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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이름 |
Eduard Wohlrat Christian Dietl 에두아르트 볼라트 크리스티안 디틀 |
출생 | 1890년 6월 21일 |
사망 | 1944년 6월 23일 |
복무 | 독일 국방군 육군 |
최종계급 | 육군 상급대장 |
주요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서훈 | 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
별명 | 나르비크의 영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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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교. 최종계급은 상급대장이다.정당은 나치당이었고, 산악병과 출신답게 등산을 즐겼다고 한다.
2. 생애
1890년 바이에른 왕국에서 태어났다.1909년 10월 1일, 디틀은 바이에른 왕국군의 제5 보병연대에 입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두번 부상을 당했다.
종전 이후 그는 나치당이 독일 노동자당이던 시절 나치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그는 자유군단에 가입하였다. 디틀은 국가방위군에 남았으며, 소장으로서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조직에 관여하였다.
디틀은 1940년 4월 9일과 10일에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에 참가한 독일 제3 산악 사단을 지휘했다. 이 사단의 대부분은 프리드리히 본테 제독이 지휘하는 구축함 10척으로 구성된 독일 해군의 도움을 받아 나르비크에 상륙했다. 나르비크에 상륙한 디틀의 부대원들은 언덕으로 후퇴했고 나중에 영국이 서부 전선(프랑스-독일 국경,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독일의 성공으로 인해 노르웨이에서 독일인을 축출하려는 노력을 포기했을 때 도시를 탈환했다. 당시 디틀 장군의 병력은 영국군, 프랑스군, 폴란드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디틀은 능숙하게 탄약, 식량, 침몰한 구축함 승조원들로 편성된 해군 육전대 등을 활용하였고 결국 방어에 성공한다. 이것은 그는 "나르비크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디틀은 이후 노르웨이와 핀란드 북부, 동유럽에서 독일군을 지휘했으며 은색 여우 작전에도 참여한다. 이 작전에서 디틀은 무르만스크의 공략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병력 부족과 험한 지형,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결국 무르만스크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다.
전투 종료 이후 디틀은 제20 산악군[1]의 지휘관이 되면서 상급대장이 되었다. 디틀은 처음에는 영전을 거절했지만, 알프레트 요들이 직접 임명하자 결국 제20 산악군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사망할 때까지 지휘를 맡았다.
3. 사망
그의 53번째 생일 2일 후인 1944년 6월 23일, 디틀, 카를 에글제어 외 2명의 육군 장성들과 3명의 승무원을 태운 Ju 52가 추락하였다. 생존자는 없었으며, 현재 비행기가 추락한 곳에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만약 이때 추락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3개월 뒤 라플란드 전쟁이 발발하였음으로 그는 핀란드군과 맞서싸워야 했을 것이다.디틀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제20 산악군의 지휘권은 로타르 렌둘릭 장군이 승계했으며, 마지막에는 프란츠 뵈메 장군에게로 넘어갔다.
4. 평가
디틀은 군사적인 면에서 유능한 장군으로 평가된다. 나르비크에서의 전공은 그가 군사적으로 유능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자신의 부하들과 핀란드군에게도 인기있는 덕장이었으며, 히틀러가 좋아하던 장성들 중 한명이었다.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디틀은 상당히 결함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나치당의 창립 멤버였고, 특히 나치의 기준으로도 심할 정도로 과격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역사학자 클라우스 슈미더는 디틀에 대해 “그는 산악부대의 유능한 장군이었으나, 정치적인 면이 전공을 모조리 가린다”고 평가했다.
특이한 사실은 디틀이 혐오하던 대상은 나치 정권이 절멸대상으로 지정한 유대인보다는 노르웨이인이나 핀인 등 북유럽계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최근에 발견된 디틀이 노르웨이인과 핀란드 여성이 독일 군인과 결혼하는 것에 관련한 견해를 적은 문서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 여성을 "인종 표류물(racial flotsam)" 이라고 서술하는 등 굉장히 과격한 인종차별주의적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이 발언은 그 당시 나치당 내에서도 논란이 되어 하인리히 힘러가 중재를 위해 개입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북유럽계 민족들은 나치 독일에서 되레 굉장히 우호적으로 대했던 민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스칸디나비아 민족들을 독일과 같은 게르만 계열인 용맹한 바이킹 혈통이라는 이유로 자신들과 거의 동급으로 우대했으며, 나아가 같은 순수 아리아인으로 여겼기 때문에 노르웨이에도 레벤스보른을 설치하여 독일인과 노르웨이인의 만남을 주선, 대규모 인구부양을 계획한 바 있다. 또한 동맹국이었던 핀란드의 핀족은 소련에 맞서는 위대한 애국 민족이라고 치켜세웠다. 이렇게 나치의 대외정책에 필요한 국가들을 모조리 비방하고 있으니 힘러까지 나서서 개입한 것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1]
1942년 초 그동안 따로 놀던 독일군의 많은 산악부대들을 합쳐서 창설된 부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