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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5 23:35:31

닐스 리드홀름

닐스 리드홀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파일:AC 밀란 로고.svg

38대
파일:엘라스 베로나 FC 로고.svg

44대
파일:ACF 피오렌티나 로고.svg

31대
파일:AS 로마 로고.svg

37대, 40대
파일:AC 밀란 로고.svg

49대, 56대
파일:AS 로마 로고.svg

43대, 50대
파일:엘라스 베로나 FC 로고.svg

57대
}}} ||
스웨덴의 前 축구인
파일:Liedholm.jpg
이름 닐스 리드홀름
Nils Liedholm
출생 1922년 10월 8일
스웨덴 발데마르스비크
사망 2007년 11월 5일 (향년 85세)
이탈리아 쿠카로몬페라토
국적
[[스웨덴|]][[틀:국기|]][[틀:국기|]]
신체 192cm[1]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발데마르스비크 IF (1938~1943)
IK 슬레이프네르 (1943~1946)
IFK 노르셰핑 (1946~1949)
AC 밀란 (1949~1961)
감독 AC 밀란 (1961~1963 / 수석 코치)
AC 밀란 (1963~1966)
엘라스 베로나 FC (1966~1968)
AC 몬차 1912 (1968~1969)
바레세 칼초 (1969~1971)
ACF 피오렌티나 (1971~1973)
AS 로마 (1973~1977)
AC 밀란 (1977~1979)
AS 로마 (1979~1984)
AC 밀란 (1984~1987)
AS 로마 (1987~1989)
엘라스 베로나 FC (1992)
AS 로마 (1997)
국가대표 파일: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3경기 12골 ( 스웨덴 / 1947~1958)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감독 경력4. 플레이 스타일

[clearfix]

1. 개요

스웨덴 축구선수 출신 감독.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성기의 주역이자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과 함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2]의 일원이다. 현역 시절 별명은 남작(II Barone).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38년 자신의 고향 팀 발데마르스비크 IF에 입단하였다. 1943년 IK 슬레이프네르로 이적해 3년간 뛰다가, 1946년에는 2개의 스웨덴 리그 타이틀을 우승한 더 큰 클럽 IFK 노르쾨핑으로 이적하였다.

노르쾨핑에서 군나르 노르달과 함께 스웨덴 알스베스칸에서 2차례 우승을 거두었고 1948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성과로 1949년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과 함께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파일:스웨덴 삼총사.png
전설의 ‘그레-놀-리(Gre-No-Li)’ 삼총사
리드홀름은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과 함께 그레-놀-리 삼총사를 결성, 첫 시즌에서 미드필더로 출전하여 37경기에서 활약하며 18골을 득점하였다. 1951년 자신의 첫 스쿠데토 타이틀을 차지하고 1955년, 1957년, 1959년에도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한다.

또한 1951년과 1956년에 라틴컵을 우승하기도 하였다. 이후 노르달과 그렌은 AC 밀란을 떠나 스웨덴 삼총사는 해체되었고 리드홀름은 1956년 이후 주장 완장을 차고 필드의 사령관으로 맹활약한다.

AC 밀란은 1957-1958 시즌 유로피언컵에서 레인저스 FC,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을 꺾은 후 4강 원정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패했으나 홈에서 리드홀름의 페널티 킥 쐐기골을 포함해 4:0으로 대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진출한다.[3]

결승전 상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이끄는 디펜딩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 CF. 리드홀름은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와 함께 AC 밀란의 공격을 지휘했고 스키아피노의 선제골로 앞서갔다. 그러나 이후 2:2 동점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결국 연장 후반에 프란시스코 헨토에게 결승골을 내줘 3:2로 패하였다.[4]

이후 리드홀름은 1961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유로피언컵 준우승과 총 4차례의 스쿠데토를 차지하는 등 AC 밀란의 영원한 전설이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바이킹 군단 1958 스웨덴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캡틴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노르달- 군나르 그렌의 그레-놀-리 삼총사가 이끄는 스웨덴은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맹활약했다. 리드홀름은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2골을 넣어 12:0으로 대파했고 라이벌 덴마크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를 격파하며 금메달을 목에 건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은 해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발탁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고 그레-놀-리 삼총사는 최전성기 시절에 국가대표에서 별로 활약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58 스웨덴 월드컵을 앞두고 스웨덴은 이 규정을 철폐했고 리드홀름과 그렌은 국가대표에 차출되었으나 노르달은 기량 저하로 은퇴하여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해 그레-놀-리 삼총사 전원이 월드컵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리드홀름은 주장을 맡으면서 스웨덴은 조별리그에서 순항했고 특히 리드홀름은 멕시코전에서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3:0 대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스웨덴은 레프 야신이 이끄는 소련 서독을 격파하며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결승전 상대는 축구황제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이었고 리드홀름은 전반 4분만에 선제골을 넣었지만, 펠레, 바바, 마리우 자갈루에게 실점을 허용하며 5:2로 패하면서 스웨덴은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3. 감독 경력

선수로서 은퇴한 리드홀름은 AC 밀란의 수석 코치와 감독을 지내고, 엘라스 베로나 FC와 AS 바레세 1910을 위하여 진급되었다.

ACF 피오렌티나로 옮기다가, 다시 AC 밀란의 감독으로 재임명되어 1979년 10회의 리그 타이틀을 우승하는 데 이끌었다.

이후 호베르투 파우캉 브루노 콘티같은 실력 있는 선수들이 소속된 AS 로마의 감독을 맡아 1983년 두번째 리그 타이틀로 이끌었다.

1년 후, 리드홀름의 AS 로마 유로피언컵에서 리버풀 FC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였다. 리드홀름은 코파 이탈리아에서 3회[5] 우승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파올로 말디니의 1군 데뷔 경기 당시, 말디니를 교체 투입한 감독이 다름아닌 닐스 리드홀름이었다.

4. 플레이 스타일

명실상부 스웨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1950년대 스웨덴의 최전성기와 AC밀란의 첫 전성기를 이끈 전설적인 선수이다. 포지션은 주로 중앙 미드필더였으나,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6], 가끔은 공격수[7]와 스위퍼 역할을 맡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올라운더 플레이어였다.

리드홀름의 가장 큰 장점은 패스 능력과 경기를 읽는 시야였는데, 인사이드와 아웃프런트 패스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정교한 크로스는 기본이었으며 위협적인 장거리 패스도 구사했다. 이러한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팀의 득점에 자주 기여해 플레이메이커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성공률도 매우 높아 역대 패스마스터 계보에 자주 거론될 정도.

피지컬로도 당대 탑급[8]이었다.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피치 위에서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고, 장신의 키를 활용해 제공권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심지어 주력도 빠른 괴물 그 자체였다. 이러한 노력 때문인지 은퇴도 40살이 가까운 나이에 했는데, 지금과 이때의 의료 수준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정말 엄청난 철강왕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테크닉, 이타적인 행동, 득점력까지 겸비한 만능 플레이어 그 자체였다.

[1] 구글 프로필 신장은 184cm이지만, 그레놀리 삼총사가 한데 모여 찍은 사진에서 185cm인 군나르 노르달보다도 월등하게 크다. [2] 스웨덴 삼총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3] 다만 당시 맨유는 뮌헨 비행기 참사 때문에 전력이 약화된 면도 있었다. [4] 이 경기가 끝난 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유니폼 교환을 했다고 한다. [5] 1980, 1981, 1983 [6]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7] 1948년 올림픽 당시 레프트윙으로 뛰었다. [8] 축구를 잘하려면 신체 관리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누구보다 훈련에 몰두했다고 한다. 100m와 3000m 달리기, 높이 뛰기, 투포환 등의 운동을 매주 2번씩 했다고...