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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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 ||||||
GBE | |||||||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
리들리 스콧(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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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E | |||||||
프레더릭 벤팅 (1934) |
에드먼드 힐러리 (1953) |
게오르그 솔티 (1971) |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
찰리 채플린 (1975) |
앨프리드 히치콕 (1980) |
밥 호프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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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일스 (2000) |
로저 무어 (2003) |
팀 버너스리 (2004) |
조너선 아이브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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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ight Bachelor | |||||||
아이작 뉴턴 (1705) |
찰스 라이엘 (1848) |
찰스 휘트스톤 (1868) |
조지프 리스터 (1883) |
아서 코난 도일 (1902) |
W. S. 길버트 (1907) |
프랜시스 골턴 (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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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퍼드 매킨더 (1920) |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
오언 리처드슨 (1939) |
알렉산더 플레밍 (1944) |
랠프 리처드슨 (1947) |
로런스 올리비에 (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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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길구드 (1953) |
칼 포퍼 (1965) |
알프 램지 (1967) |
쉬리다스 람팔 (1970) |
제임스 블랙 (1981) |
마이클 아티야 (1983) |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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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 해리슨 (1989) |
V. S. 나이폴 (1990) |
더크 보가드 (1992) |
로저 펜로즈 (1994) |
팀 라이스 (1994) |
캐머런 매킨토시 (1996) |
마이클 스타우트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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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너스 (1999) |
리처드 브랜슨 (2000) |
숀 코너리 (2000) |
톰 커트니 (2001) |
믹 재거 (2002) |
벤 킹슬리 (2002) |
리들리 스콧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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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색스 (2005) |
헨리 세실 (2011) |
케네스 브래너 (2012) |
안드레 가임 (2012) |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
패트릭 헤드 (2015) |
마크 라일랜스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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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
톰 무어 (2020) |
마이클 호턴 (2021) |
마틴 에이미스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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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E + Knight Bachelor | |||||||
데이비드 린 (1953) |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
알렉 기네스 (1959) |
스탠리 매튜스 (1965) |
맷 버스비 (1968) |
알렉 이시고니스 (1969) |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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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애튼버러 (1976) |
존 밀스 (1976) |
월터 윈터보텀 (1978) |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
윌리엄 골딩 (1988) |
피터 유스티노프 (1990) |
이안 맥켈런 (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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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홉킨스 (1993) |
데릭 제이코비 (1994) |
바비 찰튼 (1994) |
사이먼 래틀 (1994) |
조지 마틴 (1996) |
마이클 갬본 (1998) |
아서 C. 클라크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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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 (1998) |
이안 홈 (1998) |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
톰 피니 (1998) |
나이젤 호손 (1999) |
알렉스 퍼거슨 (1999) |
프랭크 윌리엄스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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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케인 (2000) |
폴 스미스 (2000) |
바비 롭슨 (2002) |
앨런 파커 (2002) |
앨런 베이츠 (2003) |
그레고리 윈터 (2004) |
트레버 브루킹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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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다이슨 (2007) |
크리스토퍼 리 (2009) |
브래들리 위긴스 (2013) |
존 허트 (2015) |
칼 젠킨스 (2015) |
로드 스튜어트 (2016) |
레이 데이비스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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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코놀리 (2017) |
배리 깁 (2018) |
마이클 페일린 (2019) |
데이비드 수셰이 (2020) |
샘 멘데스 (2020) |
스티브 맥퀸 (2020) |
로저 디킨스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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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프라이스 (2021) |
존 부어만 (2022) |
브라이언 메이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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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E + Knight Bachelor | |||||||
어니스트 섀클턴 (1909) |
윌리엄 브래그 (1941) |
리처드 돌 (1971) |
잭 브라밤 (1978) |
지미 새빌 (1990) |
클리프 리처드 (1995) |
트레버 맥도날드 (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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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모스 (2000) |
재키 스튜어트 (2001) |
톰 존스 (2006) |
테리 프래쳇 (2009) |
패트릭 스튜어트 (2010) |
밴 모리슨 (2015) |
앤디 머리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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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2018) |
마이클 모퍼고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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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E + Knight Bachelor | |||||||
폴 매카트니 (1997) |
제프 허스트 (1998) |
나이젤 쇼트 (1999) |
니콜라스 윈턴 (2003) |
닉 팔도 (2009) |
링고 스타 (2018) |
케니 달글리시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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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해밀턴 (2021) |
바비 찰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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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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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로 (1964~1968) |
▶ |
바비 찰튼 (1968~1973) |
▶ |
조지 그레이엄 (1973~1974) |
바비 찰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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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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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Ballond'or | ||
수상 플로리안 알베르트 |
2위 바비 찰튼 |
3위 지미 존스톤 |
1968 Ballond'or | ||
수상 조지 베스트 |
2위 바비 찰튼 |
3위 드라간 자이치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바비 찰튼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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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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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 이름 |
바비 찰튼 경 Sir[1] Bobby Charlt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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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버트 찰튼[2] Robert Charlton |
||||
출생 | 1937년 10월 11일 | ||||
잉글랜드 애싱턴 | |||||
사망 | 2023년 10월 21일 (향년 86세) | ||||
잉글랜드 매클스필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173cm | ||||
직업 |
축구 선수 (
미드필더[3],
공격수[4],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소속 |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3~1956 / 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6~1973)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74~1975) 워터포드 유나이티드 FC (1976) 뱅고어 시티 FC (1978) 커즌 애시턴 FC (1978) 뉴캐슬 KB 유나이티드 FC (1978) 퍼스 아주리 FC (1980) 블랙타운 시티 FC (1980) |
|||
감독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1973~1975) 위건 애슬레틱 FC (1983 / 감독 대행) |
||||
기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4~2023 / 기술 이사) | ||||
국가대표 | 106경기 49골[5] ( 잉글랜드 / 1958~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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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등번호 |
잉글랜드 대표팀 - 9, 11, 2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7, 8, 9, 10, 11, 12 |
|||
가족 |
형
잭 찰튼 외당숙 재키 밀번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으며 은퇴 후에는 1984년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기술 이사를 맡았다.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을 이끈 선수로 ' 버스비의 아이들'의 일원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뮌헨 비행기 참사를 겪은 후 1967-68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하기까지 팀의 핵심으로 활약하며 맨유의 초창기 역사를 써내려갔다. 1960년대 중반부터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와 함께 맨유의 공격 트리오를 구축했으며 세 명 모두가 발롱도르 위너인 이 조합은 'The United Trinity'라고 불렸다.
2. 유년기
1937년 10월 11일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주 애싱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축구와 관련이 깊었는데[6], 정작 축구를 가르쳐준 건 할아버지와 어머니였다고.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3.1.1. 프로 데뷔 전
이스트 노섬벌랜드 스쿨이라는 지역 유소년 클럽에서 뛰던 찰튼은 1953년 2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터 조 암스트롱[7]의 눈에 띄게 되고, 이듬해 1월 1일 15살의 나이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유소년 계약을 맺는다. 사실 프로 선수를 시킬 생각까지는 없었던 어머니의 뜻을 따라 처음에는 전기 기사 견습공 생활도 했었지만 축구가 더 재미있어서 그만뒀다고 한다.3.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3.1.2.1. 데뷔 후
그 다음해 10월 프로 계약을 체결한 찰튼은 유스와 리저브 팀을 오가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1956년 10월 6일, 마침내 올드 트래포드에서 찰튼 애슬레틱을 상대로 한 1군 데뷔전에서 2골을 넣으며 첫 발을 내딛는다.[8] 이 시즌에 찰튼은 17경기 12골(리그 14경기 10골[9])을 기록, 훌륭한 첫 시즌을 보내며 팀의 호성적[10]에 기여했다. 이것이 이 시기에 병역을 수행하느라 주말에만 축구를 하면서 거둔 성적임을 고려하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큰 기대 속에 시작된 1957-58 시즌, 찰튼 역시 15경기에서 12골을 넣으며 팀을 리그 2위, 유러피언 컵 4강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리그 14경기를 남겨놓고 11경기 연속 무패를 달리며 당시 1위 울버햄튼을 승점 6점 차이로 무섭게 추격하고 있었으나...
베오그라드 원정을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비행기가 뮌헨에서 연료를 보급한 후 이륙하는 데에 실패, 추락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만다.
찰튼은 생존한 9명의 선수 중 하나였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이전만 못한 활약을 보이며 15경기에서 4골(A매치 제외)을 넣는데 그쳤고, 팀도 이후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하며 9위로 리그를 마감하게 된다.
3.1.2.2. 첫 번째 암흑기
사고 이후 맨유는 기나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주전급 선수 중 8명이 사망하고 2명은 그 여파로 은퇴한 상황은 명장 맷 버스비[11]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전까지 디비전 1을 호령하던 팀은 1962-63 시즌에 FA컵을 들 때까지 근 5년간 단 하나의 우승컵도 들지 못하게 된다.그래도 찰튼 개인의 클래스는 어디 안 가서 1958-59~1962-63 5시즌 동안 198경기 90골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뻔한[12] 팀의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3.1.2.3. 사상 최강의 트리오
앞선 1962-63 시즌에 데니스 로를 영입하고 유스 풀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는 등 리빌딩에 힘쓰는 동시에 FA컵 우승과 리그 잔류라는 성과를 일구어 낸 버스비 감독은 1963-64 시즌엔 셀틱에서 데려온 미드필더 팻 크레란드와 어린 선수들, 기존 선수들을 잘 조화시켜 2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얻는 데 성공한다.이어진 시즌, 버스비는 기존 팀의 에이스들인 로, 찰튼과 함께 전 시즌 가능성을 보인 17세의 구단 유소년을 주전 공격수로 기용하는데, 이 선수가 바로 찰튼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레전드 조지 베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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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 수상을 자축하는 찰튼 |
그리고 월드이 끝나고 맞이한 1966-67 시즌에 리그 우승을 이루었고, 그 다음 시즌인 1967-68 시즌에는 유러피언컵에서 결승전에서 에우제비우가 버틴 벤피카를 4:1로 꺾고 잉글랜드 최초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한다. 당시 찰튼은 전반 선제골 넣었고 후반에 동점골을 먹혔으나, 연장전 앞서던 상황에서 찰튼은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골을 넣어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4시즌 동안 239골을 합작한 이 전설적인 트리오[14]의 활약에 힘입어 이 시기 맨유는 2회의 리그 우승과 1회의 유러피언컵 우승[15]을 일구어낸다.
3.1.2.4. 두 번째 암흑기
1968-69 시즌, 로-찰튼-베스트 트리오는 건재했으나 새로 영입된 선수들이 먹튀질을 하며 팀은 11위로 내려앉고 만다. 시즌 종료 후 맷 버스비 감독은 사임[16]했고 리저브 팀 감독 윌프 맥기네스[17]가 감독직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빈번히 감독이 교체되며 7위 이상으로 올라가보지 못하는 등 침체기를 겪었고 1973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찰튼 없이 맞은 1973-74 시즌에는 디비전 2로 강등되기에 이른다.3.1.3. 이후
프레스턴 노스 엔드, 워터포드 유나이티드, 뱅고어 시티, 커즌 애시턴, 뉴캐슬 KB 유나이티드, 퍼스 아주리, 블랙타운 시티를 거쳐 1980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3.2. 국가대표 경력
바비 찰튼은 1958년에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 이후 찰튼은 1962 칠레 월드컵에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출전해 아르헨티나 전에서 득점, 팀의 3-1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8강에서 대회 우승팀 브라질에 패해 탈락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한 것도 이 때의 일로, 1963년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31번째 골을 넣으며 종전 톰 피니와냇 로프트하우스[18]의 기록을 갱신한다. 이후 그의 득점 행진은 이전만 못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감독이던 알프 램지가 팀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찰튼의 포지션을 왼쪽 인사이드 포워드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변경한 것 때문이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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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튼 vs 베켄바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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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리메컵을 들어 올리며 월드컵 우승을 자축하는 찰튼 |
찰튼은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8강에서 열린 서독과의 지난 결승전 리벤지 매치에서 잉글랜드는 연장까지 가는 등 분전했으나 전성기에 이른 게르트 뮐러와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을 꺾을 수는 없었고, 결국 2-3으로 패배하고 만다. 대회 이후 찰튼은 32살의 나이로 그의 형 잭 찰튼과 함께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4년전처럼 찰튼을 1:1로 전담마크했고, 공격가담과 패스전개로 유명한 베켄바워를 오직 수비에만 전념하게 만들면서 중원을 압도했다. 하지만 2:0으로 앞선 상황에서 그의 체력을 안배한 알프 램지 감독이 그를 교체시키자 베켄바워의 볼전개 능력과 공격가담 능력이 빛을 보기 시작하며 2:3으로 역전패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찰튼은 당시 디비전 2 소속이던 과거의 명문 프레스턴 노스엔드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아일랜드 국대 감독을 맡아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영웅 대접을 받은 형과 달리 선수로서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감독으로서는 초짜에 불과했다. 1973-74 시즌, 프레스턴은 디비전 3로 강등되고 만다[20]. 다음 시즌 37살의 나이로 선수로 복귀[21]하면서까지 팀을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팀은 중상위권에 위치하는 데에 그쳤고, 찰튼은 1975-76 시즌 초 팀의 핵심 존 버드를 뉴캐슬에 팔아치운 구단의 처사에 항의하는 뜻에서 감독직을 사임한다. 이후 워터포드 유나이티드, 뱅고어 시티, 커즌 애시턴, 뉴캐슬 KB 유나이티드, 퍼스 아주리, 블랙타운 시티에서 각각 5경기 미만으로 짧게 뛰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1980년에 완전히 선수에서 은퇴했다.이후에는 위건 애슬래틱에서 이사직을 역임하다가 1983년에 잠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으며, 1984년에는 맷 버스비가 사임한 이후 보드진에 상징적인 인물을 필요로 하던 맨유의 부름을 받아 현재까지 기술 이사직을 맡고 있다.
참고로 맨유 홈경기 중계에서 카메라가 종종 잡아주는 톱 햇 모자를 쓴 노신사가 바로 이 사람이다.
2016년 4월 2일, 에버튼과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서 올드 트래포드 구장 남쪽 스탠드의 명칭이 바비 찰튼 경 스탠드(Sir Bobby Charlton Stand)로 개명되었으며, 2017년 10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훈련장의 명칭이 찰튼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된다. 이에 가레스 사우스게이트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은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4.1. 사망
2020년부터 치매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22] 그로부터 3년 후인 2023년 10월 21일(현지시간) 공식 트위터에서 사망 소식을 올리며 찬란했던 인생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영국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
- 제프 허스트
- 데니스 로
- 에릭 칸토나
- 페테르 슈마이켈
- 데이비드 베컴
- 파트리스 에브라
- 게리 네빌
- 존 테리
- 웨인 루니
- 리오 퍼디난드
- 카세미루
- 안토니오 발렌시아
- 제이미 캐러거
- 게리 리네커
- 마커스 래쉬포드
- 브루노 페르난데스
- 라파엘 바란
- 잉글리시 풋볼 리그
- 프리미어 리그
- FA컵
- 맨체스터 시티 FC
- 레알 마드리드 CF
- 리버풀 FC
- 아스톤 빌라 FC
- FC 바이에른 뮌헨
- 아스날 FC
- 위건 애슬레틱 FC
- 에버튼 FC
- 토트넘 홋스퍼 FC
-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 AFC 아약스
- 해리 매과이어
- 리즈 유나이티드 FC
- 네마냐 마티치
- 레스터 시티 FC
장례식은 11월 13일 맨체스터 대성당에서 열렸으며, 웨일스 공 윌리엄이 직접 참석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유스
- FA 유스컵: 1953-54, 1954-55, 1955-56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6~1973)
- 풋볼 리그 디비전 1: 1956-57, 1964-65, 1966-67
- FA컵: 1962-63
- FA 채리티 실드: 1965, 1967
- 유러피언컵: 1967-68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66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1958, 1959, 1960, 1961, 1964, 1965, 1966, 1968, 1969, 1970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6; 2위: 1967, 1968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WA 올해의 선수: 1965-66
- FIFA 100: 2004
- 20세기 유럽팀: 1998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23]: 2021
- IFFHS 올타임 잉글랜드 드림팀: 2021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PFA 세기의 팀 (1907~1976)
- PFA 공로상: 1974
- FWA 공로상: 1989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5, 1966, 1967, 1968
- 월드 스포츠 1950년~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 UEFA 회장상: 2008
-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평생 공로상: 2008
- 라우레우스 평생 공로상: 2012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AM 10위)
5.3. 수훈
- 대영제국 훈장 4등급 (OBE): 1969
- 대영제국 훈장 3등급 (CBE): 1974
- 기사 작위: 1994
- 욱일장: 2012
6. 플레이 스타일
축구 선수로서 갖춰야 할 웬만한 능력을 전부 최고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고, 스트라이커부터 중앙 미드필더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커리어는 공격수로 시작하여 오랜 시간 왼쪽 윙어로 뛰었으나 이후 다재다능함을 살려 활약하기 위해 포지션을 좀 더 밑으로 내렸고, 그 결과 은퇴 때까지 맨유와 국가대표팀에서 전천후 미드필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롱 패스 능력이 아주 뛰어났으며, 공간을 보는 시야가 넓고 상황판단이 빨라 기회창출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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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월드컵 서독전에서 보여준 수비가담 |
찰튼은 스트라이커 포지션에도 기용되곤 했는데, 스트라이커 포지션에 기용되더라도 한결같이 엄청난 수준의 수비 가담을 보여주었다. 찰튼의 경우에는 매우 다재다능했기에 이런 말로 한정짓기에도 무리가 있지만, 제로톱의 명맥을 이은 선수 중 하나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찰튼이 가진 또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는 양발 사용 능력이었다. 찰튼은 펠레와 함께 당대 최고의 양발잡이로 유명했으며, 양발을 가리지 않고 롱패스와 중거리 슈팅을 구사했다. 에우제비우와 함께 당대 최고의 중거리 슈터로서 명성을 떨쳤다. 말도 안 되는 거리에서도 슈팅을 때리곤 했으며, 갑자기 튀어나온 볼을 강력한 발리 슈팅으로 처리하는 데에도 상당히 능했다. 세트피스도 상황에 맞게 왼발과 오른발을 선택하여 찼다. 양발 사용 능력이 뛰어나니 드리블 능력 역시 당연히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찰튼은 자유자재로 스피드를 조절할 줄 아는 선수였고, 공을 가지고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면서 스피드를 살려 치고 나가는 플레이에 능했다. 드리블로 만들어낸 공간에서는 대부분 크로스를 올리거나 패스를 했다.
또한 찰튼은 좋은 경기 매너와 훌륭한 스포츠맨십으로도 유명했다. 정말 열심히 뛰면서도 파울이 드문 선수였다. 그래서 현역 시절 당시, 신사적인 축구 선수의 대명사였다.
7. 평가
영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25],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한 명[26], 맨유 역사상 최고의 선수[27]로 평가받는다. 바비 찰튼은 뮌헨 비행기 참사로 무너진 맨유를 지탱한 버팀목이자 부흥의 선봉장이었으며, 잉글랜드를 암흑기에서 구해낸 영웅이었다.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찰튼은 1950년대부터 지속된 잉글랜드의 침체기를 해결한 영웅이었다. 웸블리 헝가리전 대패, 월드컵에서의 계속되는 실패 등 축구 종가라는 명성에 걸맞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던 잉글랜드는 찰튼과 무어, 뱅크스의 등장으로 1960년대 중후반 세계 최강의 국가대표팀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특히 찰튼은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인 1966 월드컵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였으며, 그 활약을 토대로 에우제비우, 베켄바워, 무어를 제치고 당해 발롱도르까지 수상하였다.
또한 맨유에서의 찰튼은 뮌헨 비행기 참사를 겪고도 기적적으로 생존하여 맷 버스비 감독과 함께 팀의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맨유는 데니스 로, 조지 베스트 등의 성장과 함께 서서히 반등하였으며, 1968년에는 유러피언컵 우승이라는 무시무시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찰튼은 뮌헨 비행기 참사부터 유러피언컵 우승에 이르기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팀의 중심으로 자리하였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꾸준히 유효표를 받았다.[28]
리그 우승, 챔스 우승, 월드컵 우승, 유로 3위, FWA 올해의 선수와 발롱도르 수상 등의 실적과 평가를 종합해봤을 때 그는 196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29]이자 최고의 미드필더로 평가받을 만 하며, 역대 최고의 선수 순위에서도 20위권 안에 드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8. 찰튼에 대한 헌사
찰튼이 나보다 아주 조금 더 나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우리를 이겼다.
그는 펠레와 더불어 자신의 세대에서 최고의 선수였다. 나는 그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
나에게 있어서, 그 경기 최고의 순간은 120분이 다 지나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120분 동안 바비 찰튼을 감시하는 것이 그 경기에서 명령받은 나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와의 1:1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는 내 실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야만 했으며, 심지어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해야 했다. #
프란츠 베켄바워
그는 펠레와 더불어 자신의 세대에서 최고의 선수였다. 나는 그와의 우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
나에게 있어서, 그 경기 최고의 순간은 120분이 다 지나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120분 동안 바비 찰튼을 감시하는 것이 그 경기에서 명령받은 나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와의 1:1 대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는 내 실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야만 했으며, 심지어 그 이상의 실력을 발휘해야 했다. #
프란츠 베켄바워
그는 영리했으며, 아주 우아한 축구 선수였다. 바비가 클로도아우두에게서 공을 가로챘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그 때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아, 저 선수에게 강한 태클을 걸어야겠군." 하지만 그는 내가 다가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나를 손쉽게 제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를 완전히 놓쳤고, 그에게 태클을 걸다가 미끄러져서 발목 부상을 당했다. 내가 루마니아전에서 뛰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가 정말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
호베르투 히벨리누
호베르투 히벨리누
골대로부터 30야드 떨어진 곳에서 그가 볼을 잡으면, 양발이 모두 치명적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왼쪽에서 뛰기 때문에 그가 태생적인 왼발잡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양발이 모두 뛰어나다. #
조지 베스트
사람들은 그가 왼쪽에서 뛰기 때문에 그가 태생적인 왼발잡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양발이 모두 뛰어나다. #
조지 베스트
소속 구단은 물론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를 지향하는 누구에게나 위대한 본보기가 되는 선수다.
알렉스 퍼거슨
알렉스 퍼거슨
9. 여담
- 잉글랜드가 1966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을 때, 웸블리에 남아있던 잉글랜드 선수 중 유일하게 혼자 울상이 되었다. 물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환하게 웃는 무어와 뱅크스, 그리고 평소와 180도 다르게 완전히 신이 난 노비 스타일스의 모습을 보다가 펑펑 우는 찰튼을 보면 상당히 인상적이다.
- 형인 잭 찰튼은 리즈 유나이티드 소속의 수비수로 뛰었으며, ‘빅 재키’ 라는 별명에 걸맞게 189cm의 강력한 피지컬을 앞세워 공중을 지배하는 유형의 선수였다. 형 역시 리즈의 레전드로 대접받고 있다. 형제가 라이벌 구단에서 각각 레전드로 인정받는 재미있는 사례.
- 2020년 2월 16일, 뮌헨 참사의 생존자이던 해리 그렉이 87세로 사망하면서 바비 찰튼이 이제 마지막 남은 선수단 생존자가 되었으나 결국, 2023년 10월 21일 (영국시간)으로 작고를 하면서 더이상 남은 선수단 생존자는 없다.(현재 뮌헨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는 당시 스튜어디스였던 로즈마리 체버튼이다.)
-
월드컵에서 골을 도둑맞은 첫 번째 잉글랜드 선수이다. 1966년 월드컵 당시 프랑스 상대로 3:0으로 앞서가는 골을 득점했으나 부심의 오심으로 무효 처리가 되어 결국 2:0으로 끝났다. 찰튼에 이어 두 번째로 월드컵 골을 도둑맞은 잉글랜드 선수는 2010년 월드컵에서의 16강 독일전에서의 프랭크 램파드.[31]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미드필더, 공격수 5인을 선정했을 때 1960년대 최고의 미드필더 1위, 1960년대 최고의 선수와 공격수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
1974년 3급
대영제국 훈장을, 1994년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아 경(Sir)이 되었다.
[2]
/ˈrɒbət ˈbɒbɪ ˈtʃɑːltᵊn/
[3]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4]
윙어,
스트라이커
[5]
대표팀 역대 득점 3위.
[6]
형인
잭 찰튼뿐 아니라 외당숙 중 4명이
리즈,
레스터 시티 등에서 뛴 프로 선수들이었다. 찰튼 형제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찰튼의 사촌 중 4명이 축구 선수였고 외삼촌 스탠리 밀번 또한 축구 선수였다. 그 중
재키 밀번은
뉴캐슬의 레전드이자 국가대표로 월드컵에서도 활약한 수준급의 선수였다.
[7]
찰튼뿐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 던컨 에드워즈를 발굴해낸 게 이 사람이다.
[8]
맨유는 찰튼의 2골에 힘입어 4-2로 승리했다.
[9]
여담이지만 후에 치러진 찰튼과 원정 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10]
리그 우승, FA컵 준우승, 그리고 잉글랜드 팀 최초로 참가한 유러피언 컵에서는 4강에 올랐다.
[11]
감독 본인또한 사고로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12]
2위-7위-7위-15위-19위로 순위가 끝없이 하락했다.
[13]
에우제비우와 단 1점차 접전이었다.
[14]
그들의 파괴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1964년에는 로가, 1966년에는 찰튼이, 1968년에는 베스트가 각각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당시 경쟁하던 선수들이
루이스 수아레스,
아만시오 아마로,
에우제비우,
프란츠 베켄바워,
드라간 자이치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경이롭다. 특히 찰튼은 1967년과 1968년에는 2위에 오르며 3년 연속 포디움에 들어갔다.
[15]
참사 이후 딱 10년째 되는 1967-68 시즌이었다.
[16]
이듬해 잠시 감독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17]
맨유 선수 출신이며 1937년생으로 바비 찰튼과 동갑이다. 윌프 맥기네스는 잦은 부상으로 21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18]
피니는 찰튼과 마찬가지로 3등급 훈장과 기사작위를 받은 프레스턴 노스엔드의 레전드이고, 로프트하우스는
볼턴 원더러스에서만 뛴 구단 레전드이다.
[19]
지미 그리브스가 공격수 자리를 대체했고, 1964년 10월에는 찰튼의 득점 기록을 경신한다. 이후에 다시 역전되긴 하지만.
[20]
사실 찰튼의 능력 부족 탓만 할 수는 없다. 그 전 몇 시즌 동안 프레스턴은 늘 리그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었다.
[21]
성적은 45경기 10득점.
[22]
형인 잭 찰튼도 2019년 림프종과 치매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2020년 세상을 떠났다.
[23]
B팀
[24]
지금은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공격수에게도 수비가담이 요구되며 텐백상황에서의 역습형 공격수가 아닌 이상 수비를 하지 않으면 욕을 먹는데 저때 당시도 전술의 발전이 있긴했으나 웬만한 감독 아니면 공격수에게 수비가담 요구를 하지않았다. 오히려 저때 수비가담을 시키거나 하는 감독이나 공격수가 보기 힘든 시대였다.
[25]
조지 베스트,
바비 무어와 함께 거론된다.
[26]
디에고 마라도나,
지네딘 지단,
미셸 플라티니,
지쿠와 함께 거론된다.
[27]
찰튼 다음으로는
조지 베스트,
에릭 칸토나,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이 거론된다.
[28]
그는 총 8차례 유효표를 받았으며 1966년부터 1968년까지는 순서대로 1위, 2위, 2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29]
1960년대 선수 중에서
펠레와
가린샤를 제외하면 그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는 없다.
[30]
발롱도르 수상 사진도 가발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20대 초반에도 이마가 정수리에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기 영상들을 봐도 달릴때 평소에 길게 길러서 빈 정수리를 덮어놓은 옆머리가 휘날려 흐트러지는 장면이 쉽게 보인다.
[31]
중거리에서 칩슛으로 노이어의 키를 넘겨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을 넘은게 확실했으나 주심이 이걸 보지 못했고 결국 흐름이 끊긴 잉글랜드는 독일에 4:1로 대패했다. 1966년 월드컵 결승에서
제프 허스트의 슛이 골라인을 넘지 않았음에도 골로 인정된 것의 복수라는 말도 있었다. 다만 허스트의 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갑론을박이 있다. 1960년 대의 영상 화질이 현재보다는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별이 어렵기 때문.
분류
- 1937년 출생
- 2023년 사망
- 애싱턴 출신 인물
-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공격수
- 1956년 데뷔
- 1980년 은퇴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은퇴, 이적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은퇴, 이적
- 워터포드 FC/은퇴, 이적
- 커즌 애시턴 FC/은퇴, 이적
-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참가 선수
- 1962 FIFA 월드컵 칠레 참가 선수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참가 선수
-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참가 선수
- 잉글랜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68 참가 선수
- 잉글랜드의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
- FW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발롱도르 수상자
-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감독
-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역대 감독
- 위건 애슬레틱 FC/역대 감독
- 선수 겸 감독/축구
- 감독 대행/축구
- 축구 경영인
- 영국의 기사
- 대영제국 훈장 3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