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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 왕국

아나톨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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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비티니아 왕국.jpg

1. 개요2. 역사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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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297년부터 기원전 74년까지 아나톨리아 반도 서북부를 지배한 왕국. 리디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을 때에도 자치권을 누렸던 비티니아인들이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 후 직접 지배를 하려는 마케도니아 왕국 안티고노스 왕조,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수십년간 항전한 끝에 기원전 297년 지포에테스 1세의 휘하에서 독립을 쟁취하면서 탄생했다. 그 후 200여 년간 페르가몬 왕국, 폰토스 왕국, 갈라티아, 카파도키아 왕국,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아나톨리아의 정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갈수록 강성해지는 로마 공화국에 의존하다가 기원전 74년 마지막 군주 니코메데스 4세가 왕국을 로마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면서 로마의 속주로 개편되었다.

2. 역사

파일:갈라티아 튀르키예 2.jpg
기원전 200년경 아나톨리아 반도 정세

비티니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리디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왔지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고 자기들만의 지도자를 선출했다. 그러던 기원전 334년 마케도니아 왕국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하이자 헬레스폰티네 프리기아 총독인 칼라스가 비티니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비티니아의 지도자 바스가 이를 격파하고 비티니아의 자주권을 사수했다. 기원전 32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티니아의 지도자가 된 지포에테스는 트라키아의 지배자 리시마코스의 2차례 침공을 모조리 격파하고 장군 한 명을 제거했다. 기원전 315년 아스타코스와 칼케돈을 포위공격해 함락시킬 뻔했지만, 소아시아의 지배자 안티고노스 1세가 파견한 구원군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 1세가 입소스 전투에서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1세 연합군에게 패사한 뒤 소아시아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지포에테스는 이 때를 틈타 아스타코스를 다시 공격해 함락시켰다. 기원전 297년 바실레프스를 칭해 지포에테스 1세로 등극하고 비티니아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1세의 아들 안티오코스 1세가 비티니아를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패배했다고 한다. 이렇듯 여러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던 그는 리페드론 산 기슭에 지포에티움 시를 건설하는 등 신생국인 비티니아 왕국의 기반을 닦았다.

기원전 278년 지포에테스 1세가 사망한 뒤, 장남 니코메데스 1세는 왕위를 독차지하기 위해 세 동생을 모조리 죽이려 했다. 두 동생은 계획대로 죽였지만, 아버지 생전에 비티니아 왕국의 트라키아령을 양도받았던 지포에테스 2세는 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코스 1세의 지원을 받았다. 니코메데스 1세는 이에 맞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안티오코스 1세는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시트라프 파트로클로스에게 비티니아 침공을 명령했지만, 파트로클로스는 니코메데스 1세에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기원전 276년, 니코메데스 1세는 동생을 끝장내기 위해 레온노리오스와 투타리오스가 이끄는 켈트인들을 소아시아로 초대했다. 그들은 곧장 소아시아로 진격해 지포에테스 2세를 살해했고, 니코메데스 1세는 비티니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 후 켈트인들이 소아시아 전역에 대혼란을 야기하는 동안, 그는 켈트인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는 아스타코스 시를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니코메디아라는 명칭을 붙여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니코메디아는 훗날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서 6세기 이상 번영한다.

니코메데스 1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프리기아 출신의 첫번째 아내인 디티젤리에게는 아들 지아일라스와 프루시아스, 딸 리산드라를 두었다. 첫번째 아내가 사망한 뒤 두번째 아내로 에타제타를 맞이하여 지포에테스 3세 등 여러 자식을 두었다. 에타제타는 노년의 남편을 구슬려 디타젤리의 자녀들을 해외로 추방하고 지포에테스 3세를 후계자로 세우게 했다. 기원전 255년, 중병에 걸린 니코메데스 1세는 아직 유아에 불과했던 지포에테스 3세의 앞날을 걱정하여 에타제타를 여군(女君)으로서 섭정하게 하고, 안티고노스 2세 프톨레마이오스 2세, 자유도시인 헤라클레아 폰티카, 비잔티움, 키우스가 후견인을 맡게 했다.

니코메데스 1세가 사망한 뒤 지포에테스 3세가 왕위에 오르고 어머니 에타제타가 섭정을 맡았지만, 아르메니아에 망명가 있던 지아일라스 갈라티아인들을 고용해 비티니아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위험해졌다. 양자 간의 전쟁은 기원전 254년 또는 253년에 비티니아를 분할하여 통치하는 형태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50/249년, 지아일라스가 재차 공격하여 에타제타와 지포에테스 3세를 몰아냈다. 이후 갈라티아인들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지자, 지아일라스는 위협을 느끼고 기원전 228년 갈라티아 지도자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뒤 살해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어 본인이 갈라티아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프루시아스 1세는 마케도니아 국왕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의 딸 아파마와 결혼했다. 기원전 221년 아파마의 이복형제인 필리포스 5세가 왕위에 오르자, 양국은 동맹을 갱신했다. 필리포스 5세는 키오스와 미를리아 항구를 비티니아에 넘겼고, 그는 이를 각각 푸르사( 부르사)와 아파메아로 개명했다. 그 대가로, 그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적대적인 페르가몬 왕국을 견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원전 220년, 로도스에서 비잔티움을 함께 공격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들은 막대한 흑해 통행세 및 관세를 부과하는 비잔티움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비잔티움은 명목상으로는 비티니아 왕국의 영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자유도시로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비잔티움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라고 요구했지만 무시당한 일로 반감을 품고 있었고, 페르가몬 왕국 아탈로스 1세 셀레우코스 왕조의 소아시아 사트라프 아카이오스와 가까운 사이인 것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기에 로도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육지에서 공세를 개시했고, 로도스는 해군을 파견하여 비잔티움의 해상을 봉쇄했다. 비잔티움은 아탈로스 1세와 아카이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아탈로스 1세는 말로는 돕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카이오스는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비티니아군과 대치했다. 그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인 미시아를 장악했고, 제노판토스가 이끄는 로도스 전선 10척은 헬레스폰트로 항해하여 비잔티움의 동태를 살폈다. 한편, 비잔티움은 마케도니아 왕국에 망명가 있었던 지포에테스 3세에게 비티니아 왕으로 모실 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지포에테스 3세는 비티니아 왕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길 원했던 필리포스 5세의 동의를 얻어 마케도니아 용병대를 모집한 뒤 비잔티움으로 향했지만 도중에 사망했다.

로도스인들은 비잔티움의 가장 큰 희망이 아카이오스라고 여기고, 이를 꺾기 위한 계략을 고안했다. 당시 아카이오스의 아버지 안드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다스리는 이집트에 억류되고 있었다. 로도스는 이집트에 안드로마코스를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와 전쟁이 한창인 때에 로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유리하다고 보고 이에 동의했다. 아버지가 로도스의 도움으로 석방되자, 아카이오스는 로도스와 싸우길 거부했다. 이리하여 원군을 얻을 길이 사라진 비잔티움은 비티니아-로도스 연합과 강화 협약을 맺었다. 그들은 흑해에서 두 나라의 선박이 통과할 때 통행세를 추가로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프루시아스 1세는 자신이 점령한 영토와 포로들을 비잔티움에 반환하기로 했다.

기원전 216년, 아탈로스 1세가 아카이오스와의 전쟁에서 고용한 갈라티아인들이 헬레스폰트 해협의 도시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그러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주민들에게 격퇴되자, 아리스바로 이동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루시아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해 전투에서 남자들을 물리친 뒤 적진에 남아있는 모든 여자와 아이들을 학살했다. 이후 갈라티아는 대외 전쟁을 자제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맹자로 남았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참패한 안티오코스 3세는 그에게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는 처음엔 로마의 소아시아 확장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그러던 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의 편지를 접했다. 스키피오 형제는 로마가 필리포스 5세를 물리쳤지만 왕좌를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했고, 인질로 데려온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석방하고 빚도 일부 면제했다고 밝혔다. 또한 스파르타 참주 나비스가 로마와 전쟁을 벌이다 패했지만 역시 용서받은 점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로마는 동맹국의 영토를 늘리는 정책을 추진하니 로마의 편에 들라고 제안했다. 이에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 대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했다.

기원전 188년, 안티오코스 3세와 로마는 아파메이아 조약을 체결하여 평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비티니아가 이 조약에서 어떤 이득도 얻지 못하자, 그는 분개했다. 기원전 186년 셀레우코스 제국에 망명했다가 아파메이아 조약 체결 후 안티오코스 3세에게 버림받은 한니발 바르카가 비티니아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는 한니발을 니코메디아에서 은신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던 중 페르가몬의 국왕 에우메네스 2세와 비티니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비티니아군을 강화하여 나중에 로마와 대적할 수준으로 끌어올리길 희망했던 한니발은 그에게 군사 통솔권을 주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에 혹하여 한니발에게 해군 지휘권을 맡겼다.

한니발은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왕국 함대와 교전했다. 그는 모든 종류의 파충류들로 가득찬 도자기 그릇들을 적 함대에 던져 적을 혼란에 빠뜨린 뒤 맹공을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에우메네스는 로마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183년, 프루시아스 1세는 키에로와 티오스, 그리고 헤라클레아 시를 잇따라 공격했다. 이때 헤라클레아를 공격하던 중 공성전이 지지부진하자 자기가 직접 사다리를 타고 성벽 위로 올라가 거의 도착했을 때 돌에 맞아 성벽 아래로 추락하면서 다리가 부러졌다. 병사들은 즉시 포위를 풀고 중상을 입은 왕을 본국으로 후송시켰다. 그는 이 일로 다리를 절게 되어서 촐로스(Cholus: 절름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얼마 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대표를 맡은 로마 사절단이 비티니아 왕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그에게 에우메네스 2세와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로마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친 한니발을 당장 로마로 넘기라고 압박했다. 결국 그는 로마인들에게 한니발을 넘겨주기로 했고, 한니발은 자신을 잡으러 사람이 왔다는 걸 알게 되자 평소 소지하고 있던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후 비티니아와 페르가몬의 전쟁은 로마의 중재로 양국이 전쟁 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종결되었다.

기원전 182년 왕위에 오른 프루시아스 2세 폰토스 왕국의 군주 파르나케스 1세의 위협에 맞서 페르가몬 왕국 에우메네스 2세, 카파도키아 왕국 아리아라테스 4세와 힘을 힘을 합쳐 전쟁을 벌인 끝에 기원전 179년 파르나케스 1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쟁 배상금을 받아냈다. 기원전 177년 안티고노스 왕조 마지막 국왕 페르세우스의 누이 아파마와 결혼했다.

기원전 168년 페르세우스가 피드나 전투에서 참패한 뒤 로마군에 항복한 후, 그는 축하를 전하기 위해 로마를 공식 방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는 로마 원로원 뜰에 도착했을 때 머리를 자리고 흰 옷과 모자를 쓰고 해방노예가 입던 옷을 입고 있었으며, 문지방에 서서 의원들에게 절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그가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않고 로마에게 굴종하는 모습을 취했다며, 이로 인해 비티니아가 로마에 예속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아피아노스 역시 로마의 관용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굴욕적인 행보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기원전 164년, 그와 로도스, 아카이아 동맹의 사절들이 로마를 방문했다. 그들은 페르가몬 왕 에우메네스 2세가 자기들의 영토 일부를 빼앗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로마는 과거에 자신들을 성심껏 도와 마그네시아 전투 승리에 크게 일조했던 에우메네스 2세를 당장은 비난하지 않았지만, 배신 가능성을 고려했다. 이에 에우메네스 2세의 동생 아탈로스 2세가 형을 위해 변호했고, 원로원은 에우메네스 2세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기원전 159년에도 그와 갈라티아가 로마에 에우메네스 2세를 고발했지만, 아탈로스 2세가 형을 재차 변호해서 무위로 돌아갔다.

기원전 156년, 그는 페르가몬 왕국을 전격 침공하여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탈로스 2세를 물리친 뒤 니케포리움으로 진격해 많은 성역을 파괴하고 아스클레피오스 동상을 비롯한 청동 및 대리석 조각상을 노획했다. 이후 엘라리아로 진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뒤이어 아르테미스 신전을 약탈한 뒤 두아테이라로 후퇴해 그곳에 있던 아폴론 신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비티니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굶주림과 이질에 시달려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폴리비오스는 신전을 모욕한 것에 분노한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탈로스는 동생 아테나이오스를 로마로 보내 원로원에 비티니아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로마는 비티니아에 사절을 보내 페르가몬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이를 무시하고 기원전 155년 페르가몬과 카파도키아를 침략했다. 이에 분노한 원로원은 10명의 사절을 재차 비티니아에 보내 전쟁을 끝내고 아탈로스에게 피해 보상을 하라고 요구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아탈로스는 비티니아의 침략에 보복하기 위해 카파도키아의 아리아라테스 5세,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4세와 연합해 대규모 병력을 구축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10명의 사절들이 페르가몬 편만 든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로마는 비티니아와의 동맹을 파기하기로 했다.

원로원은 아탈로스 2세에게 일단 공격하지 말고 국경의 방어를 강화하고 있으라고 권한 뒤,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트릐 여러 지역에 전령을 위해 비티니아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권고했다. 이와 동시에, 아테네는 80척의 함대를 파견하여 비티니아 편에 있던 헬레스폰트 일대 도시들을 파괴했다. 이제 로마와의 전쟁이 임박하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협상을 제안했다. 원로원은 아탈로스와 그에게 평화 협약을 동시에 제의했다. 여기에는 그가 아탈로스에게 20척의 배를 헌납하고 20년간 500달란트를 지불하며, 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그는 피해를 입힌 도시들에 100달란트를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양자는 이에 동의했고, 비티니아와 페르가몬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는 아들 니코메데스가 민중과 신하들로부터 인망을 사고 있는 걸 경계하여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자, 기원전 151년 로마에 메나스를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페르가몬에 지불해야 하는 배상금을 줄여달라고 청원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니코메데스를 암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1차 목표인 배상금 삭감은 아탈로스 2세가 파견한 안드로니코스가 로마의 배상금이 그가 과거에 노획한 전리품보다 많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메나스는 니코메데스를 암살하려 했지만, 그가 현명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는 걸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차마 죽일 수 없었다. 니코메데스는 나중에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감지하고 안드로니코스와 논의한 끝에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기로 했다.

니코메데스는 왕권을 상징하는 보라색 의복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쓴 채 병사 500명의 호위를 받으며 메나스의 병사 2,000명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메나스는 부하들에게 폭정을 일삼는 왕을 폐위하고 로마와 페르가몬의 승인을 받은 니코메데스를 새 왕으로 추대하자고 설득했고, 2,000 장병 모두가 동의했다. 기원전 149년, 아탈로스 2세는 페르가몬에 찾아온 니코메데스를 환대해주고 프루시아스 2세에게 아들을 인정해주고 특정 도시와 땅을 주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분노하여 자기 땅을 줄 바에 아탈로스 2세의 왕국 전체를 아들에게 주겠다고 답했다. 아탈로스는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니코메데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비티니아를 공격했다.

비티니아 주민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귀순했고, 그는 부하 500명만 이끌고 니케아 요새에 숨은 채 로마가 개입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로마는 아탈로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했기에,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권고만 할 뿐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니코메디아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농성하려 했다가 그곳 주민들이 성문을 열고 귀순하자 제우스 신전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니코메데스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아들 니코메데스가 니코메데스 2세를 칭하며 비티니아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나라 전체를 로마에 기증했다. 이에 반발한 페르가몬 주민들은 에우메네스 2세의 사생아를 자칭한 아리스토니코스를 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마가 반란을 진압하고 아리스토니코스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외에 어떤 통치를 했는지는 사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127년 비티니아의 9대 군주로 등극한 니코메데스 3세는 기원전 104년 폰토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6세와 협의하여 파플라고니아를 분할했다. 로마는 사절단을 보내 파플라고니아 분할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지만 두 사람 모두 응하지 않았다. 한편, 가이우스 마리우스 킴브리 전쟁을 준비하면서 그에게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노예 약탈자들이 자국의 주민들을 마구 잡아다가 노예로 삼아버렸기에 병력을 보낼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동맹국의 자유 시민을 노예로 삼는 걸 금지하고, 시칠리아 법무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네르바에게 노예가 된 동맹국 자유 시민을 해방시키라고 지시했다. 네르바는 재판소를 설립하여 800명 가량의 동맹국 출신 노예들을 해방시켰지만, 노예 소요주들이 집단 항의하고 뇌물을 건네자 재판소를 폐쇄하고 더 이상 노예를 풀어주지 않기로 했다. 이에 반발한 노예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제2차 노예 전쟁이 발발했다.

기원전 102년, 아리아라테스 6세가 급사한 뒤 미망인 라오디케가 14년간 어린 아들 아리아라테스 7세를 대신하여 다스리고 있던 카파도키아 왕국을 침공하여 단숨에 굴복시킨 뒤 라오디케와 결혼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가 카파도키아를 침공하여 니코메데스가 남기고 간 비티니아 수비대를 몰아내고 아리아라테스 7세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아리아라테스 7세가 미트리다테스 6세가 섭정으로 지정한 고르디오스를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곧 아리아라테스 7세를 모살하고 자신의 사생아인 아리아라테스 9세를 카파도키아 왕으로 옹립했다. 이 일련의 일로 비티니아와 폰토스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기원전 100년, 폰토스와 비티니아는 전쟁을 단행했다. 양측은 로마의 지원을 받고자 로마에 잇따라 사절을 보내 원로원 의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쳤다. 한편, 카파도키아 주민들은 미트리다테스 6세의 잔혹한 통치에 반감을 품고 아리아라테스 7세의 동생 아리아라테스 8세를 옹립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96년 카파도키아를 전격 침공하여 아리아라테스 8세를 몰아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아들을 로마로 보내, "이 청년은 아리아라테스 6세가 라오디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번째 아들이다."라며 카파도키아 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트리다테스 6세는 환관 고르디오스를 로마로 보내 아리아라테스 9세가 아리아라테스 6세의 아버지인 아리아라테스 5세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로마 원로원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이해하지 못해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에게 연전연패한 니코메데스 3세는 니코메디아에서 포위당하자 로마 공화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기원전 95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등 사절단을 파견해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당장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아직 로마 공화국과 싸울 생각이 없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순순히 철수했다. 그 후 사절단은 그에게 파플라고니아에서 철수하라고 지시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카파도키아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두 왕 모두 따랐으며, 카파도키아 왕은 주민들의 추대를 받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맡았다.

한편, 그는 기원전 102년 라오디케 왕비와 함께 델포이에 막대한 자금과 노예 30명을 기증했다. 델포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아폴로 신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왕이나 왕비 중 한 명의 동상을 세우고, 두 사람의 후손에게 델포이 신탁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했다. 그는 이 일로 에우에르게테스(Euergetes: 후원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니코메데스 3세는 첫번째 아내 아리스토니카와의 사이에서 니코메데스 4세를 낳았고, 2번째 아내 니사와의 사이에서 딸 니사를 낳았다. 세번째 아내 라오디케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다. 한편, 키지코스 출신의 정부 하그네가 있었으며, 그녀로부터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기원전 94년 니코메데스 3세가 사망한 뒤 니코메데스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통치 능력이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해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91년, 폰토스 왕국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동맹시 전쟁을 치르느라 대외 상황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비티니아를 곧장 침공하여 그를 몰아내고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사생아 아리아라테스 9세를 카파도키아 왕으로 앉혔다.

로마는 이 일에 반발하여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와 아리아라테스 9세의 즉위 승인을 거부하고 그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복위시키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89년 로마 사절 마니우스 아퀼리우스가 폰토스에 찾아와 복위를 이행하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경고했다. 아직 로마와 싸울 준비가 안 되었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는 그에게 보상하라는 아퀼리우스의 요구에 "내가 프리기아를 공략하라는 로마 공화국의 요청을 시행했으니, 로마 공화국은 내게 빚을 졌다"라고 답하며 거절했다. 폰토스 왕의 태도에 화가 난 아퀼리우스는 기원전 89년 그를 부추겨 폰토스를 침공해 아마스트리스를 약탈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펠로피다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 항의했다. 그는 프리기아와 카파도키아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데 니코메데스 3세가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이제는 그가 아마스트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한 건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로마가 일방적으로 비티니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며,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미트리다테스가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에게 비티니아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마침내 로마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89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아르켈라오스를 대동하여 프리기아로 진격했다. 그가 이끄는 비티니아군은 이에 맞서 할리스 강의 지류인 암니아스 강변으로 진군하여 폰토스군과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는 비록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낫전차를 동원하여 적 보병대를 무차별 살육하자 비티니아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한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로마군과 합세한 뒤, 프로토파키움 요새로 쳐들어온 폰토스군과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 역시 폰토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둠을 틈타 로마군 진영을 이탈하여 페르가몬 왕국으로 도주했고, 진영에 남아있던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로마 장수들은 니코메데스 4세와 함께 프리기아의 '사자의 머리'로 불리는 요새로 피신해 프리기아인들을 징집하여 훈련시키려 했지만, 프리기아인들이 비협조로 나오자 포기했다. 카시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파메아로 갔고, 그는 페르가몬으로 망명했으며, 아퀼리우스는 미틸레네로 재차 피신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여세를 몰아 군대를 소아시아 전역으로 파견하여 순식간에 공략했고, 흑해 어귀를 지키고 있던 로마 함대 지휘관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에 에게 해의 패권도 확보했다.

기원전 88년, 아퀼리우스는 폰토스군에게 체포되어 미트리다테스 6세로부터 전쟁의 주범으로 비난받고 당나귀에 묶어서 여러 곳을 돌며 대중 앞에서 미친 척 하라고 강요당한 후 녹인 금이 목구멍이 들이부어지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이후 폰토스군이 소아시아 전역을 휩쓸자, 그는 로마로 망명하여 4년간 사태 추이를 지켜보다가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연전연패한 미트리다테스 6세가 전쟁 전 상태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다르다누스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식되자 기원전 84년 비티니아로 복귀했다. 이 일로 비티니아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이 공고해졌다.

기원전 81년, 아시아 총독의 부관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특사로서 비티니아에 파견되었다. 카이사르는 니코메데스 4세의 궁전에 오래 머물렀는데, 나중에 이것 때문에 그와 카이사르가 동성애 관계였다는 스캔들이 벌어졌다. 당시 로마에서는 동성애를 윤리적으로 죄악시하진 않았지만 '삽입 당하는' 행위는 남자답지 못하는 것으로 폄하당했다. 당시 카이사르의 나이나 신분 차이를 볼 때, 동성애가 사실이라면 카이사르가 '당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서 카이사르가 놀림거리가 된 것.

기원전 74년, 니코메데스 4세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에게 남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왕국 전체를 로마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유언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단행했지만,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연전연패한 끝에 파멸했고, 비티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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