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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2 17:27:54

바그라다스 전투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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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다스 전투
Battle of the Bagradas River
시기 기원전 255년
장소 북아프리카 튀니스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정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파일:attachment/mon_256_4.png 크산티푸스
병력 보병: 15,000명
기병: 500명
보병: 12,000명
기병: 4,000명
코끼리: 100마리
피해 사망: 12,000명
포로: 500명
사망: 800명[1]
결과 로마군의 전멸과 시칠리아에 대한 카르타고의 반격 시작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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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55년 초 바그라다스 평원에서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 스파르타 용병대장 크산티푸스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맞붙은 전투. 튀니스 전투로도 일컬어진다. 한 때 카르타고를 항복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로마 공화국은 이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조기에 끝낼 기회를 놓쳤다.

2. 배경

기원전 256년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한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와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지중해 최대의 해전으로 손꼽히는 에크노무스 해전에서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한 뒤 클루페아 해안에 상륙했다. 이후 해안 도시인 아스피스를 포위해 며칠 만에 항복을 받아내고 수비대를 배치한 뒤 원로원에 전령을 보내 향후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원로원은 불소에게 대다수 전선과 다수의 육군을 시칠리아로 돌려보내고 레굴루스는 15,000 보병과 500기병과 함께 현지에 남아서 점령지를 지키면서 현지 보급에 힘쓰라고 지시했다. 이는 겨울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아프리카에 주둔한 수만 병력에 물자를 지속적으로 보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소는 지시에 따라 시칠리아로 돌아갔지만, 레굴루스는 얌전히 점령지를 지키고 있을 생각따위 없었다. 그는 내년에 부임할 집정관에게 임페리움을 넘기느니 자기 선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굴복시켜서 군사적 위업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에서 남동쪽으로 40마일 떨어진 아디스(현재 유티나) 시로 진격해 포위하고 주변의 시골을 약탈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밀카르, 하스드루발, 보스타르에게 적군을 물리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하밀카르가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이끌고 온 5,000 보병과 500 기병을 포함해 로마군과 비슷한 전력을 규합한 뒤 아디스로 진군했지만, 아디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아디스에서 승리를 거둔 뒤, 레굴루스는 카르타고 주변 지역을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던 부족과 도시들이 이 때를 틈타 카르타고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카르타고 시내에 레굴루스를 피해 도망쳐 온 난민들로 북적였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는 승산이 없다고 본 카르타고 정부는 레굴루스에게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다. 만약 레굴루스가 카르타고가 받아들일 만큼 온건한 조건을 제시했다면,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이때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고 본 레굴루스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로마에 넘긴다.
2. 카르타고는 로마가 지금까지 치른 모든 전쟁 비용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3. 카르타고는 로마에 매년 경의를 표해야 한다.
4.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가 없이 이웃 국가와 전쟁을 선포하거나 동맹을 맺을 수 없다.
5. 카르타고는 전선 1척 외에 함선을 갖출 수 없으며, 로마가 새로운 전쟁을 벌일 때 50척의 전선을 제공한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 요구를 도저히 들어줄 수 없다고 여기고 최후의 항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당시 그리스에서 온 대규모 신병들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는데, 그들 중에는 스파르타 용병 지휘관인 크산티푸스가 있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 측의 병력과 기병, 전투 코끼리의 숫자를 점검한 뒤 동료들에게 "카르타고군은 충분히 로마군을 물리칠 전력을 갖췄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로마군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군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자, 카르타고 정부는 크산티푸스를 소환했다. 크산티푸스는 자신에게 지휘권을 준다면 로마군을 물리쳐 주겠다고 약속했고, 어떻게든 로마군을 물리치고 싶었던 카르타고인들은 그를 믿어보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반면, 아피아노스는 카르타고 당국이 처음부터 크산티푸스를 지휘관으로 초빙했다고 밝혔다.

크산티푸스는 겨울 동안 군대를 철저하게 훈련시키고 조국을 멸망 위기로 몰아놓은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많은 카르타고인들은 처음에는 외국인이 최초로 자국군을 지휘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지만, 크산티푸스의 철저한 훈련 방식과 능수능란한 지휘력을 보고 그라면 로마군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명령에 복종했다. 이윽고 기원전 255년 봄이 오자 카르타고군이 카르타고 시에서 출발해 로마군을 향해 접근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보병 12,000명, 기병 4,000명, 코끼리 100마리의 전력을 갖췄다고 한다. 레굴루스 역시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카르타고를 재기불능으로 만들기로 마음먹고 출진했다. 이리하여 카르타고의 운명이 걸린 결전이 벌어졌다.

3. 전투 경과

크산티푸스는 중앙에 카르타고 시민들로 구성된 호플리테스를 배치했고, 좌익과 우익에 용병대와 시칠리아 베테랑들을 배치했으며, 양익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또한 최전방에는 1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배치했다. 이에 맞서는 로마군은 최전방에 경무장 부대를 배치하고 로마 군단병을 전통에 따라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3개 대열로 편성했다. 다만 이전 전투들과는 달리 상당히 밀집된 형태를 취했는데, 이는 전투 코끼리들을 뚫고 전투력이 떨어지는 카르타고 시민병들을 제압해 승부를 보려는 것이었다. 500명의 로마 기병은 양 측면에 배치되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크산티푸스는 전투 코끼리들을 적 군단병들에게 돌격시켰다. 로마 병사들은 칼로 방패를 연신 두들겨서 코끼리들이 겁먹게 만들려 했지만, 코끼리들은 이를 무시하고 빽빽히 모인 로마 병사들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일부 군단병들은 코끼리병들을 회피한 뒤 카르타고 시민병들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돌진한 터라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데다 조국을 기필코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불사른 시민병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바람에 오히려 압도당했다. 한편 500명의 로마 기병들은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적 기병들에게 금세 격파되었다.

이윽고 로마군의 거의 모든 전열이 무너졌고, 승기를 잡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사방에서 포위되어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오직 좌측면에서 적 용병대를 패퇴시킨 2,000 군단병만이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레굴루스 외 500명의 장병 및 장교들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나머지는 모조리 살육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의 사상자는 800명 뿐이었다고 한다.

4. 이후

전투가 끝난 후 생포된 레굴루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레굴루스는 카르타고로부터 평화 협상을 촉구하는 사절로 선임되어 로마에 보내졌지만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전쟁을 계속하라고 촉구한 뒤 카르타고로 돌아갔다고 한다. 키케로를 비롯한 후대의 로마 작가들은 그가 눈꺼풀이 잘려진 뒤 분노한 코끼리에게 짓밟혀 죽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자료를 제공한 폴리비오스의 <역사>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학계에서는 후대 로마인들이 레굴루스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창조했을 뿐 실제로는 좋은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으리라 추정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를 구원한 뒤 카르타고 장군들의 질투와 중상 모략에 직면하자 해를 입기 전에 카르타고를 떠났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크산티푸스는 카르타고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많은 보물을 배에 실은 채 스파르타로 돌아갔지만, 도중에 카르타고인들이 몰래 뚫어놓은 구멍에 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르타고인들은 크산티푸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스파르타로 돌려보냈지만 선원들을 매수해 그와 스파르타 동료들을 죽이고 배 밖으로 던지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요 사료인 폴리비오스의 <역사>에는 이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시리아의 이집트군 사령관으로 크산티푸스를 임명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카르타고인들이 크산티푸스를 해쳤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레굴루스의 패전 소식을 접한 로마 정부는 패잔병들을 구출하기 위해 두 집정관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해안으로 가게 했다. 두 사람은 도중에 요격해 온 카르타고 함대를 헤르마이움 해전에서 격파한 뒤 아스피스에서 아군을 모두 태우고 이탈리아로 출항했다. 그러나 도중에 카마리나 인근 해상에서 폭풍에 휘말려 전함 384척과 300척의 수송선, 10만 이상의 인력을 손실하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말기인 기원전 205년 집정관에 오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등 원로원 중진들은 이 전투와 카마리나의 참사를 거론하며 스키피오의 계획에 정면 반대하면서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한니발 바르카를 완전히 제압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이를 무릅쓰고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했고,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물리치고 카르타고를 굴복시켰다.
[1] 폴리비우스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