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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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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총독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법무국장
한스 프랑크
Hans Frank
파일:한스 프랑크1.jpg
본명 한스 미하엘 프랑크
Hans Michael Frank
출생 1900년 5월 23일
사망 1946년 10월 16일 (향년 46세)
정당
IQ 130 ( 웩슬러 벨뷰 지능검사)
직책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법무국장
돌격대 상급집단지도자
폴란드 총독(1939. 10. 26. ~ 1945. 1.)
변호사(1923. 7. 21. ~ 1946. 10.)
최종계급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국가지휘자(Reichsleiter)
돌격대 상급집단지도자
서명
파일:한스 프랑크 서명.svg

1. 개요2. 생애3. 폴란드 총독 시절4. 최후5.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한스 프랑크2.jpg
2차세계대전 시절 나치 독일에서 폴란드 총독을 지낸 정치인, 변호사, 슈투름압타일룽 대장.

한스 프랑크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DAP) 시절부터 초기 멤버였고, 히틀러의 선동으로 발생한 맥주홀 폭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출옥한 후 집권하기까지 히틀러의 최측근으로서 히틀러 개인 및 나치당 운영 전반에 관한 법률적 자문을 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에는 나치당의 제국 지도자가 되었고, 1934년에는 히틀러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는 폴란드 점령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의 도시였던 카를스루에에서 중류 가톨릭 가정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9월에 돌격대에 입대하여 같은 해 11월의 뮌헨 폭동에도 참가했다. 폭동의 실패로 아돌프 히틀러가 체포되는 와중에도 체포를 피한 프랑크는 후에 뮌헨 재판소에서 열린 히틀러의 재판에서 그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1924년 킬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법률사무소 일을 도왔는데, 1925년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체포되면서 변호사 자격을 상실했다.[1] 192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프랑크는 뮌헨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25년 가난한 공장 노동자의 딸이며 바이에른 주 의회에서 타자수로 일하던 여성 브리기테 헤르브스트(Brigitte Herbst, 1895~1959)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프랑크보다 5살 연상이어서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프랑크는 헤르브스트와의 만남을 “내 인생에서 가장 과분한 일”이라 칭했다. 프랑크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지만 사실 프랑크는 이 때 여러 명의 정부를 두고 있었다.

1926년 나치당에 입당한 프랑크는 아버지가 나치당을 싫어했기 때문에 일시 탈당했지만 나치당원의 변호활동을 위해 1928년에 복당하여 나치당의 전속 변호사가 되었다. 1929년에 당 법무국장으로 취임한 그는 1930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치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시 30세의 최연소 의원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프랑크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1930년에 히틀러의 자택에 초대되어 히틀러로부터 세간의 히틀러 가문의 유대인 의혹을 비밀리에 조사해달라고 부탁받았다. 프랑크는 “히틀러는 유대인이 아니며 진짜 아버지를 가릴 수 없기에 유대인의 피가 흐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라고 당시 술회했다. 하지만 오늘날 연구에서 히틀러의 아버지가 유대계란 사실은 부정되고 있다.

3. 폴란드 총독 시절

파일:프랑크와 베커.jpg
한스 프랑크 총독과 헤르베르트 베커[2] 장군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프랑크는 중위로서 독일 육군에 입대했다. 폴란드가 점령된 후 1939년 10월 10일에 히틀러는 프랑크를 폴란드 총독으로 임명했다. 전후의 폴란드는 동부를 소련이 지배하고 중앙 및 서부를 독일이 지배했다. 이 중 서부는 독일에 병합되어 중앙부만 폴란드 총독부령이 되었다. 총독부령은 폴란드의 약 40%에 해당했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이었지만 권한 일부는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친위대가 가진 게슈타포와 강제 수용소 등의 탄압적인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프랑크는 크라쿠프의 바벨 성에서 폴란드 총독부령을 통치했다. 그러나 프랑크는 폴란드를 야만의 땅이라 부르면서 경멸했다. 폴란드는 그저 노동력을 제공하는 땅일 뿐이라는 뜻이었고, 그런 노예들에게 토지와 미술품은 필요없다면서 많은 폴란드 지식인들이 나치 친위대에 의해 살해되고 보물들은 프랑크의 성으로 이동하여 사유재산이 되었다.

총독부령 내의 유대인을 게토로 수용하고 친위대에 의한 절멸수용소 이송을 허락한 프랑크는 1941년 12월 16일 연설에서 “유대인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무가치한 존재다. 그들은 분명히 박멸해야 할 존재이며 그렇게 해야만 제국 전체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350만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총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제국이 검토 중인 대대적인 방법을 조합한다면 녀석들을 말살할 수 있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라는 견해를 밝혔다. 게다가 프랑크 자신은 날이면 날마다 연회를 신나게 열고 즐겼다. 그의 통치는 완전한 전제군주와 같아서 나치당의 회계사인 프란츠 슈바르츠는 폴란드를 '프랑크의 왕국'이라 불렀다.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프랑크는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군림한다" 라고 비유했을 정도였다.

프랑크는 자신이 히틀러로부터 임명되고 폴란드가 자신의 사유지란 점, 누구도 히틀러 외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친위대는 프랑크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다. 결국 힘러와 갈등이 생겼고 힘러는 프랑크와 그의 아내가 저지른 불법 행위들을 파악하여 이를 빌미로 협박을 했다. 원래 권력투쟁에 약했던 프랑크는 신경쇠약 일보직전까지 몰렸으며, 그의 아내는 지친 나머지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프랑크는 아내가 간 곳에까지 약탈한 미술품들과 약탈품을 보냈다. 프랑크는 폴란드 총독 자리를 사임하려고 하여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이던 빌헬름 카이텔 원수에게 자신을 병역 대상자로 넣어달라고 탄원하기도 했다. 카이텔은 히틀러에게 이를 말했지만 히틀러가 거부하여 뜻을 이루진 못했다.

1942년 6월에 독일로 돌아온 프랑크는 독일 법률학회에서 힘러에게 배신감을 느껴서인지 게슈타포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고. 이에 놀란 히틀러는 프랑크를 소환하였고 프랑크가 폴란드 이외의 지역에서 연설하는 것을 금지시키며 폴란드에서의 연설도 당의 방침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프랑크는 나치당의 법무부장 및 법률학회 회장, 국가 판무관 자리를 내놓아야 했지만 폴란드 총독 자리는 유지했다.

그 후, 프랑크는 힘러에게 힘을 빼앗기고 친위대가 유대인에 대한 이송을 관할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프랑크는 자포자기했는지 전황이 악화되어 감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정치에는 손을 떼고 취미인 피아노 연주와 소설에 매달리며 현실도피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1945년 1월에 폴란드를 압박해오자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루벤스 등의 미술 작품을 가지고 전용열차로 탈출했다.

4. 최후

1945년 5월 4일 바이에른에서 미 육군에 의해 붙잡혀 미즈바하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통과하던 중 그가 '크라쿠프의 학살자'라는 것을 알게 된 미 육군 보병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Running the gauntlet[3]이라는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4]. 5월 6일 감옥에서 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옥중에서 가톨릭 신앙에 심취하였고 잘못을 뉘우쳤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면서 “ 히틀러 독일 제국이 저지른 죄가 여기 적혀있다” 라며 폴란드 총독 재임시의 일기를 법정에 제공하였다. 자신은 무력했으며 히틀러와 힘러에 휘둘렸다고 항변했지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문화재를 약탈한 전범이었다. 1946년 10월 1일 “폴란드에서의 유대인 학살과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라는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형수와는 다르게 사형 선고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탄원서도 쓰지 않았다. 옥중에서 회고록 ‘죽음과 직면하여’를 집필하고 있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0월 16일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교수대에 선 프랑크는 “투옥 중 나에게 호의를 베푼 모두에게 감사한다. 신이시여. 제발 나를 자비로 맞아주소서.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소련의 요구대로 추가적인 고통을 받으며 질식사했다.

5. 기타

1987년 막내아들 니클라스가 오랜 조사와 회상에 근거한 부친의 생애를 담은 평론집 《아버지》를 출판했다. 이 책에는 부친이 폴란드에서 행했던 범죄행위가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극렬 나치주의자였으며 실제로는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다만 니클라스는 해당 발언에 대해 비판을 받았는데 아무리 극악무도한 전범이라고 할지라도 본인에게는 부친인데 그러면 안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2000년 TV 영화인 뉘른베르크에선 캐나다 배우 프랑크 무어가 분했다. 자신에 대한 변호를 포기하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친 것으로 묘사가 되는데 이 때문에 영국과 미국 재판관들은 감형을 제안하지만 소련 측에서 강경하게 사형을 주장하여 교수대로 끌려간다.


[1] 후에 1928년에 복권되었다. [2]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으로 크라쿠프의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를 지냈다. [3] 피해자가 두 줄로 나뉘어 선 가해자들 가운데를 달려가면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방식이다. [4] 집단 폭행 기록이 남아 있는 다른 3명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인 루돌프 회스와 의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카를 게브하르트 카를 브란트. 영국 정보부에 체포되었을 당시 하도 채찍질을 당한 나머지 회스 본인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것은 이전에 가본 곳과 비교할 때 마치 온천에 머무는 것과 같았습니다.'고까지 말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카를 게브하르트 & 카를 브란트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이후 사형 집행 전날까지 얼굴을 제외하고 동료 수감자와 연합군 헌병( 군사경찰)들에게 얻어터진다음 ( 파울 하우서 문서의 종전 부분 참조.) 교수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