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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04:17:08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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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명칭4. 용도와 제작 방법5. 한국의 고인돌
5.1. 출토 유물
6. 대한민국7. 종류8.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96983848934656.jpg
강화 부근리 지석묘
고인돌(支石墓/Dolmen)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며, 무덤 위에 큰 돌을 올려놓거나 큰 돌을 관의 뚜껑으로 사용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특히 한반도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됩니다.
국립김해박물관 공식 소개 문구

고인돌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 무덤의 한 종류이다.

거석(巨石)문화를 대표하는 석재 건축물 중 하나이며,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동남아시아 등 세계 여러 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기원전 1500년-1300년경부터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1]

2. 상세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고인돌은 농업과 정주 생활이 시작된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규모가 크고 구조도 다양한데, 약 4만여 기가 분포한다.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특히나 전라남도에서 거의 2만여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비록 근래까지 고인돌 귀한 줄 모르고 석재로 써먹기도 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많이 없앴기에 유실된 고인돌도 많다.[2]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한반도 전역에서 고인돌이 계속해서 발견되어 해마다 개수가 늘어난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3500년 무렵에 만든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카르나크 고인돌이 있다. 스페인 과달페랄 고인돌은 독일 고고학자가 1926년에 발견했는데 기원전 5천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인돌들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고대 석조 유적은 아니다. 자그마치 기원전 9600년 무렵에 건설된 튀르키예 지역 괴베클리 테페가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T자 모양의 석조 건축이라는 점이 고인돌과 비슷하지만 지배자를 매장한 무덤이 아니라 돌기둥을 세워 축조한 고대 신전이거나 또는 조장을 위한 장례 시설로 추측되는 유적이라서 고인돌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괴베클리 테페는 건설된 시기가 워낙 고대라서 화제가 되지만 가장 무거운 돌기둥은 16톤 정도이다. 중국에도 고인돌이 있는데 한반도만큼 많지는 않지만 특히 중국 동북쪽에서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며, 중국 최대 고인돌은 '중국 최초의 지상축조물'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즉 중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서 발견된 4~5세기 경 가락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350t 규모의 고인돌이다. 그런데 2022년 지석묘 고인돌 유적 복원공사 도중 포크레인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이 복원공사는 김해시가 구산동 지석묘를 국가사적으로 승격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실행했지만 전문가의 입회도 없이 중장비를 이용해 묘역의 잔존 석재들을 갈아 엎어버리며 고인돌의 핵심부분인 상석 아래 묘역 석재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만 발굴 조사는 조기에 제대로 이뤄져 상석 밑의 목관묘 1식과 그 안의 토기 2점은 발굴되어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3. 명칭

덮개돌을 받침돌로 괴어 놓았다고 해서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한반도의 고인돌들은 하필 무덤 기념물이다 보니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고인(故人)+돌이라고 짐작하여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돌을 괴어서 만든 것'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한자로는 支石墓(지석묘), 石棚墓(석붕묘) 또는 석붕(石棚), 영어로는 dolmen이라고 불린다. dolmen은 프랑스어에서 온 단어인데, 프랑스 카르나크 고인돌이 발견된 브르타뉴 지역의 언어인 브르타뉴어의 'Taolvaen'에서 유래했다. Taol은 테이블, maen이 돌이라는 뜻이다.[3]

4. 용도와 제작 방법

고인돌은 '무덤'보다 '거석 구조물'이란 인상이 더 강하지만 밑에는 실제로 무덤이 있다. 대개 땅을 파서 돌널무덤 형식으로 방을 만들어 사람을 매장하고 위에 굄돌과 고인돌을 쌓는다. 다만 전부 무덤방이 있는 것은 아니며 묘표석, 제단 등 종교적인 용도로 만든 고인돌도 있다. 기사 사진

고인돌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아해지는 조합을 이루지만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림은 간단하지만 영국 호킨스라는 학자에 의하면 예를 들어 70톤 덮개돌 운반에는 1,120명, 50톤 받침돌 운반에 800명, 받침돌 세우기 200명으로 이 경우 하루에만 최소 2,12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KBS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6.8톤 덮개돌 운반에 대략 70명이 필요하고, 즉 40~50톤의 덮개돌을 운반하려면 400~500명이 필요하다. 아무튼 간단히 zum 학습백과 그림으로 설명해 보면,
파일:external/study.zumst.com/%EA%B3%A0%EC%9D%B8%EB%8F%8C%20%EB%A7%8C%EB%93%A4%EA%B8%B0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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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제작 과정
현존하는 고인돌들의 접접면을 봐도 그 당시 끼인 흙 층을 발견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선사시대 거석 유적들도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

사적 137호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뚜껑돌만 해도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흑운모 편마암으로 추정무게는 80톤이다. 부근리 고인돌을 만들려면 장정이 최소 800명 남짓한 집단이 있어야 한다는 구상이 나온다. 해외 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둥근 통나무 위에 약 1톤 무게 돌을 올려놓고 옮기는 데에는 성인 남자 약 10명이 필요하다. 관련 논의

소수설이기는 하지만, 통나무를 굴리고 끈을 썼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100톤 이상의 돌을 견딜 수 있는 통나무는 없음). 통나무를 깔자면 당연히 그것을 벨 수 있는 도구가 있었어야 하고 끈으로 당겼다면 그 정도의 인장력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술들이 있었는지 어떤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러나 나무는 돌도끼로도 충분히 자를 수 있고, 실제로 발견되는 저 시기의 대형 움막 유적에는 내부에 큰 지붕을 감당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기둥들을 세운 흔적이 있는 터가 발굴되므로 견고한 나무 기둥을 가공하는 기술이 있거니와, 이 시기에는 직물을 짜거나 실을 뽑는 데 사용한 가락바퀴와 돗자리나 원시적인 거친 직물을 짜는 데 사용된 추인 고드랫돌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실을 뽑고 돗자리를 짤 기술력이면 굵고 튼튼한 밧줄 정도도 충분히 만들고 남는다.[5]

지리학계의 한 논문에서는 고인돌이 산비탈에 위치한다는 점[6], 장축의 방향이 대부분 경사방향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풍화현상에 의해 지표에 노출된 거석들이 솔리플럭션 현상에 의해 자연스럽게 산정부에서 산록부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이 경우 돌을 옮길 필요 없이 산의 하단을 약간 파내서 굄돌을 괴기만 한다면 손쉽게 고인돌을 만들 수 있어서 한반도 고인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반식 고인돌은 이와 같이 축조했으리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덮개돌 하단의 무덤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점, 평지나 낮은 구릉지대에 조성된 고인돌도 많다는 점 등 문제점이 있는 가설이다.

5. 한국의 고인돌

파일:강화군 고인돌.jpg
강화 부근리 지석묘
한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많이 만들어졌고, 옛 학설에서는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하는 지표유물로도 생각했고 아직도 교과서에는 그런 암시가 나오지만 최신 학계에선 고조선과 좀 다른 문화에서 만든 것으로 보는 추세다.[7], 전 세계 고인돌 약 6만 기 중 3만 기 정도가 한반도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동네에서는 집을 지으려고 보니까 무지막지한 돌덩이가 막았고 치우기도 너무 커서 그냥 안에 두고 지었는데 알고 보니 고인돌이더라 하는 집도 더러 있다.

남한의 고인돌은 대부분 전라남도 지방에 집중되었다.[8] 지역별로 보자면 강원 338기, 경기도 502기, 충북 189기, 충남 478기, 전북 1597기, 전남 1만 9068기, 경북 2800기, 경남 1238기, 제주 140기로 거의 대부분의 고인돌은 전남에 집중되었다. 최근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중도에서 대규모 유적지가 발굴되어 여기에 101기가 더 추가되었다. 여기에 북한이 주장하는 고인돌 수를 합하여 3만여 기라고 하는 것.

서울에서도 고인돌이 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시 개발을 급속히 진행하는 과정에서 거의 멸실되었다. 정릉동, 개포동(4기), 개포동 대모산, 우면동, 양재동(6기), 원지동(16기), 고척동 등지에서 존재하였으며 그중 원지동 고인돌은 1984년에 16기가 관련 유물과 함께 발견하였으나 보호 시설물과 안내판 설치, 문화재 지정 등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서울 말고도 적극적으로 보호를 하지 않는 이상 멸실되는 경우가 많다. 농경지에 위치했다면 경작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구석으로 치워버리거나 조경용으로 판매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크기가 크다 보니 꽤 비싼 값에 사간다고 한다. 또한 잘 다듬은 돌은 집 지을 때 주춧돌 등 석재로서도 가치가 있기 때문에 역사시대에 석재로 많이 쓰였고, 비교적 근래까지도 고인돌을 깨부셔서 채석장으로 보낸다는지 하는 식으로 고인돌 유적 귀한 줄 모르고 이런 식으로 재활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충청, 경기도 일대의 주거 유적은 많이 나오는데 분묘유적이 적기도 하고...

과거 동아시아에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부르며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실증주의적 고고학이 대두하기 전까지는 흥미의 대상이었을 뿐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돌 밑을 캐면 사람 뼈와 함께 경우에 따라서 청동검, 석검, 거울, 토기같은 골동품이 나왔기 때문에 대충 옛날 사람들 무덤이라고 여겼기는 했지만 기록이 없던 시대이다 보니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이었다.[9] 거기에 더해 연대 자체가 오래되었고, 탁자식 고인돌처럼 매장부가 지상으로 드러나 도굴이나 유실의 위험이 크기도 해서 유물 등이 잔류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연구하기에 아쉬운 점이 있다. 다만 무덤의 수효 자체가 많아 자잘한 발굴은 계속되는 중이며 당대의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추론할 정도가 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은 경남 김해시 구산동 고인돌이며, 그 무게가 무려 350톤이나 된다. 기사 이 전까지 가장 큰 고인돌이 280톤(전남 화순)이고, 모아이석상 3-10톤, 피라미드 돌 하나가 2.5-10톤, 스톤헨지 5-50톤이므로 350톤이면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이것은 지자체 예산이 없어 땅에 묻힌 채로 방치되었는데, 이렇게 무거운 고인돌의 덮개를 그냥 대충 들어올리는 것도 아니고 유적의 손상 없이 안전하게 들어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2년 7월 김해시청 가야사 복원과가 굴착기 3대를 동원하여 구산동 고인돌을 모조리 훼손하였다. 전문가 입회 없이 비전문가 공무원이 비전문가 토목업체와 협업하여 이루어낸 참사이다. 박석과 기단을 전부 뽑아내서 고압세척으로 훼손한 후 대충 보기좋게 가지런히 박아넣어 원형을 알 수 없게 만들었으며, 그 아래에 묻혀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를 비롯한 생활유적들은 그대로 갈아엎어버려 모조리 바스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유적지를 하루아침에 아무 쓸모없는 거대한 돌덩이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2020년 5월 청주시 월오동에서 다량의 청동기 시대 문화유적이 출토됐다. 탁자식과 기반식의 고인돌 형태가 모두 발견된 이른바 '고인돌 백화점'으로 불리며 역사적 가치도 높이 평가받는다. 이번 출토 현장에서 함께 발견된 붉은관 민무늬토기, 돌칼, 화살촉 등의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또한 중층 형태인 지석묘가 국내에서는 첫 발견됐다. 충청북도는 이번 유적터를 당초 조성 중이던 재난안전체험 복합타운 한켠에 교육자료로 보존조치할 방침이다. #

5.1. 출토 유물

한반도의 고인돌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 전기[10]에 나타나는데, 한반도에 고인돌이 유행했던 기원전 1200년-기원전 800년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논농사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보통 고인돌 10기를 파면 마제석검 1점이 출토되고 비파형동검은 그 수가 훨씬 적다. 비슷한 시기에 만든 암각화와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의 상태에 따르면, 고인돌 바로 앞의 땅에 마제석검이나 비파형동검을 거꾸로 꽂아 죽은 사람을 기렸다고 추정한다.[11] 또는 검을 2~3개로 쪼개서 고인돌 앞에 묻어 제례의식을 하기도 하였다.

무덤방이 없는 고인돌은 사직단이나 종묘, 나정처럼 종교나 제례의식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덤방이 있는 고인돌은 일반적으론 고인돌이 바둑판식처럼 바닥에 낮게 깔려있거나 사방이 막힌 경우고, 없는 경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처럼 돌 두 개 위에 덮개석이 올라간 식이다.

고인돌은 자연석 그대로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암각화 그림을 새기기도 했다. 예를 들어 북두칠성과 같은 별자리를 새기기도 했는데, 평안남도나 황해도, 전남 등에서 발견된다. 별 위치로 대략 시기를 따지면 기원전 2700-기원전 1000년 무렵에 새긴 듯하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별자리 기록이다. 룡덕리 고인돌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대부분이 색칠이 벗겨졌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뭔가 새겼던 흔적은 있어도 뭘 새겼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12] 즉 처음 만들었던 당시에는 훨씬 많은 암각화가 고인돌에 새겨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었는데 후대인들이 거기에 그림을 새겼다거나, 혹은 반대로 석기 시대에 암각화를 그리고 그 돌을 청동기 시대에 고인돌로 썼을 수도 있으므로, 꼭 고인돌의 그림이 고인돌 당시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대가야 박물관에서는 고령군에서 발견된 암각화를 새긴 바위로 고인돌을 만든 유적을 소개했다. 고인돌 인근에 암각화를 새긴 바위가 발견되었고, 이 바위에서 떨어져나간 부분이 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과 일치하여, 고인돌에 암각화를 새긴 것이 아니라 암각화가 새겨진 바윗돌로 고인돌을 만들었음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이 경우 석기시대에 주술적인 의미로 새긴 암각화가 고인돌을 만들 시대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질 정도로 둘의 시간적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

6. 대한민국

세계의 고인돌은 대한민국이 전 세계의 절반 이상에 달한 정도로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말고도 국내 전역에 많은 고인돌이 있는데, 전라남도 무안군, 순천시에 고인돌 공원이 자리한다. 국립광주박물관 2010년대에 특별전을 개최한 적이 있고, 옥외에 고인돌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6.1.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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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정문화재 목록

ㄱ.
*가학동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강진 송정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강화 내가 오상리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 대산리 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인천광역시 기념물)
*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거제 아주동 고분군(경상남도 기념물)
*거제 지세포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거제 청곡리 지석묘(경상남도 문화재자료)
*거제 학산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거창 내오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검단 대곡동 지석묘군(인천광역시 기념물)
*고대리 지석묘군(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고성 석지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고성 오방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고성 학림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고정리 지석묘(경기도 기념물)
*고창 부곡리 고인돌(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고창 상금리 지석묘군(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사적)
*고천리 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고흥 과역리 민등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고흥 도천리 지석묘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고흥 유둔리 덕암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고흥 중산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광령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 지석묘 3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 지석묘 4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 지석묘 5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 지석묘 6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리 지석묘 7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리 지석묘 8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리 지석묘 9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광령리 지석묘 10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교산리 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구례 봉서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구례 죽마리 지석묘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금산 용화리 고인돌(충청남도 문화재자료)
*금산 천내리 고인돌(충청남도 문화재자료)
*김해 내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김해 서상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김해 무계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김해 구산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김해 구지봉 고인돌(사적)

ㄴ.
ㄷ.
*도련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도련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동일리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동일리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동일리 지석묘 3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동일리 지석묘 4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ㅁ.
*밀양 남전리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ㅂ.
*보령 죽청리 고인돌(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부곡 지석묘(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부근리 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부안 구암리 지석묘군(사적)
*부여 산직리 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비래동 고인돌(대전광역시 기념물)
ㅅ.
*사월동 지석묘군(대구광역시 기념물)
*사천 덕곡리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사천 신벽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산수리 지석묘(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산청 특리지 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삼거동 고인돌군(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삼거리 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삼양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상예동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상예동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상예동 지석묘 3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상예동 지석묘 5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색달동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서산 둔당리 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속초 조양동 유적(사적)
*신례리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신례리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신안 안좌 방월리 지석묘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신안 흑산 진리 지석묘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ㅇ.
*양구 고대리 2지구 지석묘군(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양구 공수리 지석묘군(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양산 신기리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언양 지석묘(울산광역시 기념물)
*여수 산수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여수 오림동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연천 양원리 고인돌(경기도 기념물)
*연천 차탄리 고인돌(경기도 기념물)
*연천 통현리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연천 학곡리 고인돌(경기도 기념물)
*영광 성산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영암 엄길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오라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오산 외삼미동 고인돌(경기도 기념물)
*오상리 고인돌군(인천광역시 기념물)
*옥천 석탄리 고인돌(충청북도 기념물)
*완도 고금도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외도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외도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외도 지석묘 3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외도 지석묘 4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외도 지석묘 5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용담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용담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용담 지석묘 3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용담 지석묘 4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용두동 지석묘(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읍리 지석묘(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의령 상정리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의령 수성리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ㅈ.
*장흥 방촌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주암댐 지석묘군(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진도 송산리 지석묘군
ㅊ.
*창녕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창원 상남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창원 외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창천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철원 지석묘군(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경상북도 기념물)
*춘천 천전리 지석묘군(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충주 신청리 고인돌(충청북도 기념물)
*충주 조동리 고인돌(충청북도 기념물)
*칠성당 지석묘군(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ㅌ.
*통영 봉평동 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ㅍ.
*파주 덕은리 주거지와 지석묘군(사적)
*팔달산 지석묘군(경기도 기념물)
ㅎ.
*하귀 지석묘 1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하귀 지석묘 2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하모리 지석묘(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학익 지석묘(인천광역시 기념물)
*함안 군북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함평 용월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합천 학리 지석묘군(경상남도 기념물)
*홍성 지석묘(충청남도 기념물)
*홍천 군업리 지석묘군(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화순리 지석묘(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화순 벽송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휴천리 지석 및 입석(경상북도 기념물)
*해남 방축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해남 연정리 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7. 종류

과거에는 탁자식 고인돌을 북방식 고인돌로, 기반식(바둑판식) 고인돌을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는 분류가 일반적이었으나 현재는 잘 쓰이지 않는다.

8. 기타



[1] 동아시아 고인돌의 시작을 기원전 4000-3000년경 혹은 신석기시대로 보는 연구자가 수십년 전에는 일부 있었지만, 현재는 그 누구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고인돌은 덮개돌의 무게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인력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수십명 이상의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 집단적으로 모여 생활하는 정주 생활이 필수적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반도에서의 정주생활은 청동기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신석기시대에도 마을을 이루는 정주생활이 시작은 되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발굴상으로 확인되는 유물에서도 고인돌이 신석기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증거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2] 이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비슷하다. 원래는 겉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은 모양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거쳐 석재로 가져다 써먹으면서 지금은 계단식 속표면이 드러난 것. [3] vaen이 된 이유는 합성어에서 m은 대부분 연음화되어 v가 되기 때문이다. [4] 이 그림에는 큰 오류가 있다. 고인돌을 만들던 시대는 이미 원시인 생활을 한참 벗어난 뒤기 때문에 저런 타잔 같은 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적인 고증과 학습용 교재 이미지를 단순 비교하기엔 일부 무리가 있더라도 비단 이 그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교육용으로 제작한 많은 고인돌 그림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머리 길이도 짧고 수염도 없는 등 원시인처럼 묘사되고 심지어 지역에서 하는 고인돌 축제에서도 당연한 듯이 타잔 옷을 입고 재연할 정도라 고정관념, 편견이라는 것이 참 크게 자리잡았다. [5] 물론 당시 기술이 기술인 만큼 제법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로 실이 아니더라도 지푸라기로 만든 새끼도 굵고 튼튼하게 만들면 강도가 충분하다. [6] 혹은 과거 비탈이었던 곳. [7] 고조선의 원류는 요서 조양일대의 십이대영자 유적으로 보는 게 학계 중론이고, 십이대영자 문화에서 이어진 정가와자 유적 등 당대 고조선으로 추정된 유적들을 발굴해본 결과에 의하면 당시 지배층들의 무덤은 주로 적석목곽묘 형태로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8] 고대에는 구체적인 지역별 경계가 확정되지 않았었으므로 이렇게 보는 게 더 정확하다는 견해도 있다. [9] 고인돌에 관해선 한국 최고(最古)의 기록인 동국이상국집에서는 옛 성인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서술했다. [10] 기원전 1500년~기원전 400년 [11] 경북 김천 구성면 송죽리 고인돌에서 고인돌 바깥에 비파형동검이 땅에 꽂힌 채로 발견되었다. 여수 오림동의 암각화 역시 마제석검이 거꾸로 땅에 꽂혔고 사람 2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12] 비슷하게 이집트의 조각상이나 그리스 로마시대의 석상들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채색되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염료가 벗겨져서 밋밋해지거나 백색석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주요 길거리에 세워진 동상이나 조각상들이 채색되지 않게 된 것은 착각에 의해서였기 때문이고, 그 기조가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13] 기반식/개석식/탑파식/경사식/묘표식/묘역식 고인돌은 지하에 깬돌이나 판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위석식과 굴석식은 지상의 무덤방을 굄돌과 덮개돌로 둘러싼다. [14] 그런데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따르면 북한의 대표적 고인돌 밀집지역인 오덕리는 저수지가 생겨 고인돌들도 물에 잠겼다고 한다. 가끔 가뭄이 오면 물 위로 드러난다고 한다. [15] 롯데삼강 빠삐코 스크류바 아이스바의 광고 모델이 바로 이 작품. 참고로 주인공 이름이 '고인돌'이다. [16] 물론 주인공 보노보노의 상상 속 캐릭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