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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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20000><colcolor=#ddd>전쟁·정벌 | 교전세력 |
고조선-연 전쟁 기원전 3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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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 영토회복 기원전 3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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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왕의 마한 정복 기원전 1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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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번국, 임둔국 | |
1차 왕검성 전투 기원전 109년 |
한나라 | |
2차 왕검성 전투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 |
한나라 | }}}}}}}}} |
1. 개요
준왕이 위만과의 전투 이후 마한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마한의 군주가 되었다는 전투.2. 내용
《 삼국사기》에서 신라와 백제의 초기 기록에서 등장하는 ' 마한왕'이 준왕의 왕가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와 백제를 비롯한 삼한 전체에 대해 명목상 상국 행세를 했으나 당시 이미 쇠퇴했는지 차츰 그 권위를 무시당하다가 백제에게 끝내 병합당한다. 이 때문인지 《 삼국지》에서는 한의 왕통이 지금은 끊어졌다고 하였으나, 제사는 계속 이어졌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는 《후한서》 동이 열전에도 등장한다.“侯準既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 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그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지(韓地)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그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지(韓地)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 열전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 열전
조선 초에 편찬된 역사서 《 동국통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성이 익주에 있으며 초대 마한왕이 준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1]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2]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후략)"
《 동국통감》 외기(外記) 삼한기
《 동국통감》 외기(外記) 삼한기
이외에도 조선 시대의 연구가들은 모두 준왕이 내려와서 현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를 중심으로 마한을 건국했다고 보았다. 현재 최근 발굴 성과 등을 토대로 한 추측으로는 바로 익산에 소재한 건마국이 준왕 직계 세력으로 유력하다. 자세한 내용은 건마국 참조. 단, 익산 일대의 전승과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문헌 기록을 보면 건마국이 주욱 마한 수장국이었어야 할 텐데, 삼국지의 내용이나 삼국사기 백제 관련 기록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들로 봐선 기원후 3세기 시점에선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를 중심으로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목지국이 마한 수장국인 것으로 나온다.
물론 목지국도 건마국도 다른 충남북 및 전북 내륙부와 마찬가지로 묘제를 비롯한 물질문명은 고조선계인 토광목관묘-토광석관묘계 그리고 세형동검 등이 특징이기에, 초기 마한을 주도하던 세력과 고조선의 직접적인 계승 혹은 강력한 영향 관계가 고고학적으로도 받침됨은 마찬가지다.
다만 건마국 같은 경우 묘하게도 위만조선이 성립하는 기원전 190년 경에는 그 주도 세력이 반론이 불가능할 정도로 당시 고조선 세력 자체지만, 이후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경에는 거의 유물이 발굴되지 않는다. 그 시기가 지나고 기원후 2세기에는 다시 유물량이 회복되지만, 이때는 토착집단인 토돈분구묘제 집단 및 훗날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하는 걸로 추정되는 주구묘 집단이 내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전북 서부에 그전부터 있었던 고조선계 집단은 여전히 있으나 세력은 전자만 못한 상태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또한 언젠가부터 준왕 집안의 대가 끊겨 타인들이 제사를 잇고 있다는 삼국지 기록과 묘하게 합치되는데, 준왕 남래 시절로 계보가 소급되는 준왕 집단의 직계가 세력을 잃으면서 건마국이 목지국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다만 대대적인 집단 단위로 이주한 이상 설령 준왕 개인은 정말로 후손이 궁해서 대가 끊겼을 수는 있지만 여타 왕족인 친척들을 비롯해 고조선계 집단 전체의 후손이 후한서의 기록대로 아주 절멸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건마국이 세력을 잃었을 때도 목지국이나 익산시 입점리 및 웅포리 세력 등 여타 고조선계 세력들은 여전했으며 이들은 백제 왕실에게서도 꽤 대우를 받았던 걸로 보인다. 아마 건마국의 수장이 더 이상 준왕 집단 혹은 준왕과 관련 있는 고조선 직계 집단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던 사실, 청당동의 목지국이 적어도 묘제로만 봐선 준왕 집단과 훨씬 더 가까운데다 낙랑군과 거래할 때의 입지도 유리했던 사실 등을 이유로, 다른 마한 및 삼한 거수국들에 대한 권위 및 실력에서 목지국에게 밀려 수장국 지위를 잃은 것으로 생각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건마국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