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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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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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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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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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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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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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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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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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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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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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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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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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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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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베저위붕 작전 - 윌프레드 작전 Operation Weserübung - Operation Wilfred 노르웨이어 : Angrepet på Norge i 1940[1], Operasjon Weserübung[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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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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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에서 증원되는 독일군, 194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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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군의 해안포· 어뢰에 격침되는 독일 중순양함 블뤼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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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해군에 의해 격침되는 영국 HMS 글로리어스 | ||
기간 | ||
1940년 4월 8일 ~ 6월 10일 | ||
장소 | ||
노르웨이, 덴마크 및 북해 전역 | ||
교전국 |
[[덴마크| ]][[틀:국기| ]][[틀:국기| ]]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프랑스 제3공화국 폴란드 망명정부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서부해군집단사령관
알프레트 잘베히터 -함대사령관 귄터 뤼첸스 -제21군단 사령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제21군단 3산악사단장 에두아르트 디틀 -제10항공군단 사령관 한스페르디난트 가이슬러 |
|
전력 |
노르웨이 6개 사단, 52,000명 덴마크 2개 사단, 14,500명 지원국 병력 35,000명 |
나치 독일 9개 사단, 1개 포병대대, 1개 기계화여단, 120,000명 |
피해규모 |
덴마크 사망 26명 부상 23명 노르웨이 함선 116척 사망 1,700명 영국 해군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잠수함 1척 등 프랑스 해군 구축함 1척 잠수함 1척 폴란드 해군 구축함 1척 잠수함 1척 지원국 전체 부상 4,902명 |
독일 해군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 U보트를 포함한 지원함 부상 5,296명 |
결과 | ||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덴마크 점령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의 수립 |
||
영향 | ||
나치 독일 해군력의 중대한 손실 영국, 총리 체임벌린의 실각, 처칠 내각으로 교체 |
[clearfix]
1. 개요
베저위붕 또는 윌프레드(Operation Wilfred)1940년 4월 8일부터 6월 10일까지 나치 독일과 영국이 노르웨이를 침공해서 점령하는 전투를 지칭한다. 동시에 진행된 덴마크 침공도 포함. 침공을 위해 수립된 독일측 작전명인 베저위붕은 독일 북서쪽을 흐르는 강의 이름인 베저 강 + 훈련(Weser + Übung)을 뜻한다. 이는 도청을 당해도 자국의 영토에 도하작전 훈련을 한다고 속이게 한 뒤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침공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영국 역시 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바탕으로 4월 8일 작전명 윌프레드를 발동시켜 노르웨이 침공을 강행하였다. 세계대전이 일어났는데 중립국을 침공해서 적을 늘리는 선택을 하는 이유는 1차 세계대전에서 북유럽 국가들이 하나같이 중립국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자국에 이익이 되는 대로 독일을 도왔고, 이를 뼈저리게 느낀 영국은 이런 식으로 독일 편을 사실상 들어주는 중립국들을 침공해 억지로라도 자국 편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여러 종류를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르웨이 침공은 말 그대로 나치 독일과 영국 모두 노르웨이를 침공했다는 걸 보여주며 이런 이유로 인해 베저위붕과 월프레드로 동시에 알려지게 된다. 물론 노르웨이를 협공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 독일이 먼저 노르웨이를 먹느냐 영국이 먹느냐 하는 문제로 침공한 것이다.
2. 배경
2.1. 독일 측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던 폴란드 침공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장기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독일은 이미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보인 소극적인 태도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때문에 참전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지만, 예상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결의하고 말았다.이는 장기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략물자 비축량이 부족한 독일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실제로 폴란드 침공이 끝난 시점에서 독일군은 내부적으로 위기에 빠져 있었다. 탄약은 예비분량까지 합쳐서 2주분밖에 안 남았지, 항공기가 쓸 폭탄도 2주분밖에 안 남았지, 전차와 항공전력은 각각 30%와 25%나 상실했지... 게다가 애초부터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바르샤바와 비엘룬, 프람폴(Frampol) 등에서 전략적으로 무의미한 파괴행위와 학살에만 치중하면서 물자낭비와 탄약낭비까지 해서 자업자득으로 물자부족 사태에 빠진 답없는 상태였다. 이런데도 히틀러는 아직 침공이 제대로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다행히 참모들이 뜯어말렸고, 무려 28차례나 공격개시일을 연기시켰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영국의 해상봉쇄로 심각한 자원부족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다. 하물며 1차대전기의 독일 제국은 세계 2위의 해군강국이었으나 나치 독일은 그때보다 훨씬 열악한 해군력을 지닌 1940년 시점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고 전략자원을 해외에서 수입해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소련으로부터 전략자원을 수입할 수 있었으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은 두 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었다.
- 첫째는, 중립국인 스웨덴에서 산출되는 중요 전략자원인 철의 안정적 수급이었다. 스웨덴 북부 키루나(Kiruna) 지방에서는 양질의 철광석이 대량으로 산출되고 있었는데, 이 철광석들은 육로로 노르웨이 북부에 있는 부동항인 나르비크(Narvik) 항구로 옮겨져서 독일로 수출되었다. 스웨덴 영내에도 키루나와 인접한 룰레오라는 항구는 있었으나, 겨울이 되면 보트니아 만이 얼어붙기 때문에 나르비크 항구를 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스웨덴 영내에 있는 룰레오(북위 66도), 우메오(북위 64도)보다 나르비크의 위도가 더 높음(북위 68도)에도 얼지 않는 이유는 북대서양의 난류가 지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1939년 11월에 영국의 압력을 못이겨 국가상선단을 영국에 제공한 일이 있어, 독일로서는 노르웨이가 연합국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질 경우 철광석 수급이 완전히 끊길 우려가 있었다.
- 둘째는 영국과의 전쟁을 위한 노르웨이 항구의 확보였다. 이는 해군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적극 주장한 것으로 영국-노르웨이에 걸쳐 가해지는 영국의 강력한 해상봉쇄선을 노르웨이 점령으로 뒤로 크게 밀어내고, 장악한 노르웨이 기지를 바탕으로 독일 해군의 영국에 대한 적극적인 통상파괴전 및 해상작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이 일어나면서 더더욱 부각되었다.
결국 3월 초, 아돌프 히틀러는 노르웨이와, 노르웨이 침공의 발판이 될 덴마크에 대한 침공계획을 승인하면서 독일의 스칸디나비아 침공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침공부대는 4월 8일에 출항하여 4월 9일 침공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또한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에 이은 또다른 난적인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이 노르웨이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영국을 침공하기 위한 모의고사격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지리적으로도 섬나라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프랑스를 침공하고나서 영국까지 침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바다와 섬나라라는 장애물을 넘어야하기에 노르웨이 침공을 통해서 바다 건너 영국까지 침공하려는 사실상 연습격에 들어간 셈이다. 만약 이마저도 못한다면 영국 침공도 할 수 없기에 노르웨이 침공은 바다를 건너서 침공해야하는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영국까지 침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자 장애물을 넘어야하는 시험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노르웨이는 지리적으로 바다 서남쪽 건너로 영국 스코틀랜드와도 마주하기에 영국을 겁주고 위협시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육로로 국경을 마주하기 때문에 베네룩스 3국을 먼저 재물로 삼아 침공을 할 수 있겠지만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하는 조건도 따르기에 노르웨이 침공은 히틀러에게 있어서 프랑스는 물론 영국을 점령해서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정이었다.
2.2. 영국 측 배경
문제는, 영국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전시 거국내각에 참여한 대독 강경파인 해군성 장관 윈스턴 처칠과 프랑스 수상 폴 레노(Paul Reynaud)가 이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해상투사능력이 부족한 프랑스의 레노보다는 막강한 해군력을 지닌 영국의 처칠이 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사실 영국은 노르웨이를 우호적인 중립국으로만 묶어둬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겨울전쟁 발발 이후 독일과 소련이 공동으로 스칸디나비아를 침공할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미리 스칸디나비아에 군사거점을 선점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더 나아가 아예 소련과 전쟁 중인 핀란드에 파병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를 위해서는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을 통과해야 했다. 이들 국가들은 정부차원에서 난색을 표했다. 민간 차원에서는 핀란드에 의용군도 파견할만큼 소련의 핀란드 침공에 강한 반발을 가졌으나 스칸디나비아 각국 정부는 소련을 크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고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직접개입은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더욱이 1940년 3월에는 핀란드가 소련과 강화회담에 나서 겨울전쟁이 종결되자 연합국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개입 명분이 크게 사라졌다.
하지만 폴란드가 무너지며 영국, 특히 처칠은 이제 체면이나 국제법 그딴거 다 버리고 나치와 전쟁을 생각중이었다. 나치에게 철광석을 판매하는 스웨덴이나 스웨덴산 철광석의 수출항인 노르웨이나 다 끊어버리려 한 것이다. 물론 과감함과 별개로 1차 세계대전 때처럼 판단능력은 떨어져서, 파이크 작전 등 나치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소련을 폭격한다 등의 헛발질도 많았다. 이랬으면 정말 큰일날 수도 있었던 것이, 저러면 소련이 독일에 붙어 그대로 추축국을 형성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실행되기 직전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어 취소되었다.
따라서 알트마르크 호 사건은 독일만이 아니라 영국도 자극하였고, 영국군은 비상시 노르웨이 일대에서 수행하기로 한 윌프레드 작전(Operation Wilfred)과 R4 계획(Plan R4)의 실행을 준비했다. 윌프레드 작전은 나르비크 항구부터 시작해서 독일로 이어지는 노르웨이의 영해가 잔뜩 포함되는 노르웨이-독일 철광석 수송항로를 기뢰로 도배해버리는 것이었고, R4 계획은 한술 더 떠서 해병대를 투입해 노르웨이 본토를 침공하여 나르비크를 중심으로 한 노르웨이의 철광석 수출 항구와 연결철도를 모조리 파괴해버리는 것으로, 노르웨이가 계속 저항할 경우 트론헤임(Trondheim)과 베르겐(Bergen)도 같이 점령하기로 계획되었다.
이러나저러나 노르웨이는 결국 침략받을 운명이었다. 단, 영국의 침공 계획은 독일과 달리 노르웨이 전토 점령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독일로 철광석이 수출되는 기반시설 및 관련 지역에 국한시켰다는 점에서 조금은 낫다고 할 수 있다.
영국군의 윌프레드 작전은 4월 5일에 발동되기로 하였으나 이것이 지연되어 최종적으로 4월 8일로 결정되었다.
3. 전개
3.1. 독일의 덴마크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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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장관은 당연히 그런 새빨간 거짓말에 속지 않고 독일의 전면침공 사실을 인지, 이를 상의하고자 시간을 번 다음 급히 왕궁으로 달려가 국왕과 면담했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Christian X)는 독일의 통첩에 격분했으나, 현실적으로 덴마크군의 총병력은 1개 사단도 채우지 못했고 중장비도 거의 없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적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덴마크가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는 나라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덴마크는 중립을 선언하고 카테가트 해협에 기뢰를 쏟아부어서 배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런데 독일 해군은 킬 군항에서 주력 함선들을 빼서 빌헬름스하펜에 옮겨둔 상태였고, 그 이후의 이동도 킬 운하의 존재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유틀란트 해전을 치르는데 덴마크의 조치는 눈꼽만큼도 방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협상국은 발틱 해 해로가 막혀버리는 바람에, 영불-러시아간 해상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오스만 제국에게도 시비를 걸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중립국을 사칭하고 독일에 납작 엎드린 꼴이었다. 이에 격노한 영국은 이 경험으로 유럽의 중립국도 말만 중립국일 뿐이라고 느끼고, 주요 중립국에 대한 전시전략계획을 수립한 뒤 노르웨이 침공 당시 노르웨이에게 실제로 시행하게 되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덴마크가 손을 벌리는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노르웨이의 국왕이자 크리스티안 10세의 동생이었던 호콘 7세는 런던 망명이 허용되었다.
이런 현실적 문제로 인해 국왕과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독일의 요구조건을 수용했다.
독일군은 덴마크 정부가 요구를 수용하기도 전에 국경을 넘었고, 이 과정에서 덴마크군의 소규모 병력과 작은 교전도 있었다. 이러한 소규모 교전으로 독일군 20명, 덴마크군 26명이 전사했다. 이 덴마크군 소규모 병력의 하루동안의 저항을 다룬 영화 4월 9일( 예고편)이 있다. 변변찮은 대전차 무기나 수류탄도 없이 소총과 기관총만으로 2호 전차나 Sd.Kfz. 222에 맞서는 덴마크군의 분투가 보는 사람 입장에서 참 눈물겹다. 심지어 탄약도 부족해서 소총도 탄창 1개에서 3개 정도의 탄약만 지급할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덴마크군은 저항을 중지했고, 독일군은 덴마크 전역에 진주하게 된다. 그리고 덴마크는 독일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덴마크 보호령). 다만 독일은 덴마크가 요구조건을 수용해준 것의 대가로 덴마크 내정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군에 의한 불심검문이나 단속 등이 쏟아져나오고 물자도 많이 뜯어가 덴마크인들의 불만을 샀지만 독일의 내정불간섭 약속은 대전 중반까지 충실히 지켜지는 듯 했으나, 독일은 1943년 8월 덴마크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덴마크 정부를 해산시켜버린다. 그러나 계엄령 선포 이전에도 독일이 아주 개입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유대인 문제는 독일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는데 크리스티안 10세는 압력을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자국내 유대인들의 스웨덴 망명을 열심히 도와주었다. 다른 부분에서의 내정간섭도 "아니 님들이 우리나라 지켜주려 온거지 우리나라 지배하러 온건가여?" 하면서 독일측을 데꿀멍시키기도 했고, 히틀러가 국왕의 72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기나긴 전문을 보내자 'Spreche Meinen besten Dank aus. Chr. Rex', 직역하면 '매우 고맙소. 크리스티안 10세.'가 전부인 초간략 답장으로 화답하여 히틀러의 혈압을 올려주기도 했다.
이때 덴마크는 약 6시간 만에 항복하여 2차 대전 동안 가장 단기간의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3.2. 노르웨이 침공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그놈의 바다였다. 물론 독일 해군이 아무리 약체라 한들 노르웨이 해군보단 강력했지만, 만에 하나 가다가 영국 해군에게 걸리면 독일 해군과 이들이 수송하고 있는 독일 지상군은 그대로 북해의 발할라로 강제 관광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또 노르웨이의 영토가 남북으로 상당히 긴 편인데다 독일이 확보해야 할 핵심지역 다수가 북부에 있는 관계로 노르웨이 전역에 동시다발적인 침공을 개시해야 한다는 문제점도 있었다.독일군은 노르웨이 침공에 제21군 휘하의 총 5개 신편 보병사단(69, 163, 181, 196, 214)과 폴란드 침공에서 실전을 경험한 제3 산악사단 예하 2개 연대, 10 항공군단, 그리고 해군의 대부분을 투입하였으며, 제21 군단의 사령관직은 귄터 뤼첸스에게, 그리고 제3 산악사단의 지휘관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에게, 그리고 제10 항공군단의 지휘관에는 에두아르트 디틀이 임명되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지휘권이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뤼첸스가 아니라 팔켄호르스트와 디틀이 육군 병력의 총지휘를 맡았다. 참고로 히틀러는 본래 육해군을 하나의 통합군으로 통일한 뒤 한명에게 지휘를 맡기고자 하였지만 성사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다.
작전 입안 단계에서는 제22 공정사단을 투입한 대규모 공수작전도 계획되었으나 해당 부대는 서유럽 침공으로 전용되었다.[4] 지상군 투입을 위한 마땅한 상륙함이 없던 관계로 중순양함 이하 대부분의 함선이 차출되었다. 그런데 독일이 배가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어뢰정, 소해정, 심지어는 훈련함까지 가리지 않고 긁어모아야 했다.
여기서 민간용 선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상선이나 화물선을 동원하는 방안도 검토되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이 월등한 상황 속에서 느리고 취약한 화물선을 이용하는 건 문제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노르웨이 영해에 진입하려면 무장 병력이 잔뜩 실린 화물선에 노르웨이 도선사가 탑승해야하는 골때리는 상황이 연출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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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침공 당일 독일군의 주요 목표도시들. |
* 그룹 1 - 목표 나르비크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샤른호르스트(Scharnhorst), 그나이제나우(Gneisenau) 및 구축함 10척
지상군으로 3산악사단 소속 병력 2,0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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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2 - 목표 트론헤임
아드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퍼(Admiral Hipper) 및 구축함 4척
지상군 1,700여 명.
-
그룹 3 - 목표
베르겐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쾰른(Köln),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및 훈련함 브렘제(Bremse), 어뢰정모함 카를 페터스(Karl Peters), 어뢰정 6척
지상군 1,9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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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4 - 목표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 및 아렌달(Arendal)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카를스루에(Karlsruhe) 및 어뢰정 10척
지상군 1,1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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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5 - 목표
오슬로(Oslo)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블뤼허(Blücher),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뤼초(Lützow), 엠덴 및 어뢰정 3척, 소해정 8척
지상군 2,000여 명.
-
그룹 6 - 목표 에게르순(Egersund)
소해정 4척
지상군 150여 명.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그룹 1·2·3으로 이들의 목표는 전부 노르웨이 서부 피오르 협만(峽灣)지역 해안의 중요 핵심 항구들이었다. 이 중 그룹 3의 목표였던 베르겐은 크릭스마리네의 북방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도록 예정되었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공격하는 그룹 5도 상당히 중요했으며, 그룹 4와 6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졌고 따라서 배정된 함선의 수도 적었다. 특히 그룹 1은 작전상의 최북단이자 전쟁의 주요목표인 나르비크를 공격해야 했기 때문에 도중에 영국 해군의 습격을 받을 우려도 높았고, 때문에 매우 귀중한 전함 2척이 할당되었으며 할당된 구축함의 수도 무려 10척이었다.
나치 독일 해군의 가장 강력한 전함이었던 비스마르크급 전함 초도함인 비스마르크는 1940년 8월에 취역하였던 관계로 침공 시점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함은 샤른호르스트급 2척이 전부였다. 즉, 독일 해군은 나르비크에 보유 전함 전력을 다 때려박은 것이다.
3.2.1. 침공 초기
침공함대가 출항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징발된 독일 상선 리우 데 자네이루 호가 망명 폴란드 정부의 지휘를 받는 폴란드 해군 잠수함 오제우(ORP Orzeł)함에 의해 격침되었다.오제우 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해안지대를 방어하다가 에스토니아로 피신, 그곳에서 억류되었다가 이후 새로 선출된 함장과 승조원들이 잠수함을 탈취하여 다시 도주하고(...) 해도를 압수당하고 통신장비도 사격으로 고장난 상황에서 영국까지 항해한 잠수함이다. 실로 전투종족인 셈. 리우 데 자네이루 격침 당시 먼저 위협사격을 가해서 정선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불응하자 어뢰를 쐈고, 리우 데 자네이루의 격침으로 승선하고 있던 200여 명의 독일 육군이 사망했다. 그러나 오제우는 이것을 단순한 통상 파괴로만 생각했지 대규모 침공 상황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고, 또한 통신능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격침 사실을 보고하지 못해 영국과 프랑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연합군은 독일군의 움직임을 비교적 일찍 파악했는데, 항공정찰로 독일 함대의 대규모 움직임을 관측한 것이 4월 8일 오전이었다. 만약 이때 영국 함대가 독일 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출발했으면 독일군의 침공은 그대로 좌절이었겠지만, 영국은 독일측의 의도를 오판해 버린다. 독일 함대의 대규모 움직임을 해상봉쇄를 뚫고 북대서양으로 돌파하려는 시도거나 북해에 분산된 영국 함대를 타격하려는 의도로 오판하고 대규모 함대결전 준비에 나선 것이다.
영국 해군은 즉시 전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고, 노르웨이 침공을 위해 군함에 탑승했던 해병대원들은 즉시 짐과 함께 영국 본토의 항구에 도로 내동댕이쳐졌다. 사실상 독일군이 먼저 행동을 해버린 덕분에 영국 입장에선 노르웨이 침략 계획인 윌프레드 및 R4보다 눈앞의 독일 해군을 격멸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전력을 다해 북해를 샅샅히 수색했음에도 독일 함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독일 해군은 북해 돌파 따윈 안중에도 없이 상륙만을 목표로 노르웨이 연안에 붙어서 항해 중이었기에 영국은 엉뚱한 곳만 계속 수색했던 것이다.
결국 4월 8일 아침을 기해 독일군은 영국군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전격적으로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했다. 노르웨이군은 병력도 적은데다 기습까지 받아 곳곳에서 격파되었으며, 북부지역에 배치된 노르웨이군 연안방어선 2척도 끝까지 싸웠지만 압도적인 격차를 못이기고 격침당했다. 결국 침공 24시간만에 수도 오슬로를 제외하고 독일군이 목표로 한 모든 도시를 넘겨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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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격침된 블뤼허. 그라프 슈페 이후 두 번째 독일군의 주력함 손실이었다. |
당시 상황을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상륙예정지점인 협곡으로 가던 엠덴이 기뢰에 손상을 입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기뢰 제거를 위해 어뢰정 등 소형함을 먼저 돌입시켜야 하나, 당시 시간에 쫓기던 독일군과 상륙부대 사령관 쿠메츠 제독은 그냥 협곡 안으로 기함인 블뤼허를 먼저 돌입시켰다. 사실 어느 나라나 당시 기준에서는 가장 강력하고 방어력이 높은 기함이 선두에 서는 건 똑같았기에 이 부분에서 쿠메츠를 비난할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협곡 안에 기뢰가 수북히 깔려 있었기 때문에 블뤼허는 상당한 저속으로 항행 중이었는데, 이는 노르웨이군 요새포와 어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목표였다. 왜 그랬는고 하면 당시 블뤼허의 함장이던 하인리히 볼다크 대령은 빠르게 이 구간을 주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사령관인 쿠메츠 제독이 이를 묵살하고 느린 속도로 뚫고 가라고 찍어눌러버렸기 때문. 다만 최고 속도로 뚫고 갔어도 해당 구간은 협곡이 가장 좁아지는 구간이었기 때문에 방어군을 무력화하지 않고서는 큰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즉, 애초에 이런 지형으로 노르웨이 방어군에 대한 사전 공격도 없이 병력을 밀어넣은 최고사령부의 실책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실책으로 인하여 독일군은 귀중한 중순양함 중 하나를 어이없이 50년 먹은 요새인 오스카스부르크 요새(Oscarsborg Fortress)의 50년 먹은 11인치(280mm) 독일 제국제 크루프 MRK L/35 요새포와 육상설치형 50년 먹은 구식 어뢰의 합동공격으로 날려먹고 말았다. 덤으로 블뤼허에 탑승했던 육군 산악부대원 다수와 승조원 일부도 전사했고, 사령관 오스카 쿠메츠 제독 등 생존자들은 노르웨이 항복시까지 포로 신세가 되었다. 참고로 히틀러는 격침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으며, 반대로 노르웨이인들에게는 현재까지도 이 전투가 큰 자랑거리로 남아 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뤼초와 엠덴 등 독일군의 오슬로 방면 침공함대가 일제히 퇴각했지만, 얼마 뒤 독일군은 곧바로 육로로 재진격을 개시해서 공수부대까지 투입한 끝에 예정한 것보다는 약간 늦긴 했어도 결국 오슬로에 상륙, 도시를 점령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해당 지연시간을 이용해서 노르웨이 정부와 의회, 국왕 호콘 7세(Haakon 7)와 왕가는 오슬로를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후, 은행에서 정부의 금괴를 가지고 내륙으로 피난을 떠날 수 있었다는 점 정도.
이 과정에서 노르웨이군은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이 항속거리 문제로 노르웨이에서 작전이 어렵다는 점을 간파, 몇 안되는 구식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들까지 모조리 띄우며 어떻게든 침공을 저지하려 했으나, 독일 본토에서 출발한 독일군 전투기들이 덴마크에 착륙하여 재급유를 받고 이륙하는 방식으로 노르웨이에 출현하는 바람에 모조리 격추당하거나 지상에서 주기된 채로 파괴되었다. 이어 뒤따라온 독일군 수송기들이 비행장에 강행착륙, 비행장을 점령하였다. 특히 오슬로 인근 포르네부(Fornebu) 비행장에선 의외로 거센 노르웨이군의 저항으로 인해 수송기들이 착륙에 실패하자 독일 공군의 Bf 110 전투기 편대가 수송기보다 먼저 비행장에 강행착륙해 버렸다. 이에 당황한 노르웨이군이 공황 상태에 빠졌고 그 틈에 후속 수송기들이 착륙에 성공해 비행장을 점령했다. 이런 활약으로 쉽게 점령한 비행장을 거점으로 해서 독일군 전투기들은 작전반경을 넓혀 나갔다.
4월 10일, 노르웨이 의회는 정부와 국왕 일가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항전을 부탁한 뒤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노르웨이군은 전차나 대전차 화기같은 중화기가 사실상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전시에만 소집되는 민병대가 주력인 상태였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전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르웨이의 기갑전력이다. 일단 기갑차량으로는 스웨덴에서 수입한 AB 란츠베르크 L-120 전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만든 경전차 1대와 3대의 장갑차가 있었다. 허나 이 차량들은 실전 투입되지 못하고 전량 유기되었다가 이후 독일군에게 노획되었다.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있는 것도 활용 못한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거기에 전체 병력 숫자까지 모자라서 약 4개 사단의 규모에 불과했는데, 개전 첫주만에 3개 사단분의 병력을 상실하는 등 노르웨이의 저항은 빠르게 분쇄되어 갔다.
노르웨이 육군참모총장인 오토 루게 소장은 엽총이나 사격경기용 소총 같은 빈약한 무기를 들고 참여한 민간인 지원자까지 받아들여서 트론헤임 부근에 최후의 저항선을 만들었으나, 그들이 전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3.2.2. 초기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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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노르웨이 침공의 초기 해전도[5] |
청색 직선은 영국 해군, 검은색 직선은 독일 해군. 적색 사각형은 어드미랄 히퍼와 글로웜이 교전한 지역, 주황색 사각형은 리나운과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가 교전한 지역이다.
해전 항목은 상단의 노르웨이 지도를 같이 확인하며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영국 해군의 본토함대가 벌인 삽질이 두드러진다.
3.2.2.1. 조우
독일군이 노르웨이 침공을 위해 출발한 것이 4월 3일이었는데, 전술했다시피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짜두었던 영국도 4월 4일에 순양전함 리나운을 기함으로 하여 4척의 기뢰 부설 구축함, 그리고 8척의 구축함들을 출항시킨다. 독일도 영국도 해군 전투함을 상륙 부대보다 빨리 내보낸 것.그리고 나르비크 항구에 독일군이 침공하기 이틀 전인 4월 7일 밤에 영국 해군 항공정찰대가 오슬로 남쪽과 덴마크 북쪽의 스카게락크 해협, 즉 독일 해군이 킬 항구에서 북해로 진출하는 길목에서 구축함 6척과 중순양함 1척(=아드미랄 히퍼)로 구성된 독일 함대를 발견하였다. 영국군은 폭격기로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명중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해당 함대는 북상하였고, 규모도 구축함 10척, 중순양함 1척, 순양전함 1척(=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전함 1척을 못본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독일 해군의 전 병력이 영국군에게 노출된 상태였고, 폭격 때문에 독일군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넬슨급 전함 로드니,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밸리언트와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펄스, 그외에 순양함 2척, 구축함 10척으로 구성된 부대를 스카파 플로에서 출항시켰다. 그리고 같은 날 밤 10시에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15척으로 구성된 제2순양함대가 로디스를 떠났다.
그리고 4월 8일 오전 4시 30분부터 30분간 기뢰부설 장비를 갖춘 영국 구축함 4척이 H형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독일 해군이 북해로 진출할 수 없도록 나르비크 근해의 웨스트 피오르를 우선적으로 폐쇄하기 위해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협만의 특성상 여길 틀어막으면 독일 해군의 본거지가 트론헤임으로, 트론헤임을 틀어막으면 베르겐, 그 다음은 덴마크나 오슬로 근처까지 강제로 내려가야하므로, 영국군이 초계해야 하는 범위가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그 곁에는 순양전함 리나운과 리나운을 호위하는 구축함 4척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구축함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반대로 본인들이 노출된 것을 깨달은 독일군은 양동작전을 펴기로 했고, 2척의 전함은 북상하면서 어그로를 끌고, 중순양함은 구축함들을 이끌면서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로 한다.
3.2.2.2. 글로웜 VS 아트미랄 히퍼
독일군의 북대서양 진출을 경계한 대부분의 영국 해군이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는 동안, 리나운을 호위하는 구축함 중 하나였던 HMS 글로웜(Glowworm) 함은 야간에 승조원 1명이 바다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홀로 함대에서 이탈해 바다에 빠진 수병을 찾고 있었다.하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하여 수색을 마무리짓고 복귀하던 도중, 4월 8일 오전 8시경에 웨스트 피요르드 서남방 약 150마일 정도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군의 Z형 구축함 2척(Z11, Z18)과 만나게 된다. 글로웜은 리나운에게 복귀하면서 적 구축함을 공격했는데, 독일군 구축함은 즉시 후퇴하면서 무선으로 지원요청을 넣는다.
지원요청을 받은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아트미랄 히퍼 함이 교전지역으로 달려왔고, 4번째 일제사가 글로웜을 직격한다.
큰 손상을 입은 글로웜은 연막을 치고는,[6] 무선 침묵을 깨고[7] 적 대형함과 교전중임을 상부에 알렸다. 노르웨이 전역에 있던 영국 해군의 모든 배가 그 무선을 수신했는데, 히퍼의 포격소리가 함께 들렸다고 한다. 무선은 도중에 끊겼고, 영국군은 원래 계획이었던 웨스트 피오르 봉쇄를 일시 중지하고 글로웜이 보고한 좌표로 리나운을 급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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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어드미럴 히퍼에서 돌격해오는 글로웜을 촬영 | 침몰하는 글로웜 |
그러자 히퍼의 승조원들이 모든 함포의 일제 사격을 영거리에서 1척의 구축함에게 퍼부었고, 글로웜은 보일러실이 대폭발을 일으키며 굉침당했다. 생존자 일부는 전부 독일 해군에 구조되어 포로가 된 탓에 영국측 목격자가 전무하다시피 했으므로 글로웜 최후의 저항 및 전사한 함장 제럴드 루프 소령의 용맹함은 이들의 용맹함과 헌신을 높게 산 독일군이 직접 영국에 전보로 알려졌고 이후 훈장이 수여되었다.[8]
3.2.2.3. 리나운 VS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리나운은 글로웜을 구원하기 위해 고속으로 순항하고 있었지만, 호위하는 구축함 2척을 급유하기 위해 항구로 보낸 상태였고, 글로웜과는 떨어진 상태였으므로 G형 구축함 그레이하운드 1척만 대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군 역시 이 상황을 우려하여 8일 10시 45분에 기뢰부설을 마친 4척의 구축함과 그들을 호위하던 H형 구축함 4척을 전부 리나운의 호위로 보냈고 덕분에 이 시점에서 원래의 전략 목표였던 나르비크 봉쇄는 끝장난거나 마찬가지였고, 실제로 빠르게 소해 작업을 마친 독일 해군이 접수한다.8일 밤에는 리나운을 제외하고 노르웨이에서 가장 빠른 주력함이었던 리펄스에게 로드니, 밸리언트와 분리한 뒤, 함대의 구축함 몇척과 순양함 한척을 호위로 대동하고 북상하여 리나운과 합류하라고 지시한다. 좀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일단 글로웜의 실종 장소로 보내졌다가, 임무가 리나운과의 합류로 바뀌게 된다. 만일 리펄스가가 합류했다면 순양전함의 전술적 가치를 과시한 사례가 되었겠지만... 리펄스와 구축함들이 미친듯이 내달렸음에도 뒤이어지는 리나운과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리나운은 총 9척의 구축함들만 대동한 상태에서 글로웜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던 해역으로 진입하였으나, 악천후 지대가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소에는 글로웜이나 아드미랄 히퍼는 물론, 표류하는 생존자나 잔해, 부유물조차 없었다.
독일군의 나르비크 침공 부대를 일찌감치 상륙지에 내려놓고 어그로를 위해 북상하던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4월 9일 새벽 4시 반에 웨스트 피욜드에서 5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황천을 피해 북쪽에서 항해하던 영국군 순양전함 리나운을 레이더로 먼저 포착했다. 독일 전함들은 리나운을 상륙부대 반대 방향으로 끌어내기 위해 접근한다.
독일군은 2척의 전함을 투입한데다가 상대방이 순양전함이라서 독일군의 11인치 주포가 관통가능한 전술적 이점을 누릴 수 있었고, 새벽인 상황인데다가 눈보라까지 휘말려서 시계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유효 사거리 면에서도 이득을 보았다.
독일군의 주력함이 다가온 것을 깨달은 리나운 역시
리나운도 피탄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나이제나우에게 주포 1발과 부포 2발을 합쳐 명중탄 3발을 낸다. 그 결과 그나이제나우의 1번 포탑(A 포탑)에 기계적인 문제가 생겼고, 전방 포탑의 레인지 파인더가 파괴되고, 협차사격에 필수적인 사격지휘소 시설에도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리나운이 15인치 주포를 230발, 샤른호르스트가 11인치 주포를 182발 쏘는 동안, 그나이제나우는 11인치 주포 54발을 쏘는데 그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리나운은 목표를 샤른호르스트로 변경하여 공격을 재개한다.
리나운에게는 다행히도 독일 전함들은 거리를 접근하거나 후퇴하지 않았는데, 독일 전함들은 호위함이 없었기 때문에 리나운을 호위하는 구축함들의 어뢰 공격을 경계해서였다. 리나운은 1차 대전 시기의 순양전함인데다가 개장 이후로 속도가 30노트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새벽 6시 20분에 양측이 다시 서로 조우하며 상대방에게 주포를 마구잡이로 쏘았는데, 독일군은 어뢰를 경계해서 거리를 좁히지 않은 상태였으나 구축함들은 이를 무시하고 닿지도 않는 주포를 마구 쏘기 시작한다. 게다가 당시 영국군 구축함의 4.5인치 양용포로는 사정거리 내에서도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집중 방호 부위를 뚫지 못한다. 하지만 날씨가 워낙 안좋아서 원래 구축함이 자기보다 큰 함선에게 하는 공격인 어뢰 뇌격을 할 수가 없었다.어찌되었든 리나운의 호위를 맡았던 구축함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독일군의 제독은 악천후로 적이 잘 보이지 않지만, 영국군의 또 다른 주력함이 출현한 상태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리나운급 순양전함의 부포와 9척의 구축함의 주포는 모두 4.5인치 양용포로 동일한 포였다. 그리고 리나운이 황천 속에서 적을 추격하며 주포를 난사한 탓에 협차가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2척의 리나운급이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게다가 독일군도 영국 순양전함의 교리를 연구했으므로 순양전함이 다른 주력함을 대동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리나운급 순양전함인 리펄스가 리나운을 돕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는데다가, 넬슨급 전함인 로드니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밸리언트도 노르웨이 전역에 전개되어 있었다.
어쨌든, 적 주력함이 2척이 된 반면 아군의 전함은 주포 하나를 잃은데다가 모든 포탑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여서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고 오판한 독일 해군은 더 도망가기로 했고, 샤른호르스트가 연막을 치면서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서쪽으로 변침해 도주하는 것으로 해전이 종료되었다.
종합적으로는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으나 단순하게 본다면 1차대전 시기에 제작된 순양전함 1척이 2차대전 시기에 제작된 전함 2척을 후퇴시킨 것이라 해당 해전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을 까는데 더 많이 인용된다.
3.2.2.4. 서전 이후
리나운은 후미에 맞은 명중탄과 전방 주포탑이 파도를 뒤집어 쓸 정도로 황천이 심한 악천후로 인해 속력이 20노트로 감소하였던데가, 애초에 샤른호르스트급 전함들보다 속도도 더 느렸기 때문에 추격을 단념하게 되고, 리펄스와 합류한다. 그 직후 손상을 수리하기 위해 회항하여 1개월 후에 복귀하게 된다.추격을 뿌리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트론헤임의 아드미랄 히퍼와 합류하였으며, 세 척 모두 수리를 위해 회항하게 된다. 때문에 독일 해군은 노르웨이 전역에 전개한 주력함이 한 척도 없게 되어서, 2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반면,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워스파이트는 지중해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노르웨이에서 함대함 교전이 시작되자 4월 10일 부로 영국 본국 함대로 발령받으며 영국 본토로 귀환 명령을 받았고, 나르비크로 직행하여 4월 13일의 2차 나르비크 해전을 곧바로 진행하게 된다. 고속전함의 전술, 전략적 가치를 보여준 사례중 하나다.
노르웨이 서부의 베르겐에도 독일군이 공격한 후에 영국군의 함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해당 항구에 있는 독일군 순양함의 숫자가 2척인지라 리이튼 제독 휘하에 있는 7척의 구축함만으로는 공격이 힘들었으며, 트론헤임 방면의 독일군에 대해서는 정보 부족까지 겹쳤다. 그래서 베르겐과 트론헤임에 대한 공격은 일시 중지되었다.
4월 9일 오전에는, 전술되었던 블뤼허 격침이 오슬로에서 터진다. 같은 날 영국 해군의 넬슨급 전함 로드니도 슈투카의 급강하 폭격을 맞았으나, 폭탄은 불발인 상태로 갑판을 뚫고 현측으로 빠져나갔다.
4월 9일 오후에는 수상함끼리의 전투보다는 항공대나 잠수함의 공격이 많았다. 독일군 항공대는 영국 해군에게 공습을 가해서 구축함 1척을 격침하고, 순양함 2척에게 지근탄을 투하해서 피해를 입혔다. 한편 영국 해군도 항공모함 퓨리어스가 함재기로 공습을 가해서 독일 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에게 3발의 폭탄을 명중시켜서 격침시켰다. 그리고 스카케락크 해협 인근에 출몰한 영국군 잠수함이 독일 순양함 칼스루헤를 크리스티안산 근방에서 격침시켰으며, 오슬로 방면에서 귀항하던 포켓전함 뤼초도 어뢰를 맞아서 키를 포함한 선체 후부가 날아가는 등 대파당했으나 침몰을 간신히 모면하고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종합하자면 이 때까지의 해전은 영국 해군이 그 동안 헛발질한 것에 비하면 소득이 많았으며, 그러한 전술적 승리에 더해 주력함들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면서 노르웨이 근방의 제해권을 서서히 장악하던 상태였다.
3.2.3. 연합군 지상병력의 참전
한편, 4월 9일이 되어서야 독일군의 목표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임을 깨달은 영국은 노르웨이의 긴급 지원요청을 받고 '어이쿠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조금만 기다리세염' 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하지만 지상병력을 노르웨이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충돌이 심해서 4월의 첫째 주를 다 날려먹을 지경이었다.
-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 - 나르비크에 전체 병력을 모두 보내서 확실하게 점령이나 파괴를 해야 한다.
- 영국 육군 - 노르웨이군이 마지막으로 버티는 트론헤임으로 가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결국 절충안으로 나르비크와 트론헤임으로 군대를 나누어 보내기로 의견이 모아져, 애드리언 커턴 소장의 제146여단과 해롤드 모건 소장의 제148여단을 트론헤임 방면으로 보내고, 피어스 J. 맥케이시 소장의 제24여단은 나르비크 방면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3.2.4. 릴레함메르 전투
트론헤임 방면으로 파견된 영국 육군 제146여단과 제148여단의 경우에는, 트론헤임이 이미 독일군 손아귀에 떨어졌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대체항구인 남소스와 안달스네스 항구로 상륙하기로 결정했고, 146여단은 트론헤임 북동쪽에 있는 남소스로, 148여단은 트론헤임 남서쪽에 있는 안달스네스로 향했다.하지만 남소스와 안달스네스는 항구의 규모 자체가 너무 작은데다가, 피오르 지형도 좁고 굴곡이 많아서 대형 수송선이 통과할 수 없는 등 상륙조건이 나빴다. 결국 양 여단 모두 바다 한가운데에서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구축함이나 노르웨이 어선 등을 이용해서 물자와 인원, 장비를 옮겨실은 끝에야 상륙이 가능했다. 이 탓에 애초부터 준비한 물자와 장비가 부실한데다가, 환적과정에서의 혼란으로 인해 170톤이나 되는 무기와 식량을 실은 수송선이 그대로 영국으로 돌아가버리는 등의 악재가 발생했고, 남소스에 상륙할 병력이 나르비크로 향하는 배에 옮겨타는 등의 사건이 발생해서 전력손실이 상당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간신히 상륙한 영국 육군의 모습도 개판오분전이었다. 일단 상륙시 지참한 식량과 장비, 물자는 고작 이틀치에 불과했고, 군수성에서 극한지용 장비라는 이름으로 긴급제작해서 나누어준 방한복은 그걸 입었을 경우 걸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 수준으로 투박하고 무거운 등 장비의 질이 좋지 않았다. 물론 전차와 같은 중장비를 보유하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영국군은 전쟁이 터지자 자신들의 재무장 및 군대 확충 때문에 무기와 장비의 수요가 매우 높아서 노르웨이군이 애타게 필요로 하는 여분의 무기와 장비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소총 탄약도 영국군은 7.7 mm 계통의 .303 브리티시탄을 쓰고, 노르웨이군은 6.5 mm 계통의 스웨덴이 개발한 6.5×55 mm 탄이라 구경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사용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영국군의 제식 소총인 리-엔필드 소총도 수량부족으로 인해 영국군에게 지급하기에도 모자라서 타국에 줄만한 수량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노르웨이군은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제대로 개선할 수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노련한 군인이라기보다 흡사 미들랜드 지방의 제철소 노동자들을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노르웨이 육군 대령 로셔 닐센
설상가상으로 영국군의 인원 자체도 질이 개판이었다. 평시에는 약간의 상비군으로만 유지되다가 전쟁이 벌어지면 급속도로 확충하는 영국군의 특성상, 이 시점에서 영국군은 프랑스에 파병한 4개 사단분의 병력을 제외하면 막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신병과 동원소집된
예비군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영국측 노르웨이 원정군 병사들은
박격포와
기관총같은 각종 공용화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박격포와 기관총의 조준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지식에 깜깜했다. 덤으로 병력 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따듯한 남부 잉글랜드 출신이라서 북극권의 혹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암담한 실정이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146여단과 148여단은 트론헤임을 포위하고, 독일군 주력이 오슬로 방면에서 북쪽으로 돌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즉각적인 독일군의 통렬한 반격에 직면하고 말았다. 4월 21일에 최초의 교전이 노르웨이 중부에 위치한 릴리함메르에서 영국군 148여단과 독일군이 전투를 벌임으로써 일어났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독일군의 과감한 돌격으로 릴레함메르가 독일군에게 함락당함과 동시에 148여단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다. 여단장이 여단 지휘소까지 적군 기관총탄이 난무하는 위급상황에서 벗어나 약 100km까지 후퇴한 후에 간신히 여단 병력을 수습한 결과, 원래 1천여명이었던 병력은 3백여명으로 급감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낙오병들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거나, 눈 덮인 동쪽 산맥을 넘어 스웨덴으로 도망치거나, 험악한 서쪽산맥을 돌파해서 해변에 도달한 후 노르웨이 어선을 집어타고 스코틀랜드로 도망가는 등 지리멸렬했다.
이런 사정은 146여단도 마찬가지였다. 트론헤임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 제181보병사단은 쿠르트 보이티슈 준장의 지휘하에 즉시 영격에 돌입해서 남소스와 트론헤임의 중간지역인 슈타인케르에서 4월 21일 오후부터 격전을 벌였다. 게다가 영국군이 좁고 험한 산길에 직면해서 그나마 가진 중화기를 제대로 운반하지 못하는 사이에, 독일군은 박격포 등을 완전분해한 다음에 사이드카에 싣고 전장까지 운반해서 재조립하는 창의성을 보였으므로 화력에서도 큰 열세를 맞이했다. 결국 20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146여단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4월 22일에는 트론헤임 해상에 대기중이던 독일 해군 구축함이 함포사격까지 날려대는데다가, 바다쪽으로부터 우회한 독일군이 남소스 항을 점령하는 바람에 퇴로까지 끊어졌다. 그나마 완전 전멸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당 여단에 속한 링컨셔 대대의 지휘관인 허버트 중령이 어린 시절에 해당 전장 근처로 낚시하러 왔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에는 슈타인케르 읍 동쪽에 오래된 나무다리가 있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미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지 십수년이 지나 시커멓게 썩어가는 다리를 통해서 수백 명의 영국군이 오그나 강을 건널 수 있었기 때문에 146여단은 간신히 독일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146여단도 148여단처럼 지리멸렬했으므로 전투력은 바닥을 친 상태였다.
이렇게 트론헤임 방면에 투입한 146여단과 148여단이 붕괴된 사실을 영국 육군성이 알아차렸다. 게다가 4월 24일에는 독일군이 잔존한 영국군 패잔병을 박살내면서 안달스네스까지 점령하고자 급속진격하던 긴급사태였으므로, 3800여명 규모에 부대원 전원이 현역 정규군으로 구성된 육군 제15여단을 버나드 T. 파제트 소장의 지휘하에 안달스네스로 급파했다. 15여단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식민지에서 산악전의 경험까지 쌓았기 때문에 앞서 파견된 2개 여단에 비해서는 엄청난 정예였다.
그러나 15여단이 이전에 148여단이 진격한 길을 따라서 전진을 시작하자, 4월 25일부터 벌어진 전투는 15여단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돔바스 남방 60km지점의 크밤 마을 근처에서 독일 전차의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는데, 15여단이 2파운더가 부족해서 프랑스에게 공여받은 25mm 호치키스 대전차포라는 소형 대전차포로 독일군 전차를 격퇴하자 Ju87 급강하폭격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고, 15여단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진지를 구축하는 사이에 다른 독일군이 우회기동을 해서 안달스네스 항구를 일시적으로 점령한 후, 그곳에 있던 영국군의 예비식량, 장비 등을 노획하거나 불태웠다. 설상가상으로 독일군의 다음 공습에서는 노르웨이와 영국간의 교신을 중계하는 기지로 사용 중이던 라디오 송신소가 날아가는 바람에 영국 본토에 지원요청을 하기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했다.
결국 4월 28일에는 영국 정부도 트론헤임 방면 전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미 3개 여단이나 투입했지만 사상자만 1,559명이나 발생하면서 신나게 관광당하는 처지라 시간이 더 흘러가면 전멸당할 위기에 놓인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철수로가 독일군 입장에서도 훤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노르웨이는 주요 도시가 해안가에 위치해 있고 도로가 잘 발달하지 않은데다가 산간 마을간의 통로는 험악한 산길이나 좁은 협궤철도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니 제공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독일 공군에게 후퇴하는 영국군이 좁은 통로에서 사격 표적처럼 신나게 공격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런 공격을 뚫고 160km의 진격로를 되돌아나온 148여단과 15여단의 잔존병력은 안달스네스 항구로 귀환했으며, 공습이 미약해지는 야간에 해상철수하는 상황이었고, 영국군 패잔병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안달스네스 항구로 오고 있었으므로 철수작전은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재탈환한 남소스 항구의 경우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철수선박의 진입이 어려워서 5월 3일부터 철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배에 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서 해상까지 추격해온 독일 공군의 공습에 선박 일부를 상실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노르웨이 남부~중부 전선은 4월 말이 되면 모조리 독일군 손에 떨어지고 만다.
3.2.5. 나르비크 해전
나르비크 지역은 애초부터 연합군이 상정한 중요 목표지역이었으므로 개전 초기부터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공격이 진행되었다.4월 10일, 제1차 나르비크 해전이 벌어졌다. 영국 해군은 워버턴 리(Warburton-Lee) 대령의 지휘하에 기함인 구축함 하디와 역시 구축함인 해복크, 헌터, 핫스퍼, 호스틸로 구성된 총계 구축함 5척이라는 빈약한 전력으로 교전에 임하여 나르비크 항에서 하역 작업 중이던 독일군 침공함대를 급습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구축함 2척, 탄약보급함 1척, 수송함 6척이 격침되었고 구축함 4척이 중파되었다. 한편 영국군은 구축함 하디와 헌터 2척이 격침되었고, 1척 대파의 손실을 입었다.
독일군의 손실이 엄청났지만 영국군의 경우에도 해당 구축함들은 H형 구축함 전대로 리나운과 함께 와서 기뢰부설 구축함을 지키고, 샤른호르스트급 전함과 교전을 벌인 정예 구축함 부대인데다가 하디는 처음부터 4.5인치 양용포를 1문 장비한 단장포를 다른 H형보다 하나 더 많은 5개를 장착했던, 구축함 전대의 기함으로 만들어진 2척 뿐인 정예함이었다. 하지만 하디가 격침되면서 워버턴 리 대령도 전사해서, 영국 해군에게는 물적•인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뼈아픈 손실이었다.
해전의 양상은 영국군의 기습이 먹혀들어가서 초반에 독일 기함인 빌헬름 하이트캄프가 명중탄을 맞고 사령관이 전사하는 등 나르비크 항구가 쑥대밭이 되었다. 기습 후 빠져나가다가 근처 피오르를 지키던 다른 독일군의 함대를 만나서 손실을 입었으나, 후퇴하던 영국 함대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독일측 탄약보급함을 포격해서 굉침시키기까지 했으므로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는 독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나 이건 약과에 불과했다.
4월 13일, 제2차 나르비크 해전이 벌어졌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를 기함으로 하여, 9척의 구축함과 항공모함 퓨리어스로 구성된 영국군 함대가 다시 나르비크로 몰려왔고, 독일군은 보유 구축함 8척과 U-보트 1척을 잃어버렸다.
이 전투에서 전함 워스파이트는 항모 퓨리어스의 함재기 원호하에 트라이벌급 구축함 4척을 포함한 구축함 9척을 선두에 세워서 나르비크 항구가 있는 피오르 최심부까지 진격했다. 워스파이트는 이 과정에서 정찰기로 보유한 수상기 개조형 페어리 소드피쉬(L9767)를 직접 띄웠는데, 이 함재기가 U-64를 350파운드 폭탄을 명중시킨 뒤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어서 격침시켰다. 덕분에 U-64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전함의 공습으로 격침된 유일한 함선이라는 진기록의 희생양이 되었다.
원래 워스파이트는 해안포 진지를 박살내는 것이 주임무였으나, 나르비크 주변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저항하는 독일 구축함을 상대로 15인치 주포탄을 퍼부어 일방적인 대타격을 주었다.
독일군도 나름대로 저항을 시도했다. Z13 에리히 코엘너(Erich Koellner)은 제1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심한 손상을 입었지만 제일 먼저 도착해서 반격을 하려고 했는데, 워스파이트의 페어리 소드피쉬에 발각되어 전함의 주포와 구축함의 어뢰 세례를 받고 격침되었다. 이때 워스파이트는 15인치 주포를 그냥 철갑탄으로 장전하고 냅다 쏴버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도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관통했지만 구멍이 하나 생길 때마다 구축함의 함선 구조 그 자체가 파괴되어 가면서 눈에 띄게 기울어져 갔다고 한다. 결국 Z13은 포탄 한 발 못쏜 채로 대파된 상태에서 폭뢰를 터트려서 자침했다.
뒤이어 독일 구축함 4척(Z9, Z11 베른트 폰 아르님(Bernd von Arnim), Z18, Z19)이 저항을 시도했으며, 결과적으로 HMS 베두인(Bedouin)에게 미미한 손상을 입혔다. Z9 볼프강 젠커(Wolfgang Zenker) 함은 매복하고 있다가 워스파이트에게 뇌격을 가해서 명중코스로 집어넣었으나, 잠수함들이 겪은 어뢰의 신뢰성 문제는 구축함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명중할 것 같았던 어뢰는 워스파이트의 용골 아래를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뇌격이 독일군이 저항이라도 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독일 구축함들은 전함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구축함에게로 포를 돌렸는데, Z19 헤르만 쿤네처럼 HMS 에스키모(Eskimo)에게 행한 공격이 빗나간 후, 도망가서 자침을 시도하다가 에스키모의 뇌격으로 산산조각나기도 하고[9], Z2 게오르그 틸레(Georg Thiele)와 Z18 한스 뤼데만(Hans Lüdemann)처럼 에스키모 한 척을 집중 공격해보기도 했으며, Z17 디터 폰 로이터(Diether von Roeder)와 Z12 에리히 기에세(Erich Giese)처럼 제1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엔진 손상을 입어 항구에 정박중인 상태에서 HMS 펀자비(Punjabi) 및 HMS 코삭(Cossack)에게 미미한 손상을 주는 포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3척의 독일 구축함(Z12, Z13, Z17)이 워스파이트와 트라이벌급 구축함들의 협공으로 격침되고, Z19가 자침한 뒤, 나머지 4척의 독일 구축함들(Z2, Z9, Z11, Z18)은 상술한 방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저항하다가 롬박스피요르(Rombaksfjord)로 후퇴한 뒤 전부 자침해서 가라앉고 말았다. 글로우웜과 교전했던 Z11, Z18도 이 전투에서 둘 다 가라앉고 만다. 이 전투 끝에 독일군이 나르비크에 두었던 함선 중에서 격침당하지 않은 것은 잠수함 U-51 단 한 척이었으며, 8척의 구축함, 1척의 잠수함, 함 승조원 1,000여 명(전사자만)을 이 전투 한 번에 모두 잃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함 워스파이트가 전투가 종료된 직후 나르비크와 주변을 함포로 포격했는데 포대 비슷하게 보이는 모든 것과 나르비크 항의 시설까지 전부 주포로 박살내버리고 가서 피해가 더 커졌다.
격침된 구축함에서 생존한 승조원들은 해군 육전대로 편성되어 육군 산악사단 예하에 배속돼 지상전을 치렀다. 이들은 급히 상륙하느라 피복도 남색의 해군 근무복을 그대로 입거나 노획한 노르웨이 육군의 전투복을 착용해야 했고, 병기 역시 상당수는 현지에서 노획한 노르웨이 육군의 것들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육군의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잘 싸웠기에, 이들이 육군 산악사단에 배속됐다는 뜻으로 모자 왼쪽에 에델바이스 휘장을 달고 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해당 수병들이 정예 산악병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에델바이스 휘장은 육군 및 SS의 산악부대원들이 해당부대로 선발된 뒤 알프스산맥에서 혹독한 산악전 교육을 이수해야 산악모 왼쪽에 이 철제 꽃모양 휘장을 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델바이스 휘장은 이들의 자부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관련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비 산악부대원의 패용을 그냥 놔두지 않았는데, 수병들이 달아도 문제가 없던 것은 그들을 이미 정예 산악병과 동등하게 취급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영국군은 집중 공격당한 HMS 에스키모의 수리가 필요해서 나르비크에 잠시 머물러야 했고, 항모 퓨리어스가 2대의 항공기를 잃은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손실을 입지 않았다.
독일 해군은 작전 성공 이후 돌아가는 워스파이트를 격침시키기 위해 4월 13일과 14일에 U-46, U-48을 각각 보내서 뇌격하는데, 이때도 어뢰의 신뢰성 문제로 격침에 실패했다. 13일에 암살자로 등판했던 U-46은 워스파이트를 호위하는 구축함들의 폭뢰 공격으로 죽다 살아났다(...).
이로 인해 노르웨이 북부의 제해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나르비크에서의 두 차례의 해전으로 독일 해군은 보유 구축함의 절반 이상을 날려먹어(…) 더 이상의 해상작전이 곤란한 지경에 내몰렸으며, 영국은 확보한 제해권을 바탕으로 추가 작전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추가작전이란 기존의 윌프레드, R4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노르웨이가 먼저 독일의 침공을 받은 이상 영국은 거리낌없이 나르비크를 파괴할 명분이 생겨버렸다. 그리하여 4월 14일, 최초의 영국군이 나르비크에 도착했다. 하지만 육상 병력의 배치가 끝난 4월 16일부터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진격이 정체되었을 뿐 아니라, 24여단도 설원에서의 전투에는 문외한이었으므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트론헤임 방면의 파멸이 확실해지고 윈스턴 처칠이 노발대발하기 시작한 4월 24일에 공격을 개시했지만, 시계가 5m도 안되는 눈보라에서는 진격하기는커녕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진격은 정지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폭설은 노르웨이군에게도 대재앙이라서 해발 400m의 라파우겐 산을 항해 진격을 개시한 노르웨이군 제 6사단은 3km 전진에 15시간을 소모해야 했고, 결국 독일군 방어진지까지 근접했을 때는 이미 손가락도 까딱하기 어려운 상태로 탈진했으므로 제대로 된 전투도 거의 없이 상당수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거나 그 자리에서 사살당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물론 날씨와는 관계없이 나르비크 주변의 해역은 영국 해군이 꽉 잡고 있었지만, 육상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함포 사격을 해야 하는데 적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없는 상황이라서 3시간의 함포 사격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나마 맥케이시 소장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추가적인 함포 사격이 중지되었다.
4월 27일에는 프랑스 원정군이 결성되었으며 여기에 망명 폴란드군까지 합세한 3국 연합군이 만들어졌다. 이들 병력을 합하면 25,000여 명에 육박했으므로 연합군은 다시 한번 나르비크를 향한 진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적설량이 1.5m에 육박하는데다가, 약 4,600명인 독일군 산악부대의 저항에 직면한 나머지 전진속도는 하루에 500m 이하로 떨어졌으며 설맹(雪盲) 환자까지 속출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부와 중부를 석권한 독일군이 북부로 빠르게 진격중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독일 공군의 행동반경이 영국 함대를 위협하면서 추가작전이 점점 더 어려워져 노르웨이 전역은 사실상 패전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5월 10일에는 원정군 사령관이 클로드 오킨렉으로 교체되었다. 오킨렉은 약화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박살내고 나르비크에 진군하여 5월 27일에는 나르비크를 점령하고 있었던 독일군을 몰아냈다. 물론 독일 지상군은 1•2차 나르비크 해전에서의 패배로 해상보급이 끊긴 상태였던지라 결국 패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병력을 어느 정도 보전하고 있었던데다가 나르비크 주변 산악지대를 장악한 상황이라서 설원에서의 산악전투는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면서 나르비크 전투는 잊혀져 버렸고, 해군 병력이 노르웨이에서 대부분 철수하는 바람에 전투에서 승리하더라도 나르비크를 영구적으로 확보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결국 나르비크를 간신히 점령했으나, 1940년 6월 6일에 원정군의 마지막 병력이 철수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결되었다. 그리고 루게 장군을 비롯한 노르웨이군의 잔존 병력은 1940년 6월 9일에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3.2.6.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의 침몰
그리고 철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군에서는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와 순양함 2척, 구축함 16척이 파견되었는데, 연합군의 나르비크 항 점령을 무산시키기 위해 독일군이 유노(Juno) 작전을 개시해서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샤른호르스트 및 그나이제나우와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히퍼, 구축함 4척을 6월 4일에 킬 군항에서 먼저 출격시킨 것이 연합군에게는 불운이었다. 이 함대는 6월 7일에 연합군의 철수작전을 알아채고는 영국 선단을 발견하기 위해 수색을 실시했으며, 6월 8일에는 영국 선단을 발견해 병원선 아틀란티스만 남겨놓고 나머지 수송선과 유조선, 호위 업무를 담당한 무장 트롤 어선들을 격침시켰다.이 해전 이후에 히퍼와 구축함 4척을 트론헤임 항구로 귀환시킨 후에도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계속 수색을 실시했는데, 여기에 영국 해군 항공모함 HMS 글로리어스(Glorious)가 걸려들었다. 글로리어스는 연료 부족으로 인해 호위구축함 2척과 함께 미리 회항하고 있었는데, 오후 4시경 독일군이 글로리어스를 선제 발견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도 글로리어스의 함재기는 무장탑재도 전혀 안된 상태로 항공갑판에서 이함할 준비도 전혀 안된 상태인데다가 독일의 전함을 영국의 군함으로 오인까지 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독일 해군 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순조롭게 글로리어스에게 접근하여 오후 4시 30분경 27,000야드의 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통한 협차를 달성했다. 첫 번째 명중탄으로 항공갑판이 파괴되고, 두 번째 명중탄으로 함교가 박살난 글로리어스는 함재기를 발함하지도 못하고 신나게 두들겨 맞다가 오후 5시 20분경 승조원 퇴함 명령이 떨어지고 퇴함 완료된 후, 오후 5시 40분에 격침당했으며, 함장인 가이 도일리휴즈(Guy D'Oyly-Hughes) 대령을 포함한 주요 장교들이 전사했다. 이는 항공모함이 전함 주포에 의해 격침된 해전 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이때 글로리어스와 관련한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당시 글로리어스에는 영국 해군 항공대의 항공기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 46 허리케인 비행대도 있었다. 이 비행대는 제때 자력으로 영국 본토로 철수하지 못해 글로리어스에 착함을 강행해서 철수하려고 했다. 착함 자체는 기적적으로 피해없이 모두 성공했지만 하필 글로리어스가 독일 해군에게 걸려 버렸다. 그리고 허리케인 비행대의 항공기인 호커 허리케인은 기본적으로 육지의 비행장에서 활동하는 육상기였으므로 항공모함에서의 이함은 미리 준비를 해놓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긴급시 이함과 착함은 사실상 불가능해서 상공에서 떠돌다가 추락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착함이 기적적이라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로리어스 침몰 후 구조된 생존자 중 조종사는 단 2명에 불과했다. 반면 46비행대 소속 조종사 중 일부는 노르웨이 전역에서 항공기가 격추당해서 항공모함이 아닌 일반 수송선을 타고 철수해야 했는데 이들은 모두 영국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호위구축함 2척도 격침당했는데, 아텐트(Ardent)와 아카스타(Acasta)라는 호위구축함은 격침될 때까지 어뢰 공격을 반복했고, 아텐트는 빨리 침몰했지만 아카스타는 1시간이나 버티면서 비록 자신은 격침당했지만 샤른호르스트에 어뢰를 명중시켜서 손상을 주었다. 당시 근처에 연합군 수송선단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호위구축함 2척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이 수송선단을 습격하는 것을 막는 큰 일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 어뢰 공격을 연합군 잠수함이 어뢰 공격을 한 것으로 오인한 독일군이 구조활동을 하지 않고 황급히 철수했으며, 구조요청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통에 영국은 독일 라디오 방송에서 전과를 선전할 때까지 글로리어스와 호위구축함 2척의 침몰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서 전투에서 살아남은 900여 명에 이르는 생존자들이 차가운 북해의 바다에서 저체온증 등으로 사망한 결과, 근처를 지나가던 노르웨이 선박 2척 등이 구조한 생존자는 항모 글로리어스 38명, 호위구축함 2척에게서 각 1명씩 40명에 불과했으며 사망자가 1,521명이나 나는 대참사가 났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참 운수가 없어서 대참사가 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상세하게 살펴보면 의문점이 많다.
- 공식적으로는 연료 부족으로 인한 회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평시 기준에 맞춰서 비상용 연료, 전투시 대비 연료 등을 다 뺀 상태에서의 연료 부족인 것이라 1~2일 정도는 해당 수역에서 기다려도 되었다.
- 1~2일만 기다리면 더 강한 호위부대가 글로리어스와 합류 가능했다. 최소한 순양함 2척에 구축함 14척이었으며 잘하면 아크로열급 항공모함 아크 로열도 합류가 가능했다. 이 정도 전력이 있다면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과 만나더라도 먼저 발견하고, 선제 공습해서 쫒아낼 수 있었으며 잘하면 큰 손상을 주거나 침몰시키고 영국의 해전 승리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다.
- 기상 조건이 좋아서 정찰기나 상공엄호기를 상공에 날려서 정찰 및 수색을 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뭐에 홀렸는지 그런 행동을 전혀 안하는 미친 짓을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저질렀고, 결국 독일 전함에게 선제 발견당하는 바람에 독일 해군이 전투준비를 다 갖추게 만들었다. 맑은 날씨에 항공모함이 전함에게 먼저 발각당하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답이 없는 것이다. 결국 늦게서야 독일 전함을 발견하고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 5기를 발진시키려고 했으나 첫 번째 명중탄이 항공갑판에 명중해버리고, 두 번째 명중탄이 함교에 명중당해 초반부터 전투력을 상실하고 표적 신세가 되었다.
사실 그 원인은 영국군이 공식적인 인정만 안했지, 가이 도일리휴즈란 졸렬한 작자가 일으킨 인재(人災)였다.
가이 도일리휴즈는 항공모함의 함장이 된 주제에 항공기 전문가와 조종사들의 말을 안 들었던 고집불통에 항공정찰의 효용성을 평가절하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때 영국군 잠수함에서 활동하면서 갈리폴리 전투에서 공적을 쌓고, 잠수함에서 적국 해안으로 몰래 상륙해 이스탄불(당시 코스탄티니예)과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철도를 폭파하는 특수작전을 성공해서 훈장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걸맞지 않은 자리로 간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항공모함 함장이 된 결과, 항공모함 손실을 두려워하여 노르웨이 해안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나머지 함재기의 행동반경이 간당간당한 해역에서 아무런 호위기없이 구식 복엽기인 페어리 소드피시 5기만 발진시켜서 폭격을 하라는 미친 명령을 내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폭격의 목표도 일반적인 함재기들이 타격하는 방식처럼 정밀하게 소규모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전략폭격기가 융단폭격하듯이 그냥 해당 지역에 자유낙하 폭탄을 투하해서 공격하는 방식이라 폭격의 효용성도 크게 떨어졌다.
그러니 항공대 지휘관 J. B. 히스(J. B. Heath)가 이런 말도 안되는 명령을 수정하려고 건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건의 내용도 '다 좋은데 항공기가 귀환해야 하니 항공모함이 목표에 조금만 더 접근해서 함재기를 발진시켜달라'고 한 것이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작전을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매우 위험한 작전 정도로 바꿔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함장 가이 도일리휴즈는 앞서 말했듯이 고집불통에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공적 및 특수작전에서의 성과로 인해 자존심까지 높은 인물이라서 당장 히스를 명령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정식으로 회부, 모항인 스캐퍼 플로에 남겨두고 왔다.
여기에 더해서 히스의 군사재판 기일이 다가오자 도일리휴즈는 꼭 그 재판에 참석해서 증언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자기가 함장인 항공모함 글로리어스를 구축함 2척이라는 빈약한 호위만 데리고 고속으로 귀항하는 것이었다. 항공모함이니 함재기를 사용해서 항공모함 함장만 혼자서 빠르게 귀환하던지, 구축함에 도일리휴즈가 탑승해서 귀항하고 항공모함은 후속 호위부대에게 넘기는 안전한 선택을 하지 않고 부하를 감옥에 보내려고 자기 항공모함을 위험에 빠트리는 짓을 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걸 영국 해군성에서 서류까지 발행하면서 허가해주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봐도 글로리어스의 빠른 귀항은 함장의 군사재판 참석이었다. 연료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은 핑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글로리어스의 침몰이 발생하고 가이 도일리휴즈가 전사하자 공식적으로는 진행에 별 문제가 없었던 군사재판의 결과가 상당히 바뀌어서 항공대 지휘관 히스는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참사가 발생한 후 영국 의회에서 질문이 쏟아졌지만 영국 해군성은 군사기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더해서 1940년에 해당 사건의 군사적 원인과 책임소재를 밝히기 위해 조사를 했는데, 갑자기 이 조사결과를 101년 후인 2041년까지 열람금지라고 기밀문서로 지정한 뒤 모든 언급을 회피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결국 영국 해군성의 허가 서류까지 발견된 후인 1999년 1월 28일 영국 의회 하원에서 토론의 주제가 될 지경까지 와서야 사실상의 진상이 밝혀졌다.
가이 도일리휴즈란 졸렬한 작자가 일으킨 인재(人災)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진 상태지만 다른 가설도 존재한다. 윈스턴 처칠이 나치 독일로 공급되는 철광석을 차단하기 위해서 중립국인 스웨덴을 공격하는 폴 작전(Operation Paul)을 진행중이었고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해당 작전을 수행하다가 격침당했다는 것이다.
해당 가설은 당시에 격침된 구축함인 아덴트의 함장인 존 프레드릭 바커(J.F. Barker) 소령의 손자인 벤 바커(Ben Barker)가 주장하고 있다. 벤 바커가 가설을 주장한 이유는 당시에 독일 전함 2척에 맞서서 용감하게 싸워서 나치 독일 해군의 기록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고 나올 정도였고 자신의 할아버지를 포함한 대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 중은 물론이거니와 전후에도 별다른 훈장이나 포상을 못받았기 때문이었다.
벤 바커의 가설에 따르면 처칠이 폴 작전을 발동시키려고 했고 실행자로 가이 도일리휴즈를 지목해서 글로리어스의 침몰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개인적으로 둘이 서로 만났다고 하며 방문기록도 남아있다고 한다. 여기세 처칠이 가이 도일리휴즈를 실행자로 발탁한 이유는 가이 도일리휴즈가 함재기이며 뇌격기인 소드피시를 전략 폭격기처럼 마구잡이로 사용할 정도로 문외한이라 진짜로 아무런 생각없이 스웨덴의 룰레오를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처칠의 명령을 받은 가이 도일리휴즈가 무리하게 항공모함 글로리어스를 2척의 구축함이라는 빈약한 호위만 동반한 상태에서 스웨덴을 폭격하려고 노르웨이 해안 방향으로 따로 움직이다가 독일 전함과 갑자기 마주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 가설의 주요한 내용이다.
일단 처칠의 스웨덴 공격계획인 폴 작전 자체는 전쟁내각 회의록에 실제로 등장했고 여기서 처칠이 스웨덴 공격계획을 제시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이는 외교적으로 전쟁중에나 전후에나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며 실제로도 1963년 7월 30일에 영국측이 보관하고 있던 Operation Paul라는 이름의 기밀문서 폴더의 16페이지중 10페이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삭제되는 일도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벤 바커의 가설이 단순한 음모론만은 아니며 나름대로 학계에서도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시1 예시2
하지만 벤 바커의 가설이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 글로리어스의 침몰이 벌어질 당시의 시점에서는 노르웨이 침공이 나치 독일의 승리로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영국은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을 철수시키는 것도 힘에 부치는 판국이었고 덤으로 프랑스 침공으로 서부전선이 붕괴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기 직전이었다. 당장 6월 10일에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가 무저항 도시 선언을 하고 모든 방어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영국 본토 자체가 제 코가 석자인 위급한 상황에서 아무리 처칠이 막나가는 사람이라고 해도 노르웨이 함락으로 인해 이제는 추축국 영역 깊숙한 곳에 있는 스웨덴을 침공한다는 미친 짓을 당장 실시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 처칠이 막무가내로 폴 작전을 즉시 진행시킨다고 해도 고작 1기당 잘 해봐야 폭장량 700kg 정도를 보유한 소드피시 뇌격기 몇 대의 폭격만으로 스웨덴의 철광석 생산 및 운송 능력이 상실된다고 볼 정도의 엄청난 바보는 아니었다. 따라서 추가적인 조치인 대대적인 폭격이나 특수부대의 투입이 있어야 제대로 된 결과를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영국 본토 자체에 위급상황이 오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폭격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영국의 특수부대인 코만도는 1940년 6월 13일에서야 최초로 육군 제1코만도가 창설되었을 정도로 방금 전에 부대를 만든 상태라 도저히 바로 실전에 투입할 상태가 아니었으며 투입하려고 해도 이미 적진이 된 노르웨이에 상륙한 후 노르웨이의 영토를 관통하면서 험준한 산맥을 넘어 스웨덴 내부의 깊숙한 지점까지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항공모함 글로리어스가 기습적인 폭격을 가한다고 해도 호위함을 최소로 할 필요가 없다. 목표지역이 적지역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발트해의 보트니아 만에 있는 항구라 영국 해군이 해당 지역까지 근접해서 함포사격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호위함들에게는 작전 자체를 알려줄 필요가 없이 항공모함 호위만 제대로 하라고 하면 되며 정확한 폭격장소는 임무에 투입된 함재기 조종사와 관련인물만 알면 충분하다. 비행코스도 어차피 노르웨이 상공을 거쳐야 하므로 철수작전 지원을 위해 노르웨이에 있는 나치 독일군을 대상으로 한 폭격 정도의 면피성 변명만 해도 현장에서는 다들 수긍하고 충분히 넘어갈 수 있으며 작전의 비밀도 충분히 유지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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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를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을 살펴볼 때 가이 도일리휴즈는 작전에 임할 때는 자신이 탑승한 항공모함이 공격을 받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평소에도 작전시 항공모함의 안전을 너무 중시해서 함재기의 항속거리 반경에 육박하는 원거리에 함재기를 보내는 무리한 작전을 해서 함재기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다가 연료부족으로 추락하는 것 정도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물이 폴 작전의 수행을 위해 독일 해군과 공군이 자주 출몰하는 노르웨이 해안가라는 위험지역까지 스웨덴 폭격을 위해 근접해야 하는데 고작 구축함 2척이라는 제대로 된 호위가 불가능한 호위세력만 데리고 작전을 수행할 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판단이다.
이에 비해 부하가 받는 군사재판의 참석을 위한 가이 도일리휴즈의 급발진은 함장의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충동에 가까운 행동이며 모항인 스캐퍼 플로(Scapa Flow)가 노르웨이 방면과는 반대 방향에 떨어진데다가 영국 본토함대의 모항이므로 나름대로 항구와 주변의 수색 및 호위가 이루어진다. 즉 구축함 2척만 끌고 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같은 영국 해군을 만나므로 호위를 받아 안전하게 빠른 귀항이 가능해 보이므로 충분히 가이 도일리휴즈가 모험을 할 만하다고 판단가능하다.
- 마지막으로 벤 바커는 관련자에 속하지 제3자가 아니다. 애초에 가설을 주장한 목적 자체가 장렬한 싸움끝에 전사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훈장이나 포상을 못받은 할아버지의 명예를 올리기 위한 것이므로 주장 자체의 뿌리가 객관적이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할아버지가 가이 도일리휴즈라는 답 없는 사람의 뻘짓에 휘말려서 개죽음당했다는 허무하고 슬픈 결론보다는 폴 작전이라는 특수기밀작전에 참가했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나중의 외교적 후폭풍을 우려해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가 기밀로 덮어버렸다는 나름대로 명예로운 결론으로 가설의 결과가 이동하는 자기합리화의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벤 바커의 가설이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거의 정설로 굳혀진 가이 도일리휴즈의 졸렬한 행동에 따른 결과라는 가설과 벤 바커의 폴 작전 참가라는 가설이라는 두 종류 외에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주장의 근거도 부실해서 그냥 그런 음모론도 있긴 하다고 알면 된다.
4. 결과
4.1. 전투의 여파
노르웨이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유럽의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계속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다. 그나마 전쟁 후반쯤에 노르웨이 최동단인 핀란드 접경지역 일부가 소련군에 해방되었다. 그래서 런던의 노르웨이 망명정부가 상징적 의미로서 소련군이 해방시킨 지역에 관리를 보내어 주권을 행사했지만 소련도 노르웨이 영내 깊숙히 진격하진 않아서 대부분의 지역이 전쟁 끝날 때까지 독일군의 지배하에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으로 원하던 철광석의 안정적 수급과 북방 해군작전 기지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가 모두 달성되었다. 이후 노르웨이는 대영국 해상작전의 기지이자 독소전쟁 발발 이후 북방항로의 최대위협으로서 연합국에게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PQ-17이다.
그리고 노르웨이 침공 전체를 따질 때 독일군은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쳐서 5,600여명 수준이 넘지 않는 상대적으로 근소한 피해만 입고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독일군이 승리한 것은 맞다. 특히 육군은 1,317명이 전사했지만 동시에 영국군 1,800명, 노르웨이군 2,0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다. 하지만 1,800명도 안되는 육군의 피해와 달리 독일 해군의 피해는 심각했는데 구축함을 대거 잃었고 2,300명의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영국은 육군 1,800명, 해군 2,500명으로 독일군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으며 완패했다. 특히 영국 해군 전사자의 상당수를 차지한게 앞서 언급한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의 어이없는 침몰이다.
이 때문에 영국은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 책임을 두고 정치적인 다툼이 발생했다. 이 다툼에서 윈스턴 처칠 등 강경파가 네빌 체임벌린 수상을 맹공격하여 체임벌린이 실각하고 처칠이 전시내각의 수상이 되어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
구분 | 연합국 해군 | 독일군 해군 | ||
피해 | 침몰 | 손상 | 침몰 | 손상 |
전함 | - | - | - | 2 |
순양전함 포켓전함 |
- | - | - | 2 |
항공모함 | 1 | - | - | - |
순양함 | 2 | 6 | 3 | 3 |
구축함 | 9 | 8 | 10 | - |
잠수함 | 6 | - | 8 | - |
기타 함선 | 17 | 2 | 22 | 4 |
그러나 이 전투로 인해 독일 해군이 사실상 궤멸했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물론 개전 당시 아예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빈약한 전력으로 용감하게 싸워서 영국군에게 많은 손실을 주었지만,[10] 독일 해군은 한척 한척이 아까웠던 순양함만 3척을 잃어야 했으며, 구축함은 무려 10척이 날아갔다. 일례로 그 당시 독일의 최신예 구축함종인 1936년형 구축함은 오리지널 6척 중 5척이 이 작전에서 격침당했다. 거의 한 함급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독일 해군의 전력이 빈약하고 상대방인 영국 해군의 급수가 다르기 때문에 독일 해군의 피해는 똑같은 격침이더라도 실제적인 손실은 더 컸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 침공 이후 독일군은 바다사자 작전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통상항로파괴를 위해서 주력함을 내보낼 때도 호위함을 제대로 붙여주지 못해서 비스마르크 추격전 같은 사태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호위함이 없던 이유도 노르웨이 침공 후 남아있는 독일 구축함들의 항속거리가 너무 짧아서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니 심각한 사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이 과정에서 개전 초기에는 얼마 없던 U보트 손실까지 발생하는 통에 대서양 전투의 통상파괴전에도 지장을 주었다. 그나마 건진 것이라면 당시 어뢰에 사용되는 최신기술인 자기신관이 실제로는 쓰레기였다는 것을 파악했다는 점이며, 카를 되니츠가 자기신관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충격신관만 사용하도록 해서 문제점을 일시 봉합했다는 점이다.
4.2. 전투의 의의
이 전투의 의의를 요약하는 것은 당대의 각국 군인들, 후대 역사가들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사실 대부분의 2차 대전 자료가 이런 식이지만, 노르웨이 침공의 경우는 서로간의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에 별도로 언급되곤 한다.- 영국 육군은 패배하였으나, 주력 부대를 보내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했다. 노르웨이 침공이 시작되고 한달 후인 5월에 프랑스 침공이 있었기 때문이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서부전선에는 전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 노르웨이 육군 역시 강대국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때의 경험은 현대 노르웨이의 국방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노르웨이는 영국, 미국은 물론 인접국인 스웨덴, 핀란드와도 국방정책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독일 육군이야 당연히 완벽한 승리라고 보며,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독일 육군의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적 전략 거점 코앞으로 수송선을 몰고 가서 보병을 내리는 전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너무 구식인데다가 상대가 너무 약했던 면도 있은지라 그닥 얻을만한 교훈이 없어서 종종 잊혀지곤 한다.
- 독일 해군은 한방 먹였다고 생각했고, 드디어 킬 군항을 벗어나서 북해로 진출할 수 있는 노르웨이의 항구를 획득한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한 것에 만족했다. 이제 이것을 통해 영국 본토를 고립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 영국 해군도 한방 먹었다고 생각했고, 독일 수상함이 북해로 진출하게 된 것이 문제라고 여겼다. 영국이 잃은 수상함들도 경제문제로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대에는 미국의 지원 여부는 미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영국은 함대의 재배치를 통해 이 전투의 손실을 메꿨다. 간단히 말해, 영국 해군의 덩치가 컸기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입은 손실을 버틸 수 있었다.
-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독일군이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본다. 독일군은 수상함을 너무 많이 잃었고, 복구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구축함 손실의 의미를 오판했다. 영국 본토를 고립시키는 목표는 수상함으로는 불가능해졌으며, 항공 세력으로도 불가능했다.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구원투수가 카를 되니츠였으며, 독일은 노르웨이 항구를 통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한다.[11]
- 독일의 지도자들은 킬 군항에서 벗어난 것과 안정적인 철광석 수급처를 얻은데에 만족했다.
- 영국의 정치가들은 킬 군항에서 독일이 탈출한 것과, 영국 육군과 해군이 노르웨이에서 어영부영 싸운 탓에 손해를 제법 보았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했고, 이게 프랑스 침공과 겹쳐 수상인 체임벌린의 목이 날아가고 대독 강경파인 처칠이 집권하는 계기중 하나가 된다.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독일이 얻어야할 자원은 철광석만이 아니었고, 이것들을 전부 침공으로 얻는 것은 무모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르비크 항구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초계를 벗어나 영국을 타격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인데, 정작 타격할 화살이 될 함선들을 너무 많이 잃었다. 영국의 경우는, 처칠 역시 노르웨이의 결과에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점은 처칠이 다른 국가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에서 저지른 무수한 군사적 삽질 중 하나로 간주된다.
정리하면, 영국은 지상전에서 졌다. 해상전에서도 많이 맞았으나, 전체 해군력 대비 손실 비율은 독일이 훨씬 높았다. 비유하자면, 헤비급 챔피언에게 라이트급 챔피언이 소나기처럼 유효타를 날리다가, 카운터로 어퍼컷을 한대 맞은 상황이다. 그 결과 독일은 해군력을 대가로 지불하며 노르웨이에서 승리했다. 독일이 노르웨이에서 얻고자 했던 전략목표인 철광석, 항구 역시 모두 쟁취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침공도 성공으로 끝났다. 당대의 시점에서는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독일이 이긴 것이다.
5. 이야깃거리
- 베저위붕 작전의 육군[12] 총사령관은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kolaus von Falkenhorst) 대장이었는데,[13] 히틀러는 1940년 2월 20일에 그가 베저위붕 작전의 육군 지휘관이 될 것이라 알리면서 같은 날 오후 5시까지 기초적인 작전 계획을 수립해 오라고 명령했다. 당장 군사지도를 열람할 시간조차 없었던 팔켄호르스트는 근처 상점에서 베데커[14]의 여행 가이드북 노르웨이편을 집어들고 거기 나온 지도들을 보며 작전계획을 세웠다. 참고로 놀랍게도 이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승인되었다(...).
노르웨이의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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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반유대주의 친독 정당인 민족 단일당의 지도자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은 노르웨이 침공 당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를 선언하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민족 단일당의 세력 자체가 워낙 작아서 고작 2천여명 정도인데다가 실제 침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를 수립하고 크비슬링의 신정부를 5일만에 해산해버렸다.
그러나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에 대한 노르웨이 주민의 지지도가 낮아서 괴뢰정부 고위직에 노르웨이 사람이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는지 1943년부터는 노르웨이 총리직을 맡겼다. 이를 크비슬링 정권이라고 하는데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내의 자치정부로 활동했다. 크비슬링은 독일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노르웨이는 원래 사형제를 폐지했던 국가였으나 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해 망명정부 기간 동안 사형제를 부활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이름(정확히는 성)은 모국인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배신자, 반역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에 이르렀다. 당장 영어부터 매국노는 퀴즐링(quisling)이라고 한다. 그 밖에 스웨덴어, 네덜란드어 등에도 수출되었다. 한국에서 이완용이 그 이름만으로 매국노의 동의어처럼 언급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참고로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에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추축국의 괴뢰국을 세울 경우 이 사람이 국가 원수로 등장한다. 능력치가 심히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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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독일군은 연합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은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표적인
꿀보직으로 유명했다. 노르웨이의 넓은 면적과 혹한의 기후 때문에 인구가 적어 게릴라 활동의 피해를 받는 곳도 적었고, 무엇보다 노르웨이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20만 명이 넘어 웬만한 게릴라 활동으로는 꿈쩍도 안했다. 노르웨이에 이렇게 많은 독일군이 주둔한 이유는 히틀러의
쇠고집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1944년 후반까지 연합군이 노르웨이에 침공할 수 있다며 노르웨이 주둔군의 본토 소환에 반대했다. 나중에 가서야 연합군의 공세에 대응할 병력이 없자 노르웨이 주둔군을 생각해냈지만, 그때가 되면 배도 비행기도 다 터져서 주둔군을 본국으로 옮길 방법이 없었다. 본래라면
핀란드를 통해 진격해 오는
소련군이 노르웨이까지 들어와 노르웨이 주둔군을 끔찍한 대우가 보장된 포로 신세로 만들었겠지만, 전후
소련의 영향권 확대를 우려한 처칠이 소련군의 노르웨이 국경 진출을 강력히 반대해 이들은 연합군에 항복하도록 합의됐다. 때문에 노르웨이 주둔군은 독일 신정부가 항복할 때까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놀다가 노르웨이에 상륙한 연합군에게 얌전히 항복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이들은, 프랑스 침공에 동원된 후 서방 연합군의 대량 폭격에 시달리다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서방 연합군과 격전을 벌여야 했던 서부전선 주둔군, 뜨거운 사막에서 개고생해야 했던 북아프리카 전선 주둔군, 빠른 시일안에 점령은 했지만 정작 게릴라에게 엄청나게 시달린 발칸 전선 주둔군, 동네 자체가 그냥 생지옥이었던 동부전선 주둔군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행운아들이었다. 반면에 바로 아랫동네인 덴마크 주둔 독일군은 육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로테이션을 적용받아 노르웨이 배치 독일군과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어떤 부대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을 막기 위해 이동하다가 연합군 공군의 습격으로 대타격을 받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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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 주둔한 독일군 병력이 20만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노르웨이는 (독일이 전면적으로 유화책을 폈던 덴마크와 발트 3국을 제외하면) 독일의 다른 점령지들과 비교해서 영토에 비해 저항군의 활동이 대단히 미미한 편이었다.
다만 저항군들도 세가 약했을 뿐 저항을 아예 안한 건 아니고 노르웨이 중수 사건 같은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해당 사건은 노르웨이에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중수를 생산하는 몇 안 되는 공장 중 한 곳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중수 생산을 저지하려고 코만도 습격과 폭격기 공습을 한 사건이다. 예시 어떻게 보면 성공은 했지만 연합국과 노르웨이 사람들 입장에서도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핵폭탄 개발과 관련되기도 했고 나름대로 상당히 유명한 사건이라 영화 텔레마크 요새는 이 중수 공장 습격을 다루고 있으며, 배틀필드 5에서도 노르뤼스라는 캠페인 이름으로 등장한다. 의외로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도 구현되어 있는데, 대체역사 루트 중 하나인 민주주의 독일 루트를 타고 노르웨이와 우호적인 세력이 되면 핵개발에 대한 버프를 받는 중점을 찍을 수 있다. 또한 독일에 저항하는 연합국의 경우 스파이 작전을 통해 중수공장을 파괴하는 거너사이드 작전을 실행가능하다.
6. 매체에서의 묘사
- 2015년에 제작한 < 4월 9일>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이뤄진 전투인 덴마크-독일 전투를 다룬 첫 번째 영화이다.
- 2016년 제작한 노르웨이 영화인 <Kongens nei>(영어: The King's Choice)가 당시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예고편(영어 자막)
- 노르웨이의 2022년 영화인 <나르비크>(Kampen om Narvik/Narvik: Hitler's First Defeat)에서 나르비크 해전을 높으신 분들이 아닌 노르웨이 민간인과 일개 사병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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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도 등장, 독일이 베저위붕작전이라는 중점으로 구현되어있다. 대체역사 루트 중 하나인 민주주의 독일 루트를 타고 노르웨이와 우호적인 세력이 되면 핵개발에 대한 버프를 받는 중점을 찍을 수 있다. 또한 독일과 저항하는 연합국 경우 스파이 작전을 통해 중수공장을 파괴하는 거너사이드 작전을 실행가능하다.
이후 확장팩 AAT에서는 덴마크를 점령할경우 덴마크 농산품을 독점가능하다.
[1]
노르웨이어 보크몰. 또는 Operasjon Weserübung-Nord라고 표기.
[2]
노르웨이어 뉘노르스크. 또는 Operation Weserübung라고 표기
[3]
크리스티안 로케의 후임. 하지만 전투 중 해임된다.
[4]
이후 이 부대는 네덜란드 침공에 투입되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5]
출처는 위키피디아의 노르웨이 침공 항목의 퍼블릭 도메인 이미지.
[6]
문제는 히퍼가 레이더 관제 사격중이었던 바 포격은 계속 이어졌다.
[7]
전술했다시피, 영국 역시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있었다!
[8]
다만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수병의 말에 의하면 지근거리에서 8인치는 물론 10.5cm 부포까지 얻어 맞은 글로웜은 조타불능 상태였고, 따라서 충돌은 고의적이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사고에 가까웠다고 한다.
[9]
다만 자침이 꽤 진행된 상태여서, 침몰 원인이 뇌격인 것으로 보진 않는다.
[10]
이 때문에 영국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쓸 배가 부족해 민간에게 자원까지 받아야 했다. 물론 영국 해군이 노르웨이에서 털리지 않았더라도 해당 작전의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민간 지원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11]
통상파괴전 자체는 전시중립을 지키던 루스벨트 행정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심지어 1차대전 당시 미국의 참전 원인도 루시타니아 호 격침 사건이 아니라
치머만 전보 사건이었다) 미국이 유럽전선에 병력을 투입한 것은
진주만 공습 이후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다음이었다.
[12]
히틀러는 육해공 삼군의 지휘권을 하나로 통합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리 되지 못 했다.
[1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핀란드에서 복무했고 극지방에서의 전투(Arctic Warfare)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베저위붕 작전 성공 이후 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같이 침공을 지휘했던
에두아르트 디틀과 함께
은색 여우 작전에 참전하나 여기서는 패배했다.
[14]
Baedeker. 1827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현대적인 여행 가이드북 출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