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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23:57

페르난도 리에라

페르난도 리에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1대, 28대
클럽
파일:SL 벤피카 로고.svg

19대, 23대
파일:RCD 에스파뇰 로고.svg

37대
파일:FC 포르투 로고.svg

49대
파일: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로고.svg

40대
파일:스포르팅 CP 로고.svg

51대
}}} ||
칠레의 前 축구감독
파일:Fernando Riera.jp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페르난도 리에라
Fernando Riera
본명 페르난도 호세 리에라 바우사
Fernando José Riera Bauzá
출생 1920년 6월 27일
산티아고 데 칠레
사망 2010년 9월 23일 (향년 90세)
산티아고 데 칠레
국적
[[칠레|]][[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
축구 감독
신체조건 171cm | 66kg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우니온 에스파뇰라 (1937~1938)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39~1950)
스타드 드 랭스 (1950~1951)
FC 루앙 (1952)
클루브 데포르티보 바스코 (1953)
FC 루앙 (1953~1954)
감독 CF 우스 벨레넨스스 (1954~1957)
칠레 대표팀 (1957~1962)
SL 벤피카 (1962~1963)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63~1966)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66)
SL 벤피카 (1966~1967)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68)
RCD 에스파뇰 (1969~1970)
칠레 대표팀 (1970~1971)
CA 보카 주니어스 (1971-1972)
FC 포르투 (1972~1973)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73)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74)
스포르팅 CP (1974~1975)
CF 몬테레이 (1975~1976)
CD 팔레스티노 (1977)
CF 몬테레이 (1977~1978)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1978~1982)
에베르톤 데 비냐 델 마르 (1983~1984)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1985~1988)
CF 몬테레이 (1988~1989)
국가대표 17경기 4골 ( 칠레 / 1942~1950)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2.4. 이후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3.2. 감독
4. 어록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5.2.1. 클럽5.2.2. 국가대표

[clearfix]

1. 개요

칠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리에라는 멜초르 리에라(Melchor Riera)와 후아나 바우사(Juana Bauzá)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3년부터 우니온 에스파뇰라의 유스팀에 속했던 리에라는 1937년부터 우니온의 1군 경기에서 뛸 수 있었다. 1939년,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로 이적한 리에라는 팀의 주장을 맡으면서 1949년 카톨리카의 칠레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50년 월드컵을 마친 리에라는 프랑스 스타드 드 랭스, FC 루앙에서 커리어의 막바지를 보냈다.

2.2.2. 국가대표

리에라는 칠레 대표팀에서 한 번의 FIFA 월드컵( 1950)과 세 번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1942, 1947, 1949)에 참가했다.

칠레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큰 재미를 못봤다. 하지만 1950년 월드컵 칠레의 마지막 조별 예선 경기에서는 잉글랜드를 이겼던 도깨비팀 미국을 5대2로 꺾으며 1승을 거뒀다.

2.3. 감독

리에라는 1954년, 선수 은퇴 직후 포르투갈의 CF 우스 벨레넨스스의 감독을 맡으며 감독 커리어의 첫발을 내디뎠다. 첫 시즌에 우스 벨레넨스스를 프리메이라 디비장 준우승으로 이끌며 지도력을 인정받은 리에라는 1957년, 칠레 대표팀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대표팀 감독 재임 당시 리에라는 스포츠 센터 건립을 요청했고 1961년에 지금도 칠레 대표팀이 사용하고 있는 후안 핀토 두란[2] 스포츠 센터 건립을 확정지었다.
단지 5년간 대표팀을 훈련시키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저는 유럽식으로 매우 흥미로운 많은 일들을 하도록 고용된 사람이죠. 대표팀의 준비는 물론, 분위기 조성, 기반 개편, 선수 특성에 맞는 스타일 도입 등도 준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정 선수들이나 자신만을 위해서 일해선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칠레 축구의 기반을 구성하는 모든 광범위한 작업에 관심을 가질 생각입니다. 합의와 통일된 집단의식을 바탕으로 같은 생각 아래에서 칠레 축구를 위해 일할 의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칠레 축구가 큰 책임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페르난도 리에라. 후안 핀토 두란 스포츠 센터 기공식에서.

이 지원은 성공을 거둬 1962년 월드컵에서 칠레는 3위의 성적운 거뒀다. 현재까지 이는 역대 칠레 대표팀의 FIFA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남아있으며 월드컵을 마친 리에라는 칠레 대표팀과 아름다운 이별 후에 SL 벤피카의 감독직을 받아들였다.

유러피언컵 1961-62 시즌 우승팀 벤피카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같은 시즌 남아메리카 챔피언이던 산투스 FC와 맞붙었다. 하지만 벤피카는 펠레 해트 트릭을 내주는 등 2경기에서 산투스에 모두 패했다. 유러피언컵 1962-63 시즌에도 벤피카는 결승까지 진출해서 2연패를 노렸지만 이번에는 AC 밀란에 덜미를 잡히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국 리에라는 벤피카와의 동행을 끝내고 친정팀 카톨리카의 감독이 되었다.

1963년 10월 24일, 축구 100주년 기념 경기에서 리에라는 잉글랜드와 맞붙을 세계 올스타팀을 지휘했다. 멤버들로는 레프 야신, 자우마 산투스,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요제프 마소푸스트, 데니스 로, 레몽 코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우제비우, 프란시스코 헨토 등이 있었고 후보로도 밀루틴 소스키치, 짐 백스터, 페렌츠 푸스카스, 우베 젤러가 있었다. 경기는 잉글랜드가 2대1로 이겼다.

그는 긴 감독 커리어동안 여러 팀을 맡았고 CF 몬테레이에서는 에우제비우와 벤피카 이후 재회하기도 했다. 클루브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에서 재직할 때 리에라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진출 등 좋은 성과를 냈지만 해고되었다. 리에라는 1989년, 몬테레이에서 35년간의 감독 커리어를 끝냈다.

2.4. 이후

리에라는 2010년, 9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리에라는 칠레의 언론인 루이스 우루티아(Luis Urrutia)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선수 생활을 회고한 적이 있다.
저는 그 당시 선수들 중에 꽤 좋은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었죠. 테니스공을 나무 벽에 튕기면서 컨트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어요. 저는 양발을 다 쓸 줄 알았지만 스쿼드에 들어갈 용기는 없었어요. 그 때 멜초르가 용기를 줬어요. "넌 언제든 자리를 갖게 될 거야."라고요. 저는 오른발잡이에 가깝지만 11번을 달고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뛰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저를 왼발잡이라고 생각했었죠. 올림픽까지 포함한다면 대표팀에서 11골은 넣은 것 같은데.. 제가 넣은 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쪽 지역에서 왼발로 득점한 거예요. 그리고 제가 코너킥을 차러 갔을 때 경기장이 극도의 침묵에 빠졌어요. 저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코너킥 차는 것을 포기했어요.
페르난도 리에라

3.2. 감독

리에라는 칠레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자 대부로 평가받는다. 그의 업적은 칠레 FIFA 월드컵 역사상 최고 성적인 1962년 자국 대회 3위와 SL 벤피카 유러피언컵 1962-63 시즌 준우승으로 대표된다.

리에라의 감독 스타일은 규율과 프로 의식을 기반으로 공을 오래 소유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때문에 친정팀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재임 시절에는 짧은 패스로 측면 또는 뒤로 공을 빼며 헤더 경쟁을 많이 시키지 않는다 일명 풀비토(fulbito) 스타일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기도 했다.[3] 또한 그는 칠판을 통한 전술 지도보다 현장에서의 연습과 게임 자체에 더 중점을 뒀고 외국인 선수를 그다지 선호하진 않았다고 한다. 리에라의 긴 감독 재임기간에 걸맞게 그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 최고의 유산은 아르투로 살라 마누엘 페예그리니이다.
리에라의 가장 큰 유산은 그가 전문적인 감각과 책임감, 품격을 갖고 훈련과 활동에 접근한 방식이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절차, 라이벌, 집단적 감각, 팀을 존중하고 선수와 코치, 활동 및 축구의 수비이다.
아르투로 살라
그는 혁신가였다. 팀에는 택시 운전사나 은행원 등 투잡을 뛰는 선수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금지했다. 그는 벤피카에서 돌아온 후 우리가 축구에만 헌신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심지어 임대료까지 정했다. 그것이 프로가 되기 시작한 방법이다. 그 전의 우리는 모두 세미 아마추어였다.
호르헤 설리반
그는 4-3-3이 된 4-2-4를 사용했다. 항상 후방에 4인 라인이 있었고 공간에는 3인 라인이 없었다. 한 명의 포워드도 없고 윙어, 미드필더는 더더욱 없었다.
공을 사랑해야 하고 학대할 필요는 없다고 항상 강조했었다.
우리가 펠레를 상대로 경기를 했을 때 리에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펠레를 마크해야 하지만 걷어찰 필요는 없다. 가격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좋은 축구만이 있었다.
이그나치오 프리에토
리에라는 훌륭한 코치는 아니었지만 가장 위대한 코치였다.
마누엘 펠레그리니
리에라는 폭력적인 변화를 만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놀라운 것을 요구했다. 최대한 엄격하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했다. 심지어 스타킹을 어떻게 입어야하는지까지도. 나중에 진정한 칠레 프로 축구가 된 씨앗이었다.
호세 술란테이
리에라의 규율은 엄격했지만 최고이자 가장 성공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축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시대를 앞서갔으며 오늘날 재평가 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그는 많은 존경심을 받았지만 매우 친절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잘 해주었다.
엘리아스 피게로아

4. 어록

훌륭한 팀은 뒤에서 앞으로 구성된다.
피아노가 필요하고 메르세데스-벤츠를 구입하더라도 피아노는 여전히 필요하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2. 감독

5.2.1. 클럽

5.2.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2] Juan Pinto Durán. 칠레의 변호사로 1962년 월드컵의 칠레의 조직위원 중 한 명이다. 그는 칠레의 월드컵 개최는 확정시켰지만 안타깝게도 1957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조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직접 볼 수 없었다. [3] 이는 카톨리카가 리에라의 후임으로 리에라와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판서스(Panzers) 전술을 선호하던 호세 페레스 피게이라스를 감독으로 임명한 것에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