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에두아르트 크렙스바흐
Eduard Krebsb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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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8월 8일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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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7년 5월 28일 (향년 52세)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란츠베르크 암 레히 란즈베르크 교도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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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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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슈츠슈타펠 (1939 ~ 1945년) |
최종 계급 | 중령 (Obersturmbannführ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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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의사.2. 생애
본에서 태어난 크렙스바흐는 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병원을 개업해 의사로 살다가 1937년에 친위대에 입대하여 1939년에 무장친위대(waffen-SS)에 재입대했다. 그는1942년에 친위대 소령으로 승진했다.1941년에 마우트하우젠의 강제수용소에 부임한 크렙스바흐는 수용소에서 모든 의사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크렙스바흐는 장애자 및 병자 수용인을 대상으로 실험명목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약 900명에 달하는 체코인, 러시아인,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벤젠을 주사받아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크룹스바하는 수용인들로부터 닥터 스프리츠바하 (주사선생)이란 악명을 얻기도 했다.
마우트하우젠의 병원 지하에 가스실을 설치하는 것도 크렙스바흐가 관리했는데 주사실험 외에도 그는 여러 건의 인체실험을 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 크렙스바흐는 수용인원들을 <진찰>과 <선별>의 두 분류로 나눈 후 죽일 대상을 선별하고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크렙스바흐는 진찰대상자인 유대인 수형자를 발로 밟고는 <더러운 유대인 돼지>라는 폭언을 일삼았는데 그에게 밟힌 수형인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간수들에게 끌려나갔는데 크렙스바흐는 이를 보고 즐겼다고 한다.
1943년 가을에 라트비아의 카이저발트 강제수용소로 전근한 크렙스바흐는 수용소가 폐쇄된 1944년 8월까지 이 <선별>의 작업에 종사했다. 그 후 1944년 후반부터 육군 군의관으로 근무한 크렙스바흐는 종군도중 부상을 입고는 군을 떠나 카셀의 방직공장에서 의사로 일했다.
독일의 패전 후 전범으로 미군에게 체포되어 군사법정에 세워진 크렙스바흐는 인도주의에 반한 죄와 대량살인의 혐의를 인정받아 1946년 5월 13일에 사형이 선고되어 1947년 5월 28일에 란츠베르크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