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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2:32:05

오스카 디를레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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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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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디를레방어 여단장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1]
Oskar Paul Dirlewanger
파일:dirlewanger-1944-v0-7js874x2iw2a1.jpg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 이후의 오스카 디를레방어[2]
출생 1895년 9월 26일
독일 제국 뷔르츠부르크
사망 1945년 6월 7일?[3] (향년 49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알츠하이젠
학력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 정치학 / 박사)
직업 군인
부모 아버지 아우구스투스 디를레방어
어머니 파울린 디를레방어
정당
복무 독일 제국군 (1913~1918)
콘도르 군단 (1937~1939)
무장친위대 (1940~1945)
최종 계급 예비역 상급대령[4]
경력 디를레방어 여단 여단장
1940년 6월 14일 ~ 1945년 2월 17일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철십자 훈장
철십자 보장
독일 십자훈장
스페인 십자훈장
기사십자 철십자장

1. 개요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2.1.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2.1.2. 참전 이후
2.2. 제2차 세계 대전2.3. 종전 이후
3. 평가4. 서훈 내역5. 여담6. 관련 문서7.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파일:오스카 디를.jpg
왼쪽에 있는 인물이 오스카 디를레방어[5]

나치 독일 무장친위대 상급대령.[6]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7]와 함께 바르샤바 봉기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강간할 것을 지시한 희대의 전범이며, 얼마나 잔혹했는지 SS의 몇몇 장성들처럼 같은 나치들도 그에게서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다.[8] 심지어 디를레방어는 전쟁 이전에 아동 성폭행을 저질러 수용소에 간 적도 있었던, 그야말로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2.1.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895년 9월 26일 뷔르츠부르크에서 부유한 무역업자 아우구스투스 디를레방어와 그의 아내 파울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3년 중등 교육을 받은 그는 같은 해 10월 1일, 뷔르템부르크 군단에 1년간의 자원병으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14년 8월 2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디를레방어는 서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독일 제국군 제123 척탄병 연대 기관총 사수로 입대했다. 디를레방어는 이후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하여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의 5군 123연대의 일원으로 아르덴 전투에 참가하여 로렌에서 싸웠다. 이 전쟁에서 활약해 1915년 4월 14일 중위로 진급했고, 그곳에서 돌격 및 기관총 중대를 이끌었다.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 동안 그는 여러 번 부상당했다.[9]

여러 번 부상을 입은 후 그의 몸은 40%가 전쟁 피해를 입은 것으로 분류되었다.[10] 이 전쟁에서 활약한 공로로 2급,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했다. 1918년 121 보병 연대 기관총 중대장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에 참여했다. 휴전이 끝난 후 디를레방어의 보병 연대는 루마니아를 통해 독일로 돌아왔다. 디를레방어는 독일 제국이 항복한 후 루마니아 정부에 의해 붙잡혔지만, 그는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1918년 11월, 그는 루마니아에서의 투옥을 피해 600명의 군인과 함께 독일로 직접 돌아왔다. 이 전쟁에 참전한 영향으로 인해 1932년 디를레방어는 언론에서 전쟁 영웅으로 명예롭게 평가받기도 했다.

또한 이때부터 디를레방어는 폭력을 좋아했고, 전쟁은 그의 젊은 삶에서 결정적인 경험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루마니아의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그가 자행한 대학살과 루마니아 정부에게 붙잡히는 동안 채택한 "제한되지 않은 삶의 방식"을 그의 인간 고통과 만년의 "테러 전쟁" 방법에 대한 성향으로 평가하고 있다. # 디를레방어가 4년간의 전쟁에서 후천적인 취향, 폭력, 피, 살인에 대한 취향을 발전시켰고, 마약 중독자처럼 살인에 푹 빠졌다는 것이다. # 독일의 역사학자 페터 롱게리히(Peter Longerich)는 이 시기의 디를레방어에 대해
"그 이후로 그는 제한없는 삶의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시민사회의 규칙과 삶에 대한 경멸로 특징지어진다."
고 평가했다. #

2.1.2. 참전 이후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다양한 우익 민족주의 진영에 가입했다. 1919년에 디를레방어는 자유군단에 합류했다. 1920년의 실패한 군사 쿠데타 이후, 서독의 루르 지역에서 많은 좌파 노동자들이 자칭 루르 붉은 군대를 결성하며 봉기했다.

당시 정치학을 공부하던 광신적인 민족주의자 디를레방어는 작센과 실레지아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자유군대와 라이히스베어군에 합류했다. 1920~1921년에는 튀링겐, 작센, 루르 및 상부 실레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때려 잡기 위해 거리 전투에 참가했다. 자유군단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1921년에 머리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1921년 부활절 일요일, 그는 막스 호엘츠와 독일공산당 민병대가 점령한 독일의 생거하우젠으로 향하는 장갑열차를 지휘했다. 그는 생거하우젠의 공산주의자 막스 호엘츠(Max Hoelz)가 조직한 공산주의 조직을 학살했다. 이러한 성과로 그는 "생거하우젠 명예 시민권"을 따냈고 빨갱이들로부터 도시를 지켜낸 "해방자"라고 불렸다. # 동시에 그는 만하임에 있는 고등상업학교에서 공부했지만 반유대주의로 인해 퇴학당했다. 이때부터 디를레방어는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독일 경찰관들의 경찰 보고서는
'마약의 영향으로 폭력에 빠지는 습관을 가진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광신자이며 알코올 중독자'
라고 그에 대해 적었다. #

그리고 나서 디를레방어는 나치당이라는 자신의 극우적, 민족주의적 견해를 위한 이상적인 보금자리를 찾았는데, 그는 나치당이 창당된 지 불과 2년 만에 가입했다. 1922년 10월 1일 디를레방어는 나치당에 가입했지만 일시적으로 제외되었다가 몇 년 후 다시 승인되었다. 또한 친위대에도 입대했으며, SS 번호는 #357,267이었다. 이 무렵 그는 이미 불법 총기 소지 및 '반유대주의 선동'에 대한 법률로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이것이 나치당 내에서 그의 지위를 해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시켰다. 1922년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에서 사회정치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논문을 쓰기도 했으며, 실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논문은 계획 경제 에 대한 분석 및 비판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 , 제목은 "계획된 경제 관리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당시 강사로서 교직에 초대되었지만 거절했다.
파일:Oskar-Dirlewanger-3.jpg

디를레방어는 1922년 11월 1일 나치당에 입당했지만 군축법을 위반한 혐의로 제명되었다. 그는 1926년에 지역당에 입당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디를레방어는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다양한 은행의 은행원이자 관리자였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그는 유대인 가족들이 운영하는 섬유공장에서 최고 경영자로 활동했다. 거기서 디를레방어는 공장의 돈을 몰래 빼돌려 SA를 후원하는 몇 번의 횡령죄를 저질렀다. 그는 이 일로 유대인들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디를레방어는 자영업 세무 고문으로 일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횡령 혐의로 은행 업무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금융사기로 인해 섬유공장에서 해고당했지만 주인과 원만한 계약을 맺고 물적 피해를 배상했다. 또한 그는 무기의 불법 소지 및 반복되는 횡령으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당시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디를레방어는 은행원이나 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디를레방어는 1932년 12월 에슬링 노동조합에 침입한 후 국토 평화 위반 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1932년 에슬링겐암네카어 SA의 최고 책임자로서 자리를 얻었다. 1933년 나치들이 권력을 잡은 후, 디를레방어는 즉시 하일브론시에 고용되었고 노동 및 고용부서에 임명되어 관리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부국장으로, 그리고 나서 국장으로 일했다. 그는 독일에서 자신의 측근들과 SA를 모두 고용하는 것에 대해 논한 첫 번째 사람이었지만, 여기에서도 그는 부패와 음모로 인해 빠르게 부패하고 있었다. 1934년에 독일여성동맹의 대원이던 13세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와 불법 무기 소지 및 횡령에 대한 유죄 판결로 2년 금고형의 판결을 받고 학급, 군급, 상급, 당직, 직업 등이 모두 박탈되며 제명되었다. 재판에서
"왜 성폭행을 했냐"
고 묻자
" 술에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 변명을 해댔고,
"그 여자아이는 그렇게 좋은 아이가 아니다"
라며 피해자의 단점을 부각시켰으며, 결국 판결은 "미성년 소녀와의 비도덕적 행동"으로 인정되어 2년형의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루트비히스베르크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제국고등법원에 이 판결을 항소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또 강간 미수로 인한 재범 혐의로 이번에는 벨츠하임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11]
똑똑하긴 하지만, 그는 거짓말쟁이였고,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아이들을 성추행한 변태였다.
― 리차드 C. 루카스 (역사학자) #

하지만 디를레방어는 SS의 사령탑인 하인리히 힘러의 오랜 친구이자 SS 사령관이 된 지역 나치 간부 동지인 고틀로프 베르거의 개인적인 개입에 의해 SS의 일반 예비군에 복직되었다. 디를레방어의 오랜 친구[12]이자 친위대의 거물급 인사였던 고틀로프 베르거의 조언에 따라 디를레방어는 출소한 후 스페인 외인군단에 자원하여 그곳에서 독일의 자원병 전투부대인 콘도르 군단에 합류했다. 디를레방어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 편에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1937년 4월부터 1939년 5월까지 그는 벌로봇의 탱크 부대에서 복무했다. 디를레방어는 이 전쟁에서 3번 부상을 입었다. 1937년 4월 독일 육군의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사령관은 스페인에서의 디를레방어의 활약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디를레방어는 이 공로로 스페인 전역 훈장, 스페인 군복무 십자장, 은메달 스페인 십자장을 받았다.

다시 명예를 회복한 디를레방어는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과거에 대한 변호로 디를레방어는
"내가 비록 잘못했지만, 나는 결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고 말했다. 그는 성폭행 혐의가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정치적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전문 영국 역사학자 마크 펠턴이 정리한 디를레방어

디를레방어는 나치의 폴란드 침공에 대한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기 범죄로 아직 조사를 받고 있었지만, 그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개인적으로 침략이 시작되기 전에 슈츠슈타펠에 가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친위대 지도자께서 1939년 7월 4일 서한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신이 요청한 대로, 당신의 재활을 위한 법정 소송의 결과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동원의 경우, 친위대와 함께 행진하려는 당신의 소망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립니다. 하지만, 친위대 지도자께서는 당신이 콘도르 군단의 일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심각한 상황의 경우 독일 국방군의 어느 부서에든 자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틀로프 베르거 #

그러나 1940년 새로운 특별 부대의 편성 가능성에 관한 또 다른 조치가 진행 중이었다. 친위대 대장 카를 볼프는 독일 법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볼프는 선택된 밀렵꾼들을 전선으로 보낼 목적으로 그들을 사면하는 것이 히틀러의 바람이었다고 말했다. 아돌프 히틀러이나 올무를 사용한 밀렵꾼이 아니라 불법 총기로 사냥한 밀렵꾼만을 원했다. 또한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다른 지역이 아닌 바이에른이나 오스트리아의 밀렵꾼에만 관심이 있었다. 밀렵꾼들은 특별한 "명사수"들로만 조직되어 SS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한편 디를레방어는 1934년에 받은 유죄 판결을 성공적으로 뒤집었고, 1940년 4월 30일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무죄 판결이 너무 미흡해서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처음에 그의 박사학위 복귀를 거부했지만, 디를레방어는 다시 정치학 박사가 되었고 나치당에 복직되었다.[13] 이제 디를레방어는 슈츠슈타펠의 직위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후원자이자 슈츠슈타펠 참모총장이었던 고틀로프 베르거 덕분에, 디를레방어의 요청은 결국 승인되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부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40년 6월 14일, 고틀로프 베르거 하인리히 힘러에게 추천해 디를레방어를 유죄 판결을 받은 밀렵꾼들과 살인자들로 구성된 특수 SS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상급돌격지도자의 계급에 임명된 디를레방어는 무장친위대 부대에 입대했으며,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의 설립자이자 사령관이 되었다.[14]

디를레방어는 베를린 근처의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형을 선고받은 밀렵꾼들을 모집해 군사 훈련을 수행하는 임무를 받았다. 무장 친위대에 밀렵꾼들을 끌어모은 이유는 그들이 뛰어난 추격 실력과 사격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만약 사람들이 숲에서 동물들을 성공적으로 추적하고 찾을 수 있다면, 같은 사람들이 험한 지형의 같은 지역에서 사람들을 사냥하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한 디를레방어의 부대에는 밀렵꾼만 아니라 온갖 흉악범들[15], 정신병자, 동성애자, 집시들까지 입대시켰다. 나중에는 반나치 정치범들도 이 부대에 입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범의 비율은 적었다. 압도적인 다수는 이른바 '비사회적인' 정신병자들과 전문 범죄자들이었다.[16] 이 결정은 처음부터 다른 무장친위대 장교들에게도 논란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이 사람들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부대는 독일 육군의 엄격한 조직과 규율을 갖춘 훌륭한 부대가 아닌 깡패 집단이었기 때문이다.[17] 하지만 아무도 힘러를 통해 디를레방어 부대의 잔혹행위를 지지한 아돌프 히틀러와 논쟁할 수 없었다. 일부 나치 이데올로기 학자들은 이러한 범죄자들의 사용을 정당화했는데,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다소 니체적인 방식으로 "법에 저항하는" " 순수 원시 독일 남성들"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 초기에 유대인 사냥을 잘한 성공 덕분에, 디를레방어 여단은 전쟁 기간 동안 4,000명의 병사로 최정점에 달하기도 했다.[18]
1941년 나는 디를레방어 휘하의 '밀렵꾼 연대'를 조직했다… 10번이나 부상을 입은 훌륭한 스와비아 사람, 진짜 인물. 나는 총통으로부터 총기를 사용한 밀렵꾼들이 아니라 총기를 사용한 모든 밀렵꾼들을 수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총 2,000명 정도였다. 아아, 이 '정직하고 가치 있는 인물들' 중 400명만이 오늘날 남아있다. 나는 이 연대에 SS 보호관찰 대상자들을 계속 보충해왔다. SS에는 너무 엄격한 사법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 나는 디를레방어에게 말했다. '자, 포로 수용소에서 악당들, 즉 진짜 범죄자들 중에서 적당한 후보자를 찾아보는 게 어때?'.
하인리히 힘러 #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지휘관으로서,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에 의해 그의 부하들을 처형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훈련시킬 수 있는 특별한 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보통 다른 전투원들처럼 사법 절차를 밟고 있는 독일군 장교에게는 없는 특권이었다. 사실 디를레방어만이 이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이 권한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디를레방어의 부대원들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였고, 자원해서 입대한 병사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디를레방어는 그들을 자유롭게 죽일 수 있었으며 부대원들도 서로 죽이고 죽였다. 새로운 여단원들은 종종 내부적으로 싸움을 벌여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원한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했다. 하지만 디를레방어는 살인면허를 가지고 있는 동안 역설적으로 그의 부하들과 매우 가까웠다. 그는 반말을 사용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행동은 독일 장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고, 그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강간하고 살해했으며 마치 부대원중 중 한 명인 것처럼 행동했다. 디를레방어는 그와 동급에 있는 대부분의 장교들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디를레방어의 지휘 아래, 디를레방어 여단의 주된 임무들은 간단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빼앗고, 범하고, 죽였다.[19] 디를레방어 여단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1940년 8월 폴란드를 점령하기 위해 처음 배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나치 점령하에 존재했던 낮은 수준의 폭동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의 직책을 대량 범죄에 연루될 기회로 이용했다. 그들의 일부는 강탈, 절도, 부패에 가담했고, 일부는 군인들이 사라진 채, 마음대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을 살해했으며, 일부는 집단 성범죄에 가담하며 고문을 자행했고, 만취해서 난동을 부리는 정체불명의 사이코패스 집단이었다. 야간에 그들의 막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약탈품들로 가득 찬 방들, 근무 중 술에 취한 병사들, 그리고 집단 강간을 당하는 여성과 어린이들의 비명, 또는 유흥을 위해 고문을 당하는 죄수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었다. 심지어 디를레방어의 부하들 대부분이 그들의 범죄로 인해 정기적으로 체포되었다. 전쟁 초기에 독일의 군사 법률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나치의 많은 군사 범죄가 점차 처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1940년에는 민간인을 살해하고, 술에 취하며, 사유재산을 훔치고, 디를레방어의 부하들에 의해 저질러진 많은 다른 범죄들을 금지하는 법이 여전히 존재했다. 디를레방어는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을 성노예로서 포로로 잡아두었다. #

1941년 디를레방어 부대는 독일 민족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폴란드 루블린시 주변에서 수천 개의 마을을 폭력적으로 철거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이 지역은 나중에 무장친위대의 강제수용소가 있는 장소로 사용될 것이었다. 또한 당시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하들은 온갖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서 같은 나치들도 경악할 정도였다. 심지어 슈츠슈타펠 고위 간부들조차 디를레방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 빨치산 유대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야기된 잔인함과 살인적인 대혼란으로 인해 일부 SS 인사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나 친위대 일각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디를레방어는 프리드리히 크뤼거에게 승진을 승인받았고 1941년 11월 9일 돌격대지도자로 승진했다. 디를레방어는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에서 발자크의 버그강과 지코프의 유대인 수용소를 감독하는 동안 근무했다. 루블린 지역의 경우, SSPF를 감독했으며 1941년 8월 5일 오딜로 글로보츠닉에 의해 재승진했다. 그러나 크뤼거와 글로보츠닉의 호의는 지속되지 않았고 디를레방어는 곧 폴란드 민간인에 대한 학대에 관한 조사에 시달렸으며, 여성 유대인들을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후 그 혐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조사 결과는 SS 법원에 제출되었지만, 힘러의 명령에 따라 디를레방어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20]
디를레방어 대대는 특히 많은 인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1946년) #
디를레방어 부대가 운영되는 곳마다 부패와 강간은 매일 매일의 삶을 형성했고, 무차별적인 학살과 구타와 약탈이 만연했다.
― 매튜 쿠퍼 (기자) #

디를레방어가 행한 악행의 대표적인 에피소드로 폴란드를 점령한 이후 그는 보안 임무를 맡았는데, 디를레방어는 스타리 지쿠프에서 SS해골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디를레방어가 관리한 수용소는 SS의 담당 판사인 게오르크 콘라드 모르겐의 학대 조사 대상이었는데, 모르겐은 디를레방어를 살인, 부패, 강간 그리고 인종적 모욕[21]으로 고발했다. 판사 모르겐은 디를레방어가 주사를 맞기 전에 강제로 옷을 벗어야 했던 젊은 유대인 여성들에게 스트리크닌[22]을 주사해 본인이 원하는 " 과학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르겐은
"디를레방어는 전 국민에게 골칫거리이자 공포였다. 그는 루블린의 빈민가를 상습적으로 약탈하며 몸값을 갈취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희생자들의 옷을 벗기는 것을 포함하는 소위 과학 실험을 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스트리크닌 주사를 맞았다. 디를레방어는 그의 친구들처럼 담배를 피웠고, 그들은 이 소녀들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를 보았다. 그 직후 시신은 잘게 썰어 말고기에 버무려 비누[23]로 끓여졌다."
고 말했다. #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원들은 유대인 여성 죄수들의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하며 살충제를 주사하여 오락 삼아 지켜보았다. 거기에다가 죄수의 친구들 앞에서 여자 죄수가 경련하여 죽는 것을 재미삼아 지켜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알포드 박사는 그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능력에 내재된 절대적 통제의 즐거움"
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1940년 루블린 게토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면서 폴란드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이 기간 동안 강간, 살인, 갈취, 구타, 그리고 다른 범죄 수법들이 디를레방어의 부하들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여러 보도들이 진술했다. 루블린 게토의 경찰서장인 프리드리히 크뤼거[24] 사람들의 목을 베는 디를레방어 부대원들의 행동에 너무 경악해서 그들에게 멈추라고 여러 번 호소했다. # 당시, 디를레방어는 부하들에게 약탈, 강간, 학살을 하도록 자유로운 통치권을 줬다. 만약 민간인이나 군인이 디를레방어를 불쾌하게 했다면, 디를레방어는 그들의 손에 총을 쏘았다. 만약 그의 부하들 중 한 명이 자신이 원하는 전리품을 잡으면, 디를레방어는 그 자리에서 그를 처형했다. # 또한 디를레방어 부대는 광견병에 걸린 개들을 풀어 사람들을 사냥하기도 했다. #

2.2.1. 독일 점령하 벨로루시

처음에 대대 규모였던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는 1942년 폴란드에서 빨치산들과 싸웠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죽였으며, 일반적으로 루블린과 크라쿠프에서 폴란드인들을 괴롭혀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영국 역사학자 마이클 트레겐자에 따르면, 당시 디를레방어와 SS 집단지도자 오딜로 글로보츠닉은 1941년과 1942년에 루블린으로 발령났을 때 수많은 술자리 외출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오딜로 글로브츠닉은 힘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를레방어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말하며 추천한 적도 있었다. #

1942년 1월 29일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에 따라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SS 부대의 자원병 조직으로 선언되었으며 SS 본부에 예속되었다. 디를레방어의 지지자인 고틀로프 베르거는 부대를 개인적으로 지도하고 그의 친구였던 디를레방어를 공격과 불만으로부터 보호해줬다. 하지만 디를레방어를 혐오했던 친위대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크뤼거는 이 부대가 너무 잔인하고 부패해서 일반 정부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이에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벨라루스로 이관되었다. 1942년 2월, 여전히 최전방 무장친위대 병력의 경계에 있었던 디를레방어 부대는 오늘날의 벨라루스에서 소련의 빨치산들과 싸우기 위해 이동되었다. 이제 친위대 지도본부 아래 '자원병' 편대로 지정된 디를레방어의 부하들은 빨치산들, 그들과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 또는 단순히 그들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계속 잔인하게 대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또한 디를레방어는 그의 병사들과 함께 개인적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해 전투를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가 장교였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병사들과 전투에서 같이 싸우며 여러 번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 당시 부상당한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특수대대의 부사령관 프란츠 마질로 교체되었고, 그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 대대는 2월 15일부터 2월 17일까지 다시 스타로빈-포바르치체 선까지 전투 지역을 샅샅이 뒤질 예정이다. 피난처나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파괴되어야 한다. 그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될 것이다. 모든 주민들은 총살될 것이다. 소, 곡물 및 기타 생산품은 스타로빈으로 이송될 예정이다. 이 러시아인 중대는 전투 지역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소떼를 북쪽 방향으로 인도할 예정이다. 썰매 기둥은 파괴될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민간 운전자들이 사형 집행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

벨라루스로 이관된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는 벨라루스의 파르티잔 토벌전에 개입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디를레방어는 사람들을 축사에 강제로 쑤셔넣고서 그 축사에 불을 지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퍼부어서 빠져나가려던 사람은 가루가 되어 버렸다.[25] 그의 부하들은 지켜보는 가운데 불길에서 간신히 벗어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쏘곤 했다. 게다가 유대인들을 강간했고 젊은 여성을 고문하며 학살하는 것을 즐기면서 수행했다. 또한 디를레방어는 굶주린 개 무리들이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들의 불에 탄 시체를 먹도록 내버려두었다. 또한 그들은 총검을 들이대며 여성과 아이들을 앞으로 가게해, 디를레방어 부대를 방해할 수 있는 지뢰를 밟아 터트리도록 했다. 디를레방어는 민간인들에게 앞에서 행진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은 전술을 사용했다. 디를레방어의 부대원들은 지뢰밭으로 밀어넣으려는 디를레방어의 생각을 매우 '효과적'으로 판명했고, 그가 그렇게 위대한 혁신을 고안해내서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팔익 호수에서는 디를레방어의 병사 16,662명이 인근 마을의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호수로 몰아 포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무려 15,000명의 민간인이 그곳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디를레방어는 의심 지역을 정찰하여 비행했으며, 마을에서 누군가 보이면 나중에 돌아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였다. # 또한 학살 중 디를레방어는 인신매매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여성들을 강간하고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에 전문적이었다고 한다. 학살 당시 디를레방어가 보낸 라디오 메시지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돌격대지도자(디를레방어)는 러시아 소녀들을 원한다. 오토는 월요일에 추격전을 벌여 그들을 쓰러뜨릴 것이다. 상급돌격대지도자가 팔리크 호수 주변의 숲에 미리 책정했던 것과 같은 가격이다. 보드카 두 병이면 러시아 여자 한 명 가격이다.
― 오스카 디를레방어 #

디를레방어의 부대가 자행한 이 모든 빨치산 토벌 활동은 끝없는 서류의 형태로 보고되었다. 벨라루스의 마을과 도시에서 행한 대학살의 각 주기 후에, 각 부대는 그들 자신의 소름끼치는 수치를 제출했다. 2일 간의 그러한 작전 후에, 디를레방어는
"33개의 벙커, 386명의 도적들을 죽이고 294명의 도적 용의자들을 해치웠다."
고 보고했다. 게다가 그들은
"남자 3명, 여자 30명, 말 117마리, 어린이 248명, 양 140마리, 돼지 14마리, 그리고 120톤의 식량을 포획했다"
고 적었다. 이 문서에는 오싹한 단어들이 들어가있는데, '수거'는 즉, 약탈, 그리고 '마무리'는 즉, 완전한 사형이었다. 1942년 9월 늪지 열기 작전에서 여단은 8,350명의 유대인과 389명의 도적단, 1,274명의 도적 용의자를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디를레방어의 악행으로 30,000명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 봤을 때 살해당한 사람의 숫자는 200여 개의 마을에서 약 120,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
디를레방어 여단이 진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마을을 지웠나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나요? 디를레방어 대령에게 물어보십시오.
― 얀 발틴 (독일 작가) #
처음 (디를레방어의 부대가) 15,000명의 치명적인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디를레방어 여단은 92명만을 잃었는데, 그들 중 다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아군의 사격과 알코올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와 같은 비율은 희생자들이 비무장 민간인이었을 때만 가능했다.
티머시 스나이더 (역사학자) #

이 부대에 의한 학대와 잔혹성에 대한 보고서를 조사한 후, SS 친위대 중앙본사는 디를레방어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의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힘러와 베르거와 같은 디를레방어의 절대적인 지지자들이 여전히 그를 지지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골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고 대신 단순하게 반성하는 척만 했다. 이후 디를레방어는 처벌은 커녕 학살 당시 14,000명 이상의 빨치산을 몰살시켰다는 이유로 독일 십자훈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이 부대가 이러한 잔혹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은 이유는 나치가 규정한 범죄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추적하며,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는 것에 대해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대의 힘은 잘 훈련된 군인들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말의 공감이나 도덕적인 나침반도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고려할 때,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디를레방어 여단의 임무는 나치 지배하의 동유럽 전역에서 민간 활동을 억압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동부 전선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세심한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다.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하들은 수많은 메달, 훈장, 표창, 그리고 모든 종류의 용감한 상을 받았다. 그들은 거의 모든 작전과 행동에서 승리했고, 빠르게 움직였으며, 매우 의욕적이고 훈련되었다. SS 고위 지도자들과 힘러 자신은 그들을 존경하고 숭배했다. 히틀러조차도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들이 가능한 모든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 (중략) 로즈는 친위대가 종종 술에 취해 무질서했으며, 전형적으로 강간, 약탈,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그 작가는 '생존자' 목격자의 진술에 크게 의존했다. (중략) 디를레방어 여단이 SS의 동부 살해 집단 중 꽤 전형적이라고 생각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었고 그것의 한계와 다양하고 무거운 책임들을 보여준다.
― 조셉 비숍 (역사학자) #

이후 디를레방어는 빨치산 토벌작전에 주로 참여했고, 1944년에는 여름 내내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소련 빨치산과 싸웠으며, 이 지역의 수천 명의 무장하지 않은 주민들을 살해했다.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는 다음과 같은 빨치산 토벌 작전에 참여해 강간과 학살을 자행했다.
"Adler 작전, Greif 작전, Nordsee 작전, Regatta 작전, Karlsbad 작전, Frieda 작전, Franz 작전, Erntefest I 및 II 작전, Hornung 작전, Lenz Süd 작전, Lenz Nord 작전, Zauberflöte 작전, Draufgänger I 및 II 작전, Günther 작전, Kottbus 작전, Frühlingsfest 작전 및 Hermann 작전." #

2.2.2. 바르샤바 봉기

우리는 그를 도살자라고 불렀다. 그는 매주 목요일마다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습관이 있었다.
― 마티아스 쉔크 (독일군 공병) #

1944년 여름, 디를레방어의 부대는 1개 여단으로 격상되었다. 1944년 8월 디를레방어 부대는 범죄자, 군법회의 SS 부대, 심지어 전직 정치범으로 구성된 전대대가 되었다. 그들은 오라니엔부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제 그들은 루블린 지역과 벨라루스에서의 수많은 범죄와 잔혹행위로 유명해졌다. 병사들의 손실은 종종 사형 선고가 미결된 새로운 범죄자들과 죄수 부대의 SS 남성들로 강화되었다.

소련 군대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동부 전선이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 부대의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도 없이 소련에 망명했다. 다가오는 소련군에 고무되어,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 폴란드 국내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의 저항군들은 일어나 나치들과 싸울 기회를 보았다. 1944년 8월 디를레방어 연대는 바르샤바 봉기(1944년 8월~9월)와 1944년 10월~11월 슬로바키아 봉기로 이동했다. 1944년 8월 5일 힘러는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디를레방어 부대를 밀어붙였다. 이 봉기는 디를레방어 부대에서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쟁터가 되었다.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자 디를레방어는 제36 SS 무장척탄병 사단을 이끌고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나섰다.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가 시작되자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디를레방어 여단에게 모든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며 강간할 수 있도록 하는 특권을 무제한적으로 허가했다. 디를레방어는 월스카와 토와로와 거리에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올드 타운, 포이슬, 어퍼 체르니아코, 그리고 도시 중앙에서 무차벽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German_Brennkommando-firing_Warsaw_1944.jpg
화염방사기로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독일군

8월 5일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원들은 바르샤바의 볼라(Wola) 지구의 모든 거리에서 약 1,000야드를 진격했다. 최전방에서 훨씬 뒤에 있는 독일군에 의해 탈환된 볼라의 모든 거리에서 주민들은 대피 약속에 의해 그들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많은 민간인들이 거리에 모이자마자, 그들은 대피 장소로 끌려가지 않고 공동묘지, 정원, 뒷마당, 공장 앞마당이나 광장에 모여들었고, 군인들은 더 이상의 움직임의 징후가 없을 때까지 기관총을 발사하며 그들을 죽였다. 8월 5일 폴란드 AK의 대원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 노인들, 여성들, 어린이들까지 모두 목숨을 건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디를레방어는 볼라 지역을 청소하는 임무를 맡았고, 폴란드군들을 죽이려고 하는 우크라이나인, 코사크 지원병들의 지원을 받아, 디를레방어의 병사들은 8월 5일 집집마다 휩쓸고 다니며, 대학살을 저지르기 전에 한 집 한 채마다 살인을 저질렀다. 디를레방어는 부하들에게 그들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검은 코트를 입은 디를레방어는 뒤쪽으로 걸어가서 비명을 지르며 뒤처지는 사람은 누구든 쏘았다.

디를레방어 부대는 볼라 대학살이라고 알려진 절대적인 테러의 물결을 주도했다.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 동료 친위대는 이틀 만에 40,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 피에 젖은 땅에 따르면, 디를레방어가 자행한 볼라 대학살 동안 민간인 대 전투원 사상자의 비율은 1,000 대 1 이상이었다. 당시 학살 기간 동안, 볼라와 오초타(Ochota) 지역의 병원들은 디를레방어에 의해 그날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당시 나치군은 디를레방어를 선두로 하여 병동으로 돌진해 병동에 있는 병자들과 부상자들을 무작위로 쏘았다. 간호사, 수녀, 도우미 및 의사 할거 없이 다 죽였다. 옆에 같이 입원해 있던 독일인 부상자들이 제발 이들을 죽이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참고로 이 대학살 동안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의 잔혹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말한 사람이 있다. 폭동 기간 동안 SS 여단에 재배속된 벨기에 출신의 18세 엔지니어 마티아스 쉔크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시 그는 폭발물에 대한 그의 지식을 이용하여, SS 병사들이 경주하도록 하기 위해 각 건물을 부수거나 폭파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가 말한 디를레방어의 잔혹한 에피소드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그때 뭔가 수상해보이는 친위대 부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계급장이 없는 제복을 입고 있었고 보드카 냄새가 진동했다. 그들은 곧바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공격하면서 수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었다. 검은색 가죽 코트를 입은 그들의 지휘관(디를레방어)이 뒤에서 그의 부하들을 공격하도록 독려하고 있었고, 곧 이어 전차가 도착했다. 우리는 친위대원들을 전차의 뒤에 둔 채로 진격했다. 건물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전차가 피격당해 폭발했고 한 병사의 모자가 높이 날아올랐다. 우리는 계속 도망쳤다. 두 번째 전차는 망설이고 있었다. 우리는 친위대 병사들이 민간인들을 집에서 몰아내 전차 주변에 세워두고 일부는 위에 앉히는 동안 전선을 엄호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친위대 병사들이 긴 코트를 입고 팔에 어린 소녀를 안고 있는 폴란드 여인에게 전차 위로 올라가도록 재촉했다. 그 위에 미리 모여있던 폴란드인들이 여인이 전차 위로 올라타는 것을 돕고 있었다. 전차 위에 있던 어떤 사람이 여인이 안고 있던 아이를 도와 위로 끌어올렸고, 그가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려 할 찰나 전차가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해 아이가 그대로 전차 아래로 떨어졌고, 궤도에 깔려 으스러져 죽었다. 여인은 그 광경에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친위대원 중 한 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여인의 머리에 총을 쏴 살해했고, 친위대원들은 죽은 여인과 아이를 뒤로한 채 전차를 운전해 가버렸다. 탈출하려던 자들은 친위대에 의해 전부 살해당했다." #
"공격은 성공적이었다. 폴란드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 뒤를 쫓았다. 우리 뒤에서 민간인들이 팔을 든 채 다락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빨치산이 아니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폴란드인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가죽 코트를 입은 SS 사령관(디를레방어)이 그의 부하들에게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
"우리는 항상 선두에 있었다. 빠르게 폭발물을 설치하고 폭발시킨 후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디를레방어의 무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그들은 부랑자처럼 보였다. 지저분하고 갈기갈기 찢긴 제복들... 그들 모두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전사자들의 무기를 가져가곤 했다. 매일 아침 그들은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슈투름피오니에레(Sturmpioniere, 전투공병)도 그들과 똑같이 아침마다 술을 마셨다. 우리는 공복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다. 만약 공복에 총을 맞는다면 살아남을 수 있지만 반대로 배가 찬 상태에서 총을 맞는다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디를레방어는 항상 후방에 있었고, 때로는 전차를 탔으며, 항상 잘 엄폐한 상태로 있었다. 디를레방어는 휘하 장병들을 다그치기 일쑤였고 꾸물대던 사람들을 뒤에서 총으로 쏴버리곤 했다." #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작은 흰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총검을 꽂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커다란 방 안에 병원 침대들이 가득했고 부상자들이 널려있었다. 폴란드인 외에도 독일인들도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친위대원들에게 폴란드인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폴란드 장교 한 명과 의사 한 명, 그리고 15명의 폴란드 적십자 간호사들이 군병원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디를레방어의 무리들이 우리를 쫓아 들어왔다. 나는 간호사들 중 하나를 문 뒤에 숨긴 다음 문을 잠갔다. 종전 후 듣기로는 그 간호사는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친위대원들이 개머리판으로 부상자들을 모두 때려죽였다. 부상당한 독일인들은 절망에 빠져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었다. 그 후, 디를레방어의 무리는 간호사들을 뒤쫓아 갔고, 그들은 간호사들의 옷을 찢고 있었다. 우리는 보초 근무를 위해 쫓겨났다.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걸 들었다. 저녁, 아돌프 히틀러 광장[26]에서는 권투 시합 때만큼이나 큰 함성이 울렸다. 그래서 나와 내 친구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벽을 올랐다." #

여기서 마티아스 쉔크는 병원 직원들의 운명을 목격했다.
"디를레방어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서서 웃었다. 병원에서 온 간호사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발가벗겨진 채로 광장을 급히 지나갔다. 피가 그들의 다리에 흘러내렸다. 의사는 목에 올가미를 걸고 그들 뒤로 끌려갔다. 그는 출혈 때문인지 붉어진 헝겊을 쓰고 머리 꼭대기에 가시 왕관을 쓰고 있었다. 모두 시체 몇 구가 이미 걸려 있는 교수대로 끌려갔다. 그들이 간호사들 중 한 명을 교수형에 처할 때, 디를레방어는 그녀가 서 있는 벽돌을 직접 발로 차버렸다. 더 이상 눈 뜨곤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

디를레방어 부대의 잔혹한 학살로 인해 바르샤바 봉기가 완전히 진압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의 여성, 어린이, 병든 노인들까지, 수천 명씩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학살당했다. 매주 목요일 디를레방어는 저항군 전사나 심지어 그가 경멸하는 자신의 부대의 일원까지 죽이는 등 시도때도없이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습관을 들였다. 또한 독일군은 부상당한 폴란드군이 모인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폭격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심지어 분살[27]까지 일삼았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음악에 맞춰서 사람들을 채찍질해대거나, 고문하거나, 강간하는가 하면, 사람들을 끌어낸 다음에 화염방사기로 사람을 태워죽이는가 하면[28] 산 채로 사람에게 가솔린을 부은 다음에 분살시키는 짓을 자행했다.
봉기가 패배하는 동안, 디를레방어 여단은 죄수들을 산 채로 휘발유를 부어 불태우고, 총검에 아기들을 찔러서 창문 밖으로 내밀었으며, 여성들을 발코니에 거꾸로 매달았다.
― 프렌치 맥클린 (미국 역사학자) #

볼라 대학살 당시, 디를레방어 부대는 잔인함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범죄가 총기 난사, 죄수 고문, 약탈, 강간, 아동 범죄, 알코올 중독인데, 이것은 같은 독일군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해 입증되었다. 또한 병원 간호사들은 인기 있는 독일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채찍질을 당하고, 강간을 당했으며, 벌거벗은 채 교수형에 처해졌다. 심지어 디를레방어는 그의 부대원들에게 아이를 칼로 찔러 죽여버리라고 했으며, 그 아이들이 죽자 그냥 그대로 태워버렸다. 또한 디를레방어는 부하들에게 탁아소에 있는 500명의 어린 아이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29] 그는 그의 군대가 총알을 아껴주길 원했고, 그래서 그들은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대부분의 학살을 자행했다. 게다가 병원 창문과 발코니에 여성들을 걸어놓은 다음에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또한 여자와 어린이를 산 채로 전차에 묶어 돌진시켜 여자와 어린이들이 봉기군 손에 죽도록 만드는 참혹한 짓을 자행했다. 즉, 인간방패라 보면 된다. 또한 사람들을 죽이고 겁탈하느라 디를레방어 사단은 하루에 1.6km도 진격하지 못했다.

당시 이 학살의 목격자인 마티아스 쉔크는 볼라 대학살 때 당시 이들이 저지른 고통스러운 세부 사항을 설명했다. 내용이 굉장히 잔인하니 주의하길 바란다.
"우리는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의 문을 날려버렸다. 아이들은 홀과 계단에 서 있었다. 아이들이 많았다. 모두 작은 손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디를레방어가 뛰어 들어올 때까지 그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디를레방어는 그들 모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총을 쐈고 그리고 나서 그들의 몸 위로 걸어가 개머리판으로 그들의 작은 머리를 부서뜨렸다. 피가 계단에 흘러내렸다. 그 장소에는 350명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명판이 있다. 나는 그보다 더 많이, 아마 50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혹은 그 폴란드 여자(셴크는 그것이 어떤 행동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방에 들이닥칠 때마다 여자들은 디를레방어 군인들에게 강간당했다. 디를레방어 여단 병사들은 무기도 내려놓지 않은 채로 여자 하나를 집단으로 강간하곤 했다. 한 번의 싸움이 끝나자 나는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 벽에 벌벌 떨면서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디를레방어 병사들이 들이닥쳤고 병사들 중 하나가 예쁘장한 여자를 끌고 갔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한 손엔 총검을, 다른 손으론 그녀의 머리를 잡아 테이블에 처박은 채로 그 병사는 여자를 강간했다. 그러면서 그는 총검으로 그 여자의 블라우스를 잘라서 뜯어냈고, 그대로 목부터 배까지 일자로 절개해버렸다. 피가 쏟아져나왔다. 8월에 혈액 응고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아는가? #
"디를레방어의 손에는 그 어린 아이도 있었다. 그는 거리의 군중 속에 서 있던 한 여자에게서 그것을 빼앗았다. 그는 아이를 높이 들어올려 불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엄마를 쐈다." #
"우리 앞에 신부님이 서 계셨다. 그는 손에 제병과 성배를 들고 있었다. 어쩌면 충동이었는지도 몰라. 우리는 교감하고 성찬식을 가졌다. 그러자 우리 조의 3분의 1이 달려와 똑같이 했다. 친위대원들이 들이닥쳤고 일상적인 총성과 비명,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있었다. 몇 시간 후에 나는 디를레방어 친위대원들에게 붙잡힌 신부를 보았다. 그들은 성배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제병이 흩어지고 깨졌다. 그들은 벽에 기대어 있는 십자가 오줌을 싸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신부를 고문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이 피범벅이었고 수도복은 찢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 신부를 그들에게서 빼앗았다. 그것은 충동이었다. 그들은 놀랐지만 너무 취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다음 날 그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신부를 우리 대대로 넘겼다. 나는 그 이후로 그 신부가 어떻게 됐는지 듣지 못했다." #
"다음날 골리앗을 가져왔다. 폴란드인들이 우리 전선에서 골리앗을 폭발시키는 법을 배웠고 많은 군인들이 죽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그 길을 앞장서서 가야 했다. 골리앗은 벽에 구멍을 냈다. 밤새도록 우리는 감방과 바닥에서 폴란드인들을 쫓았다. 아침에 탱크가 와서 건물을 점령했다. 많은 금화가 지하실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우리는 바지가 벗겨질 정도로 주머니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금은 사라졌다. 내 병사들은 디를레방어가 그것을 어디론가 가져갔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
"바르샤바에서의 마지막 행동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건물을 습격하고 있었고, 나는 들판을 달렸다. 부상병 한 명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그에게 내 수통에서 물을 조금 주었고, 문을 부수려고 앞으로 달려갔다. 친위대가 우리 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디를레방어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는 부상당한 군인을 가리켰다. '이 돼지에게 물을 주었다고?' 그제서야 나는 독일 유니폼에 부상자들이 더러운 흰색-빨간색 완장을 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를 쏴라!' 디를레방어는 나에게 권총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 모든 것에 질려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디를레방어가 너무 화가 나서 나는 그가 무슨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상당한) 폴란드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빛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나는 부상병이 수십분 안에 아님 수 시간 안에 죽게 될 지 직감할 수 있게 됐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 (직감적으로) 그냥 알 수 있다. 디를레방어 친위대원 중 한 명이 나에게서 총을 빼앗아 부상병을 쐈다. #

바르샤바 봉기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토록 범죄에 관대한 지휘관의 지휘 아래 봉기 초기에만 65,000여 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죽어나갔고, 심지어 이들 중에 일부는 봉기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다.[30] 디를레방어와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가 학살을 자행[31]했으며, 이 학살로 죽은 바르샤바 시민은 최대 90,000명까지 보고 있다. #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볼라 학살과 오초타 학살의 주범들을 디를레방어와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로 보고 있다. # 볼라 학살은 희생자 수 면에서 볼 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디를레방어가 이 사태 동안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으면, 그의 부하들이 바르샤바의 다른 SS 장군들에게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그는 무차별적으로 잔혹한 행동을 했다. 당시 이 학살을 목격한 하인츠 구데리안은 충격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 것은 너무 끔찍해서 히틀러에게 동부 전선에서 두 여단 '디를레방어와 카민스키'의 철수를 요구하기 위해 그날 밤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

구데리안의 항의에 응한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에게 두 부대를 폴란드에서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이후 볼라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인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워낙에 적을 많이 만들어[32] 기습을 빙자한 암살을 당했지만, 디를레방어는 오히려 잘했다고 훈장까지 받았다. 역사학자 마틴 윈드로우(Martin Windrow)는 1944년 여름 디를레방어가 바르샤바 봉기에 대항하여
"도살자, 강간자, 약탈자들을 이끌고 재빨리 행동을 취했다... 형언할 수 없는 범죄."
라고 적기도 했다. 이런 화려한(?) 공로로 1943년 8월 15일, SS집단지도자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Curt von Gottberg)와 SS집단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는 소련 빨치산들에 대한 공적으로 독일 금십자장을 추천했다. 디를레방어는 1944년 러시아에서의 업적과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한 공로로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았다. 또한 그의 마지막 승진인 상급대령으로 임명되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모두에서,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적어도 12번의 전투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그는 검은 상처 배지, 근접 전투봉, 반당파 배지를 받았다. 그러나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 출신 군인들이 독일의 최고 군사 훈장을 여러 개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엄청나게 끔직한 전쟁 범죄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많은 무장친위대 참전자들은 종전 후 회고록을 쓸 때 이 부대의 존재를 무시했다.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한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하들은 슬로바키아로 이주해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그 시골 지역도 황폐화시켰으며, 성공적으로 봉기를 진압했다. 그 후 디를레방어 연대는 1944년 말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고, 처음에는 헝가리로 이동했다. 당시 일화로 1944년 헝가리를 방어하는 동안, 요하네스 프리스너 상급대장은 디를레방어의 부대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내가 디를레방어의 부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상한 광경을 만났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모험가 타입인 연대지도자(디를레방어)는 살아있는 원숭이를 어깨에 메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 원숭이는 폴란드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그와 동행했다고 한다. 군인이 짐을 싸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들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명령했다. 그 부대는, 전에 제안했듯이, 엄청나게 많았다. 전선에서 자신을 증명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공산주의자들인 한 중대는 막 적에게 도망친 참이었다. #

이 무렵, 부대는 강제수용소에서 수색된 병력들의 초안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불충분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제3제국의 풍경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디를레방어 여단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 소련과 싸운 후, 너무 많은 부대원들이 탈영해서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한편, 전투에서 부상당한 디를레방어는 전선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에 여단은 36th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라는 또 다른 칭호를 받으며 격상되었다.

2.3. 종전 이후

디를레방어의 부대인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은 전쟁 기간 동안 확장되었고, 독일 제36무장친위대 사단으로서 독일 제9군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할베 근처에서 싸웠다. 독일의 선전 기자와 전시 사진작가들은 디를레방어 부대의 행동을 미화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디를레방어 부대가 활동하던 곳마다 부패와 강간은 일상을 이루었고 무차별 학살과 구타 및 약탈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디를레방어는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가 군기를 위반하는 행위를 몇 번이나 무시하여 친위대 법무본부에 몇 번이나 이름이 올랐지만, 친구였던 베르거의 개입으로 무마되었다.[33] 그러던 중에 1945년 2월 중순, 오델 강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던 디를레방어는 도중에 흉부에 총상을 입고 후송되면서 자신의 부대와 떨어지게 되었다. 나치의 파멸이 코 앞까지 온 4월 22일, 디를레방어는 고틀로프 베르거도 도피한 탄하임/티롤의 로베르트 보쉬 사냥 오두막에서 제복을 민간복으로 교환하면서 은신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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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포 당시의 디를레방어 (오른쪽)

디를레방어는 5월 7일, 독일 남부의 소도시 알츠하우젠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자유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자유 프랑스군(Free French forces)에 체포된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는 미치광이 살인마(psychopathic killer)이자 아동 성추행범(child molester)이었으며, 범죄자들로 구성된 악명 높은 디를레방어 여단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같은 친위대 장성들조차 그의 좌천과 투옥을 원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1945년 5월, 덴하임에서 프랑스 전쟁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6월 초에 그와 친위대원 민치(Minch)를 동료 수감자로 알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프랑스 점령지)의 당시 사울가우(Saulgau) 지구였던 어퍼 슈바비아의 알츠하우젠에 있었던 동료 수감자의 후기 증언에 따르면, 다를레방어는 전 유대인 수용소 수감자에게 다시 인식되었다고 한다.

6월 7일 디를레방어는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했는데, 디를레방어의 감방 동기 중 한 명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디를레방어가 폴란드인 교도관에게 맞아 죽었다고 했으며, 다른 기록에 의하면 알츠하우젠(Altshausen)에서 폴란드군 병사들(Polish soldiers)에게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히스토리 채널의 프로그램 <나치 권력자: 궁극의 악>에서는 폴란드 출신의 간수들에 의해 폭행되어 죽었다는 설을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진실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디를레방어는 공식적으로 6월 17일에 매장되어 사라졌다. 알츠하우젠 시의 사망 기록부에는 1945년 6월 19일이 디를레방어의 비공식적인 매장 날짜로 나와 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친구인 고틀로프 베르거는 오스카 디를레방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디를레방어 박사는 거의 착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언제 술을 끊어야 할지 몰랐던 큰 실수를 한 번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많은 나치 관련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음모론이 돌았듯이 디를레방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아 있고 세계 여러 곳에서 그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음모론에는 그가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복무하고 나중에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대에서 임관하기 위해 이집트로 망명했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 이런 소문이 지속적으로 돌자 서독 정부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1960년 10월에 라벤스부르크 검찰청의 명령에 따라, 디를레방어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1960년 10월 24일, 법의학 조사 과정에서, 그 유골이 디를레방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가 전쟁 후에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문을 종식시켰다. 1981년 디를레방어의 다큐멘터리인 <카라텔리>에서 벨라루스의 작가 알레스 아다모비치(Ales Adamovich)는
"이미 오늘날 라틴 아메리카에서 안전하게 사망한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유골이 독일 연방 공화국으로 조심스럽게 옮겨져 뷔르츠부르크 땅에 묻혔습니다."
라고 그의 생존설을 진짜인 듯이 말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의 죽음의 상황과 정확하지 않은 사망 날짜는 음모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녹취록에 의하면 소련 검사들은 동부 전선에서 전쟁 범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디를레방어 사단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자주 질문하기도 했다. 2009년 폴란드 정부는 독일에 살고 있는 3명의 살아남은 디를레방어 대원을 확인하고 그들을 기소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

3.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전쟁터에서, 디를레방어의 잔인함에 겨룰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티머시 스나이더 (미국 역사학자, 예일 대학교 교수) #
사실입니다, 총통 각하. 이 사람들은 정말 악당들입니다.
헤르만 페겔라인[34] # #

그는 역사상 최악의 전쟁범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디를레방어가 지시하고 자행한 잔혹한 범죄들은 나치 독일의 반인륜범죄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나치 독일의 잔인한 전쟁범죄에서는 반드시 디를레방어의 이름이 나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디를레방어는 최악으로 꼽히고 " 사디스트 네크로필리아" 성향의 인물로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학자인 크리스 비숍은
"디를레방어는 SS 중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다."
라는 평가를 내렸고, 티머시 스나이더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 가장 잔인하며 잔인성으로 경쟁할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라는 혹평을 했다. 독일의 권위있는 역사학자였던 볼프강 벤츠(Wolfgang Benz)는 디를레방어를
"도덕적으로 무능하고, 권력에 집착하며 (중략), 잔인함과 독단성에 이끌려 범죄를 투쟁의 원칙으로 만드는"
란츠크네히트 유형으로 묘사했다.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성격을 연구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것이 폭력에 대한 병적인 욕망에 압도된 정신적으로 병든 인간 이하의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

2004년 디를레방어의 전기 스케치에서 크누트 스탕(Knut Stang)은 디를레방어의 경력을 결정짓는 네 가지 요소를 파악했다. 그는 디를레방어에 대해
"알코올 중독과 가학적인 성적 성향으로 산산이 부서진 부도덕한 성격, 전면에 있는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 도취된 폭력과 야만, 개인적으로 실패하고 좌절한 평화의 세월, 파렴치한 테러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력을 결합했습니다. 전쟁뿐만 아니라 방법도요"
라고 평가했다. 크누트 스탕은
“디를레방어는 이전의 확신과 다른 이상에도 불구하고, 고틀로프 베르거에 의해서만 적절하게 인식되고 착취되었습니다. (중략) 히틀러와 힘러는 디를레방어에게서 독일 군사 전통의 자선 전쟁과 비교하여 나치 전쟁을 구별하는 가장 급진적인 대표자를 보았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사학자 크리스티앙 잉그라오(Christian Ingrao)는 1942년 여름의 인터뷰와 전후 기간의 증인 진술을 분석하고 디를레방어에 대한 모순되는 정보를 조사했다. 따라서 그는 디를레방어를 "전능하고 두려운 상사"로 특성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를 카리스마적이고 존경받는 상사라고 묘사하는 하급자들의 감명을 고려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몰살의 전문가이자 사디즘과 네크로필리아의 신봉자.
― J. 보이어 벨 (미국 역사학자) #
디를레방어는 지상을 걸어다니는 그 어느 인간보다도 비열한 인간이었습니다.
― 프렌치 맥클린 (미국 역사학자) #

동시대의 오스카 디를레방어의 잔학한 행위를 목격한 사람들은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다. 부패하고 뒤틀린 무장친위대 인물들과 함께 있어도 그의 기록은 거의 독특하고 압도적으로 잔혹한 것으로 표현된다. 역사학자 스티븐 잘로가(Steven Zaloga)는 그를
사이코패스 킬러이자 아동 성추행범
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가장 극악무도한 행위가 행해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그는 이미 독일군 내에서
혼란스럽고, 예측할 수 없으며, 위험하다는 것
에 대해 널리 알려져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른 무장 친위대 부대들도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를 싫어했고 혐오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디를레방어는 독일, 벨라루스, 폴란드에서 수만 명[35]의 민간인들을 고문, 강간, 살해, 약탈하는 것을 지휘하고 개인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것은 최전방 뒤에서 ' 도적'[36]을 제거한다는 말같지도 않는 미명하에 이루어졌다. 그의 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무장하지 않은 적에 대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에 대한 그의 열렬한 증오를 풀어주면서도, 희생자에 대한 그의 선택은 대체로 편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는 남자든 여자든 아이든 간에, 미친 짐승처럼,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역사학자 피터 롱기히(Peter Longerich)가 디를레방어의 성격을 정의하기도 했다. 바로
"계속적인 알코올 남용, 약탈, 가학적인 잔혹행위, 강간, 살인"
이었다.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범죄자이자 병적인 살인마이자 학살자였다. 그는 수많은 범죄를 자행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트레겐자는 폴란드 루블린에서 디를레방어의 범죄를 기록했으며, 디를레방어가 스트리크닌 주사에 의한 살인을 포함해 폴란드 여성들을 그곳에서 살해했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만약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전쟁의 여파에서 살아남아 체포되었더라면, 유일한 문제는 어느 나라가 그를 처형하려 했는가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 벨라루스 폴란드에서는 요제프 멩겔레, 한스 프랑크 같은 악마들이나 하인리히 힘러,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같은 마왕들보다 디를레방어를 더더욱 증오하는 사람들도 많다. 게다가 마약에 까지 손을 댔으며, 알코올 의존증이 심했고, 이로 인해 굉장히 정신적으로 불안했고 성격이 아주 고약했으며 잔인했다고 한다. 심지어 디를레방어는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잔인했다.
그는 폴란드인을 대하는 것처럼 자신의 부하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사디스트였다.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곤봉으로 그들을 구타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남자들에게 무심코 총을 쏘기도 했다. 그의 병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회가 있을 때 러시아군에게 탈영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42년 이후, 강경한 범죄자들이 그의 부대로 징집되었고, 그것은 적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 THE 50TH ANNIVERSARY OF THE WARSAW UPRISING #

전쟁 후 수년 동안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의 작전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이것은 1988년에 프렌치 맥클린이 미국 국립 기록 보관소에서 수천 페이지의 <Sonderkommando Dirlewanger> 보고서를 발견하고, 연구가 끝이 났으며, 나중에 이 문서를 참고하여 《잔인한 사냥꾼: SS특공대 디를레방어, 히틀러의 가장 악명 높은 빨치산 토벌 부대》(《Cruel Hunters: SS-Sonderkommando Dirlewanger, Hitler’s Most Notorious Anti-Partisan Unit》)를 출판했다.

4. 서훈 내역

출처

참고로 디를레방어의 기사십자 철십자장 추천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보기 ]
1944년 4월 24일에 강력한 빨치산 세력이 베레시나 강과 츠체르니차 강 사이에 집결하여 자신들을 깊이 파고들었다. 중무기와 소형 무기로부터의 맹렬한 적의 포격은 처음에는 정면 공격을 막았다. 디를레방어 SS 상급지도자는 지형이 제공하는 천연 엄폐물을 이용하여 측면과 후방의 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최전방에서 싸우고, 강한 의지와 개인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면서, 그는 적을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들의 퇴로를 끊고 그들에게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러시아 전방에서 SS 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는 1944년 7월 7일에 리다 남동쪽의 차단 진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맹렬히 추격하는 적군을 묶었고, 그와 다른 보급부대는 큰 손실을 입지 않고 리사-그로드노 길을 따라 갈 수 있었다. 그는 그의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싸웠고, 단호함과 결단력의 예를 보여주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훨씬 더 큰 적군으로부터 심하게 방어하도록 고무시켰다. 그러나 강력한 적의 압력과 중포의 포격은 그가 더 큰 아군 손실을 피하기 위해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연대의 기민한 요소들이 그를 따라올 수 있게 하려는 그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그의 대담한 행동이 없었다면 그들은 적의 포위망과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1944년 8월 5일, 디를레방어는 바르샤바의 서쪽 가장자리에 배치되어 폴란드와 볼셰비키 빨치산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도약대를 떠난 직후 격렬한 도시 전투가 전개되었다. 위장하고 바리케이드를 친 도적들의 소총 진지를 제압해야 했다. SS 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의 전술적 능력, 대담성, 무자비함만이 이 공격이 계속 진행되도록 했고, 매일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도록 했다. 여기서도 SS 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는 손에 든 무기로 직접 적들의 저항세력을 무찌르는 등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그는 용맹, 용기, 그리고 그의 군대를 위한 의무 이행의 본보기였다. 리츠만 도로를 따라 있는 바리케이드와 지뢰밭은 처음에 더 많은 진격을 지탱했다. 슈투카의 개입 이후, 기갑과 다른 중화기, 그리고 디를레방어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앞으로 돌진했다. 여기에서 그와 그의 병사들은 수류탄을 던져 적에게 큰 손실을 입히고 위치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격렬한 도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SS 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의 대담한 태도는 의도적인 방식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이미 1944년 8월 8일, 아돌프 히틀러 광장이 함락되고 독일 국방군 본부가 해방된 후, 비스툴라 강에 도달하여 반대편 최전방과 다시 접촉했다. SS 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는 계속해서 1944년 9월 2일 구시장 포위망에서 적군을 파괴하는 동안 뛰어난 군사적 기술, 용감함, 그리고 두려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항상 그의 부하들과 최전선에서 싸우면서, 그는 적대적인 저항세력의 둥지와 저격수들을 제거했다. 이 저항세력의 완전한 청산은 1944년 9월 3일 정오에 이미 완료되었다.

1944년 9월 4일에 남쪽 저항세력의 동쪽 가장자리에 대한 추진력과 비스툴라 은행의 제거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적의 포격도 SS 상급지도자 디를레방어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최전방에서 싸우며 그의 부하들에게 두려움을 모르는 본보기를 통해 신속하게 전진하도록 격려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우호적인 손실에도 불구하고 비스툴라 은행을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그의 반복된 행동을 통해 SS 상급지도자는 그가 가장 용감한 용사들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특히 그가 1차 세계대전에서 50%의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 나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할 것을 추천한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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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독일어의 표기법상 '디를레방거'라고 써야 되겠지만, 연음이 되지 않는 독일어의 특성을 감안하면 '디를레방어'가 맞다고 볼 수 있다. [2] 진압 이후의 사진이라 독일 십자훈장(1943년 수훈)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패용중이고 SS 상급대령(상급지도자) 칼라장이 달려 있다. [3] 확실한 사망 날짜가 아닌 추정 날짜다. [4] Oberführer der Waffen-SS [5] 1944년 말이나 1945년 초에 찍힌 사진이다. # [6] Oberführer는 초기에는 독일 국방군 육군 소장과 동급이었으나, 무장친위대의 정식 편제 이후 상급대령으로 격하되었다. 나름 1개 사단의 지휘자였던 디를레방어의 계급이 이 꼴인 것은 디를레방어 여단이 실제로 사단이 아니라 여단 규모였던 것도 있지만, 학살에만 특화되어 있었을 뿐 실질적인 전투력을 기대할 수 없었던 쓰레기 부대였던 이유도 있다. 애초에 형벌부대에서도 가장 답이 안 나오는 자들을 모아놓은 부대였으며, SS 상층부에서도 이 부대는 정식 SS가 아닌 단지 우리 지휘하에 있는 부대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7] 카민스키나 바흐-첼레프스키도 악랄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디를레방어는 최악이었다. 그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SS에 있는 그 어떤 인물도 디를레방어의 광기와 잔혹성에 못 미쳤다. SS의 몇몇 장성들조차 디를레방어는 혐오했을 정도였다. 다만 전체적인 악행으로 보면 바흐-첼레프스키도 무시못한다. 카민스키와 디를레방어와 달리 SS 대장까지 진급한 고위직 인물이었고(심지어 훈련병부터 올라온 인물이다), 동부전선의 파르티잔 초토화 작전을 총괄했으며 저 두 사람도 바흐-첼레프스키의 부하에 불과했다. 그리고 항목을 참조하면 알 수 있지만 전후 재판에서 비열한 행각을 벌여 살아남았다. [8] 이 강간과 학살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바르샤바 봉기 때 같이 투입된 아제르바이잔 보병 대대 카민스키 여단이 하루에 수 km씩 전진할 때 디를레방어 사단은 꼴랑 1, 2km밖에 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죽이고 강간하는 데 시간을 다 써버려서였다. [9] 1914년 8월 22일 - 롱위 전투에서 부상. 8월 23일에는 포격 충격으로 부상. 1915년 9월 7일, 1918년 4월 30일 샴페인 방어 전투에서 두 번 부상, 타간로크 근처 포크로브스코예 마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디를레방어는 장애를 앓기도 했다. 출처 Klausch H.-P. Antifaschisten in SS-Uniform. Schicksal und Widerstand der deutschen politischen KZ-Häftlinge, Zuchthaus- und Wehrmachtgefangenen in der SS-Sonderformation Dirlewanger / Herausgegeben vom Dokumentations- und In­formationszentrum Emslandlager. Bd. 6. Bremen: Edition Temmen, [10] 이러한 부상으로 인해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뿐이다. [11] 그것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다. [12] 베르거와 디를레방어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함께 복무했다. [13] 당시 회원 번호 1.098.716 [14] 처음에는 대대로 지정되었다가 나중에 연대와 여단으로 확장되었고, 결국에는 사단으로 확장되었다. [15] 아동성범죄자, 강간범들도 포함됐다. [16] 디를레방어의 병사들 중 단지 10에서 15 퍼센트만이 보호관찰 중인 무장친위대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 [17] 이들은 훈련되지 않은 병력과 밑도 끝도 없는 전술로 대량의 아군 사격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한 전투에서, 디를레방어는 앞서 언급한 이유로 말 그대로 그의 거의 모든 병사들을 잃었다. [18] 하지만 전쟁에서 살아남은 디를레방어 부대의 군인들은 총 약 700명으로 추정된다. [19] 같은 추축국인 일본이 난징 대학살에서 저지른 만행인 삼광 작전을 생각나게 한다. [20] 다른 독일군들, 특히 무장친위대는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하들을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위험한 디를레방어를 전쟁터에서 몰아내고 잔학행위로 기소하기 위해 몇 번의 시도를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베르거는 항상 불평을 참견하고 진압했다. [21] 여기서의 '인종적 모욕'은 인종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과 성관계를 가진 것을 말한다. 당시 법으로 독일인은 유대인과 성관계를 맺으면 안되었다. [22] 독성이 매우 강했는데, 조류나 설치류 같은 작은 척추동물을 죽이기 위해 만든 살충제였다. [23] 디를레방어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유대인 여성들을 자르고, 말고기와 함께 끓여 비누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하다. # [24] 이 사람도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전범이다. 그런 인간이 경악한 것이다. [25] 영화 < 컴 앤 씨>에도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26] 현재의 피우수트스키 광장 [27] 쉽게 말해 불타(태워) 죽는 것을 의미한다. [28] 저 위의 사진에 있는 화염방사기를 민간인들에게 사용해서 분살(焚殺)했다는 이야기다. [29] 이 사건으로 디를레방어의 미친 부하들도 그를 도살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학살로 인해 혈액과 뇌수가 계단을 따라 흘러내렸다고 한다. # [30] 물론 "드디어 이 더럽고 사악한 도시를 지구상에서 아주 없애 버릴 기회가 왔다. 전투원이건 비전투원이건 상관없다. 바르샤바에서 눈에 띄는 폴란드인은 다 죽여라"고 하인리히 힘러가 지시하기는 했다. [31] 작전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가 주도했지만, 이 학살의 주요 가해자는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이었다. [32] 약탈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힘러에게 바쳐야 할 몫까지 자기가 착복하고 있었다. 또한 카민스키의 만행은 일부 무장친위대원들까지 경악할 정도였고, 보다 못한 헤르만 페겔라인이 히틀러에게 직언한 결과 통한 것이다. [33] 당시 나치 독일은 학살이나 강간을 종용하거나 묵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나치 독일마저 군기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했으니 이 미친 놈이 얼마나 개막장인지 알 수 있다. [34] 디를레방어와 그의 부대가 바르샤바 봉기에서 저지른 악행을 본 하인츠 구데리안이 히틀러에게 이들의 문제를 보고했는데, 옆에 있던 페겔라인이 한 대답이다. 같은 나치들, 그것도 슈츠슈타펠 내부 인물에게서도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이다. 솔직히 슈츠슈타펠이 이런 반응을 보일 자격이 되는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35] 최소 100,0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디를레방어 부대의 잔악무도하고 비인간적인 행동때문에 피해를 봤다. 피해 내용은 살인과 강간, 재산 갈취, 무자비한 고문 등 다양하다. [36] Bandenbekämpfung라고 부른다. [37] 독일 국방군의 상이훈장 [38] 나치당에 10년 근속했다고 받은 메달이다. [39] 바르샤바 봉기를 진압했다고 받은 훈장. [40] 1944 가을 슬로바키아 공화국 영토에서 봉기를 진압한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받은 훈장 [41] 1944년 8월, 카민스키의 상관이었던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는 여성 및 어린이에 대한 학살을 중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이들에게 자비를 줄 목적이 아니라 프루슈쿠프(Pruszków)에 소재한 수용소로 이송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카민스키 여단은 이 명령을 씹고 이송되어야 할 대상자들에게 학살을 지속했던 것이다. 허나 카민스키는 자신의 부대를 전혀 통제할 수도, 아니 통제할 의지 자체가 없었고, 결국 카민스키는 무장친위대에게 폴란드 우치(당시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보병대장까지 오른 인물이자 전후 나치당원이었던 카를 리츠만의 이름을 따서 리츠만슈타트라고 불렀다.)에서 살해당했다. 살해 명령을 내린 것은 바흐-첼레프스키라고 추정된다. 참고로 바흐-첼레프스키는 상술했듯이 카민스키의 상관이었으나, 카민스키는 본인과 휘하 부하들이 힘러의 직접 지휘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바흐를 계속 무시했으며, 결국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부하인 카민스키를 죽이고 바르샤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카민스키처럼 폴란드계이다. 다만 둘은 각각 폴란드계 러시아인(카민스키는 부계가 폴란드인이고 모계가 독일인이였으나 당시 러시아 제국령의 현 벨라루스 지역에서 태어나서 자란지라 자신을 러시아계로 여겼다.), 첼레프스키는 폴란드계 독일인(첼레프스키는 모계가 폴란드인이고 부계가 독일 제국 동부 쪽 출신의 카슈브인 혈통인데 독일의 카슈브인들들은 수백년간 진행된 동방식민운동 및 3국 폴란드 분할의 영향으로 슬라브계 정체성이 없어졌다.)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 서로 같은 폴란드계로 느끼지도 않았다. [42] 하지만 디를레방어는 친위대 시절 내내 자기 친구이자 무장친위대 장성인 베르거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의 영향도 컸다. 여담으로 디를레방어에 대한 비난과 카민스키의 처형을 상부에 건의한 이가 바로 영화 <몰락>의 등장인물이자 밈으로 유명한 헤르만 페겔라인 무장친위대 중장이다. 참고로 이자는 양심이 있는 선인이 아니라 다른 국방군의 군인들이나 친위대원들처럼 독소전쟁 초기인 1941년에 벨라루스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전범이다. 게다가 페겔라인은 일선 부대 지휘관직에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잔혹 행위를 여러 차례 저질러서 문제를 일으켰다.(다만 그를 총애하던 힘러가 비호해 주는 바람에 이런 문제들로 문책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승진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국방군 장성들, 심지어는 무장친위대 내의 다른 장군들에게도 평가가 좋지 않았다. 이는 영화 <몰락>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그(그리고 페겔라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국방군과 친위대 장성들 모두)조차 경악해서 디를레방어에 대한 비난을 히틀러 면전에서 말할 정도면 얼마나 이 놈이 답이 없는지 잘 알수 있다. [43] 오히려 디를레방어는 동기 자체만 보면 카민스키보다 악질인데, 카민스키는 소련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가 된 무리한 집단농장화와 그걸 지시한 이오시프 스탈린을 비난하다가 잡혀서 정치범이 된 상태로 고역을 겪다가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에게 해방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한 증오는 3자 입장에서도 납득이 갈 만했고, 무엇보다 수감 전까지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44] 작중 소련은 스탈린 대신 부하린이 집권해 나치 독일에게 손쉽게 격파 당하고 붕괴해 수많은 군벌들로 쪼개졌으며, 디를레방어 여단은 소련 잔당 군벌인 서러시아 혁명전선과의 전쟁 도중 힘러의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계획이 새서 힘러가 조기 체포 당하자 우랄 동쪽으로 도망쳤다. [예시1] 파일:1624546856891.jpg [예시2] 파일:1__i2rglfRoQyX7TmEcPGBbg.jpg [47] 미국 최대의 유대인 단체 [48] 해당 그림은 그중에서도 게임 TNO의 디를레방어를 묘사한 것이다. [49] 게임 내에서의 디를레방어 여단의 설정이 상당히 나쁜 탓도 있다. 게임 내에서 디를레방어 여단은 플레이 설정이 낮고 무기개발도 느린데다 툭하면 몰살당하거나 리더가 죽어 게임오버가 되는 개복치인데 우랄 지역 통일을 완수하여도 나중에 디를레방어가 죽으면서 조직에 분열이 생겨 해당 점령지역이 무정부지대가 된다. 제작자들도 디를레방어를 극히 싫어하여 일부러 플레이를 힘들게 하고 유독 비현실적인 사망 이벤트를 다수 집어넣었으며 게임 내 다른 세력들도(독일 내전 이후 대게르만국의 모든 지도자들도 포함된다.) 디를레방어를 사람 취급도 안 한다. 직접적인 언급대신 우랄의 역병, 강간왕, 도적왕이라는 이명으로 더 자주 불릴 정도. 군벌 협력도 리셴코의 검은산 군벌이나(이것도 일시적인 것이며 사망 이벤트에서 둘 중 하나가 통수쳐서 결과적으로 디를레방어가 죽는다.) 독일 사대주의를 추종하는 아리아인 형제단의 바그너 루트로만 플레이해야 가능할 정도이다. [50] 이들은 디를레방어가 직접 쓴 희귀한 논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51] 특히 바르샤바 봉기. [52] 단, 디를레방어는 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친위대 상급대령에서 커리어가 끝났다. 그 이유는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구성원의 질이 창설 초기부터 영 좋지 않았는 데다가 전쟁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친위대 내에서도 정말로 노답인 병사와 장교들만 모였고, 실제로도 전투만 치렀다 하면 부대 손실률만 미친 듯이 높은 노답 행보를 보여주였기 때문. 따라서 친위대 상부에서도 이 부대를 정말 싫어해서 정말로 자기들 휘하 부대로 인정하기는 커넝 편제상 이리 짜졌기 때문에 억지로 데리고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게다가 전쟁 초반부에나 상급대령이 국방군의 소장급(서방 군대의 준장급) 취급을 받았지, 디를레방어가 사단장이 된 시기이도 한 후반부에는 대령급으로 격하되었으나, 그래도 사단장이었던지라 순수 영관으로 둘 수는 없었으니 장성 계급에 가까웠던 상급대령을 던져준 것. 애당초 상급지도자 계급도 자세히 보면 'der Reserve'란 말이 달려있는데, 이거 우리나라 말론 예비역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상급대령도 원래 상황에서는 달아주기도 싫은데, 전쟁 말기에 상황도 개판이니 진급이라도 시켜준다는 의미였다. [53] 반면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한 단계 낮은 여단인데도 불구하고 소장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학우인 콘스탄틴 보스코보이니크(Konstantin Voskoboinik)와 함께 독소전쟁 초장기부터 독일에 부역한 데다가 자기 친구가 암살된 1942년에는 로코트 자치국의 두 번째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 국민해방군(러시아어 : Русская освободительная народная армия, РОНА)이라는 일종의 자경단이자 민병대의 대장이 되어 1943년까지 자기가 지배하는 구역에서 아무런 도움 없이 파르티잔을 거의 몰아내어 독일군을 도왔던 공적이 있었고, 나중에 독일로 후퇴한 44년 이후에도 친위내 상부는 그것을 잊지 않고 그에게 소장 계급과 1급 철십자 훈장을 주었기 때문이다. [54] 디를레방어는 (나중에야 그렇게 되지만) 사단을, 카민스키는 여단을 지휘했고, 거기서 친위대 커리어가 끝난 반면 상술한 바흐는 이들이 각각 순수 영관급과 조잡한 민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당시에는 이미 집단지도자(독일 국방군의 중장에 대응되는 계급이며, 한국군 기준으로는 소장에 해당한다.)였던데다가 이미 독소전쟁 초반 시점부터 파르티잔 토벌 총책임자 등을 맡았기 때문에 절대로 같은 급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