가 설립되었고, 이에 의해 공인받은 엑스포만이 공식적인 국제행사로서의 '세계 박람회'가 되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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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브뤼셀 엑스포의 소련관(좌), 1970 오사카 엑스포의 미국관(우). 양국 우주 경쟁의 상징인 스푸트니크 2호와 아폴로 11호를 전시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최된 엑스포도 냉전 시대의 체제 경쟁과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다니긴 마찬가지였다. 1967 몬트리올 엑스포에서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해 "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라는 퀘벡 분리독립 연설로 캐나다와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1967 몬트리올 엑스포 당시 샤를 드 골의 발언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 |
BIE가 설립되면서 엑스포의 명칭도 "등록 박람회"는 World's Fair로 정해졌다. Expo는 약칭으로 쓰는 것이다. 인정 박람회나 원예박람회는 Expo라는 단어만 쓸 수 있고 World's Fair를 못쓴다. 이 World's Fair라는 표현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인 1949년, UN 산하 기구로 BIE가 편입되면서 UN의 세계 표준 상표권으로 등록되었다. 따라서 등록 박람회 World's Fair라는 표현을 다른 전시회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Expo에는 이런 조치를 하지 않아서 지역의 박람회를 "엑스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1. 상업주의와 엑스포
엑스포가 창시될 당시에는 각국의 국력 과시의 장이자, 인류 문명의 성취를 확인하는 장으로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미국을 제외한 각국 경제의 피폐 및 과학 문명에 대한 회의로 인해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 몬트리올 엑스포 및 1970 오사카 엑스포의 성공으로 엑스포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국력 과시의 장에서 대중에게 희망을 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은 세계 박람회를 마치 흥행을 위한 테마파크인 양 변질되게 한 측면도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의 많은 엑스포가 환경의 보호나 그 유사한 것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실상은 엑스포 개최지 주변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15]이고, 빠르게 발전된 정보통신 수단으로 인해 엑스포의 의미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많고 극단적으로는 행사 개최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박람회는 관광객 유치 내지는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꾸준히 유치 경쟁이 존재하고 또 개최되고 있다. 특히 유럽 지역의 경우 박람회 문화가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 엑스포가 자주 유치되고 또 개최된다. 박람회라는 것을 보러 가기 위해 돈을 쓰는 사람들이 주로 유럽인이고, 유럽에서 열리는 엑스포가 그들이 관람하기는 가장 편할 수밖에 없다...
4.2. 한국과 엑스포
한국은 조선 왕조시기인 1883년 최초로 서구권으로 파견된 사절인 보빙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열린 1883 보스턴 기술공업박람회에 비공식으로 물품을 출품하였다. 이때 처음 보스턴박람회를 본 민영익은 감동하면서 다음 해인 1884년에 한양에서 국제산업박람회를 열겠다고 발표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889 파리 엑스포에는 민영찬(閔泳瓚)을 대표로 파견하여 참가하였으나 따로 전시관도 마련하지 않았고 그저 참가에만 의의를 둔것이었다. 그 후 본격적인 참가는 1893 시카고 엑스포로서 세계 박람회위원회의 초청으로 참의내무부사 정경원(鄭敬源)을 파견하여 '제조와 교양관'(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Building)에 전시관을 마련하고 물품을 출품하였다. 당시 정경원과 고종의 대화(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대한) 한국의 참가는 플랑시 공사 등 프랑스측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서였다. 한국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은 들로 드 글레옹 남작 Baron Delort de Gleon은 비단, 도자기, 장롱, 의복, 화문석 등 한국의 주요 생산품을 모아 진열해 놓는 것 이외에 노점상, 공방, 술집, 장터 등 한국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제물포의 한 거리를 생생하게 재현하고자 했었다. 또한 민속놀이, 곡예, 의례 등 축제 한마당을 열고자 했었다. 즉 1900년 파리박람회를 통해서 한국의 고유한 풍습, 민속까지도 고루 프랑스 인들과 나아가서 세계인들이 주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하는 큰 기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글레옹 남작의 죽음은 한국관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마는 불운을 가져왔다. 후임자인 미므렐 백작 Comte de Mimerel은 민속부문의 전시 기획을 철회하고 단지 공공부문의 전시만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당초 글레옹 남작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는 한국의 문화를 보다 생생하게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한국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와 관련된 문서, 한국관 전시목록, 건축도면 및 한국관에 대한 모리스 쿠랑 Maurice Courant의 상세한 소개의 글 등을 수집하여 제2편에 수록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서 한국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하게 된 과정, 전시목록, 건축된 한국관의 규모 및 취소된 한국관의 규모 등 한국의 참가를 둘러싼 비교적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국사편찬위원회, <韓佛關係資料> 해제에서. #
그러나 불행하게도 글레옹 남작의 죽음은 한국관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고 마는 불운을 가져왔다. 후임자인 미므렐 백작 Comte de Mimerel은 민속부문의 전시 기획을 철회하고 단지 공공부문의 전시만을 실현시켰던 것이다. 당초 글레옹 남작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는 한국의 문화를 보다 생생하게 외국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한국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참가와 관련된 문서, 한국관 전시목록, 건축도면 및 한국관에 대한 모리스 쿠랑 Maurice Courant의 상세한 소개의 글 등을 수집하여 제2편에 수록하였다. 이 자료를 통해서 한국이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참가하게 된 과정, 전시목록, 건축된 한국관의 규모 및 취소된 한국관의 규모 등 한국의 참가를 둘러싼 비교적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국사편찬위원회, <韓佛關係資料> 해제에서. #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후 1900 파리 엑스포에 프랑스의 초청으로 참가하였다. 이번에는 전시관 없이 참가만 한 1889 파리 엑스포나 1893 시카고 엑스포때 '제조와 교양관' 한켠에 전시관을 마련한것과는 달리 독립적인 국가관을 세워 훨씬 더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민영환이 유럽대사로 임명되면서 대표로 갔고 사업가인 루리나를 파리주재총영사로 임명하여 진행시켰다. 대한제국관은 프랑스의 페레(E. Feret)가 설계한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한 것이었다. 정부 대리인으로 관립 불어학교 교사이자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를 찍었으며 불한사전을 써낸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évêque)가 있었다.
이후 베트남에서 개최된 비공식 박람회인 1902 하노이 엑스포에 물품을 보내고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는 대한제국은 박람회에 참가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라가 없어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주도로 비공식 박람회인 1910 영일박람회, 1922 평화기념동경박람회(平和記念東京博覽會) 등에 '식민지 조선'이 참가하였고 일제강점기시기 조선총독부가 일본에서 열린 박람회, 공진회에 참여한 것도 104차례에 이른다.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박람회와 공진회가 173개나 열렸다. 특히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오주년기념(始政五周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 때에는 궁궐을 파괴하면서 전시실을 만들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1962년 시애틀 엑스포에 대한민국 국명으로 처음 참가하였으며 이때부터 계속 참가하고 있다. 한편 1967년 홍콩에서 한국섬유전시회를 개최한 뒤 1968년에는 국내 최초로 ‘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을 주제로 해외 10개국, 국내외 293개 업체 참가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975년에는 75특별상품전(’75 Special Merchandise Show)을 개최하였고 그 후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매년 2회 봄, 가을에 서울교역전(Seoul Trade Show)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이 서울교역전을 모태로 하여 1982년부터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82: Seoul International Trade Fair 82)[16]를 열었으며 1993년에 대전에서 첫 인정 박람회가 개최되었고, 2012년 두 번째로 여수 엑스포가 개최되었다.
1998년부터 2~3년 간격으로 경주시에서 세계문화엑스포를 진행하지만 비공식 박람회이다. 이외에도 1999 강원국제관광엑스포 같은 전국 각지의 전시장에서 엑스포라는 이름을 내세운 다양한 비공식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인데, 미국의 E3(Electronic Entertainment Expo, 전자오락박람회), 프랑스의 재팬 엑스포 등이 그것이다.
2008년 후기부터 2010년 후기까지 부천시에서 무형 문화재 엑스포가 진행되다가 폐지되었다.
5. 역대 세계 박람회
역대 엑스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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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 런던 |
1855 파리 |
1862 런던 |
1867 파리 |
1873 빈 |
1878 파리 |
1880 멜버른 |
1889 파리 |
|||
1893 시카고 |
1897 브뤼셀 |
1900 파리 |
1905 브뤼셀 |
||
1906 밀라노 |
1910 브뤼셀 |
1913 헨트 |
|||
1933 시카고 |
1935 브뤼셀 |
1937 파리 |
1938 헬싱키 |
||
1939 브뤼셀 |
1939 뉴욕 |
1947 파리 |
|||
1949 리옹 |
1951 릴 |
1953 로마 |
1954 나폴리 |
||
1955 토리노 |
1957 베를린 |
1958 브뤼셀 |
|||
1961 토리노 |
1962 시애틀 |
1965 뮌헨 |
|||
1970 오사카 |
1974 스포캔 |
||||
1982 녹스빌 |
1985 츠쿠바 |
1986 밴쿠버 |
|||
1992 제노바 |
1992 세비야 |
1993 대전 |
|||
1998 리스본 |
2000 하노버 |
2005 아이치 |
2010 상하이 |
||
2012 여수 |
2015 밀라노 |
2020 두바이 |
2025 오사카·간사이 |
||
2027 베오그라드 |
2030 리야드 |
2032 |
2035 |
2037 |
|
*
2023 부에노스 아이레스 엑스포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경제악화 자재 상승으로 인해 취소 ■ 의정서 이전 박람회 ■ 등록박람회 ■ 인정박람회 |
BIE 기준 구분 |
등록 박람회(World's Fair) |
인정 박람회(International Expo) |
1933 BIE 의정서 이전 세계 박람회 |
6. 역대 세계 원예 박람회
역대 원예박람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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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
1960 로테르담 |
1963 함부르크 |
1964 빈 |
1969 파리 |
1972 암스테르담 |
|||||
6회 | 7회 | 8회 | 9회 | 10회 | |||||
1973 함부르크 |
1974 빈 |
1980 몬트리올 |
1982 암스테르담 |
1983 뮌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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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 12회 | 13회 | 14회 | 15회 | |||||
1984 리버풀 |
1990 오사카 |
1992 주테르메이르 |
1993 슈투트가르트 |
1999 쿤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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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 17회 | 18회 | 19회 | 20회 | |||||
2002 하를레메르메이르 |
2003 로스토크 |
2006-07 치앙마이 |
2012 펜로 |
2016 안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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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회 | 22회 | 23회 | 24회 | 25회 | |||||
2019 베이징 |
2022 암스테르담·알메르 |
2023 도하 |
2027 요코하마 |
2029 나콘랏차시마 |
역대 세계 원예 박람회 목록 | ||||
<rowcolor=#ffffff> 회차 | 연도 | 개최국가 | 개최도시 | 비고 |
1 | 1960년 | 네덜란드 | 로테르담 - 1960 로테르담 엑스포 | |
2 | 1963년 | 독일 | 함부르크 - 1963 함부르크 엑스포 | |
3 | 1964년 | 오스트리아 | 빈 - 1964 빈 엑스포 | |
4 | 1969년 | 프랑스 | 파리 - 1969 파리 엑스포 | |
5 | 1972년 |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 1972 암스테르담 엑스포 | |
6 | 1973년 | 독일 | 함부르크 - 1973 함부르크 엑스포 | |
7 | 1974년 | 오스트리아 | 빈 - 1974 빈 엑스포 | |
8 | 1980년 | 캐나다 | 몬트리올 - 1980 몬트리올 엑스포 | |
9 | 1982년 |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 1982 암스테르담 엑스포 | |
10 | 1983년 | 독일 | 뮌헨 - 1983 뮌헨 엑스포 | |
11 | 1984년 | 영국 | 리버풀 - 1984 리버풀 엑스포 | |
12 | 1990년 | 일본 | 오사카 - 1990 오사카 엑스포 | 원예박람회 역대 최다 관람객(2312만 7천 명) |
13 | 1992년 | 네덜란드 | 주테르메이르 - 1992 주테르메이르 엑스포 | |
14 | 1993년 | 독일 | 슈투트가르트 - 1993 슈투트가르트 엑스포 | |
15 | 1999년 | 중국 | 쿤밍 - 1999 쿤밍 엑스포 | |
16 | 2002년 | 네덜란드 | 하를레메르메이르 - 2002 하를레메르메이르 엑스포 | |
17 | 2003년 | 독일 | 로스토크 - 2003 로스토크 엑스포 | |
18 |
2006년 - 2007년 |
태국 | 치앙마이 - 2006-07 치앙마이 엑스포 | |
19 | 2012년 | 네덜란드 | 펜로 - 2012 펜로 엑스포 | |
20 | 2016년 | 튀르키예 | 안탈리아 - 2016 안탈리아 엑스포 | |
21 | 2019년 | 중국 | 베이징 - 2019 베이징 엑스포 | 역대 최대 규모 원예박람회 |
22 | 2022년 |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 알메르 - 2022 암스테르담·알메르 엑스포 | |
23 | 2023년 | 카타르 | 도하 - 2023 도하 엑스포 | 2021년에서 개최 연기 |
24 | 2027년 | 일본 | 요코하마 - 2027 요코하마 엑스포 | |
25 | 2029년 - 2030년 | 태국 | 2029 나콘랏차시마 엑스포 |
7. 기타
- 슬릭백 개최기간이 3주에서 6개월[19]로 제한되는 관계로, 커다란 비용을 들여 건설한 박람회 시설의 사후 활용이 중요하다. 대체로 임시시설물로 건축되어 철거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1993 대전 엑스포의 시설물의 경우 '엑스포 과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반 정도의 시설물을 영구시설물로 남겨 테마파크를 구성했으나 결국 대전광역시의 악성 적자 컨텐츠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교훈(?)을 살려 2012 여수 엑스포의 전시관들은 대부분 철거될 예정. 현재는 주제관, 국제관, 스카이타워, 아쿠아리움만 남아있다. 그러나 아쿠아리움과 스카이타워는 그럭저럭 돌아가지만 주제관과 국제관은 영 아니올시다인 상황.
- 일부 국가들은 전시관이나 조형물을 대회가 끝난 이후 자국으로 뜯어오거나 제3국에 두는 경우도 있다. 소련이 1937 파리 엑스포를 장식했던 '노동자와 콜호스의 여성' 조형물과 1967 몬트리올 엑스포의 소련관을 자국 모스크바의 베데엔하로 가져온 사례가 대표적. 페루, 칠레, 포르투갈, 아랍에미리트 같은 나라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1993 대전 엑스포나 1970 오사카 엑스포의 영향으로 열렸다 하면 흥행에 대성공하는 일종의 황금알 낳는 거위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5번의 공인 박람회[20]를 개최하였으나 1970 오사카 엑스포를 능가하는 흥행을 거둔 바는 없으며, 1985 츠쿠바 엑스포의 경우 츠쿠바 학원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그야말로 초딩 눈높이 엑스포를 표방했다가 이바라키현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21]
- 일본의 만화에서는 1970 오사카 엑스포(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자주 등장한다.[22]
- 미국 대중매체에서는 마찬가지로 1964년 뉴욕 엑스포가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시가 맨 인 블랙과 아이언맨 2. 하지만 BIE 공인 엑스포가 아니다. 바로 2년 전에 1962 시애틀 엑스포가 열렸기 때문에 BIE는 1964 뉴욕 엑스포를 인정하지 않았다.
-
몬트리올의 한인들이
1967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는
장-드라포 역 인근에 가림막으로 가려진 채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
1967 몬트리올 엑스포 당시 한국관 | 한국관 현재의 모습 |
- 1992년 5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1992 세비야 엑스포, 1992 제노바 엑스포, 1992 주테르메이르 엑스포 3개의 엑스포가 기간이 겹쳤는데, 국제박람회기구 주관 엑스포 중 3개의 엑스포의 기간이 겹친 해는 1992년이 유일하다. 1949년에도 3개의 엑스포가 개최되었지만 모두 기간이 겹치지 않았다.
- 연도가 2로 끝나는 원예박람회[23]는 모두 네덜란드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2003년까지 연도가 3으로 끝나는 원예박람회[24]는 모두 독일에서 개최되었지만 2023년 원예박람회의 개최지가 카타르 도하로 결정되면서[25] 해당 타이틀은 깨졌다.
8. 관련 문서
[1]
1876, 1893, 1904, 1915, 1933,
1939, 1962, 1968, 1974, 1982, 1984
[2]
/ɛk.spo.zi.sjɔ̃ y.ni.vɛʁ.sɛl/
[3]
육십갑자로 치면 을(乙)과 경(庚)으로 시작하는 해이다.
[4]
1791년에는 "노동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5]
사단법인 2030부산월드엑스포 범시민유치위원회 발췌, 수정 인용.
[6]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하인즈(Heinz)사를 설립한 F. & J. 하인즈가 만든 시판용 케첩으로, 세계 최초의 시판용 케첩이자 미국 최초의 포장식품이기도 하다.
[7]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자
건축가였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함.
[8]
박람회나 전시장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임시로 만든 건물.
[9]
소련은 특유의 선전 동상을 출입구 건물을 기단 삼아 올렸는데, 독일은 슈페어 특유의 고전주의 건축물을 동상보다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국장인 독수리를 올려놓았다.
매우 활동적인 형태의 소련 동상과 그걸 내려다보는듯한 차가운 인상의 독수리가 인상적.
[10]
아돌프 히틀러는
1937 파리 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 측에서 히틀러의 참석을 견제하는 바람에 결국 방문 일정을 포기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조치에 빡친 히틀러는
3년 후에
프랑스를 멸망시켜서 기어이
파리 땅을 밟는 데에 성공했다.
[11]
인구가 당시에 비해 훨씬 증가한 후 열린
2012 여수 엑스포의 관람객이 약 800만이다. 1900년 인구가 약 20억 명, 2012년 인구가 70.2억 명인 것과, 1900년에는 장기 여행을 할 수단이 느린 증기기관차와 정기 여객선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산술적 수치인 2.5배를 넘어서는 엄청난 수치다. 물론 여수 엑스포가 워낙 부진한 성적으로 마지막 가서는 표를 할인하는 전략까지 내세워 겨우 목표치를 달성한 부진한 박람회였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2000만이라는 숫자가 당시 인구 기준으론 상당히 많은 인원이었긴 하지만 1937 파리 엑스포 3000만, 1939 뉴욕 엑스포 4500만, 1970 오사카 엑스포 6400만, 2010 상하이 엑스포 7300만, 2002 아이치 엑스포 2200만, 2015 밀라노 엑스포 2100만, 1993 대전 엑스포 1450만 등 대부분은 기본 천만 단위의 관람객을 찍었다.
[12]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박람회에서 홍보할 목적으로 1855년에 그랑 크뤼 클라세(등급제)를 제정하게 됐다.
[13]
올림픽은 참가자들의 비용을 주최 측에서 지원하지만 세계 박람회는 원칙적으로 각 참가국에서 알아서 비용을 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엑스포가 열리게 되면
돈이 들어서 참가하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체면상 참가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14]
그 외의 경우는 아무리 '엑스포'나 '박람회'라는 명칭을 써도 그냥 지역 행사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을 예로 들자면
고성군
공룡 엑스포 같은 경우.
[15]
1970 오사카 엑스포는 물론 심지어 미국에서 개최된
1982 녹스빌 엑스포도 마찬가지이다.
[16]
1982부터 1994년까지 2년마다 격년제로 시행하였으며 위치는 한국종합전시장
COEX였다. 이때는 아직 빌딩이 올라가기 전이었다.
[17]
전세계에 프랑스와인을 쉽게 소개하고자 엄선된 61개의 샤토들을 5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소개했다. 이때문에 와인과 깊은 연관을 가진 엑스포이기도 하다.
[18]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이 각각 물품을 출품했다. 대회 진행 도중에
대정봉환이 일어 났다.
[19]
인정 박람회는 3개월.
[20]
오사카(등록 박람회), 오키나와(인정 박람회), 츠쿠바(인정 박람회), 오사카(원예박람회), 아이치(등록 박람회)
[21]
참고로 1970년의 기록은 2010년에
상하이 엑스포에서 깨졌는데, 워낙 많은 인구의 내수시장이 든든히 받쳐 준 결과였다.
[22]
일본 만화인
짱구는 못말려에서 시대 박물관에 70년대 전시관에 나오는데, 그 당시 딱히 우리나라에서 진행한 박람회 행사가 없었기 때문에 국내판에서는 70년대 서울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로 얼버무려 나온다.
2000년대부터는
1993 대전 엑스포로 로컬라이징되는 경우가 많다.
2020년대 이후에는
2012 여수 엑스포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23]
암스테르담(1972, 1982, 2022),
주테르메이르(1992),
펜로(2012),
알메르(2022)
[24]
함부르크(1963, 1973),
뮌헨(1983),
슈투트가르트(1993),
로스토크(2003)
[25]
원래 2021년에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2년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