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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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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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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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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편제3. 병종4. 주력대5. 수군(水軍)6. 병기7. 규모8. 성과 요새9. 여담

[clearfix]

1. 개요

고구려의 군사 전반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고구려는 한민족 왕조 중에서도 손꼽히게 중국과의 격돌이 잦았던 국가이며, 때문에 그만큼 고구려군에 대한 외국의 기록도 풍부하다. 게다가 고분벽화 등에도 군사를 주로 그리는 호전적이고 선군적인 문화 덕에 병기의 모습과 군복도 눈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다. 때문에 기록이 없다시피 한 백제나, 삼국통일전쟁 이전의 군제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라에 비해 창군에서부터 멸망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군제와 병장기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덕분에 역대 한국계 국가 군대들 중에선 조선군 다음으로 기록 및 그림이 풍부하다.[1]

다만, 이하의 서술은 공문서나 공식 전투기록에 기반한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술에서 추론한 정황이기 때문에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신라를 제외한 삼국시대의 기록 전반은 대부분 중국의 기록과 정치적 사료에 입각해 있고, 따라서 군사 제도는 딱 잘라서 이것은 이것, 저것은 저것으로 나눠 말할 수 없다.

2. 편제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 고구려의 태왕이 최고 사령관이었으며, 군사 조직도 일원적인 편제 구조로 국내성·평양성·한성(漢城: 황해도 재령군)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었고, 변방에 지방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실시했다. 대모달의 관직은 5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 수 있었으며, 말객의 경우 1,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7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 수 있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고대국가들처럼 5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의 계루부는 중앙군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을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이런 묘사가 덜하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국원왕 항목에도 있지만 고구려군 본군만 적기군으로 두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던 것이 나중에 소수림왕 때 국가적 율령 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대왕 때 왕당(王幢)과 관군(官軍)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 통제하의 지휘 체계와 병력 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2] 따라서 평시 상비군의 체제가 중앙의 군대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연히 고대의 중앙과 지역 간 권력의 균형을 볼 때나 그 이후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보아 각 귀족마다 사병 집단은 존속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사하게도 고려시대 현종때 완성되는 중앙군 2군 6위와 중앙의 통제가 강한 지방군인 주진군-중앙통제가 미약한 주현군과 같은 모습과도 거의 동일하며 오늘날의 예시로 보자면 미군처럼 연방군과 주방위군- 주방위대의 형태와 같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미군과 다른 점은 평시에도 중앙 통제의 영향을 받는 주방위군 외에도 존재하는 주방위대의 규모가 주방위군 못지 않은 세력으로 존재하는 각 5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의 사병 집단이자 중앙 통제가 미약한 지방군 세력으로 존재했었다라는 점이다.

3. 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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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종은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잘 알려진 중장기병과 중장기병보다 무장이 덜한 중기병(重機兵) 그리고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과 기마궁수의 기병 병과가 존속했다. 크게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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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으로는 부월수(斧鉞手)/환도수(環刀手) /창수(槍手)/궁수(弓手)가 존재했다. 환도수(環刀手)/창수(槍手)는 중장보병에 속했으며 부월수(斧鉞手)는 경보병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궁수(弓手)가 별도로 존속했다. 이외에 별도로 쇠뇌를 운영하는 병사나 공병과 같은 존재 그리고 취사 집단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부분적 기록에서만 유추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3]

고구려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개인의 신분과 경제 수준에 따라서 갑옷과 무장을 각자 갖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색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밀었다는 무사 집단의 경우에는 '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용어나 '조의'(皁衣)라는 표현이 나오나 둘 다 모두 관등의 문제이고, 실존 기록에는 적시되어 있지 않다. 위에 서술되었듯,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경당(扃堂)은 오늘날의 훈련소와 같은 군사학교의 역할을 하여 성인 남성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고구려군에 즉각 편입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당(扃堂) 이전에는 좌식자(坐食者) 혹은 국인(國人)라는 약탈 경제와 전투 목적의 지배 전사집단이 귀족층 내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학설이 여러가지이므로 그 존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들이 계속 존속하여 군사력의 한 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4. 주력대

[주의]

'개마무사'(鎧馬武士)라 불리는 중장기병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경기병 및 중기병들이 고구려의 주력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 방어기지인 산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산성 기병은 침공군에게는 매우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온 침공군의 배후와 보급로를 이들이 끊임없이 차단하여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방어전략에서 청야전술과 함께 산성과 산성의 주변에 있는 보루와 같은 군소기지들의 협력방어를 매우 중시했다. 덕분에 침공군은 장기 주둔도 어려웠지만 점령한 고구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일도 상당히 어렵게 되는 환경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고국원왕 시절에도 잘 나가던 전연이 국내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난 이유 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고구려의 이 방어 전략 체계의 우수함은 이후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에서 압도적인 적의 침공군에 맞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력으로 재차 증명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시 집단예민(集團隷民)에 속하는 말갈, 거란 등과 같은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간접 지배 지역의 타 종족들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처럼 이들이 보조병 역할을 했을지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도 이들을 동원하면서 로마와 유사한 인센티브를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고구려가 거란-실위-말갈 등을 동원했던 기록들과 거란-실위- 말갈족 등이 고구려의 멸망 시기까지 함께 했던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5. 수군(水軍)

의외로 고구려는 육군뿐 아니라 수군을 운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당대 삼국 가운데 최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가 언제부터 수군을 운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의 삼국 시대인 233년[5] 오나라에서는 조위의 후방을 견제하고자 동연에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들은 조위에 들켜 억류되었고 가까스로 이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고구려에서는 이때[6] 사신들을 오나라로 송환하면서 검은담비 가죽 1,000장과 꿩가죽, 각궁 등을 오나라에 선물로 보냈으며, 235년에도 오나라에 말 수백 필을 선물로 주었는데, 오나라의 사신선이 작아서 80필만 싣고 가야 했다고 한다.

고구려 수군이 대대적으로 활약한 것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고 벌인 백제와의 전쟁이었는데, 《삼국사기》 〈광개토왕본기〉에는 광개토대왕 원년(391년), 백제의 북방 해양거점이었던 관미성(關彌城)[7]을 함락해 한강 하구와 경기만의 백제 함대를 무력화시켰으며, 396년까지 인천, 한강 수로 그리고 남양 반도에 이르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일대의 58개 성을 점령해 한반도 서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차지했는데 이때 수군이 동원되었다.[8] 이어 광개토대왕 20년( 410년)에는 지금의 길림성 방면인 동부여에 대한 공략을 개시해 훈춘, 포시에트, 블라디보스토크 등이 있는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또한 《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백제인으로 왜국에 들어가서 "신라가 고구려와 짜고 대왕의 나라를 치려고 한다"며 참소하는 자가 있어서 왜왕이 병사를 풀어 신라와 왜국의 인근 해안을 순찰하게 하였는데, 그때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순찰을 돌던 왜국의 병사(수군)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이보다 앞선 영락 14년( 404년) 백제가 왜병을 앞세워 대방계[9]에 침공했을 때, 광개토대왕이 연선(連船) 즉 배를 거느리고 교전했다는 언급이 있어서, 고구려 수군의 활약이나 왜 수군과의 교전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고구려 수군의 리즈 시절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아주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는 장수왕이 보낸 장군 제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고, 근개루왕이 시해된 뒤, 뒤를 이은 문주왕이 한성을 떠나 웅진으로 천도하고 이듬해인 476년에 중국 유송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고구려 수군에 막히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동성왕 6년( 484년)에도 마찬가지로 남제로의 사신 파견을 시도했지만 고구려 수군에 가로막혀서 못 가고 돌아올 정도였다. 고구려 수군 때문에 중국과 사신 왕래길이 통하지 않아 곤욕을 치른 것은 왜국도 마찬가지여서, 왜왕 무(武)[10]가 유송에 보낸 표문에서 "조종(朝宗)을 어기지 않으려 하나 길이 백제를 지나게 되며, 또 고구려가 무도해서 우리를 병탄(倂呑)하고자 합니다"라고 징징거리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 수군은 백제-신라 연합군의 반격으로 다시 한강 유역을 내어주고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건재해서, 64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신라의 김춘추가 하필 서해에서 고구려 수군에게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온군해 항목 참조. [11]

598년에 고구려 영양왕이 말갈병(또는 거란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고구려-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중국의 《 수서》는 고구려가 요서에서 수나라의 해양 방어시설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12] 수문제(文帝)는 곧 30만명의 수•륙군으로 반격했으나 육군은 역병이 창궐해 요하 전선을 넘지 못했고, 수양제 때인 612년에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내호아가 지휘하는 6,000명의 산동 수군이 평양성을 향해 출항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기록은 "폭풍우를 만나는 바람에 배들이 표몰되어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하는데, 기상조건들을 분석해도 태풍이 올 계절은 아니라서 장산 군도 등에 구축한 해양방어체제에 막히고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 고종은 이듬해 평양성 공략에 나서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다. 《신당서》 〈고려전〉이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소정방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리고 마읍산을 빼앗은 후 평양성으로 나아갔다"고 해서, 소정방의 당군이 패강 즉 대동강에서 고구려군과 수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이때 고구려 공격에 참전한 당의 장수 오흠의 묘지명에는 "용삭(龍朔) 원년(661년) (당 고종이) 패강도(浿江道)[13]에서 하늘의 도리를 받들고 위엄을 이어 죄를 물을 때, 군(君)은 배에 무기를 감추고 성루(城樓)에서 홀로 (적을) 굽어보고 분주히 달렸다. 배를 타고(浮龍) 수로를 따라 공격하니(水劍), 월협(月峽)[14]에서 앞서기를 다투며 명성을 날렸다."고 적어서, 오흠이 배를 타고 대동강 수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고구려 수군과 '수검'(水劍) 즉 해상전을 벌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묘지명에서는 고구려 수군이 당군에게 패했다고 하기는 했지만, 당군의 주 접근로인 대동강 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방어전을 펼쳤던 사실이 확인되는 셈이다.

​667년 당나라의 총사령관 이세적이 이끄는 육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곽대봉의 수군이 바다를 가로질러 평양을 직접 공격하고자 했다. 이 때 이적은 별장(別將) 풍사본을 시켜 곽대봉이 이끄는 당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케 했는데, 양곡과 무기를 실은 풍사본의 선박들이 파손되어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풍랑으로 인한 좌초이거나 혹은 적군의 공격으로 인한 침몰일 수밖에 없는데 기록에는 배가 파손된 원인에 대해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고구려 수군의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2년 뒤인 670년 궁모성(窮牟城)에서 거병한 검모잠은 유민들을 수습하여 대동강 남쪽에 도착하여 당나라의 관인들을 살해한 후, 다시 신라로 향해 한반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15]에 도착해, 앞서 고구려에서 신라로 망명했던 보장왕의 서자(또는 외손) 또는 연정토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 안승(安勝)을 이곳에서 만나 한성(漢城)으로 맞아들이고 임금으로 삼았다고 한다. 검모잠과 안승이 만났던 사야도의 위치 비정은 논란이 있지만, 섬이었던 사실은 분명하며, 검모잠 세력과 안승 세력은 모두 일정 규모 이상의 수군 내지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 수군의 전통은 훗날 발해에까지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

고구려의 기록 부재로 고구려때도 수군(水軍)이었는가 해군(海軍)이었는가 하는 명칭의 문제가 기록상 제대로 안나온다는 점이다. 고려때 해군이라고 하던 것이 조선 시대 수군이라는 명칭으로 전환되었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구려에서도 해군이라는 명칭을 썼을 가능성이 상존하나 기록이 없어서 알지 못하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6. 병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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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백병 <colbgcolor=#000> 도검 맥검
장창, , 기창
둔기 도끼, 쇠도리깨, 철퇴
발사
무기
활(弓) 각궁, 골궁( 맥궁)
노(弩) 쇠뇌
방어구 갑(甲) 찰갑
주(冑) 원주형 투구, 종장판투구, 비늘투구, 충각부주, 금동장투구
부속 갑옷 어깨가리개, 치마갑옷, 목가리개, 팔보호대, 허벅지보호대, 정강이보호대
방패 고구려 방패
군마 마갑
군장 동개, 활집
육상병기 마름쇠
전선(戰船) 고려선 }}}}}}}}}



고구려의 병장기들은 중국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될 만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6] 당장 군대가 입는 갑옷만 하더라도 높은 철 생산력과 가공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비록 손은 많이 가지만 방어력을 확실히 보장하는 찰갑이 고구려 초기부터 보편화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맥궁(貊弓)/호시(楛矢)가 유명했고, 건국신화에서도 주몽이 활의 명수였던 점, 말을 수출하고 대량으로 운영하여 경당(扃堂)에서도 활쏘기과 말타기를 배우게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궁병 기병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의 병장기 수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특히 평원왕 때는 고구려의 쇠뇌를 개량하기 위해 수나라의 기술자들을 대거 매수해서 빼돌릴 정도였다. 《 수서》에서는 이 대목을 아주 치를 떨며 기록해 놓았다.

다만 수레는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 지역의 전장 환경과 더불어 산성을 기반으로 한 전투를 주 전략으로 펼친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차(戰車)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장기병의 존재가 전차의 충격력과 파괴력을 대신했기에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전투용으로 쓰지 않은 것 뿐이지, 어마어마한 곡식과 여물을 소비하는 기병의 특성상 운반수레를 대규모로 운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고구려 전역으로 수레와 기병을 파송하기 위한 도로와 교량 등이 잘 닦여 있었고 이 길을 통해 육상 교역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7. 규모

고구려군의 동원 능력은 고려에 밀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상 인구 규모나 국토의 척박함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군사 동원 능력은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최상위권에 속했다. 고구려군은 상술한 대로 중앙군, 변방군으로 나뉘었으며, 말갈과 거란을 포괄하는 제후국들을 거느렸던 만큼 상당한 규모의 병력 차출도 가능했던 국가다. 특히 말갈과 거란의 이민족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이민족 통제가 성공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창기 고구려에게는 수만 단위의 병력 동원도 벅찼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동천왕기 비류수 전투에서는 고구려가 국가의 존망을 걸고 총동원한 병력이 5만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미천왕 대에 서안평, 낙랑, 대방을 함락시키고 한반도 중북부 및 요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 소수림왕 대에 군제를 개혁하며 병력 동원 능력이 크게 증강되었고 광개토대왕 내지 장수왕기에는 여유롭게 3~5만 정도의 병력을 외부에 투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고구려에 맞먹는 인구를 보유했다고 추정되는 백제에 비해서도 많은 것으로 백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5만 이상의 병력을 내부에서 차출하지 못하였다.[17] 신라는 고구려보다도 더한 조밀한 행정망을 갖추었음에도 백제멸망전 당시 동원한 5만이 역대 최고 기록이고[18] 이 두 값이 모두 국가를 쥐어짜야 나오는 병력 규모였던 반면, 여유롭게 경제와 행정을 돌리며 투사할 수 있는 전력이 수만 단위였던 고구려의 병력 동원력이 훨씬 강했다고 볼 수 있다.[19]

또한 고구려의 가장 큰 특징은 대규모의 유목민족 병력을 차출했다는 점인데 신라, 백제에서도 수시로 고구려가 동원한 말갈에 의해 약탈당하곤 했다.[20] 후술할 주필산 전투에서도 수천에서 만 단위로 추산되는 말갈기병을 동원했다.

누가 뭐래도 고구려의 병력 동원력이 최정점을 찍는 시기는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시기이다. 여수전쟁기의 고구려군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건 수십만에 달하는 수나라군을 회전에서 기병전과 보병전으로 밟아버렸으므로 최소한 수만에서 10여만 단위를 동원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당 전쟁기에는 그야말로 병력 동원의 최정상이라 요동성, 박작성 등에 수만의 병력을 박아뒀다가 잃어버리고도 주필산 전투에서 15만 대군을 동원하고, 그 15만 대군이 당나라에게 날아가고도 안시성 전투에서는 신성, 건안성 등을 합쳐 여전히 10만 대군이 건재한 위용을 보여주었다. 사수 전투에서도 10만 대군을 두 번이나 뽑아내고 부여성으로 5만 명의 병력을 올려보내는 등, 당시 중국이 통일왕조였기에 망정이지 분열기의 중국을 생각한다면 웬만한 중견 왕조에 맞먹는 동원력을 자랑했다.[21][22]

이것은 이후의 왕조들을 생각해도 두드러지는 성과로, 고려가 고구려보다 더한 동원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요전쟁 이후로는 10만 대군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공민왕 때 개성 탈환을 위해 어중이떠중이 긁어 모은 20만[23]이 전부.[24] 고구려와 비등 혹은 그 이상의 덩치를 가졌던 발해는 멸망전 당시 긁어모은 게 3만으로 10만 플러스알파를 달벌대전에서 동원한 신라보다 훨씬 적었으며,[25][26] 조선은 적어도 고구려의 2배에서 3배에 육박하는 인구를 갖췄음에도[27][28] 임진왜란 당시 11만을 동원하는 것이 한계였다. 고구려를 명백하게 능가할 정도의 동원력을 가진 국가가 한반도에 생기는 것은 고구려 멸망 1300년 뒤인 6.25전쟁기였으며 그조차도 당시의 북한은 인구 대비 고구려의 동원력을 재현하지 못했다.

8. 성과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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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고구려군을 묘사한 중국의 사료, 특히 고구려-당 전쟁 시기의 사료들에서는 고구려군을 대단히 위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사서에서는 적군의 강성함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했기 때문에 XX가 두려워하였다"라는 식으로 간접적인 제시를 하는 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시작된 이 제시법은 "적이 강성한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것은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 등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다음과 같은 묘사방식을 택했다.
...(전략)...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전략)...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남성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삼국사기 권제25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9월자 기사

그런데 중국의 사서에서 매우 일관되게 이와 같이 묘사하지 않는 존재가 딱 하나 있는데 바로 흉노다. 흉노군의 군세에 대해서는 중국 기록에서 보통 "~~가 두려워하였다"라고 기록하지 않는다.[29] 대신 흉노군의 군세 그 자체를 매우 강성하게 묘사한다. 이는 흉노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중국 전체에서 보편적이기 때문에, 굳이 누군가가 두려워했다고 묘사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두려워했을 것이 너무나 뻔한 적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국이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묵돌이 스스로 강성해질 수 있었고, 활시위를 당길 수 있는 군사만도 30여 만에 달했다.
《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 中

흥미로운 것은, 이와 비슷하게 기술되어 군세 그 자체가 강성하게 묘사된 군대는 중국사에서 몇 없는데, 주필산 전투에서의 고구려군은 이와 같이 노골적으로 그 군세가 매우 강성하게 묘사된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
《전당문》 권7 태종황제 破高麗賜酺詔 中

이것은 당시 흉노와 같이 중국에서 고구려군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매우 보편적이었거나, 혹은 최소한 주필산 전투에서만이라도 당나라 수뇌부 내지 당나라군 전체가 고구려군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를 보편적으로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대목.

물론 그러한 고구려군에 대한 압도적 공포를 느끼게 하는 묘사도, "그런 위협적인 대상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상대로 이겼다" 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자신들의 승리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들어간 서술이라는 점은 감안하고 볼 필요가 있다.

어쨋든 이러한 고구려군의 강력한 군세에 대한 기억은 중국 왕조 내내 확실히 각인되어 있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이 순식간에 일본군에 무너지자 명나라에서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던 조선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리가 없다며 믿지 못하거나 조선이 지나치게 문민에 집중하여 이 모양이 됐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又曰: "貴國自高句麗, 號稱强國, 邇來士民, 唯事耕田、讀書, 馴致此變。 今天朝使貴國爲金甌, 貴國知否?"
(유황상이) 또 말하기를,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 일컬어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金甌無缺)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선조실록 39권 1593년(선조 26년) 6월 5일 : 명 관리 유황상이 조선의 문약함을 꼬집다.


[1] 애초에 유목민족 만큼은 아니지만 전쟁이 거대한 국가 산업이었던 고구려이기에 군제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한 사업이었을 것이다. [2] 유사한 군제 개혁은 고려 시대 성종 군제개혁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3] 전문 취사집단의 경우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 때 '거대한 솥을 발견하여 밥을 지을 수 있었다'는 대목을 해석한 것이다. [주의] 해당 영상에서는 철기병, 경기병, 창병을 갖춘 보편적인 중세 전투방식의 전형을 고구려군에 대입해서 설명하는 것일 뿐, 고구려군이 저렇게 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동천왕 시기의 비류수 전투에서는 흉노와 싸워왔기에 대기병전에 능했던 관구검 휘하 조위군이 방진을 짜고 막으면서 전멸했다는 암시가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기병들이 우선 최선두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높으며,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지휘관이 지휘관인지라 "남정백제하고 북벌거란"하며 영락 17년 전투에서는 "사방합전하여 참살탕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므로 대규모 기병으로 적들의 본진을 쓸어버리거나, 안쪽으로 끌어들여 사방으로 포위섬멸하는 전술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군의 전략이 정점을 찍는 삼국통일전쟁기의 살수대첩에서는 적들을 내륙으로 끌어들였다가 돌려보내면서 도하하는 와중에 후미를 몰아붙여 모조리 강물에 장사지내고, 주필산 전투에서는 경기병과 중기병을 나누어 앞세워서 중기병으로는 당군의 주력부대를 박살내고 중앙돌파를 감행하는 동시에 경기병을 투입해 적들의 본영을 소탕하려 들었으며, 사수전투에서는 얼어붙은 강을 도하하는 적군의 때를 노려 강의 얼음을 투석기로 깨버리고 다수를 익사시킨 뒤 강변에 잔재한 패잔병을 각개격파하는 거의 근대전에 가까운 전술까지 구사한다. [5] 제갈량이 사망하기 딱 1년 전이다. [6] 고구려 동천왕 7년이다. [7]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 북부 교동도 또는 파주 오두산성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든 백제의 서해 방면 수군 기지였다.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의 지형을 두고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는" 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8] 이때 탐라국이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나오는데 혼란기에 빠진 백제를 건너뛰고 서해안의 거점만을 통해 바로 탐라국과 통교하였던 것 같다. [9] 지금의 황해도 연안. [10]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이른바 왜5왕의 마지막 왕으로 《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유랴쿠 천황으로 비정되고 있다. [11] 참고로 이때는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해를 '횡단'하지 못하고 연안을 따라 항해해야 했다 [12] 훗날 수 양제가 612년에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내린 조서에서 고구려를 두고 "거란의 무리를 아울러다 (수의)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족이나 하는 짓을 배워서 요서를 침범하였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13] 대동강 물길로 평양으로 가는 길. [14] 중국 강남의 양쯔강에서 물살이 빠른 곳인 명월협(明月峽)을 의미한다. [15] 이병도는 지금의 덕적도 근처에 있는 소야도라고 비정했다. [16] 백제가 弓 箭 矛 刀 4가지의 무기를 사용할 때 고구려는 활, 창, 폴암, 검 종류에서만 최소 8가지를 (弩 弓 箭 戟 削 矛 鋋 刀 劍 貊弓 貊劍) 운용했다. 《수서》에는 고구려군의 무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兵器與中國略同(병기가 중국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또한 고구려는 야전과 공성전 양 쪽에서 특히 노와 활을 애용했다. 돌궐계인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도 고구려군의 流矢(류시)에 자주 당했다고 《구당서》에 나오며, 요동성 전투에서 요동성의 고구려 수비군이 弓弩(궁노)를 亂發(난발)하자 염비(閻毗)가 타고 있던 말이 流矢에 맞았다고 《수서》에 나온다. 활도 고구려 초기에는 단궁류를 많이 쓰다가 6세기를 즈음에 이르러서는 장궁류를 많이 썼으며 이를 통해 기병 중심에서 보병 중심으로 전환했다고 보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다만 고구려 중기의 동원력과 후기의 동원력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대량 생산이 쉬운 장궁으로 제식배치 무기가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으며, 현재까지는 고구려군이 가장 선호하는 전투양상은 멸망 시점까지 기병전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7] 백제는 상비군, 예비군, 준군사조직을 모두 합쳐도 10만을 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18] 668년 고구려멸망전 당시 신라가 2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다른 기록들과 맥락이 맞지 않는 대목이라 현대 사학자들은 이 대목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한참 뒤 신라의 인구가 정점을 찍었던 달벌대전 시기에 신라 정부군이 장보고군에 대항해 10만을 동원한 기록이 있지만 이 부분은 신라가 고구려 남부 인구밀집지역 및 백제를 흡수한 통일신라라서 통일 이전의 신라와 양적 비교가 곤란한데다 내전 상황이라서 국가 전체의 동원력을 판단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통일신라의 경우는 상비군, 예비군, 준군사조직을 합치면 20만 군대 정도로 추정된다. [19] 고구려군은 상비군, 예비군, 준군사조직까지 합치면 40만~50만, 때에 따라서는 60만~70만에 이를 때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 지리상 이 말갈은 북쪽의 말갈 7부에 속하는 말갈이 아니며, 한반도 중부에 살던 또 다른 종류의 민족으로 보인다. 학자에 따라서는 말갈이라는 단어 자체를 고구려의 유목민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하며, 또는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는 말갈도 그냥 북쪽의 그 말갈이 맞고 고구려가 북쪽의 말갈 기병을 차출해 남쪽으로 끌고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위말갈 참조. 혹은 삼국시대 초기의 말갈은 위말갈이고 후기의 생해 등이 지휘한 말갈은 북방의 말갈족으로 분리해서 보기도 한다. [21] 다만, 삼국사기에서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기록은 중국 기록 복붙이라 중국 사서에서 애초에 고구려군의 규모를 뻥튀기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중 가장 논란이 심한 게 주필산 전투의 고구려군이 정말로 15만이나 되었을까다. [22] 병력 규모를 보면, 고구려군의 규모가 이전까지만 해도 백제, 신라보다 좀 더 우위 수준이었으나 수, 당과 격돌하는 시기가 되면 갑자기 백제, 신라와는 급이 다른. 그냥 0 하나 더 붙은 수준의 병력이 나온다. [23] 이것도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견이 많다. 홍건적의 규모부터가 고려에서는 20만으로 기록되었는데 실제 중국 기록을 보면 5만도 안 되는 등, 혼란기라서 그런지 여말선초 병력 기록은 요동정벌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개판이다. [24] 그래도 고려군은 상비군 뿐만 아니라 예비군(광군), 준군사조직을 합치면 40만~50만의 병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25] 멸망직전의 발해의 경우 어떤 요인(고구려계-말갈계의 갈등을 비롯해 백두산의 화산활동이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는 등의 기후변화를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으로 인해 급속히 사분오열되고 있었음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후기로 갈수록 확장을 하긴 했지만 고구려의 수도권이었던 패서지역을 비롯한 농경 중심지를 장악하는 데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전성기에도 영토 크기에 비해 고구려보다 뽑을 수 있는 병력 자체는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26] 발해의 경우는 상비군은 3~4만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예비군, 준군사조직을 합치면 10~20만까지는 간 것으로 추정된다. [27] 고구려의 인구가 200~300만, 조선의 인구가 700~800만이라는 설을 사실로 볼 때 기준. 학자에 따라 고구려의 인구를 600만까지 잡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거의 비등해진다. 물론 학자에 따라 임진왜란기 조선의 인구를 천만까지 잡기도 한다. [28] 다만 조선도 상비군에 예비군, 준군사조직까지 합치면 최소 30~40만 군대를 보유하는 경우가 있었다. [29] 개별 전투의 전황을 묘사할 때는 쓰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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