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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영국군 화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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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화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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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dnance QF 2 Pounder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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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QF 2 파운더 발포 영상 |
2. 제원
중량 | 814kg |
구경 | 40mm |
포신 | 2.08m (L/52) |
포탄 | 40×304 mm. R |
탄종 | 철갑탄, 철갑유탄, 피모철갑탄, 구경감소탄[1], 분리철갑탄, 고폭탄 |
폐쇄기 | 반자동 수직블록 |
완충기 | 수압스프링 |
거치대 | 삼각 플랫폼 |
상하각도 | -13° 에서 +15° |
좌우각도 | 360° 완전선회가능 |
연사속도 | 분당 22발 |
포구초속 |
792m/s (철갑탄, 철갑유탄, 피모철갑탄, 고폭탄) 853m/s (장약증강탄) 1280m/s (구경감소탄 Mk. 1) 1189m/s (구경감소탄 Mk. 2) 1295m/s (분리철갑탄) |
유효사정거리 | 914m |
조준기 | No.24b |
운용인원 | 3 ~ 5명 |
3. 개발
2파운더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 영국에서 순항전차 Mk.1과 순항전차 Mk.2 의 주포로 비커스 사에서 개발되었다.영국의 초기 전차포 계열은 대전차전을 감안한 것이면 모두 2파운더를 사용했다. A9 전차, A10 전차 에 2파운더가 주포로 탑재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순항전차인 크루세이더 전차와 보병전차인 마틸다 전차, 밸런타인 전차등에 탑재되었으며 처칠 전차의 초기형에도 탑재되었다.
공수부대용 경전차인 테트라크와 해리 홉킨스에도 2파운더를 주포로 사용했으며 다임러 AC 장갑차나 AEC MK I 장갑차나 마몬-헤링턴 장갑차 같은 초기형 장갑차에도 주포로 채택하였다. 그 외에도 베드포드 QL, OY 트럭이나 WC-55 위에 2파운더 견인식 대전차포를 올려놓은 전시 급조형 대전차 자주포도 존재했다.
4. 종류
전차포와 대전차포 종류가 있다.전차포 | 상세 |
Mk IX | 자긴가공(autofrettage) 방식의 포신을 가진 전쟁 발발 이전의 형식 |
Mk IX-A | Mk IX의 전시생산을 위한 간략화 형식 |
Mk X | 단조 방식 포신을 장비한 후기 생산형 형식 |
Mk XA | Mk X의 생산시 치수 공차가 감소된 형식 |
Mk XB | 리틀존 어댑터를 장착가능한 후기 생산형의 주력 형식 |
대전차포 | 상세 |
Mk I | 비커스(기업)에서 설계한 견인식 대전차포 형식 |
Mk II | Royal Arsenal에서 설계한 견인식 대전차포 형식 |
대전차포의 형식에는 Mk IV 형식도 존재했다. 6파운더와의 포가 공용화를 위해 개발된 형식으로 포신의 좌우 선회각도가 기존 포가의 360° 완전선회방식에서 90°로 크게 제한되었지만 기존 방식에 비해 훈련이 불충분한 병력도 쉽게 다룰 수 있고 생산성이 좋았다. 이미 비슷한 형식의 대전차포 포가가 1936년에 제안되었으나 그 당시에는 중량이나 비용이나 생산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거절한 전례가 있고 Mk IV 형식이 개발완료된 1940년에는 워낙 다급해서 기존 생산라인을 변경하기 어려웠으므로 Mk IV의 구조를 일부 변경 및 개량하여 6파운더의 견인식 대전차포 포가로 사용하기로 하고 2파운더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결정하였다.
5. 탄약과 생산량
2파운더의 탄약은 아래와 같다.종류[2] | 명칭 | 전체중량 | 탄두중량 | 내부작약 | 포구초속 |
철갑유탄, 예광탄 | Shell AP/T Mk IT | - | 1.077kg | 19g의 Lyddite | 807m/s |
철갑탄, 예광탄 | AP/T Mk I | 2.04kg | 1.08kg | - | 792m/s |
철갑탄, 예광탄, 장약증강탄 | APHV/T | 2.04kg | 1.08kg | - | 853m/s |
저저항 피모철갑탄, 예광탄 | APCBC/T Mk I | 2.22kg | 1.22kg | - | 792m/s |
구경감소탄 | AP/CNR (APSV) Mk I | - | 0.470kg | - | 1,280m/s |
구경감소탄 | AP/CNR (APSV) Mk II | - | 0.560kg | - | 1,189m/s |
연습탄, 예광탄 | Shot, Practice, Mk IT | - | 1.077kg | - | 610m/s |
고폭탄, 예광탄 | HE/T Mk II | 1.86kg | 0.86kg | 85g의 TNT나 RDX | 792m/s |
다만 모든 탄약을 전쟁 당시에 사용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철갑유탄인 Shell AP/T Mk IT은 전쟁이 터지기 전에 이미 생산이 중단된 상태라서 남아 있는 재고량만 사용되었으며 2파운더가 1선급 대전차포일 시절에는 통짜 철갑탄인 AP/T Mk I만 사용이 가능했다. 그 이후에 저저항피모철갑탄인 APCBC/T Mk I가 1943년에 개발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까지 가면 이미 6파운더와 17파운더로 대전차포 주력이 넘어가기 시작하는 시절이다. 연습탄도 사용은 가능하나 장갑관통력도 없고 폭발력도 없어서 전투시에는 사용불가능한 탄약이다.
2파운더용 고폭탄의 경우에는 1942년 말까지 시제품 4만발이라는 적은 수량만 생산되었고 그나마 1942년 말쯤에 가서야 만들어졌고 일선에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실질적인 대량생산과 보급은 1943년이었다. 고폭탄 위력도 40mm라는 구경을 감안하면 평균적인 수준이었다.[3]
2차대전 후반기에 장갑차용으로 장착한 2파운더용 리틀존 어댑터를 장착한 2파운더 주포는 오직 구경감소탄인 AP/CNR (APSV) Mk I와 AP/CNR (APSV) Mk II만 사용이 가능하였고 고폭탄을 비롯한 다른 탄약은 일체 사용이 불가능했다. 관통력만은 457m 거리에서 3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 할 때 관통력이 88mm로 크게 늘었으나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장약을 증강한 탄인 APHV/T의 경우에는 고폭탄 사용도 가능했으나 개발시기가 이미 2차대전이 종전한 후였다. 초기형의 경우에는 2파운더의 기본탄약구조는 유지한 채 장약만 개선된 물건으로 넣은 결과 포탄의 크기와 중량은 동일하지만 포구초속이 792m/s 에서 853m/s 으로 약간 증가하였으나 관통력 향상이 60도 각도의 경사장갑을 상대로 457m 거리에서 54mm 관통력을 가지는데 그쳤다. 당장 저저항피모철갑탄인 APCBC가 60도 각도의 경사장갑을 상대로 457m 거리에서 53.5mm 관통력을 가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냥 관통력 향상이 거의 없어서 장약을 증강한 의미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본격적인 개량을 위해 포탄 크기도 40×304mm. R에서 40×438mm. R로 변경하여 장약을 크게 증강하여 기존의 2파운더와 탄약의 호환성이 없어졌으며 FV601 살라딘의 주포로 개발되다가 해당 장갑차가 보병지원용으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76mm L5A1를 주포로 채택함으로서 개발이 중단되었다. 개발중인 탄약에는 분리철갑탄인 APDS탄도 있었고 포구초속 1,295m/s로 914m 거리에서 탄착각도 60도라는 조건하에 관통력이 85mm 이었다고 한다.
탄종[4] | 조건 | 91m | 457m | 914m | 1,371m |
AP | 30도 경사장갑 | 53mm | 47mm | 40mm | 34mm |
APHV | 30도 경사장갑 | 105mm | 90mm | 74mm | 60mm |
APCBC | 30도 경사장갑 | 58mm | 53mm | 49mm | 44mm |
관통력은 위의 표와 같다. 다만 APHV는 2차대전 종전 후에나 개발되었으므로 전쟁 당시에는 AP와 APCBC의 관통력만 사용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APHV의 관통력으로 나온 수치는 포탄의 크기가 확대된 40×438mm. R 탄약을 사용하는 분리철갑탄이다.
2파운더 전차포와 견인식 대전차포의 생산량은 아래와 같다. 견인식 대전차포는 1943년을 끝으로 생산이 종료되었으나 전차포의 경우에는 장갑차 주포용으로 1944년에도 적은 숫자가 양산되었다.
구분[5] | 전간기 |
1939년 9월 ~ 12월 |
1940 | 1941 | 1942 | 1943 | 1944 | 1945 |
2파운더 전차포 | 1,077 | 412 | 1,773 | 8,547 | 16,830 | 5,141 | 370 | 0 |
2파운더 견인식 대전차포 | 407 | 138 | 1,534 | 2,607 | 4,106 | 2,246 | 0 | 0 |
2파운더의 2차대전 기간동안 탄약생산량은 아래와 같다. 해외 표시는 영국 본토가 아니라 무기대여법 및 영연방 구성국에서 생산한 탄약이다.
구분[6] | 전간기 |
1939년 9월~12월 |
1940 | 1941 | 1942 | 1943 | 1944 | 1945 |
Shell AP/T Mk IT | 562,000 | 0 | 0 | 0 | 0 | 0 | 0 | 0 |
AP/T Mk I | 337,000 | 135,000 | 836,000 | 4,619,000 | 8,202,000 | 1,712,000 | 0 | 0 |
AP/T Mk I (해외) |
0 | 0 | 417,000 | 0 | 4,375,000 | 585,000 | 0 | 0 |
APCBC/T Mk I | 0 | 0 | 0 | 0 | 0 | 644,000 | 1,061,000 | 0 |
APCBC/T Mk I (해외) |
0 | 0 | 0 | 0 | 0 | 5,000 | 34,000 | 0 |
AP/CNR (APSV) Mk I, II |
0 | 0 | 0 | 0 | 0 | 115,000 | 127,000 | 56,000 |
HE/T Mk II | 0 | 0 | 0 | 0 | 40,000 | 474,000 | 304,000 | 0 |
탄약 생산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형 통짜 철갑탄인 AP/T Mk I은 1943년을 끝으로 생산이 종료되었으며 저저항피모철갑탄인 APCBC/T Mk I가 1943년부터 1944년까지 2파운더의 철갑탄 주력 위치를 이어받았고 리틀존 어댑터용 탄약인 AP/CNR (APSV) Mk I, II도 1943년부터 양산이 개시된다. 1942년 말에 4만발 정도의 시제품이 생산만 되고 일선보급은 안된 고폭탄인 HE/T Mk II도 1943년부터 생산이 본격적으로 개시된다. 1945년에는 리틀존 어댑터용 2파운더 탄약만 생산된다.
따라서 2파운더가 1선급 주력 전차포 겸 대전차포였던 전간기에서 1942년까지는 이미 생산이 개전 전에 중단된 철갑유탄인 Shell AP/T Mk IT의 남은 재고량을 제외하면 오직 통짜 철갑탄인 AP/T Mk I만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6. 문제점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하자마자 문제점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했다.6.1. 통짜 철갑탄만 사용이 가능
2파운더가 1선급 전차포와 대전차포였을 때 가장 큰 문제점으로 사실상 사용가능한 탄종이 통짜 철갑탄밖에는 없었다. 이는 2차대전 초기에 생산되고 있던 탄종이 철갑탄뿐이었다. 그것도 철갑유탄같이 내부에 화약이 있는 녀석이 아니라 쇳덩어리 그 자체인 쌩철갑탄이었기 때문이었다.원래 2파운더용으로 최초로 개발된 철갑탄은 1936년에 개발된 철갑유탄 Shell, Q.F., 2-pr, A.P./T., Mk. 1이었다.[7] 철갑유탄의 경우에는 내부작약량이 적긴 했으나 신관을 조정하면 고폭탄 보조용으로 사용이 가능하기도 하고 개전 초반에 고폭탄이 없었던 2파운더의 경우에는 철갑탄으로도 사용이 가능하고 고폭탄으로도 아쉽지만 일단 사용이 가능한 탄종이었다.
그런데 영국군은 철갑탄 내에 들어가는 작약량에 따라 신뢰성, 관통력, 파괴력 등을 잘 타협해야 하는데 적은 내부작약량과 Shell Mk. I 철갑유탄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관통력과 신뢰성으로 인하여 아예 1938년에 생산중지를 시키는 삽질을 한다. 관통력과 신뢰성에 대해 너무 많은 가중치를 두고 판단한 결과물이었다.
덕분에 철갑유탄 재고량이 적으니 전차 같은 중장갑목표물 이외엔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물론 철갑탄을 쇳덩어리 그 자체로 만들면 관통력은 올라가지만, 이런 탄환을 트럭 같은 비장갑목표물이나 장갑차 같은 경장갑목표물에 쏘면 그냥 구멍만 두 개 뚫리고 끝. 보병의 경우라도 정확히 명중시키지 못하면 그냥 단단한 돌덩어리 한 개 던진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면 선제사격해서 정확하게 명중시켜도 적에게 타격을 제대로 못주기 때문에 적의 반격으로 개박살나기 딱 좋다.
그나마 후방인 북아프리카 전선에는 구식 철갑유탄이 쌓여있었는데, 현지에서 노획한 이탈리아군 M13/40을 상대로 테스트한 결과 900야드 거리에서도 관통하는 것은 물론 파편까지 전차 내부로 많이 뿌렸기에 잘 써가며 Shell AP/T Mk. 1의 생산재개를 요청하였으나 높으신 분들에 의하여 거절당했다. 심지어 그나마 개전 전부터 생산했던 철갑유탄 일부는 신뢰성 향상이라는 명목 하에 내부 작약을 빼고 모래로 채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기 때문에 철갑유탄의 위력을 생각하고 사용했던 병력 중 일부가 눈물을 흘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6.2. 관통력
이미 2차대전 초기부터 슬슬 관통력에도 한계점이 오기 시작했다. 사실 37mm 구경 및 그와 비슷한 구경을 가진 대전차포 자체가 전간기에 개발된 것이라서 위력부족이었으며, 그 중에서 관통력이 높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였다.그리고 철갑탄의 관통력이 제대로 통하는 중장갑목표물인 전차의 경우에도 명중시 위력이 신통치 않았다. 원래 전차는 포탄이 장갑을 뚫는 것만으로는 격파되지 않는다. 관통 이후 내부를 얼마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가가 중요한 점인데, 통짜 쇳덩이인 2파운더 철갑탄은 심각할 정도로 파편발생이 생기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그마저도 파편이 발생해도 질량이 가벼워 적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도 약했다.
설상가상으로 2파운더에 채용한 통상철갑탄의 경우, 독일 전차의 표면경화장갑에 명중한 경우, 탄환이 부스러지면서 관통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43년에 2파운더용 APCBC( 피모철갑탄)이 개발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개전 초반을 지나자마자 2파운더의 관통력도 시원치 않아졌다. 통짜 철갑탄은 장갑 관통전에 포탄 자체가 붕괴되는 탄자붕괴현상이 심해서 관통력을 언급할 가치가 없으며 피모철갑탄의 경우에도 30도 경사장갑 기준으로 91m 거리에서 58mm, 457m 거리에서 53mm 수준의 관통력으로는 수직장갑인 3호 전차와 4호 전차 초기형 모델이나 상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원래 운동에너지를 사용하는 철갑탄의 경우에는 제대로 관통력을 발휘하려면 장갑의 두께보다 최소 10mm, 보통은 20mm 이상의 관통력을 가져야 한다. 애초에 험악한 전장에서 90도 각도로 정확하게 정타가 들어갈 확률이 없다시피한데다가 설령 그렇다고 해도 포탄의 품질차이나 발사시 장약의 완전연소여부 및 탄두의 품질문제로 인해 도탄되거나 장갑을 관통중에 포탄이 장갑에 박힌 채로 멈추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90도 정타로 관통력을 실험한 결과물은 그냥 참고도 하지 않을 수준이 되며 보통은 30도 경사장갑에 명중시킨 자료로 관통력을 실험한 결과물을 가지고 관통력을 평가하는데다가 이것도 아군의 장갑과 적군의 장갑이 동일하다고 본 것이라 실제로 적 전차를 노획해서 목표물로 삼은 후 여러 각도로 사격실험해본 자료에 비하면 신뢰성이 떨어진다. 6파운더와 3인치 M5 대전차포항목을 보면 이걸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2파운더의 철갑탄은 내부 작약이 없기 때문에 일단 관통해서 포탄이 전차 내부로 들어오면 포탄이 폭발하면서 전차 승무원과 전차 내부를 쑥밭으로 만드는 철갑유탄에 비해서는 심각할 수준으로 파편발생과 내부손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장갑만 관통하고 전차 내부에 쇳덩어리 하나가 툭 떨어지고 끝나버릴 가능성이 너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장갑을 강화한 3호 전차와 4호 전차 후기형이나 르노 B1이나 소뮤아 S35같이 독일이 노획한 전차중 장갑이 두껍고 수량이 많은 전차의 경우에는 2파운더는 무용지물에 가까워진다. 관통될지도 미지수인데다가 관통해봤자 탄두가 폭발도 안하고 내부에 파편도 제대로 쏟아붙지 못하니 적 전차를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6.3. 대전차전만 가능한 대전차포
사용가능한 탄약이 사실상 통짜 철갑탄밖에 없어서 대전차포가 대전차 임무만 가능했다. 원래 보병이 운용하는 대전차포는 전차 이외에도 보병의 진격을 지원하거나 벙커 등을 사격해서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일이 많은데, 2파운더는 이런 경우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점이었다.반대로 독일의 도어 노커인 37mm PaK 36의 경우, 고폭탄이 수류탄급 위력이라는 불평이 있었지만, 이런 보조 임무는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장갑관통력이 떨어져서 2선급 무기가 된 후에도 완전히 퇴물이 되진 않았다. 여기에 더해 PaK 36은 총류탄처럼 대전차고폭탄을 포구에 꽂은 다음에 공포탄을 장전하고 발사하는 새로운 방식의 전투방법을 도입하여 대전차전 능력도 잠시동안 회복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전차고폭탄을 일반 고폭탄처럼 사용해서 보병포 용도로도 충분히 사용가능했다.
결국 고폭탄인 Shell, Q.F., 2-pr, H.E./T., Mk. 2가 2차대전 중반에 개발되게 된다. 그러나 고폭탄은 1942년 말에 시제품 4만발 정도만 생산된 후 보급도 안된 상태라 1943년부터 최전선에 고폭탄이 서서히 보급되었을 때는 이미 2파운더가 1선급 대전차포가 아니게 될 시점이었다. 고폭탄의 종류에 대해서는 앤서니 G. 윌리엄(Anthony G. William)[8]에 따르면 영국의 노즈타입 퓨즈의 고폭탄과 호주의 베이스타입 퓨즈의 고폭탄이 있었다고 한다. 전자는 장갑차에 주로 사용되었고, 후자는 벙커를 날리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Jentz에 의하면 전차포와 대전차포로 2파운더가 가장 크게 활동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사용된 바가 전혀 없다고 한다.[9]
6.4. 불만족스러운 전차포
전차포의 경우, 포수의 어깨에 받쳐서 사격해야 했다. 보통 전차포는 크랭크를 돌리거나 발판을 이용하여 선회하였는데, 영국군은 근중거리에서 이동중 사격에 이상하게 집착을 해서 포수가 직접 몸으로 전차포를 떠받치면서 조준을 하게 하였다. 이러면 포수의 실력에 명중률이 크게 좌우되며 전차가 급기동을 하는 순간 포수의 몸이 흔들리면서 조준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게 된다. 심지어 정조준 후에 발사시에도 방아쇠 압력이 높아서 사격하는 순간 조준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여기까지는 당시의 비슷한 수준의 전차들과 동일한 상태라 전차를 상대하는 경우에는 아주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2파운더는 고폭탄이 없다시피해서 대보병전이나 대전차포를 상대하는 경우에는 매우 정밀한 조준이 필요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단단한 돌덩어리 1개를 부정확하게 던진 꼴이라 적을 쓰러뜨리기는 커녕 일시적인 제압도 곤란해서 적의 반격이나 제대로 먹게 된다. 그런데 위에 언급된 조준방식으로는 매우 정밀한 조준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런 문제로 인해 해당 포를 탑재한 전차의 경우에도 적의 대전차포를 제압하지 못해서 공축기관총의 사정거리까지 억지로 진격하다가 대전차포의 정확한 사격을 맞고 불덩어리가 되는 사태가 많이 발생했다.
결국 6파운더부터는 일반적인 전차포처럼 크랭크를 돌리거나 발판을 이용해서 포신의 부앙과 포탑의 선회를 가능하게 했으며 동력도 유압식과 전동식을 사용하게 된다.
6.5. 경쟁자에 비해 불리함
철갑유탄을 억지로 생산중단시키고 고폭탄이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 인한 생산성 저하 및 운용시 잘 훈련된 병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동급 대전차포와 비교해서 무거운 중량등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던 2파운더는 아래의 경쟁자들에 비해 여러가지 면에서 성능이 떨어졌다.스웨덴의 보포스 37mm 대전차포는 370kg의 가벼운 무게에 37×257mm. R탄을 사용하여 포구초속 739m/s로 400m 거리에서 3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 40mm를 관통하고 45도 경사장갑을 상대로는 30mm를 관통한다. 철갑유탄과 고폭탄도 보유하며 연사속도가 분당 15발이다.
구경에 비해 가볍고 훈련상태가 안좋은 병력도 다루기 쉽고 전간기때 베스트셀러중 하나라서 폴란드 제2공화국등 타국에도 수출이 잘 되는 상태라 영국이 수입이나 라이선스 생산하기 딱 좋았다. 실제로 영국도 식민지인 앵글로-이집트 수단 수비용으로 37mm sk ptr m/34 모델을 수입하여 Ordnance QF 37mm Mk I 으로 제식화해서 배치했던 상황이었다. 나치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에서 해당 대전차포 및 해당 대전차포를 전차포로 탑재한 7TP의 맛을 톡톡히 본 후 노획품을 3.7 cm PaK 36(p)로 이름붙여서 운용했고 노르웨이 침공의 일부인 덴마크 침공에서도 단 1문만 실전배치상태로 있었던 보포스 37mm 대전차포에게도 전차 2대의 손상을 입고는 3,7 cm PaK 157(d)로 이름붙여서 운용했다.
프랑스의 47mm APX 대전차포는 1,070kg의 중량에 47×380mm. R탄을 사용해서 포구초속 855m/s로 500m 거리에서 0도 수직장갑을 상대로 89mm를 관통하고 6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는 50mm를 관통한다. 철갑유탄과 고폭탄도 보유하며 연사속도도 분당 15발에서 20발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생산력 문제로 인해 프랑스 침공 당시 1,120문만 생산했으나 1939년 기준으로 최강의 대전차포 소리를 들을만한 성능을 가졌으며 나치 독일군도 노획후에 4.7 cm Pak 181(f)라는 이름으로 독소전쟁에서 초반에 사용할 정도였다. 영국이 수입이나 라이선스 생산을 하려고 할 경우 구경이 47mm라서 3파운더에 해당하므로 운용이나 양산이 상대적으로 쉽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서 2파운더의 초기 생산량이 매우 모자라서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에 파견된 영국 원정군은 2파운더 대전차포가 모자라서 프랑스로부터 25mm 호치키스 대전차포를 220문 정도 지급받는 처지에 몰리게 된다. 25mm 호치키스 대전차포는 25mm라는 소구경의 한계상 성능이 떨어졌으나 496kg 중량을 가지는 기본형인 SA Mle 1934가 4,225문 양산되었고 310kg의 중량을 가지도록 경량화된 개량형인 SA-L Mle 1937가 1,285문 양산될 정도로 양산수량이 많았다. 성능의 경우에도 25×193.5mm. R탄을 사용하여 포구초속 918m/s로 100m 거리에서 3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 36mm를 관통하고 300m 거리에서 3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 32mm를 관통한다. 연사속도도 분당 15발에서 25발이다.
영국군이 지급받은 것은 군마로 견인하도록 만든 대전차포 포가를 적용한 제품이라 장갑차나 트럭으로 견인하면 견인속도가 험지에서 15km/h 이고 포장도로에서도 30km/h라는 한계점이 걸리고 그걸 넘어가면 대전차포가 박살나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워낙 가벼워서 트럭 짐칸 위에 올려놓고 사격해도 별 문제가 없었으므로 노르웨이 침공당시 파견된 영국군이 사용하는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며 프랑스가 항복한 후 영국군에게 남은 수량은 탄약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나치 독일군도 노획 후에 2,5 cm Pak 112(f)와 2,5 cm Pak 113(f)라는 명칭을 붙이고 대서양 방벽과 채널 제도등에서 사용하였다. 이탈리아 왕국군도 cannone da 25/72라는 이름으로 사용했으며 루마니아 왕국과 핀란드도 사용했다.
여기까지 가면 앞에서 언급한 여러가지 주옥같은 단점에다가 최소인원이 3명이고 보통은 5명이 운용해야 하는 2파운더의 효용성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정도다. 굳이 2파운더를 애써서 개발해서 힘들게 양산할바에는 위에 언급한 종류의 대전차포를 처음부터 수입이나 라이선스 생산하는 게 더 나았을 가능성이 높다.
7. 원인
2파운더가 이렇게 안좋은 처지에 놓인 이유는 탄약 개발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짜 철갑탄만 일부러 양산하는 삽질이 주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영국이 상정한 대전차전 교리의 잘못에 있었다.간단하게 언급하자면 오로지 대전차전만 상정했다. 그래서 철갑탄의 관통력과 신뢰성만 중시했으며 고폭탄은 일부러 개발도 안하고 철갑유탄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설상가상으로 고폭탄을 장비 가능한 전차는 전차부대에 소수 편제된 CS전차 뿐이고 이들도 전차 운용 교리상 탄약의 대부분을 연막탄으로 채워서 유사시 연막을 뿌리는 게 주목적이라서 고폭탄은 소수만 탑재하였으므로 대보병전이나 대전차포를 상대할 때 충분한 지원이 불가능했으며 여기에 더해서 CS전차가 탑재한 전차포도 일반적인 전차에 사용하는 전차포가 아니라 철갑탄을 사용할 수 없는 유탄포 계열이라서 적 전차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으며 주포가 일반적인 전차가 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라 주포와 관련 부위의 경우에는 탄약 및 부품 호환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것들이 중첩된 결과 북아프리카의 할파야 고개에 배치된 독일군 88mm 대공포에게 중장갑의 보병전차인 마틸다 II들이 신나게 털려나가는 사태가 터진다. 전차포에 사용가능한 탄약이 철갑탄 뿐이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
8. 미비하고 때가 늦은 개선책
상황이 이렇게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교리는 제대로 쉽게 바뀌지 않았고 결국 독일군에게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처참하게 얻어터지고 난 후에나 서서히 개선책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개선책이 미비한데다가 때가 늦었다는 점이다.가장 중요한 개선책인 고폭탄 대량생산 및 보급이 1942년 말 이후라서 이미 때가 늦은 후라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으나 그나마 이건 2차대전이라는 전쟁기간 중에 공급하긴 했으므로 전쟁기간이라는 시기를 맞추기라도 했다.
리틀존 어댑터(Littlejohn[10] Adaptor)의 경우에는 457m 거리에서 30도 경사장갑을 상대로 할 때 관통력이 88mm로 기존의 탄약에 비해서 관통력 향상은 확실했으나 구경감소탄의 특성상 억지로 포탄의 구경을 40mm에서 30mm로 쥐어짜서 날리므로 기본적으로 탄도가 흔들려서 명중률이 떨어지며 탄두 외부의 연금속제 고리가 불규칙하게 탄두에 붙게 되면 탄도가 개판이 되어 명중이 불가능해진다. 덤으로 구경감소탄 외에는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철갑유탄이나 고폭탄등을 사용할 수 없다.
덤으로 전투 한번 치르고 리틀존 어댑터와 포신의 내구성을 간략하게라도 해야 했다. 그리고 검사 과정에서 뭔가 수상한 조짐이 보이거나 하면 발사시 포탄이 리틀존 어댑터에 박혀서 포구를 막아서 전투불능이 되는 것은 가벼운 증상이고 포신이 박살나거나 장약발사화염이 포미부로 역류해서 유폭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즉시 리틀존 어댑터를 신규품으로 교체해야 했으므로 리틀존 어댑터의 소모량도 상당했으며 전투시에 쉽게 리틀존 어댑터를 장착 및 탈거할 수가 없다.
그래서 2파운더를 장비한 장갑차 부대중에서 1대에서 3대 정도가 리틀존 어댑터를 장착한 후 유사시에 대전차 임무를 담당하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그나마 리틀존 어댑터까지는 2차대전이라는 시기에 맞추기라도 했지 그 이후의 개선책은 전쟁 시기에 맞추지도 못했다. 6파운더의 탄피에 2파운더 탄두를 끼우고 탄두에 적절한 이탈피를 장착해서 사격하는 시험이 실시되었으나 초기 시험후 2차대전이 끝나버려서 그냥 종료되었으며 그나마 실험의 주체도 캐나다였다.
장약을 증강한 탄인 APHV/T의 경우에는 고폭탄 사용도 가능했으나 개발시기가 이미 2차대전이 종전한 후였으며 초기형은 앞서 언급했듯이 관통력 향상이 없다시피하여 포탄 크기도 장약증강으로 인해 40×304mm. R에서 40×438mm. R로 변경하여 기존의 2파운더와 탄약의 호환성이 없어졌으며 FV601 살라딘의 주포로 개발되다가 해당 장갑차가 보병지원용으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76mm L5A1를 주포로 채택함으로서 개발이 중단되었다. 개발중인 탄약에는 분리철갑탄인 APDS탄도 있었고 포구초속 1,295m/s로 914m 거리에서 탄착각도 60도라는 조건하에 관통력이 85mm 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전쟁이 끝난 후였고 전후에는 그 정도 가지고는 답이 없었다.
9. 말로
결국 보다 위력이 강한 6파운더가 등장하자 여기에 밀려나는게 정상이었던 2파운더지만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주요 장비들을 모두 버리고 탈출한 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독일군의 본토 상륙이 멀지 않았다고 느끼고 생산 설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6파운더의 양산을 보류하고 생산설비가 일단 잘 돌아가는 2파운더를 증산해서 배치하는 삽질을 시전한다. 그래서 6파운더는 1941년 11월까지 생산이 연기되었고 최전선의 보급도 1942년 봄쯤 되어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한다.사실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크레타 섬 전투 등을 봤을 때에 단순히 상륙을 넘어서 독일군이 영국 상공을 뒤엎어버리고 그 빈틈으로 악명 높은 독일 공수부대들이 대거 투하되어 영국을 파괴시킬 것이란 공포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대전차전에서의 어려움이 지속되게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군도 곧 M13/40처럼 공격력과 방어력을 업그레이드한 주력전차를 투입하기 시작하면서 영국군의 순항전차 전력들을 위협하였다. 물론 M13/40의 장갑도 튼튼치는 않아서 의외로 장거리에서도 쉽게 뚫렸지만 M13/40의 주포인 47mm 32구경장 블레르 47mm 대전차포의 위력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고폭탄도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탈리아군의 포탄이 명중만 하면 장갑이 영국군 보병전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얇은 영국군 순항전차건 영국군 보병이건 간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가 났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군의 경우에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장갑을 강화한 3호 전차나 4호 전차가 등장하면서 2파운더의 효용이 바닥을 쳤다. 더구나 6호 전차 티거가 오면서부터 2파운더의 가치가 땅을 뚫고 떨어졌다. 이 때문에 신형 6파운더, 17파운더 대전차포가 긴급배치되기 전까지는 25파운더 야포를 끌어와 대전차포 역할을 떠 맡기기도 했다. 그 이유로 인해 1942년 중반부터 2파운더는 영국 본토의 홈가드나 태평양 전선으로 전환배치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군이 담당한 버마 등지에선 일본군의 전차가 M3 37mm 대전차포에도 숭숭 뚫리는 치하처럼 장갑이 얇고 품질이 조악했기 때문에 현지에선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당장 태평양 전쟁 초반 시기에 일본이 자랑하는 소위 말레이반도 전격전인 싱가포르 전투에서도 길가에 매복한 영국군 대전차포들에게 일본군 기갑부대가 전멸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히 퇴역하는 시점이 1945년 12월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이었다. 이 탓에 태평양 전선에는 17파운더가 배치되지 않았다.
10. 기타
2파운더의 견인포형 대전차포 방식의 경우 경쟁자인 독일의 37mm PaK 36에 비해 중량이 2배 가까이 될 정도로 무겁고 높이도 높은 편이라 방렬에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트럭 뒤에 묶여서 장거리를 견인하는 과정에서 거칠고 돌이 많은 사막을 가로지르게 되므로 손상이 심해지기도 했다.그래서 트럭같은 차량에 그대로 2파운더 대전차포를 올린 후에 이동하는 차량 위에서 사격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원래 2파운더 대전차포의 구조가 그런 것에 적합하지 않은데다가 장갑 방호력이 없고 높이가 높아서 적의 반격으로 인해 아군에 사상자가 발생하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파운더의 포방패의 보호를 최대한 받기 위해서 차량을 후진하면서 사격을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독일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노획한 2파운더에 4cm PaK 192(e)라는 명칭을 붙인 후 대서양 방벽같은 해안 진지에 간이용 해안포 겸 대전차포 등으로 사용하였다. 같은 2파운더인데 4cm Pak 154 (b)라는 명칭이 붙은 경우도 있는데 이는 독일이 2파운더를 노획시 벨기에군의 대전차포인 것으로 오해하고 엉뚱한 명칭을 붙인 경우였다.
2파운더의 전차포 버전은 영연방 호주의 자체 제작 전차인 센티넬 전차와 캐나다의 램 전차의 주포로 쓰일 예정이었으며, 이중에서 센티넬 전차는 실제로 이를 달고 양산, 램 전차는 램 1 사양이었지만 이 속에는 꼼수가 있다. 램 전차 제작 시 본토의 명령으로 대전차 주포는 2파운더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2파운더를 달라고 했지만, 캐나다 기술진들은 램 전차에 6파운더를 달아도 문제가 없도록 설계했다. 후에 처칠이 명령을 바꾸어 6파운더를 무장하라고 했을 때 캐나다 측은 그저 번거로운 수고를 할 뿐이었다. 이것이 램 2다.
11. 평가
제때 대체되지도 못했고 있는 성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영국군의 삽질을 상징하는 대전차포이다.게다가 상부의 판단착오로 인하여 철갑유탄을 생산중지하고 대전중반까지 쇳덩어리 철갑탄 및 그 변종만이 보급되어서 안 그래도 도태되어가고 있던 구식 장비에 상부의 오판이 강요되며 더 안쓰러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일본, 이탈리아가 열강답지 않은 부족한 공업능력과 영국보다도 뒤쳐지는 교리를 선택하므로서 북아프리카 전역와 태평양 전쟁에서는 활약하긴하지만 이쪽에선 2파운더뿐 아니라 대전차 소총까지도 현역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위안을 삼기는 어렵다.
12. 미디어
12.1. 게임
12.1.1.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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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3에서 등장한 오스트레일리아군 소속 QF 2파운더 대전차포 |
[1]
영국에서는 APCNR 즉 Armour-piercing, composite non-rigid라고 불렀다
[2]
Regulations for Army Ordnance Services Volume 4 Ammunition Pamphlet No. 8 Q.F. Fixed Ammunition Amendments No. 20 Part 2 Cartridge, Q.F., 2-pr., Mks. 9A and 10A Guns and Cartridge, Q.F., 2-pr., S.V., Mk. 10B Gun 1956과 Hunnicutt 1994, p. 496.
[3]
Boyd, David (1 January 2009). "The 2 Pounder Anti-Tank Gun". WWII Equipmen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 April 2022.
[4]
Bird, Lorrin; Livingston, Robert (2001). World War II Ballistics: Armor and Gunnery. Albany, NY: Overmatch Press. p. 60
[5]
예시
[6]
예시
[7]
Shot은 통짜 철갑탄, Shell은 고폭탄이나 철갑유탄 등 내부 작약이 있는 형식이다.
[8]
탄약전문가다.
http://www.quarryhs.co.uk/
[9]
Tank Combat in North Africa, Thomas L. Jentz, 1998, p.14
[10]
여기서 '존'이란 거시기를 뜻하는 속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