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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8:33:02

위청


한의 대장군(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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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 기원전 106년
이름 위청(衛靑)
중경(仲卿)
시호 열후(烈侯)
출생지 하동군 평양현(平陽: 現 산서성 임분(린펀)시)
1. 개요2. 집안 내력
2.1. 불쌍한 소년 위청2.2. 청년 시절
3. 전공
3.1. 낙하산 장군3.2. 한나라 군대의 기둥3.3. 달도 차면 기우는 법3.4. 막북 대전투3.5. 이광의 죽음3.6. 말년
4. 평가5. 성격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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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djyimg.com/803160219491974.jpg
중국 전한 한무제 때의 명장. 한나라가 벌인 대(對) 흉노 전쟁의 가장 커다란 핵심이었고,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대단한 공적을 세웠다. 한무제가 벌인 대반격의 선봉에 섰던 인물.

그러나 곽거병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자 하늘의 편애를 받은 인물 때문에, 살아 생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불운한 인물. 사실 곽거병이야 출생과정은 좀 복잡할 망정 분명 좋은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인 터라, 자기계발을 해야 할 시기에 변변한 교육도 못 받고 남의 집 종이나 다름 없던 하찮은 삶을 살다 당시 기준으로 중년에 가까운 나이에 접어들어 낙하산으로 발탁돼 엄청난 전공을 세운 위청이 보는 관점에 따라선 더 '타고난' 천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곽거병이 워낙 어린 나이에 넘사벽에 가까운 군공을 세운 터라 무시되기 일쑤다. 게다가 위청 본인부터가 비천한 출신 성분에 따른 콤플렉스 때문인지 큰 공을 세우고도 항상 몸을 사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방향으로 처신을 해서... 결론적으로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2인자, 콩라인의 대표격이라 할 만하다.

2. 집안 내력

2.1. 불쌍한 소년 위청

나중에 대단해지건 어쩌건 어린 시절의 위청은 그야말로 비천한 삶을 살아왔다. 형편이 넉넉치 않은 건 둘째치더라도, 위청 본인의 출생마저도 남들 손가락질을 받기 딱 좋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위청의 모친이었던 위온(衛媼)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에 불과했다. 게다가 정계(鄭季)라는 하급관리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낳은 상태였던 것이다. 바로 그 자식이 위청이었다. 즉 본래 이름은 위청이 아니라 정청(鄭靑)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되는 정계는 평양후(平陽侯)[1]의 관리이면서, 평양후의 시녀였던 위온과 사사로히 정을 통해 자신을 낳은지라 출생 신분이 비천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살았다면 애비 없는 자식이란 욕을 들을지언정 더한 괄시는 없었을 터인데, 어린 시절의 위청이 어머니가 일하던 평양후 집안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가버렸던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인 정계가 위청에게 시킨 일은 고작 양 치는 일 수준에 불과했으며, 새어머니와 그 이복형제들은 위청을 사람 취급도 안하고 종처럼 부려먹었다. 물론 같은 형제 취급 따윈 해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아가던 도중, 위청은 우연히 다른 사람을 따라 감천궁(甘泉宮)의 감옥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데, 목에 칼을 쓰고 있는 죄수 한 명이 위청을 보고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귀인이다! 후에 크게 될 것이다."

양치기 일 하면서 종 취급이나 당하고 있는데 이런 소리를 들어봐야 현실감은 없을 일이다. 위청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남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매질과 욕설을 안 당하면 다행인데, 어찌 벼슬 자리를 바라겠습니까."

2.2. 청년 시절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위청은 당연히 이런 집안에서는 더 생활을 안하고, 다시 평양후의 집으로 가서 평양공주를 섬겼다. 그리고 평양공주의 기사(騎士) 노릇을 했는데, 기사라고 해서 체인메일 입고 폼 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공주가 외출할 때 말을 끌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김기사... 아니 위기사...

아무튼 이렇게 그냥 저냥 살아가던 도중,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무제는 황후 진아교(陳阿嬌)와 본래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문제는 아교가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교는 질투심이 심했고 심지어 의부증 증세까지 보여 한무제는 아교에게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지고 만다.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는 이런 상황을 난감하게 여겼는데, 그녀와 한무제의 어머니인 효경황후 왕씨는 자식을 네 명 낳았지만 아들은 하나, 한무제밖에 없었다. 황제를 떠나서 가까운 핏줄에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 아들이 또 자식이 없으니 걱정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괜찮은 여자들을 계속 소개시켜 주지만 한무제는 영 뚱한 태도만 보였다.

그렇게 평양공주 집을 들락거리다가 눈에 들어온 것이 평양공주의 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찮은 여가수 위자부였다. 위자부는 위온의 딸로 위청의 누이다. 한무제는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이렇게 위자부가 존귀해지면서 위청도 정씨 성을 갈아버리고 위씨 성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건장궁(建章宮)에서 일하게 된다.[2]

한편, 이 위자부가 기어코 한무제의 아이를 임신까지 하게 되자, 본래 무제의 부인인 아교의 질투심이 폭발해버렸다. 당장 황제의 총애를 받는 위자부를 어찌해볼 수는 없으니, 그 대신 건장궁에서 일하고 있는 위청을 잡아 들여 죽여버리려고 사람들을 풀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인 위청이지만, 마침 친구였던 기랑(騎郞)[3] 공손오(公孫敖)가 소식을 듣고 급히 장사들을 이끌고 구하러 와서 간신히 죽음만은 면하게 되었다. 아니 무슨 인생이 무협지를 찍네

이 소식은 한무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한무제는 위청을 불러들이고 건장궁의 궁감(宮監) 겸 시중(侍中)[4]으로 삼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위씨 집안을 우대하기 시작하는데, 위청의 누이이자 위자부의 첫째 언니인 위유(衛孺)는 태복 공손하(公孫賀)에 시집을 보내주었고, 둘째 언니인 위소아(衛少兒)가 진장(陳掌)이라는 남자와 살고 있자 진장도 불러들여서 귀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이 위소아의 아들이 바로 곽거병이다. 즉 곽거병과 위청은 숙부조카 사이인 것. 다만 곽거병의 집안 내력 역시 복잡해서, 곽거병의 친아버지는 진장이 아니다. 애초에 곽씨도 아니고 자세한 것은 곽거병 항목 참조.

그리고 위청은 곧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이 되었다. 그야말로 인생 대반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3. 전공

3.1. 낙하산 장군

파일:external/img.blog.163.com/5144518149341875403.jpg

당시 전한은 가공할 수준의 국력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다. 하지만 고조 유방 흉노 묵돌선우에게 패배한 뒤로, 군사적으로는 쭉 흉노에 눌려오던 상황이었다. 여후는 대놓고 흉노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고, 한문제의 시대 등에는 쳐들어온 적은 막아내었으나 장수들이 적을 추격해서 북벌을 감행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무제 시기에 이르러 전한의 국가적 역량이 그야말로 절정을 향해 치닫자, 자연스레 그 힘은 외부로 분출되었다. BC 133년, 한무제는 무려 30만이라는 믿기 어려운 숫자의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한다.

최초의 작전은 흉노의 군세를 유인해서 복병으로 섬멸하는 계획이었는데, 문제는 흉노의 군신선우에게 이 작전이 완전히 간파당해 시도조차 못 해보고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까지 하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했지만 그 돈을 쓰고도 얻어낸 것은 전무했던 셈. 결국 관련 책임자를 죽이자는 여론이 강해져서, 작전을 입안한 왕회(王恢)는 절망하고 자살해 버렸다.

위청이 처음 출진하게 된 것은 이렇게 한나라가 흉노에 제대로 반격도 못 해보고, 계획도 실패하면서 우울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위청으로부터 시작된 반격이 당시 전한 사회에 얼마나 커다란 충격과 환희를 주었을지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나라가 다시 한번 원정군을 준비한 것은 4년 뒤[5]의 일이다.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의 장수들이 출진하여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다른 방향으로 출진하였다. 위청이 출발한 곳은 상곡(上谷)으로, 현재 베이징의 북서쪽쯤 되는 위치다.

위청은 이때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서 출진을 했는데, 그전까지 위청이 군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순전히 위자부의 빽에 가깝다. 한무제가 위자부 동생이 공 좀 세워보라고 밀어넣은 것에 가깝고, 일반적이면 패망해야 당연하나 결과는 전혀 의외의 상황으로 흘러갔다.

공손하는 흉노를 만나지도 못했고, 공손오는 무려 7,000명의 사망자를 남기는 참혹한 대패만 당하였다. 심지어 잔뼈가 굵은 명장인 이광은 아예 전군이 패배해서 본인도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도망칠 정도였다. 그런데, 빽으로 들어온 위청만이 오히려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닌가.

위청은 흉노가 제사하는 곳인 용성(龍城)까지 쳐들어가, 목을 베고 포로로 잡은 사람이 700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숫자만 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전공은 아니지만, 계속된 실패에 익숙해져 있던 한나라의 조야(朝野)는 흥분했다. 건국 70년, 드디어 처음으로 한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넘어 그 북쪽까지 위풍당당하게 공격해 들어간 것은 실로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위청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장수들이 모조리 패배하거나 성과를 세우지 못한 게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경우가[6] 되었다. 위청은 이 공으로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

기원전 129년, 누이인 위자부는 한무제의 자식을 낳았는데, 위청은 새로 태어난 아이를 축복하기라도 하듯이 3만 명의 병사로 출격하여 흉노군 수천 명을 물리치고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웠다.

3.2. 한나라 군대의 기둥

파일:QnpP5Ke.jpg

기원전 127년, 이번에는 흉노 쪽에서 선공을 날렸다. 요서태수가 살해되었고 어양군의 2,000여 명을 잡아간 것이다. 이에 반격을 위해 장군 이식(李息)이 대군(代郡)에서 출발을 했고, 위청은 운중(雲中)에서 출발을 해서 고궐(高闕)[7]까지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하남 땅을 빼앗고 농서(隴西)[8]까지 도달하여 끝을 내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가축 수십만 마리를 잡고, 흉노의 백양왕과 누번왕을 달아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삭방군(朔方郡)이 처음으로 설치가 되었다. 위청은 이때의 공으로 3,800호를 얻고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기세를 탄 위청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기원전 124년, 위청은 다시 3만 기를 이끌고 고궐에서 출진, 흉노의 우현왕과 교전했다. 우현왕이 안심하고 술이나 마시고 있자 밤에 군사를 일으켜 완전히 포위했고, 깜짝 놀란 우현왕은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간신히 달아났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자기 애첩도 한 명 제대로 챙겨서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위청이 이끄는 한군은 우현왕의 비장 10여 명과 남녀 15,000여 명, 가축 수십만 마리를 얻고는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 중에 위청은 자신이 대장군에 임명되었음을 알았다. 또한 6,700호를 추가로 받았고 위청의 아들인 위항(衛抗) 등도 후작에 봉해졌는데, 위청이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신은 황공하옵게도 군중에서 대죄하게 되었으나[9] 폐하의 신령하심에 힘입어 군대가 크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여러 교위들이 힘써 싸운 공입니다. 황공하옵게도 폐하께서는 이미 신 위청에게 봉읍을 더해주셨습니다. 신 위청의 아들들은 포대기에 싸인 아이들로 아직 수고로이 일을 한 바가 없는데도, 지금 임금께서는 땅을 갈라 세 놈 모두를 열후에 봉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군중에서 대죄하며 군사들에게 힘써 싸울 것을 권한 까닭이 아닙니다. 항 등의 세 놈이 어찌 감히 책봉을 받으오리까!"
예컨대 "열심히 싸운 건 내 부하들인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아들들이 후작이 되면 이게 뭐임?" 하는 것이고, 아랫사람 챙겨주는 위청의 배려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참고로 한무제는 "당연히 부하들도 상 주지. 내가 그런 것도 안 해줄지 알았음?" 하고 대답.

한편, 위청의 옛 주인 평양공주가 남편과 헤어지고 난 뒤, 당시는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기에 공주도 재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주위에서 추천하던 사람이 위청이었다. 공주는 "우리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하나요?" 하고 반문했는데, 이에 사람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지금 가장 권세가 강한 사람이 대장군입니다."

결국 위청과 평양공주는 결혼을 하게 됐는데, 위청 입장에서 보자면 한때 주인마님으로 모시던 분과 한이불 덮고 자게 된 것이다

3.3.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다음 해에도 위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양(定襄)에서 출발하여 1만 명 가까운 흉노 병사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위청의 부하인 소건(蘇建)과 조신(趙信)이 수천 명으로 진군을 하다가, 하필이면 수만대군을 이끄는 흉노 선우와 바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한군은 하루가 넘도록 분투하지만 숫자 열세는 어쩔 수 없어 거의 전멸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조신은 흉노 선우의 설득으로 항복하고[10] 소건은 병사고 뭐고 다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돌아왔다. 위청은 부하들에게 일을 어찌 처리해야 될성 싶냐고 물었다. 의랑(議郞)이었던 주패(周覇)는 소건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출정하신 이래로 아직까지 비장의 목을 베신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건이 군대를 버렸으니 목을 베시어 장군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참모들은 반대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 이르길, 작은 부대는 굳세게 대적한다 해도 큰 부대에게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 라고 했습니다.[11] 지금 소건은 수천으로 선우의 수만과 마주쳤습니다. 하루가 넘도록 힘껏 싸우는 동안 군사들은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소건이 스스로 돌아왔는데도 그의 목을 베신다면, 이는 장수들에게 앞으로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보이는 일입니다. 소건의 목을 베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고민하던 위청은 일을 한무제에게 맡기기로 결정한다.
“나 위청은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친척이 되는 까닭에 군중에서 대죄할 수 있었고, 고로 난 지금껏 내 위엄이 없을까 근심한 적이 없었소. 주패는 나에게 위엄을 드러낼 것을 권했으나 이는 신하된 자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오. 게다가 신하의 직분상 장수를 목 베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도 내 비록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 하나 감히 국경 밖에서 멋대로 장수를 죽일 수는 없소. 이 일을 천자께 소상히 고해서 천자께서 친히 판단하시도록 하여 남의 신하된 자가 감히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좋지 않겠소?"
이때의 선택이 위청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인데, 더없이 신중하지만 윗사람의 눈치를 상당히 살피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위청이 당대에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윗사람의 눈치를 설설 본다는 시각 때문이었던 것.[12]

바로 그러한 때 곽거병이 등장했다. 곽거병은 처음의 출전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세우며 많은 활약을 했는데, 위청은 수하들이 패배한 덕분에 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영승(寧乘)이라는 인물이 위청에게 다가와 "현재 왕부인이 무제의 총애를 얻고 있는데, 집안이 가난하니 도와주면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준다. 이 말을 들은 위청은 왕부인에게 금 오백을 바쳤고, 한무제는 이런 위청에게 이런 언질을 준 영승을 동해도위(東海都尉)에 임명했다. 그런데 오히려 위청은 이와 같은 행동 때문에 '눈치나 살살 보면서 설설 기는 놈' 이미지만 더 강해지게 된다.

위청이 이러고 있던 동안, 조카인 곽거병은 놀라운 공을 세우며 종횡무진 활약을 하게 되고, 한무제의 신임도 이 당당하고 활발한 아이에게 꽤나 기울게 된다. 뭔가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던 것이다.

3.4. 막북 대전투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서의 북방에 이는 후흐호트 지역을 출발하였고, 후자는 북경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을 출발하였다 ─ 은 고비를 가로질러서 현재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략)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원수 4년이었던 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을 불러 의논을 했는데,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사막을 건너서는 오래 싸우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점에 합의를 두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크게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취한다면 큰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해 봄, 한나라는 에이스였던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게 하는 동시에, 수십만이나 되는 보병과 치중병으로 이를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나름대로 잔뼈가 굵은 무장들은 모조리 참전했다. 근 10만이 넘는 원정대가 사막을 넘기 시작했는데, 이 병력들이 원정군이라는 점, 그리고 사막과 계곡을 넘는 극히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숫자다.

출발하는데 있어서,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13]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출발 직전에 포로를 문초해본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군(代郡)에서 출발하여 진격하기로 하였다. 반대로 위청은 정양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선우를 상대하는 맛있는 역할은 곽거병이 골라먹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선우의 군단을 상대하는 것은 위청이 아닌 곽거병이 된다. 흉노 쪽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면 매우 피로에 지칠 것으로 판단, 군수물자를 전부 먼 북쪽에 두고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천천히 기다리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그런 흉노 선우의 군대가 정작 곽거병도 아닌 위청의 군대에게 포착되어 버렸다.[14] 그리하여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고, 위청은 압도적인 병력의 숫자와 힘으로 흉노 선우의 좌우익을 둘러싸 완벽하게 격파했다.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될 수순이었으나 날이 저물 무렵 흉노 선우는 수백명의 기마대와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포로를 통해서 선우의 탈출을 알아챈 위청은 200여 리를 추격하였으나 선우를 잡는데 실패한다.

본래대로라면 이 역할은 곽거병이 해야 할 일이니, 위청에게 역할이 돌아간 것은 오히려 위청이 돋보이게 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게 일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그 사이 곽거병은…

파일:krsOUkF.jpg
우주를 뚫을 기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장장 1천여 리를 행군한 곽거병은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가며 흉노의 영역을 완전히 가로질러 진군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따르면,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오르콘 강 상류 바이칼 호 부근까지 이른다고 한다.[15]

이 자체로도 위업이라 할 만한데, 그러는 동안 세운 곽거병이 세운 공적은… 곽거병 항목 참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힘든 싸움이 끝나고, 곽거병의 밑에 있던 부하 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많은 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곽거병 또한 한 번에 5,800호를 증봉받았다. 그런데 위청은 흉노 선우를 패배시켔음에도 불구, 절호의 기회에서 사로잡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아무런 증보도 받지 못했고, 수하 중에 단 한 명도 후작을 받거나 한 인물이 없었다.

한나라 군대가 이번 싸움에 동원한 말이 무려 14만 필이 되었는데,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는 3만 필도 되지 못하였다. 그만큼 힘든 싸움이었는데 위청은 그 대가를 인정받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대사마의 직위를 새로 두어 표기장군과 대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일컫었고, 둘의 녹봉이 똑같아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곽거병과 위청의 입지가 대놓고 차이가 나게 되자, 야속한 사람들도 모두 바람처럼 움직여 버렸다. 위청의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 모두가 곽거병에게로 가버린 것이다. 위청의 주변에 계속 남아있던 사람은 임안(任安)이라는 사람 딱 한 명이었다.[16]

3.5. 이광의 죽음

막북 전투 관련해서 위청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데, 이광의 죽음이 그것이다. 선우의 위치를 알아낸 위청은 이광에게 말하여 길을 돌아 진군하게 하고, 스스로는 바로 진격해나갔다. 이광은 이에 간절하게 위치를 옮겨 달라고 부탁했지만, 끝내 위청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 한무제의 명령이 있었다. 이광이 그동안 하도 운수가 사나웠으니, 만약 이광이 흉노 선우를 대적하면 재수가 옴 붙을까 걱정했던 것. 윗사람 말은 철저하게 지키는 위청은 이광의 청을 그래서 거절했던 것이다.

이광은 화가 나기도 했지만 자기 의견이 먹히지 않자 아예 위청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나가 버리고 만다. 이광이 길잡이도 없이 빙 돌아오느라 정해진 시간에 늦어 싸움에 참전도 못하게 되자, 위청은 밥과 술을 주면서 이광에게 길을 잃은 상황을 묻게 했다. 이광이 전혀 대답을 안하고 있자 위청은 장사(長史)를 불러 이광을 질책했는데, 이광은 화가 나서 자살해 버렸다.

이광이 죽자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서 울었는데, 아무리 위청이 황제의 명에 따라 이광을 빙 돌게 하고 전투 후에 책임을 물었어도 죽여버리려고까지 했을 동기는 없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고 그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많으니, 결과적으로는 위청이 이광을 죽인 나쁜 놈이 되는 것.

나중에 너무 화가 난 이광의 아들 이감[17]이 위청을 만나고는 다짜고짜 두들겨팼다. 위청이 대장군이고 흉노전쟁의 영웅이며 황제의 친척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래도 위청은 이 일을 숨겼다. 나중에 그 일을 알게 된 곽거병은 자기 삼촌이 두들겨 맞았다는 것에 격분해서 사냥터에서 화살을 쏘아 이감을 죽이게 된다.

3.6. 말년

사람들의 모든 관심은 불세출의 기린아, 곽거병에게 집중되었고 위청은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변이 생기는데, 곽거병이 급사를 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청이 다시 부각되지 않나 싶기도 하겠지만, 위청은 이미 나이도 많았고 오히려 곽거병은 일찍 죽어서 더 전설이 된 측면도 있다.

더구나 10년 가까이 흉노와 전면전을 벌이면서 말이 많이 소모되었고, 한나라의 전쟁도 한동안 흉노와 직접적으로 싸우기보다는 남월이나 고조선을 상대한 싸움에 집중이 되면서 위청의 전문인 흉노 전쟁은 한동안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위청의 첫째 아들 위항은 법에 저촉되어서 후작을 잃었고, 둘째와 셋째도 모두 법에 저촉돼서 후작을 잃었다. 위청이 아직 죽기 전의 일이니, 그는 그 꼴을 두 눈을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이, 위청이 죽기 전은 이 정도에서 끝났지만, 위청이 죽고 난 뒤 벌어진 사건에 연루되어 위항 등은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저승에서 위청이 그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산시성 홍평현(興平縣) 무릉(茂陸) 위청묘(衛靑墓)

4. 평가

처음으로 흉노에 일격을 먹인 장군이자, 가장 오랫동안 대 흉노전선에서 별다른 패배도 없이 한나라를 수호하던 장군. 위청의 공적은 분명 가볍지 않고 대단한 수준이다. 워낙 곽거병 때문에 2인자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곽거병을 제외한 다른 한나라 장수들과 비교해보면 위청이 더 튀어나온 존재인 것.

위청이나 곽거병이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본인이 뛰어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한무제가 밀어준 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순신이 이런 주장을 했는데, 이미 한나라의 국력은 몇배로 튼실해졌고 흉노는 쇠퇴기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죽을 쑤고 위청과 곽거병만 공을 세운 것은, 무제가 위황후의 동생과 조카를 열후로 만들기 위해서 공을 세울 기회를 팍팍 밀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고의 장비와 최강의 정예병을 팍팍 밀어주었으니 군사적 천재라는 것은 과장이라는 이야기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위청이 처음 출전했을 때를 보면 양이나 치던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거기장군에 임명시켜서 보냈던 것이다. 또한 곽거병에 대해서는 항상 따로 정예병을 선발하였는데, 그 군사와 말과 병기가 다른 장수들이 거느린 수준에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무제의 심기를 거슬러 지원을 받지 못한 바람에 고군분투하다가 패배하고 투항한 이릉 같은 경우만 봐도 황제의 지원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위청은 운도 좋았는데, 아무런 이론 공부나 실전경험이 없이 처음 출전했을 때 정처없이 행군하다가 들이닥친 곳이 하필이면 흉노의 수비가 가장 허술했던, 그러면서도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 중요도는 높았던 용성이다. 같이 출전했던 이광이 무능해서 부대가 전멸하고 본인이 포로로 사로잡힌 게 아니다. 단지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흉노 선우의 대부대와 맞닥뜨렸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나 밀어준다고 해서 팍팍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위청이 처음 출전했을 때의 상황은 볼 것도 없이 빽을 써서 들어간 수준이지만, 다른 장수들이 모조리 패배했을 때 홀로 승리를 거두었다. 한무제는 훗날 이광리를 위청과 곽거병처럼 밀어주었지만 그 결과는 둘에 비할 바가 못된다.

5. 성격

곽거병은 태어났을 때부터 고귀한 신분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어주고, 심지어 제국의 황제마저 지지해주는 판국에 고작 18살 때부터 무지막지한 전공을 세우고 있어,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고 행동에 거리끼는 바가 없었다. 행동에는 기백이 넘쳤는데 속내에 있는 말을 숨기는 바가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너무 높은 위치에 있다보니 일반 병사들의 심정이나 상황은 전혀 알지 못했다. 황제가 수십 승의 수레에 음식을 꽉꽉 채워서 보냈는데, 먹고 남으니까 그냥 버렸다. 그런데 그때 병사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에 반해서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한 위청은 아랫사람들을 돌볼 줄 알았고, 사람됨도 어질었다. 사마천은 아예 "대장군은 사람됨이 어질고 선하고 겸손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천자에게 아첨을 했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 중에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단점도 말했다. 종합해보면 사람됨이 좋기는 한데 너무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타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의 측근이라는 사람들은 윗사람, 즉 황제가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곤란하다. 어떤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따끔한 직언을 올릴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서 위청은 몸을 빼는 경향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건이 사마천에게 자기가 위청과 나누었던 대화를 말해주었는데, 소건은 "천하의 어진 사대부들 중에 대장군을 칭찬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 강직한 사대부의 덕목은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

오죽하면 드라마에서 이렇게 묘사되었을까.

하지만 위청 본인이 이에 대답한 말이 있다. 소건이 위청에게 사대부들을 불러 모으는 일을 힘쓰라고 권하자, 위청은 그런 일은 "남의 주인되는 자들이나 하는 권한이다." 라고 하면서 사양했다.
"나는 단지 국법을 받들어 직무에만 따르면 그만입니다. 내가 어찌 사대부들을 불러 모으겠습니까."

즉 사대부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장군으로서는 충실한 인물이었다는 것. 애초에 그는 사생아로 태어난 노비 출신에 제대로 된 교육도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벼락 출세한 사람이었다. 장군이 된 뒤에는 전공을 쌓아서 자신의 기반으로 삼지만, 출신이 미약하고 기반이 단단하지 못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총애였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황제에게는 몸을 낮출 수 밖에 없었고 사적으로도 노비인 자신을 매형으로 삼고 한 제국의 최고 실권자 자리에 앉혀 놓은 황제에게 쓴 소리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도 고위 관료 수십을 숙청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한 무제에게. 결국 위청은 황제의 총애로 출세했다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그를 등용해준 사람이 다름아닌 한무제라서 명장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황제에게 아첨하고 총애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정계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위청은 지금까지도 비판받는다.

그렇지만 입장바꿔서, 노비인 자신을 뽑아서 밀어주는 사람에게 반발을 한다?, 이것은 인의도 충성도 없는 사람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쓴소리를 해야 한다면 사적인 자리에서 몰래 할 수 도 있는데,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 하여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위청의 입장에서는 집지키는 개만도 못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부추기는 인물들도 자기에게 떨어질 떡가루를 노리거나 방패막이로 삼으려고 했던것이지 실제 했다면, '노비에게 은총을 내려 줬더니, 하는 짓거리 봐라. 역시 노비는 안돼.'라고 수근거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대부는 정의의 사자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어느정도 기반을 가진 호족, 이권단체의 대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조창이 존경하던 인물이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도 단독이 아니라 곽거병과 세트로 존경을 받는다.

6. 대중매체에서

위청이 등장하는 중화권 드라마는 8개 정도가 있으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없다.

2014년 드라마 위자부[18]는 누나가 주인공이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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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참의 증손. [2] 한서의 위청곽거병열전이나,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 모두 위청이 어느 시점부터 궁궐에서 일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과정을 봤을 때 이때부터 궁전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3] 황제를 시중하는 무관. 그러니 공손오의 무예가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4] 황제를 좌우에서 모시고 수레와 복식을 관리한다. [5] 원광 6년인 BC 129년. 이것은 한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고, 사기에서는 원광 5년인 BC 13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6] 단 확실한 목표물도 없이 이리저라 다니다가 닥친 곳이 하필이면 수비가 가장 허술했던 곳이라 운이 따라주기는 했다. 어쩌면 흉노의 군대는 없는 곳에서 양민학살했을지도 반대로 이광은 운도 없이 하필이면 흉노 선우의 대부대와 만나는 바람에 참패하고... [7] 내몽골 지역. [8] 감숙성 난주시. [9] 대죄란 신하가 죄를 짓고서 결과를 기다린다는 뜻인데, 관직을 얻는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겸손의 표현인 것. [10] 조신은 본래 흉노 사람이다가 한에 항복한 인물이었다. [11] 小敵之堅 大敵之擒. 손자의 말이다. [12] 한편 소건은 무제의 분노를 사 사형에 처해질 뻔했다가, 속전을 내고 풀려나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복직이 돼 천수를 누리다 죽었는데 역사책을 만들기 위해 취재를 열심히 하던 젊은 사마천을 늘그막에 만나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직접 들려주기도 했다. 소건은 아들 셋을 두었고 그중에 둘째 아들이 흉노에 잡혀서도 충절을 지켰던 소무이다. [13] 산시성(山西省) 신저우(忻州)에 있는 현. [14] 이장군열전에 따르면 위청의 포로가 선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15] 곽거병의 군대가 산에 올라 한해(翰海)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김영수 역 사기 열전을 참조하면 한해는 고비 사막 혹은 바이칼 호를 의미한다고 한다. [16] 임안은 훗날 역사서 <사기>를 쓴 사마천의 친구로 궁형을 당한 직후 사마천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기 위해 쓴 편지 <보임안서>의 그 임안이다. 임안의 자는 소경(少卿)이며. 형양(滎陽)사람으로 청년시절 매우 가난하였으나,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어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은 익주자사(益州刺使)에 이르렀다. 그런데 B.C. 91년, 여태자(戾太子) 유거의 반란, 즉 무고(巫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다.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 임안은 처형되기 전에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 역시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 때에 하지 못하였다. 결국 안타깝게도 그 해 겨울, 임안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졌다. 아무튼 친구끼리 한무제한테 쌍으로 못볼 꼴을 당하고 말았다. [17] 이광이 죽을 당시 이감은 곽거병 휘하에서 종군중이었다. [18] 국내방영명 위황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