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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먼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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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88대
휴버트 험프리
제88~94대
월터 먼데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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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덜 앤더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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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2대 부통령
월터 먼데일
Walter Mondale
파일:Waltermondaleasdiplomat.jpg
본명 월터 프레데릭 먼데일[3]
Walter Frederick Mondale
출생 1928년 1월 5일
미국 미네소타주 실론
사망 2021년 4월 19일 (향년 93세)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재임기간 제42대 부통령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서명 파일:월터 먼데일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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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부모 아버지 시어도어 시그바드 먼데일
배우자 조안 먼데일
자녀 아들 테드 먼데일
엘레노어 먼데일외 1명
학력 맥칼리스터 컬리지 (졸업)
미네소타 대학교 (BA, JD)
종교 개신교 ( 침례교회)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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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약력3. 생애
3.1. 휴버트 험프리의 제자3.2. 미국 부통령3.3. 1984년 대선 출마3.4. 낙선 이후의 생애
4. 선거 이력5. 기타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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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42대 부통령이자 정치인.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제4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였다.

노르웨이계 미국인으로 "프리츠"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2. 약력

3. 생애

3.1. 휴버트 험프리의 제자

파일:험프리먼데일.webp
휴버트 험프리와 월터 먼데일
1928년 미네소타에서 태어났으며, 로스쿨에 진학해 법학을 배웠다.[4] 20세이던 1948년, 휴버트 험프리 미니애폴리스 시장이 미네소타 주 상원의원으로 출마하자 선거캠프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드러냈고 험프리에게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험프리의 수제자로 거듭났다. 이후 미네소타 제2구 민주당 지부에서 잠깐 활동하다가 1960년 미네소타 주지사에 의해 미네소타 주 법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험프리의 후계자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된다. 1964년, 험프리가 존슨의 부통령이 되기 위해 의원직을 사임하자 미네소타 주지사는 그를 미네소타 주 상원의원직에 임명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먼데일은 상원에서 험프리의 직계 후계자로 활약하며 당권파의 핵심 멤버로 부상했다. 1968년 존슨이 정계은퇴를 은퇴하고 험프리가 민주당의 명실상부한 보스가 되자 그의 위치는 더욱 상승했으며,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존슨이나 험프리와는 달리 민주당 상원의원과 두루 친하게 지냈다. 조지 맥거번과는 사적인 친구 사이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대선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으로부터 2번이나[5] 부통령 후보직을 제의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재선에 관심을 기울여야했던 먼데일은 이를 거부했고, 사전트 슈라이버가 최종 부통령 후보로 낙점되었다.

그는 휴버트 험프리의 최측근이자 개인 비서나 다름 없는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노골적인 복지 옹호파(뉴딜 민주당원)는 아니었다. 먼데일은 확장적인 재정 정책과 복지 확대 등 LBJ의 "위대한 사회"의 이상을 믿었지만 한편으로는 1968년 혁명 이후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노동자, 농민의 우경화를 가장 빠르게 눈치챈 인물이었다.[6] 때문에 먼데일은 경제정책에 있어 선배인 험프리나 존슨에 비해 보다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하였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스쿱 잭슨이나 스테니스 등의 매파와 풀브라이트, 맥거번 등 비둘기파 사이에서 타협지점을 찾으며 "중도파"로 거듭났다.

이러한 먼데일의 중도실용주의 노선은 험프리로 하여금 먼데일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었으며, 험프리가 눈에 띄게 노쇠해지자 먼데일의 민주당 내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물론 모든 문제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시민권 문제에 있어 그는 당 내의 확고한 좌파였고, 자신의 힘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남부 보수파 혹은 온건파로부터 뉴딜 진보주의의 이상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먼데일의 행보는 1970년대의 현실에 맞게 FDR과 LBJ의 유산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3.2. 미국 부통령

파일:카터먼데일.webp
197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손을 치켜들고있는 먼데일과 카터
역대 모든 미국 부통령은 월터 먼데일 이전과 월터 먼데일 이후라는 두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앨 고어
오바마가 나에게 부통령 직을 제안했을 때 내가 처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바로 먼데일이었다. 그는 부통령직을 완전한 파트너십으로 정의하고 나를 포함한 후대의 모든 부통령에게 이상적인 모델을 제공한 인물이었다.
조 바이든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서 지미 카터가 당선되자, 당내 진보파는 카터의 보수성에 반발하며 휴버트 험프리 제리 브라운 등을 대타 후보로 내세우자는 "ABC"(Anybody But Carter) 운동을 벌였다. 카터는 당내 진보파의 거두인 험프리의 지지를 확보하고 더 나아가 노동조합의 확실한 지지를 얻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는데, 월터 먼데일은 그에게 가장 적합한 부통령 후보군이었다. 게다가 먼데일은 카터와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카터는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는 유명 우주비행사인 존 글렌 오하이오 상원의원과 월터 먼데일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먼데일을 부통령 후보로 낙점했다. 이는 좋은 선택이었고 험프리와 노동조합이 기쁜 마음으로 카터를 지지하면서 카터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현직 포드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7]

지미 카터는 초선 조지아 주지사 밖에 경력이 없었기에 대통령으로서는 다소 미숙했는데, 이 때문에 월터 먼데일에게 이례적으로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조언을 구했다. 먼데일 이전까지 부통령은 대통령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어떠한 권한 행사도 할 수 없었으며 "해외 정부수반 장례식장에나 다녀오는 사람" 정도로만 여겨졌다.[8] 하지만 먼데일은 이례적으로 국내외 현안에 대해 카터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카터와 함께 산책하며 국정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카터의 정책에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내며 국정 전반에 관여했다. 동시에 베트남 보트피플 구제, 이란 인질극 협상 주도, 중국 방문 등 부통령의 외교적 역할을 두배로 늘렸다.

이러한 먼데일의 행보는 부통령의 역할을 크게 바꾸었다. 먼데일 이전까지 부통령은 대통령의 대리인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으나, 먼데일과 그 이후의 부통령은 대통령이 처리하기 어려운 잡다한 업무를 맡고, 대통령에게 많은 조언을 제공하며, 외교나 일부 내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국정파트너로 급이 격상되었다. 앨 고어는 이러한 점을 들어 부통령의 역사가 먼데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며, 많은 정치학자들은 먼데일이 처음으로 부통령의 권한을 확실히 한 기념비적 부통령이라고 평한다. 때문에 카터가 대통령으로서 나쁜 평가를 받지만 부통령 먼데일은 미국 역대 최고의 부통령으로 자주 꼽히기도 한다.[9]

먼데일의 또다른 업적은 카터의 지지 기반을 어느정도 봉합했다는 점에 있다. 카터가 대통령으로서 보수적인 정책을 펼치자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분노하며 그의 지지를 철회했고, 1980년 대선에서 에드먼드 머스키, 조지 맥거번, 헨리 M. 잭슨 등 많은 진보 의원이 그에 대항하는 테드 케네디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먼데일만큼은 끝까지 카터를 믿어보자면서 카터의 붕괴되는 지지 기반을 유지하려고 동분서주했고, 그 영향으로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케네디를 힘겹게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다시 지명될 수 있었다.

물론 먼데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카터의 모든 것을 지지할 수는 없었다. 먼데일은 카터가 '불쾌한 연설'(Malaise speech)[10]을 하고자 했을때 이 연설을 발표하는 것에 반대했으며[11], 소련-아프간 전쟁을 이유로 대소련 곡물 수출을 중단한 카터(사실상 브레진스키)의 결정에 반대했다. 먼데일은 브레진스키의 매파적 노선에 반대해 그와 자주 말싸움을 벌였다. 1979년 카터가 개각을 통해 먼데일과 험프리의 측근을 백악관에서 몰아내자 그는 너무 화가나서 얼굴이 붉어졌으며 며칠동안 카터 지지를 철회하고 1980년 재선 출마를 포기하는것까지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모두 용서하고 다시 카터를 지지해줬으니 대인배라 할만하다.

3.3. 1984년 대선 출마

월터 먼데일에게는 결함이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불릴 정도로 투쟁가로서의 열정이 부족하다. 그리고 캠페인을 위한 의제도 부족하다. 때때로 그는 단지 "레이건이 아닌 후보"인 것처럼만 비추어졌다. 노동계와 이익단체에 막대한 이권을 약속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러닝메이트는 조지 부시만큼 대통령이 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는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로서 환영받았지만, 남편과 그의 사업 파트너들의 세금 탈루 논란과 같은 골치 아픈 질문의 역효과를 불러왔다.

하지만 먼데일의 장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는 상원의원으로서 문제를 극단으로 몰고가지 않는 중도실용파였고, 지미 카터의 부통령으로서 일관되게 좌우파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동요를 겪을 상황에서도 투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넘어졌을 때 자신의 부하나 상대방을 탓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일어나 싸움을 시작한다. 대선날 그는 이기거나 지겠지만 그뿐이다. 그는 이전과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는 적자를 줄이고, 부를 재분배하고, 핵무기를 보다 안전하게 통제할 것이다. 이러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월터 먼데일은 대선에서 승리할 자격이 충분하다.
뉴욕 타임스, 1984년 10월 28일 사설에서 #
1978년 험프리가 사망하고 1980년 대선에서 카터가 참패하면서, 먼데일은 민주당의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먼데일은 만신창이가 된 당을 복구하고 1982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압승을 이끌어내며 대권주자로서 지위를 굳혔다. 대선을 1년 앞두고 치러진 여론조사에서, 레이건 대 먼데일이 48% 대 47%로 접전으로 나타나면서 정권 탈환의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거노믹스의 효과가 발현되면서 레이건의 지지율이 회복되었고, 민주당 내에서도 루스벨트-스티븐슨-존슨-험프리-먼데일로 이어지는 뉴딜 자유주의자들의 권력 독점에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졌다. 1972년 대선에서 맥거번의 선거 참모였던 게리 하트 콜로라도 상원의원은 먼데일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다. 하트는 먼데일의 복지, 재정 확대 정책이 구식 "위대한 사회" 접근 방식이라며 1980년대에는 기업 규제를 철폐해 첨단 기업 및 IT 산업 육성, 정보통신 산업 혁신, 시대에 맞춘 친환경 성평등 정책 등으로 경제 성장을 주도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트는 자신을 "아타리 민주당원"이라 자처하며 먼데일을 구식 정치인으로 비난했다. 한편 마틴 루터 킹의 후계자인 제시 잭슨 목사는 레이거노믹스에서 소외된 흑인, 빈곤층, 여성, 성소수자 등의 유권자를 모아 풀뿌리 운동으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맞서야한다는 급진좌파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먼데일은 여전히 많은 흑인과 기득권 진보파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고 숙련된 정치가 답게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진보 정책을 공약하였다. 이에 반해, 하트는 먼데일에 비해서는 중도적이었지만 실속이 없는 정책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먼데일은 하트에게 "Where's my meat?"[12]라는 돌직구를 날려 하트 대세론을 잠재우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다.
파일:먼데일 페라로.webp
먼데일과 페라로,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Mr. Reagan will raise taxes, and so will I. He won't tell you, I just did.
레이건 씨는 세금을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럴겁니다. 그는 당신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전 여기서 솔직하게 진실을 말씀드렸습니다.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발언. 미국 정치사 사상 최악의 연설로 평가된다.
야심차게 본선에 나섰으나 결과는 폭망. 우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세금을 올리겠다는 모두가 싫어할 말을 제1의 공약으로 내세워 표가 우수수 떨어졌다.[13] 먼데일은 진보적 가치를 실현한다며 민주당 하원의원 제럴딘 페라로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 최초의 여성 러닝메이트를 두게 되었지만, 정작 페라로의 남편인 돈 지카로가 세금 체납 사건에 연루되며 캠페인에 짐만 되었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경제가 호전된 반면, 먼데일은 미국의 상승하는 빈부격차와 범죄율, 농장 정책의 실패 등 부정적인 지표를 거론하며 노골적인 네거티브 선거전에 열중했다.[14] 반대로 레이건은 "미국에 다시 아침이 찾아왔습니다"로 대표되는 포지티브 캠페인을 벌였고, 레이건에 대비되어 먼데일은 상대방의 사소한 흠결에 집착하는 구태 정치가로 비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선거 몇주 전 토론회에서 레이건이 눈에 띄게 말을 더듬고 수치를 바꿔 말하는 등 부진하자, 먼데일의 지지율이 반등하기도 했다. 먼데일은 기세를 타고 레이건의 고령을 지적하며 자신의 젊음을 홍보했지만 2차 토론회에서 레이건이 "이 자리에서 저는 제 고령을 문제삼지 않아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먼데일 후보의 지나친 젊음과 경력 부재를 지적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선빵을 때려 먼데일은 본전도 못건졌다. 정치경력만 보면 레이건에 비해 먼데일이 훨씬 더 능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이 이 말에 박장대소했고, 먼데일조차 레이건의 위트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2차 토론회 밤에 먼데일이 아내한테 여보, 나 선거 진것 같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선거 결과, 먼데일은 40.6%를 득표하며 자신의 고향인 미네소타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패배하는 굴욕을 당한다. 확보한 선거인단 수는 단 13명.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함께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미네소타에서 4천표차(0.18%)로 간신히 이겼는데, 히스패닉의 압도적 지지[15]가 없었다면 미네소타조차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레이건은 미국 50개 주에서 모두 이길 뻔 했다. 당시엔 NBC 등 개표방송을 하던 주요 언론들이 공화당을 파란색[16]으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레이건은 이 승리 이후 " 수영장 대통령"이란 별명을 얻었다.

3.4. 낙선 이후의 생애

낙선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당선된 후 주일대사로 임명되었다. 1996년 주일대사에서 퇴임한 이후로는 에이미 클로버샤, 셰러드 브라운과 같은 정치인들을 양성했다.

2002년, 3선에 도전하던 폴 웰스턴(Paul Wellstone) 상원의원[17]이 선거를 겨우 10일 앞두고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자 미네소타 민주농민노동당의 지명을 받아 급히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51 대 45로 꽤 크게 앞섰지만, 결과는 2%p 차이로 패배. 아무리 지명도가 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부시 행정부의 지지율이 높았고, 10일만에 모든 것을 해내야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이로서 먼데일은 미국 정치사 사상 유일무이하게 50개 주에서 모두 패배한 정치인이 되고 만다.[18]

2020년 대선을 앞두고는 에이미 클로버샤를 지지했다. 2021년 4월 19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4. 선거 이력

<rowcolor=#0d1635>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62 미국 미네소타주 법무장관 선거 미네소타

730,783 (59.64%) 당선 (1위) 초선
1966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685,840 (53.94%)
197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981,320 (56.67%) 재선
1976 미국 부통령 선거[A] 미합중국

40,831,881 (50.08%, 297명) 초선
1980 미국 부통령 선거[A] 35,480,115 (41.01%, 49명) 낙선 (2위)
1984 미국 대통령 선거 37,577,352 (40.56%, 13명)
200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미네소타

1,067,246 (47.34%)

5. 기타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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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명단
부통령 <colbgcolor=#fff,#1f2024> 월터 먼데일
국무장관 사이런스 밴스 에드먼드 머스키
재무장관 마이크 블루멘탈 G. 윌리엄 밀러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
법무장관 그리핀 벨 벤자민 시빌레티
내무장관 세실 앤드루스
농무장관 로버트 버글랜드
상무장관 후아니타 M. 크렙스 필립 클루츠닉
노동장관 레이 마샬
보건사회복지장관 조셉 A. 캘리파노 주니어 패트리샤 로버츠 해리스
주택도시개발장관 패트리샤 로버츠 해리스 문 랜드류
운수장관 브록 애덤스 닐 골드슈미트
에너지장관 제임스 R. 슐레진저 찰스 던컨 주니어
교육장관 셜리 허프스테들러
관리예산실장 버트 랜스 제임스 T. 맥킨타이어
무역대표부 대표 로버트 S. 스트라우스 루빈 애스큐
주유엔대사 앤드루 영 도널드 맥헨리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경제자문위원장 찰스 슐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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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임자 휴버트 험프리 사임(부통령 임명)으로 미네소타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 [2] 전임자 월터 먼데일 사임(부통령 임명)으로 미네소타 주지사에 의해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 [3] 프리츠(Fritz)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4] 한국전쟁 당시 징집 대상이었지만 실제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5] 2번째 제안은 토머스 이글턴의 후보직 사퇴로 제의 받은 것이었다. 이 외에도 프랭크 처치, 래리 오브라이언, 에드먼드 머스키, 휴버트 험프리 등이 제의받았다. [6] 1972년 대선에서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하게 전미 최대 노조인 AFL-CIO가 민주당 지지를 거부했고 노동조합원 사이에서 닉슨이 맥거번에 비해 더 많은 표를 얻었다. [7] 이때 최초의 부통령 후보 토론회도 치러졌다. 공화당 부통령 후보는 밥 돌이었는데, 돌은 여기서 "20세기에 일어난 모든 미국의 전쟁이 민주당의 미숙한 안보 정책으로 일어났다"라는 무리수 발언을 해 먼데일이 승자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밥 돌의 "민주당 전쟁" 발언의 영향력이 다소 과장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대선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8] 계파 안배로 부통령 후보가 정해졌던 19세기는 말할것도 없으며, 찰스 G. 도스, 존 낸스 가너,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스피로 애그뉴 등 많은 부통령이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국정 운영에 거의 참여할 수 없었고, 헨리 A. 월리스 넬슨 록펠러처럼 백악관 내 권력 싸움에서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9] 이 외에도 최고의 부통령으로 자주 꼽히는 인물로는 조지 클린턴, 리처드 닉슨, 앨 고어 등이 있으며, 최악의 부통령으로는 에런 버, 존 C. 칼훈, 리처드 멘터 존슨, 스피로 애그뉴, 댄 퀘일, 딕 체니 등이 자주 선정된다. [10] 엄밀히 말해 '불쾌한'이란 단어는 오역에 가깝다. '불안감'쪽이 좀 더 정확한 의미에 가깝다. 사실 번역이 '불쾌한'이던 '불안감'이던간에, 애초에 카터는 'Malaise'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11] 이 연설의 요지는 "오늘날 미국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빠졌으며, 이는 미국인들이 자신감을 잃고 있기 때문인데, 이 바탕에는 물질만능주의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유와 소비를 줄이고, 미국 전통의 공동체 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사실 카터는 인간적으로는 솔직담백한 사람이었고, 이 연설은 그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한 "비전과 지혜를 국민 여러분과 (솔직히) 나누겠다."라는 약속을 지킨 것이지만, 여기는 정치판, 그것도 대선시점이었고, 찬성파와 반대파가 온갖 주장을 내세우며 격론을 벌였다. 반대파에서는 이건 단순한 국개론에 불과하며, 이런식의 끝없는 독설이 국민들을 지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파는 이 연설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 출현을 경고한 연설이며, 연설 직후 카터의 지지율은 크게 상승했으므로 카터의 재선 실패는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2] meat(고기)라는 단어는 미국 정치에서 특정 지지자들이 만족할만한 확고한 정책이라는 속어로 사용된다. [13] 먼데일의 요지는 레이건이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올린다면 자신은 부자에게 더 많이 세금을 걷어 복지를 확충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먼데일의 세금을 올리겠다는 말의 충격이 너무 커서 자세한 말의 목적이 모두 잊혔고 공화당은 신나게 먼데일을 공격해댔다. [14] 먼데일이 비난한 레이거노믹스 및 신자유주의의 허점이 2008년 금융 위기에서 대부분 드러났기에 뒤늦게 먼데일을 재평가하는 여론이 좌파를 중심으로 어느정도 있다는 점이 먼데일에게는 유일한 위안거리이다. [15] 로널드 레이건은 포클랜드 전쟁에서 전폭적으로 영국 마거릿 대처를 지지했었고, 이 때문에 히스패닉은 민주당에 몰표를 줬다. 당시만 해도 히스패닉의 인구 비중이 적은 편이라 선거에 큰 영향은 못 미쳤다. [16] 2000년 대선 까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색을 반대로 표시했었다. [17] 상원의 양심으로 불렸던 의원으로, 걸프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모두 반대한 민주당 대표 진보 정치가였다. [18] 맥거번은 49개 주에서 전패했지만 매사추세츠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다. [A] 대통령 후보는 지미 카터 [A] 대통령 후보 지미 카터 [21] 역대 최장수 부통령은 아니다. 최장수 부통령은 존 낸스 가너로 99세까지 생존했다. [22] 연방정부의 구성과 업무를 배우기 위한 닷새 일정의 수학여행. [23] 금요일 자유 시간에 친구들과 걷다가 한 친구가 농담따먹기로 할 일 없는 부통령이나 보러 가자고 얘기한 걸 다머가 옆에 있던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어찌어찌 해서 진짜로 먼데일의 참모와 통화가 연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