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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03:01:32

숙손통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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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군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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叔孫通
생몰연대 미상.

1. 소개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에서

1. 소개

전한 박사이자 유학자. 또 다른 이름으로는 숙손하(叔孫何)로 불리기도 한다.

성이 숙손이고 이름이 통인데, 일설에 따르면 통은 자(字)라고 한다.

2. 생애

진시황 때부터 문학에 뛰어났다 해서 조정에 불려가 박사 후보자가 되어 의 조정에 몸을 담았다.

진시황이 죽고 진승 이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이세황제 영호해는 박사들과 여러 유생들에게 의견을 물었다.[1] 박사들과 유생 30여 명이 일제히 '진승 저 놈은 반란군이니 당장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숙손통이 황제의 얼굴을 보니, 그는 크게 노하여 얼굴빛이 변해 있었다. 숙손통은 곧 황제가 자신이 정치를 못해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석해 유생들의 말에 못마땅한 감정이 들었다고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 공손하게 말했다.
저들의 말은 다 틀린 것입니다. 진승은 일개 좀도둑일 뿐이니 지방의 관리들이 알아서 처벌할 것입니다.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모든 백성이 법을 지키고 직분에 충실한데 무슨 반란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호해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리고 숙손통에게 옷과 비단을 하사하고 박사의 벼슬에 임명하였다. 궁에서 나온 후, 다른 유생들이 숙손통에게 "어찌 그리 아첨을 잘 하느냐"고 묻자[2] "내가 그렇게 아첨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호랑이 입에서 못 나왔을 것"이라며 빨리 달아날 준비나 하라고 대꾸했다. 호해가 '반역자'라고 대답한 사람들을 어사에게 넘겨 조사 후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3]

변장을 하고 고향인 설(薛)[4]로 돌아왔는데 항량이 그 곳을 점령한 상태였으므로 항량에게 몸을 맡겼고, 그를 따라 회왕을 모셨다가 회왕이 의제로 추대되고 강남으로 옮겨가자 그냥 남아 항우를 섬겼다. 그러다가 또 항우의 세력이 약화되자 유방에게 항복했다.[5] 그 뒤로도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다시 세력을 갈아타거나 하진 않았다.

원래 숙손통은 유학자들이 입는 길고 치렁치렁한 도포를 입고 다녔는데 누군가가 '한왕(유방)은 유복(儒服)이라면 질색을 한다더라[6]'는 걸 주워듣고는 도포를 벗어버린 뒤 제자들까지 일부러 초나라 풍습의 짧은 옷을 입게 했다. 그 모습에 흐뭇해진 유방이 '어디에 쓸만한 사람 없느냐'고 묻자 학문이 뛰어난 자들은 냅두고 왕년에 떼도둑이었거나 깡패였거나 주먹만 잘 쓴다는 자들만을 추천하였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선생을 여러 해 동안 섬기고 한나라에도 같이 들어왔는데, 왜 우리는 놔두고 저런 시원찮은 놈들만 추천하느냐"는 불평을 하자 답변이라고 한 말이 일품이다.
漢王方蒙矢石爭天下,諸生寧能鬬乎?故先言斬將搴旗之士。諸生且待我,我不忘矣。
한왕께선 지금 화살과 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하를 다투고 있는데, 그대들이 싸울 수는 있는가? 그런 연유로 일단 적장을 베고 깃발을 빼앗을 이를 천거한 것일세. 그대들은 잠시 기다려보라. 내 잊지 않고 있다네.

본인도 유학자면서 '유학자는 전쟁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제 입으로 말하고 있다. 후대는 물론이고 약육강식의 정도가 심하던 춘추전국시대조차 '덕이 강한 사람이 전쟁에서도 이기고' 뭐 이런 소리라도 할 법한데 그런 소리는 없다. 난세의 초한전쟁기에서 숙손통이 얼마나 현실주의를 추구했는지 보여준다.

초한대전이 끝난 후 직사군(稷嗣君)으로 봉해진 숙손통은 위의 대화처럼 알맞은 기회가 오자 한나라의 예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한고제 유방부터 한미한 출신에 추종자들의 상당수도 예의범절 같은 것과 거리가 멀고, 진나라의 복잡한 예식을 냅다 잘라내버리니 당시 한나라의 궁중예절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었던 것. 자신들끼리 공적 다툼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몸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칼을 뽑아 대궐의 기둥을 찍었다는 일도 있을 정도. 이는 아무리 편한 것을 좋아한다지만 유방도 굉장히 골치 아파 하는 상황이었다. 숙손통은 이렇게 골머리를 앓는 유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궁중예절을 간소하게 정리해 보겠다고 조언했고 유방의 명을 받아 한나라의 예법을 새로이 만들었다.
夫儒者難與進取,可與守成。臣願徵魯諸生,與臣弟子共起朝儀。
선비들은 달려가 빼앗는 것은 어려워하지만, 지키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노나라의 여러 선비들[7]이 있으니, 신과 제자들이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五帝異樂,三王不同禮。禮者,因時世人情為之節文者也。故夏、殷、周之禮所因損益可知者,謂不相復也。臣願頗采古禮與秦儀雜就之。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왕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하니 고로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고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시대가 지나면 예법이 변하는 것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니 지금 필요한 대로 적당히 짜맞추면 그만입니다'라는 뜻. 숙손통이 이렇게 예법을 정비한 동기는 유방이 초기에 엄격하지 못한 군신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정치적인 목적에서 '우리 유가를 어디 마음껏 이용해보시죠.' 하고 권하면서 유학의 지위 상승을 노린 것이다.

이에 유방이 허락하자 숙손통은 바로 위의 제자들을 데리고 예법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 중 2명이 "예악은 100년간 기다려야 만들 수 있는데 못하겠다." 면서 거부했고, 숙손통은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군"라고 답했다.[8] 어찌저찌 숙손통은 예법을 만들어서 보여주자 유방이 "이것은 할 수 있다."라고 평했다. 그리하여 고조 7년(기원전 200년)에 장락궁이 완공되자 그 예법을 시험했다. 당시 숙손통열전에 기재된 예법은 아래와 같다.
漢七年、長樂宮成、諸侯群臣皆朝十月。
한 7년, 장락궁이 만들어졌고, 제후들과 군신들이 10월에 조회하였다.
儀:先平明,謁者治禮,引以次入殿門,廷中陳車騎步卒衛宮,設兵張旗志。傳言「趨」。殿下郎中俠陛,陛數百人。功臣列侯諸將軍軍吏以次陳西方,東鄉;文官丞相以下陳東方,西鄉。大行設九賓,臚傳。於是皇帝輦出房,百官執職傳警,引諸侯王以下至吏六百石以次奉賀。自諸侯王以下莫不振恐肅敬。至禮畢,復置法酒。諸侍坐殿上皆伏抑首,以尊卑次起上壽。觴九行,謁者言「罷酒」。御史執法舉不如儀者輒引去。竟朝置酒,無敢讙譁失禮者。
의례: 날이 밝자 알자가 예식을 주관하여 차례대로 대전의 문에 들어오도록 하였고, 뜰에 있던 전차, 기병, 보졸, 위관이 병장기와 깃발을 세웠다. 전언하길, "서두르라." 대전 아래에 낭중들을 계단을 끼었으니 수백명이었다. 공신, 열후, 장군, 군리는 서열대로 서쪽열로 동쪽을 향하였으며 문관, 승상 이하는 동쪽열로 서쪽을 향하였다. 대행은 구빈을 두어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이때 황제가 연(輦)을 타고 나오면 백관이 기를 들어 경고하고, 제후왕 이하 600석의 관리까지[9] 인도되어 차차 황제에게 하례하였다. 제후왕 이하가 떨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정숙하며 공경해 하였다. 의례가 끝나면 다시 연회를 둔다. 전상에 있는 이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다 서열대로 일어나 황제에게 축수하였다. 술잔이 9번 돌자 알자가 전언하기를, "파주한다." 어사는 집법하면서 의례를 지키지 않은 이들을 즉시 끌어냈다. 그렇게 조회를 끝내고 연회를 베푸는 동안, 감히 떠들거나 예를 잃은 사람이 없었다.

이 예법에 따라 조회에서 모두가 황제를 공경하자 유방이 비로소 "내가 이제야 황제가 존귀함을 알겠구나."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 공로로 태상에 제수되고 황금 500근을 받았는데, 함께 작업에 참여했던 제자들의 존재를 귀띔하여 그들에게도 낭관(郎官) 벼슬을 내리게 했다. 제자들에게 "여기 500근의 황금을 챙겨왔으니 나누어 가라. 그리고 그대들이 전부 낭관에 임명되었다" 하자 모두 기뻐했다. 이 후 고조 9년(기원전 198년)에는 태자태부에 제수되었다.

물론 현실주의를 추구한 것은 형식에 가까운 예법에서뿐이었고, 원리원칙이 중요한 곳에서는 유학자답게 칼 같았다. 유방이 말년에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척희의 아들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여희의 고사와 진시황의 고사( 사구정변을 통한 호해의 즉위와 그로 인한 혼란)를 예로 들어 "소신의 피를 궁궐 바닥에 흩뿌린 후에 태자를 바꾸십시오." 라는 강경 발언으로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후 혜제 시대에 황제의 묘와 관련된 예법 제정을 위해 다시 태상으로 불려왔다는 기록이 있다.

3. 평가

숙손통은 유학자임에도 유학자의 스테레오타입에 걸맞지 않은 극한의 현실주의적 처세가라 할 수 있다. 유가의 지위 상승을 위해 설사 학풍을 변질시켜서라도 적용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현실에 영합했다. 이러한 태도는 당연히 유가들에게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 예법을 만들 때 위에 적힌 것처럼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훨씬 후대에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도 '숙손통 같은 사이비가 이런 짓을 하는 바람에 예법에 큰 상처를 입혔다'며 분개했다.[10]

그러나 그의 처세술과 유학, 예법을 제정한 능력에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감탄해 "숙손통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급한 일부터 순서대로 처리하고 예법을 정비했다. 그의 물러가고 나아감은 모두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따랐으며 마침내 한나라의 큰 유학자가 되었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며, 길은 원래 구불구불한 것(大直若詘 道固委蛇)[11]이라는 이야기는 숙손통의 경우에 딱 맞는다"는 평을 남겼다.

그리고 사실 사마광의 평가는 숙손통의 입장에선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숙손통의 간소화된 예법은 (물론 그의 현실주의적 성향도 있겠지만) 현실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전한 초반기에는 워낙 규례에 대해서 까막눈인 사람이 많았고, 한고조를 필두로 원래 귀족이 아니었다가 급격하게 출세한 사람들이 고위층에 상당수 포진해 있어서, 황제가 베푸는 연회 자리에서 공신들이 쌈박질하고 술 퍼마시고 대궐 기둥에 칼을 찍는 판이었다. 통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사마광의 말대로 숙손통이 예법을 훼손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 맞겠지만, 당시는 분서갱유와 항우 때문에 옛 법에 대한 기록도 적잖이 사라진데다 황제였던 유방조차 자신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만들기를 요청했을 정도였으니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비슷한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 여러 봉국을 세우고 제후를 세웠는데, 이때 강태공은 제나라로, 주공 단은 노나라 제후지만 동시에 성왕을 보좌해야 하는 섭정을 겸직한 관계로 장남인 백금을 대신 보냈다. 강태공은 제나라에 간 지 5개월 만에 봉국의 상황을 보고하러 입조한 반면 백금은 무려 3년이 지나서야 입조했다. 이웃한 두 나라에 각각 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반 년도 안 되어 돌아오는데 다른 사람은 몇 년이 지나서야 돌아오니 주공 단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에게 물었고, 강태공은 현지 사정에 맞게 예법을 만들어 퍼뜨렸기에 일이 금방 끝났지만, 백금은 주나라의 예법을 그대로 노나라에 전파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었다.[12][13] 이런 사정 탓인지 제나라는 모든 열국들 중 가장 실리를 따지는 나라였고 반대로 노나라는 주나라의 예법이 가장 잘 보존된 나라가 되었다.[14] 백금은 자신도 제후였던지라 주나라 예법을 현지에 강요할 수라도 있었지, 숙손통은 황제의 신하인데다가 당시 황제고 신하고 가릴 것 없이 규례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서 위 사례의 강태공처럼 그냥 사정에 맞게 빨리 만들어 일단 정착시키고 보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초한전기에도 나온다. 대전에서 대신들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진언하지만 별거 아니라며 2세 황제에게 진언한다. 이후 또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자 이번에도 그들은 도둑 떼로 표현하고[15], 더불어 백성들은 비단옷과 산해진미를 먹으며 황제에게 감사하고 있다 아부한다. 2세 황제에게 황금과 비단을 받고 물러난다.

밖으로 나와 유생들이 이를 질책하자 "조고한테 죽고 싶냐? 살려준 은혜도 모르고… 이 재물들을 당신들이랑 나눠 가지려 했는데 안 되겠다"고 말한 뒤 황제는 진실 따위 관심 없으며 자신이 헛소리를 한 덕분에 모두 살아 나왔다며 강변한다. 집으로 돌아와 거짓말을 한 사실을 자책하며 남아 있으면 금방 화가 닥칠 것이라 예상하며 관직에서 물러나 도망친다.

이후 거록 전투의 결과를 보고하러 온 사마흔을 만나 조고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 궁에 보관된 서책들을 모조리 챙기러 온 소하와 만나는 등 간간히 등장은 하나 큰 비중은 없고, 가장 중요한 한나라의 예법을 만든 일마저 해하 전투 후의 상황이 대폭 축소, 생략되었기에 안 나왔다.


[1] 분서갱유 이미지가 강해서 모든 유학자들이 전멸했다고 인식되곤 하지만 사실 갱유는 전국의 모든 유학자를 싸그리 잡아 죽이기보다는 불온분자, 반정부 인사 색출에 목적을 둔 정치 탄압이었기에 유학이 완전 소멸까지 간 건 아니었다. [2] 혹은 '나라가 위험한 상황에서 그따위로 아첨을 하느냐'며 힐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모두가 진승의 무리를 반역자라 하진 않고 어떤 이들은 숙손통이 말한대로 좀도둑이라고 말했는데, 이들은 숙손통을 따라 도주했다. [4] 영주가 맹상군이었던 그곳 맞다. 현 산둥성 자오좡 시(枣庄市). 이곳은 맹상군 이후 별의별 사람들이 마구 모여들어 사마천이 그 땅의 풍속을 두고 '문란하다'라고 서술했을 정도의 동네였는데, 유학자이면서도 특이한 행보를 보인 숙손통의 면모는 고향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5] 이런 숙손통의 행적은 의리와 충성을 중요시 하던 유생과 협객들에게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바꿔가며 섬긴 군주가 10여 명이나 된다'고 당대에 공공연히 비난받을 정도. [6] 원래부터 날건달 출신이기도 했고, 군사를 일으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 그런지 육가와의 대화에서 '시서 그런거 쓸 데가 있긴 하냐?' 고 궁시렁거리기도 하는 등 유학의 실용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학자의 갓을 벗겨 오줌을 누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다만 장량 등은 극진히 대우했고, 육가의 경우에도 '그것이 필요한 때가 지금'이라고 반박하자 민망해하면서도 인정하긴 하는 등 쓸모만 증명하면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나중에 가면 "내가 책 보기 싫어하고 왜 이런 게 있는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 보니 책에 있는 말이 다 맞더라."라고 할 정도로 유가를 인정하기도 했다. [7] 노나라는 기원전 256년에 멸망해서 유방이 황제가 되었을 때는 멸망한지 이미 54년 정도 되었다. 아주 먼 옛날은 아니지만(유방이 기원전 256년생이라는 설이 맞다면 노나라가 멸망한 해에 유방이 태어났다) 그렇다고 가까운 과거도 아니다. 노나라는 공자를 배출한 곳이니, 이는 결국 공자의 학문을 이은 유학자들을 의미한다. [8] 그 둘의 말이 옳을지 모르나 유방과 그 신하들은 대체로 예악에 어두운 이들이지만 이들을 위한 예악이 조속히 필요한 상황에서 100년 타령하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다. 유학이 뿌리 내렸어도 가능할 리가 없는데 이 시대의 유학이란 그저 많고 많은 제자백가 사상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예악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것도 아니다. [9] 구품관인법 도입 이전까지는 받는 봉급에 따라 격이 애매하게 나뉘어졌다. [10] 다만 사마광은 구법당과 신법당이 대립하던 북송 말 구법당의 당수로서 신법당의 당수 왕안석과 반목하던 인물이라 유학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옛것을 중시하는 보수파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11] 대직약굴, 도고위이. 노자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뱀 사(蛇)자는 '구불구불 갈 이'자로 읽는다. [12] 이를 들은 주공 단은 노나라는 제나라의 손에 잡혀 살 것이라며 한탄했고, 실제로 노나라는 옆 나라인 제나라가 강성해지는 통에 쇠퇴하다 초나라에게 멸망했다. [13] 다만 백금은 이 때에 어머니 삼년상까지 꼬박 다 채우고 돌아온 것도 있다. [14] 당장에 주나라로 돌아가자고 외친 공자의 고향이 노나라다. [15] 위에 나온 진나라 말기 반란군을 좀도둑이라고 말하는 일화가 나온다.(1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