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f,#610b5e><colcolor=#610b5e,#fff> 가이우스 마리우스 Gaius Mar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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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가이우스 마리우스 Gaius Mar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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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157년 ~ 기원전 86년 1월 13일 |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아르피눔 아르피노 | ||
이탈리아 라치오주 프로시노네현 아르피노 |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현 로마 | |||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
칭호 | 제3의 건국자 | ||
국가 | 로마 공화정 | ||
가족 |
율리아(부인)[A]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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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장군, 정치가 | ||
계급 | 레가투스(Legatus) | ||
복무기간 | 기원전 134 ~ 기원전 86년 | ||
참전 |
유구르타 전쟁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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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로마 관직 내역 ]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107년 | ||
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스카우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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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
후임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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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04년 | ||
전임 |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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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 ||
후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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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103년 | ||
전임 |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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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 ||
후임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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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102년 | ||
전임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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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 ||
후임 |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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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101년 | ||
전임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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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 ||
후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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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100년 | ||
전임 |
마니우스 아퀼리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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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 ||
후임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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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86년 | ||
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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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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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당대 로마인들에게 제3의 건국자로 칭송받은, 전쟁 영웅이자 포풀라레스의 거두로 유명하며 이 사람의 삶 자체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한다고 비유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로마 출신이 아닌, 이탈리아 지방 출신 평민으로 국가 최고위직인 집정관까지 오른, 그것도 무려 7차례나 역임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서구권 학자들이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부르는 BC 88 ~ 78년간의 시대를 상징하는 두 정치가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가이우스 마리우스라는 전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마리우스는 일반적인 로마 귀족이나 평민들과 달리 프라이노멘(개인이름)+노멘(씨족명)만 가진 평민 출신이다.[2]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기원전 157년 이탈리아 라티눔 남부 지방의 아르피눔 근교의 작은 마을 케레아타이에서 보잘 것 없는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다만,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이나 당대 로마 귀족들의 생각과 달리, 마리우스는 다다음 세대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달리 소위 쌩평민 출신이 아니었고 그의 부친은 노동자 출신도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라틴인 마을로, 로마에 편입된 이후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동네였다. 마리우스 일가가 대대로 살았던 아르피눔과 케레라타이는 마리우스가 태어나기 30년 전인, 기원전 188년에서야 비로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완전한 로마시민권을 도시 전체가 부여받은 로마의 피정복도시 중 하나였다. 이런 이유로 마리우스의 집안은 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아르피눔 일대에선 부유하고 유력한 기사계급에 속한 지역 유지였음에도, 당대 로마 귀족들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평민 가문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상당한 재산을 가진 지역 유지 아들로 태어난데다 일찍부터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출세 코스를 밞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마리우스가 로마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나게 된 무대는 바로 군대였다. 그는 24살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스페인 원정군에 종사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활약은 스키피오가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을 이끌 사람이라 칭찬하기도 한다. 그는 군대에서 복귀한 뒤 군대에서의 전적으로 트리부누스 밀리툼, 재무관, 호민관에 선출되며 출세를 하기 시작한다.
마리우스가 대중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아지자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로마 귀족 중 한 명이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마리우스를 지목하였고 둘은 보호자(patronus), 피보호자(cliens) 관계를 갖는다.[3] 그 뒤 마리우스는 안찰관에 입후보하나 낙선한다. 그 다음 해에 마리우스는 법무관에 입후보하여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고 그 뒤 총독으로 임명되어 2년 동안 로마 속주를 관할한다.
마리우스의 파트로네스였던 메텔루스가 집정관에 임명된 뒤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게 되자 메텔루스는 유능한 군인으로 알려졌던 마리우스를 자신의 부관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지휘 방식에 불만을 품었고 그는 자신이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마리우스는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며[4] 병사들에게 고된 일인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우는 것을 손수 도우며 환심을 산다. 그리고 전장에선 앞장서서 지휘하였으므로 병사들에게 신임받게 된다.
메텔루스는 자신의 친구였던 투르필리우스를 병참 담당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투르필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베가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베가 시민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하지만 베가 시민들은 그를 배신하였고 한밤 중에 유구르타 군을 불러들여 투르필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모두 생포되는 신세가 된다.
베가 시민들은 투르필리우스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죽이는 것을 원치 않았고 때문에 유구르타군은 그를 풀어준다. 이렇게 되자 메텔루스의 장교들은 그가 돈을 받고 적과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고 특히 마리우스가 앞장서서 투르필리우스를 질타하였다. 메텔루스는 어쩔수 없이 투르필리우스를 처형하였으나 후에 그가 결백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깊이 상심한 메텔루스는 투르필리우스를 앞장서서 처형토록 하게 한 마리우스를 싫어하게 된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에게 집정관 입후보를 위해 로마로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마리우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가지려고 한다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던 메텔루스는 마리우스의 요청을 허가하지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24살에 불과했던 자신의 아들이 집정관 후보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소하기도 하였다.[5] 그러다 마침내 입후보 기일 12일 전에 아슬아슬하게 허락을 해준다.[6]
마리우스는 로마로 되돌아와 집정관에 입후보한 뒤 유구르타 전쟁을 마무리 지을 것이라고 호언하였고 메텔루스와 원로원을 무능하다며 힐난한다. 이미 메텔루스 휘하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그의 명성과 유구르타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메텔루스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이를 좋게 생각하였고 따라서 마리우스를 압도적인 찬성으로 집정관에 선출한다. 그런데 원로원이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연장하려하자 시민들은 이것을 투표를 통해 저지한 뒤 마리우스에게 이 직책을 내준다. 마리우스는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오자 메텔루스는 마리우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부관과 함께 로마로 돌아온다.
마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은 끊임없이 유구르타를 압박하였고 유구르타는 결국 자신의 장인이었던 마우레타니아 왕인 보쿠스 1세에게 달아났는데 마리우스는 보쿠스를 회유하여 유구르타를 마리우스에게 넘기도록 한다. 당시 마리우스는 자신의 부관이었던 술라를 사절로 보냈었는데 마리우스에게 거부감을 가졌던 원로원은 유구르타를 생포한 공이 술라에게 있다며 그의 공적이 새겨진 인감을 술라에게 주었으며 술라는 이를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나빠지게 된다.
2.2. 킴브리 전쟁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로마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북방에서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 테우토니족, 암브로네스족, 체루스키족, 마르코마니족이 연합하여 라인강을 건넜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갈리아족의 영토를 유린하였고 로마는 이들이 갈리아를 지나면 이탈리아 혹은 스페인에 침입할 것이라 판단하여 집정관들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저지코자 하였다.하지만 파견된 집정관들은 차례대로 게르만족에게 격파당하였고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두 명의 집정관과 그들의 군대가 몰살당하자 게르만족은 자신감을 갖고 로마 영토였던 남부 갈리아에 침입하였다.
로마인들은 이에 당황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하여 맞서게 한다. 로마는 8만에 이르는 병력을 편성하였고 이는 12개 군단에 이르는 전례없는 규모였다. 이 병력은 그해의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와 전직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각각 4만씩 지휘하게 된다.
전직 집정관인 퀸투스는 이미 게르만족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이때 집정관인 막시무스의 군이 도착하였고 막시무스는 퀸투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퀸투스는 신참자(novus homo) 가문 출신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막시무스보다 파트리키(patrícĭi) 가문 출신인 자신의 권위가 현직 집정관의 권위를 능가한다고 생각하였고 신참자 가문 출신인 막시무스의 지휘를 받는 것이 굴욕이라 판단하였다. 결국 퀸투스는 막시무스의 요청을 거부하고 따로 진영을 구축한다. 퀸투스의 진영이 새로 구축된 것을 본 게르만족은 로마 군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으므로 싸우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였고 그 때문에 막시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다.
이 사실을 들은 퀸투스는 강화가 체결되면 막시무스가 모든 군사적 성취를 가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고 막시무스와 게르만족의 강화를 훼방놓기로 하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4만의 군단병을 이끌고 단독으로 킴브리족의 진영을 공격한다. 이 싸움에서 게르만족은 숫적으로 앞서있고 또한 충동적으로 공격한 퀸투스의 전술에 약점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군은 몰살당하고 퀸투스는 달아난다. 집정관 막시무스는 퀸투스 휘하에서 종군하던 아들을 잃었다.
이로 인해 사기가 크게 고양된 게르만족은 강을 건너 막시무스의 진영으로 쳐들어왔다. 막시무스의 병사들은 퀸투스 군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므로 겁에 잔뜩 질린 상태였고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게르만족은 여기서도 대승을 거두었는데 로마군은 매우 적은 소수만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8만에 걸친 군단병이 몰살당하였는데 이는 로마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다. 이를 아라우시오 전투라 부른다.[7] 이로써 로마 영토는 완전히 노출되게 된다.
2.3. 두 번째 집정관이 되다
로마 시민들은 역사상 최악의 패배 앞에 공황에 빠졌는데 이때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유구르타를 생포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로마 시민들은 마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게르만족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러나 이는 제약이 따랐는데 그 이유는 마리우스에게 게르만 족과의 전쟁을 맡기려면 그를 집정관에 선출시켜야 하는데 아프리카에 있던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입후보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에 시민들은 법을 바꾸어 아프리카에 있는 마리우스를 입후보시킨 뒤 집정관에 당선시킨다.
마리우스는 두 번째 집정관이 된 뒤(기원전 105년) 그 다음 해에 생포한 유구르타와 함께 로마로 귀국하여 개선식을 거행한다. 이때 게르만족은 이탈리아로 침입하지 않고 스페인으로 침입해 켈티베리아인들을 약탈하는 중이었으므로 마리우스는 그들의 침략에 맞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2.4.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마리우스는 로마군의 질적 저하가 심각한 것을 파악하였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에서 중산층의 몰락으로 인해 로마 군단병의 조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이 때문에 재산 하한선을 낮춰 징집 대상의 폭을 넓혔고 따라서 로마 군단병의 전체적인 무장 수준은 저하되었다. 또한 8만에 달하는 로마군의 손실은 쉽게 채워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때문에 기존의 방식으로는 30여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을 저지할 충분한 수의 로마 군단병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로마의 중산층이 몰락한 이유는 당시 로마 중산층을 이루는 이들은 자영농민들이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자 해외에서 값싼 수입 곡물이 들어오면서 자영농 계층은 몰락하게 되었고 또한 이들이 해외 원정을 나가는 동안 그들의 영토가 황폐해져 많은 이들이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된 상태였다. 로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징병대상자의 재산 기준을 완화했으나 사실상 빈곤층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가족 걱정에 군복무를 제대로 할 리 만무해서 오히려 전투력만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때문에 마리우스는 의무병역 해당자들을 소집하는 대신 기존에 있었던 비상시 유급지원병 모집제도[8]를 확대하여 아예 순수한 유급지원병만으로 군단을 구성하도록 하였다.[9] 그리고 병력이 충분히 모이자 기존의 징병제를 전면 폐지하였으며 이렇게 모인 병사들이 전쟁이 끝나면 토지를 비롯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한 결과 충분한 병력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돈을 통해 로마 군단의 통제권을 지휘관이 과도하게 갖게 되고, 오랜 기간 같은 지휘관 아래 같은 군단이 있게 됨으로써 사병화를 불러오게 된다. 이것은 빈곤 해결과 군사력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획기적인 개혁이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병사들이 지휘관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가 나타남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점은 술라가 독재관 자리을 차지한 시기에서도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로마에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 즉 군사적 역량을 갖춘 정치인들 간의 군대를 동원한 권력다툼, 내전을 펼쳐지게 하는 계기를 낳았다. 훗날 공화정을 무너트리는 인물에 속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역시 마리우스의 덕을 본 셈이며, 아우구스투스가 황제정을 시작한 후에 상당부분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로마 내전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중산층의 몰락도 근본적으로는 혈연 세습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그외의 귀족층이 '시민병 제도' 시절부터 중산층 파산을 묵과하고 부를 독점한 탓이고, 사병화도 특정인물들을 견제하려고 사령관이 약속한 퇴직금 등 군대에 지불해야 하는걸 안주거나 막는 대처를 한 원로원이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즉.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을 해서 문제가 생긴게 아니라 군제개혁을 해야 할 정도로 원로원이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애초에 이 문제는 마리우스 등장 20~30년 전에 활약한 그라쿠스 형제도 제기했지만 이에 대한 원로원의 응답은 원로원 최종권고와 그에 따른 불법적이고 무자비한 학살 뿐이었다.
어쨌든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단행한 뒤 군대를 증강하였고 이러는 동안 마리우스의 임기가 끝나게 된다. 이에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에 연임시켰고 때문에 마리우스는 전대미문의 5년 연속 집정관에 당선되는 행운을 누린다.[10]
이렇게 마리우스가 연달아 집정관이 될 수 있었고 또한 원로원이 이것을 묵인했던 이유는 30만에 이르는 게르만족이 언제 이탈리아로 남하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르만 족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로마군을 몰살시킨 뒤 계속 이탈리아 침공을 미루었고 이 사이에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사실 마리우스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군사활동을 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직 집정관과 현직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집정관 항목 참고) 게르만족에 대한 전쟁준비를 마리우스에게 전부 맡기고 싶어했던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계속 현직 집정관인 상태로 두고자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아라우시오 전투에서의 참패는 전직 집정관 퀸투스가 현직 집정관 막시무스의 밑에 들어가길 거부한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마리우스는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 출신인 현직 집정관이 마리우스의 명령에 거부하려 들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게르만 족이 남하할 가능성이 있는 기간 동안엔 계속 마리우스를 현직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2.5. 게르만족과의 싸움
마리우스가 5번째 집정관이던 기원전 102년에 드디어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로 침략한다. 게르만족은 둘로 나뉘어 남하하였는데 하나는 테우토네스족으로 전사만 해도 12여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킴브리족으로 21여만의 전사를 대동하고 있었다.[11] 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탈루스와 각각 론 강과 갈리아 키살피나로 향했고 킴브리족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동안 마리우스의 진영으로 테우토네스 족이 진입하였다.마리우스는 적이 다가왔음에도 나가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테우토네스 족은 마리우스의 진영 앞을 지나가며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안부를 전해주겠다며 조롱했다. 테우토네스 족이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에 이르자 이들을 추격한 마리우스는 높은 언덕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 기병과 투창병을 내보내 게르만 족을 유인하였다. 로마군을 연달아 쳐부숴 사기가 높았던 게르만 족은 이러한 유인에 걸렸고 언덕을 올라 로마군을 정면으로 공격했던 암브로네스족이 3만의 병력을 잃는 대참패를 당한다.
당황한 암브로네스족과 테우토네스족은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마리우스는 이들을 추격하여 10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을 철저히 쳐부쉈다. 사서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전사자는 10만에 이르렀고 마리우스군의 전사자는 1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승리한 마리우스는 다음 집정관 선거를 위해 로마로 되돌아간다.
한편,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킴브리족이 지나오는 알프스 산맥의 고갯길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갯길을 방어하는 게 여의치 않다고 생각한 카툴루스는 포 강으로 철수하여 평원에 진영을 설치했고 이때 알프스를 넘어온 킴브리족이 카툴루스의 진영으로 들이닥치자 카툴루스의 로마군은 진영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다음 해인 기원전 101년, 개선식을 준비하다가 카툴루스의 패주 소식을 들은 마리우스는 카툴루스와 합류하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북상한다. 북이탈리아로 진입한 킴브리족은 두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과 조우하였으나 테우토네스 족의 패배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테우토네스족이 합류하면 전투를 치를 생각이었다.
킴브리족은 마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테우토네스족과 자신들이 살 땅을 요구하였는데 마리우스는 사슬에 묶인 테우토네스족의 왕을 보여주며,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주겠다고 조롱하였고 숫적으로 우세한(21만 vs 5만) 킴브리 족의 왕 보이오릭스는 자신만만하게 마리우스에게 회전을 하기 위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동안 무기를 개량하고 있던 마리우스는 사흘 뒤인 6월 30일 라우디네 평야에서 맞붙자고 대답하였고 다음 날 아침 마리우스군의 기병은 동이 트자마자 킴브리족의 기병을 공격하였다. 예상보다 이른 공격에 당황한 킴브리 족의 기병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기병이 패주하자 킴브리족의 보병이 나와 응전하였고 마리우스의 로마 군단병이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기병을 패주시킨 로마 기병이 이들을 협공하여 킴브리족은 무너지고 만다. 이때 킴브리족은 14만이 죽고 6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로마군의 사망자는 1천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킴브리족와 테우토네스족은 기원전 113년에 이주를 시작하여 12년에 걸쳐 거침없이 갈리아와 스페인을 휩쓸고 지나갔는데 이탈리아에 진입하여 모두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 게르만 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로마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열렬히 환영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음 해인 기원전 100년 마리우스를 또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이는 마리우스에겐 6번째의 영예였다.
2.6. 호민관 사투르니누스
마리우스는 세 번째 집정관을 지낸 기원전 103년에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졌다.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비호를 받으며 그를 위한 여러 가지 법안을 민회에서 가결시킨 바 있었다.게르만 족과의 전쟁을 끝내자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를 움직여 그의 휘하의 병사들에게 퇴직금으로 줄 영토를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데 사투르니누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정치적인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였다.
그는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과 흡사한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는 시칠리아 섬과 그리스, 그리고 갈리아에 있던 국유지를 마리우스의 퇴역병에게 주어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단지 갈리아에 퇴역병을 정착하고자 했던 마리우스의 구상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이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여기에 덧붙여 평민 집회에서 법안이 가결되면 원로원 의원이 지키겠다는 맹세를 5일 내에 해야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또한 마리우스의 퇴역병이 세울 신도시의 시민들은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갖게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그라쿠스 형제 중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의 법안 내용과 일치하였으며, 이는 로마 시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원로원의 반대는 격렬했다. 원로원이 우려한 것은 새로 건설한 식민지 중 그리스와 시칠리아 섬의 영토는 이미 원로원이 점거하고 있었으며, 또한 신도시의 시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져 투표권을 갖게 된다면 이들이 모두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호민관들은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불길한 전조가 있다면서 평민 집회를 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성난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은 로마로 몰려가 거부권을 행사한 호민관들을 위협하였고 마침내 열린 평민 집회에서 이 법안은 가결되고 만다.
원로원들은 억지로 가결된 이 법안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투르니누스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고 마리우스의 상관이였던 메텔루스는 맹세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로마를 떠난다.
2.7. 사투르니누스와 마리우스의 실각
사투르니누스는 기원전 99년에 열린 호민관 선거에 다시 나서 당선된다. 뒤이어 그는 마리우스의 열렬한 추종자인 전직 법무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집정관으로 밀었는데 선거를 주재했던 집정관 마리우스는 글라우키아가 집정관 선거에 나올 법적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므로 그의 후보 등록을 거부한다. 그러자 사투르니누스는 여기서 과도하게 나갔는데, 그는 글라우키아의 강력한 라이벌이였던 집정관 후보를 때려죽인 다음 글라우키아의 후보 등록을 가능케 하기 위해 수정 법안을 민회에 제출한 것이었다.원로원은 이에 분개하였고[12] 따라서 가이우스 그라쿠스 때에 이어 두 번째로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발의한다. 집정관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추종세력을 체포해서 제거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사투르니누스는 마리우스의 세력이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제거해야 했다. 이는 마리우스에게 있어 매우 난처한 것이었다.
사투르니누스가 원로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던 것은 순전히 마리우스가 군사력으로 뒤를 받쳐주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는 지나칠 정도로 행동하여 원로원을 자극하였고 마침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킨 것이었다.
여기서 마리우스는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사투르니누스의 행동에 제동을 가할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투르니누스의 행동에 끌려다녔던 것이었다. 사투르니누스의 법안은 마리우스가 원했던 것 이상으로 자극적이었고 또한 급진적이었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불신을 샀고 그는 이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었어도 마리우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사투르니누스의 행동을 방조하고 묵인하였다.
그 결과 원로원 최종권고가 발의되었는데 마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머물면서 이러한 결의가 되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군사력과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현직 집정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결의를 막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이것을 방관하였다.
원로원 최종권고의 발동으로 인해 마리우스는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막다른 상황에 몰린다. 원로원의 명령대로 사투르니누스를 잡아다 처형한다면 마리우스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격하는 것이고 이는 그의 지지자에 대한 배신이므로 마리우스의 정치생명은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투르니누스를 지지하고 원로원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이는 로마의 구체제에 대한 반역인 셈이었다.
당시 현직 집정관이던 마리우스에겐 실질적인 군사력이 있었는데 그의 퇴역이 결정된 병사들은 불과 1년 전까진 현역이였고 상당수가 로마 시내에 머물고 있었다. 게다가 마리우스는 5년에 걸쳐 사실상의 독재관이나 다름없는 권한으로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준비해왔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마리우스였으며, 이런 마리우스에게 그의 정치생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끝장내라는 주문을 원로원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권위를 믿은 것이었다.
때문에 훗날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가 그리했듯 마리우스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요구대로 군대를 이끌고 사투르니누스를 체포한다. 사투르니누스는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 마리우스에게 순순히 투항하였고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의 그의 지지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신전에 가둬두었다. 이때 원로원 지지파들은 몰려가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떼네 신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고 결국 사투르니누스는 목숨을 잃는다. 마리우스는 이런 것을 방관하였을 뿐이었다.
이날 사투르니누스의 죽음과 함께 마리우스의 정치생명도 끝나게 된다. 마리우스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며 마리우스에게 원로원의 결의를 수호한 것에 대해 원로원은 감사 표시를 하였을 뿐 곧 잊혀지게 된다. 원로원 의원들에게 있어 시민의 지지와 군대가 없는 마리우스는 단지 '한창 때 잘나갔던 시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이렇게 순순히 원로원의 명령을 들어 자신의 정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낸 것은 아마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유능하였으나 정치가로서는 유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때문에 부유층, 기득권을 대표하는 옵티마테스, 서민과 중산층을 대표하는 포풀라레스와의 알력을 조정하는 섬세한 일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결과 6번째 집정관이 만료되자 마리우스는 더이상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게 된다.
2.8. 마리우스의 재등장 - 동맹시 전쟁
기원전 99년에 마리우스의 6번째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마리우스는 잊혀진 존재가 된다. 하지만 이후 기원전 91년에 시민권 확대 문제로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드는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자 마리우스는 기원전 90년도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군사 고문으로 지명된다.마리우스는 루푸스에게 새로 징집한 신병의 훈련이 부족하므로 전투를 하기 전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였으나 루푸스는 이를 무시하고 그들을 이끌고 나간다.
루푸스는 군을 둘로 나눈 뒤 마리우스와 각각 지휘하기로 한다. 루푸스와 마리우스는 각각 다리를 건설해 리리스 강을 건너고자 하였고 이들과 맞선 베티우스 스카토는 루푸스에게 주력 부대가 마리우스 쪽으로 이동한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다. 이것에 속은 루푸스는 경솔하게 도강하다 스카토군에 포위되어 목숨을 잃는다.
마리우스는 이 둘이 싸우는 동안 텅빈 적의 막사를 공격해 이를 점령한 뒤 패주한 루푸스의 군단과 합류한다. 이렇게 되자 마리우스는 루푸스를 대신하여 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마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은 그해 내내 패배하지 않았고 성공적으로 군사활동을 마친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겨울이 되자 지휘권을 반납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마리우스가 이렇게 지휘권을 반납한 이유는 불명확한데 그의 건강상의 문제로 그리했다는 가설이 있다.
2.9. 호민관 술피키우스 루푸스
동맹시 전쟁의 결과로 로마 원로원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내의 모든 라틴 시민권자들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한다. 기원전 88년에 전쟁이 마무리 지어졌으며 그러자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어떻게 투표권을 줄 것인가가 중대한 이슈가 된다.당시 로마의 투표 방식은 평민집회의 경우 로마 포럼에 모인 시민들을 주거지 별로 35개의 그룹으로 나눠 이 35개의 부족의 과반수를 가져가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였다. 로마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새로 확대된 로마 시민권자의 수가 기존의 로마 시민들을 웃도는 것을 감안한다면 명백히 기존의 로마 시민들보다 불평등한 대우였다.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는 때문에 새로운 로마 시민들을 기존의 35개 그룹에 할당하려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한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매우 거셌고 루푸스는 당황한다. 궁지에 몰린 루푸스는 마리우스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법안이 통과되게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였고 마리우스는 루푸스를 도와주는 대가로 로마에 반기를 든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원정군을 지휘하는 군사 지휘권(임페리움)을 요구하였다. 루푸스는 이에 동의하였고 마리우스는 자신의 퇴역병들을 로마 시내로 불러들여 루푸스의 법안을 지지하게 한다.
이렇게 되자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하였던 원로원은 휴일을 선포하고 모든 시내의 상업을 중단시키며 맞섰는데 마리우스와 루푸스의 지지자들은 시내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로마 시내 곳곳엔 이들 양파간에 패싸움이 벌어졌고 이에 휘말린 집정관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망갔다. 마리우스는 술라를 숨겨주는 대가로 휴일 선포를 취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집회를 연 루푸스는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를 35개 그룹에 배당하겠다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뒤이어 놀라라는 도시에 집결했던 미트리다테스 원정군의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준다는 법안을 가결시킨다. 이로써 69세의 마리우스는 이전의 군사적인 영광을 성취하여 정계에 복귀할 기회를 얻게된 것이었다.
2.10. 술라의 로마 진군
하지만 로마 역사상 군단 지휘권은 집정관 혹은 법무관이 갖는 것이 상식이였으며 예외의 경우가 임기가 만료된 집정관이 전직 집정관이라는 신분으로 지휘권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아무런 공직에 있지 않았던 민간인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 지휘권은 집정관 고유의 권한이었는데 이것을 빼앗아 일개 시민에게 주는 것은 전대미문의 폭거였다.이때 놀라에 있었던 집정관 술라는 군단 편성을 마친 상태였는데 마리우스가 이 군단을 지휘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술라는 격분하였고 따라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다. 이것은 로마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로 수백 년간 집정관이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라는 대담하게도 수도 로마를 공격하였다.
술라가 로마를 공격하려하자 술라 휘하의 지휘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불복한다. [13] 하지만 일선 병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술라 휘하에서 동맹시 전쟁을 치른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무산자들로 앞으로의 봉급 문제, 퇴직금 문제 등을 술라에게 기대고 있었으며 때문에 로마군이라기보단 술라의 군대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사령관에 의한 사병화는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준 폐해였고 술라가 이런 폐해를 이용한 첫 장군이었던 것이었다.
술라는 로마 공격에 6개 군단을 동원하였고 마리우스는 이를 저지하고자 노예와 검투사를 모아 군대를 이끌고 맞섰으나 패배한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퇴역병들이 정착하고 있었던 북아프리카로 달아났고 술라는 로마에 입성한다.
술라는 로마 원로원에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였는데, 그는 마리우스와 루푸스가 집정관의 고유의 권한인 군단 지휘권을 멋대로 바꾸었으며 이는 로마의 전통과 정치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고 따라서 현직 집정관인 자신이 나서서 이것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자신을 억울한 희생양으로 묘사하였고 마리우스와 루푸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였고 루푸스가 통과시킨 모든 법안을 철회한다.
그러나 뒤이어 열린 집정관 선거에서 로마 시민들은 술라의 로마 진군에 대한 분노감을 표시하는데 술라가 내세운 후보들은 모두 낙선하였고 마리우스 일파에 가까운 후보들이 당선된 것이었다. 술라는 로마 진군이라는 행위를 지울 만한 군사적 성취를 원했고 때문에 폰투스 원정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는 집정관에 당선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불러 자신의 법안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강요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를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난다.
2.11. 집정관 킨나
술라의 강요로 맹세를 한 두 집정관 중 하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민중파에 해당되는 사람이었으며 마리우스의 지지자였다. 이런 킨나의 당선은 로마 시민들이 명백히 술라의 로마 진군이라는 만행과 그의 독단적인 법안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킨나는 술라에게 맹세를 하긴 하였으나 그는 이 맹세는 강요에 의해 된 것이므로 지킬 의무가 없다고 말하였고 술라가 그리스에 상륙하자 과거 루푸스가 시도하였던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을 기존의 35개의 그룹에 배치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동료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움직여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였고 궁지에 몰린 킨나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을 방문하며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촉구한다. 이런 킨나에게 많은 지지자가 몰렸는데 킨나가 군대를 구성해서 로마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생각한 원로원은 그를 집정관직에서 파면키로 하고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이렇게 되자 아프리카에 있었던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귀국한 뒤 킨나의 세력과 연합한다.[14] 원로원도 서둘러 군단을 편성하여 농성했으나,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였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모호한 행동 등으로 인해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갔고, 결국 협상하여 이들을 로마 내로 들이게된다. 마리우스와 킨나는 이 과정에서 킨나의 동료 집정관이었던[15]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살해하고 대규모 숙청을 벌인다. 그 뒤 킨나와 마리우스는 선거나 정식절차는 안중에도 없이 스스로 집정관직에 올랐다. 킨나에겐 2번째, 마리우스에겐 7번째 집정관직이었다.
2.12. 사망
마리우스는 그가 로마에 영향력을 잃은 지 10년 만에 다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잘 활용해 다시 권력을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마리우스는 집정관직에 취임한 지 보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폐렴으로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이러한 최후는 마리우스가 실각한 이후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것을 본다면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위기로부터 구했으나 노년에 가서는 이 공화국의 토대를 흔듦으로써 결국 공화정의 붕괴를 초래하게 만든 것이었다. #
마리우스가 죽은 뒤 킨나는 사실상 로마의 일인자가 되어 집정관으로서 로마를 통치한다. 그러나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 강화를 맺고 이탈리아에 상륙하려하자 군대를 편성하여 맞서려다 군대의 폭동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그 뒤 민중파들은 권력의 공백을 겪게 되었고 술라는 이들을 맞아 승리하여 로마를 점령한 뒤 민중파들을 철저히 숙청하면서 전통적인 원로원 주도의 정치 제도를 강화시킨다.
여담이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 되는 사람이다. 덕분에 소년기를 막 벗어날 무렵 마리우스와 그의 정적 술라 간의 내전에 휘말려야 했던 카이사르는 일찌감치 민중파의 일원으로 낙인찍히는 신세가 되었다.[16]
민중파의 숙청과 함께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취급된 마리우스의 시신은 테베레 강에 버려졌고 조각상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정계에 입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복권되었다.
3. 같이 보기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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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 사고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 ||
기타 |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 차르 · 카이저), |
[A]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
[2]
일반적인 로마인들의 이름은 개인이름(프라이노멘)+성씨(노멘) 뒤에 추가이름 혹은 지파성씨 등으로 번역되는 코그노멘이 붙었다. 이렇게 셋으로 이루어진 로마인들의 이름은 건국 이래 로마시민임을 나타내는 확실한 특징 중 하나였다. 따라서 로마시민으로서 공직에 있는 특정인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는 소개법도 아버지의 이름과 출신 씨족과 지파 성씨를 결합해 소개했다. 가령 카이사르의 경우, "가이우스의 아들이며 율리우스 씨족 출신인 카이사르"와 같이 소개됐다.
[3]
그러나 호민관 시절 마리우스가 메텔루스의 파벌에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는 있으나 마나 한 게 되었다.
[4]
이는 중국의 병법가였던
오기도 그렇게 하였다. 오기는 휘하 병사에게 난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준 적이 있는데, 이러한 행동 역시 병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으므로 이 점은 마리우스와 오기가 비슷하다.
[5]
그 아들은 훗날 커서 메텔루스 피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집정관을 역임한 뒤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 반란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되게 되었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만만치 않았고 나중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6]
이는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최대한 뺏으려는 의도였다.
[7]
2위는
칸나이 전투. 하지만 아라우시오 전투에 대한 기록자인
발레리우스 안티아스의 기록에 대해, 대체로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별로 높은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는 점 및 일반적으로 당시 전투에 참가한 2개 야전군은 보통 4~6만으로 추산되는 점 등을 보아 군단병 8만+기타 4만이 전사했다는 기록은 과장이 있다고 평가된다.
[8]
2차 포에니 전쟁 때와 같은 국가비상사태 시 중산층 중장보병이 부족할 경우 장비비용와 복무비용과 봉급을 국비로 지급하는 댓가로 자진입대를 받아 군단을 만드는 제도는 원래 있었다. 물론 정규군단만으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때 임시로 시행되는 제도였지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아프리카 원정작전 때 정식 집정관 군단을 배정받지 못해서 유급지원병과 시칠리아 주둔병력으로 전력을 충당했다.
[9]
기존의 병역대상자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면 그에 따른 세금을 내는 것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0]
5년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된 인물은 임기 제한이 없었던 공화정 초기에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전대미문한 일이었다.
[11]
이렇게 엄청난 인원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들의 군사행위가 단순한 침공이 아닌 부족 전체의 대규모 이동이었기 때문이다. 침공을 위해 몇몇 인원만 선별해 보내는 것과 아예 부족 전체가 이주를 위해 침공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규모로, 사실상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을 끌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며 이런 식이라면 로마인들 역시 백만이 넘는 인원을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2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이 눈에 띄게 강력해졌음에도 4세기까지는 로마 제국 측이 어찌어찌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으나 훈족에 의해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하자 결국 국경선이 마구 뚫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실제로 이와 같은 대규모 이주는 언제나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치며 일개 유민 집단이 대규모 토착 세력을 여지없이 패배시키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자주 보이는 일이다.
[12]
사투르니누스에게 맞아죽은 집정관 후보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또한 사투르니누스의 행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였기 때문이었다.
[13]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명만 불복했다고 잘못된 언급을 하였다
[14]
이들은 대부분 퇴역병사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건설했던 식민지 출신이었다. 마리우스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해방노예 집단인 바르뒤아이도 언급된다.
[15]
킨나는 옥타비우스와의 정쟁 중에 집정관직을 박탈당했다.
[16]
또한 카이사르는 킨나의 사위이기도 했다. 술라는 살생부 명단에서 카이사르를 지우는 조건으로 카이사르에게 킨나의 딸과
이혼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당당히 "
No!!!"를 외친 카이사르는 술라를 피해 이탈리아를 떠나게 된다.
[17]
사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전에도 16년에 걸친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수년에 걸쳐서 같은 군대를 지휘하는 마르켈루스 같은 인물은 병사들과 지휘관이
클리엔텔라 관계로 발전하여 이미
군벌화 되기 시작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