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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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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주의 상징으로 대표 척화비
영어 Isolationism
한자 孤立主義
스페인어 Aislacionismo
러시아어 Изоляциони́зм
독일어 Isolationismus
프랑스어 Isolationnisme
1. 개요2. 사례3. 같이 보기

1. 개요

타국과의 외교 관계를 최소화하고 개입을 꺼리는 외교정책. 시대에 따라 고립주의의 형태는 꽤나 다양한데, 전근대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쇄국정책과 같이 모든 분야에서 철두철미하게 타국과의 교류를 일절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세계화로 인한 완전한 고립이 불가능해지면서, 고립주의의 의미가 변화되어 정치/군사적으로 자국의 이익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각종 국제분쟁이나 타국 문제에 중립을 유지하며 개입을 최소화하는 외교노선을 지칭한다.[1]

고립주의는 국제문제에 관한 국가적인 외교정책이며 타국의 내부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동맹을 체결하거나 국제기구 참가를 제한하는 방침이다. 난민 문제나 이민, 외국인 배척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해당 논의는 다문화주의 혹은 다문화주의/반대 문서를 참고바람.

2. 사례

2.1. 대한민국

역사적으로는 조선 시대 말기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이 가장 유명한 사례. 흥선대원군은 "조약 없음, 무역 없음, 천주교 없음, 서양 없음, 일본 없음"이라는 단순한 외교 정책을 펼쳤으며, 중국을 제외한 모든 외국 세력과의 교류를 거부했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고립주의와는 달리 경제/문화적 교류까지 전면 차단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쇄국정책이었다.

현대 대한민국의 경우 주요 동맹국 및 교역국을 제외한 지역의 국제 분쟁에 대해선 제한적 개입 정책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직접적인 국익과 관련되지 않은 국제 분쟁에 대해서는 외교적 성명이나 입장 표명 수준의 대응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경제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시장 개방과 교역 확대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수출 중심의 무역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자원 부국이나 일본, 유럽과 같이 인구가 많고 내수가 발달한 국가들과는 달리, 한국은 국제 교역을 통한 경제 성장이 필수적인 상황이다. 이러한 경제적 특성으로 인해 한국은 최근 강화되고 있는 세계적인 보호무역 추세에도 불구하고 개방적인 통상정책을 취하고 있다.

2.2. 북한

에리트레아,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현재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고립주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곳이다. 다른 나라들은 과거에는 고립주의를 택했더라도 현대에는 폐기했거나 점점 개방적으로 가는 추세인데 반해 21세기인 지금도 고립주의를 넘어서 아예 철저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국 자체도 엄격하게 제한될 뿐만 아니라 어찌어찌해서 북한에 들어간다고 해도 북한 일반인들과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고 오직 당국에서 허락한 곳만 다닐수 있으며 가이드를 빙자한 감시원이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외국인이라도 가차없이 억류하거나 노동교화형을 때린다. 게다가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것 뿐만 아니라 내부 주민들도 북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고 있으며, 려행증 제도로 주민의 왕래까지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이러니 외국에서는 북한을 가리켜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경이다. UN 측은 북한의 '자발적 고립(self-imposed isolation)'이 주민들의 기본적 인권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2.3. 중국

역대 왕조에 따라 조금씩 양상이 변하기는 했지만, 가장 유명한 사례는 명나라. 초대 홍무제 때부터 아예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금정책(海禁政策)을 실시했을 정도.[2] 명나라 초기에는 환관 정화를 원정보내기도 했지만 정화의 원정 이후로는 나라의 문호를 걸어잠그고 고립주의를 취했다.

이후 청나라 역시도 큰 틀[3]에서는 명나라의 대외정책을 유지한다.

또한 전근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의 경험만을 가진 한국과 달리, 중국은 현대적인 의미의 고립주의를 외교노선으로 채택하기도 했는데 죽의 장막이 바로 그것. 죽의 장막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고립주의는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를 수립함과 동시에 채택됐으며,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를 거치며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후진타오 집권부터 유소작위, 대국굴기를 명분으로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전환했으며, 시진핑 집권부터 일대일로를 적극 추진하고있다.

2.4. 일본

헤이안 시대에 894년의 견당사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대륙과의 교류가 크게 감소하여 국풍의 시대로 들어선다. 1271년 원나라의 일본원정으로 쇄국이 흔들렸고, 1401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요청으로 명과 국교가 성립되어, 동아시아권에 재편입한다.

에도 시대인 1633-1639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실시된 쇄국정책은 1853년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전통적인 교류국이었던 조선, 중국, 류큐 등지와는 간헐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데지마를 통해 서양인과도 접촉을 가지는 등[4] 철두철미하게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아니었다.[5]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에 의하여 강제 개항되며 쇄국정책은 종료된다.

일반 시민들의 인식은 꽤나 고립주의적이지만, 정부 차원에선 1990년대부터 '세계 진출', '적극적 평화주의' 등의 기치 아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우방국들과 보조를 맞추며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열심히 하는 등 국제 사회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힘을 쏟고 있다.

2.5. 영국

현대적 의미의 고립주의의 주요 사례로 꼽히는 영국은 유럽 대륙 내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등 사이에서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한 유럽 내부문제에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영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는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18~19세기 유럽의 역사에서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이 유지되는 경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영국이 고립주의를 파기하는 경우 역시 빈번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의 제국이 지나치게 비대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프랑스 동맹의 주축으로 활동한 것.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영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크림 전쟁 정도를 제외하면 유럽 대륙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렇게 고립주의를 채택한 이면에는 19세기 절정을 자랑하던 자신들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도 밑바탕[6]으로 있었다. 그러나 1898년 파쇼다 사건과 1899-1902년 보어 전쟁을 겪으며 영국의 고립주의 정책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 그레이트 게임이 지속됐고, 게다가 건함 경쟁이 보여주듯이 신생 독일 제국은 공공연하게 영국을 찍어누르고 세계 최강의 강대국으로 등극하겠다는 야심을 표출하였다. 이에 영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영예로운 고립에서 벗어났으며, 1904년에는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맺고 연이은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야욕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국가 간의 상호의존성이 깊어졌음에도 영국은 여전히 유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해왔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와중에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에게 했던 "대서양과 유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다."[7]라는 발언은 영국의 이러한 입장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전후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 공동체(EC)에도 오랜 기간 가입을 꺼리다가몇 번은 되레 차이고1973년에야 가입했다.[8] EC에 가입한 이후에도 회의적인 태도는 여전해서, 마거릿 대처 총리는 EC의 기능 확대에 대한 조소를 공공연히 표출하기도 했다.[9] 유로화를 도입한 이후에도 영국이 꿋꿋이 자신들의 파운드화를 고수하고 있는 것 역시 유명한 사례이다.

그마저도 2016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브렉시트라는 초대형 이슈를 국민투표에 부쳐 영국의 EU 탈퇴가 확정되었고, 브렉시트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당겨진 2019 총선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의 보수당이 압승을 거두자, 2020년 1월 31일에 EU를 공식 탈퇴했다.

2.6. 미국

만약 어떤 나라가 미국만큼 안보가 확실하다면 국민에게 세계적인 리더십을 맡아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외교 문제에 대해 미국은 전통적으로 권력정치와 연관된 음모와 경쟁, 잔혹함으로부터 초연하게 거리를 두고 자유에 깊이 전념해서 미국만이 갖고 있는 예외적인 특성을 보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예를 들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1796년 대통령 이임 연설에서 국민에게 다른 나라의 문제에 연루되면 안된다고 경고했고, "우리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저명한 반(反)제국주의 인사인 찰스 에임스Charles Ames도 1898년에 "일단 우리가 군사강대국이나 해상강대국으로서 국제 갈등의 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약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런 전통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초에 조지 스테파노폴러스George Stephanopolous 백악관 공보 비서관에게 "미국인들은 근본적으로 고립주의자"라고 말했다. 마치 신의 섭리에 따른 것 같은 이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복받은 역사를 고려한다면 미국인들을 상대로 자유주의 패권을 추구하도록 설득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스티븐 월트, 미국 외교의 대전략, 184p

건국 이후 한 세기 넘게 고립주의를 국가의 공식적인 외교노선으로 천명했던 역사가 있다. 다만 먼로 독트린 문서에서 나와있듯이 이는 국가적인 단위의 고립주의는 아니고 '아메리카 대륙은 우리 미국의 세력권이니 유럽은 신경 꺼라. 대신에 우리도 유럽의 일에는 신경 안 쓴다.'라는 방침이었다. 사실 이 고립주의의 속뜻은 '아메리카 전체와 태평양을 미국의 식민지로 삼을 테니 유럽은 나가라'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이 때 명백한 운명을 통해 멕시코를 불구 상태로 만들고, 하와이와 괌,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 1917년까지 미국은 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일관적으로 채택하였으나,[10]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치머만 전보 사건을 겪으면서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하면서 그 명맥이 중단된다.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우드로 윌슨 국제연맹을 창설하였고, 미국은 고립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에서 국제연맹 가입이 부결되면서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도했으면서도 막상 가입은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 채로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한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도 미국 내에서는 유럽의 전쟁에 개입할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더 컸지만[11]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180도 뒤집히고 미국의 참전을 이끈다.
고립주의 성향의 국민을 참전으로 이끌고 갔던 루스벨트의 역할은 여론조사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현대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 체제에서 리더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된다. 유럽의 세력균형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지배를 향해 폭주하는 독일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만간 개입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국력이 가파르게 증가함에 따라 미국은 궁극적으로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이런 속도로 그리고 이렇게 결정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이다.

모든 위대한 지도자는 홀로 걷는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던 도전을 간파해낼 수 있는 능력에서 이들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루스벨트는 고립주의 성향의 국민을 이끌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가치와 모순되며 대체로 미국의 안보와 무관하다고 간주되었던 국가들 간의 전쟁에 동참했다. 루스벨트는 1940년 이후 불과 몇 년 전에 압도적 표차로 일련의 중립법(Neutrality Acts)을 통과시켰던 의회를 상대로 계속 증가하고 있었던 대 영국 지원을 정식으로 승인하도록 설득했고, 전면적인 교전상태 직전까지 갔으며, 때로는 심지어 그 선을 넘기도 했다. 결국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망설임이 사라졌다. 루스벨트는 2세기에 걸쳐 스스로 난공불락이며 안전하다고 믿어 왔던 사회를 상대로 만약 추축국이 승리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이번에는 미국의 개입이 항구적인 국제적 관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게 했다. 전쟁 기간 동안 루스벨트의 리더십 덕택에 동맹이 단결했고 오늘날까지도 국제공동체에 계속 기여하는 다자적 제도가 형성되었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383~384p
루스벨트의 첫 번째 임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수정주의의 전성기와 겹쳤다. 1935년에 노스다코다 출신 상원의원인 제럴드 나이(Gerald Nye)가 주도했던 상원 특별위원회는 군수업체 때문에 미국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비난하는 1,400페이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월터 밀리스(Walter Millis)의 베스트셀러인 <전쟁으로 가는 길(The Road to War)>을 통해 일반 대중이 이 주제에 익숙해졌다. 이런 시각들의 영향 하에서 미국의 참전은 근본적이거나 항구적인 이익보다 부정한 행위, 음모, 배신 등으로 설명되었다.

미국이 또다시 전쟁의 유혹에 빠져드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의회는 1935년부터 1937년 사이에 소위 중립법(Neutrality Acts)을 세 건이나 통과시켰다. 나이 상원의원이 발간한 보고서로 촉발된 이 법은 교전당사국(전쟁의 원인이 뭐가 됐건 간에)에 대한 차관 제공이나 다른 재정적 원조를 금지했고, 모든 당사국(누가 피해국인지를 막론하고)에 무기 금수조치를 부과했다. 현금을 통한 비군수물자의 구매는 미국 선적이 아닌 선박으로 운송될 때에만 허용되었다. 의회는 위험을 거부했지만 이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침략국들이 유럽을 주름잡고 있을 때 미국은 침략국과 피해국 양쪽 다 똑같이 제약하는 법안들을 제정함으로써 침략국과 피해국 간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392p
루스벨트는 과거 윌슨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하우스(Edward House)대령에게 1937년 10월에 "우리가 폭동을 억제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근다면 전쟁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위험해질 것임을 국민들이 깨닫게 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침략 행위를 진압하는 것을 돕기 위해 국제문제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루스벨트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는 분출하는 친고립주의 정서였다. 1938년 1월에 미 하원은 미국이 침략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선전포고를 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개헌안을 거의 통과시킬 뻔했다. 루스벨트는 이 개헌안이 통과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개인적 호소에 의지해야 했다. 이런 여건에서 루스벨트는 대담하기보다 신중한 게 더 낫다고 보았다. 1938년 3월에 미국 정부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Anschluss)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형식적 항의에만 그친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을 따른 것이다. 뮌헨 회의로 이어지는 위기 동안 루스벨트는 미국이 히틀러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부하나 심지어 가까운 친구조차 부인해야 했다.
...
뮌헨 회의는 루스벨트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하지만 점차 실질적으로 공동전선을 펼치겠다고 마음먹게 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때부터 독재자를 좌절시키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는 거침 없었고, 3년 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정점에 달했다. (...) 그는 미국을 깊이 신뢰했다. 나치즘이 사악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동시에 이례적으로 간교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고독한 결정이라는 부담을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
1938년 10월 26일 뮌헨 협정이 발표된 지 4주도 안 되어서 루스벨트는 격리연설이라는 주제로 돌아갔다. 헤럴드-트리뷴(Herald-Tribune Forum)에 보내는 라디오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국명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침략국들에 대해 이 나라들의 "국가정책이 전쟁 위협을 고의적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어서 루스벨트는 군축을 원론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아울러 미국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리는 주변국들이 완전히 무장한 이상, 우리나라건 어떤 나라건 군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일관되게 지적해왔습니다. 만약 전반적인 군축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도 계속 무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좋아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조치입니다. 하지만, 침략을 할 수 있는 무기가 전면 폐기될 때까지 국가의 신중성, 그리고 상식이라는 일반적인 원칙에서 볼 때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비밀리에 훨씬 더 많이 나갔다. 루스벨트는 1938년 10월 말에 영국 공군장관 및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개인적인 친구와 별도의 회담을 하면서 중립법을 우회하는 계획안을 제시했다. 자신이 최근에 서명한 중립법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미국 국경과 가까운 캐나다에 영국과 프랑스 비행기 조립 공장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이 모든 부품을 공급하고 최종 조립만 영국과 프랑스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짐작건대 부품이 민수물자라는 이유로 기술적으로 중립법의 규정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체임벌린의 특사에게 "만약 독재자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체임벌린은 미국의 산업 자원을 배후에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붕괴된 공군력 복구를 도와주려고 했던 루스벨트의 계획은 그 정도 규모의 사업을 비밀리에 착수하는 게 순전히 물류 측면에서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루스벨트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지원은 의회와 여론을 피해가거나 극복할 수 없었을 때만 제한되었다.

1939년 초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이탈리아, 독일, 일본을 침략국으로 지목했다. 격리연설의 주제를 내비치면서 루스벨트는 "침략국 정부가 우리 국민의 총체적 감정을 절실히 느끼게 할 수 있는, 단순한 말보다 더 강력하고 더 효과적인, 전쟁 이외의 수단이 많이 있습니다." 라고 언급했다.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한 지 한 달도 안 된 1939년 4월에 루스벨트는 처음으로 약소국들에 대한 침략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1939년 4월 8일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는 기자들에게 "세계의 모든 약소국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게 분명히 우리나라의 안전과 번영에도 영향을 줍니다. 약소국들이 하나씩 사라질수록 우리나라의 안전과 번영도 취약해집니다."라고 말했다. 3월 14일 범미연맹(Pan American Union)에서 했던 연설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의 안보 이익이 더 이상 먼로 독트린의 제약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앞으로 몇 년 내로 항공기들이 오늘날 유럽의 내해(內海)를 가로지르듯이 대양을 쉽게 횡단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는 경제적 기능 측면에서 반드시 하나의 단위가 될 것입니다. 미래에는 어디에서라도 교란이 발생하면 모든 곳에서의 경제 활동이 지장을 받을 것입니다.
범미주지역 문제와 관련해서 과거 세대는 서반구가 다 함께 협력하는 원칙과 방법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신세계가 구세계와 평화롭게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1939년 4월에 루스벨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메시지를 직접 전달했다. 비록 독재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는 했지만, 이 메시지는 추축국이 실제로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보여주려고 교묘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확실히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미묘하면서도 가장 기만적인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루스벨트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독재자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31개국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나서 루스벨트는 이 31개국으로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유사한 안전보장을 받으려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긴장완화의 결과로 개최되는 어떠한 군축회의에도 미국이 참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루스벨트의 편지는 외교사에서 참모진들이 꼼꼼하게 검토한 문서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위임통치령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독립국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제국의회(Reichtstag)에서 연설하면서 루스벨트의 메시지를 흥미를 돋우는 소재로 활용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가 히틀러에게 그대로 두라고 간청했던 국가들의 명단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독일 총통이 우스꽝스러운 어조로 국명을 하나씩 발음하자 제국의회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루스벨트의 편지에 적힌 각각의 국가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위협을 느꼈는지 물어봤다. 그중에 많은 나라들이 히틀러 앞에서 떨고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히틀러가 연설 측면에서는 점수를 땄지만,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만 보장을 요청함으로써 루스벨트는 당시 루스벨트에게 중요했던 유일한 청중인 미국 국민 앞에서 이들을 침략자로 낙인찍었다.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여론을 동원해야 했던 루스벨트는 이 문제를 세력균형을 넘어서는 측면에서 틀을 짜야 했고, 사악한 침략자에 맞서 무고한 피해자들을 수호하는 투쟁으로 그려야 했다. 루스벨트의 편지와 히틀러의 반응 둘 다 루스벨트가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새로운 심리적 문턱을 잽싸게 전략적 자산으로 바꿔놓았다. 같은 달인 1939년 4월에 그는 영국과 사실상의 군사협력을 할 수 있도록 미국을 조금씩 이동시켰다. 양국 간의 합의로 영국 해군은 모든 전력을 대서양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은 미국 해군 함대의 상당 부분을 태평양으로 배치했다. 이런 역할 분담은 미국이 일본에 맞서 아시아의 영국령들을 방어할 책임을 진다는 점을 암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 간에 유사한 합의가 있었고(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는 지중해에 집중하게 되었다), 영국이 프랑스의 대서양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원용되었다.

루스벨트의 행동을 지켜보던 고립주의자들은 매우 불안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9년 2월에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erg) 상원의원은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을 유창하게 제시했다.
우리가 워싱턴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시공간이 상대적으로 사라져버린 축소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외부와 단절시키는 두 대양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두 대양도 결국 축소되겠지만, 현명하고 신중하게 사용한다면 여전히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우리 모두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국가적 혹은 국제적 불법행위의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자연스러운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 세계의 수호자나 경찰관이 아니며, 될 수도 없습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영국이 1939년 9월 3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루스벨트는 중립법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무기를 구매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법을 개정하려고 했다.

루스벨트는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에는 표면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법 발동을 회피해왔다. 실제로는 무기금수 조치가 일본보다 중국에 더 많은 피해를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전쟁이 유럽에서 발발한다면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될 것이고, 루스벨트는 중립법을 우회하는 속임수에 의존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1939년 초에 루스벨트는 중립법이 "불균형하고 불공평하게 적용될지도 모르며, 실제로 침략국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막상 피해국에는 원조를 거부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개정을 촉구했다. 의회는 유럽에서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고립주의 정서가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듯이 루스벨트의 제안은 그해 초 의회에서 세 번 부결되었다.

루스벨트는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당일인 9월 21일에 의회에 특별 회기를 요청했다. 이번에는 그가 승리했다. 소위 1939년 11월 4일의 제4차 중립법은 교전당사국들이 현금으로 지불하고 구매품을 자국 선적이나 중립국 선적 선박으로 운송하면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구매할 수 있게 허용했다.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만 구매하고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립국"은 갈수록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중립법은 중립적이어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동안만 지속되었다.

소위 가짜 전쟁(phony war) 동안에 미국 지도자들은 그들이 물질적 지원만을 요구받고 있다고 계속 믿었다. 일반 통념에 따르면 마지노선 뒤에서 버티면서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이 수세적 지상전과 해상 봉쇄를 통해서 독일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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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10일에 프랑스가 나치 침략자들에 의해 쓰러지고 있을 때, 루스벨트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포기하고 수려한 달변으로 영국 편에 섰다. 루스벨트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Charlottesville)에서 했던 강력한 연설을 통해 이탈리아군이 이날 프랑스를 공격한 데 대해 무솔리니를 통렬하게 비난했고, 독일의 침략에 저항하는 모든 국가에 전면적으로 물질적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밝혔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미국의 방위력을 증강하곘다고 선언했다.
1940년 6월 10일 이날, 민주주의를 최초로 가르쳐준 위대한 미국인이 설립한 이 대학교에서 우리는 바다 건너 저편에서 자유를 위해 용명하게 싸우고 있는 분들을 위해 우리의 기도와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 미국은 단결하여 두 가지 명백한 노선을 동시에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강압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물질적 자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미주 지역에서 우리 스스로가 어떠한 비상 상황과 어떠한 방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장비와 훈련을 갖추기 위해 이러한 자원의 활용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루스벨트의 샬러츠빌 연설은 분수령이 되었다. 영국의 패배가 임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어떤 미국 대통령이라도 서반구의 안보를 위해 영국 해군이 긴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 그리하여 미국이 조만간 영국의 동맹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처칠이 홀로 계속 싸우겠다는 결정을 확실히 견지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끝까지 갈 것입니다. ⋯ 그리고 잠시라도 믿지 않겠지만, 우리 영국 본토나 본토의 많은 부분이 정복되거나 굶주리게 된다면, 바다 너머에 있는 우리의 제국이 영국 함대의 무장과 보호 하에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언젠가 신세계(미국)가 강력한 힘과 무력으로 구세계(유럽)을 구원하고 해방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루스벨트의 방식은 복잡했다. 목표를 발표할 때는 고상했고, 전술은 기만적이었으며, 이슈를 규정할 때는 노골적이었고, 특정 사건의 복잡한 속성을 설명할 때는 덜 진솔했다. 루스벨트의 많은 행동은 합헌성(合憲性)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만약 오늘날 어떤 대통령이더라도 루스벨트가 했던 방식대로 했더라면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395~401p
루스벨트는 미국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했고, 1940년에는 의회를 설득해서 평시 징병제를 도입했다. 고립주의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하원 표결에서 이 법안은 전쟁 발발로부터 4개월도 남지 않은 1941년 여름에 불과 한 표 차이로 갱신되었다.

루스벨트는 재선되자마자 즉각 미국의 군수물자를 현금으로만 구매 가능하다는 제4차 중립법의 요건을 삭제하자고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노변담화에서 윌슨의 용어를 빌려,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법적 장치가 렌드-리스법(Lend Leasd Act, 무기대여법)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어느 나라건 간에 그 나라를 방어하는 것이 미국의 방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대통령이 판단할 경우, 그 나라의 정부에" 대통령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조건에 따라 어떤 군수물자라도 대여, 리스, 판매, 혹은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원래 열정적인 윌슨주의자였고 집단안보의 옹호자였던 헐 국무장관은 평소답지 않게 전략적인 이유로 렌드-리스법을 정당화했다. 그는 미국의 대규모 지원이 없으면 영국이 함락될 것이고, 대서양의 제해권이 적대세력에 넘어가서 서반구의 안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영국이 스스로 히틀러를 물리칠 수 있을 때만 참전을 피할 수 있게 되는데, 처칠조차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태프트(Taft)상원의원은 렌드-리스법을 반대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고립주의자들은 소위 미국우선주의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를 조직했다. 시어스 로벅 앤드 컴퍼니 회장인 로버트 E. Wood) 장군이 위원장을 맡았고, 많은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지했다. 이 중에서 캐슬린 노리스(Kathleen norris), 어빈 S. 콥(Irvin S. Cobb), 찰스 A.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 헨리 포드(Henry Ford), 휴 S. 존슨(Hugh S. Johnson) 장군, 체스터 볼스(Chester Bowles),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니콜라스 롱워스 여사(Mrs. Nicholas Longworth)가 있었다.

렌드-리스법을 반대하는 고립주의자들의 격한 감정은 이들을 가장 사려 깊게 대변했던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erg) 상원의원이 1941년 3월 11일에 한 발언에 잘 담겨 있다. "우리는 조지 워싱턴의 이임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권력정치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강대국 전쟁에 그대로 내던졌습니다. 이제 다시는 후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첫걸음을 뗐습니다. 반덴버그의 분석은 정확했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세계였다.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루스벨트의 공이었다.

렌드-리스법을 제안한 뒤에 루스벨트는 갈수록 나치를 패망시키겠다는 의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이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영국과 미국의 참모총장들은 이 법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고 곧 가용해질 자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만났다. 또한 미국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되는 시점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기획자들로서는 미국의 참전 시기만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에 최우선순위를 부여한다는 소위 ABC-1 협정(ABC-1 Agreement, 미국, 영국, 캐나다군 참모부 간 비밀회의에서 유래했다. - 옮긴이)에 가서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순전히 국내적 필요와 헌법적 제약 때문이었지 루스벨트의 목표가 애매모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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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에 루스벨트는 미군이 그린란드(그린란드는 덴마크령이다. - 옮긴이)를 점령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한 워싱턴 주재 덴마크 대표(그의 직급은 공사였다)와의 합의를 재가함으로써 전쟁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덴마크가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고 덴마크 망명정부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없던 이 외교관은 덴마크 영토에 있는 미군기지를 "승인"한다고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앞으로 미국 군함이 북대서양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아이슬란드 서부의 북대서양을 초계(哨戒)할 것이며, "미국의 초계 해역에 있는 침략국의 선박이나 항공기의 추정 가능한 위치를 공표"하겠다고 처칠에게 개인적으로 통보했다. 3개월 후에 현지 정부의 초청을 받은 미군 병력이 영국군 병력을 대체하고자 또 다른 덴마크 소유령인 아이슬란드에 상륙했다. 그러고 나서 루스벨트는 의회의 승인 없이 덴마크령과 북아메리카 사이의 모든 구역이 서반구 방어 체제에 속한다고 선언했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403~404p
1941년 9월에 미국은 선을 넘어 교전당사국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영국 해군에 보고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조만간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9월 4일에 미국 구축함인 그리어호(USS Greer)가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영국 항공기에 알려주다가 어뢰 공격을 받았다. 루스벨트는 9월 11일에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이 독일의 "해적행위"를 비난했다. 루스벨트는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려고 똬리를 튼 방울뱀에 비유하면서 아이슬란드까지 확장된 기존 미국의 방어 구역에서 발견되는 어떤 독일 잠수함이나 이탈리아 잠수함이라도 "현장에서" 격침하라는 명령을 미 해군에 내렸다. 사실상 미국은 바다에서 추축국과 전쟁상태에 있었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일본의 도전에도 응했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1941년 7월에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폐기했고, 일본에 대한 고철 판매를 금지했으며, 네덜란드 망명정부에 동인도(오늘날 인도네시아)로부터 일본으로의 석유 수출을 중단하라고 권유했다. 이런 압박으로 인해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졌고, 1941년 10월에 협상이 개시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 협상단에게 미국이 이전에 일본의 점령행위를 "승인"하기를 거부했음을 상기시키고 만주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라는 훈령을 하달했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고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에 러-일 전쟁의 방식을 따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미 태평양 함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12월 11일, 일본과 이탈리아와의 삼국조약에 가담했던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왜 히틀러가 루스벨트가 항상 주적으로 여겨왔던 국가를 상대로 자유롭게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집중할 수 있게 해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스럽게 설명된 적이 없다.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위대하고 대담한 지도자가 추진해왔던 비범한 외교적 노력이 그 정점을 찍었다. 3년도 안 되어서 루스벨트는 확고하게 고립주의적이었던 국민을 전세계적인 전쟁으로 끌고 갔다. 1940년 5월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인 중 64퍼센트가 나치의 격퇴보다 평화의 보전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18개월 후인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 직전에는 이 비율이 역전되어서 불과 32퍼센트만이 나치의 승리 저지보다 평화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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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참전이 미국인들에게 너무나 급작스럽게 보였다는 점은 세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미국인들은 서반구 외부의 안보를 우려해서 참전했던 경험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나 미국을 상대로 한 히틀러의 성급한 선전포고가 있기 전에 전개되었던 외교의 본질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만이 폭격당하고 나서야 미국은 태평양에서 전쟁에 들어갔고, 유럽에서 최종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건 히틀러였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추축국이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미국 국민을 전쟁으로 끌고 갈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루스벨트의 해묵은 딜레마가 해결되었다. 만약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고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인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루스벨트의 임무가 한층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선언했던 도덕적, 전략적 확신에 비추어볼 때, 의심의 여지없이 루스벨트는 결국에는 자신이 자유의 미래와 미국의 안보 모두에 결정적이라고 여겼던 전쟁에 어떻게든 미국을 참전시켰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406~408p

2차대전의 승전 이후 미국의 외교노선은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변모하는데, 그 이유야 당연히 소련과 벌인 냉전 때문. 세계 어느 지역이건 간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트루먼 독트린 이후 미국은 그리스 내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곳곳의 분쟁에 깊숙이 개입한다. 물론 이 와중에도 오랜 고립주의의 역사 탓인지 애치슨 라인과 같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준 경우도 간혹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최근 수십 년간 미국의 전반적인 외교노선은 활발한 개입주의였다. 때문에 항공모함 등 강력한 미합중국 해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반전여론과 전쟁피로로 아시아 지역에서 발을 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냉전이 자신들의 승리로 종결된 이후로는 이념적인 문제보다는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더 활발히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걸프 전쟁.

2.6.1. 신(新)고립주의의 등장

이후 조지 W. 부시 재임 기간 동안 이라크 전쟁의 실패와 막대한 비용 지출 이후,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신고립주의의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이러한 기조를 반영하여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도널드 트럼프. 파리 기후 협약에서 단칼에 탈퇴하고 보호무역주의 강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을 트레이드마크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신고립주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북한 핵 문제와 중국 내정 문제 등에 대해 국제적인 대응 공조를 주창하고 있는 걸 보면 완전한 고립주의는 아닌듯 싶다.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듯하다.[12] 그리고 조 바이든이 트럼프의 재선을 막아 내고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신고립주의가 약화될 가능성이 생겼다.[13] 2021년 바이든 행정부가 아프간 전쟁을 끝내고 미군을 철군시킨 것에 대해서도 언론은 '신고립주의'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2022년 이후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하며 이스라엘과 하마스 역시나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상술했던 아프가니스탄 사태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대외 분쟁이 발생했다. 그 중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우, 발생 초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동정의 대상이 되었고 지원도 받았지만 2023년 하반기 이후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문제가 여전하고 전쟁의 매듭이 갈수록 지어지기 어려운 양상을 보이면서 국민의 혈세를 대외 분쟁에 투입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대중들이 많아지면서 신고립주의가 부활하게 되었고 이것이 2024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카멀라 해리스를 누르고 당선되는데에 기여하였다.

2.6.2. 관련 문서

2.7. 스위스

중세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철저하게 외교적 중립 노선을 취하여 특정 국가와 동맹하지 않는 고립주의 정책을 썼다. 스위스는 유럽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연합에는 가입을 거부하고 있고, 당연히 유로화도 도입하지 않고 여전히 스위스 프랑을 쓰고 있다. 거의 대부분 국가들이 참가하고 있는 유엔에도 가입을 막는 요소가 없는데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가 2002년에야 가입하고, 솅겐 협정도 2008년에 가입했다.

3. 같이 보기



[1] 보호무역과는 무관하다는 의미이다. [2] 아이러니하지만 해금정책 때문에 오히려 왜구들은 견제를 덜 받게 됐고, 그 덕에 더더욱 날뛰게 된다. [3] 한국에서는 청나라가 굉장히 활발히 대외교역을 한 것 같은 인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명나라의 그것과 큰 틀에서 차이는 없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4] 1년에 한번씩 쇼군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상인들과 접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통역사, 게이샤를 제외한)일반인들이야 네덜란드 상인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5] 반대로 말하면 데지마 이외에 장소에서 서양인과 접촉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얄짤없이 사형이다. 하지만 페리 내항 이전 사쓰마번에서 중국과 서양 상인과의 밀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돈으로 번주가 서양식 문물과 공장을 지어 유신의 기초를 다졌다. [6] 즉, '혹시라도 유럽의 세력균형을 위협하는 국가가 등장한다면 언제라도 개입해서 박살내주겠다'라는 마인드. [7] 미국과 프랑스 중에 선택해야 되면 영국은 미국 편을 들 것이라는 의미. [8] 드골은 영국을 "미국이 유럽에 보낸 트로이의 목마"라 불렀고,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도 영국을 배제시켰다. 결국 영국은 드골의 퇴임 이후인 1973년에야 EEC에 합류했다. [9] 그리고 이 문제를 둘러싼 보수당의 내분으로 대처는 실각하고 만다. 물론 대처가 실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인두세 도입이었지만, EC 기능 확대를 둘러싼 당내 갈등이 출발점. [10] 이때까지 미국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선 이견이 많다. 언급했다시피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유럽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지만 서부로 진출하면서 멕시코와 전쟁을 치렀고 이후 하와이를 흡수했으며 더 나아가 일본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이 기간의 행보를 고립주의로 보아야 하는지는 개개인이 판단하자. 제국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다. [11] 미국우선위원회에서 이런 여론을 주도했었다. [12] 주한미군 주둔과 북한 배후의 중국 견제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3] 하지만 IRA이나 CHIP4 등 자국 중심주의 정책은 트럼프 정권 시절과 별 차이가 없다는 시각과 아울러 이 조치들을 도구 삼아 동맹국들에게 자국의 손해를 떠넘기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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