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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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제5대 국왕 장양왕 | 莊襄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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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추존 황제 태상황 | 太上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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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왕릉 전경. | |
<colcolor=#fff> 생몰 | <colbgcolor=#fff,#191919>기원전 281년 ~ 기원전 247년 (34세) |
재위 | 기원전 250년 ~ 기원전 247년 |
성 | 영(嬴) |
씨 | 조(趙) |
휘 | 이인(異人) → 자초(子楚) |
시호 |
장양왕(莊襄王) → 태상황(太上皇) |
부모 |
부왕
효문왕, 적모 화양부인 생모 하희(夏姬) |
자녀 | 황자 시황제 |
[clearfix]
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제 30대 군주이자 5대 왕, 추존 황제다. 중국을 통일하는 진시황의 아버지였다. 휘는 '이인'(異人)이었다가[1], 나중에 '자초'(子楚)로 개명했다.2. 생애
2.1. 즉위 이전
영이인은 안국군 영주(安國君 嬴柱)와 하희(夏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국군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 하희가 첩인 데다가 안국군의 관심도 받지 못했고, 이미 이복 형제들이 20명이 넘었기에 왕위 계승 순위가 멀었다.[2] 당시 진나라는 법가가 근본 사상이었는데, 《 한비자》를 보면 알겠지만 성리학 못지 않은 정도로 적서 차별이 심한 사상이었다.[3][4]결국 영이인은 아버지가 진나라의 태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진나라에서는 방계 왕족 중의 먼 방계 왕족으로 취급받아 다른 나라에 인질로 갔는데, 하필이면 인질로 간 곳이 진나라와 툭하면 전쟁을 벌여서 목숨이 위험한 조(趙)나라였다. 후술하겠지만 실제로도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조왕이 영이인을 죽이려고 했다. 진나라도 태자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놓고 안심시킨 뒤에 전쟁을 벌이는 등 영이인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5]
영이인이 조나라에 인질로 간 시기는 그의 당시 나이와 진시황이 태어난 시점(기원전 259년 음력 1월 15일)을 보면 적어도 장평대전(기원전 259년 음력 9월)이 일어나기 이전에 갔던 사실을 알 수 있고, 장평대전 이후로 패전국인 조나라에서 영이인이 대우 받았던 수준은 처참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 사기》 < 여불위 열전>에는 "거마를 타고 행차할 때도 충분치 못했고, 거차하는 숙소는 곤궁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라고 묘사하여 조 왕실로부터 상당히 빈약한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 조나라 한단의 상인 여불위가 영이인을 보게 되었는데, 여불위는 영이인을 ' 진기한 재화'라 부르며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여불위가 영이인의 집을 찾아 왔다. 이 자리에서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안국군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어가라는 조언을 해주며, 500금을 내면서 자금으로 사용하라고 했다.
영이인은 "내가 왕이 되면 진나라를 나누어 그대와 함께 다스리겠다"라며 여불위의 조언을 따랐다.[6] 그 후 여불위에게 받은 돈을 화양부인의 가족들에게 뿌려서 호감을 샀다. 화양부인은 정실이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서 서자가 후계자가 되면 자신이 홀대받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는 영이인을 양자로 삼고는 안국군에게 영이인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약속까지 받았다.
그러던 중 영이인은 여불위의 집에서 한 여성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마음에 든 영이인은 여불위에게 부탁하여 그 여성을 부인으로 삼았다. 이 여성이 바로 조희로 영이인은 조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기원전 259년 음력 1월 15일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었다. 그리고 영이인은 아들을 낳아준 조희를 정실 부인으로 삼았다.
기원전 257년, 진 소양왕이 왕흘을 시켜 조나라 한단을 공격하자, 인질로 있던 영이인은 조나라 효성왕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영이인은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600근의 금을 병사들에게 뇌물로 뿌리며 조나라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영이인의 가족들은 조나라에 남겨졌는데, 조나라는 남아 있는 영이인의 가족들이라도 죽이려고 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부자 집안 출신이라서 조희와 영정 모자는 살 수 있었다.[7]
진나라로 돌아간 영이인은 적모인 화양부인과 만났는데, 이때 여불위는 영이인에게 초나라의 옷을 착용하고, 화양부인을 만나라고 조언을 했다. 이유는 화양부인이 초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인데, 역시나 화양부인은 매우 기뻐하며 영이인의 이름을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자초로 고치게 했다.[8]
2.2. 치세
진 효문왕 원년(기원전 250년), 아버지 효문왕이 죽어,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죄인을 크게 사면하고, 조부 소양왕 때의 공신들을 표창하면서 친족을 후대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진 장양왕 원년(기원전 249년), 장양왕은 여불위에게 군사를 주어 동주(東周)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몽오(蒙驁)에게 명을 내려 한나라를 공격하라고 했고, 이에 몽오는 한나라의 형양을 점령했다. 그리고 성고, 공 땅을 한나라가 바치자, 장양왕은 한나라에게서 받은 땅에 삼천군을 설치했다.
진 장양왕 2년(기원전 248년), 몽오는 조나라를 공격하여 유차, 신성, 낭맹 등 37개의 성을 점령하고, 태원(太原)을 평정하였다. 같은 해 3월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였고, 위나라의 고도, 급 땅을 함락하였다.
진 장양왕 3년(기원전 247년), 위나라는 신릉군을 장수로 삼아서 반격하였고, 하외에서 진나라의 군사를 격파하며 몽오를 쫓아냈다. 이 일로 화가 난 장양왕은 인질로 와있던 위나라의 태자 증(太子 增)을 가두려다가, 진나라의 한 신하가 태자 증을 위해서 장양왕에게 간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위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여 왕이 증을 가두게 되는 것은 일찍이 공손희(公孫喜)의 음모이므로, 반대로 태자 증을 환대하여 위나라와 화의를 맺고, 위나라가 제나라와 한나라 등으로부터 의심받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이에 장양왕이 태자 증을 가두지 않았다.
같은 해 장양왕이 34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하여 그의 아들인 정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후 시황제가 천하통일을 한 뒤에 선왕 장양왕을 '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했다.
3. 미디어에서
진시황의 일대기를 다룬 매체에서는 안 나올 수가 없다. 다만 언제나 여불위보다 분량이 훨씬 뒤쳐진다.실제 역사에서 장양왕은 꽤나 야심 있는 인물이었고, 화양부인에게 적극적으로 딜을 할 정도의 인물이었으나 1996년 CCTV에서 방영한 《진시황》이라는 드라마에서는 화양부인에게 거의 조종 당하고 말년에는 여불위에게 실권을 빼앗기는 유약한 왕으로 나온다.
2001년 드라마 심진기에서는 진왕인 상태로 등장하나 2018년 리메이크작에선 왕손으로 등장한다[9]. 조나라에서 탈출시켜준 여불위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있지만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여불위를 꺼리는 마음이 더 크다. 다른 대신과 연합해 여불위에게 반기를 들려고 했으나 결국 여불위 집에 끌려가 여불위에게 직접 구타당했다. 진왕으로 등극하고 여불위 휘하의 이사와 왕전을 재물로 매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 고우영 십팔사략》에선 약간 소심해보이는 외모와 성격의 소유자로 여불위의 후원을 받는 건 실제 사초에 기록된 것과 동일하지만, 여기선 야사의 '여불위 진시황 생부설'을 가져와, 자신의 아들이라 굳게 믿고 있는 정(시황제)이 사실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것을 혼자만 모르는 인물로 그려진다. 왕위에 오른 뒤에 여불위를 승상으로 임명해 은혜를 갚았다는 것 이외의 치세는 언급되지 않고, 즉위 후 3년 뒤 덜컥 죽어버렸다고만 나오는데, 사망원인도 왕후인 조희가 하도 밤낮으로 졸라대는 바람에 기력이 쇠해서 죽은게 아닐까..하는 식으로 추측을 하면서 퇴장한다. 여러모로 4권의 주역인 진시황의 아버지치곤 빈약한 비중.
《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에선 볼모시절 그럭저럭 왕의 품격을 가졌으나 여불위를 만난 이후 풀어지더니 여불위의 애첩 주희(조희)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 킹덤》에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고, 언급만 되는데 여불위의 꼭두각시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자기가 태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아내와 아들을 적국인 조나라에 내버려두고 도주를 하였기 때문에 처자식에게조차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1]
《
전국책》에 이름이 '이인'(異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이름인 '자이'(子異)도 《전국책》에 기록되어 있다.
[2]
그리고 안국군 역시도 그의 형인 도태자가 위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살해당한 후에야 후계자가 될 수 있었기에 장양왕은 더더욱 순위가 멀었을 것이다.
[3]
물론 장양왕의 사례에서 보듯 불가능한건 아니었다. 허나 장양왕도 결국 아버지에게 적자가 없어서야 겨우 될 수 있었다는데서 보듯 명백히 적자가 우선이다.
[4]
다만 그럼에도 야심이 없지는 않았는 것 같다. 결국에는 여불위와 손잡고 왕이 된걸 보면... 여불위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5]
사실 당연한데 장양왕에게는 백부가 되는 도태자는 태자였음에도 위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위나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또한 초나라 또한 훗날 고열왕이 되는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가 진나라가 보내주지 않자 춘신군이 꾀를 써서 고열왕을 초나라로 탈출시킨 바 있다. 태자조차 인질이 되고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인데 하찮은 서자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6]
사실 처음에는 영이인도 뜬금없다 여겼는지 여불위가 영이인을 설득하며 "공의 집을 성대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자 "그대 집이나 성대하게 하시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불위가 "제 집은 공의 집이 성대해진 뒤에야 성대해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한다.
[7]
《사기》<여불위 열전>
[8]
《전국책》, 정작 그 초나라는 그 '초나라의 아들'의
아들에게 망한다는게 함정이다. 거기다가 장양왕의 이름이 자초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피휘에 따라 진나라에서는 초나라를 형나라라 표기한다.
[9]
여씨춘추가 막 편찬되었다라는 장면이 등장하기에 왕손으로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고 이미 시호가 정해진 왕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