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挹 婁[1]
1. 개요
고대 만주 지역에 살던 퉁구스계 숙신의 후손이자, 부여의 종속국이었다.2. 역사
한서와 후한서 기록에 따르면 오랫동안 부여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나라 황초(220~226) 연간에 부여의 세금과 부역이 무거워 반란하여 종속에서 벗어났다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읍루인들이 화살에 독을 발라 공격하니 부여의 군인들이 이기지 못했는데, 고구려 영양왕 시절 말갈인들을 동원하여 요서를 공격할 때, 말갈인들이 독화살을 잘 쓴다고 표현한 걸로 보아 두 부족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도 읍루가 말갈의 전신이라고 여기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정체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듯하다. 관계가 없진 않을 듯.일부에서는 당시 몽골어족과 튀르크어족, 퉁구스어족이 특히 만주~바이칼호 일대에서 활동 영역이 겹치는 일이 많아 교류가 잦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해, '나라'를 뜻하는 몽골어 ' 울스(улс)'의 고대형을 음차한 것이 '읍루'라고 보기도 한다. 참고로 읍루의 상고한어 발음은 *qip-[r]o(낖로), 중고한어 발음은 ʔiɪp̚-ləu(잎루)이며, улс의 원형은 튀르크조어 *uluš(울루슈)로 재구되었다.
3. 풍속
매우 추운 지방에 거주했으며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땅에 무덤 같은 굴을 파놓고 거주했고, 몸에 돼지기름을 발라[2] 추위를 면했다. 목축과 농경을 같이 했다.그들은 항상 산림속에 살며 동굴 속 생활을 한다. 대가(大家)는 그 깊이가 9계단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긴다. 그 지방의 기후는 추워서 부여(夫餘)보다 혹독하다.
그들은 돼지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을 가린다. 그들은 깨끗하지 못해서 [집]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산다.
(읍루)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활의 길이는 4자인데 그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싸리나무(楛)를 쓰는데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되며,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들었으니, [이는 읍루가] 옛 숙신씨의 나라 [이기 때문]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 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의 담비가 그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挹婁)편
그들은 돼지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을 가린다. 그들은 깨끗하지 못해서 [집]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산다.
(읍루)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활의 길이는 4자인데 그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싸리나무(楛)를 쓰는데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되며,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들었으니, [이는 읍루가] 옛 숙신씨의 나라 [이기 때문]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 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의 담비가 그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挹婁)편
동해 인근에서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3]
특이한 점이 또 있는데, 이들은 소금을 구할 길이 없어 나무를 태운 다음 그 재를 물에 타서 이것을 소금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읍루인들이 집의 가운데에 화장실을 만들어 거기서 똥과 오줌을 눈다고 적었는데[4], 실제로 읍루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나나이족 같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살았던 전통 가옥들은 그런 구조다. 그래서 19세기 나나이족을 방문한 러시아인 탐험가들은 나나이족들의 몸에서 참을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기록했다(...)[5]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연해주에서 읍루인들이 살았던 유적지들을 발굴한 결과, 읍루인들이 이미 대장간을 차려서 자체적으로 도끼 같은 쇠로 만든 도구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심지어 도끼의 표면은 그 강도가 강철과 같을 만큼, 읍루인들이 독창적인 기술로 강화시켰을 정도였다. 아울러 2009년 러시아 사할린 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읍루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그 길이가 62cm나 되는 쇠로 만든 긴 칼이 있었다.[6] 사실 21세기의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를 보면 함경도와 연해주 일대가 고조선보다도 일찍 철기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고, 읍루인들도 야만족 취급을 받을지언정 주변 국가나 종족들과의 교류도 있었을테니 제철을 안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는 했다.
화살대로는 싸리나무를 쓰는데, 이걸 사용하는 이유는 싸리나무가 곧고 습하거나 건조해도 휘어지지 않으며, 만주와 밀림 지역에서 많이 자라서라고 한다. 또 독화살의 경우 베링 해 건너의 알래스카, 사할린 북부, 아무르강 하구, 아이누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이들과 동일한 문화권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고 한다.
읍루족의 문화 수준은 매우 뒤떨어졌으나, 대단히 사납고 난폭한 부족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이 강력하여 주변의 다른 집단들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고구려를 공격했던 중국 위나라 관구검의 군대는 고구려의 동쪽에 있는 옥저까지 쳐들어와 3,000명의 옥저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모든 마을들을 파괴했으나, 읍루인들의 영토에는 쳐들어가지 않았다.
4. 지리
서쪽에는 부여가, 동쪽에는 바다가 있었고, 북쪽은 끝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아마 북동시베리아 쪽이었던 거 같다)고고학에서는 아무르 강 중하류 지역에 폭넓게 분포한 우릴 문화, 우릴 문화 이후 탈라칸 문화( 아무르 주를 포함한 서아무르 유역), 폴체 문화(아무르 강 중하류, 기원전 2세기 이후 점차 연해주 일부까지 확장)를 읍루로 비정하고 있다.
읍루와 관련된 문화유형들에서 공통적이며 두드러지는 특징은 호류와 같은 토기들의 견부에 화살표 문양의 장식을 시문하는 것이 있으며 그 밖에도 수레바퀴 모양의 장식 등이 있다.
5. 기타
- 게임 바람의 나라에서는 부여의 한 성으로 등장한다.
[1]
위 지도에서 Yilou. 읍루의 중국어 병음 표기가 Yìlóu인 관계로 영문 표기로는 Yilou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돼지비계를 그냥 피부에 문지르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돼지비계에서 추출한 기름을 피부에 문지르는 것이다.
[3]
읍루인들의 후손인
여진족들도 동해에서 해적질을 자주 벌여
일본의
쓰시마와
규슈까지 쳐들어갔다!
#
[4]
왜냐하면 읍루인들이 살았던 곳이 워낙 춥기 때문에 볼일을 보러 일일이 집밖으로 나갔다 들어갔다 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5]
출처: 《옥저와 읍루》, 강인욱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2020년 12월 15일 발간
[6]
그 형태는 곧게 뻗은 검이었다. 다만 읍루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알타이 같은
중앙아시아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옥저와 읍루》, 강인욱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2020년 12월 15일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